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이 동맹 제의를 해오자 먼로 행정부는 고민에 빠졌다. 퇴임 대통령들인 제퍼슨과 매디슨은 영국과의 동맹에 찬성했다. 그러나 국무장관 존 퀸시 애덤스는 강력히 반대했다. 유럽에서 대사 생활을 오래 해본 그는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고 마키아벨리즘이 횡행하는 유럽의 정치에 미국은 관여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퇴임 연설에서 워싱턴이 “가능하면 유럽과는 깊은 관련을 맺지 않는 게 좋으며, 어느 한쪽을 계속해서 편드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언급한 이래 미국 외교 정책은 기본적으로 중립지향적이기도 했다.
먼로 대통령 스스로는 영국과의 동맹에 솔깃해 했다. 그는 라틴아메리카를 미국처럼 공화국 체제로 만드는 일을 열렬히 지지해 왔으며, 매디슨 정부 말기에는 국무장관으로서 은밀히 그런 나라들의 독립 운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 반대하는 유럽 제국들과 한꺼번에 맞설 힘은 없는 상황에서, 라틴아메리카를 직접 지배하려 하지는 않는 영국과 동맹을 맺고 함께 행동하는 일은 합리적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쿠바가 걸림돌이 되었다. 먼로와 애덤스는 모두 미국의 코앞에 있는 쿠바가 스페인의 지배에서 벗어나거나 장기적으로 미국 영토가 되어야 안보 면에서 안심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영국은 카리브해 지역에서는 현상유지를 선호하고 있었다. 영국과 동맹을 맺었다가 나폴레옹 전쟁 같은 유럽 국가끼리의 전쟁에 말려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결국 1823년 12월 2일, 먼로는 의회에서 연례교서를 발표하며 먼로 선언, 또는 먼로 독트린이라고 알려지게 될 외교 원칙을 천명했다. 그것은 첫째, 앞으로 남북 아메리카의 어느 지역도 유럽의 식민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비식민지화의 원칙). 둘째, 아메리카의 문제는 아메리카인끼리 해결해야 한다(불간섭의 원칙). 셋째, 미국은 유럽의 분쟁에 일체 개입하지 않는다(고립주의의 원칙), 로 요약되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러시아의 북아메리카 영토확장을 정면으로 반대하고 남아메리카의 재식민지화도 반대하며, 그러기 위해 영국이나 다른 어떤 나라와도 손잡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한편으로 러시아령 알래스카나 프랑스령 기아나 등 현재 유럽이 보유하고 있는 아메리카 식민지를 해방하는 일에 나서지는 않을 것임을 나타냄으로써, 유럽과의 정면 충돌은 피하려는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선언은 이처럼 방어적이고 소극적인 뉘앙스를 담고 나왔으며, 국력이 뒷받침해주지 않는 이상 공허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한동안 유럽 각국은 이를 노골적으로 무시하며 아메리카에서 영향력을 높이려 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이후, 국력을 한껏 키운 미국은 이를 공세적으로 해석하여 남북 아메리카 전체에서 ‘제국주의’를 추구하게 된다. 반대로 20세기에 들어서는 미국이 아메리카에서 벗어나 세계 경찰로서 역할을 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 오늘날에는 아무도 먼로주의를 미국의 외교 원칙으로 거론하지 않는다. 그래도 이 선언은 미국이 비록 유럽에서 비롯되었을지언정 유럽과는 다른 별도의 문명이며, 그 자체의 논리와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갈 것이라는 선언으로서 항구적인 의의를 지닌다.
“청년 미국”, 거인으로 자라기에 앞서 성장통을 앓다
19세기 중반을 넘긴, 건국 후 약 백 년을 넘겨 가던 미국은 18세기 말의 미국과는 크게 달랐다. 본래 소박한 농업국가였으며, 워싱턴, 제퍼슨, 매디슨, 먼로 등 건국의 아버지들도 대부분 농장을 경영했던 미국은 갈수록 공업화되고, 이 무렵에는 막강한 산업자본을 가진 국가가 된다. 최악의 비극이었던 남북전쟁도 농업국가의 정체성을 유지하려 애쓰던 남부가 패망하고, 그 폐허를 재건하기 위해 유례없는 산업투자가 이루어지는 계기로 작용했다. 19세기 말에 이르면 미국은 영국이나 독일을 뛰어넘어 세계 최대의 산업국가로 올라선다.
