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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유적과 백두산 관광을 마치고.....
설레는 마음으로 동료들끼리 4박5일 일정으로 고구려 유적 및 백두산 관광을 가기로 하였다. 사전(事前)에 고구려에 대하여 공부도 좀 하고 또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관련 검색도 해보기로 마음먹고 있었으나 제대로 된 사전 지식 없이 길을 나섰다. 어쩜 역사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하 선생님과 같이 일행이 되어 간다는 행운을 믿었는지도 모른다.
올해 여름은 진저리 칠만큼 더운 대구를 떠난다는 사실만 해도 즐거운데 동료들과 같이 꿈에도 그리던 백두산 천지와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고구려 유적을 만나러 간다는 여정이 어린 시절 수학여행을 떠나는 들뜬 기분과도 같다. 아침 8시30분에 지리과 조주희 선생님. 역사에 관심이 많은 박순구 선생님. 우리에게 역사 기행의 안내자가 되실 하종혁 선생님. 한문과 김진현 선생님. 그리고 무엇보다 이러한 여행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선도하고 가이드가 되어 주신 수학과 주영환 선생님과 나를 포함한 6명은 2대 승용차로 분산 중부내륙 고속도로와 영동 고속도로를 거쳐 인천으로 향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화려하게 단장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볼거리와 먹거리를 제공해 주고 있는 이곳의 과거를 뒤집어 보면 눈물겨운 세월을 보내면서 화교 사회의 명맥을 이어 오신 분들이 바로 그 지역에 사는 화교들이다.
인천 화교는 약 130년 전인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의 군인과 함께 온 40여명의 군역상인들이 이 땅에 정착하면서 그 역사는 시작되었다. 이들은 주로 청나라 군대에 물자를 공급하면서 조선 상인들과의 무역도 하였다. 그 후 1884년 4월 "인천화상조계장정(仁川華商租界章程)"이 체결되면서 지금의 인천시 선린동 일대의 5천평 토지에 중국 조계지가 세워졌다. 조계지가 생긴 후 중국의 건축 방식을 본뜬 건물이 많이 세워졌다고 한다.
1894년 일본과의 전쟁(청일전쟁)에서 패한 다음 청나라의 수도인 북경은 물론 타이완, 만주지역도 일본이 주인 노릇을 하니, 한국에 있는 화교들의 생활도 그리 안정적일 수는 없었다.
그래도 한국인에게는 대국인으로 행세하며 거들먹거리던 세월도 한국 전쟁과 인천상륙작전으로 거의 파괴되고 만다.
전쟁 후 화폐개혁으로 중국사람 특유의 장롱 속 돈을 모두 신고해야 했고, 외국인 부동산 소유제한으로 오랫동안 가꾸어온 농장이 헐값에 판매되거나 남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는 등 화교 사회는 점점 한국에서 외면을 당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인천이 대중국 교류의 중심도시로 성장하면서 이 지역의 역사성과 문화성이 재조명되고 인천의 새로운 문화와 관광 명소로 부상함에 따라 재도약의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고 한다.(차이나타운 홈페이지에서 발췌)
흔들리는 배속에서 잠을 청하기란 쉽지가 않았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는 습관 때문에 설친 잠을 시원한 새벽 뱃전바람으로 달래고자 카메라를 들고 나섰다. 꿈에도 그린 오메가 모습은 보지 못하였지만 구름 속에서 반쯤 가려진 일출을 카메라에 담았다.
9시쯤 멀리 중국 단동의 모습이 보이고 맞은편은 북한의 신의주가 눈에 들어왔다. 너무
얼마 전 TV에서 이 섬의 이름이 비단섬이고 북한에서 특구로 개발하고자 한다고
한다. 동행한 일행들은 북한 쪽 비단섬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섬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4대강 사업으로 환경 파괴 결과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뉴스를 통해서 익히 들어온 나는 저 아름다운 섬의 갯벌과 갈대숲이 사라지는 자연 파괴만은 되지 않기를 바랬다.
비단섬은 평안북도 용천군 신도면에 소속돼 있던 이름 없는 모래톱이었는데 압록강에서 흘러온 모래가 쌓여 물길을 막는 바람에 중국 쪽으로 연륙(連陸)되었다.
