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살롬의 군사회의(사무엘 하 17:1-14) 압살롬은 행정도시인 예루살렘을 무혈로 점령하고 통치권과 다윗의 왕관까지 차지했다. 그의 부친은 유대 지파만이 있는 헤브론에서 7년동안 선한 정치를 하다가 압살롬에게 갑자기 붕괴되었다. 그의 나라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건설되었다. 때가 되면 시행될 것이기 때문에 그 때를 참고 기다렸다. 그러나 청년 압살롬은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동분서주 서두를 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가 스스로 망하기를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의 왕위를 뺏고도 만족지 않아 그의 생명까지 뺏으려고 했다. 그것은 그의 나라가 죄악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난폭하게만 모든 일을 처리했다. 선한 자기 아버지의 생명을 노리는 압살롬 같은 그런 비열한 탕아는 이상할 것 없다. 세상에는 여기 저기에 괴물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모든 국민의 존경 속에 번영을 누리던 다윗의 추종자들은 압살롬의 모략 중에서도 다윗만을 추종했으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조상들은 종종 모세를 배반했었다. 좋은 부모나 좋은 왕은 부양자들에 의하여 소란을 겪으면서도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지 않는 법이다.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을 처단해야한다는 것이 그들의 만장일치로 가결한 결론이다. 아무 것도 그에게서 장점이라고 할 만한 것은 찾을 길이 없었다. 오히려 무엇 때문에 다윗의 왕관을 몰수해야하는 것이냐는 의문을 일으킬 뿐이다. 아무도 감히 그를 추방시킴이 마땅하다는 것을 제안할 자도 없었고 그의 왕위를 속히 물러나도록 권면장을 보낼 만한 사람도 없었다. 그들이 그렇게 하기는 어렵지 않다고 생각되었을지도 모른다. 압살롬이 죄 때문에 망명생활한지 얼마되지도 않아서 자기 아버지의 생명을 찾아 애쓰는 본능적 애정을 완전히 저버린 태도는 다윗과 차이가 너무 크다. 다윗은 죽어도 마땅한 자기 자신이 망명신세가 된 것으로 만족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죽어 마땅한 몸이 자기 아들의 난을 피하여 망명생활하게 되는 정도를 만족하게 생각했으며 오히려 아들의 신변을 위해 울고 그를 보고 싶어했다. 그러나 배도자 압살롬은 자신이 저지른 죄로 인하여 도망다닌지 얼마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본능적인 애정을 말살하고 자기 아버지의 생명을 노렸다. 지금까지의 논거는 다윗의 쇠퇴에 대한 것뿐이었지만 이제부터는 어째서 그가 쇠퇴해야만 했던가를 생각해 보자. Ⅰ. 아히도벨은 자기가 군대를 일으켜 오늘밤 당장 다윗을 죽이고 그의 병사들을 흩어버리도록 하면 그를 지지하던 모든 백성이 압살롬에게로 돌아올 것이며 다윗과 사울의 집 사이에 있었던 전쟁처럼 그렇게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에 품었던 술책으로 압살롬에게 조언했다. "무리의 돌아오기는 왕이 찾는 이 사람에게 달렸음이라" (3절). 다윗의 생명을 노리는 아히도벨의 계획을 압살롬이 명령만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아히도벨은 그를 정복하게 될 것이다. 즉 "목자를 죽이면 양은 흩어지고" 이리의 밥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간단히 전쟁을 도발하여 오직 왕의 목숨만 처치하면 짧은 시간에 즉시 그가 몰락할 것이라고 획책했다. 이런 방법을 쓰는 것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다윗에게 다시 없을 것이다. 그는 그의 말대로 곤고하고 약해져서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압살롬의 반란의 첫 경종이 될 것이다. 아마도 그는 한밤중에 그에게 큰 혼란을 일으킬 약간의 군대로 치열한 공격을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임금만 처치하기는 아주 쉬울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일은 간단히 해결된다. 모든 백성이 그에게 돌아오게 될 것이고 평화스럽게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평화는 약탈자들에 의하여 어떻게 파괴되었나를 생각해 보자. 악마의 궁전은 강자가 무장하고 있는 동안은 평화스러운 것이다. 다윗의 자손을 대적했던 제이의 아히도벨 가야바의 음모와 이 사건을 비교해 보라. 그들의 계획은 예수를 죽이려 했던 것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요 11:5). "자 이 상속자를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마 21:38). 그러나 이런 모사들은 둘다 어리석은 것이었다. 그러나 빛의 자녀들은 이 세상의 자녀들로부터 지식을 얻었다. 우리가 할 일을 깨달은 것은 신속히 하는 것과 전력을 다하는 것이다. 특별히 영적 싸움에서 때를 잃지 않기 위해서 단호하고도 신속하게 하도록 신중을 꽤해야 한다. 왕을 거스리는 음모는 신중히 생각되었다. 철면피 악한 압살롬은 곧 왕을 쳤다. "내가 왕만 치겠나이다." 이 말에 모두 동의했다(4절). 이런 계략으로 자신의 명예를 확보하려 했으나 놀라리만큼 자극은 주지도 못했고 오히려 야만스럽고 괴상한 결론을 초래했던 것이다. 선한 일이 어찌 야심이 불타는 자에게 있을 수 있겠는가? Ⅱ. 후새는 다윗을 급하게 추적하는 것은 불가한 일이라고 조언했다. 그를 이길 수 있는 병력을 양성할 기회를 가져야 하며 그를 놀라게 할 만한 인원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후새는 이 조언으로 다윗을 도와 준 것이다. 자기의 정보가 그에게 전달될 시간이 필요했고 또 다윗이 병력을 준비할 기회와 요르단 시내를 건너 이동할 기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보다 더 다윗에게 유익한 처사는 없었다. 후새는 압살롬이 분별없이 하는 동안 다윗이 세력을 구축하도록 조심스럽게 조언했다. 1. 