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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고비아 성과 산티아고 문
그들 역시 스탬프 여백이 없어서 따로 첨부한 내 대학인 순례자여권을 펴보다가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경악했다.
그들의 권고 대로 서북쪽 끝 세고비아 성(Alcazar de Segovia)으로 가서 시계방향으로
한바퀴 돌기로 코스를 정하고 관광객들로 북새통인 긴 골목길을 통과했다.
먼저, 3km의 무라야(Muralla/중세의 성벽)중 온전하게 현존하는 부분을 살펴보았다.
성은 알폰소 8세(Alfonso Vlll)의 기념비가 있는 빅토리아 에우헤니아 여왕 광장(Plaza
de la Reina Victoria Eugenia)을 지나 있다.
천길 절벽 아래에서 에레스마 강(rio Eresma)과 클라모레스 강(rio Clamores)이 V자로
감싸고 있어 천연 해자((垓子/moat)가 된 천혜의 언덕배기에 자리잡았다.
로마시대 목성(木城)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석성의 최초 축성시기는 1122년이지만 현재
의 아름답고 웅장한 성은 수 세기에 걸쳐 증.개축, 보축의 과정을 거쳐 이뤄졌단다.
히메네스(Jimenez) 왕조의 알폰소 6세(Alfonso Vl)로부터 트라스타마라(Trastamara)
왕조의 이사벨 1세(Isabel l)에 이르기 까지.
더구나 현재의 성은 1862년에 대화재로 입은 치명적 손상에서 재건된 모습이란다.
한데, 세고비아 성을 왜 카스티요(Castillo)라 하지 않고 알카사르(Alcazar)라 했을까.
스페인어 '카스티요'와 '알카사르'는 둘 다 성(城)이라는 단어지만 뉘앙스가 다른 점에
주목할 필요가가 있다.
전자가 일반적인 성(castle)을 의미한다면 후자는 어원이 아랍어라는 것과 아랍풍의 성
(이슬람 시대의 성)을 의미하면서도 요새(fortress)의 성격을 지녔음을.
세고비아 성의 존재의의를 함축하고 있다.
스페인의 많은 성처럼 세고비아 성도 이슬람의 성으로 출발했다.
레콘키스타(Reconquista/스페인의 국토회복운동)에 의해 기독교 수중에 들어온 이래
왕궁과 주(州)감옥, 왕립 포병학교, 사관학교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어 온 성이다.
실로, 굴곡과 사연이 많은 성이며 월트 디즈니(Walt Disney)의 신데렐라 성(Cinderella
Castle/미국Florida소재)에 영감을 불어넣은 성으로도 알려졌다.
프랑스의 퐁텐블로(Fontainebleau),베르사유(Versailles),쉬농소(Chenonceau),쇼몽
(Chaumont),상보르(Chambord),피에르퐁(Pierrefonds),독일의 노이슈반슈타인(Neu
schwanstein),바바리아(Bavaria), 폴란드의 모스나(Moszna) 성과 함께.
그러니까, 디즈니의 만화영화 백설공주를 보지 못한 내가 확언할 수는 없으나 세고비아
성이 신데렐라 성을 쌓는데 영감을 주었을 뿐 백설공주 성의 모델이 아님은 분명하다.
영화의 성으로 이 알카사르를 사용했는지 이 성을 모델로 한 세트장인지 나는 모르지만
세고비아를 다녀온 우리나라의 많은 이들이 이 성을 백설공주에 등장하는 성의 모델로
알고 있는 것은 미스테이크(mistake)라는 말이다.
더구나, 동화 백설공주(Schneewittchen)는 모델이 있는 창작품이 아니란다.
옛부터 독일 민중에 구전돼 오는 이야기를 언어학자 그림 형제(Bruder Grimm/독일)가
수집해 예술적으로 표현한 것일 뿐.
우여곡절을 겪으며 걸어온 서북쪽의 광활한 고원이 일목요연한데, 특히 차편으로 그냥
통과한 사마라말라(Zamarramala)의 인력(引力)을 거부할 수 없었다.
코카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 마을을 다녀오지 않고는 어찌 배기겠는가.
