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혁명, 이는 비록 곧 빛이 바래지고 말았지만, 아시아의 역사에서 최초로 공화제를 새긴 불멸의 이정표였습니다. 후에 쑨원의 비서이자 부인이 되는 쑹칭링(송경령)은 당시 미국 대학 재학 중에 신해혁명의 소식에 감개무량하였습니다.
당시 쑨원은 미국에서 혁명 자금의 모금에 여념이 없었는데, 신해혁명의 소식을 듣고 바로 귀국하지 않고, 미국과 유럽을 순회하며 신해혁명의 공화국에 대한 열강의 지지를 얻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직 신해혁명은 불완전하였습니다. 청조는 낙향해 있던 실력자 위안 스카이를 불러들였습니다. 그의 북양군(北洋軍)은 여전히 가장 강력한 물리력이었습니다. 호북성의 공화혁명군은 위안스카이에 패퇴하게 됩니다. 양 진영은 영국의 중재하에 휴전에 들어갔습니다. 물론 위안 스카이도 이미 무너진 청조에 충성을 다 바칠 일은 없었습니다. 이리하여 새로운 공화국의 영수로서 쑨원과 함께 위안 스카이가 대두하게 됩니다.
그해 12월 홍콩에 도착한 쑨원을 맞이한 동지들은 혁명의 완전한 승리를 위하여 위안 스카이와 결전을 벌일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쑨원은 그에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중국이 내전으로 빠져들어간다면, 열강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쑨원은 결단을 내립니다. 위안 스카이가 청조를 포기하고 공화제를 수용한다면, 그에게 초대 총통의 지위를 양보하겠다고 제안합니다. 위안 스카이의 동의를 기다리면서 혁명의회는 중화민국 공화국 임시총통으로 쑨원을 선출합니다.
청나라는 회복이 불가능하였습니다. 북방의 여러 군벌들도 청조 타도에 가담하였습니다. 위안 스카이는 청조의 황족들에게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함을 알려주었습니다. 마침내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부의: 溥儀)가 폐위되어 한 명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쑨원은 임시총통 사직서를 의회에 제출하였고, 의회는 다시 위안 스카이를 정식의 총통으로 선출합니다.
쑨원은 총통 대신 국민의 지도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쑨원은 공화국 중화민국의 미래에 낙관적이었습니다. 신해혁명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이전의 어떤 왕조의 교체보다 피해가 적었고, 민족주의와 민권주의, 그 두 가지가 성공적으로 달성되었다고 자부하였습니다. 쑨원은 이제 민생주의에 집중하고자 하였습니다. 평균지권 그리고 그에 더하여 철도와 같은 중요 자본의 국유화가 민생주의의 핵심으로 선언되었습니다. 쑨원은 위안 스카이에게 '평균지권' 사상을 전도하고, 또 철도 부설을 위한 전권대사의 직을 부여받습니다. 쑨원은 중국의 재건, 부흥이라는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화민국의 정국은 다시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동맹회의 신진기예, 30세의 쑹쟈오런(송교인)은 의회민주주의의 이상을 위하여 '국민당을 조직하여 세를 불렸습니다. 쑨원의 동맹회도 국민당에 흡수되었습니다. 쑨원은 정당을 무원칙하게 확대하는 것에 탐탁치 않았지만, 형식적인 집행위원장직을 맡습니다. 국민당은 선거에서 연이어 압승을 거두고 쑹쟈오런은 수상이 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의회민주주의에 익숙치 않은 위안 스카이는 자신의 권력을 수상의 통제하에 두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1913년 쑹쟈오런은 저격 암살됩니다. 국민당은 저항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쑨원도 제2혁명을 선언하였습니다. 그리고 열강들에게 의회정치를 파괴하는 위안 스카이를 지지하지 말 것을 강력히 요청합니다. 그러나 위안 스카이는 물리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국민들 대다수도 아직 공화제, 의회정치에 대하여 알지 못하였습니다. 위안 스카이는 국민당을 무효화시키고, 국민당원들을 처단하기 시작하였고, 결국 의회를 해산해버렸습니다. 또한 열강들은 쑨원에 호응하여 공연히 일을 어렵게 만들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쑨원은 참담한 심정으로 일본으로 피신하였습니다. 전열을 재정비하고자 하였습니다. 