압살롬은 후새를 공석에 초대하여 조언을 기다렸다.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이 아히도벨의 말에 모두 찬성했으나 압살롬의 마음을 하나님이 다스려서 후새의 제안이 있을 때까지 이 일에 결정을 내리지 못하게 하셨다. "후새를 부르라. 그의 말도 듣자" (5절). 두 사람의 생각은 한 사람의 생각보다 낫다고 그는 생각했다. 하나님은 음모자들의 재치 속에 하나님의 지혜를 불어넣어 주었다. 이에 관해 풀선생의 기록을 읽어 보라. 2. 후새의 말 중에는 그럴 듯이 이유를 제시해 주었다. (1) 그는 아히도벨의 제안이 위험을 자초하는 것이라고 이를 반박했다. 그의 주장은 아히도벨의 주장과 전혀 다른 것이었고 신중한 것이었다. 아히도벨의 계략은 언제나 환영을 받고 있다는 사실도 후새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후새는 아이성을 칠 때 여호수아의 군대가 패배를 당한 것을 상기하면서(수 7:4 참조) 이렇게 적은 인원을 가지고 성급히 출격하는 것은 너무도 위험한 일이며 적당치 않은 처사라도 아히도벨의 제안에 찬동하는 자들을 설득시켰다. 적을 너무 무시하는 사람은 언제나 패배하는 것이다. 후새의 제안이 어째서 그럴듯하게 느껴졌나 생각해 보자. [1] 그는 다윗이 훌륭한 전략가라는 것을 인식시켰다. 압살롬의 군대보다 용맹을 떨치는 지도력과 많은 전투 경험이 있음을 상기시켰다. "당신의 부친은 용사라" (8절). "병법에 익은 사람이라." 그는 아히도벨의 말처럼 약하고 두려워 떠는 존재가 아니라고 말했다.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쉽게 물러난 것은 결코 그가 비겁해서가 아니라 신중히 생각하는 바 있어 그런 것이라고 말했다. [2] 그의 추종자는 많지는 않지만 모두 "용사라" (8절). "병법에 익은 사람" (10)이요, 전술에 능한 용감한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옷을 찢으며 말한 아히도벨은 아마도 자신을 다윗과 동등한 위치로 생각하고 자기들 가운데 한 사람이 다윗의 군대 천을 이겨낼 것처럼 생각했던 것 같다. [3] 사람들은 압살롬에 대해 적개심이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재난을 일으킨 장본인이 그였기 때문이다. 치열한 격투가 생기고 마음에 맞지도 않는 그들의 사상을 따라야 하니 그들의 용기나 분노 같은 것은 어린애 같은 압살롬은 감히 다윗의 무리 앞에 설 수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후새는 그들을 대신해서 아히도벨이 다윗을 우습게 여긴 것처럼 그는 다윗을 무시할 수 없는 존재라고 말했던 것이다. [4] 후새는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어떤 함정에서 잠복하고 있을 것이라고 암시해 주었다. 그들이 잠복한 것을 알지 못하고 가다가 적은 무리라도 패하면 남은 자들이 모두 낙심할 것이며 또 기름 부음 받은 자와 그들의 마음에 있는 자를 해롭게 했다고 비난할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되면 압살롬의 무리는 모두 살인자라고 소문이 날 것이며 적을 돕는 일이 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아히도벨의 격노한 마음을 녹였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취급하기가 아히도벨이 생각한 것처럼 쉽지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2) 후새는 자기 생각을 전했다. [1] 그는 실제로는 돕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나 압살롬의 거짓된 변덕스런 교만을 만족시켜 주려고 했던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 사람을 국민병으로 징집하라고 조언했다. 모든 지파가 다 그를 위해 있고 그의 명령 아래 있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그를 기쁘게 하려고 했다. 둘째로 그는 압살롬에게 자기 부하들이 싸우고 있는 전쟁터에 참여하도록 권면했다. 그것은 아히도벨이 어떤 계략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여주려고 했다. 거만한 사람을 배도하기란 아주 쉬운 것이다. 교만하도록 추켜세우면 한없이 기뻐한다. [2] 그는 결국 아무런 위험성도 없는 것처럼 성공의 길을 찾도록 권유했다. 만약 다윗을 찾아내면 미리 약속한 군인들이 잠복하고 있다가 일어나 그를 처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로 만일 그들이 들에서 땅에 이슬이 내림같이 매복했다가(12절) 아히도벨의 계략대로 왕만 죽인다면 압살롬이 매우 기뻐할 것이다. 그래서 후새는 그의 교만과 분계심을 달래려고 했다. 둘째로 만일 저가 어느 성에서 포로가 된다면 밧줄로 그 성을 강으로 끌어올려 돌 하나도 보이지 않게 하라고 불가능한 이상한 암시를 환상적인 것으로 제안했다. (3) 이런 술책으로 인해서 후새는 압살롬의 찬동을 얻을 뿐 아니라 군사 회의에서 만장일치의 승인을 얻었다. 후새의 모략은 아히도벨의 모략보다 낫다(14절)고 인정을 받았다.[1] 사람들이 행하는 모략들이 얼마나 기궤한 것들인가. 만약 후새가 거기 참석하지 못했었더라면 아히도벨의 음모가 실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배후 역사하심으로 그들의 생각을 제압할 수 있는 그를 참여케 했다. 그가 말한 것은 모두가 다윗이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었다. 음모자들은 흔히 생각없이 어리석음을 말할 때가 있다. [2]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진 것이다. 후새의 명석한 정책이 성공한 것은 하나님의 배후 역사였다. 아히도벨의 좋은 음모가 실패로 돌아가게 하나님이 조정하셨다. 비록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모르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도록 모든 사람들이 마음을 강물처럼 바꾸어 버렸다. 후새는 하나님 편에 서서 부정적인 결정을 내리는 자들을 설복시켰다. 