한편 국가의 규모도 영토와 인구, 두 가지 면에서 모두 급성장했다. 1803년의 루이지애나 매입으로 본격화된 영토 팽창은 끊임없이 진행되어 1840년대에는 북아메리카의 태평양 연안을 차지했고, 스페인, 멕시코와의 타협, 거래, 또는 전쟁으로 콜로라도 강에서 리오그란데 강에 이르는 광활한 서남부 지역이 손에 들어왔다. 그리고 1867년에는 알래스카를 러시아에게서 사들임으로써 북극해까지 판도에 추가했다. 한편 인구는 1790년에 400만 명이던 것이 1840년에는 1700만까지 늘었고, 남북전쟁 무렵에는 3천만 명을 돌파했다. 이런 기록적인 인구 증가는 공중 보건의 개선과 경제적 번영, 그리고 3백만 명 이상이 이민온 아일랜드를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의 이민자 물결에 힘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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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 때문에 미국 노동자들의 설 땅이 없어진다는 내용의 1888년도 풍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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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커지고, 강해지고, 복잡해진 미국이었으나 한편으로는 건국 당시부터 싹튼 모순과 한계점들이 여전히 해결을 기다리고 있었다.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권력 배분 문제가 그랬고, 북부와 남부의 대립 문제, 흑인 노예 문제와 인디언 문제 등이 해묵은 과제였고,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른 빈부격차, 노동자의 생존권, 공민권 확대 등도 점점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대통령이라는 직책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대통령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하며, 국가는 대통령에게 무엇을 해줘야 하는지도 그런 문제의 일부였다. 그리고 본래 국왕의 전제를 끔찍이 혐오하며 출발한 이 나라였지만, 점점 더 많은 중대 과제들이 대통령의 결단에 의존하게 되었으며, 그만큼 대통령의 권한과 권위도 커져가고 있었다.
중요한 순간마다 결정을 내린 미국의 대통령들
앤드류 잭슨(제7대, 1829~1837), 인디언들을 쫓아내다 | |
앤드류 잭슨은 오늘날 미국에서 역대 대통령들의 인기투표를 해 보면 대부분 상위에 랭크되는 대통령이다. 실제로 그는 긍정적인 업적을 많이 남겼으며, 무엇보다도 초대에서 제6대까지의 “남부의 농장주 출신의, 대부분 교육을 잘 받은 명문가 신사들”에 한정되어 있던 대통령들과 전혀 다르게 서부의 변변찮은 집안의 대학도 제대로 못 나온 서민이던 그답게 공직을 개방하고, 선거법을 개정해 평민도 선거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며, 대자본가의 힘을 억제하려고 했던 이른바 “잭슨 민주주의”는 미국 정치를 한 단계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민주당을 세워서 현대 미국 정당정치의 기반을 다진 사람도 그다.
