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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정씨족보 |
연안차씨 족보 |
경주최씨족보 |
조선왕조실록 | |
정공미 |
차덕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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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찬 |
차공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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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균 |
차안도 |
차공윤의 딸 =단양우씨 禹淵 |
최현우=청주경씨 경사만의 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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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경(1305-1366) = 영천우씨 우연(禹淵)의 딸 |
최습=차안도의 딸 (*정도전 처가) |
우연의 아들 : 우제강 우연의 서녀 = 정운경 (*정도전의 외가) |
최습=연안차씨 차안도의 딸 |
정운경=우탁의 족인인 김전(중)이 수이라는 종의 아내를 간통하여 딸을 낳아 우연(禹延)에게 시집보냈고 이 단양우씨 우연의 딸과 정운경은 혼인하였다. |
정도전(1342-1398) = 경주최씨 최습의 딸 |
정도전 = 최습의 서녀 |
최습의 딸 = 정도전 |
정도전의 어머니는 단양우씨이고,정도전의 외조부는 단양우씨 우연이고 외조모는 김전과 종 수이의 아내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 |
참조 |
우극관 : 우제강의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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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정도전등의 혼인관계에 대한 검토
1. 정도전(1342년-1398년)의 혼인관계
정도전이 경주최씨 최습의 딸과 혼인했다는 것은 이견이 없는 것 같다. 다만 정도전의 배위가 최습의 정실부인의 딸인지 아니면 최습의 첩의 딸인지를 살펴보자. 경주최씨 화숙공파 족보에 의하면 최습의 아버지는 최현우로 청주경씨 경사만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자식에 최습,최잉,최주를 두었고 사위는 이초,오식,나현,기원등이 있다. 그리고 최현우의 장인은 충주경씨 경사만(?-?)으로 경사만의 사위로 최현우외에 한공의(1307년-1365년)이 하나 더 있고 아들은 경복흥(? -1380)이고 손자는 경보(1323년~1406년)이다. 즉 최현우와 한공의는 동서지간이고 이들은 경복흥과는 처남매부지간이다.
최습과 최습의 아버지인 최현우는 고려사등 정사에 등장하지 않는 듯 보이고 1358년에 쓰여진 보광사보광선사비(부여군 임천면 있는 사찰로 원명국사 1275년-1339년 가 개경을 떠나 부여에 있는 보광사를 중창한 내용을 기록한 비문)를 보면 양광도 안렴사 최현우가 많은 물자를 조달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1300년경에 태어난 인물로 추정되고 그의 첫째아들인 최습은 1320년대경에 출생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경주최씨 화숙공파 족보에 의하면 최습의 장인을 차안도로 기록하고 있고 차안도와 최현우는 사돈지간이므로 출생년도 거의 비슷한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차안도의 경우에도 생몰기간을 명확히 없는 인물이나 고려사등에 의하면 1361년 판사복시사,1363년 호종공신이 되었다는 기록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주최씨 화숙공파 족보에 의하면 최습은 정실부인 연안차씨인 차안도의 딸외에 첩을 두었다는 기록은 없고 배위 연안차씨 가계도를 연안차씨 족보와 똑같이 기록하고 있고 외조부는 홍륜이라고 하고 있으며, 최습은 정실부인 사이에서 3남 2녀를 낳았는데 최계운,최서운,최경운이고 사위는 의령남씨 남유, 봉화정씨 정도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연안차씨 족보에서는 최습의 사위로 이거이(李居易)와 정도전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거이는 청주이씨로 생몰년도는 1348년 ~ 1412년으로 그의 아들 저는 태조 이성계의 장녀 경신공주와 혼인하였으며, 또 다른 아들 백강은 태종의 장녀 정순공주와 혼인하였는데 청주이씨 및 경주최씨 화숙공파 족보에 의하면 이거이는 배위는 경주최씨로 처부는 최잉이고 처조부는 최현우이고 처증조부는 최저로 최습의 동생 최잉의 사위가 이거이인데 연안차씨 족보에서는 이거이가 최습의 사위로 되어있다. 이렇게 경주최씨 화숙공파 족보에서 처음부터 최습의 장인을 차안도라고 기록했는지 아니면 후대에 연안차씨 족보를 참고하여 추기했는지를 정확히 알 길 없으나 사견으로는 경주최씨 화숙공파 족보에서는 연안차씨 족보를 보고 후대에 추기한 것으로 보인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최습의 배위인 연안차씨의 외조부, 즉 차안도의 장인을 경주최씨 화숙공파 족보에서도 연안차씨 족보와 똑같이 홍륜(洪倫)이라고 홍륜이 과연 차안도의 장인이 될 수 있는지 살펴보자.
