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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전례원 - 韓國典禮院 - ( jeonyewon ) 원문보기 글쓴이: po2855
예천군 보문면 미호동 출신. 초명은 철. 자는 실부, 호는 별동.
예천군의 향리인 선의 아들로 태어나서 과거를 통하여 양반신분으로 올랐다. 향리 역에 종사하면서 퇴식을 오가는 사이에 솔기름을 취하여 몰래 숨겨두었다가 밤에 책읽기에 쓸 정도로 끈기있는 노력을 기울였다.
정몽주의 문인으로 성리학에 밝은 趙庸이 1392년(태조 1)에 역성혁명을 반대하여 예천에 유배되자, 조말생て배강 등과 함게 수업하여 그 문인이 되고, 그해에 진사시에 합격한 뒤, 이듬해에 생원시에도 합격하였다.
趙庸이 어느날 윤상을 시험하기 위해 아무도 모르게 장지문 위에 물 한그릇을 올려 놓고 지금 소나기가 올 것 같으니 모든 장지문을 내리라고 윤상에게 명했다. 조금 후에 윤상이 시키는대로 했다고 복명하자 조용은 「장지문 위에 아무것도 없더냐」고 물었다. 「물이 한그릇 있었습니다.」는 윤상의 말에 조용이「그것을 어떻게 알았느냐」며 묻자 「혹 장지문에 무엇이 있으면 다칠까 염려되어 긴 막대기로 장지문을 튐어보니 무엇이 닿기에 올라가 보니 물그릇이 있었습니다.」고 대답했다. 윤상의 조심성과 침착성에 탄복하여 조용은 윤상을 제자로 받아들여 훌륭한 사람으로 키우기로 마음먹었다.
1396년(태조 5) 24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선산て안동て상주 및 한성 서부 등지의 교수관을 거쳐, 예조정랑 때 서장관으로 연경에 다녀와서 성균관사예가 되었다. 가친이 연로하여 외직을 청하여 황간て영천て대구 등지의 군사를 맡은 뒤, 사성을 거쳐 대사성에 발탁되었다. 1448년(세종 30) 예문관제학으로서 원손(단종)의 입학례를 거행할 때 특명으로 박사가 되어 선비들이 이를 영예로 여겼다. 오랫동안 성균관의 교육에 종사함으로써 그 문하에 과거에 합격하여 이름난 사람들이 많았다.
문종 초에 고령으로 고향에 돌아가게 되니, 국왕이 사궤(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음식물)를 내렸느데, 고령으로 은퇴하는 재상에게 궤물을 내리는 제도는 이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향리에서 자제들을 가르치다가 3년여 만에 83세로 일생을 마쳤다.
조용을 통하여 정몽주의 학통을 이은 그는 특히 세종대에 성균관 교육에 종사함으로써 왕조 초기의 중앙학계에 성리학의 기운을 진작, 유지시키는 데 기여하였으며, 개별적으로는 김숙자에게 <주역>을 가르쳐 정몽주 계열의 도통에 학문적으로 크게 기여하였다. 경학에 밝았을 뿐 아니라 문장에도 매우 능하였다. 저서로는 <별동집>이 있다.
윤상은 기지도 남다른 데가 있어 어린이 동화집에 자주 등장하는 「거위와 구슬」이야기도 그와 관련된 것이다. 한번은 윤상이 길을 가던 중 날이 저물어 주막에 묵게 되었는데 어린 주인집 아들이 값진 구슬을 갖고 놀다가 떨어뜨리자 옆에 있던 거위가 삼켜버렸다. 조금후 주막집에서는 구슬이 없어졌다고 야단법석이 일어났다. 결국 구슬 행방에 대한 혐의가 윤상에게 돌아왔다. 주인이 윤상을 관가에 끌고가려하자 그는 태연히 거위의 다리를 노끈으로 묶어 내 옆에 있게 한다면 반드시 구슬을 찾게해 주겠다고 주인에게 말했다. 이튿날 아침 거위똥속에서 구슬을 발견한 주인은 너무 민망하여 윤상에게 백배사과 하면서 그 사실을 알면서 왜 이야기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윤상은 웃으면서 어제 저녁에 말했다면 당신은 급한 마음에 거위를 죽였을 것이 아니냐고 했다.