그러나 그를 칭찬해 마지않던 역사가들도 태도를 바꿔 이구동성으로 비난을 하기 마련인 정책이 있는데, 바로 그의 인디언 정책이다. 기독교도도 아니고, 피부색도 다르며, 생활방식도 딴판이던 인디언은 건국의 아버지들로서도 “지워버리고 싶은 풍경의 일부”였다. 그래도 “인디언을 멀리 서쪽으로 이주시키는 게 낫다”고 처음 발언한 제퍼슨도 실제로는 이주가 아닌 동화 정책을 썼다. 현실적으로 당시의 힘으로 인디언을 강제 이주시키기 어렵다는 점이 컸지만, 인디언이 아무리 이질적으로 보여도 그들에게 ‘참된 종교’를 일깨우고, 문명된 언어와 문자, 생활 습관을 가르친다면 더불어 살 수 있는 문명인으로 교화할 수 있다는 생각도 작용한 정책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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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통령들의 인기투표에서 항상 상위를 차지하는 앤드류 잭슨. 그러나 그의 반(反)인디언 정책은 여전히 비난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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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1820년대에는 남부의 조지아, 앨라배마, 미시시피, 플로리다에 “문명화된 인디언” 다섯 부족(체로키, 크리크, 치카소, 세미뇰, 촉토) 수만 명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영어를 쓰고, 다수가 기독교를 믿었을 뿐 아니라 자체의 법률과 법원을 갖추고 학교와 보안관 제도를 운영했을 만큼, 당시 보통 미국인들과 별 차이 없는 생활을 했다. 그러나 “서민의 벗” 잭슨은 이들을 미시시피 강 서쪽으로 쫓아낼 뿐 아니라 특정 구역에 몰아넣고 죄수들 감시하듯 감시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젊은 시절 미영전쟁에서 영국군 편에 선 인디언과 싸우기도 했지만 동시에 친정부 인디언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웠으며, 크리크족의 고아를 입양할 정도로 나름대로 인디언과 친한 것으로 알려져 있던 잭슨은 왜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
여러 가지 분석이 있지만 인디언을 개인적으로는 동정하면서도 근본적으로 그들이 백인과 동화될 수 없는, 미국인으로서의 권리를 누릴 자격이 없는 열등종족이라고 여긴 점, 오랜 군지휘관 경험상 미영전쟁 등에서 미국에 반기를 든 적이 있는 인디언은 미국 안보에 잠재적인 위험요소라고 여긴 점, 그리고 인디언이 차지하고 있는 땅의 높은 이용가치와 상품가치를 놔두고 볼 수 없었던 기업인과 정치인들의 집요한 로비의 결과라고 여겨진다.
아무튼 잭슨은 연방정부가 그때까지 인디언과 맺은 여러 협정이 걸림돌이 되자 조지아나 앨라배마 주정부에 팔밀이를 해서 그들 차원에서 인디언을 내쫓도록 했다. 인디언들이 ‘문명인답게’ 소송을 건 결과 연방대법원에서 그들의 이주 강요는 위법이라는 판결이 나왔지만, 잭슨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1830년 5월, 인디언을 강제 이주시키는 연방법안에 서명했다. 그리고 인디언 중 소수를 매수하여 토지를 양도한다는 계약을 맺도록 하고, 그 계약의 불법성을 성토하는 인디언들은 군대를 동원해서 내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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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기병대에게 쫓기는 서부의 인디언들. 1899년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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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4만 5천 명 이상의 인디언들이 “눈물의 길”을 따라 아칸소와 오클라호마의 보호구역으로 갔으며, 그 길목에서 약 4분의 1의 인디언이 추위와 전염병으로 죽었다. 부당한 핍박에 무기를 들고 최후까지 저항하던 세미뇰 족은 잭슨의 임기가 끝난 1842년에야 손을 들었다.
인디언 이주나 말살 정책은 건국 초부터 어느 정도는 일관된 태도를 가지고 취해진 것이었으나, 잭슨처럼 연방법원까지 무시해 가며 적극적으로 반 인디언 정책을 취한 대통령은 없었다. 그것은 인종과 원 국적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자유와 평등을 보장한다는 ‘미국적 인도주의’가 일정한 내부 모순을 갖고 있음을 확인시켰다. 자신들과 다른 문화의 소유자들을 열등한 야만인들로 보고, 그들에게 공평한 대우를 거부하는 태도는 이후 미국이 동양인들이나 무슬림들을 대할 때도 번뜻번뜻 드러나게 될 것이었다.