홍륜은 홍언박(1309년-1363년)의 손자이자 홍사우(? - 1374년)의 아들로 고려사등에 의하면 한안,권진,홍관(홍륜의 사촌),노선등이 1372년 공민왕 21년 설치된 자제위(명문가의 젊은 자제들로 구성) 소속되어 공민왕을 보필하다가 “공민왕이 아들이 없자 후사를 얻기 위하여 자제위 소속 청년들로 하여금 여러 비빈들과 사통시켜 아들을 낳게 하여 후사로 삼기를 원하였는데, 홍륜이 익비(공민왕의 셋째부인)와 관계하여 임신하게 되자 왕은 기뻐하며, 이 사실을 아는 자는 모두 죽이겠다고 하자, 1374년 이를 두려워한 홍륜이 환관 최만생과 모의하여 왕을 시해하였고” 적발되어 홍륜,홍관등 자제위 소속 젊은 사람이 죽임을 당하고 홍륜의 아버지도 귀양가다가 주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이 기사가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홍륜은 1372년 설치된 자제위 소속으로 혼인 전의 약관의 나이로 볼 수 있고 또한 홍륜의 할아버지인 홍언박과 차안도가 1300년대에 태어난 거의 동일시대 인물로 추정되는데 1350년대 중반쯤 태어나 1374년에 죽은 홍언박의 손자이고 자제위 소속으로 젊은 약관의 나이에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홍륜의 사위로 차안도가 될 수는 없다.(혹 연안차씨 족보에서는 홍륜에 가계도에 대하여 정확히 밝히고 있지 않으므로 위에서 말하는 홍륜이 아닌 다른 인물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그럴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따라서 경주최씨 화숙공파에서 최습의 장인이 차안도이고 배위 연안차씨의 외조부가 홍륜이라고 기록한 것은 고증도 없이 연안차씨 족보를 보고 후대에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차안도의 장인은 홍륜이 될 수 없으며, 그리고 최습이 차안도의 딸과 혼인했는지도 알 수 없으나 여러 가지 정황상 차안도와 최습의 아버지인 최현우와는 거의 동일시대 인물이므로 그 혼인의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으나 경주최씨 화숙공파 족보는 연안차씨 족보를 보고 별다른 고증도 없이(차안도의 장인이 홍륜이라는 연안차씨 기록을 그대로 기록한 것으로 보아) 후대에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고, 경주최씨 화숙공파 족보에는 최습이 연안차씨 정실부인외에 첩을 두었다는 기록은 없고 정도전은 정실부인에서 태어난 딸고 혼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2. 정운경(1335년-1366년)의 혼인관계
정도전의 아버지인 정운경의 혼인관계는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크게 3가지가 존재한다. 첫 번째는 정도전이 쓴 아버지 정운경의 행장기록, 두 번째는 연안차씨 족보에 의한 기록, 세 번째는 조선왕조실록 1398년 정도전 졸기등에서 나타난 기록이다. 왜 이렇게 동일인물의 혼인관계에 대하여 서로 전혀 다른 세 가지 기록이 존재할까?
