(시뇨리아 광장에서)
미켈란젤로 광장 언덕에선 피렌체 도심과 가로질러 흐르는
아르노강이 바로 보인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은 그 시대의 것인 양 신선하고 꽤 시원하였다. 자율적 의지와 신 사고에 의해 가능하였던
낭만의 꽃 르네상스는 이제 지구상 전 인류가 갖는 최대 유산이다. 상서로운 빛은 그곳에서 분명 시작되었었다. 아르노는 기억하고 있으리라 그
시대 젊은 피렌체의 꿈을. 풍수학자가 그 자리에 섰다면 피렌체 도시가 명당이며 서있는 자린 명당중에 명당이라고 하지 않을까. 광장
한가운데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복제품이 우뚝 서있다. 후세들이 그의 이름을 광장 앞머리에 붙인 것은 아마도 그가 단연 피렌체를 대표할 만한
인물이라 여겼기에 그리 해 둔 것 일 텐데 알고 보면 그의 재능이 빛을 발한 것은 순전히 메디치가문의 후원과 지지 때문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이
없다. 메디치가 당시 천재 예술가들을 불러 모으지 않았다면 지금의 르네상스 역사는 다른 괘도를 걸었을 것이다. 어쩌면 비천한 직업의 미술가로서
그의 작품은 종교적 제물로 만족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우린 계단을 따라 폰테 베키오라는 석교를 향해 걷고
있다. 그 시대도 그렇고 지금도 여전히 사람이 제일 많이 몰려드는 그곳이다. 그 시대 피렌체는 파리나 나폴리 베네치아 보단 못해도 5만명 정도가
몰려 살던 큰 상업도시였었다. 특히 모직실크나 견직물, 제혁 업이 번창하여 밀라노와는 늘 경쟁관계를 유지하였었는데 메디치 가문은 그 시대
은행업을 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뚜렷한 족적을 남기는 15세기의 피렌체를 파악하기위해선 당시의 이탈리아 주변정세와 그 흐름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당시의 이탈리아는 우리완 사뭇 다르다. 우리는 변함없는 영토 내에서 왕권이 유지되어 온 역사이기에 어느 면 파악하기가 쉽다. 로마시대
역시 정복하여 얻은 땅에서 이루어지는 역사이기에 접경에서 겪는 잦은 전쟁을 제외하곤 시대흐름을 읽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다.
그러나 당시의 이탈리아는 영토 내에 작고 많은
도시국가형태의 공화국이 난립한다. 밀라노, 나폴리, 로마, 베네치아가 다 별도의 통치개념을 갖고 따로 존재하는 것이다. 거기에 교황청과 스페인,
프랑스, 오스트리아 같은 이웃한 나라들이 이탈리아에 들어와 각축을 벌이는 장이기도 하여 도시국가들이 서로 필요에 따라 동맹을 맺고 결별을 하는
등등의 얽히고설킨 숫한 난맥상이 거듭되어 그 시대 제대로 된 역사를 파악하기란 쉽지가 않다. 그러기에 메디치가 각국에 지사를 두고 은행업을 해서
돈을 벌기위해선 많은 고충이 있었을 것이고 어쩌면 그러기에 더욱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실제 그 가문이 돈을 많이 번 것은
교황청과 거래를 하여 얻은 수수료 덕분이다.
당시 베키오 다리엔 푸줏간,피륙상, 문방구,
식료품가게가 차지하였다는데 지금에 그곳은 화려한 금은세공 상점과 가죽제품 가게가 꽉 들어차 있다. 우리는 베키오 궁전을 보기위해 베키오 다리를
건너자마자 우측으로 틀어 우피치 미술관으로 향했다. 대단한 긴 행렬이다. 안에 들어가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만나
보려다간 해가 서산에 지고 말 것이다. 우린 막 베키오 궁전 앞에 섰다. 이곳이 바로 시뇨리아 광장이다. 그곳에 서있는 청동기마상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아마도 말을 탄 그는 메디치가의 한 사람인 코시모 1세란 인물일 것이다. 그보단 앞선 선조가 실제 대단한 인물이었다. 어쨌거나 그들
가문과 시뇨리아 광장 그리고 베키오 궁전은 뗄 수 없는 역사의 한 페이지다.
시뇨리아란 정부회의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바로 그곳은 당시 피렌체의 정부회의가 열리는 곳이었음을 의미한다. 피렌체는 당시 모직물, 견직물, 법률가, 의사, 약제사 등등의 동업조합인
21개의 길드가 있었는데 정부회의의 구성은 그 길드 중 6개는 큰 길드조합에서 두 개는 작은 길드에서 대표하여 구성하고 콘발로니에라는 직책을
따로 하나 두어 총 아홉 명이 공화국 정부를 꾸려나갔다. 그 시뇨리아는 법 제정과 외교정책을 위해 콜레지라는 자문기구를 두고 국방에 10명,
안보에 8명, 통상에 6인을 두어 임무를 담당했다. 위기 상황이면 시뇨리아의 큰 종이 궁전 종탑에서 울려 퍼져 사람들을 모았다. 14세 이상의
피렌체 남자들은 광장으로 모여들면서 파를라멘토를 구성하여 비상사태를 책임질 전권을 부여받은 비상위원회인 발리아를 승인하였다고 한다.
