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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도(烏瞰圖)
- 詩제1호 -
- 이 상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
(길은막달은골목이適當하오.)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四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五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六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七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八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九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十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
兒孩와그러케뿐이모였소.
(다른事情은업는것이차라리나앗소)
그中의一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좃소.
그中의二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좃소.
그中의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좃소.
그中의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좃소.
(길은뚤닌골목이라도適當하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지아니하야도좃소.
「조선중앙일보」(1934년7월24일)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오감도는 일제치하의 억압된 실존적 불안을 그린 작품으로 자동기술법의 실험적 수법을 사용하여 다다이즘, 초현실주의의 경향을 보이는 난해한 시이다.
반복의 수법을 사용한 이 작품은 피해망상, 과대망상과 같은 병적인 상태에서 쓰여진 것이라 볼 수 있으나, 확대 해석하면 인간애를 역설적으로 표현하였다고 볼 수 있다.
▶ 성격 : 주지적, 관념적, 심리적, 상징적
▶ 어조 : 비판적, 냉소적 어조
▶ 특징 : ① 다다이즘, 초현실주의의 영향
② 실험적 수법
▶ 구성 : ① 13인의 아이가 도로를 질주함(제1연)
② 13인의 아이가 무섭다고 함(제2-3연)
③ 그 중의 어느 아이가 무서운 아이이든, 무서워하는 아이든 무방함(제4연)
④ 13인의 아이가 도로로 질주하지 않아도 좋음(제5연)
▶ 제재 : 실존적 삶의 모습
▶ 주제 : 식민지 지식인의 공포 의식과 좌절 의식.(무의미의 의미. 인간애의 소망)
<연구 문제>
1. 시인이 갈망한 세계는 무엇인지 30자 정도로 쓰라.
☞ 인간애가 회복되어 인간과 인간의 의사 소통이 자유로운 세계
2. 이 시가 초현실주의 기법이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는 까닭을 50자 내외로 쓰라.
☞ 그 까닭은 표현의 참된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운 자동기술의 수법을 섰기 때문이다.
3. 이 시에는 일제치하에서 살았던 우리 지식인들의 어떤 의식이 나타나 있는가?☞ 공포 의식과 좌절 의식
4. 이 시에 사용된 표현 기법을 열거하라.
☞ 상징법, 역설법, 반복법
<감상의 길잡이>(1)
보통의 서정시에 친숙한 독자의 눈으로 보면 이 작품은 매우 어려워서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 난감할 것이다. 우선 표면화된 내용을 좇아 요약해 보기로 하자.
(1) 13인의 아이가 막다른 골목으로 질주한다.
(2) 13인의 아이가 모두 무섭다고 한다.
(3) 그 중 누가 무서운 아이고 누가 무서워하는 아이라도 좋다.
(4) 13인의 아이가 도로로 질주하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여전히 무슨 말인지 종잡을 수 없다. 먼저 13이라는 숫자에 대해 눈여겨 보자. 이 숫자는 어쩐지 불길하다는 느낌을 준다. 서양 사람에 의해 유포된 관념이지만, 예수가 열두 제자와 함께 최후의 만찬을 나눌 때의 사람 수가 열셋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그 중에 누군가가 예수를 밀고했다. 무서운 자가 그들 속에 끼어 있는데, 아무도 그가 누구인지를 모를 때 느끼는 불안감이 심각할 수밖에 없을 터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두가 무서운 아이이고, 모두가 무서워하는 아이들이기도 하다는 말이 된다. 이 불안이 13인의 아이를 질주하게 한다. 공포로부터의 탈출인 셈이다. 그런데 그 길이 ‘막다른 골목’이라도 좋고 ‘뚫린 골목’이라도 좋다는 말은 또 무슨 말일까.
