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컴 특집기사1] 역전의 용사 베컴, 새로운 도약을 꿈꾸며, LA로 가자

[황제의꿈]

전편...

영국 언론지면에 빠지지 않는 단골 손님이 있다. 특히나 흥미위주로 쓰여진 몇몇 가십지는 애타게 기다리는 팬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기라도 하듯 그에 관해 연일 시끌시끌 이야기 꺼리들을 만들어 낸다.

데이비드 베컴, 올해 한국나이로 32살이 된 이 사나이에게 영국인들은 왜 그리도 혈안이 되어 있을까? 방송과 언론은 모두들 특종이라며 기사들을 쏟아내고 ‘베컴 살리기’와 ‘베컴 죽이기’를 반복해서 하고 있다.

● 런던 촌뜨기, 맨유에서 날개펴다

1975년 어느 화창한 5월, 런던을 찾는 한국인 쇼핑족들이라면 한번쯤 둘러봄직한 하크니(Hackney)의 버버리 직판매장과 이영표가 소속되어 있는 토튼햄에서 그리 멀지 않는 런던 동부 레이톤스톤(Leytonstone)에서 태어난 베컴은 어릴적부터 축구광이었다고 한다. 특히 맨유팬이었던 그는 늘 빨간색 유니폼을 입고 다닐 정도로 열광적이었다.

하지만 그가 첫 발을 내딘 팀은 토트넘 홋스퍼, 특히 유소년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는 토트넘은 런던 시내를 오가면서 “유소년 프로그램 0월 0일 시작합니다” 라는 대형 광고판들도 눈에 띄게 볼 수 있는 구단이다. (지난해에는 한국의 모 스포츠지와 계약을 맺어 호주에서 동계 축구 프로그램도 시작하는 등 다른 구단 못지 않게 비즈니스적인 측면으로도 강한 팀이다.)

자신이 바라던 맨유로 가지 못하고 토트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베컴은 늘 맨유로 갈 수 있다는 ‘꿈을 품는 자’였다고 한다. 결국 그의 꿈은 머지않아 성취됐다. 보통 8세부터 언더 19세까지 2살 터울로 팀을 구성하는 유소년 팀에서 연령과 실력에 따라서 감독의 눈에 들때면 1군과의 계약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12세 때 이미 ‘보비 찰튼 축구 기술 경연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그는 런던외곽에 위치한 에섹스(Essex)주의 대표로 활약하기도 했으며 그 가능성을 인정받아 16세가 되던 해 유소년 발굴에 힘을 쏟던 퍼거슨 감독의 눈에 든 것이다. 

물론 토트넘의 테리 베너블즈 감독도 프로팀으로 영입할 것을 제안하며 베컴의 장래성을 예견했지만 그의 선택은 단연 맨유였고 퍼거슨 감독이었다. 늘 유망주 발굴에 고심했던 퍼거슨에게 베컴은 긱스와 네빌형제 그리고 스콜스등과 함께 맨유를 이끌 차세대 주자로 점 찍힌 것이다.

사담을 잠깐 곁들인다면 사실상 유소년으로 유명 구단에 들어 갔다가 팀을 떠나는 사례가 허다하다. 한국인으로 플햄구단 유소년 팀에 들어갔던 신은석 선수같은 경우 아쉽게도 1군의 부름을 받지 못하고 떨어져 나간 경우이다. 이들은 대부분 하위팀으로 강등되어 그곳에서 다시 도약을 꿈꾸며 절치부심(切齒腐心)의 자세로 혼신의 힘을 다한다. 냉혹한 프로세계에 도전해 다시 살아남기 위해서 말이다.

1991년 7월 8일, 베컴은 드디어 맨유에 입성하게 된다. 그토록 그리던 맨유, 늘 축구를 관전할 때면 맨유를 응원했다는 베컴은 꿈에도 그리던 맨유에서 작은 날개짓을 시작했다. 무서운 퍼거슨 감독이었지만 저 사람을 믿고 따라가면 성공할 수 있겠구나라는 확신에서였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퍼거슨 감독은 프리미어 리그에서부터 컨퍼런스 팀 선수들까지 한눈에 파악할 정도로 모든 선수들의 신상명세를 꽉 꾀고 있다고 한다. 그만큼 선수들에 대한 깊은 통찰과 평가를 바탕으로 자신의 팀에 가장 적합한 선수를 찾아 낸다는 것이다. 베컴도 이러한 점에 반했다. 명철한 퍼거슨 감독을 신뢰할 수 있었다.

비록 에릭 칸토나, 라이언 긱스, 칸첼스키스등 쟁쟁한 선수들이 버티고 있었지만 말이다.

● 반전의 드라마, 역적에서 영웅이 되기까지

그렇게 시작된 맨유에서 그는 자신의 화려한 시절을 개막하듯 좋은 활약을 펼친다. 1994/95시즌에는 한달 여간 다른 팀으로 임대되기도 했지만 한층 성장한 모습으로 맨유에 다시 합류해 선발을 꾀찼다. 1995년 4월 2일 리즈 유나이티드와의 홈경기에서 드디어 첫 데뷰의 영예를 얻는다. 어린 나이인 베컴으로서 이런 기회는 평생 잊지 못할 순간과도 같은 것이었다.

비록 그가 가장 좋아하는 포지션이 중앙 미드필더였지만 감독이 지시한 우측 미드필더 포지션도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이 자리가 그 누구도 넘 볼 수 없는 자리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그런 노력이 있었기에 베컴은 줄 곧 맨유의 우측 자리의 주인이 되었다.