에이브러햄 링컨(제16대, 1861~1865), 노예해방령을 선포하다
“이 분쟁에서 나의 최우선 목표는 연방을 구하는 것이며, 노예제를 구하는 일도 없애는 일도 아닙니다. 만약 노예를 전혀 해방하지 않음으로써 연방을 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고, 모든 노예를 해방함으로써 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입니다. 또한 일부는 해방하고, 일부는 해방하지 않음으로써 구할 수 있어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링컨, 1862년 8월)
에이브러햄 링컨이 남북전쟁 당시 추구했던 목표는 노예해방이 아니라 연방의 유지였으며, 연방의 유지를 위해서는 노예 문제에 관련해 남부와 타협할 뜻도 있었음은 이제 거의 상식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링컨 개인은 일관되게 노예제도를 혐오하고 폐지를 염원했으며, 그 과정에서 정치 경력을 쌓아왔다. 대통령 링컨이 그 지지자들의 재촉에 시달리면서도 노예해방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까닭은 제퍼슨과 비슷했다. 연방 대통령에게 과연 그런 결정을 내릴 권한이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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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이 남북전쟁 당시 추구했던 목표는 사실 노예해방이 아니라 연방의 유지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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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긴 글과 어록을 보면, 워싱턴, 제퍼슨, 프랭클린 등 건국의 아버지들은 대부분 노예제를 바람직하지 않으며 없어지면 좋을 제도로 생각했다. 개인적으로는 소유하던 노예를 해방해 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을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나며, 천부 인권을 가진다”는 미국 헌법의 정신과 양립할 수 없는 제도로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기독교 정신에 비추어 좋지 못한 관습”이며,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폐지를 바랄 것” 정도로 여겼을 뿐이다. 그래서 미국 헌법에는 도망 노예는 원 주인에게 돌려보내야 한다는 조항이 들어갔고, 1808년까지는 노예무역도 여전히 이루어졌다.
그러나 노예제를 산업의 중요한 축이자 “저버릴 수 없는 전통문화”로 여겨 절대 사수하려는 남부와, 이를 기본적으로 백안시하며 자유주의의 원칙과 노동력의 필요에 따라 노예제 폐지를 바라는 북부 사이에는 점점 골이 깊어갔다. 먼로 대통령 시대인 1820년의 미주리 협정으로 노예제를 고수하려는 주와 폐지하려는 주 사이에는 일정한 타협이 이루어졌으나(미주리주의 남부 경계선인 북위 36도 30분 이북에는 노예주를 설치하지 않는다, 비노예주와 노예주의 수를 동수로 유지한다 등이었다), 이는 어정쩡한 타협이었기에 양쪽에서 계속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다가 1854년의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으로 “미주리 협정은 위헌이며, 각 주는 노예제에 대해 마음대로 판단할 권리가 있다”는 결론이 내려지면서 노예제 폐지론자들은 분격했다. 이 법에 반대하여 수립된 정당이 공화당이었고, 그 당에는 링컨도 가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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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이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에 반대했던 까닭은 그것이 노예제를 지금보다도 확대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건국의 아버지들이 노예제를 포함한 미국의 모든 제도에 대해 현명한 판단을 내려 그것을 헌법에 반영했으며, 따라서 후대인들이 그것을 마음대로 바꿔서는 안 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노예제를 적극적으로 긍정하지는 않으면서 폐지를 명문화하지도 않은 헌법은, 노예제를 일종의 악습으로 여기되 각 개인과 주정부가 알아서 폐지하면 좋은 것으로 보는 소극적 도덕주의의 산물이었다.
따라서 현행 노예주에 연방정부가 압력을 넣어 폐지를 유도하는 일은 있을 수 없지만, 마찬가지로 지금보다 노예제가 더 늘어날 가능성을 열어 두는 것 또한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링컨은 1858년의 상원의원 선거에서 캔자스-네브래스카 법 제정의 주역인 스티븐 더글러스와 대결하며 일련의 명연설을 쏟아냈고, 그리하여 전국적 유명인으로 떠올랐다. “흑인도 백인과 다름없는 인권을 갖고 있다고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라는 링컨의 외침은 노예제 폐지론자들에게 복음처럼 들렸다. 비록 그가 “인권이 현실 문제를 떠나 지체 없이 보장될 수는 없지만”이라는 단서를 달았을지라도.
