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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버니는 이곳에 칩거하면서 세상 돌아가는 것도 모르고 무사태평이군요.”
이단은 이영월의 친 오라버니로서 이영월보다 다섯 살 연상이다. 오누이의 관계는 내면적으로 어떠했는지 모르나, 표면상으로는 비교적 좋았다. 이단은 부친 고종 이치를 닮아 온순하고 차분한 성격인데 반해, 이영월은 모친 무 태후의 성격을 이어받아 활달하고 명민하며 강인했다.
“그래도 들을 것은 다 듣고 산다.”
“그럼 혹시 알고 있어요?”
“뭘?”
“어마마마가 고승과 고조영을 죽이기로 작심했어요.”
“모친의 성격을 누가 말리겠냐?”
“흥! 그렇게 나약해 빠졌으니, 황제의 자리까지 엄마에게 빼앗기고 여기에 갇혀 지내는 거 아녜요?”
“내게도 다 생각이 있다. 연작안지홍곡지지燕雀安知鴻鵠之志라, 제비와 참새가 어찌 큰 기러기와 고니의 뜻을 알리요?”
“흥! 남자들은 말이 막히면 무조건 남아일언중천금이니, 연작 어쩌고저쩌고 하는 따위의 말만 나불거리고 있어요.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으면서.”
이단이 태평공주의 얼굴을 보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럼 넌 왜 여기에 찾아왔는데?”
“그거야 뭐, 너무 답답해서···.”
“하하하, 좀 솔직해져라.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내 도움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냐?”
“그러지 말고, 제발 말씀 좀 해주세요. 어찌하면 좋을지.”
“고조영을 포기해라.”
“그럴 것 같으면 내가 왜 오라버니를 찾아왔겠어요?”
“네 말마따나 내게 무슨 힘이 있다고?”
“그러지 말고 좋은 방책 좀 가르쳐줘요.”
이단이 잠시 사색에 잠기다가 물었다.
“고조영 혼자만 위험에 빠진 건 아닐 텐데?”
“어떻게 아셨어요?”
“뻔하지. 내가 지난 번 적취지 연회에 참석했지 않느냐?”
“···?”
“그 때 어마마마의 시비인 미시아, 그녀의 쌍둥이 자매 여미아, 또 어처 수녀綏女 극시아까지 참석했었지?”
“그런데요?”
“그 때 난 알았다. 미시아와 고조영이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오빠는 눈치하나 빨라서 좋네요. 그래서 황위도 엄마에게 신속히 양보한 거로군요.”
황제 예종 이단이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어머니 무 태후에게 찾아가 황위를 양도한 것은, 삼년 전인 684년 2월 12일의 일이다. 그러자 사흘 후 무 태후는 예부상서 무승사를 보내 이단으로 하여금 황위를 이어받으라고 말했지만, 그 말과는 달리 그 때부터 이단을 제치고 무 태후 자신이 친정親政을 시작했던 것이다.
“내 허락도 없이 어처 극시아를 별실에 감금했으니, 미시아나 여미아도 온전하겠느냐?”
“여미아는 잘 모르고, 극시아는 아마도 피하기 어려울 거예요.”
“고조영만 구하면 명분이 서겠느냐?”
“그럼 그 요녀들도 내가 구해야 한단 말이에요?”
“요녀가 뭐냐? 극시아는 내 후궁이다. 고조영을 구하려면 극시아나 그 자매들도 구하는 것이, 바른 마음 아니겠느냐?”
“누구 좋으라고?”
“마음을 선량하게 써야 하늘이 돕는 법이다.”
“좋아요. 그럼 오라버니가 좋은 방책을 가르쳐주신다면 극시아는 어떻게 해 보겠어요. 하지만, 미시아나 여미아는 자신 없어요.”
“알았으니 물러 가거라. 밤이 너무 깊었다.”
“오라버니는 좋은 방책도 가르쳐주시지 않고서?”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
“이리 귀 좀 가까이 대라.”
이영월이 이단의 면전에 귀를 대자 이단이 소곤거렸다.
이영월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묻는다.
“그 다음에는요? 오히려 일이 복잡하게 꼬일 텐데요?”
“그건 내게 맡겨다오.”
