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4월, 오랫동안 유신독재 하에서 억눌려 왔던 노동운동은 사북 노동자 4천여 명의 총파업을 계기로 격렬하게 터져 나왔다. 짧았던 노동운동의 봄이었다. 4일간의 봉기에 가까운 파업이 끝난 직후, 4월 25일 단 하루 동안에만 전국 8개 공장에서 3천여명의 노동자가 경찰과 직접 대치하여 격렬한 투쟁을 벌였고, 5. 17직전까지는 부산 파이프, 동국제강, 금강제화, 원진레이온, 신일인쇄 등 수많은 공장에서 노동쟁의가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1) 파업의 배경
사북 파업은 올바른 정치의식 하에서 목적의식적.계획적으로 시도되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오래전부터 기업주와 어용노조를 향한 작은 투쟁들이 축적된 결과였다.
(1) 동원탄좌의 비인간적인 착취
1980년 당시 동원탄좌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국내 최대의 민영 탄광으로서 직영에서만도 3,052명의 노동자가 3,609ha, 23개 광구에서 연 160톤의 석탄을 캐내고 있었고, 하청탄광에서도 2천여 노동자가 연70만톤을 캐내고 있는 대형탄광이었다.
이는 전국 채탄량의 11%를 차지하는 것으로, 당시 동원탄좌 자산액은 120억원으로 추정되었다. 회장 이연은 60년대에 동원탄좌를 개발, 석탄에서 번 돈으로 동원전자 등 10여 개 방계기업을 세워 국내 유수의 재벌이 되었는데, 당시 이연회장은 사채 시장의 큰손으로 3천억원까지 즉시 꺼낼수 있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그러나 광부들의 임금은 당시 평균 15만 5천원으로, 1980년도 광산노련에서 집계한 최저생계비인 24만원의 64%정도에 불과한 저임금이었다. 그나마의 저임금조차도 동원탄좌측은 생산량을 줄이는 부비끼로 이중으로 착취해 왔다. 갱내에서 탄을 실은 차가 갱밖에 나오는 동안의 충격으로 탄 부피가 20% 가량 줄어드는 것을 이용, 생산량을 적게 측정해 왔던 것이다.
그 사실은 1979년에 동원탄좌 사무직이었던 김종길씨(당시 42세)가 노동부에 고발함으로써 폭로되었는데, 김씨는 자신이 바로 생산량을 적게 측정해 오던 직원으로써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이를 일일 계산했는데, 4년 6개월 동안 무려 4억 4천만원의 임금이 갈취되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노동부와 행정관청은 김씨를 오히려 무고. 협박죄로 구속시켜 그는 6개월의 실형을 살아야만 했다. 김씨는 이후에도 계속 진정과 고발을 거듭, 갈취액의 일부를 회수하는 데는 성공하여 자신이 결코 거짓 주장을 한것이 아님을 증명했다. 당시 동원탄좌측은 고발을 취소하는 대가로 2천만원을 주겠다고 유혹했다는 후문도 있었다고 한다.
노동자들은 이러한 저임금을 소비과정에서 다시 기업주에게 3중으로 착취당하였다. 지장산 사택의 경우, 기업주의 친척이 운영하는 구판장이 유일한 점포였는데, 말이 구판장이지 실제로는 시중의 물가보다도 훨씬 비쌌다. 기업주측은 더욱이 구판장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외부에서 들어오는 차량행상들의 출입을 금지시키고, 읍내로 나가는 시내버스의 개설을 방해하기까지 했다.
당시 동원탄좌는 국내 제1의 민영탄광이면서도 목욕탕조차 제대로 갖추지 않아서, 당시 부녀자들은 밥하는 일만큼이나 목욕물 데우는 것이 중요한 일과였다. 본갱의 목욕시설은 낡을대로 낡았고, 2천여 하청탄광 노동자들은 아예 그나마도 없었던 것이다. 또한 동원탄좌는 이런 악조건에 대한 노동자의 불만은 누르고 더욱 착취해내기 위해 악랄한 정보원 조직까지 운영하고 있었다.
소위 “암행독찰대”라고 불리는 이들은 1977년도에 이연 회장의 가까운 친척들로 알려진 5명의 방위과 직원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특별한 근무시간이 없이 24시간 아무때나 어느 곳이고 돌아다니며 노동자의 근무실태를 사찰하는 것이 임무였다. 이들에 의해 소위 ‘적발’된 노동자는 매우 많았다. 일례를 들면, 현장에서 쓰고 남은 갱목으로 사택을 수리했다가 회사기물 절도로 몰려 많은 노동자가 30% 감봉이나 출근정지를 당한 일이 있었다. 동원탄좌 사택은 불과 6평짜리 인데, 창고조차 없어 많은 노동자들이 갱내에서 쓰다버린 판자를 틈틈이 주어 누덕누덕 못질해 창고를 만들어 쓰고 있었는데, 암행독찰대가 있기 이전에는 회사 간부들도 이를 묵인해 왔다고 한다.