먼저 연안차씨 족보의 기록부터 살펴보자. 연안차씨 족보에 의하면 18세 차공윤(동국통감 고려기에 1280년 정5품의 중랑장으로 고려,원나라군이 일본을 정벌할때 살아돌아와 파천이 되었다는 인물)은 은천오씨 오부순(伍夫順, 고려사기록에 의하면 1270년에 오부순과 비슷한 인물이 나오는데 낭장 伍夫順明이 나오는데 아마 연안차씨 족보에서는 말하는 오부순과 동일인으로 추정되고 차공윤과 오부순명은 거의 동일시대의 인물인데 어떻게 장인,사위관계가 되었는지 의심이 간다)의 딸과 혼인하여 차안도(생몰년도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361년 판사복시사, 1363년 호종공신등 역임)와 딸을 한명 낳아 단양우씨 우연(禹淵)을 사위로 맞이한다. 그리고 차공윤의 딸과 혼인한 단양우씨 우연(禹淵)은 연안차씨 정실부인외에 첩을 하나 두었는데 그 첩이 정도전의 아버지인 정운경과 혼인하였다고 하고 연안차씨 정실부인에서 태어난 아들은 우제강(禹濟江)과 우제강의 아들은 우극관(禹克寬)이라고 한다. 연안차씨 족보에 의하면 우연의 가계도는 우연(禹淵) -- 우제강(禹濟江) -- 우극관(禹克寬)이라고 하는데 우연과 우제강이라는 인물은 고려사,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지 않은 인물 같고 단양우씨 족보에는 이런 인물은 없는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우극관이라는 인물은 무오사화때 죽은 김일손(1464년-1498년)의 첫 번째 부인인 단양우씨의 아버지로, 즉 김일손의 장인이고 단양우씨 족보에 의하면 -- 우탁 -- 우길생 -- 우현보(1333년-1400년) -- 우홍강(1357년-1423년) -- 우원보(? - ?) -- 우극관(?-?) -- 우만수 으로 이어진 계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연안차씨 족보에서 주장하는 단양우씨 우연의 계보는 전혀 신뢰성이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연안차씨 족보는 더 치명적인 모순점이 발생하는데 차안도와 단양 우씨 우연(禹淵)은 처남매부지간이고 단양우씨 우연(禹淵)는 차공윤의 딸인 정실부인 연안차씨외에 첩이 하나 있었고 그 첩에서 낳은 딸이 정운경과 혼인했다는 것인데 정운경 입장에서는 차안도가 처외숙이 된다. 그런데 정운경은 1305년생이고 차안도의 경우에도 1300년대초반쯤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데 어떻게 처외숙(차안도)과 생질의 남편(정운경)과의 나이 차이가 거의 없을 수가 있는가?
물론 당초에 1300년대초반쯤으로 추정했던 차안도(차안도의 아버지가 차공륜이라고 하는데 차공륜은 고려,몽고군이 일본을 정벌할때 등장한 인물로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1280년 중랑장의 신분이었고 판천-만호와 비슷한 관직-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이때의 차공륜의 나이를 30대중반으로 정도로 생각하면 차공륜은 1245년쯤 태어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차공륜의 아들인 차안도는 1275년쯤 태어났다고 볼 수 있는데 이렇게 보면 차안도가 1363년 호종공신 - 왕이 원나라 갈때 호종하였다고 주는 공신 - 이 되었는데 이때의 차안도 나이가 88세라면 너무 나이가 많다는 생각이 들고 차안도의 아버지가 차공륜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의 출생년도가 틀릴 수 있을 것이고 또한 처남매부지간인 단양우씨 우연(禹淵)과 차안도의 서열 차이 때문 일 수도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한세대의 차이를 20년~30년대로 본다면 정운경의 출생년도가 1305년이니 처외숙이 되는 차안도는 1270년대-1280년대에 태어났다고 가정하면 차안도와 정운경의 관계를 설명할 수는 있을 것 같은데 고려사를 보면 차안도의 생몰년도는 알수 없지만 1361년 판사복시사,1363년 호종공신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이를 기준으로 하면 이 때의 차안도의 나이가 80세~90세가 된 나이는 이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할 지 의문이 든다.
결론적으로 연안차씨 족보에 의하면 차공윤의 사위로 등장하는 단양우씨 우연(禹淵) 및 우제강,우극관의 계보는 단양우씨 족보의 계보에는 없는 것이고, 단양우씨 우연(禹淵)의 손자라는 우극관(禹克寬)는 1400년대의 인물로 그 선조의 계보는 연안차씨 족보와는 다르게 단양우씨 족보에는 존재하고, 설령 정운경이 단양우씨 우연의 첩의 딸과 혼인했다고 하더라도 처외숙인 차안도와 1305년생인 정운경이 비슷한 시대의 인물로 추정되어 이러한 혼인관계가 가능할지 의심이 가고 따라서 차공윤의 사위 단양우씨 우연(禹淵)이라는 인물은 가공의 인물로 보여진다.
두 번째 1398년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정도전 졸기등(이미 1392년 우홍수 졸기등에서도 정도전의 혼인관계는 언급되고 있음)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져 있다.
