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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에는 정조가 많은 개혁 정치를 펼쳤지만 갑자기 사망하고 노론의 벽파인 심환지와 정순왕후 김씨에게 정권이 넘어가면서 정조가 했던 개혁정치를 무너뜨렸다. 이후 노론의 소수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정치형태가 나타나는데 이를 세도정치라 불렀다. 이 시기에는 정치 기강이 해이해지고 관리들이 부패하면서 광범위한 착취와 수탈이 진행되었다. 특히 백성들의 삶은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더욱 힘들어지자 민란의 시대가 펼쳐진다. 이는 조선이란 국가가 망국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이 위기 속에서 위로부터 개혁과 아래로부터 개혁이 있었다. 먼저 개혁을 하기 위해서 세력을 가진 정치공동체가 필요한데 위로는 명문가 출신의 개화파가 있었고, 아래로는 민중세력 중심으로 전국적인 조직을 가진 동학이 있었다. 위로부터 개혁은 급진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과 온건개화파가 실시한 갑오개혁이 있었다. 개화파는 일본처럼 새로운 정치체제를 본받아 수구정치를 물리치고 조선을 개혁하려했지만 자주적이지 못했고, 농민들의 염원이었던 토지개혁이 없어서 큰 호응을 받지는 못하였다는 한계가 있었다. 아래로부터 개혁은 동학농민혁명이 있었다. 동학농민군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폭정에 못이겨 동학교도 전봉준 중심으로 일어났다. 이때 동학농민군은 동학삼걸로 불리는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을 중심으로 세력이 나뉘는데 전봉준은 금구에 진을 치고 전라우도를, 김개남은 남원에 진을 치고 전라좌도를, 손화중은 나주에 진을 쳐서 그 지역을 다스렸다. 동학농민군은 세력이 커지자 반봉건, 반외세라는 구호로 조선 사회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정확하게 제시하였다. 반봉건은 신분사회 해체이고, 반외세는 외세의 힘이 아닌 자주적으로 국가의 반석에 올리기 위함이었다. 또한 동학농민군은 서울로 북상하면서 관군과 전주성에서 전투하여 승리한 후 <12개조의 폐정개혁안>을 정부에 제기하여 국정의 민주적 개혁과 외세 배제를 요구하였고 전라도 53개 지역에 농민자치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해 신분제 폐지, 탐관오리 숙청, 토지재분배, 농민들의 정치 참여 및 노비해병, 일본세력의 배격 등을 주장하고 실천하였다. 이에 대해 직접 민주주의의 시작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 삼정(三政)의 문란이란 ?
삼정은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정(還政)을 말하는데, 조선 후기 삼정의 문란 때문에 백성들은 큰 고통이었다. 전정의 경우 가난한 농민들은 규정된 세금보다 몇 배의 세금을 부담해야 했다. 마을 단위로 세액의 총액이 미리 정해져 있는 비총제(比摠制) 때문에 가난한 농민의 부담은 더 컸다. 군정의 경우 양반 사대부는 군포납부에서 면제된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군포 때문에 도망간 친지나 이웃들의 군포까지 남은 농민들이 부담해야 했고, 갓난아기에게 군포가 지워지는 경우도 있었다. 환정도 마찬가지였다. 환곡의 이자에 각종 가산세를 물려 고리대처럼 운영하였다. 필요 이상의 곡물을 억지로 떠맡기거나 규정보다 적게 대여해주고 거둘 때에는 더 받는 등 각종 불법과 부조리가 만연하였다. 곡물을 대여해 주지도 않고 이자만 받는 경우도 있었다. 암행어사를 파견해 단속하려 했지만 지방 수령 대부분이 세도가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효과를 거두기 힘들었다. 정부에서 환곡을 탕감해 줄 경우에도 그 혜택은 수령이나 아전에게 돌아갈 뿐 백성들에게 혜택이 돌아가지는 않았다.