하나님은 기름부은 자를 대적하려는 인간들의 계획을 보시고 웃으신다. ●다윗에게 전해진 정보(사무엘 하 17:15-21) 여기서 다윗의 적도들이 후새의 모략을 따라 승리감에 기뻐하면서 약속된 장소에서 만나 그의 모략대로 수행하려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소집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여기서 압살롬의 계획을 시행하려는 것을 미리 다윗에게 알리려는 다윗의 친구들의 모략을 발견할 수 있다. 후새는 군사회의에서 결정된 것을 제사장들에게 알려 주었다(15절). 그러나 아직은 아히도벨의 모략이 시행될 것인지는 확실치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최선을 다해서 알리지 않으면 질투심이 많은 아히도벨이 다윗왕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을 죽일 것이기 때문이었다(16절). 후새가 모략회의에 소환되었을 때 벌써 그들은 결론을 지어 놓았었다(5절). 그러나 후새는 그들의 마음을 바꾸어 놓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것은 악인들을 대적하시는 하나님의 선의였으며 파괴자들로부터 선한 이들을 지키시려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였다. 압살롬은 예루살렘 거리를 삼엄하게 지키게 했지만 다윗에게 필요한 정보는 전달되었다. 1. 정보를 제공하기로 되었던 젊은 제사장 아히마하스와 요나단은 "정보의 샘" 이라고 불리우는 에느로겔 성을 가까스로 벗어나왔다. 물론 이 두 신임받은 제사장들이 그 성을 떠났다는 것은 불길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2. 정보는 한 젊은 여인에 의해서 다윗에게 전달되었다. 그녀는 우물 속에서 그들을 감추어 주었다(17절). 만일 그 여자가 입을 열어 이 비밀을 말했다면 잘못될 우려가 있었다. 자칫하면 큰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천진한 소녀를 들어 좋은 제보자가 되게 하여 명석한 두뇌를 가진 음모자들의 모략을 어리석게 만들었다. 3. 그러나 압살롬의 야경 첩자들에 의해 그들은 발각되었다. 그래서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여차여차히 모략을 베풀었다는 정보가 도로 압살롬에게로 옮겨졌다. "한 소년이 저희를 보고 압살롬에게 고한지라" (18절). 4. 그들은 이미 자기들이 발각되었음을 알아 차리고 바후림에 있는 친구집으로 피신을 했다. 그곳은 다윗이 망명시 잠깐 휴식을 취했던 곳이다(16:14 참조). 그들은 다행히 거기서 우물 속에 숨어있었다. 여름이지만 마침 그 우물은 건조해 있었다(13절). 그 여주인은 태연스럽게 우물 뚜껑을 덮고 그 위에 곡식을 널었다. 그래서 추격하던 이들이 그곳에 우물이 있는 것도 모르고 열어 보지도 않았다(19절). 이 여인은 우리 보기에 매우 잘한 것 같지만 거짓말로 그들을 숨겨 주었다고 해서 의롭게 인정할 수는 없다(20절). 우리는 종종 좋은 일을 위해서 악을 저지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를 당하게 된다. 그렇지만 우리는 선을 위해 악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여기 이 여인은 그들을 보호했고 압살롬에게로 추격자들을 공수로 돌아가게 했다. 압살롬은 사울이 다윗을 잡으려고 아히멜렉에게 친절하게 대한 것처럼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은 재난에서 모면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그를 억제시키셨다. 그렇게 보호하시기 때문에 그들은 다윗에게 좋은 정보를 제공할 수가 있었다(21절). 그의 친구들의 충언으로 그들이 머물고 있는 곳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요단을 속히 건넜다. 그가 42편 내지 43편의 시편을 기록한 것은 요단을 건널 때 예루살렘을 그리워하는 시였다고 어떤 이들은 말한다(시 42:6 참조). ●요단을 건너 도망감(사무엘 하 17:22-29) Ⅰ. 다윗과 그의 군사들이 요단을 건너는 것은 예루살렘에 있는 그의 친구들의 정보 제공에 의한 것이었다(22절).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과 다윗은 종종 왕래한 바 있던 나루터에서 밤에 몰래 건너갔다. 한 사람도 요단을 건너지 못한 자 없었다. 그의 재난은 대단히 어려운 것 중에 하나이지만 아파서 남거나 두려워서 지쳐서 뒤에 남은 자가 하나도 없었다. 환란날에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을 하나라도 잃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 메시야와 같이 다윗이 그런 보호를 받았다. 그들이 요단을 무사히 건넜기 때문에 그는 암몬 사람들의 성읍 라바로부터 멀지 않은 마하나임을 향해 수마일을 행진했다. 마하나임은 가드 지파에 속한 레위 사람들의 성읍이었다. 이 성읍은 이스보셋이 행정도시로 삼았던 성읍이다(2:8 참조). 다윗은 이 성을 본부로 삼았다(24절). 그는 여기서 반역자들과 대치할 군사를 훈련하고 그들에게 친절한 환영회를 열었다. Ⅱ. 아히도벨의 죽음(23절). 그는 자살을 했다. 자기 모략이 좌절된 것을 괴롭게 생각하고 자살했다. 1. 그는 자기가 가장 훌륭한 정책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장 지혜롭다는 명성을 잃어버린 모욕을 참을 수 없었다. 그의 판단력은 언제나 회의 장소를 움직이곤 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의 의견보다 다른 이의 의견이 훨씬 좋고 현명한 의견이었다. 그의 교만한 마음은 이런 모욕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모욕감이 부풀면 부풀수록 분개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모든 사람들은 그를 현명한 사람으로 인식했고 자기도 오직 자기만이 현명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기의 지혜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수하는 것은 자기가 죽으면 함께 지혜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는 아히도벨 같은 지혜자는 존재할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원한을 그들에게 알리려고 했다. 가장 무서운 적은 자기가 가장 잘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불행한 것 중에 가장 불행한 것은 모욕을 참지 못하는 것이다. 