“외조부(外祖父) 우연(禹延)의 처부(妻父)인 김진(金戩)이 일찍이 중이 되어 종 수이(樹伊)의 아내를 몰래 간통하여 딸 하나를 낳으니, 이가 도전의 외조모(外祖母)이었는데, 우현보(禹玄寶)의 자손이 김진(金戩)의 인척(姻戚)인 이유로써 그 내력을 자세히 듣고 있었다. 도전이 당초에 관직에 임명될 적에, 고신(告身)이 지체(遲滯)된 것을 우현보의 자손이 그 내력을 남에게 알려서 그렇게 된 것이라 생각하여 그 원망을 쌓아 두더니, 그가 뜻대로 되매 반드시 현보의 한 집안을 무함하여 그 죄를 만들어 내고자 하여, 몰래 거정(居正) 등을 사주(使嗾)하여 그 세 아들과 이숭인 등 5인을 죽였으며, 이에 남은 등과 더불어 어린 서자(庶子)의 세력을 믿고 자기의 뜻을 마음대로 행하고자 하여 종친을 해치려고 모의하다가, 자신과 세 아들이 모두 죽음에 이르렀다.”
그리고 조선개국전 1354년 공양왕 3년,4년에도 고려사등을 보면 “정도전의 가풍이 부정하고 파계가 밝지 못하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사 내용을 보면 정도전의 어머니 우연(禹延)의 딸이고 외조부는 우연(禹延)이고 외조모는 김진이 종 수이의 아내와 간통하여 낳은 딸이라고 하고, 이를 우현보(1333년~1400년)의 자손, 즉 우현보의 아들인 우홍수,우홍득,우홍명등이 그 내력을 알고 있었고 정도전이 관직에 임명될 때 고신이 지체된 것을 우현보의 자손이 그 내력을 남에게 알려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 원망을 쌓아 두더니, 정도전이 이에 앙심을 품고 1392년 우홍수,우홍득,우홍명등을 죽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정도전의 혈연관계에 대하여 조선왕조실록과 연안차씨 족보는 다르게 기술하고 있는데 먼저 연안차씨 족보에 의하면 최습의 장인은 차안도이고 최습의 서녀 사위가 정도전이라고 하였는데 조선왕조실록에 서는 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고, 연안차씨 족보에서는 정도전의 외조부은 차공윤의 사위인 단양우씨 우연(禹淵)이나 외조모는 외조부의 미상의 첩의 딸로만 언급하고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외조부은 (단양)우씨 우연(禹延)이나 외조부의 장인은 누구인지 밝히지 않고 대신에 외조모는 중 김진과 종 수이의 아내 사이에 태어난 김진의 딸이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단양우씨 족보에는 우연(禹延) 또는 우연(禹淵)이라는 인물은 없는 듯하고 봉화정씨인 정도전이 아버지 정운경의 행장에서 아버지 정운경은 영천의 사족인 산원 영천우씨 우연(禹淵)의 딸과 혼인했다고 밝히고 있다.
먼저 봉화정씨인 정도전의 상계를 보면 적어도 정운경 및 정도전이 중앙에 진출하기 전까지는 지방에 근거를 둔 토착세력으로 중앙권력집단과 비교해보면 가문의 정도는 미미하였고 혼인도 지방 토착세력들과 하여 상계의 가계(혼인)도가 잘 정리되지 않았을 것이고 정운경 또한 인근지방의 영천우씨 우연의 딸과 혼인하였을 것이고, 어찌보면 단양우씨 집안과 비교하면 변변치 못한 집안이었던 것이 사실이었다고 볼 수는 있으나 그렇다면 조선왕조실록이나 연안차씨 족보 내용이 사실일까?
일단 이 두 기록은 사실에 근거하여 쓰여진 것이기 보다는 특정한 목적하에서 쓰여진 의도적인 글이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조선개국에 큰 공을 세운 정도전등을 이방원이 무력으로 제거함으로써 그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정도전의 졸기를 쓴 것이고, 연안차씨 족보에서는 차원부등이 정도전등 4얼에 의하여 무고하게 희생되었다는 것을 가장하기 위하여 쓴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쓰여진 1398년 정도전 졸기(여기에서는 문화류씨 좌상공파조 류만수의 졸기도 있음)를 보면 정도전의 외가쪽 혈통이 천민이 이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왜 우현보나 조선개국전 고려말 왕조의 기득권세력은 모르고 우현보의 아들인 우홍수,우홍득,우홍명만 알고 있었을까? 이는 정도전이우홍득등이 자신의 외가쪽 혈통이 천민이라는 내력을 알고 있었고 이를 소문내 정도전의 고신이 지체되어 정도전이 이에 대하여 개인적 앙심이나 원한으로 1392년에 우홍득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꺼내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정도전은 1360년에 국자감시에 선발되고 1362년에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이때에 우현보가 1333년생이니 나이가 27세~29세였고, 우현보의 큰 아들 우홍수는 1355년생이니 5세~7세이고 그 밑의 동생은 더 어려는데 어찌 이렇게 어린 아이들이 정도전의 외조모의 출생비밀을 알고 소문을 내고 고신을 지연시킬 수 있었을 것인가? 차리리 그 아버지 우현보나 아니면 멸망해가는 고려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지키려는 구 기득권세력이 했으면 모를까?