북한은 지난 1958년 인근의 마안도와 신도 장도 말도 등을 합쳐 둑을 쌓고 매립해 64.368km²의 비단섬을 만들고 용천군에서 분리시켜 신도군을 신설했다.
이 때문에 중국은 압록강을 통하여 서해로 나갈 수가 없어 부득이하게 단동에 새로운 항구를 건설하게 됐고 동시에 하류의 큰 면적인 신생 토지를 얻을 기회를 잃었다고 애통해 하고 있다고 한다.
폭넓은 압록강을 접하고 단동시가지를 거쳐 6.25때 파괴된 압록강 단교를 지나고 나서는 북한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저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을 텐데 나무가 별로 없는 산과 한적한 북한땅을 바라보니 웬지 모르게 우리 민족의 슬픔을 보는 듯하다.
역사적인 위화도를 먼 곳에서 조망하고 압록강 좌우로 늘어진 옥수수 밭을 보면서 우리 일행이 탄 차는 계속 압록강을 오른쪽에 두고 거슬러 올라갔다.
단동에서 20Km 쯤 떨어진 곳에 고구려 박작성(泊灼城)이 있는 호산(虎山)을 지나면서 시간 여유가 있다면 올라가보고 싶은 곳인데 멀리서 조망할 수밖에 없었다. 압록강 하구에 위치한 고구려의 박작성은 요동반도에서 평양성으로 이어지는 교통로를 방어하는 성의 하나인데,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인해 모두 철거되고 신축 하여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고 선전하면서 호산장성(虎山長城)이라 이름 하였다.
645년(보장왕 4)에 당태종의 대규모 고구려 침략이 실패한지 3년 후인 648년에 태종은 대규모 전함을 축조케 하는 한편, 설만철(薛萬徹)로 하여금 3만여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의 박작성을 공격케 하였다. 설만철이 압록강을 거슬러 박작성 남쪽 40여리 지점에 진영을 갖추자, 당시 박작성 성주(城主) 소부손(所夫孫)이 1만여명의 군대로 대항하여 성을 지켰으며, 고구려 장군 고문(高文)이 오골성(烏骨城)과 안시성(安市城)의 군대 3만여기를 거느리고 구원하였다는 기사가 있다고 한다. 분히 우리의 역사이고 유적인데 동북공정이란 미명하에 왜곡되었다.
힘의 논리에 어쩔 수 없이 왜곡된 역사는 언젠가는 바로잡아야할 우리 민족의 역사이다.
북한쪽에는 어린애들이 멱을 감는 모습도 보이고 소를 먹이는 모습과 빨래하는 모습. 드문드문 있는 초소에는 국경을 지키는 군인들 모습도 보였다. 두 시간을 달렸을까 북한영토인 우적도 근방 압록강에 도착했다.
압록강을 유람하고 돌아올 때 자연스럽게 유람선을 강 중앙에 정박시키고 주위에서 서성이던 군인(?) 같은 젊은 장정이 북한 담배. 우표. 지폐 등 잡동사니를 팔았고, 신기한 것은 북한 장교가 경비정을 타고 가면서 못 본 듯이 지나쳤다.
약속한 듯 정박하는 선주. 물건을 판매하는 군인. 못 본체 지나치는 장교... 모든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늦은 저녁 무렵에서야 일행은 집안에 도착했다.
집안시는 고구려 옛 수도 국내성의 현재 지명으로 길림성 동남쪽에 위치한다. AD3년경 고구려 2대왕인 유리왕이 졸본성에서 이곳으로 천도하여 424년간 수도로서 번성기를 누렸던 만큼 만 여개의 고분과 많은 고구려 유적이 남아있다고 한다.
너무 늦게 도착하여 광개토대왕비를 제대로 관람하지 못할까 잰걸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공원인지 사적지 인지도 분간할 수 없는 곳에 이상하게 생긴 모습의 느릅나무가 많이 심겨있었다.
입구에서 200m 쯤 올라가니 우리의 자랑스러운 보물은 열악한 주위 환경에 비하여 사면을 유리로 잘 둘러 보관하고 있는 호태왕비를 만날 수 있었다. 천오백년의 세월에 비하면 너무나 완벽하고 크고 웅장하다. 학창 시절 역사책에서 볼 수 있는 호태왕비를 직접 보고 있다는 감회는 말로 표현 할 수가 없다.