또, 당시 810항에 후산부로 일하던 김모씨의 경우, 노보리에서 갱목을 진 채로 잠시 쉬다가 암행반에 걸렸는데, 다음날 사무실에 불려가 호되게 욕을 먹고 나서 벌칙으로 사무실 마당의 풀을 뽑는 모욕적인 일을 당했다고 한다. 이보다도 더 심한 경우도 무수히 많았는데, 당시 875항에서 일하던 최모씨의 경우, 회사 경영진을 비판하는 잡담을 하다가 감봉당했고, 통상적으로 인정되어 온 마른 공수를 달아 주었다고 해서 감독이 해고당한 일도 있었다. 이토록 기업주측은 가혹한 중노동과 이중 삼중의 임금착취, 인격적 모욕과 천대를 일삼아 왔고 그것이 사북 총파업의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2) 노동조합의 어용성
기업주측의 악랄한 착취 이상으로 노동자들의 분노를 일으키게 했던 것은 어용노조였다. 동원탄좌 노조는 탄광이 개발되던 초기에 노동자들을 감독하기 위해 고용되었던 주먹 깡패들의 잔재가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 노조 지부장이었던 이재기는 물론 부지부장 홍○○, 또한 이웃의 삼척탄좌 지부장 김규벽 등 노조 간부 대부분이 광부 출신이 아니라 소위 전과자들의 조직인 국토개발대라든지 지역청년회 소속의 불량배나 그와 다름없는 주먹패 출신이었다.
광산노동자로서 기업주의 착취에 분노하기는커녕 기업주·경찰과 야합하여 노사협조라는 미명아래 진정한 노동운동을 억눌러 온 이들은 지부(80년 이전에는 산별노조를 단위로 하였기 때문에 산하 조합장을 모두 지부장이라 지칭) 선거가 간선제인 것을 이용하여 돈과 주먹을 동원, 노조를 장악하고 엄청난 이윤을 착취해 왔다.
당 지부장 이재기만 보더라도, 1964년 동원탄좌 노조지부가 설립되자 곧바로 회사측의 지원으로 1,2대 지부장이 되었는데, 1969년 1천7백만원의 보험금을 횡령한 사실이 드러나 구속되어 일시 복역까지 했던 파렴치한이었다. 그러한 이재기가 또다시 회사와 야합, 1976년 동원탄좌에 복직되어 대의원 확보에 나선지 단 두 달만에 제 5대 지부장이 되었던 것이다. 이는 3개월 이상 조합비를 내야 지부장 피선거권이 주어지게 되어 있는 규약조차 무시한 채, 일명 칠형제파로 불리던 대의원 이홍규, 유정현, 이형윤, 김재하, 황보수, 방영순, 이용진 등과 홍금웅 등의 지지로 이루어 진 부정선거였다.
이재기 일파는 4천여 조합원으로부터 매월 임금의 1.5%인 연 1억5천만원을 거둬들여 물쓰듯 돈을 써대는 한편, 노동자들의 일상적인 요구는 철저히 무시했다. 현재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 노조활동이란 것이 고작 경찰과 노조의 협의회, 행정관청과의 회의, 대의원대회, 반공교육 등이었을 뿐, 진정 노동자를 위한 신문 한장 낸 일없고, 파업 한 번 주도한 일이 없었다.
이에 대한 불만은 점차 고조되어 갔고 대의원 대회 내에서도 이재기 파벌을 퇴진시켜야만 한다는 여론이 임박해지면서 노조민주화 요구는 더욱 강해졌다. 광산노련에서는 이를 감지, 당시 광산노련 위원장 최정섭은 이재기를 퇴진시킬 목적으로 광산노련 조직부 차장이던 황한섭을 동원탄좌에 입적시켰다.
이재기가 5대 지부장이 되기 위해 입적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황한섭도 실재로 일은 하지 않고 서류상으로만 동원탄좌 노동자가 된 것이었다. 황은 당시 어용노조 내에서 불만이 많던 고토일갱 대의원 이원갑을 신임하여 이재기에게 이원갑을 노조 보안부장으로 내정하게 한 후 이씨와 함께 세력을 규합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분위기를 눈치챈 회사측과 이재기는 현직 지부장으로서의 권리를 이용 황한섭을 위원장으로 한 선거위원회가 구성되려 하자 재빨리 일부 대의원 선거를 실시하였다. 하청업체 대의원 선거였는데 이재기는 대의원 수가 조합원 수에 비례해서 뽑혀야 함에도 불구하고 비조합원인 사무직까지 포함해서 대의원 수를 4명이나 더 늘인 후 선거를 실시, 자파 후보 8명을 당선시켰다. 여기에는 물론 회사측의 도움이 있었는데, 대의원 선거가 끝난 후 이재기와 회사가 공동으로 값비싼 향응을 마련했다는 것만으로도 증명되었다.