위험한 철책 계단 샛길을 타고 내려와 알카사르에서 지하 통로가 나있다는 베라 크루스
교회(Iglesia de la Vera Cruz)를 지나 비탈을 올라갈 때 비로소 청년의 말이 실감났다.
비탈진 좁은 도로를 쏜살처럼 달리는 차량들에 공차증이 도져서 포기했으니까.
귀로에 의외의 수확을 거두었다.
이 문을 통과하지 않고는 산티아고에 갈 수 없었을 '산티아고 문'(Puerta de Santiago)
으로 들어섰으니까.
단지,차로를 피하고 시내 골목들을 지그재그하며 살핀 후 마지막으로 맨 처음 대면했던
아구에둑토 앞으로 가기 위해 들어섰을 뿐인데.
오늘날에는 아소게호광장에서 에레스마 강을 끼고 저지대 차로를 따라서 사마라말라로
가지만 예전에는 산티아고에 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했던 문이다.
그러나, 산티아고 문은 마치 터널공사를 하듯 내부 공사중이며 통행금지판(Cortado el
Paso a Peatones)이 길을 막았다.
그렇다고 되돌아갈 늙은이인가.
이 문을 통과해야만 마드리드 입성도 가능할 것처럼, 위험하기 때문에 가지 말라는데도
막무가내로 컴컴한 터널을 통과했다.
장중하고 견뢰한 로마인
이어서 산 에스테반(San Estevan),산 마르틴(San Martin),산 세바스티안(San Sebas
tian) 등 여러 12c교회와 수도원을 돌아보며 아소게호 광장에 다시 섰다.
석양인데 2시간여 전보다 관광객이 더 불어났다.
수도교(Acueducto)의 인력이다.
카테드랄, 알카사르와 함께 세고비아의 3대 아이콘이라는 아쿠에둑토, 수도교가 홀로
관광객을 끌어모으기에 충분하다 할 정도로 장관인 수로(水路) 다리의 위력이다.
인근인 과다라마 산맥(Sierra de Guadarrama)에서 채석한 25.000여개의 화강암으로
최고높아 28.1m의 아치기둥 166개 위에 958m를 축조한 웅장하고 미려한 고공교다.
수원지(과다라마 산맥의 rio Fuente Fria)로 부터 총 갈이 14.965m의 수로 따라 흘러온
물은 2차의 저수( El Caseron탱크와 Casa de Aguas탑)과정을 거쳐 수도교를 통해서
배수(配水)되었단다.
1984년에 스페인의 국가기념물로 선포되었으며 이듬해(1985년)에는 구 시가지와 함께
UNESCO에 등재된 세계문화유산이다.
놀라운 것은 1c말 ~ 2c초에 완성되었다는 이 수도교는 어떠한 회반죽(mortar)도 없이
돌로만 쌓았는데도 2천여년 세월을 끄떡없이 버틸 만큼 완벽하고 정교하다는 점이다.
그들의 손을 거친 것들은 하나같이 장중(莊重)하고 견뢰(堅牢)하다.
로마인의 우수한 기술력과 예술적 감각에 찬탄하지 않을 수 없다.
통 크고 계획이 원대한 로마인들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서 그들이 지배했던 곳에는 유명한 문화유산들이 산재하고 있는 것 아닐까.
협소한 이탈리아 반도의 도시국가로 안주할 수 없는 로마는 지중해 연안의 여러 민족을
통일해 제국을 형성하고 도로망을 완벽하게 구축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All roads lead to Rome)는 말은 속담 이전의 실제였다.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서 였지만 지금도 편리하게 이용되고 있을만큼 훌륭하다.
속주 주민에게 광범위한 시민권을 주고 민족과 지역을 초월하는 법과 제도로 대제국을
통치한 까닭에 찬란한 문화유산이 범제국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리라.
로마제국은 역사의 한 단원에서 악역 주연을 맡아 멋지게 연기를 해냈다.
콜로세움(Colosseum), 카타콤베(Catacombe)는 그 악역의 하이라이트(highlight)다.
오늘날. 노다지(1급 관광지)가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겠지만 그것들이 없었디면
로마의 연기는 평가절하되었을 것이다.