비석의 규모와 발견 당시의 이야기만 가이드로부터 듣고 상세한 역사적 측면은 하 선생님의 설명을 들었다.
비문에는 “왕의 은택이 하늘까지 미쳤고, 위엄은 온 세상에 떨쳤다.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자 백성이 모두 생업에 힘쓰고 편안하게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풍족해졌으며, 온갖 곡식이 가득 익었다. 그런데 하늘이 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나 보다. 39세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었다.”
광개토대왕비 최초 탁본자인 일본 육군 참모본부 소속 사꼬오 가게노부 중위가 비문의 글자를 변조(사학자 이진희 교수 주장)했는지는 알 수 없어나 이 비문이 일본의 건국역사나 임나일본부설. 삼국시대의 우리나라 역사 등 고대 역사에 지표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역사학자들이 이 비문의 왜곡(?)에 대한 논란은 광개토대왕비에 래도해파(來渡海破) 글자에 대한 탁본 비교이다. 국립중앙박물관 탁본에서는 해(海) 자는 판독불가이고 지금도 탁본하면 도해파(來渡海) 세 글자는 거의 알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일본의 사꼬오 가게노부가 갖고 있는 탁본의 경우엔 래도해파(來渡海破)부분이 선명하다. 그래서 비문 변조논란이 일고 있다.
우리 고령에도 이 비문과 관련된 임나일본부설에 관한 비석이 있었다.
약 50년 전에 역사를 모르든 어린 시절 지금 고령 향교 옆에는 큰 돌비석이 있었는데 앞에는 한자로 글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글자를 지운 모습의 비석이 있었다. 당시에는 저게 왜 저렇게 되었을까? 궁금하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조선 총독 미나미 (南次朗)가 조선 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고령 향교 옆에 전면에는 任那大伽倻國城址 뒷면에는 연호와 이름을 새긴 비석을 세웠는데 고령군민들이 전면 任那라는 글자와 뒷면의 이름을 지운 비석이다.
그리고 20년 정도 출타하고 그 곳에 가보니 비석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지금은 독립기념관에 있다고 한다.
그런데 1984년 중국학자 왕건군이 발표한 광개토대왕비문 연구논문에선 래도해파(來渡海破)가 왜곡되지 않았다고 발표 하여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을 간접으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지나친 국수주의적인 역사관과 불확실한 논문에 의거하기 보다는 언젠가는 이 비문을 내용을 뒷받침하는 유물이 발굴되어 올바른 역사가 정립되기를 바랄뿐이다.
무덤으로 들어가는 입구 앞에는 철문이 달려 있고 안에 발을 들이자 호태왕릉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싱거웠다. 정말 몇 발자국 옮기지도 않았는데, 그것이 그냥 석실 내부의 끝이다. 원래 관이 안치되어 있었을 자리에는 받침돌만 덩그러니 냉기를 뿜으며 놓여 있고, 관광객들이 재미로 뿌리고 갔을 동전, 중국 지폐들만이 여기저기 널러 있었다.
어쩜 우리 한국 관광객을 위한 볼거리 장으로 만들어 놓은 것 같은 느낌이다.
능에서 바라본 도시가 바로 호태왕이 눈을 뜬다면 기가 막혀 다시 돌아가실 분단된 우리네 북한 땅 만포시 이다.
빨리 이동하여야만 어둡기 전에 장수왕릉을 볼 수 있다기에 걸음을 재촉하고 버스로 10여분 거리에 있는 장수왕릉으로 향했다.
고구려는 705년의 역사를 거쳐 28명의 왕이 있었는데, 그중 18개의 왕릉이 길림성 집안 동구(洞沟) 옛 무덤군에 분포됐다고 한다. 확인된 왕릉 중 제일 완벽하게 보존된 하나로 뾰족한 추형(锥形) 외관으로 하여 《동방의 피라미드》로 불리고 있다
장군총은 화강암표면을 정성들여 가공한 석조(石条)를 7단의 스텝 피라미드형으로 쌓았다. 밑 부분은 정방형에 가까우며 기단(基壇)의 한 변은 31.58m, 1100여개의 석조를 22층으로 쌓아 올린 것으로서 높이는 12.40m에 달한다.