비교적 자유스런 이런 형태의 공화국을 당시 피렌체인들은
꽤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예컨대 베네치아는 공화국이지만 귀족가문의 영향력이 너무 컸고 밀라노는 독재공작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나폴리와 시칠리아는
앙주 가와 아라곤 가문의 경쟁적 알력으로 자유스럽지 않았으며 로마를 비롯한 교황령의 군소독재국가들은 아드리아해에 걸쳐 반도전체에 퍼져 거의
무정부 상태에 있었다. 그런 나라에 비하면 피렌체는 상당히 안정되고 민주적인 정부를 가지 편이긴 하지만 노동자와 귀족층이 배제된 것이니 그렇게
민주적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부유한 상인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피렌체 정부를 통제한 셈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피렌체에서는 돈을 많이 번
상인들은 특별했다.
벌은 만큼 그 재산을 사용하는 데 인색하지 않아야만
했다. 교회나 수도원을 짓는데 아낌이 없어야 했으며 영예로운 일을 하는데 앞장서서 권력의 뒷받침이 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원래 메디치가는
샤를마뉴 대제때 용맹스러운 기사로 활약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피렌체에서 이름이 나기 시작한 것은 1296년 아르딘고 데 메디치가 최초로
콘발니에네가 되고서 부터다. 이후 두세 차례 콘발니에네에 선출되기는 하나 큰 빛을 보지 못하다가 가문이 크게 일어선 것은 1400년대 초
지오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가 메디치은행을 설립하고 각국에 지점을 설치할 때부터다. 그는 교황청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부를 축적해 나갔다.
언제나 신중하였던 그는 겸손과 중용을 유지했으며 이러한 바탕을 그의 아들인 코지모 또한 전승하기를 바랐다고 한다.
당시 피렌체는 알비찌 가문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는데
밀라노와 전쟁을 하려던 알비찌 가문은 매사에 비협조적인 메디치 가문을 공화국을 전복할 음모가 있는 것으로 꾸며 한때 코지모를 추방하기도 한다.
하지만 선친의 유언대로 행하였던 그는 유럽의 16개 도시에 은행을 세우는 한편 교황청 재정을 장악하여 막대한 재산을 축적한 피렌체의 신망이
두터운 사업가로서 오히려 금의환향 하는 격으로 정적들을 물리치고 피렌체에 돌아온다. 그런 그가 피렌체에서 이루어 낸 일은 실로 엄청나다. 그가
권력을 잡고 피렌체에서 제일 처음 행한 것은 1439년 그리스정교와 로마카톨릭 교회의 공의회를 그의 친구인 유제니우스4세와 함께 피렌체에서
개최한 일이다.
기독교의 양대 산맥인 이 두 교회는 원리상의 문제로 6세기동안 서로 반목상태였다. 실제 공의회가 열림으로서 두파 간에 화합이 발전적으로 변한 것은 없는데 피렌체는 그 바람에
국제적인 면모와 더불어 무역이나 르네상스라 알려진 현상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그리스 학자들이 대거 모여들면서 고전 문서와 역사,
미술과 철학에 대한 흥미가 촉발되었다. 이후 피렌체는 그리스학을 연구하는 학교가 들어서고 훗날 유럽의 사상발전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당시 플라톤 아카데미를 창설할 야심을 품었을 뿐 아니라 장서의 수집에도 심혈을 기울인다. 당시 메디치 가문에 출입한 많은
인문주의자들은 그 장서를 많이 이용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우린 이제 시뇨리아 광장을 지나 단테의 집을 향하고
있다. 근대의 목전 르네상스란 이 집단적 문예운동의 중심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케란젤로 등의 천재화가들과 단테, 마키아벨리 등의 거인들이
같이 있다. 바로 이러한 위대한 정신들의 뒤에는 든든한 후원자가 있었기 때문 가능했으리라. 민중의 지지와 상업자본의 힘으로 그는 권력과
신문예사조의 탄생을 더불어 이루었다. 한 인물의 확고부동한 지적이고 명철한 사고가 역사에 어찌 기억되고 남는지 실감하게 된다. 1434년 부터
1471년 까지 그의 회계장부에 따르면 믿기 힘든 금액인 67만 플로린이 건축과 자선기금, 세금으로 사용한것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친구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난 우리 시의 기질을 잘 알고 있지. 50년이 지나기도 전에 우리는 추방되겠지만 내
건물은 남아 있을 거야." 그런 그는 고리대금업을 하느님이 어찌 받아들일 것인가에 늘 고민하였으며 친구인 교황과 그것에 대해 남몰래 토론하기를
즐겼다고도한다. 그가 그런 가치창출에 기여한 것은 그의 고뇌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결코 그는 헛된 돈을 쓰지 않은 것이다. 그 사회는 결코
민주적이지 않았지만 그는 통찰을 겸비한 인문학적인 사고로서 지극히 회화적이고 민주적이었던 것이 아니었겠는가 생각도 하면서 부의 재창출.. 이를
다시 뜻 깊게 새겨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