비록 그 상원의원 선거에서는 패배했으나, 그 과정에서 얻은 명성을 발판으로 링컨은 4년 뒤에 대통령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남부 주들에게는 선전포고처럼 받아들여졌다. 사우스캐롤라이나를 시작으로 남부 7개 주가 연방에서 탈퇴했으며, 1861년 4월에는 섬터 요새에서 남군이 연방군을 공격하면서 남북전쟁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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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해방 선언 초안을 작성하는 링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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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전쟁은 남군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전개되었고, 그 점에다 링컨이 노예 문제에 미온적이라는 점이 겹치며 북부에서도 링컨의 인기는 급락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위헌적 결정을 내릴 권한은 없다고 고집했으며, 노예해방이 자칫 중립적 입장에 서 있던(그리고 노예제를 선호하던) 주들까지 남부 편으로 돌릴 가능성도 염려했다. 그는 심지어 일부 지휘관이 점령지에서 노예를 풀어주자, 이를 비난하며 월권행위를 엄금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노예제에 관해 남부와 타협할 수 있음을 거듭 타진했다.
그러나 남부가 반응을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유럽 각국도 노예제에 대한 미국 정부의 입장이 모호하다는 이유로 원조를 미루고 있었으므로 링컨도 점점 생각을 고쳐먹기 시작했다. 일종의 타협안으로, 그는 노예제를 폐지하는 주에는 연방정부가 보상금을 준다는 안을 내놓았지만, 역시 거부당하고 말았다. 결국 그는 최후의 카드를 쓰기로 했다. 1862년 9월 22일, “남부 반란주들이 1863년 1월 1일까지 연방에 복귀하지 않으면” 그 주들의 노예를 해방한다는 것이었다. 그 조건에 따라 노예해방 선언은 1863년 초하루에 발효되었다.
그것은 전면적인 노예제 폐지선언이 아니라 연방에 적대하는 주들에 대한 일종의 징벌의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중립 주들과 일부 북부에 존재하던 노예들은 해당되지 않는 부분적 해방이었다. 하지만 그 파급 효과는 컸으며, 남부 내부의 혼란과 북부의 단합, 외국 세력의지지 등에 힘입어 북군은 전세를 뒤집고 전쟁에서 이기기 시작했다. 링컨은 노예해방 선언 직전까지도 자신의 행동이 과연 옳은지 확신을 못하고 있었으나, 차차 그런 믿음이 커져갔던 것 같다. 10개월여가 흐른 게티스버그 연설에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언급했을 때, 그 국민 속에는 흑인도 분명히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도 흑인이 온전한 시민권을 인정받기까지는 숱한 세월이 필요했지만, “흑인도 미국 국민이다”는 원칙은 기념비처럼 꿋꿋이 세워졌다. | |
시어도어 루스벨트(제26대, 1901~1909), 파나마 운하를 건설하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같은 공화당의 전설적인 대통령, 링컨을 누구보다도 존경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링컨이나 제퍼슨처럼 실리를 앞에 두고 원칙과 철학 때문에 고민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진취적이고 실행력 있는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는 그는, 여러 강적과 난문제들을 맞이해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맞서 싸웠다. 그리고 대부분 승리했다.
루스벨트는 상당히 행운에 따라, 즉 제25대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가 1901년 9월에 버팔로에서 암살되는 바람에 부통령이던 그가 대통령직을 승계함으로써 백악관의 주인이 되었다. 그 독불장군 기질 때문에 공화당 내에서도 같은 편이 별로 없던 그였으므로, 부통령은 사실상 마지막 공직이라고 스스로 여기던 상황에서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많은 경우에 이런 식으로 대통령 자리에 오른 부통령들은 전임자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평범한 대통령으로 임기를 채우고 사라지는 편이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달랐다. 매킨리의 친재벌 정책을 하루아침에 뒤집고는 스탠더드 오일을 비롯한 트러스트들의 목을 죄는 정책을 일관성 있게 추진했으며, 이는 결국 그의 퇴임 뒤인 1911년에 스탠더드 오일의 불법 판정과 해체 판결을 가져왔다. 자칫 산업화 초기부터 정경유착과 재벌경제가 ‘스탠더드’가 될 상황을 그 특유의 뚝심으로 차단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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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역사상 가장 진취적이고 실행력 있는 대통령이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 그림은 1903년 그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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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는 8년여의 임기 동안 정부 주도 환경보호 운동의 본격화, 식품 안전 법제화, 노동권 강화, 부패 척결 등의 많은 공로를 세웠는데, 무엇보다도 그의 ‘트레이드 마크’는 내정보다 외교국방 분야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이른바 “곤봉 외교”라 하여 미국의 국익을 위협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이미 세계 최고 수준에 오른 미국의 국력(그것은 그가 해군차관 시절부터 일관되게 추진해온 국방력, 특히 해군력 강화 덕분이기도 했다)을 앞세워 응징한다는 공세적인 외교정책을 썼다. 약 백 년 전의 먼로주의가 보여준 소극성과는 정반대였는데, 묘하게도 루스벨트는 그 먼로주의를 적당히 왜곡하고 확대 해석해서 “남북아메리카 전체는 아메리카인만이 다스려야 한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본래의 먼로주의가 유럽의 기존 식민지는 건드리지 않았던 반면, 루스벨트식 먼로주의는 적극적으로 유럽 세력을 아메리카에서 내쫓고 아메리카를 사실상 미국만이 지배하는 대륙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띠고 있었다.