장군총은 거대한 석조사이에 조약돌을 메워 놓았으며 자신의 무게로 하여 외부로 생기는 장력이 생겼다. 이런 장력을 상쇄(抵消)하고 견고성을 보장하기 위해 사면에 10톤짜리 거석 3개씩 눌러놓았는데 현재는 11개만 남아있다.
이런 거대한 돌들은 전부 22km 밖의 채석장에서 운반해온 것이라고 한다.
집안시의 화려한 야경에 비하여 장수왕릉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도로는 차 두대가 교행하기 힘들고, 불빛이 없는 시골마을에 더워서 문밖에 앉아있는 사람들이며 간간히 들리는 개짓는 소리는 어린 시절 내가 살던 모습을 생각나게 하는 60년대 시골 풍경이다.
북한에서 운영하는 묘향산 식당에서 저녁을 먹기 위해 집안시내로 접어들었다.
가는 길에 고구려 옛 산성인 국내성이 보였는데, 성이라고 하기엔 너무 낮은 느낌이다. 하기야 1,500여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의 모습이야 제대로 있겠냐마는 그래도 너무 낮다. 아파트 담장으로 사용된 듯한 국내성벽을 지나 식당의 모습이 보였다.
마침 저녁식사 때라 한국 사람도 드문드문 보이고 대부분이 중국사람 같았다.
예쁜 북한 여자 종업원이 사무적인 태도로 내어놓은 음식은 별로 특이한 것은 없어나 우리 입맛에는 맞는 음식이다. 말도 별로 없고 친절하지도 않고 그저 사무적이면서, 바쁜 듯이 음식을 내어 놓고는 종업원들이 무대에서 공연을 한다.
집안을 떠난 지 약 두세 시간이 지난 밤 11시경 화려한 통화의 야경이 눈에 들어온다. 시내 중앙을 흐르는 강에 비친 통화의 야경은 참으로 아름다웠으나 너무 늦은 시간이라 들릴 수는 없고 호텔에서 여장을 풀자마자 하루 종일 시달린 버스 여독에 나도 모르게 깊은 잠에 빠졌다.
07시 20분 우리가 탄 버스는 백두산을 오르기 위해 집안에서 4시간 거리에 있는 이도백하로 향했다. 획일적 모양의 농촌 주택 모습과 옥수수 밭이 끝없이 이어지는 길을 가다가 마을 구판장보다 못한 휴게소라는 곳에 들러 먹어보고 사라는 권유에 못 이겨 북한산 도라지와 석이버섯을 구입하고 다시 이도백하로 향했다.
이도백하란 백두산천지에서 두 갈래로 흘러내려오는 깨끗한 물이라는 뜻으로 원래 연변자치구(연변조선족자치주 안투현, 延邊朝鮮族自治州 安圖县)에 속해있었지만 동북공정 때문인지 2005년 백두산관리권이 길림성으로 이관되었다고 한다.
큰 도로변은 그런대로 개발이 되었는데 반해 골목길을 들어서면 조그마한 판잣집이며, 먼지가 날리는 비포장도로 우리의 60년대를 생각하게 한다.
호텔을 출발할 때 빗방울이 약간 들어 천지를 보지 못할까봐 내심 걱정을 하였는데 다행히 쾌청하지는 않아도 그런대로 괜찮은 날씨였다. 울창한 숲속에 놓인 도로를 약 30여분 지나 장백산 입구에 도착했다. 백두산에 오를 수 있는 코스는 동서남북 사방에서 올라오는 길이 있다고 한다. 그 중에 북과 서는 중국에서, 동과 남은 북한에서 올라올 수 있다. 우리가 가는 코스는 백두산 북파코스이다. 북파는 험준한 산세를 자랑하고 장백폭포를 볼 수가 있고, 서파는 완만한 고산지대를 이루어 백두산의 유명한 야생화와 금강대협곡을 볼 수가 있다고 한다.