별동 윤선생(상) 신도비명
선생의 성(姓)은 윤씨(尹氏)로, 처음의 이름은 철(哲)이고, 고친 이름은 상(祥)이며, 자(字)는 실부(實夫)이다. 선생은 출신이 한미(寒微)한 까닭에 가승(家乘)과 세보(世譜)로 증거할 것은 없고, 예천(醴泉)에 살았으므로 예천으로 관향을 한다. 휘(諱)에 충(忠)이 증 예빈소윤(贈禮賓少尹)이고, 휘에 신서(臣瑞)는 증호조참의(贈戶曹參議)이고, 휘에 선(善)은 증공조참판(贈工曹參判)인데 선생에게 증조, 조부, 아버님이며 선생의 귀(貴)로 추증(追贈:자손이 높은 벼슬에 오르면, 죽은 그의 선대에게도 벼슬을 주던 일)되어 이름이 드러나게 되었다. 또 참판공(參判公)은 후덕하고 공근(恭謹)함으로써 고을에 이름이 넘쳤으니, 선(善)을 쌓은 집에 경사가 많은 법이니 당연히 선생이 태어났다.
선생은 홍무(洪武:명태조의 연호 1368~1398)의 계축(癸丑:고려 공민왕 22년, 1373) 10월 10일에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남다른 자질이 있어서 총명이 또래들보다 뛰어나서, 어릴 적 장난하는 행동에 벌써 대인(大人)의 발자취를 갖추게 되었다. 겨우 학교에 갈 나이가 되자 책읽기를 권하는 말을 기다리지 않은 채, 쉬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였으니 대체로 그의 천성이 그러했던 것이다. 일찍 아역(衙役:지방 官衙에서 부리는 下隷)을 맡았는데, 낮에는 맡은 일을 부지런히 행하고 밤에는 공무에서 물러난 뒤에 관솔불을 밝히고 책읽기를 그치지 않았다. 더욱이 성현(聖賢)의 경전(經傳:성인의 저술을 경, 현인의 저술을 전이라 한다)에 힘을 쏟아 미묘하고 깊은 뜻을 탐구하여 깨우치지 못하면 중지하지 않았다. 학문과 지혜가 함께 나아가고 지혜와 행실이 함께 성취되어 어린 나이에 훌륭한 명성이 벌써 날마다 창성하여졌다.
조선 태조가 나라를 처음 세운 임신(壬申, 태조 원년, 1392)에 진사(進士)가 되고 계유(癸酉, 태조 2년, 1393)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으며, 24세에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그 뒤의 벼슬 경력은 다음과 같다. 선주(善州)·보주(甫州)와 서울의 서부, 상주, 안동 등 다섯 곳의 교수(敎授)와 산음(山陰)·황간(黃澗)의 감무(監務)와 금산(金山)·영천(榮川)·대구(大邱)의 군사(郡事)와 경창부(慶昌府)의 소윤(少尹)·부윤(府尹), 정조사(正朝使)의 서장관(書狀官), 교서관 교리(敎書館敎理), 성균관(成均館)의 직강(直講)·사예(司藝), 형조(刑曹)와 예조(禮曹)의 정랑(正郎), 종부시 소윤(宗簿寺少尹)을 거쳐 46세 이후로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니 학문의 명망이 날로 유성해졌기 때문이었다. 49세에 문종(文宗)이 세자(世子)로서 입학할 때, 박사(博士)가 되고, 63세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65세에 성균관 유생들이 산으로 유람한 일 때문에 두 차례 추문(推問:죄상을 밝히기 위하여 힐문함)을 당하였으나, 조금도 혐의를 두지 않으니 유생들이 더욱 경복(敬服)하였다. 이 때 흥천사(興天寺)의 탑을 중수(重修)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그 규모가 매우 굉장하고 화려하였다. 유생들과 함께 불교를 배척하는 상소(闢佛疏)를 올렸는데, 지극히 엄격하고 정당하여 유도(儒道)를 보호하는 큰 공이 있었다.
66세에 임금이 또 세자에게 ‘주역(周易)’을 강의하게 하여 임금의 장려를 받고 좌보덕(左輔德)에 올랐는데, 강의를 마치자, 제생(諸生)들의 소원에 따라 다시 사성(司成)에 임명되었으며, 70세에 나이가 많으므로 벼슬을 그만두려 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고 전의 관직을 도로 받게 되었다. 72세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예문제학(藝文提學)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고, 75세에 가정대부(嘉靖大夫)의 품계로 진급되었으며, 또 관직에 새로 임명될 때마다 대사성(大司成)을 잉겸(仍兼:종전대로 경임하는 일)하니, 덕행으로서의 인망(人望)이 더욱 높아진 때문이다. 76세에 단종(端宗)이 세손(世孫)으로서 입학할 때, 임금의 특명으로 재차 박사가 되어 원손(元孫)에게 스승의 예를 받았다. 78세에 나이가 늙음으로 벼슬을 그만두자, 임금이 승정원(承政院)에 명하여 술을 하사(下賜)하고 전송했는데, 양양(襄陽)의 별동(別洞)으로 돌아와 후진(後進)을 교수(敎授)하였다. 단종2년(1454)에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전 제학(提學) 윤상은 기력과 총명이 아직 쇠퇴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국학(國學)에 두어 유생들을 권장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의정부에서는 나이가 높아 초치하기 어렵다고 의논하여 결국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역사의 기록을 참고하면 우참찬(右參贊)의 칭호가 있었는데, 무슨 연유로 족보(族譜)에 빠졌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역사에 어찌 아무 증거없이 그렇게 일컬었겠는가?