로마제국의 역사적 존재의의도 없을 것이며, 나아가 로마제국이 없었다면 역사는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을까.
무엇보다, 기독교의 탄생이 불투명해진다.
예수의 처형과 추종자들에 대한 박해가 없었을 것이며, 그랬다면 기독교의 확산이 요원
의 불길처럼 이루어지기는 커녕 종교의 속성상 고사하거나 지지부진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형벌(박해)을 받을 때마다 날로 더 많이 불어난다"고 아테나고라스(Athe
nagoras(아테네 출신으로 알렉산드리아 최초의 기독교 교사)는 말했다.
거창한 상상은 그만두고 당장 내가 여기 이베리아 반도까지 올 일도 없었을 것이다.
백마타고 칼을 휘두르는 무어인의 처단자 산티아고 마타모로스(Santiago Matamoros)
가 없으며, 따라서 사도 야고보의 길들도 있을 리 없으니까.
세고비아에는 세고비아 기타가 없다
켈트족의 땅으로 시작하여 로마시대를 거쳐 이슬람의 지배 아래 있다가 알폰소 6세 때
(1040~1109) 국토회복운동(Reconquista)으로 기독교 수중에 돌아온 세고비아.
지명 'Segovia'도 켈트이베리아어(Celtibero) 'Sego'(승리/victoria)와 'Briga'(市/ciu
dad) 2단어의 합성어 'Segobriga'에서 비롯되었다는 도시.
수도 마드리드에서 102km, 해발 1.002m 고원에 위치해 있으며 카스티아 이 레온 자치
지방의 9개주중 하나로 인구56.000명 남짓되는 세고비아 주의 주도.
크지 않은 시가지를 어두워질 때까지 배회하다가 밤 10시쯤 되어 숙소로 돌아와 사들고
온 빵과 맥주로 식사하며 낮에 승차를 권한 청년에게 다시 감사하는 마음이었다.
그의 도움으로 여유로운 시간을 확보해 많은 것을 보고 느끼게 되었으니까.
이른 아침에 고소를 지으며 세고비아 시내를 벗어났다.
어제 시가지를 배회할 때 세고비아 시내에 세고비아 키타가 없음을 괴이쩍게 생각했을
만큼 악기에 무지했던 늙은이가 스스로 가소로워서.
게다가 클래식 기타의 거장이라는 세고비아(1893~1987)가 더욱 헷갈리게 했다.
그는 스페인 중북부 세고비아에서 거리가 먼 남부 안달루시아 자치지방의 지중해 연안
하엔 주(Jaen)에 속해있는 작지 않은 도시, 월드 체스 토너먼트(chess tournament)로
유명한 리나레스(Linares) 태생이다.
성과 지명이 같다 해서 경주김씨가 경주에만 살고 전주이씨는 전주에만 있는가.
안드레스 세고비아 토레스(Andres Segovia Torres)는 리나레스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조상 누군가가 세고비아 주 출신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세고비아 기타의 브랜드가 지명과는 무관해도 인명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했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명품브랜드(brand)는 대개 장인의 성명 또는 지명에서 나오는데
그도저도 아니라면 이 유명 브랜드의 출처(origin)는 어디인가.
늙은이의 유별난 관심 탓으로 돌리고 걸음을 재촉했다.
아소게호 광장에서 수도교 따라 동진해 CL-601도로를 만나자 세고비아 시와 아디오스
(adios)함과 동시에 멋진 센다(senda)가 반겼다.
차로도 한가한데 넉넉한 인도인데다 N-110국도도 안전하게 횡단하도록 배려하는 등 흠
잡을 데 없는 길을 이 때만은 떠나기 싫었다.
세고비아에서 13km인 라 그란하가 7km라면 마드리드가 이미 2자리수 안에 들어왔으며
마드리드가 86km(이정표)라면 사도 야고보의 길보다 10km쯤 단축되는 차로다.
영어에 무관심한 스페인에도 영어 바람이 불기 시작했는가 구직난이 심해가는가.
집과 말을 판다는 전단(leaflet)은 흔하지만 시골마을에서 영어교습 전단도 종종 보인다.