천지까지는 5분쯤 걸어가면 된다. 등정이라기 보단 관광이다. 기대를 걸고 올라왔는데 정상 부근은 비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한기를 느낄 정도로 기온이 차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준비한 외피 옷을 걸쳐 입고 100여 m 되는 계단을 올라갔다. 몇 분의 선생님은 얼굴이 창백하다. 아마 올라올 때 너무 차가 심하게 요동치는 바람에 차멀미를 하신 것 같다.
한마디로 민족의 영산이란 말이 그냥 생기게 아닌 듯하다. 너무나 큰 호수에 짙푸른 색은 무서울 만큼 웅장하고 장엄하다.
그러나 우리 땅 우리의 강산인데 멀리 멀리 돌아 남의 땅에서 보는 천지의 모습은 가슴이 시리도록 감회어린 풍경이지만 나도 모르게 마음 한구석은 울적한 기분이 자리 잡고 있었다. 눈가를 적신 물은 천지수면 거센 바람 따라 올라온 푸른빛의 물만은 아니리라......
순간을 놓칠세라 정신없이 천지를 배경으로 사진을 담고 있는데 언제 보였느냐 싶을 정도로 다시 운무로 천지의 모습을 덮어버렸다.
남이장군의 북정가가 생각난다.
「白頭山石 磨刀盡 豆滿江水 飮馬無 男兒二十 未平國 後世誰稱 大丈夫」
슬그머니 조그마한 백두산 돌을 주머니에 하나 집어넣었다.
마치 마술하듯 흰 장막 너머로 천지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곤 하는 변덕은 보여줄 사람을 골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오전에 온 사람은 천지를 보지 못했단다.
관광 삼아 올라온 중국 사람들도 천지를 많이 구경하고 있지만 그 사람들이 보는 천지와 우리가 보는 천지의 모습은 다를 것이다.
백두산은 최고봉인 장군봉(2,750m)을 비롯해 망천후(2,712m)·백운봉(2,691m)·청석봉(2,662m) 등 높은 봉우리에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천지는 해발 2,190m, 면적 9.165㎢, 둘레 14.4㎞, 평균너비 1.975㎞, 최대너비 3.550㎞, 평균수심 213.3m, 최대깊이 384m의 거대한 호수이다.
내려가는 차속에서 자꾸만 나도 모르게 뒤를 바라본다. 아름다운 산정의 모습은 흔들거리는 차속에서는 도저히 담을 수가 없었다.
장백폭포를 만나러 환승버스를 타고 우측 계곡 방향으로 올라갔다.
폭포 주위에 백두산으로 올라가는 계단인 듯한 인공 구조물이 눈에 거슬린다.
60여m나 되는 갈라진 두 갈래 물줄기 중 동쪽 많은 물은 송화강의
버스를 타고 장백산 산문에 내려오는 중 좌측에 소천지라는 안내문이 보였고 많은 사람이 그 길로 향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저녁을 먹기 위해 점심때 들린 이도백하 식당에 들렀다.
호텔까지는 이도백하에서 4시간여 거리이다. 무료한 차내에서 가이드가 건넨 들쭉술로 주거니 받거니 화기애애하게 올 수 있었다. 현지 가이드는 북한 화교출신으로 북한 실정을 잘 알고 있었으나 역사적인 지식이나 특히 고구려 역사에 대해서는 별로 지식이 없는 것 같다.
몇 분의 선생님은 차내의 술기운이 호텔까지 이어졌다. 6시 모닝콜에 피곤한 몸을 추스르고 아침 식사 후 관광버스에 승차했다. 오늘 일정은 오녀산성과 압록강 단교를 관람 후 승선하는 일정이다.
패키지로 가는 여행은 의례적으로 거쳐야하는 매장에 들렀다. 팔기 위해 갖은 방법으로 회유를 했지만 귀를 막고 구입하지 않았다.
20여년전 처음 해외여행으로 대만에 들러 도자기니 목각이니 등등 많은 것을 구입하여 집에 가져와도 쓸모없는 물건으로 되었다. 그 이후로는 우리 식구들은 해외여행을 갈 때 마다 그 나라를 상징하는 간단한 기념품만 사기로 하고, 올해까지 관광 차 다녀온 35개국 기념품은 기억에 남는 물건 한두 개만 구입 하곤 한다.
