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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제4권 77
1460독, 범부(凡夫) - 첫 번째
오늘은 「정신게」 독송에 들어가기 전에 복습을 하나 하고자 합니다.
지난 번 편지는 ‘2024년 동안 읽은 정서(淨書)목록’을 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중에 이현주 목사님 번역의 《겨울부채》가 있었는데, 제목이 오역이라 감히 지적한 바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제 편지를 꼬박꼬박 실어놓는 ‘일본불교사공부방(일본불교사독서회)’(다음 카페)에 한 독자님의 반론(反論)이 댓글에 제시되었습니다.
키요자와 만시(淸澤滿之)스님의 자호이기도 한 ‘로센(臘扇, 납선)’의 뜻을 ‘겨울부채’라고 해도 문제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면서 그 근거로 왕충(王充)의 《논형(論衡)》에서 ‘하로동선(夏爐冬扇)’이라는 말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현주 목사님께서도 그 책에서 이 ‘하로동선’이라는 단어를 각주를 통해서 소개하면서, ‘겨울부채’라 옮긴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역이라 보는 것입니다.
키요자와 만시 스님의 호는 ‘납선(臘扇)’이지, ‘동선(冬扇)’이 아니지 않습니까. ‘臘’의 뜻은 ‘섣달’을 말합니다.
음력 12월이지요.
물론, 뜻으로 본다면 ‘겨울부채’나 ‘12월의 부채’나 다 되는 것 아닌가 할 수 있습니다.
그 어느 경우이든 다 ‘쓸모없는 존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2월의 부채’를 ‘겨울부채’라고 한다면, 비록 그 뜻으로는 ‘쓸모없는 존재’를 뜻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애당초 키요자와 스님이 그 말을 쓸 때 혹시라도 염두에 두었을지도 모르는 문학성(文學性)은 사라지고 맙니다.
문학은 구체적인 것으로 추상을 나타내고,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나타냅니다.
작은 ‘12월’을 말하면서, 더 큰 는 ‘겨울’을 나타내는 것, 그것이 문학입니다.
그런 뜻으로 ‘랍’이라 쓴 것입니다.
번역을 하면서는 그런 문학성까지 감안해야 한다는 뜻에서, 제가 감히 오역이라 평가한 것입니다. 이렇게 답변을 드립니다.
그런데 저의 오류도 하나 있었습니다.
이현주 목사님 번역의 책에 저본(底本)이 된 영어책(The December Fan)은 하네다 노부오(羽田信生, 1946-)스님이 영역한 것입니다.
그분의 성함을 ‘노부오 히데오’라고 하였습니다.
확인했어야 할 일을 기억에만 의존하여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노부오 히데오'는 '하네다 노부오'로 바로잡습니다.
이제 ‘오늘의 「정신게」를 독송합시다. 지난 번 편지에서는 안 읽었으니,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귀명무량수여래(歸命無量壽如來) ⟶ 나무불가사의광(南無不可思議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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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장보살인위시(法藏菩薩因位時) ⟶ 재세자재왕불소(在世自在王佛所)
도견제불정토인(都見諸佛浄土因) ⟶ 국토인천지선악(國土人天之善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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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무상수승원(建立無上殊勝願) ⟶ 초발희유대홍서(超發希有大弘誓)
오겁사유지섭수(五劫思惟之攝受) ⟶ 중서명성문시방(重誓名聲聞十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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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방무량무변광(普放無量無邊光) ⟶ 무애무대광염왕(無碍無對光炎王)
청정환희지혜광(淸淨歡喜智慧光) ⟶ 부단난사무칭광(不斷難思無稱光)
초일월광조진찰(超日月光照塵刹) ⟶ 일체군생몽광조(一切群生蒙光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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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원명호정정업(本願名號正定業) ⟶ 지심신요원위인(至心信樂願爲因)
성등각증대열반(成等覺證大涅槃) ⟶ 필지멸도원성취(必至滅度願成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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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소이흥출세(如來所以興出世) ⟶ 유설미타본원해(唯說彌陀本願海)
오탁악시군생해(五濁悪時群生海) ⟶ 응신여래여실언(應信如來如實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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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발일념희애심(能發一念喜愛心) ⟶ 부단번뇌득열반(不斷煩惱得涅槃)
범성역방제회입(凡聖逆謗齊回入) ⟶ 여중수입해일미(如衆水入海一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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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취심광상조호(攝取心光常照護) ⟶ 이능수파무명암(已能雖破無明闇)
탐애진증지운무(貪愛瞋憎之雲霧) ⟶ 상부진실신심천(常覆眞實信心天)
비여일광부운무(譬如日光覆雲霧) ⟶ 운무지하명무암(雲霧之下明無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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획신견경대경희(獲信見敬大慶喜) ⟶ 즉횡초절오악취(卽橫超截五惡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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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선악범부인(一切善惡凡夫人) ⟶ 문신여래홍서원(聞信如來弘誓願)
불언광대승해자(佛言廣大勝解者) ⟶ 시인명분타리화(是人名分陀利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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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타불본원염불(彌陀佛本願念佛) ⟶ 사견교만악중생(邪見憍慢悪衆生)
신요수지심이난(信樂受持甚以難) ⟶ 난중지난무과사(難中之難無過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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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서천지론가(印度西天之論家) ⟶ 중하일역지고승(中夏日域之高僧)