이런 식으로 자파인 무자격 대의원을 7명이나 확보한 이재기파는 4월 3일 지부장 선거를 실시했다. 이날의 6대 지부장 선거는 전 노동자와 광산노련의 주시 속에 진행되었다. 이재기 스스로 인정했듯이 “이원갑이 절대 다수로 당선되리라고 예상한” 대회였다. 그러나 개표 결과는 아무도 예상치 않았던 충격적인 것이었다. 이원갑이 13표를 얻고 이재기가 15표, 무효 1표로 이재기가 당선된 것이었다. 노동자들은 즉각 불만을 터뜨렸고, 이원갑 등 다수 대의원들은 7명의 대의원이 무자격인 것을 확인하고 지부장 선거가 무효임을 주장했다. 4월 15일, 이원갑, 김상기, 박근식, 심혜구, 김형진, 김재봉, 김종철, 이수경, 이명호 등 9대 대의원의 연명으로 “지부장선거 무효 신청”이 광산노련에 제출되었다.
광산노련에서는 4월 20일 조사단을 파견, 노동자들이 술렁이는 것을 보고 선거가 무효라는 판정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고, 즉각 조직부장 이영근을 직무대리로 파견하여 사태수습에 나섰다. 이영근은 6월 20일까지 재투표를 실시하도록 종용하였다. 그러나 이재기는 이를 거부하고 법적인 감독자인 강원도지사 김성배에게 유권해석을 신청하였다. 물론 어용노조 편인 강원도지사는 선거가 유효하며 노조지부장, 자격유무에 대해 광선노련에서는 말할 자격이 없다고 회신하였다. 이를 증거로 이재기 일파는 사무실을 점거하고 광산노련에서 파견되어 온 이들을 못들어요게 완력으로 막기 시작했다. 이영근 조직부장 이후 이귀택, 신경 등 5명의 광산노련 간부가 임시 지부장으로 파견되어 왔지만 모두 깽패들에 의해 쫓겨나고 말았다.
노동자들의 분노는 점차 높아져 갔다. 노동자들은 6월 중순, 지부장 직선제와 재선거를 요구한 서명운동을 벌였는데, 전 조합원의 75%인 2,586명이나 서명에 참여했다. 이재기 퇴진의 요구는 누가 보아도 너무나 정당했다. 그러나 이재기 일파는 이를 소수의 선동이라고 일축하였고, 노동부는 서명이 무효라고 선언해 버렸다. 경찰은 주동자들에게 압력을 가하였다. 광산노련은 이재기를 “반조직 행위, 공문서 위조죄”로 조합원에서 제명하고 제차 3차 선거실시 요구 공문을 보냈지만 이재기는 버젓이 지부장 행세를 계속했다. 노동자들의 분노는 턱밑까지 치밀어 올라 있었ㅈ지만 유신체제의 학정은 이를 당분간 더 누를 수 있었다.
이토록 제멋대로 노동자의 의사를 거부하고 스스로 노동자의 대표가 된 이재기 일파가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
당시 매년 뛰어오르는 물가로 가장 시급했던 임금인상 문제에 대해 어용집행부는 당연히 노동자를 배신했다. 1979년도에 고아산노련은 그 해 상여금 인상 미지급분 90%를 일시불로 지불 요구하기로 결정하고 6월말까지 각 사업장에서 기업주와 합의볼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재기는 이 문제를 상의 하겠다고 서울까지 가서 이연 회장을 만났으나 전혀 거론치 않고 돌아와서는 7월말까지 받기로 합의를 보았노라고 벗젓이 거짓말을 하였다. 노동자로부터 지지받지 못하고 회사에 기생해서 위태롭게 직위를 유지하는 어용노조 지부장으로서는 그 정도의 당연한 요구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막상 7월이 다 가게 되자 노동자들의 요구에 초조해진 이재기는 할수 없이 상집회의를 열었다. 상집회의에서는 미지급분을 즉각 지불하지 않으면 회사 사무실에서 농성하겠다고 결의하였다. 놀란 이재기 일파는 농성을 못하게 말리고 공휴작업을 거부하기로 경정했다. 당연히 놀아야 될 일요일에 노는 것을 투쟁이라고 선택했으니 90% 일시급을 받지 못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노동자들의 불만이 축적되던 중, 10월 26일 박정희가 살해되는 정변이 일어났다. 유신독재체재는 급속히 붕괴되기 시작했고, 그 동안 억눌려왔던 제 계층의 요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독재자의 죽음은 민주주의의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정권은 여전히 군 계엄사령부가 장악하고 있는 가우데 불안한 정국이 계속되었다.