이 말은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지아니하야도좃소’라는 구절과 통한다. 아무리 달린다 하여도 공포는 끝내 따라올 것이므로, 공포로부터의 탈출은 불가능할 것이므로, 길이 뚫렸든 막혔든 달리든 달리지 않든 마찬가지라는 뜻이 된다. 공포로부터 해방될 길이 없는 현대인의 불안한 심리가 이 시에 표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사 소통이 단절된 사회의 공포를 드러내고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참다운 인간 관계를 갈망하는 시인의 마음이 역설적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하겠다.
<감상의 길잡이>(2)
“모든 현대인은 절망한다. 절망은 기교를 낳고, 그 기교 때문에 또 절망한다.”고 소리쳤던 이상. 만약 우리 문학사에 그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이 땅의 문학은 참으로 무미건조하였을 것이다. 이상을 현대시의 기수(旗手)라며 천재적 시인으로 높이 평가하는 평자(評者)가 있는가 하면, 당시 일본 문단에 유행했던 시경향의 단순한 모방일 뿐이라며 낮게 평가하는 평자도 있는 것을 보면, 어느 쪽의 평가를 받든지 간에 그는 분명 ‘이상(異常)한’ 시인이자 소설가요, 수필가로서 대단한 주목을 받고 있음은 분명하다.
20세기의 정신으로 19세기의 현실을 고민하던 그가 30회를 예정하고 2천 편이 넘는 작품에서 골라냈다는 30편을 당시 조선중앙일보 문화부장으로 있던 이태준에게 넘겨 발표하게 한 이 작품은 게재 첫날부터 독자들의 빗발치는 항의 전화와 비난 투서로 인해 결국 15회로 중단하고 말았다. 이렇게 발표시부터 문단 내외의 주목을 받아 온 그의 시에 대해 많은 문학 연구가들뿐 아니라 심지어 수학자나 정신과 전문의까지 연구하고 있으나, 어느 누구도 속시원히 설명해 주지 못할 만큼 그의 시는 난해하기만 하다. 어쩌면 정신병자의 장난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은 그의 시는 띄어쓰기를 무시하는 등 기존 문법 질서의 파괴와 숫자, 기호, 도표의 사용으로 인해 더욱 그 의미를 알아내기가 어렵다.
모든 시의 미학을 부정하고 새로운 시 형태를 취하는 일종의 초현실주의(sur-realism), 또는 다다이즘(dadaism) 경향의 이 작품은 제목에서부터 독자를 혼란에 빠지게 한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 본 상태의 도면을 일러 ‘조감도(鳥瞰圖)’라 하지 ‘오감도(烏瞰圖)’라고는 하지 않는다. 연재시 신문 조판 과정에서의 실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와 같은 이상한 시를 쓴 이상이고 보면 능히 제목부터 의도적으로 국어 사전에도 없는 이러한 단어를 시의 표제로 삼았을 성싶다.
이 작품에서 시적 자아는 13인의 아해가 도로를 질주하는 모습을 조감하고 있는데, ‘조감도’를 ‘오감도’로 바꾼 의도가 무엇이든지 간에 나타난 현상만으로만 보면, 풍경을 조감하는 시적 화자가 자신을 새가 아니라 까마귀와 동일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시적 화자이자 불길한 새의 표상인 까마귀가 아해들이 질주하는 풍경을 위에서 내려다 보고 있는 이 작품은 곧 자기 풍자의 성격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 작품의 감추어진 의미를 찾아내기란 매우 힘들지만, 표면적 내용은 매우 단순하다. 전체의 내용은 크게 4단락으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단락 :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한다.
둘째 단락 : 13인의 아해 모두가 무섭다고 한다.
셋째 단락 : 그 중의 어떤 아해가 무서운 아해든, 무서워하는 아해든 상관없다.
넷째 단락 :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지 않아도 좋다.