현대성흥세정의(顯大聖興世正意) ⟶ 명여래본서응기(明如來本誓應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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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여래능가산(釋迦如來楞伽山) ⟶ 위중고명남천축(爲衆告命南天竺)
용수대사출어세(龍樹大士出於世) ⟶ 실능최파유무견(悉能摧破有無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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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설대승무상법(宣説大乘無上法) ⟶ 증환희지생안락(證歡喜地生安樂)
현시난행육로고(顯示難行陸路苦) ⟶ 신요이행수도락(信樂易行水道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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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념미타불본원(憶念彌陀佛本願) ⟶ 자연즉시입필정(自然卽時入必定)
유능상칭여래호(唯能常稱如來號) ⟶ 응보대비홍서은(應報大悲弘誓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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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친보살조론설(天親菩薩造論說) ⟶ 귀명무애광여래(歸命無碍光如來)
의수다라현진실(依修多羅顯眞實) ⟶ 광천횡초대서원(光闡橫超大誓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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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유본원력회향(廣由本願力廻向) ⟶ 위도군생창일심(爲度群生彰一心)
귀입공덕대보해(歸入功德大寶海) ⟶ 필획입대회중수(必獲入大會衆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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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지연화장세계(得至蓮華藏世界) ⟶ 즉증진여법성신(卽證眞如法性身)
유번뇌림현신통(遊煩惱林現神通) ⟶ 입생사원시응화(入生死園示應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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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담란양천자(本師曇鸞梁天子) ⟶ 상향란처보살례(常向鸞處菩薩禮)
삼장류지수정교(三藏流支授淨教) ⟶ 분소선경귀락방(焚燒仙經歸樂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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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친보살론주해(天親菩薩論註解) ⟶ 보토인과현서원(報土因果顯誓願)
왕환회향유타력(往還廻向由他力) ⟶ 정정지인유신심(正定之因唯信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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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염범부신심발(惑染凡夫信心發) ⟶ 증지생사즉열반(證知生死卽涅槃)
필지무량광명토(必至無量光明土) ⟶ 제유중생개보화(諸有衆生皆普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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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작결성도난증(道綽決聖道難證) ⟶ 유명정토가통입(唯明浄土可通入)
만선자력폄근수(萬善自力貶勤修) ⟶ 원만덕호권전칭(圓滿德號勸專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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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불삼신회은근(三不三信誨慇懃) ⟶ 상말법멸동비인(像末法滅同悲引)
일생조악치홍서(一生造悪値弘誓) ⟶ 지안양계증묘과(至安養界證妙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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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도독명불정의(善導獨明佛正意) ⟶ 긍애정산여역악(矜哀定散與逆惡)
광명명호현인연(光明名號顯因緣) ⟶ 개입본원대지혜(開入本願大智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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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자정수금강심(行者正受金剛心) ⟶ 경희일념상응후(慶喜一念相應後)
여위제등획삼인(與韋提等獲三忍) ⟶ 즉증법성지상락(卽證法性之常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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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신광개일대교(源信廣開一代教) ⟶ 편귀안양권일체(偏歸安養勸一切)
전잡집심판천심(專雜執心判淺深) ⟶ 보화이토정변립(普化二土正弁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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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중악인유칭불(極重惡人唯稱佛) ⟶ 아역재피섭취중(我亦在彼攝取中)
번뇌장안수불견(煩惱障眼雖不見) ⟶ 대비무권상조아(大悲無倦常照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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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원공명불교(本師源空明佛敎) ⟶ 연민선악범부인(憐愍善惡凡夫人)
진종교증흥편주(眞宗教證興片州) ⟶ 선택본원홍악세(選擇本願弘惡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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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래생사륜전가(還來生死輪轉家) ⟶ 결이의정위소지(決以疑情爲所止)
속입적정무위락(速入寂靜無爲樂) ⟶ 필이신심위능입(必以信心爲能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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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대사종사등(弘經大士宗師等) ⟶ 증제무변극탁악(拯濟無邊極濁悪)
도속시중공동심(道俗時衆共同心) ⟶ 유가신사고승설(唯可信斯高僧說)
(『교행신증』 제2권)
「정신게」에서 ‘범부’라는 글자가 나오는 것은 세 군데입니다. 이들을 한 번 더 추출해서 보겠습니다.