이재기 일파는 그 속에서도 재집권을 위해 계속 혈안이 되어 있었다. 1979년 12월 13일, 이재기는 대의원 29명 전원을 제주도로 초청하여 신재주호텔에서 3박 4일이나 호화판 잔치를 열어 주었다. 천만원이상의 비용이 들어간 향응을 통해 이재기는 노조 임원진에 대한 신임투표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도 임원중 신흔균 등 자파 세력이 불신임되는 것을 확인하고는 회의 도중 올라와 버렸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어느정도 유화책을 써, 1980년 1월 11일 이원갑을 조조 지도위원으로 추대하였다. 지도위원이란 실권없는 형식적인 자리였지만, 광산노련에서는 이를 기회로 이재기를 다시 조합원으로 인정하고 직무대로 임명했다. 결국 기회주의적인 광선노련은 노동자들의 분노가 가라앉은 것처럼 보이자 이재기를 지부장으로 인정하고 만 것이었다. 그런 형식적인 자리에 억지로 추대된 이원과 일반 노동자들은 조금도 분조를 잃지 않고, 결정적인 폭발을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2) 파업의 발단
노동자들의 거센 반발과 험오를 부릅쓰고 다시 안정되 자리를 확보하게 된 어용노조 집행부는 1980년 임금인상에서 또다시 노동자를 기만하고, 정치권력은 이에 항의 하는 노동자들을 탄압해 들어갔다. 결국 노동자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터지게 된 것이었다.
(1) 어용노조의 배신
1979년 12월 4일 광산노련 전국 지부장 회의에서는 광산 노동자 5인 가족 최저 생계비를 241,200원으로 책정하고, 1979년 평균임금 155,700원과의 차책 85,000원 즉42.75%의 인상을 요구하기로 결정하겼다. 그러나 여러 탄광업주들이 이를 거부하자, 1980년 3월 2일 재집결, 42.75% 인상을 사수하기로 재결의하고 대표단이 광산협회에 몰려가 농성을 벌이는 한편, 동력자원부와 상공부까지 찾아가 항의를 계속했다.
그러나 동원탄좌는 조용하기만 했다. 이재기는 광산노조 조합장 결의를 배신하고, 나아가 노동자를 배신하고, 회사측과 비밀리에 협상하여 20% 인상키로 합의를 본 것이다. 이재기 집행부는 이 사실을 숨긴 채로 임금인상에 대한 아무런 발표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어용노조의 배신은 곧 폭로되었다. 광산 업주들사이에서 동원탄좌가 20%에 합의를 보았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기업주들은 이를 이유로 자기돌 20% 이하 인상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기막힌 배신에 분노한 노동자들은 동요하기 시작했고, 이원갑과 신경 등은 이재기에 관한 서류와 1979년 선거에 대한 자료들을 다시 모아 탄원서를 작성, 각계에 진정을 하기 시적했다.
(2) 광산노련의 기회주의 4월 15일 밤 9시, 이원갑, 신경, 최돈혁, 진복규, 조행웅, 이학천, 안원순, 박윤상, 조재흥, 고새용, 신수복, 황보광, 이상진, 김동진 등 26명은 사북역을 출발, 서울로 향했다. 이들은 서울에 도착하자 여관에서 합숙한 뒤, 4월 16일 오전 9시, 종로구 창신동에 있는 광산노련 사무실로 몰려갔다.