1354년 정도전에 대한 고려사 내용을 보면 (물론 이것도 후대에 가감된 측면도 있었을 것이나) 고려왕조의 기득권세력들은 이성계등의 신진세력의 핵심인 정도전에 대하여 인신공격을 통하여 그들의 세력을 약화 시킬 목적에서 나오는 기사인데 만약 이 기사의 내용대로 정도전의 가풍이 부정하고 파계가 밝지 못하는데 1360년 정도전이 국자감시에 선발되고 1362년 과거에 급제하고 조선개국에 큰 공을 세웠겠는가? 그리고 조선왕조실록기사에는 정도전이 우홍수등에게 앙심이 있어 1392년에 죽였다고 했는데 사실은 우홍득은 이른 박자량 사건에 연루 되었고, 우홍명은 이초 사건 즉 이성계가 명을 침공한다는 밀고 사건과 김저의 사건등에 연루되어 죽은 것인데 조선왕조실록 기사는 우홍명등이 정도전의 외가쪽과 족친관계에 있어서 정도전의 외가 혈통이 천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를 소문내 정도전의 고신을 지체지켜자 정도전이 이에 앙심을 품고 죽였다고 교묘하게 이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정도전의 졸기는 1398년 태종(이방원)이 정도전등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후 그 뒤에 고려 구신세력 및 하륜,변계량등에 명하여 편찬된 것으로 이방원이 일으킨 왕자의 난의 정당성을 알린 필요가 있었고 이의 결과물로 정도전의 가족사까지 근거없이 조작,왜곡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결국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정도전 졸기중에서 나오는 정도전 외가쪽 혈통 문제는 다분히 정치적인 것이다.
어찌 되었던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정도전의 외가쪽 혈통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고 하더라도 정도전의 혈통은 연안차씨와는 전혀 관계 없는 것을 나온다. 그런데 왜 연안차씨 족보에서는 이러한 정도전이 1398년 연안차씨 가문을 멸족시킬려고 했다고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1398년 9월 연안차씨 가문을 멸족시킬려고 했을 시 이미 조영규,정도전은 사망했는데 말이다. 연안차씨 주장, 즉 소위 말하는 4얼등에 대하여 1386년 차원부등이 왕차류보판을 만들때 그들의 천한 혈통을 족보에 기록하여 만인앞에 드러났을때부터 이러한 4얼들이 앙심을 품고 연안차씨 가문에 보복을 해야 옳지 않는가?
그리고 이들이 연안차씨 족보처럼 4얼이라고 가정하더라도 그리고 1386년 차원부등이 왕차류보판을 만들어 그러한 혈통을 족보에 기록했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하륜이 주도해서 1398년 9월 연안차씨 일족을 70여명이나 주살하고 왕차류족보를 불태웠다고 하더라도 했다고 그 4얼이 연안차씨 혈통과 첩의 혈통을 가진 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을 만인이 알고 있었을 것인데 족보를 불태우고 연안차씨 죽인다고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III. 결론
1. 차원부 설원기를 보면 차원부가 고려왕조에 충성을 다한 충신인지 아니면 조선왕조의 개국에 참여한 사람인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다. 차원부는 “차라리 다섯말의 식초는 마실 망정 공선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이성계가 요동정벌에 관하여 묻자 “위화도에서 회군하여야 한다” 답했다고 하는데 이는 고려왕조 입장에서 보면 반역에 해당되는 것이고, 이성계가 저위륜전책(왕자들이 돌아가면서 왕을 하는 것) 에 묻자 “시국이 평탄하면 적실의 큰아들이 왕위를 잇고, 시국이 어려울때는 공훈이 있는 왕자에 왕위를 잇어야 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 인지는 모르지만 차원부는 평산신씨 신군평의 사위라고 하는데 경주김씨 계림군파 족보에는 김균(1341~1398, 조선개국공신)의 사위로 올라가 있다.