그런 “미국식 제국주의”를 달성하기 위해 루스벨트가 가장 필요하다고 여겼고,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사업이 파나마 운하 건설이었다. 남북아메리카를 잇는 이 지협에 운하를 건설하자는 아이디어는 꽤 오래 전부터 있었는데, 16세기에는 거대한 스페인 제국을 다스리던 칼 5세가 이를 검토했으며 19세기 초에는 독일과 영국이 한때 추진했다. 그러다가 1880년에 이미 수에즈 운하를 건설한 프랑스의 레셉스가 콜롬비아(당시는 파나마를 지배하던)와 계약을 맺고 운하를 파기 시작했다. 하지만 설계 오류와 극악의 작업 환경 등으로 지지부진한 채로 머물러 있던 것을, 루스벨트가 가로챌 속셈을 품었던 것이다.
미국으로서는 특히 파나마에 운하를 뚫는 일이 국익을 위해 절실했다. 유럽과 무역을 하려면 멀리 남아메리카 끝까지 내려가서 마젤란 해협을 지나 다시 대서양을 거슬러 올라야 했던 것이, 운하길이 열리면 항행 거리가 몇 배로 단축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먼저 국내에서 제동이 걸렸는데, 남부를 지역기반으로 하는 민주당 등이 운하를 굳이 건설하겠다면 남부에서 보다 가까운 니카라과에 하자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당리당략 때문에 훨씬 긴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일을 용납할 수 없었던 루스벨트는 온갖 선전, 호소, 계략을 동원해 파나마 안을 관철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파나마를 차지하고 있던 콜롬비아가 이리저리 말을 돌리며 루스벨트의 애를 태웠다. 2년이나 걸려 겨우 행정부 사이에 협정을 맺었지만, 이번에는 의회 비준이 하염없이 늦춰지고 있었다. 참을성의 한계를 넘은 루스벨트는 마침내 곤봉을 뽑아들었다. 그렇다고 콜롬비아와 전쟁을 벌인 것은 아니었고, 파나마 지방의 지도자들을 회유, 매수하여 콜롬비아에 반대하는 독립운동을 벌이도록 했다. 그리고 함대를 파견해 콜롬비아의 진압군을 견제했다. 마침내 1903년 11월 18일, 독립한 지 열흘 남짓 된 파나마 정부는 미국과 파나마 운하의 건설과 유지, 보호에 대한 전권을 넘기는 조약을 체결했다.
루스벨트는 자신의 임기 중 벌인 일 중에서 가장 흥미진진했고 보람되었던 일이 파나마 운하 건설이라고 회고했으며, 그것은 루이지애나 매입과 맞먹는 가치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그 운하는 미국의 경제적 번영의 불길에 기름을 부었을 뿐 아니라, 미국이 해상 강대국으로 세계 속에 우뚝 설 수 있도록 했다. 이제 20세기로 접어드는 미국, 이 젊은 나라는 이제 절정기의 청년 같은 힘을 발휘해 20세기를 자신의 세기로 만들어갈 것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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