=청주성과 김개남의 동학군
청주와 관련해서 주목할 인물은 동학군 지도자였던 김개남(金開南)이다. 그는 전북 태인 출신으로 본래 이름은 영주이지만 어느날 꿈에 신인(神人)이 개남(開南)이란 두 글자를 손바닥에 써서 보여주었기 때문에 이름을 개남으로 고쳤다고 한다. 개남이라는 뜻은 ‘남쪽에서부터 개벽한다’ 또는 ‘남조선을 연다’는 뜻이다. 김개남으로 개명한 이유도 시국관과 대처방안에서 나왔다. 동학농민군 지도자로 잘 알려진 전봉준의 시국관과 대처방안은 조선왕조체제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먼저 ‘권귀(權貴)’ 즉 부패한 탐관오리들을 척결해야 한다는 편이지만 김개남은 곧바로 한양으로 진격하여 부패무능한 왕조를 타도해야 한다는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주장이었다. 그래서 당시 양반들의 기록을 보면 동학군 중 김개남이 가장 심했다고 했는데 다시말하면 그의 군대는 천민출신들이 다수여서 기존 지배층에 대한 불만이 많았을 것이고, 그래서 더욱더 격렬하게 싸웠다고 볼 수 있다. 1894년 6월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이후 8월말에서 9월초, 내정간섭 등 혼란스러운 상황이 계속되면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일본의 의도가 점점 노골화되기 시작하였는데 이로 인해 민중들이 분노해서 일본을 상대로 다시 제2차 봉기가 일어났다. 전봉준과 손병희의 동학농민군은 교통의 요충지인 논산에서 모여 충청 감영이 있는 공주를 점령해 서울로 북상하려고 하였고, 김개남의 동학농민군은 1894년 10월 14일 독자적으로 남원에서 출발해 전주에서 금산(충남 금산)→회덕(대전 대덕구 회덕동)을 점령하고 충청 병영이 있는 청주를 점령한 뒤에 서울로 북상하려 하였다. 김개남이 이끈 1만 5천 명의 동학농민군은 1894년 11월 13일 청주성 남문에서 관·일본연합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지만 화력 차이로 인해 패배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무라타 소총 등 현대식 병기로 무장하고 있어서 동학군이 상대하기 쉽지 않았다. 동학군과 일본군의 화력은 1대 250 수준이라고 분석한다. 전봉준과 손병희가 이끈 1만 명의 동학농민군이 2,700명의 관군·일본연합군과 공주 우금치에서 싸웠지만 동학군 사상자가 9,500명이나 나올정도로 처참하게 패배하였다. 이후 잔존세력의 탄압이 이어지고 1898년 동학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이 붙잡혀 교수형에 처해지는 데까지 이르게 되자 동학농민혁명은 좌절되었다. 살아남은 동학군 지도자들은 관군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는데, 살아남은 지도자 일부는 은신하다가 훗날 3·1혁명을 주도하는 민족대표 33인이 되기도 하고 일부는 친일활동에 앞장서는 반민족행위자가 된다.
=청주 선교의 아버지, 청주제일교회 설립자 밀러
밀러(Frederick Scheiblin Miller:한국 이름 민노아)는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로 1892년 11월 15일 입국하여, 서울에서 11년을 사역하였고, 1904년부터 1937년까지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꼭 33년간 청주주재 선교사로 청주선교부(Mission Station)를 설립하고, 청주 선교부를 이끌며, 청주를 중심한 중부권 선교와 근대 교육기관 설립, 근대병원 설립, 문맹 퇴치를 위한 여성교육, 삶의 질 향상을 위한 금주운동을 비롯한 계몽운동 등, 청주 근대화와 교육도시로서의 명성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청주 근대화의 기수(旗手)이다.
민노아(F. S. Miller)는 1866년 펜실베니아(Pennsylvania)주 피츠버그(Pittsburg)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밀러(W. N. Miller. M. D.)는 남북전쟁에 참전한 군의관이었으며, 58년간 피츠버그에서 의사로 봉직했다. 그는 피츠버그(Pittsburg)의 국립고등학교와 피츠버그대학(1889)을 거쳐 뉴욕 유니온신학교를 졸업(1892년)하고 목사로 임직한 후 1892년 11월 15일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본부 해외 선교부의 임명을 받아 한국에 왔다.