2. 이러한 내용을 보면 차원부는 조선개국에 정치적으로 깊숙이 개입한 인물인데, 고려에 충절신하의 상징인 두문동 72현(두문동 72현도 조선후대에 사실과 다르게 포장되었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입장이다)에 들어갔는지 의문이다. 왜냐하면 차원부 설원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연안차씨 가문이 고려왕조에 불사이군으로 충성하면서 조선개국에 적극 반대하여 1398년 9월 하륜등에 의하여 연안차문이 멸족을 당한 것이 아니라 소위 4얼(이미 이때는 조영규,정도전은 사망했다)이 개인적인 앙갚음을 했다는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3. 혹시 모르겠다. 정도전,하륜,조영규,하륜등이 천한 혈통과 혼인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특히나 성리학적 가치나 유교가 정착되지 않는 고려사회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고 고려시대 전체적으로 보면 근친간 혼인도 많았고 남녀간의 연애도 조선시대보다는 훨씬 자유스러웠고 서얼에 대한 차별, 남녀에 대한 차별도 거의 없었다. 고려사를 보면 양인 모두는 과거에 응할 수 있었고 무신정권시대에는 노비,종도 장군이 되는 등 조선시대보다는 제한적이지만 신분이동이 상당히 탄력적이라고 볼 수 있다. 참고로 고려 후대로 들어오면서 정실부인외에 첩(후실)을 두는 것이 유행했는데 그 이유는 무신정권,몽고와 전쟁등으로 남자들이 많이 희생되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고려가 원나라의 속국이 되어 많은 원나라 사람이 고려에 거주하면서 원나라의 일부다처제 풍습을 들어와 고려후기에 이러한 혼인문화가 유행했다고 한다. 적어도 조선시대에도 성리학 및 유교적 문화와 가치가 완전히 정착되기 전까지도 그랬고 서얼등을 제도적으로 차별하기 시작한 것은 태종이 들어서 한참 뒤의 일이고 또한 그 제도가 사회문화, 정치적으로 완전히 정착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조선초기 유명한 황희 정승은 1363년에 태어나 1452년 2월에 사망했는데 1452.7.4 조선왕조실록 기사를 보면 세종실록을 편찬하면서 황희에 출신성분에 대한 언급하고 있고, 고려말에서 조선초의 인물인 변계량-1369~1430-,목신우-1374~1446,장사길-?~1418,하륜-1347~1416-등의 기첩 자직, 즉 서자나 서녀들의 기사가 조선왕조실록에 있는데 기첩에서 태어난 자식들도 이때까지는 차별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했었는데 차원부 설원기 내용을 보면 차원부,정도전,하륜,조영규,함부림등이 살았던 그 시대의 시점에서 사실관계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서얼차별등이 정착되기 시작한 1500년대중반이후의 시각과 관념으로 그들을 재단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4. 1477년 안동권씨 성화보와 1562년 문화류씨 가정보를 보면 이때까지도 족보에 적자,서자등을 구분하지 않고 있다. 왜 적자,서자등을 구분하고 있지 않을까? 의외로 그 답은 간단하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사회적으로 적자와 서자를 구별할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고려말에 태어난 정도전,하륜,조영규,함부림등이 연안차씨 족보에서는 보는 바와 같이 연안차씨 혈통과 첩의 혈통을 동시에 갖지고 있었던 인물이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도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그 시대에는 근친간에도 혼인하고, 왕들도 공공연하게 동성애를 하고, 귀족들 사이에는 첩(후실)을 두는 것이 유행이었고, 적자든 서자든 신분적,사회적 차별 없이 똑 같이 대우하였고 서자라고 해서 과거시험을 못보게 하거나 상속에서 배제되거나 적게 받지도 않았고 여식이라고 상속에서 배제되지도 않았고 아들이 없다고 양자를 들려 제사를 모시는 것이 아니라 딸이 제사를 모시는 그런 사회 였다는 첩에서 태어났고 첩에서 태어난 딸과 혼인을 했다고 도대체 뭐가 문제인가? 적어도 정도전,차원부가 살던 시대에는 이런 혈통이 별로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특히나 고려말에서 조선초 넘어가는 과도기에는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망하여 가는 고려를 지켜려는 구기득권세력과 고려를 사회를 엎으려는 신진사대부세력간에 정치권력 투쟁이 급박하게 일어나고 있는 시점에서 출신성분이나 한가이 논하고 있을 시대가 아니었다. 그리고 신진사대부였던 정도전,하륜,함부림,조영규등이 첩의 딸등을 정실부인으로 맞이했겠는가? 정실부인을 두고 서녀 출신등을 첩으로 삼는 것이 상식적인 생각이다.