그 날 밤 이영월은 한 가닥의 희망을 안고 숙소로 돌아왔다. 이튿날 아침에 그녀는 황제 친위대 몇 사람과 함께 부랴부랴 내준신을 찾아간다.
내준신의 국문실을 가니 이속吏屬이 문을 지키고 있다.
“속히 나를 내 대인에게 안내하라.”
“지금 죄인을 국문하시는 중이라 면담하실 수 없습니다.”
“폐하의 명을 받들고 왔다.”
이속이 문을 열어주어 그녀가 들어가니, 실내에 무더운 기운이 후끈거렸다. 태평공주는 고문실의 광경에 넋을 잃고 말았다.
고조영의 온몸이 칭칭 묶여있는데, 내준신이 마침 불에 달군 인두를 들고 조영의 얼굴에 들이대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나!”
소스라치게 놀란 이영월이 소리를 질렀다.
“내 대인, 도대체 뭐하는 거예요?”
내준신이 고개를 돌려 땀이 범벅된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았는데, 흡사 지옥의 아귀 같았다.
“공주마마가 웬일이오?”
“지금 즉시 심문을 중단하고, 고조영과 미시아를 보내라는 폐하의 명이십니다. 폐하께서 친히 국문하신다고요.”
“사실입니까?”
“그럼 거짓이란 말이에요? 어서 족쇄부터 푸세요.”
“폐하의 제서制書(조서詔書)를 보여주시오.”
“여기 있어요.”
태평공주가 제서를 꺼내 그의 코앞에 내밀었다.
내준신은 인두를 내려놓고 아전에게 명했다.
“결박을 풀고 보내라.”
“미시아는 어디에 있어요?”
태평공주가 물었다.
“아마 옆방에서 만국준에게 심문을 당하고 있을 거요.”
태평공주가 고조영을 데리고 부리나케 만국준에게 달려갔다. 방문을 열어젖히니 실내는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미시아는 기절한 듯 바닥에 쓰러져 있는데, 겉옷을 벗은 채 속옷만 입고 있었고, 만국준은 옷을 벗고 있다가 사람들이 들어오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허겁지겁 옷을 주워 입는 참이었다.
“당신, 뭐하고 있는 거야!?”
태평공주가 소리 질렀다. 만국준이 술에 취한 듯 벌건 얼굴로 태평공주를 보다가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흥, 꼴좋군요. 폐하께서 아셔도 괜찮은가요?”
태평공주가 대답 대신 그를 힐난했다. 그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영월이 덧붙여 말했다.
“폐하의 명을 받잡고 왔어요. 폐하께서 친히 국문하신다고, 미시아를 속히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입니까?”
“폐하께서 이럴 줄 아시고 명을 내리셨어요. 폐하께 지금 본 광경을 다 아뢰겠어요.”
“공주마마, 제발···.”
“비밀로 붙여달라고요?”
만국준이 침묵을 지킨다.
“당신에게는 딸이 없나요?”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앞으로 당신 하기 나름이에요. 비밀을 지키고 안 지키고는.”
태평공주는 한 마디 내뱉고 미시아의 결박을 풀고 옷을 입히게 한 다음, 그녀를 깨웠으나 일어나지 못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만국준이 해독약을 먹이자 비로소 미시아가 깨어났다. 조영이 미시아를 부축해서 태평공주를 따라 나섰다.
태평공주는 그들을 데리고 황제 이단이 거주하고 있는 별전으로 신속히 이동했다.
“공주마마, 지금 어디로 가시는 길인가요?”
고조영이 물었다.
“당신은 잠자코 있어요.”
태평공주가 퉁명스레 말하며 그들을 이단의 처소로 안내했다. 황제 이단이 기다리고 있다가 그들을 맞았다.
“신 고조영이 폐하를 알현합니다.”
고조영과 미시아가 엎드려 이단에게 절했다.
“어서들, 일어나시오.”
이단이 고조영과 미시아의 얼굴을 훑어보다가 물었다.
“심문을 받으며 고생한 것 같구려. 다친 데는 없소?”
“폐하의 염려지덕으로 무사하옵니다.”
“내가 궁금한 것이 있어서 두 분을 불렀소.”
“···?”