10년경력 영국태생 원어민 교사가 어린이와 초보자, 성인, 회사원까지 모집한단다.
로블레도 공원(Parque Robledo)마을 게시판에 붙어있으나 별무 관심인지 전화번호가
거의 뜯기지 않고 있다.
얼마 가지 않아서 폰톤 알토 댐(Embalse del Ponton Alto)을 건넜다.
에레스마 강물을 담는 댐 하류에서는 다리를 중심으로 보트놀이와 수영을 즐기고 있다.
6일 전에 카스티아 운하에서 이미 보고 왔을 만큼 더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음을 뜻한다.
라 그란하 데 산 일데폰소 미스터리
곧, 레알 시티오 데 산 일데폰소'. '라 그란하' 마을의 환영을 받았다.(bienvenidos)
세 부속마을을 포함해 인구가 5.700여명인 이 큰 마을은 세고비아 주의 209개 지자체중
하나인데 헷갈리게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레알 시티오 데 산 일데폰소'(Real Sitio de San Ildefonso),'라 그란하 데 산 일데폰소'
(La Granja), '산 일데폰소' 또는 '라 그란하' 등으로.
레콘키스타를 완성하고 스페인의 황금기를 창출한 카스티야의 여왕 이사벨1세(Isabel
I)가 수도사들의 자급자족을 위해 하사한 경작지라 해서 라 그란하(La Granja/농장)라
했다는 마을이다.
아마도,왕위계승 다툼이 치열한 와중에 그녀가 등극하던 1474년 당시 그녀를 지지하는
세고비아에 머물고 있을 때 였을 것으로 추측해 본다.
(세비야와 세고비아를 혼동하여 세고비아를 왕국의 수도로 아는 이들이 있는데 세비아
와 달리 세고비아는 어느 왕국에서도 수도가 된 적이 없다)
한데, 여느 마을과 다른 화려한 건물들에서 예사롭지 않은 근세사의 한면이 읽혀진다.
거창한 건물은 왕 펠리페 5세(Felipe V /1683~1746)가 왕실의 하계 별장으로 지었다는
'라 그란하 왕궁'이며 마을 이름 레알 시티오가 바로 왕실별장라는 뜻이란다.
이 왕궁은 스페인의 베르사유 궁전(Chateau de Versailles)으로 불리는데 실제로 분수
(噴水)가 있는 거대한 정원을 비롯해 베르사유 궁을 본떠서 지었단다.
주목해야 할 점은 스페인의 왕 펠리페 5세는 프랑스 부르봉 왕조 루이14세(Luis XlV)의
손자로 베르사유 궁에서 태어난 앙주 공작 필립(Duc d'Anjou Philippe)이라는 것.
그는 또한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의 마지막 왕 카를로스 2세(Carlos II)의 외종손(루이
14세의 왕비가 된 이복 누이의 손자)이다.
카를로스2세가 후사(後嗣) 없이 죽음으로서 왕위에 오르기는 했지만 이로 인해 유럽은
스페인의 왕위계승 전쟁(1701~1714)을 치뤄야 했다.
그는 어렵사리 왕이 되었음에도 석연치않게 일찍 왕세자(Luis I)에게 양위하고(1724년)
여기 그란하 궁에 기거했다.
루이스1세가 겨우 7개월 반만에 천연두로 사망함으로서 복위할 때까지 섭정 비슷하게
관여했기 때문에 그란하 궁이 한때나마 권력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단다.
그는 1746년 사망할 때까지 22년을 더 왕좌에 있는 동안 프랑스를 떠날 때 조부인 루이
14세가 당부한 말을 기억했을 것이다.
"훌륭한 스페인인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프랑스인으로 태어난 사실을 잊어서도 안된다.
그리고 두 나라 간의 유대관계를 잘 유지해야 할 것"이라는 당부를.
아무튼, 스페인의 부르봉 왕조를 연 펠리페 5세때 친불모드(mode)로 돌아선 것은 우연
이 아닐 것이며 결국 스페인 독립전쟁(Guerra de la Independencia Espanola/1808
~1814/반도전쟁Guerra peninsular)이라는 악동을 잉태하게 되었다.