그런데 차원부 설원기에서는 이를 마치 큰 문제로 생각하고 있는데 차원부 설원기를 쓸 당시의 사회적 환경,관념들을 기준으로 정도전등을 보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조선시대 족보에도 임진왜란무렵부터 만들어진 족보부터 족보상에 적자,서자를 구분하는 것이 시작되었고 따라서 위에서 언급한 대로 1477년 안동권씨 성화보,1562년 문화류씨 가정보에는 적자,서자를 구분도 아니하였고 더더욱 차원부가 1368년 왕차류족보를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족보 서자,서녀라는 기록을 했을 가능성은 그 당시의 시대적 관념으로 보아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차원부 설원기는 1456년에 쓰여진 것이 아니라 훨씬 그 뒤에 쓰여진 것이라고 볼수 밖에 없다. 1596.10.28 조선왕조실록에는 차천로(1556년-1615년)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 차천로가 과거시험을 볼때 본(본관)을 적지 않아 대간의 논계가 있었으나 끝내 삭제(합격을 취소)됨은 면했다" 고 쓰고 있는데 차천로는 문과방목에 의하면 1577년 알성시에 합격하였고 1597년 중시에 합격했는데, 이 기사를 보면 1577년 알성시를 볼때 시권에다 본관을 적지 않했다는 말인데 이미 차원부가 1386년 왕차류보판을 만들었고 1456년 왕명에 의하여 차원부설원기가 만들어져 가승도 가첩도 있어 자신의 본관은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인데 실수로 시권에다 본관을 적지 못했을까? 여러가지 정황으로 보면 1577년~1597년 사이에 차원부 설원기가 쓰여졌다고 추정할수 있다.
첫댓글 저는 이 글 중심 인물의 후손 중 한사람입니다. 저희 선조님과 연안차씨에 관한 님의 논고에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16세기 말엽 차천로에 의해 조작 파생된 것이 조선후기로 오면서 단양의 전설로까지 와전된 사실을 볼때, 곡필의 해악이 어떤것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위 제ㅣ항 정도전의 혼인관계표에서 봉화정씨란에 鄭云敬의 妻父를 禹延으로 표시하셨습니다. 이는 봉화정씨족보 기록이 아니라 태조실록 정도전졸기 기록으로써 위 표에서는 혼동하여 바꾸어 놓았습니다. 따라서 봉화정씨 족보기록과 같이 봉화정씨 항목에는 榮川禹氏 禹淵으로, 조설왕조실록 항에는 禹延으로 사실대로 정정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조설왕조실록 란의 내용은 님의 주관이 개입된 듯합니다. 태조실록은 [현보의 족인 김전이 자기의 종 수이의 처를 간통하여 취하고 그 딸을 禹延에게 출가시켰다. 우연의 딸은 공생 정운경에게 시집가서 아들을 낳으니 정도전이다.] 라고 분명히 기록하였습니다. 여기서 禹延의 본관을 단양이라고 명시하지 않았고, 우탁 또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사실대로 인용하여 주시고, 그 아래 내용은 인용이 아니오라 님의 부연설명으로써 적절한 표기가 아니라고 사료됩니다. 실록 역시 허구이지만 사실관계에 오해 소지가 있으므로 삭제하시거나, 원문을 사실대로 인용하여 주시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십시오. 꾸뻑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면 위표 연안차씨족보란에 [우연의 서녀=정운경(*정도전의 외가]라는 표기는 연안차씨족보 상에 없는 기록이고, [정도전 사상의 연구]에서 한영우가 고려말 당시의 혼인 풍속을 반영 우연을 동일인으로 간주 그의 처 중 차공윤의 딸을 본처로, 수이의 딸을 첩으로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에 불과하고 사실관계가 검증되지 않은 각색일 따름입니다. 연안차씨 족보에 차공윤의 사위 木川人 禹淵이 첩을 가졌다는 기록이 없고, 단양우씨 족보에 禹延은 존재하지 않는 인물입니다. 인용은 있는 사실대로 해야 할 것이며, 중요한 것은 정운경 행장(1369)에 나타난 정운경의 처 [榮川禹氏 禹淵之女]기록을 존중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태조실록은 정도전을 의도적으로 천출로 묘사하였고, 글 솜씨가 뛰어난 차천로가 이를 토대로 가문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차원부설원기]로 위작하여 정도전, 하륜, 조영규, 함부림을 그들의 사얼로 조작하였고, 이후 [차원부설원기]는 점차 식자층으로 확산 유포되었습니다. 18세기 영조, 정조 대에 이르러 [차문절공유사]로 시호를 받은 것처럼 위장하였고, 이때 정도전을 혐오하던 송시열과 일부 가문의 후예들이 가세 야담으로 윤색하여 단양의 전설로 변질시켰다고 판단됩니다. 차천로 한사람의 사악한 진실 왜곡이 이와 같은 해악으로 번짐을 볼때 경악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 논고를 위해 애쓰신 님의 노고에 거듭 감사드립니다.