“고 장군은 귀인상이오. 앞으로 크게 될 인물 같소.”
“과찬이십니다.”
“후고구려 임금 고중상의 장자라고 들었소.”
“그렇사옵니다.”
“작년에 고 장군의 부왕이 내게 국서를 보냈다는 말을 들었지만 직접 보지는 못했소.”
무 태후의 친정 이후, 예종 이단은 일절 정사에 관여할 수 없었다.
“아마, 대당과 후고구려 양국이 화평하게 지내자는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어마마마가 내국인이나 이웃나라와 화평하게 지내는 법을 잘 몰라서 나라꼴이 말이 아닌데, 하루가 멀다 하고 변방 민족들이 중화의 영토를 침범하고 있소.”
이단이 말을 끊었다가 한숨을 내쉬고 덧붙였다.
“이런 식으로 나가다간 대당이 언제 망할지 모르오. 대당과 고려 사이의 평화를 위해, 내가 귀공과 미시아 아가씨를 빼낸 것이오.”
“황공하옵니다.”
“어마마마에게 섭섭한 일을 겪더라도 잊어버리고, 훗날 고려에 돌아가 보위에 오른다면, 양국 간의 친선을 도모해 주시오.”
“명심하겠사옵니다.”
이단은 비록 조롱에 갇힌 유명무실의 황제였지만, 훗날을 염려하고 있었다. 돌궐과 후고구려, 말갈, 거란, 해족 등이 세력을 규합해 어지러운 당나라를 치면, 신라와의 우호적 관계도 흔들리는 마당에, 당은 존립의 여망을 가지기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다.
그는 어쩌면 현실의 부자유 속에서도 선견지명을 가지고 유비무환의 정신을 구현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 날 이단은 고조영과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어보았는데, 이단 자신도 많은 책을 섭렵해 매우 박학다식했지만, 이단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고조영 역시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고조영과 미시아가 이단의 별전으로 도피해 있던 그 시각, 무 태후는 자신전에서 태평공주를 불러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후고구려의 고중상이 우리 황제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왔는데, 너도 한 번 읽어보렴.”
태평공주가 그녀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 펼쳤다.
후고려의 군주 고중상은 대당의 군주에게 문안하노라.
귀 황실과 조정, 나라의 연연세세 번영을 간원하오.
근자에 나의 부친과 장자가 귀국의 보호 속에 평안히 지낸다 하니,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내 아들이 귀국에서 무슨 죄를 범했는지 모르지만, 옥중생활을 했다는 소문이 들리니, 이게 도대체 무슨 유언비어인지 모르겠소.
귀국의 한 공주가 내 아들을 깊이 사모한 나머지, 모종의 사건이 벌어지고 그 일로 인해 아들이 옥고를 치렀다고 하니,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심히 가슴 아프게 생각해 귀국에 엄중히 항의하는 바요.
내 아들의 옥고는, 선린의 양국 간에 도저히 일어나서는 안 될 비상식적인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특단의 조처를 취해주시기 바라오.
아울러 우리 후고려의 개국공신인 임장청의 손녀들, 미시아와 여미아, 어처 극시아를 잘 건사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특별히 미시아는 우리 후고려에서 태자비 물망에도 오른 현숙한 처자인 바, 귀국에서 황태후의 총애를 받고 있다 하니, 매우 감사하게 생각하오.
삼신일체 상제께 귀황실과 귀국의 평강을 빌며, 이로써 간단히, 안부의 인사를 대신합니다.
중광 20년 후고려국 제帝 고중상
서신을 다 읽은 태평공주가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다.
“우리의 사적인 일을 고중상이 손바닥 보듯 환하게 알고 있다니, 어찌 된 일이냐?”
태평공주는 무슨 속셈에 골몰한지, 그녀의 말을 못 들은 듯하다.
“이것아! 내 말 좀 들어봐.”
태평공주가 말없이 어미인 무 태후를 쳐다보았다.
“너는 남편 설소를 버리고 고조영과 혼인할 의사가 있느냐?”
태평공주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구나.”
무 태후가 천정을 쳐다보다가 밖을 향해 말한다.
“게 아무도 없느냐?!”
“네! 여기 있사옵니다.”
한 내시가 종종걸음으로 달려 들어왔다.