화려한 킥력을 자랑하던 베컴은 미드필더로서 꼭 필요한 때에 골을 성공시키면서 전문 프리킥커로 자리잡았고 1995/96 시즌 맹활약을 펼친 덕에 그때 당시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인 글렌 호들의 눈에 들어 잉글랜드 대표팀에 발탁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떫은감이 홍시가 되듯 베컴의 실력도 그라운드에 녹녹히 젖어 들었다. 대표팀에 발탁된 이듬해 1996/97시즌 기간 동안 맨유에서 뚜렷한 활약상을 보여준 덕택에 동료 선수들이 뽑는 '올해의 선수상(Professional Footballer’s Association)'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하지만 인간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했던가? 탄탄대로를 향해 걷고 있던 베컴은 난관에 봉착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숙적인 아르헨티나와 치른 16강전에서 보복성 반칙으로 퇴장 당했고 수적인 열세에 몰린 잉글랜드 대표팀은 결국 2대 2로 비긴 후 승부차기 끝에 3대 4로 패하고 말았다. 

‘축구 종가’의 자존심이 무너지자 잉글랜드 팬들과 언론은 희생양을 찾았고 베컴은 이름대신 ‘얼간이(Stupid Boy)’라는 칭호를 받으며 숱한 질책과 비난을 몸소 체험해야만 했다. 승승장구할 줄만 알았던 자신의 앞날에 찬물을 끼얹는 안타까운 나날이었다. 하지만 의기소침한 그에게 늘 든든한 후원자로 다가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레드즈(Reds)라고 불리는 맨유 서포터들은 그에게 새 힘을 불어 넣어 주었고 프랑스 월드컵 직후 시작된 1998/99 시즌에 맨유가 트레블을 달성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울 수 있도록 열띤 응원의 함성으로 그를 끌어 안았다. 

맨유 팬들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바이에른 뮌헨과의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1대 0으로 뒤진 후 전광판이 멈춘 절체절명의 위기상황, 이 때 테디 셰링엄의 극적인 동점골이 터졌고 바로 1분 뒤에는 슈퍼서브 솔샤르의 역전 결승골이 맨유 팬들의 가슴을 찢어 놓았다. 그리고 부메랑처럼 휘어드는 크로스로 숨은 조력자역할을 담당한 베컴은 트레블 달성, 그 중심에 서 있었다. 

 위의 사진은 트레블과 상관없음(맨유대 리즈 유나이티드의 프리미어십 경기에서 숄사르의 골장면)

“베컴을 비난하기는 쉽다”라는 제목으로 글을 쓴 ‘더 타임즈’의 휴 맥버니 기자도 “늘 베컴을 곱씹기에는 좋은 꺼리들이 다분하다. 하지만 필요할 때에 빛을 발하는 그를 우리는 항상 필요로 한다”며 잉글랜드와 맨유에서 베컴의 존재가 크다라는 것을 각인시켜 주기도 했다.

컴퓨터 택배 크로스라 불릴 만큼 날카로운 크로스와 프리킥의 달인으로 정평이 나 있던 베컴은 드디어 자신에게 질책을 가했던 잉글랜드 팬들에게도 값진 골로 보답하게 된다. 2002 한·일 월드컵 지역 예선 마지막 경기였던 그리스전, 또 다시 전광판의 시계가 멈춘 상황, 마지막 프리킥이 끝나면 예선탈락이라는 비참함 속에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는 현실, 운명의 추는 베컴의 마음을 저울질 하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공을 살며시 그라운드에 올려 놓은 베컴은 침착하게 스텝을 밟으며 프리킥을 쏘아 올렸고 포물선을 그린 공은 어느새 골대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순간 깊은 바닷물보다 차갑고 고요해진 올드 트래포드 경기장은 어느새 환희에 찬 함성의 도가니로 돌변했다.

베컴의 프리킥 골로 인해 2대 2 무승부가 된 잉글랜드는 본선행 티켓을 거머쥘 수 있었다. 훗날 베컴은 “모든 팬들이 기립박수를 보내는 순간 끝없는 좌절의 터널을 통과한 것 같다”라며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이기도 했다.

베컴의 빛나는 전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포클랜드 전쟁과 마라도나의 ‘신의 손 사건’으로 인해 보이지 않는 골이 깊은 아르헨티나와 2002 한·일 월드컵에서 ‘죽음의 조’로 또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98 프랑스 월드컵에서 비신사적인 반칙으로 인해 뼈아픈 퇴장 경험을 한 베컴에게 둘도 없는 설욕의 찬스, 마이클 오웬이 얻어낸 패널티킥을 대표팀 전문키커인 베컴이 맡았다. 떨리는 극적인 순간, 또 다시 조롱거리로 내 몰릴 것인가? 아니면 쓰디쓴 기억들을 이 발길질 하나에 날려 보낼 것인가?

패널티킥을 준비 하는 베컴에게 두 사람이 다가와 염려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한 명은 팀 동료인 마이클 오웬이었고 또 한 명은 지난 98 프랑스 월드컵에서 오버액션으로 퇴장을 유도한 아르헨티나의 시메오네, 오웬은 걱정되는 듯 자기가 차겠다고 했지만 베컴은 이를 거부했다. 마찬가지로 능청스럽게 심리전을 펴며 “저쪽으로 차는 게 좋을거야”라고 말하는 시메오네의 권유도 뿌리쳤다. 오로지 골키퍼와 1대 1 상황, 신은 극적인 드라마를 만드는 마술사였다. 몇 초가 채 지나지 않아 베컴의 손이 번쩍 들어 올려졌다. 골이었다. 

후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