일체선악범부인(一切善惡凡夫人)
혹염범부신심발(惑染凡夫信心發)
연민선악범부인(憐愍善惡凡夫人)
위의 두 구절은 ‘범부’를 주어로 쓰고 있으며, 아래 마지막은 목적어로 쓰고 있습니다.
첫 번째 구절과 세 번째 구절은 공히 ‘선악범부인’라고 하였으며, 중간에서는 ‘염범부’라고 하였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오염된 범부’는 ‘선한 범부’가 아니라 ‘악한 범부’만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선을 짓는 사람도 악을 짓는 사람도 다 범부임에는 틀림없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상대적인 차원에서는 ‘선한 범부’와 ‘악한 범부’ 사이에는 간극이 큽니다.
선한 범부는 칭찬을, 악한 범부는 비방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절대적인 차원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상대적인 차원에서의 비교대상은 ‘악한 범부’와 ‘선한 범부’들 사이의, 어떻게 보면 도토리 키 재기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절대적인 차원에서의 비교 대상은 아미타불입니다.
아미타불과 경쟁할 때, 우리는 어느 정도 선한 범부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미타불 앞에서도 “저는 선인입니다”라고 자신 있게 가슴 내밀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과연, 한 사람이라도 있기나 할까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미타불 앞에서는 모두가 다 범부이다. 이 ‘범부’를 ‘악인’이라는 말로 바꾸어 본다면, 아미타불 앞에서는 모든 존재가 다 범부이자, 모든 존재가 다 악인이라는 말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일체’라는 말을 붙인 것입니다. ‘일체선악범부인’이라고 말입니다. ‘선을 지었든 악을 지었든 일체 모든 존재가 다 범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스스로 이러한 범부로서의 자각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겠습니다.
범부라는 자각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왜 어려울까요?
바로 우리 스스로 다 아상(我想, 我相)이 있고, 에고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존재 근거는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다 자기 스스로 잘났다고 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내가 범부다’라는 인식은, 내가 잘 났다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못났다’라는 인식 아니겠습니까.
야나기 무네요시 선생님께서느 《나무아미타불》에서 ‘범부’라는 한 장을 따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위해서,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한 번 보십시오.
야나기 선생님은 둘이라는 것, 그 점을 싫어합니다.
범부는 둘이라는 것을 당연시 하는 사람들입니다.
불이(不二), 즉 둘이 아닌 경지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불이에 들어가면 범부는 아니겠지요. 이미 불보살의 경지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뜻으로만 범부를 이해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철학적인 언술로서 “모든 존재는 다 범부다”, 이렇게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말고, 그러한 인식을 오직 나 한 사람에게만 국한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나기 선생님은 ‘천상천아 유악독존’도 있지만, ‘천상천하 유아독악(天上天下 唯我獨惡)’이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나 홀로 높다는 것이 아니고, 모든 존재가 다 악하다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악한 것은 나 한 사람뿐이다. “하늘 위 하늘 아래에서 오직 나 홀로 악하다.” 이것이 ‘범부의 자각’입니다.
이러한 범부의 자각을 정토불교에서 강조한 분으로 야나기 선생님은 선도대사, 호넨스님, 그리고 신란스님을 듭니다.
왜인지는 몰라도, 야나기 선생은 이 ‘범부’의 장에서는 잇펜스님을 말씀하지 않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죄악이 많아서
생사를 거듭하는 범부이니,
한량없는 겁 이전부터
항상 죽고 항상 윤회해왔으나
그것을 벗어날 인연이 없다.(160-161쪽)
다만 겐쿠(源空, 호넨)같이 아주 어리석은 무리는 더욱이 그(삼학을 닦을 수 있는 – 인용자) 그릇이 아니기 때문에, 깨닫기는 어렵고 미혹하기는 쉽다.(161 쪽)
진실로 알겠구나.
어리석은 구토쿠(愚禿, 어리석은 까까머리) 신란은
슬프게도 애욕의 넓은 바다에 빠졌으며,
명리의 큰 산에서 헤매면서,
정정취의 무리에 들어가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진실한 깨달음에 가까이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네.
부끄럽고, 슬프도다.(162쪽)
지금 호넨스님을 개조로 받드는 정토종의 사찰에 가보면, ‘우자(愚者, 어리석은)의 자각’이라는 말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어리석다, 범부다, 악하다.