노동자들은 광산노련의 기회주의적 태도를 격렬히 비난했다. 사무실을 점거하고 책상을 두드리고 구호를 외치면 위원장 최정섭과 부위원장 김규벽을 잡아놓고 “직접선거를 승인해 놓고 왜 선거를 치르지 않느냐”,“조합원은 다죽으란 말이냐”며 농성에 들어갔다. 광산노련측은 당황하며 다음날 디시 오면 책임 있는 답변을 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노동자들은 일단 여관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광산노련은 노동자의 요구를 해결하기는커녕 동원탄좌 노조에 연락, 다음날 노동자들이 다시 가보니 부지부장 홍○○(1987년 광산노련 선거에서 위원장이 됨)과 이ㅣ홍규가 쫓아 올라와 있었다. 홍○○ 등은 다음날인 4월 18일 오후 2시에 이재기가 조합원 앞에서 임금인상 문제를 해명하기로 했다며 노동자들을 회유, 노동자들은 일단 농성을 해산하고, 이원갑을 제외한 전원이 사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다음날 이재기의 발표는 전혀 반성의 빛이 없는 것이었다. 이재기는 오후 2시 노조 사무실로 몰려가 50여 명의 노동자 앞에서 오히려 당당했다. 노동자들이 임금인상 경위, 신협운영 문제, 복지시설 문제 등을 추궁하자, 이재기는 “나는 강원도지사가 임명한 지부장이다. 당신들 따위가 떠들어 봤자 소용없다. 노조선거는 다시 할 수 없다.”며 큰소리를 쳤다. 분노한 노동자들은 그자리에서 구호를 외치면 농성에 돌입했다. “이재기 사퇴하라!”,“현집행부 물러나라!”,“임금 40% 인상하라!”등 노동자들의 구호가 읍내에 퍼지기 시적했다. 그러자 익히 어용노조의 비리를 알고 있던 노동자 백여명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3) 군부 경찰의 기만과 폭력
노동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자 이재기는 경찰에 신변보호를 요청했다. 오후 5시경 출동한 사북지서장 어윤철은 노동자들의 절박한 요구는 들어 볼 생각도 않고 “계엄령하의 집호는 불법이다. 해산하라”고 명령하며 주동자격인 신경을 지서로 강제연행해 갔다. 경찰의 편파적인 행동에 분노한 노동자들은 들끓기 시작했다. 이때 용천수, 윤원철 등이 나서서 “신경이만 죄가 있냐, 여기 있는 사람 모두 같이 가자”고 외쳤다. 그러자 백여 명의 노동자들은 즉각 이에 동조, 사북지서로 몰려갔다.
이들은 지서 앞에서 “신경을 석방하라! 이재기 사퇴하라!”고 함께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7시 30분경 서울에 남아 있던 이원갑이 도착하여 노동자들의 대표로서 지서장을 만나 집회허가를 요구했다. 농성 노동자들은 날이 어두워지자 빵과 소주를 사다먹으며 아예 도로 위에 연좌하여 계속 구호를 외쳤다. 경찰은 도저히 안되겠다고 판단하자, 당장 해산한다면 이원갑과 신경이 요구하는 집회허가를 내주겠다고 각서까지 써 주었다. 지서장의 각서에 농성 노동자들은 일단 해산했고, 이원갑, 신경, 최돈혁 등은 계속 만나 21일 집회에 필요한 인원동원 계획을 짜나갔다.
그러나 이틀이 지난 4월 20일 회사 입구와 각 사택에 “21일 집회는 불허한다.”는 계엄사령부 명의의 벽보가 나붙었다. 19일 오전 9시에 사북지서장 앞으로 접수된 노조지부장 명의 집회허가 신청서가 계엄사령부에 거부된 것이다. 기업주에 대한 노동자의 권리행사를 철저히 분쇄함으로써 자본가의 이익에 봉하해 온 군부정권은 총칼의 힘만 믿고 노동자의 절실한 요구를 거부한 것이다. 회사로부터, 어용노조로부터, 광산노련으로부터, 이제는 국방의 의무에 전념해야 할 군인까지로부터도 기만당한 노동자들은 더이상 아무것도 믿지도 두려워하지도 않게 되었다.
다음날인 4월 21일 오후 2시경 30여 명의 노동자들이 계엄사령부의 ㅣ포고를 무시하고 노조 사무실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조합원 총회를 요구하며 농성에 돌입했는데, 얼마 안 가 노동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3시경에는 300명이 넘게 되었다. 노동자들은 이재기와 한패인 홍○○을 둘러싸고 “왜 집회허가가 나오지 않느냐! 노조와 경찰이 짠 아니냐”며 항의하였다. 오후 4시경 사무실 안에 있던 노동자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경찰 50여명이 사무실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정선경찰서 형사 이운선은 노동자인 양 위장, 사무실에 잠입해 들어왔다. 르러나 노동자들은 경찰임을 알고 “경챂이 사태를 모르고 무엇 때문에 왔냐, 저 ○○ 죽여라!”고 외치며 이운선을 잡으려 하였다. 이운선은 당황하여 창문을 타고 도망쳐 나와 사무실에서 15미터쯤 떨어진 곳에 세원 두었던 경찰 지프에 올라탔다. 밖에서 이것을 보고있던 노동자 원일호 등 4명은 경찰이 동망가지 못하도록 지프이 본네트에 올라타며 차앞을 가로막았다. 노동자들은 “네놈도 한패다. 내려라”고 소리치며 위협했다. 이때 지프에는 이운선과 형사 장윤택이 타고 있었는데 겁에 질린 강윤택이 엉겁결에 엑셀레이터를 밟아 버린 것이었다.