여기서 먼저 의문점이 생기는 것은 ‘13’이라는 숫자이다. 이것의 의미는 (1)당시 우리 나라의 도(道)가 13도였다는 것으로 식민지 조국을 상징 (2) 최후의 만찬에 참석한 예수와 12제자를 상징 (3)무수(無數)의 상징 (4)‘13의 금요일’처럼 가장 불길한 숫자로서의 상징 (5)일종의 국외적(局外的) 성격을 띤 사물을 상징 등 다양하게 해석된다. 이 작품에서의 의미는 분명하지는 않으나 ‘오감도’의 까마귀의 불길함과 연관지어 볼 때, 이 13이라는 숫자도 불길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게 아닐까 한다.
13인의 아해 모두가 ‘무섭다’며 질주하는 것은 공포심 때문이다. 아해들이 질주하는 길이 막다른 골목이기에 그들이 공포에 떤다고도 할 수 있지만, 마지막 연에서 길은 뚫린 골목이라도 상관없다고 한 것을 보면 아해들의 공포에는 뚜렷한 이유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뚜렷한 이유가 없는 공포는 곧 불안에 가까운 것으로 도로를 질주하는 13인의 아해는 결국 불안을 앓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질주하는 행위는 자신들의 정체 모를 불안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필사적인 몸부림이다. 불안감을 갖고 있는 13인의 아해가 도로를 질주하는 모습을 까마귀가 내려다 보는 풍경이란 더욱 불안하고 음산한 느낌까지도 준다.
그런데 질주하는 13인의 아해 중, 무서운 아해나 무서워하는 아해가 몇이든 상관없다고 한다. 그것은 13인의 아해가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로 이루어져 있지만, 누가 무섭고 누가 무서워하는지 굳이 따질 필요가 없음을 암시하며, 동시에 13인의 아해가 무서운 아해이자 무서워하는 아해라는 반어적 성격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그들은 서로 무섭고, 무서워하는 사이가 되어 13인의 아해는 더욱 불안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스스로가 불안을 느끼는 존재요, 스스로가 불안을 느끼게 하는 존재이므로 질주하는 곳이 막다른 골목이건 뚫린 골목이건 간에 어디에서도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고, 도로로 질주해도 결국은 불안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기에 마지막 행에서는 13인의 아해가 질주하지 않아도 좋다고 하는 것이다.
어디를 가건 불안에 떨며 절망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그들. 이것이 바로 시인 이상의 눈에 비친 현대인의 모습이 아닐까? 그러므로 바로 삶의 의미와 방향을 잃고 상호 불신과 치열한 경쟁 속에서 불안 의식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13인의 아해는 맹목적인 자신의 삶을 향해 그저 질주할 뿐이다. 그 불안한 모습을 바라보는 까마귀 이상은 아마도 더욱 불안해하며 암울한 식민지 시대를 가슴 졸이며 살았을 것이다. 현대인의 소외와 불안, 고독을 막다른 골목으로 삼아 절망적이고 암담한 현실 상황을 보여 주고 있으며, 뚫린 골목으로 나타난 희미한 희망의 불꽃이라도 잡아 보려고 하는 현실의 위기 의식을 도식적으로 구도화한 이 시는, 진정한 의미에서 참다운 인간 관계를 열망하는 시인의 마음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감상의 길잡이>(3)
이 작품이 바로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된 「오감도」 제 1호이다. 이 시를 신문에 연재하도록 주선한 사람이 이태준이다. 이태준은 월북인지 납북인지 혹은 놀러 갔다가 못 돌아온 경우인지 몰라도 여하간 월북 작가로 분류되었다가 지금은 해금되었다.
이태준은 문장의 귀재라 불리었고 그의 저서 「문장강화」는 그 당시 장기 베스트셀러였다. 그런 모범 문장가가 ‘이런 시작품’을 신문에 연재하도록 했다는 것은 대단한 아이러니다.
이게 무슨 시냐? 귀신 낮밥 먹은 소리 때려치워라! 미치고 싶거든 좀 곱게 미쳐라! 꼭 생긴 대로 노네! 지금 독자를 우롱하자는 것이냐? 독자 모독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이런 내용의 항의 엽서가 신문사 문화부 데스크에 나날이 쌓였고 이태준은 안 호주머니에 사직서까지 넣어 다니며 원래 전 30호로 예정된 연작시의 연재를 강행했으나 결국 시 제 15호까지 연재하다가 중단되었고 이상(李箱)은 더 이상 쓰지도 않았다.