을해(乙亥, 단종3년, 1455) 3월 9일에 세상을 버리니 향년이 83세이었다. 성(城)의 북산(北山) 동향(東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그 뒤 의정부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안동 사람 낭장(郎將) 전경충(全敬忠)의 딸에게 장가들어 5남 3녀를 낳았다. 아들 백은(伯殷)은 교수이고, 중은(仲殷)은 생원, 숙은(叔殷)은 전직(殿直), 계은(季殷))은 현감(縣監), 흥은(興殷)은 훈도(訓導)이다. 사위는 태을전직(太乙殿直) 권효당(權孝當), 별시위(別侍衛) 임형(林泂), 승사랑(承仕郞) 고영석(高永碩)이다. 백은의 두 아들은 수생(遂生)·선생(善生)이고, 숙은의 두 아들은 기부(起夫)와 참봉(參奉)인 면부(勉夫)이며, 홍은의 세 아들은 신형(莘亨)과 참봉인 신경(莘耕)과 진사(進士)인 신연(莘連)이다. 수생의 두 아들은 시좌(時佐)·시우(時佑)이고, 딸은 창봉인 김계원(金繼元)의 아내이며, 선생(善生) 아들은 부장(部將)인 보상(輔商)이다. 면부의 외아들은 참봉인 팽석(彭錫)이고, 신경의 외아들은 첨정(僉正)인 창문(昌文)이며, 신연의 두 아들은 직장(直長)인 정(禎)과 봉사(奉事)인 희(禧)이다. 그 밖은 다 기록하지 못하고, 5대손 정란(庭蘭)은 생원인데 문학으로 이름이 있었으며, 흠신(欽信)·흠도(欽道)는 모두 임진왜란 때 절의를 지키다 죽어서 정(正)에 증직되고 아울러 정려(旌閭)를 받았다.
아! 지금 선생의 시대와의 거리가 500여년이나 되었기에, 후생 말학(後生末學)으로서 선생의 발자취를 만분의 하나라도 찾을 길이 없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국사(國史)·야승(野乘:野史임) 및 선현들이 평론한 믿을 만한 기록들을 참고하여 모아 엮어서 증거할 바를 만든다. 서사가(徐四佳:사가는 徐居正의 호)의 ‘필원잡기(筆苑雜記)’에 대략 말하기를,
“윤공이 성균관의 장관(長官)이 되었는데 학문이 매우 정밀하여 자세하고 세밀히 분석하였으니, 국조 이래로 스승 중에 최고가 되었다.”
하였고,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실린 바를 요약하면,
“고려 문사(文士)들은 모두 시(詩)·소(騷:文體의 하나. 屈原의 離騷에서 시작되었다.)로 업을 삼았으나, 오직 포은(圃隱:鄭夢周의 호)이 처음으로 성리학을 주창하였다. 그 뒤 스승의 책임을 맡은 사람은, 황현(黃鉉)·윤상(尹祥)·김구(金鉤)·김말(金末)·김반(金泮)인데, 윤상이 가장 정밀하였다.”
하였다.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에서는,
“김사예(金司藝:사예는 성균관의 종4품 벼슬) 숙자(叔滋)는 경전(經傳)에 독실한 뜻을 두고 염락(濂洛)·고정(考亭)의 학문을 탐구하였다. 윤상이 황간(黃澗)의 수령(守令)으로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가서 ‘주역’을 배웠는데, 음양 변화(陰陽變化)의 이수(理數)와 일의 근원을 깊이 궁구하고 일의 마지막을 연구(原始要終)하는 학설을 탐구하여 그 오묘한 이치를 모두 터득하였다.”
하였고, 점필재(佔畢齋:金宗直의 호)의 ‘이존록(彛尊錄)’에서는,
“윤공은 경학(經學 儒家의 경전(經傳)에 관한 학문)이 정밀하고 깊었고, 남을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김숙자공이 가서 ‘주역’을 배웠는데, 윤공이 그 깊은 이치를 모두 가르쳐 주니, 이리하여 역학(易學)이 크게 밝아졌다.”