모욕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겸손한 사람의 잠을 깨우려는 것이 아니라 교만한 사람의 마음을 깨우치는 것이다. 2. 그는 스스로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생명을 끊었다. 그는 자기의 모략이 채택되지 않으면 압살롬이 분명코 실패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압살롬에게 그의 부친과 처첩과 동침하도록 조언한 큰 죄를 범한 장본인이 자기임이 드러날 것이 두려웠다. 수치감과 공포감을 막기 위해 자신을 지혜있는 사람이라는 평판대로 정당화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자살행위는 자기가 어리석은 자라는 것을 증거하고 말았다. 세상에는 자살자보다 더 어리석은 자는 없다. 생각해 보자. 어째서 그는 자신을 가해하려고 고의로 자기 성으로 돌아가 자기 집에서 생각할 시간과 여유를 가지고도 죽었는가 이상하다. 그는 우선 가정에 질서를 세우고 자신이 지혜있는 사람인 것을 이해해 주기를, 또한 추억해 주기를 바랐다. 그는 자기의 교만한 마음을 자르지 않고 자기 생명을 잘랐다. (1) 수치심은 지혜자에게 많이 있다. 정책가로 유명한 그는 어리석음이 누구보다도 풍성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혜있는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치 말라. 미련한 자도 죽고 지혜있는 자도 죽는다. (2) 하나님의 의를 실천하기를 기뻐하라. 악인이 함정을 팔 동안 자기가 판 함정에 스스로 빠지느니라(시 7:15, 16 참조). (3) 구하는 자에게는 응답하시고 정직한 사람에게는 적군의 손을 통해서도 도와주신다. 다윗은 여기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여호와여 원컨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15:31)라고 기도한 것이 응답된 것이다. 라이트푸드 박사는 시편 55편은 아히도벨이 자신을 대적하려는 음모를 가지고 있을 때 기록한 것이라고 추측했다. 아히도벨은 다윗에 대해 불만자였다(시 55:13 참조). "나의 동료, 나의 동무요, 나의 친우로다." 이렇게 만일 그가 기도했다면 즉시 응답을 받았을 것이다(시 55:15 참조). "사망이 홀연히 저에게 임하여 산채로 음부에 내려갈지어다." 그는 아히도벨이 죽기를 원했다. 세상에서 오래 사는 것만이 보람으로 생각하는 세상 사람들처럼 자기를 괴롭히는 아히도벨의 멸망을 원했다. 그는 압살롬의 수족이였고 다윗에게 치명적인 모략을 제공하는 자였다. 그래서 그는 그가 숨이 멎고 목이 끊어지기를 원했다. 언제나 자살한 시체는 불명예스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그것은 아히도벨이 영예스럽게 조상의 장지에 매장되었다. 물론 그는 당나귀 장례보다 나은 장례가 될 수 없는 천한 죽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치스러운 장례를 했다(전 8:10 참조). Ⅲ. 압살롬은 자기 아버지 다윗을 추격했다. 그는 후새의 모략대로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을 모으고 자신이 그들 선두에 서서 요단을 건넜다(24절). 그는 다윗이 자기가 세운 나라에서 쫓겨난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를 세상에서 완전히 쫓아 버리려고 뒤를 쫓고 있었다. 다윗과 싸우기 위해 그는 "길르앗 땅에 진치니라" (26절). 압살롬은 아마사를 군장으로 삼았다(25절). 아마사는 이스마엘 사람 에델의 아들이다. 그의 종교적인 명칭은 이드라이지만 여기서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했다. 아마 그는 다윗집안 가까운 친척과 결혼하고 개종했기 때문일 것이다. 국가에 대한 그의 중립적인 태도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이라 호칭한 것 같다(대상 2:17 참조). 그의 부인 즉 아마사의 어머니는 아비가일이며 다윗의 누이이다. 그의 다른 누이 스루야는 요압의 어머니다(대상 2:16 참조). 요압과 다윗과의 관계는 아마샤와 다윗과 같은 친척이었다. 그가 아버지 다윗을 대적하기 위해 무장할 때 가문의 영예를 위해 압살롬은 아마샤를 그의 군대의 총지휘자로 삼았다. 이새를 여기서는 나하스라 부른 것은 많은 사람이 두 개의 이름을 가졌기 때문인지 혹은 그의 부인의 이름인지도 모른다. Ⅳ. 다윗의 친구들이 먼 곳에서 서로 만났다. 암몬 족속에 속한 젊은 형제 소비도 그에게 친절했다(27절). 그의 형제 하눈이 다윗의 특사들에게 행한 경멸을 증오했던 것 같다. 그는 다윗의 총애를 받았으며 그의 보상을 지금 받는 것이었다. 자신들의 번영이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떤 때가 되면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고 만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자비를 베푼 자에게 자비함을 받게 되고 남을 기쁘게 한 자가 기쁨을 얻게 된다. 그래서 선한 사람은 이런 이유가 있기 때문에 기회만 있으면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려고 하는 것이다. 아미엘의 아들 마길은 다윗이 망명을 마칠 때까지 므비보셋을 지켰다(9:4 참조). 마길은 은혜 입은 사람에게 은혜를 갚았다. 그는 다윗의 재난시 그를 돕는 후원자였던 것 같다. 바실레도 다윗과 그의 군대를 돕는 열성자로서 그들이 오랜 행군에 지쳤음을 보고 자기집 가구, 침상과 대야, 질그릇을 가져왔다(28, 29절). 다윗은 그들에게 기구를 제공하고 음식을 공급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다윗왕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스스로 의무를 느껴 가져왔다. 그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왕이 곤경에 처한 것을 애도하여 그의 가지고 있는 것 모두를 가져다가 최선으로 도왔다. 우리는 여기서 관대한 마음과 아끼지 않는 후한 마음을 배워야겠다. 우리의 최선을 다해 고난당하는 이와 슬픔 중에 있는 이를 도와야 하겠다. 하나님은 절망 중에 있는 사람을 위험으로부터 안전한 곳으로 그의 백성을 인도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