민노아에게 처음 부여된 임무는 서울 선교부 직원으로 교육사역(1892-97)이었고, 그다음에는 복음사역(1896-1905)이었다. 부인과 함께 2개월 동안 한국어 공부에 몰두하다가 6개월 후에 선교회 회계담당 지위를 얻었다. 1893년에 1월에 평양 장로회신학대학 학장에 취임한 마포삼열 학당장에 이어 언더우드가 세운 예수교학당(현 경신학교)을 ‘민노아학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제3대 학당장에 취임하였다. 민노아는 이 시기 10대였던 도산 안창호를 가르쳤다. 만난 지 반년 만에 세례를 주고, 선진 학문을 가르쳤으며, 유학 준비를 돕고, 결혼까지 주선하여 주례 후 유학의 길을 열어주었다.
1897년 10월에 민노아학당이 폐쇄되자 대한기독교서회 편집위원, 1894년부터 상임성서실행위원회(PEBC: Permanent Executive Bible Committee) 위원으로 한글성서번역에 참여하여, 1903년에는 회장으로 1905년까지 소위원회를 이끌었다. 또한 1905년에는 장로교 대표로 장∙감연합찬송가 편집에도 참여하여, 그가 직접 작사한 찬송가를 포함하여 총 26곡을 수록하였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에 한글로 지어진 찬송가 최다곡 수록자이기도 하다. (5곡: 96장, 204장, 427장, 451장, 588장)
그 어간, 민노아는 서울 연동교회 설립의 기초를 놓았고, 장로교의 발길이 미치지 못하던 경기 남부와 충청도를 중심으로 선교를 시작한다. 용인(백봉교회), 안성(안성제일교회), 죽산(죽산교회) 등지에서 교회를 세웠고, 1900년 봄에는 당시 한강 이남의 3대 시장이던 청주읍성을 방문한다. 충청권 선교를 담당하던 침례교 엘라딩 선교회가 재정 사정으로 손을 떼었고, 남장로교회도 충청권 선교에 여력이 미치지 못했으며 감리교회가 청주순회 전도를 막 시작하는 시기였다.
민노아는 기다렸다는 듯 청주에 입성하여 첫 번째 방문에 감동적인 소식을 듣는다. 자신이 죽산 둔병리교회에서 부흥회를 할 때 참석했던 몇 명이 예수를 믿고, 청주에서 교회(청주 최초의 교회인 신대교회)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민노아는 자신이 사역할 곳이 청주라는 확신을 갖는다. 신대교회를 중심한 교회의 부흥과 도청소재지의 이전 계획, 전기 가설 등 발전 전망은 물론 특별히 청주사람들의 심성을 좋게 보았다. 점잖고, 학식이 있고, 배움에 대한 열의가 있고, 따뜻한 사람들이라는 점등을 들어 선교부 추가 설치를 강력히 요청하였다. 그리고 1901년부터 본격적으로 김흥경 조사와 함께 청주선교를 시작한다.
그리고 1904년 임시허가를 받자마자 본부의 지원이 없는데도 자비를 들여 15회에 걸쳐 청주읍성이 내려다보이는 탑동 언덕을 중심으로 5만5천 평의 임야를 사들인다. 그리고 1905년 가족을 이끌고 청주로 이거(移居)하여 1906년 선교본부로 사용할 첫 번째 양관을 건축하였다. 이것이 청주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었다. 그후 1910년부터 32년까지 총 7동의 양관을 건축한다. 이 양관은 청주선교부 및 성경학원, 선교사 사택, 청주 최초의 근대병원인 소민병원으로 사용되었으며, 그 당시 청주읍민들의 눈에는 근대화의 상징이요 일제의 침탈로 상심한 시민들의 마음에 희망을 주는 랜드마크가 되었다.