아무리 당황했다고는 하나 노동자들이야 죽거나 말거나 밀고 나가려고 한 것은 평소 노동자를 천시해 왔던 경찰의 본색을 여지없이 드러낸 것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프는 원일호를 들이받은 후, 그의 허리와 다리를 타고 넘고서도 앞에 서 있던 노동자들을 4명이나 들이받고 타고 넘었다. 비명과아우성이 하늘을 찢는 듯 하였다. 동료가 피투성이가 되어 실려가자 분노가 극에 달한 노동자들은 지프를 완전히 박살내어 언덕에 굴려 버리고 시위에 돌입하기 시작했다. 회사, 노조, 경찰과 군보안대의 기만과 폭력은 마침내 17년 동안 참아 왔던 분노의 뚝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격분할 대로 격분한 노동자들은 밀물처럼 사북시내로 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3) 파업의 경과
(1) 노동자. 부녀자들의 집결
“경찰이 사람 죽였다!”
“경찰이 차로 사람을 갈아 죽였다!”
외침소리가 터져나오고 노동자들은 순식간에 불어났다. 갑반퇴근자까지 합류한 500여명의 노동자들은 노조 사무실 주변에 있던 지서장 어윤철을 붙잡아 앞장세우고, 사북읍내를 향해 일물처럼 내려가기 시작했다. 4월 21일 오후 5시경이었다.
“이재기 찾아내라!”,“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여기저기서 너나없이 절규하는 소리가 사북읍을 온통 뒤흔들기 시작했다. 지서로 몰려간 노동자들은 부녀자들과 함께 지서에 뛰어들어가 책상과 의자를 뒤엎고 난로를 때려부쉈다. 전화기와 유리창은 산산조각이 났다. 부녀자들은 지서장을 때리고 멱살을 잡아당겨 옷을 갈갈이 찢어 버렸다. 노동자들은 경찰이 피신시킨 이재기를 돌려보낼 것을 요구하며 지서 주변을 완전히 점거하여 농성에 들었다. 전화 4대, 유리창 40장이 박살나고 170만원어치의 기물이 파괴되었다.
밤이 되면서 숫자는 더욱 불어났다. 밤 9시경 노동자 중에서 이완형이 지서장을 멀리 데리고 나가려 하였을때, 윤병천, 안재 등 10여 명의 노동자들이 달겨들어 마구 두들겨팼다. 이때, 노동자들에게 사무실에 경찰서장과 광업소장이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동원탄좌 내에 외부귀빈 숙소로 만들어진 객실에는 사북 담담서인 정선경찰서장이 암으로 치료 중이라서, 장성경찰서장 총경 홍응수가 와서 광업소장, 보안과장들과 협의를 하고 있었다.
“가자! 똑같은 놈들이다. 이재기를 찾아내라!”
외침소리와 함께 100여 명의 노동자들이 객실이 있는 사무실을 향해 노도처럼 몰려갔다.
“이 개○○들 전부 나와라” 누군가가 외치며 유리창을 박살내고 객실로 뛰어들었다. 그 뒤를 이어 백여 명의 노동자들이 유리창과 문을 박살내고 화려하기 짝이 없는 객실로 몰려들어 갔다.
“저 ○○, 네 개 단 놈은 뭐냐? 이재기한테 돈 얼마나 받고 여기에 왔냐? 죽여라!”
객실 1호에 있던 무궁화 4개의 총경 홍응수가 발견되자 노동자들은 죽이라고 외치며 몰매를 가하기 시작했다. 노동자 20여 명의 주먹질에 경찰서장의 옷이 다 찢어지고 가슴, 무릎 등을 걷어채이며 쓰러졌다. 별실로 도망쳤던 장성경찰서 소속 형사 이채규, 황희을, 안석호 등도 곧 노동자에게 잡혔다.
“이 경찰놈의 ○○는 숨어 있기는 왜 숨어 있어? ○○들아 전부 때려 죽이겠다. 다 똑같은 놈들이야!”
경찰들은 노동자들의 강인한 손에 붙잡혀 마당으로 질질 끌려 나왔다. 각목과 재떨이가 날아갔다. 이를 말리려던 서무계 직원 문병현도 몰매를 맞았다.노동자들이 경찰서장을 질질 끌고 마당으로 끌어내던 중 객실에서 광업소 사무실로 통하는 계단위에서 서장이 굴러 떨어지자 노동자들은 돌을 집어 던지며 외쳤다.
“이 개○○가 장성서장이래, 이재기를 찾아내, 이○○야 이재기만 찾아 내면 넌 보내 줘!”