●압살롬의 군사회의(사무엘 하 17:1-14)
압살롬은 행정도시인 예루살렘을 무혈로 점령하고 통치권과 다윗의 왕관까지 차지했다. 그의 부친은 유대 지파만이 있는 헤브론에서 7년동안 선한 정치를 하다가 압살롬에게 갑자기 붕괴되었다. 그의 나라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건설되었다. 때가 되면 시행될 것이기 때문에 그 때를 참고 기다렸다. 그러나 청년 압살롬은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동분서주 서두를 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가 스스로 망하기를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의 왕위를 뺏고도 만족지 않아 그의 생명까지 뺏으려고 했다. 그것은 그의 나라가 죄악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난폭하게만 모든 일을 처리했다. 선한 자기 아버지의 생명을 노리는 압살롬 같은 그런 비열한 탕아는 이상할 것 없다. 세상에는 여기 저기에 괴물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모든 국민의 존경 속에 번영을 누리던 다윗의 추종자들은 압살롬의 모략 중에서도 다윗만을 추종했으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조상들은 종종 모세를 배반했었다. 좋은 부모나 좋은 왕은 부양자들에 의하여 소란을 겪으면서도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지 않는 법이다.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을 처단해야한다는 것이 그들의 만장일치로 가결한 결론이다. 아무 것도 그에게서 장점이라고 할 만한 것은 찾을 길이 없었다. 오히려 무엇 때문에 다윗의 왕관을 몰수해야하는 것이냐는 의문을 일으킬 뿐이다. 아무도 감히 그를 추방시킴이 마땅하다는 것을 제안할 자도 없었고 그의 왕위를 속히 물러나도록 권면장을 보낼 만한 사람도 없었다. 그들이 그렇게 하기는 어렵지 않다고 생각되었을지도 모른다. 압살롬이 죄 때문에 망명생활한지 얼마되지도 않아서 자기 아버지의 생명을 찾아 애쓰는 본능적 애정을 완전히 저버린 태도는 다윗과 차이가 너무 크다. 다윗은 죽어도 마땅한 자기 자신이 망명신세가 된 것으로 만족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죽어 마땅한 몸이 자기 아들의 난을 피하여 망명생활하게 되는 정도를 만족하게 생각했으며 오히려 아들의 신변을 위해 울고 그를 보고 싶어했다. 그러나 배도자 압살롬은 자신이 저지른 죄로 인하여 도망다닌지 얼마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본능적인 애정을 말살하고 자기 아버지의 생명을 노렸다. 지금까지의 논거는 다윗의 쇠퇴에 대한 것뿐이었지만 이제부터는 어째서 그가 쇠퇴해야만 했던가를 생각해 보자.
Ⅰ. 아히도벨은 자기가 군대를 일으켜 오늘밤 당장 다윗을 죽이고 그의 병사들을 흩어버리도록 하면 그를 지지하던 모든 백성이 압살롬에게로 돌아올 것이며 다윗과 사울의 집 사이에 있었던 전쟁처럼 그렇게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에 품었던 술책으로 압살롬에게 조언했다. "무리의 돌아오기는 왕이 찾는 이 사람에게 달렸음이라" (3절). 다윗의 생명을 노리는 아히도벨의 계획을 압살롬이 명령만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아히도벨은 그를 정복하게 될 것이다. 즉 "목자를 죽이면 양은 흩어지고" 이리의 밥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간단히 전쟁을 도발하여 오직 왕의 목숨만 처치하면 짧은 시간에 즉시 그가 몰락할 것이라고 획책했다.
이런 방법을 쓰는 것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다윗에게 다시 없을 것이다. 그는 그의 말대로 곤고하고 약해져서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압살롬의 반란의 첫 경종이 될 것이다. 아마도 그는 한밤중에 그에게 큰 혼란을 일으킬 약간의 군대로 치열한 공격을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임금만 처치하기는 아주 쉬울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일은 간단히 해결된다. 모든 백성이 그에게 돌아오게 될 것이고 평화스럽게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평화는 약탈자들에 의하여 어떻게 파괴되었나를 생각해 보자.
악마의 궁전은 강자가 무장하고 있는 동안은 평화스러운 것이다. 다윗의 자손을 대적했던 제이의 아히도벨 가야바의 음모와 이 사건을 비교해 보라. 그들의 계획은 예수를 죽이려 했던 것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요 11:5). "자 이 상속자를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마 21:38). 그러나 이런 모사들은 둘다 어리석은 것이었다. 그러나 빛의 자녀들은 이 세상의 자녀들로부터 지식을 얻었다. 우리가 할 일을 깨달은 것은 신속히 하는 것과 전력을 다하는 것이다.
특별히 영적 싸움에서 때를 잃지 않기 위해서 단호하고도 신속하게 하도록 신중을 꽤해야 한다. 왕을 거스리는 음모는 신중히 생각되었다. 철면피 악한 압살롬은 곧 왕을 쳤다. "내가 왕만 치겠나이다." 이 말에 모두 동의했다(4절). 이런 계략으로 자신의 명예를 확보하려 했으나 놀라리만큼 자극은 주지도 못했고 오히려 야만스럽고 괴상한 결론을 초래했던 것이다. 선한 일이 어찌 야심이 불타는 자에게 있을 수 있겠는가?
Ⅱ. 후새는 다윗을 급하게 추적하는 것은 불가한 일이라고 조언했다. 그를 이길 수 있는 병력을 양성할 기회를 가져야 하며 그를 놀라게 할 만한 인원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후새는 이 조언으로 다윗을 도와 준 것이다. 자기의 정보가 그에게 전달될 시간이 필요했고 또 다윗이 병력을 준비할 기회와 요르단 시내를 건너 이동할 기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보다 더 다윗에게 유익한 처사는 없었다. 후새는 압살롬이 분별없이 하는 동안 다윗이 세력을 구축하도록 조심스럽게 조언했다.