“지금 고조영과 미시아가···.”
이 때 태평공주가 그녀의 말을 끊고 급히 제지하고 나선다.
“어마마마,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왜? 금새 마음이 변했느냐?”
“아니에요. 그들이 죽을까봐 두려워, 이미 제가 손을 써서 빼냈어요.”
무 태후가 그녀를 한참 쏘아보더니 묻는다.
“그들은 어디에 있느냐?”
“오라버니의 별전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너의 오라버니 이단은 지금 뭘 하고 있느냐?”
“글쎄요, 잘은 모르겠지만 오라버니는 밤낮으로 책에만 빠져 있습니다.”
“그래? 우리가 그를 찾아봐야겠다.”
두 사람은 종종걸음으로 이단의 별전을 향해 직행했다.
무 태후와 태평공주가 들어서자 황제 이단이 책상 앞에 앉아 있다가 정중하게 맞이한다.
“어마마마께서 어인 일로 저를 다 찾아주셨습니까?”
이단이 미묘한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 있어, 자네 의견 좀 들어보러 왔네.”
“소자가 불민하온데, 어찌 도움이 되겠습니까? 하지만 오늘 아침 어마마마가 보고 싶은 의념이 문득 일어나 준비를 갖추고 있었사옵니다.”
“그래? 우선 내 말 좀 들어보게.”
이단이 시종에게 무언가를 부탁한 후 좌우를 모두 물리치자, 무 태후는 고중상이 보내온 국서를 내보였다. 이단이 국서를 자세히 읽은 후 무 태후에게 물었다.
“제게 어떤 말을 듣기 원하십니까?”
“이 아이가 남편을 버리고 고조영과 혼인하겠다고 하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머니, 그건 아니 됩니다.”
무 태후가 침묵을 지킨다.
이단은 혀를 끌끌 차더니 이영월에게 조용히 말했다.
“고조영을 맘에 두는 것은, 네 신상에나 우리에게 여러 모로 좋지 않은 일이다.”
무 태후가 화제를 돌리며 이단에게 묻는다.
“수 천리 밖 모퉁이 동모성에서 고중상이 어떻게 이곳 사정을 손바닥 보듯 환하게 알고 있을까?”
“우리 가까이에 고려 세작細作이 있다고 봐야죠.”
“고려 세작이라면?”
“그야 명약관화하죠. 죄다 고려인들이지, 중화인이 세작 노릇을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마마마 맘대로 도출해 보십시오.”
“고려인들을 다 잡아 가두어야 하는 게 아니냐?”
“어마마마는 고려인이 모두 세작일 것으로 추측하십니까?”
“그렇지는 않겠지만, 죄다 가두면 세작도 잡히지 않겠느냐 말이다.”
“지자천려智者千慮에 필유일실必有一失이라고 했습니다.”
이단은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라고 힐문하려다가 그건 어머니에 대한 지나친 언사인 것 같아, 무 태후의 자존심을 은근히 높여주고자 이렇게 말했다.
“···?”
이단이 창밖을 내다보다가 말을 잇는다.
“고려 속담에, 빈대 하나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세작 하나 잡으려고 하면 그보다 훨씬 더 소중한 것을 잃게 됩니다.”
“하지만 그냥 놓아둘 수도 없지 않느냐 말이다.”
“그냥 놓아두세요. 어차피 우리도 그 쪽에 첩자를 보냈고, 그네들도 우리나라에 놓아두고, 피장파장입니다.”
무 태후가 입을 다물었다.
“우리 사정을 가장 잘 아는 고려인은 고조영과 미시아 밖에 없지 않느냐?
“그러겠죠.”
“그네들을 보다 엄밀하게 감시해야 하겠구나.”
“조심해야 할 거예요. 만에 하나 고조영이 우리 대당에 대해 악감이라도 품는다면, 그가 후고려의 왕위에 오를 때, 우리로서는 그리 재미없을 거예요.”
“그까짓 후고려쯤이야.”
“어마마마는 돌궐과 거란, 후고구려의 공모에 대해, 어떤 계책을 준비해 놓고 계십니까?”
“그들은 공모할 수 없다.”
이단이 침묵을 지킨다.
(다음회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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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4. 11. 15. 늦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