이 소리를 듣고 밖에 있던 노동자 10여명이 서장에게 달려들어 몰매를 가했다. 경찰서장은 계급장과 단추가 모두 뜯긴 채 피투성이가 되어 애원하며 기어 도망가기 시작했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
그러나 노동자들의 분노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직 살려 달라고 애원하며 기어 도망치다가 구덩이에 빠지자 “저○○ 죽을 자리 찾으러 갔다.”고 외치며 돌을 던졌으며, 다시 끌어내어 “이○○ 아직 죽지 않았다. 끌고 가서 이지기 있는 곳을 확인하자”며 2층으로 끌고 갔다.
한편 이재기는 경찰의 도움을 받아 고한으로 피신해 있었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더이상 경찰서장으로부터 알아낼 것이 없음을 알고 다시 사무실 밖으로 끌고 나와 내버려 두었다. 우풍당당했던 경찰서장은 권총과 보자까지 잃고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었고, 갈비뼈 3개가 부러진 채 엉금엉금 기어 직원사택으로 도망쳤다.
노동자들은 남은 경찰, 형사들에게도 계속 몰매를 가해 내쫓아 버렸다. 서장은 사무직 사택에서 기계과장 이원락의 도움으로 겨우 도망쳤는데, 나중에는 이원락도 역시 몰매를 맞았다. 다른 경찰관의 구타를 말리던 사무직 김삼도도 몰매를 맞았고 흥분한 한 광부가 드라이버로 턱을 찍어 버렸다.
시위대열은 계속 확산되었다. 밤이 깊어지면서 천여명으로 불어난 부녀자들과 노동자들은 수백 명이 떼지어 다니며 동원탄좌 드넓은 구역 안에서 어용노조와 기업관리들의 특권흔적을 모조리 박살내기 시작했다. 객실의 화려한 치대며 옷장들이 모조리 부숴지고 끌어내 불살라졌다. 과장급 이상 회사 간부 집과 어용노조간부들의 집도 초토화되었다. TV,냉장고, 전축으로부터 부엌살림까지 연탄집게를 든 부녀자들에 의해 모조리 박살났다.
지부장 이재기와 부지부장 홍금웅의 집은 특히 집중공격되었다. 회사 비품도 모조리 박살났다. 전산기, 통신기, 전기시설, 차량과 부품, 주방용구, 가전제품 등 모든 것이 부숴지거나 꺼내어 불태워졌다. 안전모 방진마스크, 리어커까지도 남김없이 부수고 불태워버렸다. 지장산 계곡은 치솟는 불길과 함성으로 가득찼다. 새벽 4시경에는 김분연, 진복규, 이도명 등 노동자와 부녀자들이 사북읍내에 있는 새마을사택 목욕탕에 몰려가 방송기기를 점거했다. 이들은 “이재기를 내쫓고 임금인상 40% 쟁취하자! 모든 노동자는 빠짐없이 나오라!”고 방송을 계속하였다.
방송을 듣 수백명의 노동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날이 밝기 시작한 22일 아침 7시경에는 동원탄좌 위편에 있는 지장산사택 목욕탕, 방송실도 점거되었다. 부녀자와 노동자들은 지장산사택 8백여 가구 3천여 가족들에게 “어제 경찰이 사람을 깔아 죽였다. 사북으로 내려가자”고 외쳤다. 야간전투 같던 밤이 지나고 22일 아침이 밝았을때 동원탄좌의 드넓은 계곡은 2천여명의 노동자와 부녀자들로 가득했다. 오전 9시, 2천여 명의 부녀자, 노동자들은 사북읍내로 가두시위를 벌이며 참가할 것을 호소했다. 오전 9시 30분경 백여 명의 부녀자와 노동자들이 이재기의 집으로 몰려갔다.
마침 이재기의 세 아들은 외지에 나가 있었고, 처 김순이는 이웃집 정명찬의 집에 숨어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손에 손에 연탄집게와 망치 등을 든 시위대는 가재도구를 모조리 끌어내어 부수기 시작했다. 흥분한 부녀자들은 이에 멈추지 않고 이재기의 처를 찾아 주변 집을 수색하기 시작하였다. 처 김순이는 정명찬의 뒷방 침대 밑에 숨어 있다가 최옥자 등 10여 명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재기 대신 마누라를 잡았다. 이 년을 불태워 죽이자.”
“지금까지 잘 먹고 잘 살아 돼지처럼 살쪘구나.”
부녀자들은 김순이를 끌어내 1.5킬로미터 떨어진 노조 사무실까지 100여 명이 에워싸고 질질 끌고 갔다. 부녀자들은 욕설을 퍼붓고 침을 뱉고 꼬집어 뜯으며 이재기의 소재를 추궁했다. 그러나 김순이는 실재로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더 알아 낼 수가 없자 광부 10여 명이 달겨들어 광업소 정문 옆 게시판에 전선으로 묵어 놓고 이재기와 교환하자고 외쳤다. 수백명의 노동자와 부녀자들은 “네 남편이 어디 있냐”,“저 년이 지부장 마누라다. 죽여야 한다.”며 욕을 퍼붓고 할키거나 침을 밷었다. 흥분한 어떤 광부는 찬물을 끼얹기도 했고, 몇 명의 부녀자들은 아에 옷을 홀랑 벗겨버리고 음모를 뽑기도 했다.