근대적 의미의 자유 헌법이라는 1812년의 헌법(Constitucion espanola de 1812/일명
Cadiz헌법)을 거부한 페르난도7세(Fernando VII/1814~1833)가 1833년에 사망한다.
왕비 마리아 크리스티나(Maria Cristina)는 카를로스 전쟁이라는 왕위계승전쟁을 치루
면서 왕위에 오른 딸 이사벨2세(Isabel II/1833~1868)의 전권 섭정(regente)이 된다.
이 기간에(1836년 8월 12일) 이 마을 라 그란하에서 자유파 지도자들이 1812년 헌법을
회복하는 칙령에 서명하도록 섭정인 태후 마리아 크리스티나를 압박한다.
이른바 '라 그란하 폭동'인데 여러 개의 이름을 가지게 된 것도, 이사벨 1세여왕의 하사
라는 것도, 펠리페 5세의 등극과 조기 선위 및 복위와 관련된 모든 것도, 마리아 크리스
티나의 섭정과 폭동도 모두 미스터리 천지다.
전생에 어떤 인연이었을까
안내판 따라 관광안내소에 들렀는데 다행히도 시에스타 직전이었다.
한국 늙은이의 스페인어가 단어 몇개의 나열에 불과한데도 알아서 챙겨주고 안내하는
유능한 관광안내 직원들에 늘 고마운 마음인데 이 마을 직원들은 더욱 그러했다.
이해못하는 것은 내 탓인데도 자기 탓인 듯 더 유능한 상사를 모셔와 설명하게 하다니.
고백컨대, 아무리 설명해도 내가 이해하는 부분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으므로 받은 안내
책자들이 길라잡이가 되고 있다.
오늘 마감하려는 발사인까지만 집중해서 안내받았다.
사도 야고보의 길들 중에 가장 높은 과다라마 산맥의 1.796m고지를 넘어서 알베르게가
있는 세르세디야 까지는 13km 이상 되기 때문에 다음날 아침에 시작하려 한 것.
폰톤 알토 댐에서 라 그란하를 거치지 않고 댐 하류 에레스마 강을 따라서 발사인으로
직행하는 길이 있으나 이미 지나왔으므로 CL-601도로를 따라 발사인으로 갔다.
시간 여유가 있다니까 운치있는 우회로 라며 가르쳐 준 길을 따랐더라면 댐까지 되돌아
갔을뻔 했는데 길을 잘못 든 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라 그란하에서 발사인까지 4.5km가 왜 그리도 가깝게 느껴졌을까.
발사인에 도착했으면서도 발사인은 아직 한참 더 가야 할 것 처럼.
차로지만 칙칙한 숲을 끼고 가며 가끔 숲길이라 지루한 줄 모르고 내(arroyo/川) 2개를
건너 라 프라데라 데 나발오르노(La Pradera de Navalhorno) 마을에 도착했다.
도로변 식당에 들러 발사인이 얼마나 남았느냐는 물음에 여기가 발사인이란다.
마을이름이 다른 점에 집착해 납득을 못한 늙은이가 어쩌면 신경질적 반응을 보였던가.
식당의 두 사람은 인내심을 발휘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나를 마침내 납득시켰다.
CL-601도로를 두고 좌우 마을이름이 다를 뿐이라는 것.
어이없게도 발사인에서 발사인을 묻는 코미디가 오스탈 겸 식당 엘 토레온(El Torreon)
주인 후스토 에레데로 산스(Justo Heredero Sanz) 부자(父子)와 인연을 맺어주었다.
세고비아에서 18km 밖에 오지 않았다 해도 먹은 것이 아직 없으므로 당연히 시장했다.
무얼 먹겠느냐는 주문에 아무 거나 달라 했다.
고백하건대 이때껏(지금도) 나는 스페인 메뉴에 대해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었다.
2달 반이 되어가지만 식당에서 폼잡고 식사한 회수가 2자리 수에 들지 못하니까.
파스타와 구은영계(roasted chicken)가 맛이 좋고 양도 많아 모처럼 포식한 후 식대를
지불하려는 내게 젊은 아들은 '0 euro'라고 쓴 백지빌(bill)을 내밀었다.