1. 압살롬은 후새를 공석에 초대하여 조언을 기다렸다.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이 아히도벨의 말에 모두 찬성했으나 압살롬의 마음을 하나님이 다스려서 후새의 제안이 있을 때까지 이 일에 결정을 내리지 못하게 하셨다. "후새를 부르라. 그의 말도 듣자" (5절). 두 사람의 생각은 한 사람의 생각보다 낫다고 그는 생각했다. 하나님은 음모자들의 재치 속에 하나님의 지혜를 불어넣어 주었다. 이에 관해 풀선생의 기록을 읽어 보라.
2. 후새의 말 중에는 그럴 듯이 이유를 제시해 주었다.
(1) 그는 아히도벨의 제안이 위험을 자초하는 것이라고 이를 반박했다. 그의 주장은 아히도벨의 주장과 전혀 다른 것이었고 신중한 것이었다. 아히도벨의 계략은 언제나 환영을 받고 있다는 사실도 후새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후새는 아이성을 칠 때 여호수아의 군대가 패배를 당한 것을 상기하면서(수 7:4 참조) 이렇게 적은 인원을 가지고 성급히 출격하는 것은 너무도 위험한 일이며 적당치 않은 처사라도 아히도벨의 제안에 찬동하는 자들을 설득시켰다. 적을 너무 무시하는 사람은 언제나 패배하는 것이다. 후새의 제안이 어째서 그럴듯하게 느껴졌나 생각해 보자.
[1] 그는 다윗이 훌륭한 전략가라는 것을 인식시켰다. 압살롬의 군대보다 용맹을 떨치는 지도력과 많은 전투 경험이 있음을 상기시켰다. "당신의 부친은 용사라" (8절). "병법에 익은 사람이라." 그는 아히도벨의 말처럼 약하고 두려워 떠는 존재가 아니라고 말했다.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쉽게 물러난 것은 결코 그가 비겁해서가 아니라 신중히 생각하는 바 있어 그런 것이라고 말했다.
[2] 그의 추종자는 많지는 않지만 모두 "용사라" (8절). "병법에 익은 사람" (10)이요, 전술에 능한 용감한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옷을 찢으며 말한 아히도벨은 아마도 자신을 다윗과 동등한 위치로 생각하고 자기들 가운데 한 사람이 다윗의 군대 천을 이겨낼 것처럼 생각했던 것 같다.
[3] 사람들은 압살롬에 대해 적개심이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재난을 일으킨 장본인이 그였기 때문이다. 치열한 격투가 생기고 마음에 맞지도 않는 그들의 사상을 따라야 하니 그들의 용기나 분노 같은 것은 어린애 같은 압살롬은 감히 다윗의 무리 앞에 설 수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후새는 그들을 대신해서 아히도벨이 다윗을 우습게 여긴 것처럼 그는 다윗을 무시할 수 없는 존재라고 말했던 것이다.
[4] 후새는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어떤 함정에서 잠복하고 있을 것이라고 암시해 주었다. 그들이 잠복한 것을 알지 못하고 가다가 적은 무리라도 패하면 남은 자들이 모두 낙심할 것이며 또 기름 부음 받은 자와 그들의 마음에 있는 자를 해롭게 했다고 비난할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되면 압살롬의 무리는 모두 살인자라고 소문이 날 것이며 적을 돕는 일이 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아히도벨의 격노한 마음을 녹였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취급하기가 아히도벨이 생각한 것처럼 쉽지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2) 후새는 자기 생각을 전했다.
[1] 그는 실제로는 돕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나 압살롬의 거짓된 변덕스런 교만을 만족시켜 주려고 했던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 사람을 국민병으로 징집하라고 조언했다. 모든 지파가 다 그를 위해 있고 그의 명령 아래 있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그를 기쁘게 하려고 했다. 둘째로 그는 압살롬에게 자기 부하들이 싸우고 있는 전쟁터에 참여하도록 권면했다. 그것은 아히도벨이 어떤 계략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여주려고 했다. 거만한 사람을 배도하기란 아주 쉬운 것이다. 교만하도록 추켜세우면 한없이 기뻐한다.
[2] 그는 결국 아무런 위험성도 없는 것처럼 성공의 길을 찾도록 권유했다. 만약 다윗을 찾아내면 미리 약속한 군인들이 잠복하고 있다가 일어나 그를 처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로 만일 그들이 들에서 땅에 이슬이 내림같이 매복했다가(12절) 아히도벨의 계략대로 왕만 죽인다면 압살롬이 매우 기뻐할 것이다. 그래서 후새는 그의 교만과 분계심을 달래려고 했다. 둘째로 만일 저가 어느 성에서 포로가 된다면 밧줄로 그 성을 강으로 끌어올려 돌 하나도 보이지 않게 하라고 불가능한 이상한 암시를 환상적인 것으로 제안했다.
(3) 이런 술책으로 인해서 후새는 압살롬의 찬동을 얻을 뿐 아니라 군사 회의에서 만장일치의 승인을 얻었다. 후새의 모략은 아히도벨의 모략보다 낫다(14절)고 인정을 받았다.[1] 사람들이 행하는 모략들이 얼마나 기궤한 것들인가. 만약 후새가 거기 참석하지 못했었더라면 아히도벨의 음모가 실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배후 역사하심으로 그들의 생각을 제압할 수 있는 그를 참여케 했다. 그가 말한 것은 모두가 다윗이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었다. 음모자들은 흔히 생각없이 어리석음을 말할 때가 있다.
[2]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진 것이다. 후새의 명석한 정책이 성공한 것은 하나님의 배후 역사였다. 아히도벨의 좋은 음모가 실패로 돌아가게 하나님이 조정하셨다. 비록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모르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도록 모든 사람들이 마음을 강물처럼 바꾸어 버렸다. 후새는 하나님 편에 서서 부정적인 결정을 내리는 자들을 설복시켰다. 하나님은 기름부은 자를 대적하려는 인간들의 계획을 보시고 웃으신다.