그 당시의 ‘말이 되는’ 시에 길들여온 문단과 독자들은 이 도무지 ‘말도 안되는’ 잠꼬대(?)를 용납하지 않았다.
지금에 이르러 이 시는 시적 가치라는 측면보다도 이 ‘말썽’ 때문에 유명해져 있다. 이상(李箱)의 「오감도」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해석을 내리는 일을 퍽 멋있는 화젯거리로 삼는 문청(文靑)들이 많았다. 띄어쓰기를 전혀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똑 같은 서술을 반복하다가 조금씩 토씨를 바꾼 ‘의미’에 대해서, 처음에는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다고 했다가 끝에 가서 뚫린 골목도 적당하다고 말한 ‘깊은 의미’에 대해서, 도로를 질주하는 아해와 질주 안하는 아해의 차이에 관한 ‘철학적 의미’에 대해서 문청(文靑)들은 구구 각색의 기발한 해석을 다 내렸다.
그러나 정답은 아직 없고 이상(李箱) 자신도 ‘의도’를 밝히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나 버렸다. 이상(李箱)이 장난 삼아 이 시를 써서 발표했든 혹은 지금의 비평가들이 평가하듯 ‘모든 기존의 관념과 사유 방식을 철저히 깨부숴 버린’이라든가 ‘한 시대의 시세계를 마감하고 새로운 문학의 문을 열어 젖히는’ 작품을 ‘과감하게’ 발표했든 어쨌든 간에 그의 「오감도」는 우리 나라 「명시선집」에 두루 올라 있다.
그러나 그의 「오감도」가 지금의 시대에 어느 신문에 연재되었다 해도 그것을 인내심 있게 읽을 독자는 없을 것이고 ‘그 시절의 비난’과 유사한 욕설이 적잖이 나왔을 것이다. 그만큼 이상(李箱)의 「오감도」는 ‘말도 안되는 말’만 요상스럽게 늘어놓았다는 욕을 먹게 되어 있다.
이상(李箱)의 「오감도」를 이해하려면 그의 일생을 더듬는 방법밖에 없다. ‘박제가 된 천재’라는 그의 「날개」 첫머리의 암시가 도움이 될 지 모르겠다. 그는 박제가 되기를 한사코 거부한 천재였고 그 피나는 몸부림이 「오감도」로 나타났다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경성 공업고등학교를 우등생으로 졸업했다. 건축 기사라는 직업이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으나 워낙 ‘머리’가 있으니 본의 아니게(?) 우등생이 되었고 성적이 좋다 해서 조선 총독부 소속의 건축 기사로 취직이 된 것이다.
그러나 자유주의자인 그는 직장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학생시절에 모자 한 번 똑바로 써 본 일이 없고 교복 단추 하나 제대로 끼워 본 일이 없는 이상(李箱)이란 인간이 말단 기술직 공무원 노릇인들 모범적으로 할 리 없었다.
이상(李箱)은 「봉별기(逢別記)」에서 그때의 일을 단편 형식으로 써 놓았다. 그는 폐병약 한 제를 지어 황해도 백천(白川)으로 들어간다 물 좋고 공기 좋고 온천도 있는 그곳에서 그는 처음에는 기분이 괜찮았다. 그러나 한 달쯤을 배기다 보니 그만 주리가 틀린다. 별수 없이 그는 ‘장구 소리 나는 집’을 찾아가게 되는데 그 유곽에서 ‘금홍’이라는 기생을 만난다. 이상(理想)이 23살 때의 일이다.
‘체대가 비록 풋고추만 하나 깡그라진 계집이 제법 맛이 맵다. 열여섯살? 많아야 열아홉살이지 했으나 스물 한살이라 한다.’ 이것이 「봉별기(逢別記)」에 묘사된 금홍이의 용모다.