동맹회보다 더욱 정예화되고 일사불란한 당 조직, 마치 레닌의 당 개념을 선취하는 것과 같은 조직을 원했습니다. '중화혁명당'을 구성하였습니다. 당의 강령은 이전 동맹회의 강령과 대동소이하였습니다. 민권, 민생, 5권헌법, 3단계 혁명(군정-훈정-헌정) 등이 그것입니다. 청조는 이미 타도되었기 때문에 민족주의는 이제 빠진 것입니다. 이 때까지 쑨원의 민족주의는 만주족에 대한 한족의 해방을 말하는 것이었지, 열강의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의 담론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한편 세계 정세도 격변기로 접어들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입니다. 일본은 산동반도를 점령하고 있던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중국 정부에 많은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소위 21개조 요구입니다. 그것은 곧 일본이 중국의 후견인이 되겠다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중국 인민들은 분노하였고, 일본의 요구를 수용한 날을 국치일로 선포하였습니다. 위안 스카이에 대한 저항도 전국적으로 고조되었습니다. 위안 스카이는 권위를 공고히하고자 스스로 황제에 오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더 큰 반발을 불러왔고, 위안 스카이는 요독증으로 급사하였습니다. 위안 스카이의 사망은 공화국의 부활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청조가 무너진 이후 공화주의 혁명 세력은 대중적 지지가 미약하였고, 또 세력이 분산 약화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북경 정부는 군벌들이 각축하는 전리품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게다가 제1차 세계대전의 연합국측은 중국을 끌어들여 참전케 합니다. 중국의 수만의 병사들을 용병처럼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쑨원의 반대와 항의는 소용이 없었고, 열강들은 중국 군벌 정부와 이해관계를 공유하였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열린 파리 강화회의에서 연합국들은 더욱 큰 실망을 안겨줍니다. 중국은 형식적으로 승전국으로 강화회의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중국인들은 열강들이 강요했던 불평등 조약 등의 개선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패전국 독일을 대신하여 승전국 일본이 산동반도 점령을 승인하는 안이 나온 것입니다. 중국 전역은 들끓었습니다. 이른바 5.4운동입니다. 맹렬한 시위, 파업과 보이코트가 이어졌습니다.
쑨원은 혁명 조직을 재정비하였습니다. 중화혁명당을 중국국민당으로 재편하였습니다. 국민당은 민국 초기의 정당 이름과 같지만, 그 앞에 '중국'을 붙여 차별성을 두고자 하였습니다. 당 강령은 역시 '삼민주의'와 '5권 헌법'이었습니다. 여기서 민족주의는 새로운 의미와 위상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전의 만주족 축출이 아니라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 그리고 중국을 구성하는 5개 민족들의 상호 공존과 협력이라는 차원으로 발전해 간 것입니다. 그리고 광동의 군벌 천즁밍(진형명: 陳炯明)의 도움을 받아 광저우에 중화민국 정부를 재수립하고, '비상총통'에 선출됩니다.
쑨원은 총통의 자격으로 북경정부와 협상 혹은 북벌을 통하여 중화민국의 통일을 달성코자하였습니다. 그러나 북경의 군벌과 연결되어 있던 천즁밍은 쑨원에 반대하였고, 오히려 쑨원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공격이 개시되었을 때, 쑨원과 부인 쑹칭링의 일화는 유명합니다. 쑹칭링은 남편 쑨원을 먼저 피신시킵니다. 중국은 쑨원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쑨원은 경호원을 모두 남겨두고, 혼자 탈출합니다. 쑹칭링도 총탄세례 속에 구사일생으로 탈출에 성공합니다. 경호원들은 모두 사망하였습니다. 쑹칭링의 배속의 아이도 유산되었습니다. 이후 쑹칭링은 아이를 갖지 못합니다.
군사력이 결여된 쑨원, 열강의 지지를 받지 못한 쑨원은 무력감을 절감합니다. 이제 쑨원은 러시아에 의지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