1. 댓글을 이제서야 보고 지적한 내용은 일부 수정하였습니다.
2. 수정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번째 댓글부분은 본인의 착오이므로 이를 수정하였고 나머지 부분은 다시 검토하여 수정 반영할 예정이고 그리고 연안차씨 족보상의 기록에는 차공윤의 딸이 단양우씨 우연(禹淵)과 혼인했다는 기록이 있고 또한 단양우씨 우연은 첩이 하나 있었는데 여기서 태어난 딸이 정운경과 혼인했다는 기록은 존재합니다. 저는 가끔씩 수백년동안 연안차씨 족보상의 고려시대,조선시대 초기의 가계도 및 혼인관계에 대하여 한번도 검증되지 않은채 진실이 아닌 것이 다른 가문에 족보에도 똑같이 기록되고 인용되었는지 안타까운 뿐입니다.
차천로는 봉화정씨 척족
* 자료 봉화정씨족보 권2 , 515쪽에 정원준의 사위 錦川正. 그의 사위 차천로라는 기록이 보입니다. 금천정(錦川正)이란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조선왕실 종친에게 부여하는 호칭입니다. 다시말하면 적통 왕자에게는 대군, 종실 왕자에게는 군이라 호칭하는데, 군의 자식에게 어미의 출처에 따른 지명 뒤에 副正 혹은 正 붙이는 봉호입니다. 따라서 錦川正은 성종대왕 숙의홍씨의 아들 제9 왕자 景明君 자손들로 그 둘째 아들 安南君 李壽鍊의 장자 李俌의 봉호입니다. 그리고 그 왼쪽에 아들과 사위를 기록하였는데, 昌平守, 昌林守, 昌漢守 역시 종실들의 봉호인 것입니다.
즉, 昌平副守 李世禮, 昌林副守 李世智, 昌漢副守 李世溫, 사위 차천로인데, 종실들은 이름을 피하여 봉호만 기록하였기때문 입니다. 따라서 차천로는 봉화정씨 11세 鄭元浩의 사위 錦川正 李俌의 딸을 취하였으므로, 봉화정씨 11세 鄭元浩의 외손녀 사위인 것입니다.
* 또한 조선왕조실 족보 선원록 제39권은 적첩취처에 대하여 아주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위계질서를 정확히 기록하는데 목적을 둔것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錦川正 李俌가 부인을 여럿 거느렸고, 정원준의 딸은 이보의 첩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鄭元浩의 딸은 3남1녀를 낳았는데, 1남은 昌平副守 李世禮, 2남은 昌林副守 李世智, 3남은 昌漢副守 李世溫, 그리고 딸은 車天輅에게 출가하였습니다.
차천로는 한 때 출중한 문장가로 소문이 있었지만, 광패한 성격으로 빛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주지하는 바와같이 출세를 목적으로 본처를 버리고 왕가의 종실녀인 이보의 첩녀 李應福취하고, 본처를 버려 부부윤리를 저버린 패륜아로 지탄 받은 사실이 선조실록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이러니칼 하게도 우리 문증은 그의 처 외가임에도 불구하고 삼봉선조와 문중에 먹칠을 하고, 지금도 처외가 앞산에 묻혀 처 증조부와 마주보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