‘금홍’을 만난 것과 때를 맞추어서 양부인 백부(이상(李箱)은 백부 집에 양자 들었음)가 그만 타계하는데, 이상(李箱)은 이제 겁날 것이 없게 되었다. 그는 초혼의 아내를 ‘집구석에 박아 두고’ 금홍이와 신바람이 났다. 소설 속에서도 ‘기분이 좋아서 그런지 객혈도 덜 하고 몸이 한결 나아진 듯’하다고 씌어져 있다.
이상(李箱)은 백부 없는 백부집 재산을 상속인 권한으로 마구 처분해서 금홍이와 함께 다방 ‘제비’도 내고 카페 ‘69’도 내고 주로 유흥 음식점을 개업하는데 주제꼴이 그런데다 마담을 자청한 금홍이의 돈 빼돌리고 달아났다 돌아오기가 되풀이되는지라 하는 족족 망한다. 그럭저럭 ‘금홍’이와도 티격태격하다가 헤어지고 이 여자 저 여자 사귀어 봐야 별 재미도 없고 그래서 속이 대단히 상하고 폐병은 자꾸 심각해져 갔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씌어진 소설이 「날개」고 시가 「오감도」이다. 따라서 「오감도」는 한 천재의 처절한 몸부림이고 절망적인 절규라 할 수도 있다.
<감상의 길잡이>(4)
장미 병들다」라는 블레이크의 유명한 시를 60명의 대학생들에게 읽히고 그 시가 무엇을 의미한 것인지를 물었다. 어느 학생은 뱀에 유혹된 이브를 그린 것이라고 했고, 또 어느 학생은 처녀성의 상실을 나타낸 것이라고 답했다. 종교적 의미에서 에로티시즘에 이르기까지 실로 그 해답들은 백인백색(百人百色)이었지만, 단지 원예과 학생 하나만이 ‘벌레먹은 장미를 읊은 시’라고 대답했는 것이다. 이것은 캐나다의 문예평론가 <노드롭 프라이>의 방송강연을 통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이야기이다.
시를 우유(寓喩)로 착각하는 오류는 이상(李箱)과 같이 이른바 난해한 시를 읽으려고 하는 경우에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오감도(烏瞰圖)》‘詩 제1호’를 놓고 지금까지 많은 평자(評者)들이 소모전을 계속해 온 것도 바로 ‘13’이란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려고 한 것인가에 집착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13인의 아이’를 예수의 최후 만찬과 결부시키기도 하고, 혹은 조선 13道의 숫자와 관련지어 풀이하기도 한다. 그리고 예외없이 그러한 논자들은 ‘13’이란 숫자의 우유적 의미(寓喩的意味)만 알면《오감도(烏瞰圖)》‘詩 제1호’는 단숨에 풀릴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상(李箱)의 시는 시가 아니라 난수표(亂數表)로, 그리고 비평가는 비평가가 아니라 암호해독의 판단관으로 대우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누구든지《오감도(烏瞰圖)》 ‘詩 제1호’를 읽었을 때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13이라는 숫자보다는 시의 통념을 뒤엎는 여러 가지 양식의 일탈성(逸脫性), 그리고 시적 언어의 코드 위반(違反) 같은 것들이다.
제목부터가 ‘오감도’이다. 조감도(鳥瞰圖)를 오감도라고 한 것은 그만두더라도 어째서 시의 제목에 건축 용어가 등장하고, 또 어째서 第一號, 第二號와 같은 비정적(非情的) 숫자 번호판이 달려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래서 ‘13’이라는 숫자도 그같은 일련의 낯선 시적 조사법의 하나로 인식된다.