주차장 규모가 넓은 것을 보니 중국인도 많이 오는 관광코스인 듯하다.
박물관 주차장에서 멀리 보이는 곳에 마치 여인이 누워있는 모습이 오녀산성 이다. 고구려의 졸본성이다. 중국 전설에 의하면 오녀산성이라는 이름은 아주 오랜 옛날 이곳에 다섯명의 여신이 살아 산과 마을을 수호해 주었는데 흑룡과 싸우다가 전사해 이를 기리기 위해 붙여졌다고 한다.
광개토대왕릉 비문 앞부분에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아! 옛날 시조 추모왕께서 처음으로 기틀을 세우셨도다.)
于 沸流谷忽本西, 城山上而建都焉.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에서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우셨도다.)
비류곡이 지금의 혼강이니 모든 정황으로 미루어 오녀산성이 졸본성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산성 관람 시간이 약 3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하여 이번 여행에서는 시간상 이곳을 오르지 못하는 아쉬움이 크다. 언젠가는 한번쯤 가봐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차내에서 착잡한 마음으로 마이크를 잡은 하 선생님이 중국 사기나 우리의 삼국사기에 기록 된 고구려 역사에 대하여, 그리고 동북공정과 임나일본부설과, 광개토대왕비 비문 변조설 등에 대한 견해를 듣는 아주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일행 중 내 뒷좌석에 앉은 서울대 학생도 열심히 경청하고 박수를 치는 모습이 많은 도움이 되는 모양이다.
고속도로와 일반도로를 번갈아 약 두 시간 정도 달려 오늘의 마지막 관광코스인 단동시내 압록강 단교에 도착했다.
하기야 빈곤이란 상대적이니까 느끼는 감정이 우리하곤 다르겠지만 인지상정이라 저 사람도 보고 느끼는 것은 별반 다르지는 않으리라 생각하면서 발길을 돌렸다.
단동시가지 날씨도 대구와는 비교가 되진 않지만 더운 날씨라고 한다. 이곳 사람들은 30도만 되면 난리란다. 남자들은 상의를 탈의하여 다니거나 앞부분을 위로 젖혀 배가 다 보이도록 다니는 게 이젠 낯설지가 않다.
일행들과 같이 동방명주 갑판에서 시원한 해풍을 맞으며 가지고온 술로 여독을 풀고 올 때와는 달리 나도 모르게 잠에 골아 떨어졌다.
이런 저런 바쁜 일정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다가 글을 쓴 게 여행을 마치고 보름이 지나서였다. 그래서 그런지 현장감이 살아나지 않고 공대출신이라 역사지식은 물론 고구려에 대한 아는 것이 별로 없다고 자위를 하면서도 나름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아직까지 머리에서 살아지지 않는 운무속의 천지 모습이 다시 발길을 유혹한다. 이젠 간다면 사랑하는 마눌님과 서파 트래킹 코스로 등정하면서 백두산의 야생화를 렌즈에 담고 싶고 금강대협곡과 소천지가 보고 싶다. 그리고 시간 관계상 그저 눈요기 거리로만 지나쳐 버린 위화도, 집안의 장군총과 국내성, 오녀산성(졸본성), 고구려 박작성 등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올 수 있기를 바란다.
중국의 동북공정 현실과 접하기 어려운 고구려의 유적과 우리민족의 영산 백두산 천지의 웅장함, 분단 민족의 안타까움 등을 기억이 사라지기전에 솜씨 없는 글재주로 부족한 부분은 인터넷을 찾기도 하고 먼저 다녀온 사람들의 글도 참조하여 4박5일의 추억을 글로 남기고자 노력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해박한 지식으로 우리에게 고구려 역사 안내를 해주신 하종혁 선생님, 해외여행 경험이 많아 안전하게 리드한 주영환 선생님, 그리고 대구에서 인천까지 고생스럽게 직접 왕복운전을 하신 룸메이트 한문 김진현 선생님, 분위기 메이크 역사 박순구선생님. 멋쟁이 조주희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글을 맺고자 한다. (여행기간 : 2013년 8월13일 ~ 8월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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