청주 최초의 근대학교인 광남학교(청남학교의 전신)는 1904년 11월 1일 방흥근의 집에서 시작됐다. 청주의 공립학교인 청주보통학교가 설립됐던 1907년보다 3년 앞선 것이다. 민족적 기운이 팽배하던 시기, 방흥근, 김태희, 김원배 등은 구국의 이념을 갖고 ‘광남학교(廣南學校)’를 설립했다. 매년 20여명 안팎이 입학해 100여명의 학생이 있었고, 3~4명의 교사가 학생을 가르쳤는데, 1904년 청주읍교회가 세워지면서 민노아선교사가 광남학교를 맡아 운영하게 되었다. 1908년 청남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청주를 중심으로 청남학교(淸南學校)와 △괴산 청천교회에 ‘청동학교(淸東學校)’ △신대교회에 ‘청서학교(淸西學校)’ △묵방교회에 ‘청북학교(淸北學校)’ 동서남북(東西南北)에 기독교 학교를 세우고 1909년 정식 인가를 받아 보통교육과정 교육을 시작했다. 문명퇴치와 농촌계몽을 펼쳤으나, 역점은 유능한 한국인을 양성하는 것이 목표였으며, 나라사랑과 민족자주의식을 고취했다.
1906년 청남학교에 입학했던 배민수 목사는 “선생님들이 찬송가와 애국적인 노래들을 가르치며 조국의 자유를 위해 싸울 준비를 해야 한다고 용기를 북돋우셨다”고 회고했다(배민수자서전 39쪽). 일제가 문화재인 망선루(望仙樓)를 없애려하자 청년 및 교우들과 시민운동을 전개하고 골목에 쌓여 있던 망선루 자재를 교회로 옮겨 복원하여 교사(校舍)로 사용했다. 청주제일교회 안에 있던 망선루는 2000년 청주 중앙공원으로 이전하였다. 1932년에는 한글 말살정책이 펼쳐되던 때 최현배 선생을 초청하여 7일 동안 한글강습회를 열기도 하였다.
1936년 신사참배령은 더욱 강화됐고, 교감 최창남은 민족교육이 중단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학교 문을 닫을 수 없다는 입장이었지만, 민족의식이 강했던 청남학교 학생들은 신사참배 불응에 나섰고, 정규태, 정순경 선생은 구속되고, 재학생 박종렬(청주 서남교회 개척목사), 강병찬 등은 감금당했고, 청주읍교회 손현수 장로(훗날 보은군수역임)도 수감됐다. 신사참배 반대를 천명했던 교장 소열도(T.S. Soltau, 1921~1936 교장재임) 선교사와 정규태, 정순경 선생은 강제 퇴직당하고, 청남학교도 1936년 10월 12일 강제 휴교 처분을 당하고, 교사와 선교사가 떠난 주인 없는 학교는 1938년 현 상당구 영운동으로 이전(移轉)하였고, 1943년 일제에 의해 국가에 강제 귀속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민노아의 선교 지역은 충청권 전체였다. 그리고 당시의 지역과 교통의 중심에 교회를 세웠다. 충주, 홍주, 청주, 상주, 괴산, 보은, 옥천, 영동, 추풍령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역에 이른다. 충남 홍성군 홍주성 서문 밖에 자리 잡은 홍성제일교회도 1900년, F. S. 밀러 선교사에 의해 설립되었다. 서해안 지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교회이며, 지역 내 많은 교회를 육성한 어머니 교회이기도 하다. 죽산교회는 충북 첫 교회인 청주 신대리교회의 모교회나 다름없다. 죽산은 구한말 한양서 경상도로 통하는 교통 요지였다. 죽산교회도 F. S. Miller 선교사에 의해 설립됐다. 민노아 선교사는 둔병리에서 사경회를 인도했다. 이 사경회에 청주 사람 오천보, 문성심, 오삼근 등이 예수를 믿고 신대리교회 공동체를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민노아 선교사가 한국말을 어찌나 잘하는지 탄복했다.’고 전해진다.