조사법만이 아니라 시 전체가 건축 설계도처럼 직선이나 사각도형을 이루고 있다.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도형성은 더욱 강조되고, 모든 문자들은 매스게임을 하듯 기하학적으로 정렬되어 있다. 숫자적이며 기하학적이고, 획일적이며 반복적인 그 도형을 볼 때, 우리는 어떤 느낌을 받게 되는가. 그것은 자연보다는 인공적인 것, 그리고 근대성(모더니티)이나 도시성 같은 인상일 것이다.
「여러 아이가 길을 달린다」와「13인의아해가도로를질주하오」사이에는 또 어떤 의미, 어떤 느낌, 그리고 어떤 인식의 차이가 있는가 하는 의문도 대두할 것이다. 전자(前者)가 언어적이고 일상적인 것이라면, 후자(後者)는 숫자적이고 개념적이다. 「길/도로」, 「달리다/질주하다」의 차이는 토착어 對 한자어, 구어(口語) 對 문어(文語)만의 차이가 아니라 그 내포적인 뜻에서도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냥 ‘길’이라고 하면 시골의 오솔길을 연상할 수 있다. 그러나 ‘도로’라고 하면 최소한 직선으로 뻗친 근대적이고 인공적인 도시의 길을 연상하게 된다. 「인생은 나그네 길」이라는 전통적 비유에 익숙해 왔던 사람들은 「13인의아해가도로를질주하오」라는 진술에서 그와는 색다른 길의 은유적 감각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저 감동적인 영화 「포레스토 검프」와 같은 끝없는 질주와 맞먹는 것일지도 모른다.
질주라는 말은 그냥 뛰다 달리다 라는 말과 다르다. 스피드, 관성, 맹목성과 같은 근대문명의 메커니즘과 쉽게 손을 잡게 되는 말이다. 원래 도로라는 말 자체에 질주라는 공시적 의미가 잠재되어 있다. 모든 도로는 고속도로와 마찬가지로 달리도록 명령지어져 있다. 길 위에서 멈춰 서 있다는 것은 남자의 경우라면 부랑자요, 여성인 경우에는 창녀와 같은 것이 된다.
그리고 도로의 질주라는 말에 속도를 더해주는 것이 바로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에서 시작하여 「제13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로 반복 나열되어 있는 시행들이다. 무서움이라는 말 때문에 질주란 말은 도주와 도피의 뉘앙스를 풍기게 된다.
그러나 다시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라는 말이 등장함으로써 아이들을 달리게 하는 무서움은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내부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질주는 쫓기고 쫓는 끝없는 무한 질주라는 것도 짐작하게 된다. 그러나 다시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는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로 바뀌게 된다. 즉 무서운 아이가 곧 무서워하는 아이이기도 한 것이다. 결국 이상(李箱)의 시 속에서는 「무서운 아이」와 「무서워하는 아이」의 그 차이와 대립함이 말소되어 있다는 이야기이다. 아이만이 아니다. 「길은막다른골목길이적당하오」라는 처음의 진술 역시 뒤에 오면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라고 뒤집힌다. 골목길이나 뚫린 길의 차이는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아이들이 질주하는 이 도로 상황은 이상(李箱) 이후의 시대에 유행했던 「부조리」라고 불려지는 그 세계와 같은 것이 된다. 그리고 무서워하는 아이가 곧 무서운 아이이기도 하다는 진술은 사르트르의 「타자(他者) 이론」과 같은 것이 된다. 즉, 내가 타자(他者)를 바라본다는 것은 나의 시선 속에 타자(他者)를 구속하고 정복한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동시에 타자(他者)가 나를 볼 때에는 나의 존재가 그의 시선 속에서 징발된다. 거미가 먹이를 녹여 먹듯이 남을 본다는 것은 곧 그 대상을 자신의 의식 속에 흡수해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보고, 동시에 보임을 당한다. 즉, 우리는 무서워하는 아이이며 동시에 무서운 아이의 역할을 한꺼번에 하고 있는 것이다.