어리둥절해진 내게 그는 "아버지의 명령이라 받을 수 없다"는 것.
혹여, 동양 늙은이가 가련해 보였기 때문었을까.
고마우면서도 언짢았다.
저만치에 있던 아버지 산스가 마뜩잖은 내 표정을 읽었는지 내게 와서 해명을 했다.
자기 호의를 그냥 받아 달라며 이어서 하는 말을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해도 시에테 이
세텐타(77세) 노인에게 드리는 경의의 뜻도 포함되어 있다는 말인 듯 했다.
디카를 꺼냈더니 아버지는 너른 식당 벽에 걸린 2개의 메달을 가지고 와서 부자가 각기
하나씩 목에 걸고 나를 가운데에 세운 후 직원을 불렀다.
요리 경연대회에서 1등한 메달이란다.
포옹으로 작별인사를 나눈 후 CL-601도로에서 1km쯤 서쪽지점, 과다라마 산맥 아래에
고즈넉이 앉아있는 발사인 마을로 갔다.
지자체 라 그란하의 부속마을로 인구 220명 미만의 조용한 산간마을이다.
마을 한가운데 낡은 집을 개수하는 현장에서 알베르게를 물었다.
도로변(CL-601)에 있는데 왜 여기까지 들어왔느냐고 핀잔(?)을 주는 한 중년에게 나는
그럴 리 없다, 당신이 잘못 알고 있는 것 아니냐고 대들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의 말이 사실이라면 발사인에서 일박하겠노라고 분명하게 말한 내게
식당의 산스가 왜 알려주지 않았으며 안(內)마을로 가도록 왜 내버려 두었겠는가.
중년은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들었는가.
그는 자기 말을 불신하는 이방 늙은이인데도 화를 내기는 커녕 데려다 주겠다며 자기의
트럭에 나를 태우고 도로로 나와서 한 2층 건물 앞에 내려놓고 갔다.
그의 말대로 과연 알베르게 간판이 붙어있고 전화번호도 안내 책자의 번호와 일치했다.
업은 아이 삼년 찾는 날인가.
발사인에서 발사인을 묻고, 발사인 알베르게를 산스의 식당에서 100m 미만 옆에 두고
멀리 떨어진 마을 안을 뒤지고 다녔으니.
한데, 한스 부자는 왜 내게 말하지 않았을까.
마드리드 길에서 거의 모든 알베르게의 문이 잠겨있는데 여기라고 예외가 되겠는가.
산스에게 거듭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한 초로남(初老男)의 차를 세우고 알베르게 문에
붙어있는 안내대로 전화해줄 것을 부탁했다.
응답이 없는데도 그는 인내심을 발휘해 계속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자기 길을 갔다.
알베르게 관리인은 무슨 사연이 있기에 이처럼 무성의, 무책임할까.
결국, 산스 부자까지 나서서 백방으로 애를 썼으나 허사로 끝이났다.
산스는 자기 오스탈에 방이 많으니 걱정 말라지만 한사코 돈을 받지 않을 것이 뻔하니
그럴 수 없고 이미 석양인데 알베르게 마을 세르세디야까지 걷는 것은 무모한 짓이다.
택시 이용만이 출구인 진퇴유곡의 절박한 처지인데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는 산스.
그는 택시를 부르는 대신 식당 문을 닫은 후 나를 태우고 차를 몰았다.
사도 야고보의 마드리드 길은 13km지만 꼬불꾸불 차로로 푸엔프리아 고개마루(Puerto
de Fuenfria)를 넘어 산속 깊이 있는 세르세디야 알베르게까지는 20km가 넘는 거리다.
인근 마을이라 해도 지방이 다른 마드리드 땅이며 그도 초행인 듯 묻고물어 찾아갔다.
나한테 왜 이리 극진하냐니까 왠지 그리 하고 싶은 것 뿐이라는 말을 남기고 왕복 100리
길을 돌아간 이베리아 반도의 그와 한반도의 이 늙은이가 전생에 어떤 인연이었기에?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