그러면, 그 경지로부터 벗어나려고 해야 하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수행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정토문에서는 어차피 해봐도 성공하기는 어렵다.
성공할 수 있다면, 범부가 아니다.
범부이기에, 자력으로는 구원이 어렵다.
수행했다는 의식만 남아서 더욱 그릇되고 만다.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나 스스로 범부임을 깨닫는 것뿐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선(禪)에서는 부처의 자각인데, 정토에서는 범부의 자각입니다.
야나기 선생님은 스스로 범부임을 자각하는 바로 그 순간이 절망의 순간이지만, 동시에 아미타불을 만나는 순간이라 말합니다.
한번 읽어봅니다.
반어적인 것 같지만, 사실 우리는 온전히 범부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구제받지 못하는 것이다. 범부이면서도 범부가 아닌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망상을 버리지 못한 집착이 슬픈 까닭이다. 그 망집이 구제받는 데 걸림돌이 된다. 범부라고 자각 한다면 몸을 내맡기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 그럴 때만이 아집이 끊어지고, 그때가 정토에 받아들여지는 때이다. 그러니까 범부야말로 성불이 확약(確約)되어 있다. 공 연히 범부이면서 범부가 아닌 체하기 때문에 그 확약을 쓸모없게 해버린다.(167쪽)
결국 우리의 왕생은 악인으로 돌아가서, 범부로 돌아가서, 우자로 돌아가서 하는 왕생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미타불 입장에서 구제해야 할 대상이 악인이고, 범부이고, 우자라고 한다면, 우리가 그렇게 돌아갈 때 바로 그 자리에서 아미타불을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서, 우리가 악인이 되어야 한다고 하니, 거리에 나가서 앙굴리말라처럼 악행을 해볼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겠지요.
원효스님 비유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집가는 딸에게 아버지가 교훈을 내립니다.
“얘야, 시집 가거든, 착한 일 하지 마라.”
“그럼, 아버지, 악한 일을 행하리까.”,
“착한 일도 하지 말라 했는데, 하물며 악한 일을 행하라 하겠는가.”
현명함과 어리석음이 둘이 아닌 차원은 내가 현명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어리석음을 자각할 때 이루어집니다.
야나기 선생님은 이 법문의 어려움을 이렇게 토로합니다.
이 진리가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염불자들이 자신을 그르쳤는지 모른다. 동시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염불자들을 오해하며 비난했는지 모른 다.(173쪽)
이제 ‘퀴즈문제 풀이’로 들어갑니다. 지난 번 ‘퀴즈 11’의 문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지난 번 퀴즈의 정답(칠보강당)이 나오는 부분에서 좀 더 뒤에 보면, 부처님께서 미륵보살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만, ‘불퇴(不退, 후퇴하지 않는 = 불퇴전/不退轉) 보살’의 숫자가 언급됩니다. 과연, 이 세계에는 얼마나 많은 불퇴보살이 존재한다 고 말씀하셨을까요?”
정답은 ‘67억’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밑에 보면, 똑같이 부처님께서 미륵보살에게 하는 말씀입니다만, “다만 내가 교화하는 이 국토의 모든 보살만이 (불퇴전의 보살로서 – 인용자)저 국토에 왕생하는 것이 아니고 타방 불국토에서도 이와같다”라고 전제하신 뒤에, 14개의 타방 불국토에서 왕생하는 불퇴전보살들의 숫자를 언급합니다. 첫 번째는 180억 등 ---.
그러다 보니, 다양한 의견이 도착되었습니다. 만약 제가 이 문제를 수능시험에 냈다면, ‘정답이 복수가 아닌가’라는 시비에 휘말렸을 수도 있겠습니다. 썩 좋은 문제는 아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다만, 그 문제를 낸 것은, 사실은 오늘의 ‘퀴즈 12’를 위해서입니다. 바로 ‘퀴즈 11번의 정답, 67억이 나오는 문장을 다시 읽어 봅니다.
이 세계에 67억의 불퇴전보살들이 있어 저 국토에 왕생하게 될 것이다. 이 보살 들은 이미 일찍이 헤아릴 수 없는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였나니, 이는 ( )과 같은 이들이다.
이 문제를 내고 싶어서였습니다. ( ) 안에 들어갈 말은 무엇일까요? 태원스님 번역 《우리말 정토삼부경》이 있으신 분들은 111쪽을 확인해 보시면 됩니다. 많은 응모 바랍니다. 오늘 퀴즈에 응모하시는 분들께 드리는 사은품은 《탄이초》 제2장의 우리말 번역입니다.
오늘은 드릴 말씀이 많아서 길어졌습니다.
양해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김호성 합장
(2025년 2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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