실험실에서 실험관을 관찰하고 있듯 이상(李箱)은 부조리한 인간의 상황을 모순 그대로 관찰하고 기술한다. 그것은 전30편으로 된 연작시의 제목을《오감도(烏瞰圖)》라고 한데서도 알 수 있다. 원래 ‘조감도(鳥瞰圖)’라는 말은 새가 높은 공중에서 아래를 내려다본 것과 같이 그려놓은 도형(圖形)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상(李箱)은 바로 그 새 ‘鳥’에서 획 하나를 떼내어 까마귀 ‘烏’로 바꿔《오감도(烏瞰圖)》라고 한 것이다. 아이를 ‘아해(兒孩)’라고 한자말로 고쳐놓은 것처럼 굳은 살이 박혀버린 그 한자말에 새로운 비유적 이미지가 살아나게 한 것이다. 그 순간 우리 눈앞에는 겨울날 고목나무 가지에 앉아 마을 전체를 굽어보고 있는 까마귀의 모습이 떠오르게 된다. 그리고 음산하고 불길하며 흉칙한, 그리고 황량한 불모의 풍경이 그 까마귀 밑에 펼쳐진다. 그 중의 하나가 도로를 질주하는 ‘13인의 아이들’의 모습인 것이다.
「장미 병들다」란 시를 있는 뜻 그대로 「벌레먹은 장미」라고 대답한 원예과 학생의 말이 의외로 ‘블레이크’의 시에 접근해 있었던 것처럼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 역시 마찬가지이다. 「13인의 아이」를 예수의 최후 만찬에 모인 사도 혹은 조선 13道에 비겨 도민 대항 체육대회 같이 만들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읽으면 자연히 서로를 무서워하면서 무한질주를 하고 있는 도시의 우리들 모습이 보이게 될 것이다. 따라서 ‘13’이라는 숫자 역시 단순한 우유(寓喩)가 아니라 복합적이고 다기능적인 시어의 하나로 인식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숫자가 지닌 절대적이고 비정적(非情的) 이미지, 기하학적 도형 즉 ‘文明의 鳥瞰圖’를 만들어내는 숫자의 순차적 나열성, 그리고 까마귀와 조응 관계를 이룬 ‘13’이란 숫자의 불길 · 불안한 이미지 등에서 우리는《오감도(烏瞰圖)》에 내재된 복합적이고 다기능적인 시어의 의미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시는 정답을 감추어 놓은 퀴즈 문제가 아니다. 차라리 침(鍼)을 놓듯이 시 전체의 신경망(神經網) 그리고 상호 유기적인 상관성에서 시적 언어의 혈(穴)을 찾는 작업이다.
이상(李箱)에 의해서 한국시는 처음으로 표현(表現)이 아니라 관찰(觀察)이 되었고, 느낌의 방식이 아니라 인식(認識)의 양식(樣式)으로 바뀐 것이다.
<이어령 교수>
초현실주의 : 기성의 미학․도덕과는 관계없이 이성(理性)의 속박을 벗어나 비합리적인 것이나 의식 속에 숨어 있는 비현실의 세계를 즐겨 표현하려는 예술 혁신 운동으로, 꿈과 현실, 지상과 천상, 의식과 무의식, 현상과 본질의 대립과 통일을 목표로 1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에서 다다이즘에 이어서 일어났다. 초현실주의 시인들이 쓰던 시의 기법에는 브르통(A.Breton)에서 시작된 자동기술법이 있으며, 그것은 꿈과 무의식의 내면 세계에서 들려오는 이미지를 그대로 기술하는 방법을 말한다.
다다이즘 : 1차 세계대전 중인 1916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루마니아 시인 차라(T.Tzara)가 중심이 되어 제창한 예술 사조로 기존의 모든 가치나 질서를 철저히 부정한 일종의 저항 운동이다.
시의 구조상, ‘十’의 정수에서 일단 끝나고 한 行을 비운 다음 ‘十一’로 새로 시작한 것, 그리고 ‘도’란 조사를 ‘가’로 바 꾸어 놓은 것 등에서 이상(李箱)이 시도한 ‘숫자의 순차적 나열성’을 찾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