●다윗에게 전해진 정보(사무엘 하 17:15-21)
여기서 다윗의 적도들이 후새의 모략을 따라 승리감에 기뻐하면서 약속된 장소에서 만나 그의 모략대로 수행하려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소집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여기서 압살롬의 계획을 시행하려는 것을 미리 다윗에게 알리려는 다윗의 친구들의 모략을 발견할 수 있다. 후새는 군사회의에서 결정된 것을 제사장들에게 알려 주었다(15절). 그러나 아직은 아히도벨의 모략이 시행될 것인지는 확실치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최선을 다해서 알리지 않으면 질투심이 많은 아히도벨이 다윗왕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을 죽일 것이기 때문이었다(16절). 후새가 모략회의에 소환되었을 때 벌써 그들은 결론을 지어 놓았었다(5절). 그러나 후새는 그들의 마음을 바꾸어 놓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것은 악인들을 대적하시는 하나님의 선의였으며 파괴자들로부터 선한 이들을 지키시려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였다. 압살롬은 예루살렘 거리를 삼엄하게 지키게 했지만 다윗에게 필요한 정보는 전달되었다.
1. 정보를 제공하기로 되었던 젊은 제사장 아히마하스와 요나단은 "정보의 샘" 이라고 불리우는 에느로겔 성을 가까스로 벗어나왔다. 물론 이 두 신임받은 제사장들이 그 성을 떠났다는 것은 불길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2. 정보는 한 젊은 여인에 의해서 다윗에게 전달되었다. 그녀는 우물 속에서 그들을 감추어 주었다(17절). 만일 그 여자가 입을 열어 이 비밀을 말했다면 잘못될 우려가 있었다. 자칫하면 큰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천진한 소녀를 들어 좋은 제보자가 되게 하여 명석한 두뇌를 가진 음모자들의 모략을 어리석게 만들었다.
3. 그러나 압살롬의 야경 첩자들에 의해 그들은 발각되었다. 그래서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여차여차히 모략을 베풀었다는 정보가 도로 압살롬에게로 옮겨졌다. "한 소년이 저희를 보고 압살롬에게 고한지라" (18절).
4. 그들은 이미 자기들이 발각되었음을 알아 차리고 바후림에 있는 친구집으로 피신을 했다. 그곳은 다윗이 망명시 잠깐 휴식을 취했던 곳이다(16:14 참조). 그들은 다행히 거기서 우물 속에 숨어있었다. 여름이지만 마침 그 우물은 건조해 있었다(13절). 그 여주인은 태연스럽게 우물 뚜껑을 덮고 그 위에 곡식을 널었다. 그래서 추격하던 이들이 그곳에 우물이 있는 것도 모르고 열어 보지도 않았다(19절). 이 여인은 우리 보기에 매우 잘한 것 같지만 거짓말로 그들을 숨겨 주었다고 해서 의롭게 인정할 수는 없다(20절).
우리는 종종 좋은 일을 위해서 악을 저지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를 당하게 된다. 그렇지만 우리는 선을 위해 악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여기 이 여인은 그들을 보호했고 압살롬에게로 추격자들을 공수로 돌아가게 했다. 압살롬은 사울이 다윗을 잡으려고 아히멜렉에게 친절하게 대한 것처럼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은 재난에서 모면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그를 억제시키셨다. 그렇게 보호하시기 때문에 그들은 다윗에게 좋은 정보를 제공할 수가 있었다(21절). 그의 친구들의 충언으로 그들이 머물고 있는 곳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요단을 속히 건넜다. 그가 42편 내지 43편의 시편을 기록한 것은 요단을 건널 때 예루살렘을 그리워하는 시였다고 어떤 이들은 말한다(시 42:6 참조).
●요단을 건너 도망감(사무엘 하 17:22-29)
Ⅰ. 다윗과 그의 군사들이 요단을 건너는 것은 예루살렘에 있는 그의 친구들의 정보 제공에 의한 것이었다(22절).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과 다윗은 종종 왕래한 바 있던 나루터에서 밤에 몰래 건너갔다. 한 사람도 요단을 건너지 못한 자 없었다. 그의 재난은 대단히 어려운 것 중에 하나이지만 아파서 남거나 두려워서 지쳐서 뒤에 남은 자가 하나도 없었다. 환란날에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을 하나라도 잃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 메시야와 같이 다윗이 그런 보호를 받았다.
그들이 요단을 무사히 건넜기 때문에 그는 암몬 사람들의 성읍 라바로부터 멀지 않은 마하나임을 향해 수마일을 행진했다. 마하나임은 가드 지파에 속한 레위 사람들의 성읍이었다. 이 성읍은 이스보셋이 행정도시로 삼았던 성읍이다(2:8 참조). 다윗은 이 성을 본부로 삼았다(24절). 그는 여기서 반역자들과 대치할 군사를 훈련하고 그들에게 친절한 환영회를 열었다.
Ⅱ. 아히도벨의 죽음(23절). 그는 자살을 했다. 자기 모략이 좌절된 것을 괴롭게 생각하고 자살했다.
1. 그는 자기가 가장 훌륭한 정책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장 지혜롭다는 명성을 잃어버린 모욕을 참을 수 없었다. 그의 판단력은 언제나 회의 장소를 움직이곤 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의 의견보다 다른 이의 의견이 훨씬 좋고 현명한 의견이었다. 그의 교만한 마음은 이런 모욕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모욕감이 부풀면 부풀수록 분개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모든 사람들은 그를 현명한 사람으로 인식했고 자기도 오직 자기만이 현명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기의 지혜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수하는 것은 자기가 죽으면 함께 지혜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는 아히도벨 같은 지혜자는 존재할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원한을 그들에게 알리려고 했다. 가장 무서운 적은 자기가 가장 잘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불행한 것 중에 가장 불행한 것은 모욕을 참지 못하는 것이다. 모욕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겸손한 사람의 잠을 깨우려는 것이 아니라 교만한 사람의 마음을 깨우치는 것이다.