1901년 세워진 청주 신대교회, 1903년 세워진 괴산 제일교회에 이어, 1904년 11월5일 시작된 청주읍교회는 충북지역 세 번째 개신교이지만 ‘충북의 어머니 교회’로 통하고 있다. 청주제일교회 출신 선교사와 목회자, 신자 등이 주변 지역 교회들을 보살피거나 전도해 묵방리, 화죽, 문의, 쌍수, 청안교회, 청주 제2교회(지금의 중앙교회) , 대전제일교회 등을 세우는 등 초기 충북과 중부권 교회의 매개체였다. 안성시 모교회인 안성제일교회도 민노아 선교사가 1902년 12월 설립했다. 이 교회는 안성지역 최초의 유치원을 설립해 많은 기독교 인재들을 배출했다. 조치원, 추풍령, 홍성, 안성, 죽산, 청주 등지의 교회들은 그의 숨결로 세워진 교회들이다. 1907년 독노회에서 노회를 분립하기 위해 시작된 1911년 경기·충청 노회의 초대 노회장으로 활동하였다.
민노아는 문학과 음악에도 재능이 탁월하여 1894년 언더우드가 가사와 악보가 공존하는 한국 최초의 찬송가를 발간할 때도 번역과 편집에 참여하였다. 그는 특히 음악적 재능이 있어 찬송가를 많이 작사하였다. 한국어의 음절, 운율, 강약 등의 특성까지 꿰뚫고 있어 한국인에 맞는 찬송가 편집에 큰 역할을 했다. 그가 작사 또는 편집한 찬송가는 주로 성경을 토대로 이루어졌으며, 1905년 26편이 수록되고, 현재 한국찬송가공회가 발행한 찬송가책에는 5곡이 실려 있다. 너무나도 잘 알려진 곡들이다. 96장 “예수님은 누구신가” 204장 “주의 말씀 듣고서” 427장 “맘 가난한 사람” 451장, “예수 영광 버리사” 588장 “공중 나는 새를 보라” 그가 작사한 곡들이다.
그는 문학가이기도 하다. 그의 문장에는 위트와 유머가 넘친다. 한국 풍습에 대한 그의 묘사는 섬세하고, 한국인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글을 쓴다. 그는 재한(在韓) 선교사 가운데 가장 성실하고 꾸준하게 문학 부문에서 활동해 온 선교사로 전해진다. 그의 저서는 40여종에 이르며, 한국 선교 역사상 어떤 선교사보다 많은 문서를 남겼다. 그는 한국 이야기를 많이 쓰고 간행했는데, 그 중 영문판인 “우리의 친구들(Our Korean Friends)", "한국의 젊은이들(Korean Young People)"이 미국 뉴욕 레벨 출판사(Fleming H. Revell Press)에서 출간되었다. 특히 민노아 선교사는 순수 한글로 된 금주, 금연, 사회 계몽 및 문맹 퇴치를 강조한 전도지를 많이 제작 배포하였다. 그래서 그는 “전도지의 왕”, “소책자의 사도”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청주선교부는 1904년에 개설되어 1970년대 초까지 약 70년간 주재했다. 50여 명의 선교사가 활동하였으며, 민노아 선교사의 지도력에 의해 교육, 의료, 교회설립, 계몽운동 등 근대문화와 신문명의 전달자로 역할을 다하였고, 청주제일교회, 대전제일교회, 충주제일감리교회, 안성제일교회, 홍성제일감리교회 등 경기 충청권의 40여 교회와 청주에 청남초등학교, 청주맹학교, 일신여자중고등학교, 청주성서신학원, 일신학원 안과 밖의 6동의 양관 등 많은 문화유산을 남겼다.
그는 1936년 12월 만 70세로 정년 은퇴하고 필리핀과 중국 등지를 여행하고 돌아와 1937년 청주에서 별세하였다. 한국에서 선교한 지 45년째 되던 해 그의 유언에 따라 그가 사랑하던 청주에 묻혔다. 그의 첫 번째 아내와 두 아들의 무덤이 선교사들의 묘지인 양화진에 묻혀 있음에도 자신은 청주에 묻어달라고 유언하였다.
민노아 선교사가 설립한 청주성서신학원(1921년 설립) 100주년을 맞아 민노아기념 찬송가비와 작은 흉상 하나가 세워졌다. 문명의 후진국이었던 한국을 ‘품격이 없어서가 아니라, 과학과 기술의 보급에 늦어진 탓’이라고 애써 변명해 주며, 한국인 사랑에 앞장섰고, 특별히 청주를 포함한 중부권을 사랑하여 그의 청춘과 일생을 다 바쳐 헌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