하였다. 이는 모두 당시에 직접 보았거나 혹은 사숙(私淑:직접 배우지 않았으나, 그 사람의 학문을 존중하여 따르는 일)한 제현(諸賢)들의 공정한 기록으로써 이미 영원히 믿을 수 있는 증거가 되었다. 더구나 나의 선조 퇴도부자(退陶夫子:퇴계 이황을 높여 이르는 말)는 곧 우리나라의 집대성(集大成)한 현인(賢人)으로 한 글자의 표창이 참으로 금저울(金枰)이 되고, 옥자(玉尺)가 될 수 있으니, 융경(隆慶, 明 穆宗의 연호. 1567~1572) 원년(元年, 1567)에 위천사(魏天使:천사는 明나라의 사신을 높여 이르는 말. 魏時亮을 말함)가 질문한 심학(心學:心·性·理·氣에 관한 학문)과 기자(箕子)의 주수(疇數:洪範九疇에서 말하는 정치에 관한 아홉 가지의 도덕)에 대한 답변에서 대략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신라·고려 두 시대의 선비는 끝내 언어나 글이나 짓는 문장에 있었다. 고려 말에 이르러 정자(程子)·주자(朱子)의 글이 차츰 동방에 전래된 까닭에 우탁(禹倬)·정몽주(鄭夢周)와 조선조의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서경덕(徐敬德) 및 윤상의 무리가 성리설을 연구하였다. 이 때문에 선비의 외우고 익히는 것이 공자(孔子)·맹자(孟子)·정자(程子)·주자(朱子)의 말이 아닌 것이 없었다.”
하였다. 또 이희(李憙)에게 회답한 편지에 대략 말하기를,
“윤선정(先正:先代의 학문이 훌륭했던 儒賢)의 理學의 연원(淵源:학통이 계승되어 가는 근원의 줄기)은 점필재·사가(四佳:서거정의 호) 및 여지승람(輿地勝覽) 등의 여러 책에 이처럼 칭찬하였기 대문에 위 천사가 질문한 심학에 대하여 답하는 말 속에도 윤공의 이름을 열거하였다…….”
하였다. 우리 부자(夫子:퇴계 선생을 말함)는 선생의 세대와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으며, 또 제현들이 보고 들은 실상에 근거하여 평가하고 증명한 것이다. 백세(百世) 뒤에 우리 부자(夫子)의 글을 확실히 믿어 상상하면서 존모(尊慕)하는 마음을 일으키면 거의 선생이 이룬 도덕과 문학의 대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또 그 뒤에 눌은옹(訥隱翁:눌은은 이광정(李光庭)의 호)은 후서(後叙)에서 말하기를,
“경술(經術:儒家의 經傳에 관한 학문)과 문장이 한 시대에 으뜸으로 뛰어났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부화(浮華:실속은 없이 겉만 화려함)를 눌러 없애고 이취(理趣)를 끝까지 연구하였으며, 완전히 익혀지고 물들어서 훌륭한 학문을 도야(陶冶)해 이루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고향에 돌아온지 얼마되지 않아서 경태(景泰)의 일(단종의 손위)이 있었으니, 거의 기미(幾微)를 아는 신(神)이던가.”
하였으니, 이는 모두(선생에 관한 일을) 말하여 쌓인 나머지가 없을 것이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선생의 후손들이 창성(昌盛)하지 못하고 침체되어 무덤 앞의 석물(石物)을 여지껏 마련할 겨를이 없었다. 요사이 비로소 경영하여 신도(神道)에 비(碑)를 세우려고 하면서, 종손(宗孫) 대진(大進)이 그의 족숙(族叔) 도경(道景)과 함께 우진(友進)과 학진(學進)을 여러 차례 나에게 보내어 비명(碑銘)을 청하였다. 나는 참으로 말을 만들어(立言) 후세에 전하게 할 사람이 아니지만, 단지 평소에 태산 북두(泰山北斗)와 같이 경앙(景仰)한 나머지 끝까지 사양하기가 어렵기에, 드디어 참람함을 무릅쓰고 명(銘)을 짓는다. 명(銘)에,
높은 대관령, 긴 낙동강물은
정영(精英)을 기른 바일세.
오계(五季)가 쇠하고, 송(宋)나라가 일어남은
한창 문명(文明)세계로 향함이어라.
한미한 집안에서 몸을 일으켰기에
응당 크고 성한 운수를 만났어라.
선생이 살아실제
정미한 주역·홍범(洪範)의 학문 일으켰고
피음(詖淫)스런 불교의 가르침 배척하였네.
선생의 공적은 세자를 훌륭히 啓導하였고
태학(太學)의 모범이 된 것이오.
도(道)가 한 시대에 행하였어라
점필재는 사숙하였고 퇴계는 드날리게 찬양하였네.
이 명예 영원토록 전해지리!
후학 진성(眞城) 이중린(李中麟)은 삼가 짓다.
윤상(尹祥) 별동집(別洞集)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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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전례원 - 韓國典禮院 - ( jeonyewon ) 원문보기 글쓴이: po28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