2. 그는 스스로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생명을 끊었다. 그는 자기의 모략이 채택되지 않으면 압살롬이 분명코 실패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압살롬에게 그의 부친과 처첩과 동침하도록 조언한 큰 죄를 범한 장본인이 자기임이 드러날 것이 두려웠다. 수치감과 공포감을 막기 위해 자신을 지혜있는 사람이라는 평판대로 정당화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자살행위는 자기가 어리석은 자라는 것을 증거하고 말았다. 세상에는 자살자보다 더 어리석은 자는 없다. 생각해 보자. 어째서 그는 자신을 가해하려고 고의로 자기 성으로 돌아가 자기 집에서 생각할 시간과 여유를 가지고도 죽었는가 이상하다. 그는 우선 가정에 질서를 세우고 자신이 지혜있는 사람인 것을 이해해 주기를, 또한 추억해 주기를 바랐다. 그는 자기의 교만한 마음을 자르지 않고 자기 생명을 잘랐다.
(1) 수치심은 지혜자에게 많이 있다. 정책가로 유명한 그는 어리석음이 누구보다도 풍성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혜있는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치 말라. 미련한 자도 죽고 지혜있는 자도 죽는다.
(2) 하나님의 의를 실천하기를 기뻐하라. 악인이 함정을 팔 동안 자기가 판 함정에 스스로 빠지느니라(시 7:15, 16 참조).
(3) 구하는 자에게는 응답하시고 정직한 사람에게는 적군의 손을 통해서도 도와주신다. 다윗은 여기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여호와여 원컨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15:31)라고 기도한 것이 응답된 것이다. 라이트푸드 박사는 시편 55편은 아히도벨이 자신을 대적하려는 음모를 가지고 있을 때 기록한 것이라고 추측했다. 아히도벨은 다윗에 대해 불만자였다(시 55:13 참조). "나의 동료, 나의 동무요, 나의 친우로다." 이렇게 만일 그가 기도했다면 즉시 응답을 받았을 것이다(시 55:15 참조). "사망이 홀연히 저에게 임하여 산채로 음부에 내려갈지어다." 그는 아히도벨이 죽기를 원했다.
세상에서 오래 사는 것만이 보람으로 생각하는 세상 사람들처럼 자기를 괴롭히는 아히도벨의 멸망을 원했다. 그는 압살롬의 수족이였고 다윗에게 치명적인 모략을 제공하는 자였다. 그래서 그는 그가 숨이 멎고 목이 끊어지기를 원했다. 언제나 자살한 시체는 불명예스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그것은 아히도벨이 영예스럽게 조상의 장지에 매장되었다. 물론 그는 당나귀 장례보다 나은 장례가 될 수 없는 천한 죽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치스러운 장례를 했다(전 8:10 참조).
Ⅲ. 압살롬은 자기 아버지 다윗을 추격했다. 그는 후새의 모략대로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을 모으고 자신이 그들 선두에 서서 요단을 건넜다(24절). 그는 다윗이 자기가 세운 나라에서 쫓겨난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를 세상에서 완전히 쫓아 버리려고 뒤를 쫓고 있었다. 다윗과 싸우기 위해 그는 "길르앗 땅에 진치니라" (26절). 압살롬은 아마사를 군장으로 삼았다(25절). 아마사는 이스마엘 사람 에델의 아들이다. 그의 종교적인 명칭은 이드라이지만 여기서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했다. 아마 그는 다윗집안 가까운 친척과 결혼하고 개종했기 때문일 것이다.
국가에 대한 그의 중립적인 태도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이라 호칭한 것 같다(대상 2:17 참조). 그의 부인 즉 아마사의 어머니는 아비가일이며 다윗의 누이이다. 그의 다른 누이 스루야는 요압의 어머니다(대상 2:16 참조). 요압과 다윗과의 관계는 아마샤와 다윗과 같은 친척이었다. 그가 아버지 다윗을 대적하기 위해 무장할 때 가문의 영예를 위해 압살롬은 아마샤를 그의 군대의 총지휘자로 삼았다. 이새를 여기서는 나하스라 부른 것은 많은 사람이 두 개의 이름을 가졌기 때문인지 혹은 그의 부인의 이름인지도 모른다.
Ⅳ. 다윗의 친구들이 먼 곳에서 서로 만났다. 암몬 족속에 속한 젊은 형제 소비도 그에게 친절했다(27절). 그의 형제 하눈이 다윗의 특사들에게 행한 경멸을 증오했던 것 같다. 그는 다윗의 총애를 받았으며 그의 보상을 지금 받는 것이었다. 자신들의 번영이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떤 때가 되면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고 만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자비를 베푼 자에게 자비함을 받게 되고 남을 기쁘게 한 자가 기쁨을 얻게 된다. 그래서 선한 사람은 이런 이유가 있기 때문에 기회만 있으면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려고 하는 것이다.
아미엘의 아들 마길은 다윗이 망명을 마칠 때까지 므비보셋을 지켰다(9:4 참조). 마길은 은혜 입은 사람에게 은혜를 갚았다. 그는 다윗의 재난시 그를 돕는 후원자였던 것 같다. 바실레도 다윗과 그의 군대를 돕는 열성자로서 그들이 오랜 행군에 지쳤음을 보고 자기집 가구, 침상과 대야, 질그릇을 가져왔다(28, 29절). 다윗은 그들에게 기구를 제공하고 음식을 공급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다윗왕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스스로 의무를 느껴 가져왔다. 그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왕이 곤경에 처한 것을 애도하여 그의 가지고 있는 것 모두를 가져다가 최선으로 도왔다. 우리는 여기서 관대한 마음과 아끼지 않는 후한 마음을 배워야겠다. 우리의 최선을 다해 고난당하는 이와 슬픔 중에 있는 이를 도와야 하겠다. 하나님은 절망 중에 있는 사람을 위험으로부터 안전한 곳으로 그의 백성을 인도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