김순이를 숨겨 주었던 정명찬도 끌려 왔다. 노동자들은 “이놈이 김순이를 감춰주다니 환장했구나. 이런 놈은 전기줄에 메달아 죽여야 한다.”고 외치며 두들기패서 내쫓아 버렸다.
이때쯤 서울에서 신문기자들이 도착하기 시작하였다. 노동자들은 김순이의 옷을 벗긴 채 사진을 찍으라고 했다가 기자들이 그런 상태로는 신문에 낼수 없다고 하자 옷을 입혀 찍게 하였다. 그 사진은 나중에 “무법천지”,“공포의 난동”이라는 제목으로 신문 1면을 가득 채웠다. 한편, 10시 반경에는 광업소 사무실에 숨어 있던 부소장 이우석이 노동자들에게 발각되어 몰매를 마지고 도망쳤다.
(2) 경찰과의 안경다리 접전
그때쯤 경찰은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밀려오고 있었다. 강원도 경찰국장 유내형의 직접 지휘아래 200여 명의 경찰.전경들이 소총으로 완전 무장을 하고 읍으로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읍내에 있던 1천여 시위대는 중무장한 경찰에 일단 밀리기 시작했다. 읍내에 있던 1천여 시위대는 중무장한 경찰에 일단 밀리기 시작했다. 경찰은 10시경 사북지서를 다시 점거하였고, 10시 30분경에는 300명으로 증원되어 동원탄좌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시내에 있던 3천여 시위대는 경찰에 밀려 철뚝과 안경다리 너머 동원탄좌 안으로 들어갔고, 내부에 있던 2천여 명과 합류했다. 4천여 부녀자, 노동자들은 철길은 경계로 더 이상 물러나지 않고 대열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사북읍과 동원탄좌 사이에는 높다란 철뚝이 가로막고 있어 유일한 길은 개울이 흐르는 철교 아래로 난 좁은 도로 뿐이었다. 노동자들은 즉각 큰 갱목을 철교로 날라와 井자 모양으로 쌓아 올려 도로를 차단하였다.
동원탄좌쪽은 사북읍보다 훨씬 높기 때문에 경찰은 이제 철뚝방을 기어올라야만 동원탄좌로 진입할수 있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철길 위의 넓은 평지에 얼마든지 쌍여 있는 자갈과 통나무를 가지고 맞설 수 있었다.
한편 이원갑 등 노동자 대표 두 명은 강원도 경찰국장 유내형에게 찾아가 거짓말이라도 이재기가 사표를 썼다고 방송하면 노동자들이 저러지는 않을 것이라고 충고했으나 경찰국장은 고자세로 이를 거부했다. 그는 노동자들이 운집헤 있는 역위를 향해 잘 들리도록 마이크를 역 아래쪽에 설치하고 “대표를 뽑아 평화적으로 대화하자”고 떠들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에 기동경찰들은 그의 지시대로 철길위로 접근해 올라가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회유하고 한쪽으로는 치고 들어가는 경찰 고유의 비열한 수법이었다.
드디어 10시 40분경, 아피서 올라가던 경찰이 소총으로 공포 2발을 쏘았다. 날카로운 총소리가 얼음장같던 긴장을 깨뜨렸다. 그리고 뒤어 3발의 최루탄이 총성을 울리며 노동자들에게로 날아왔다. 노동자들은 총까지 쏘아대는 경찰에 일시 당황했으나 곧 총알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반격을 시작했다. 수천 개의 짱돌이 탄가루 날리는 하늘에 가득 떠올랐다.
주먹만한 돌덩어리들이 총든 경찰관들을 무자비하게 박살내기 시작했다. 부녀자들은 부지런히 치마폭에 돌멩이들을 나르고 통나무가 굴러 내려가고, 커다란 바위들이 굴리어졌다. 300여 명의 경찰의 대열은 순식간에 파괴되었다. 경찰은 10분도 안 되어 십여 명의 부상자를 남긴 채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도경국장도 정신없이 도망쳤다. 10분전까지의 그 도도하고 거만했던 말투와 비열한 진압작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노동자들은 손에 손에 망치와 각목을 들고 도망치는 경찰을 잡기 위해 구름처럼 밀고 내려갔다.
경찰은 후퇴 지휘도 없이 사방 민가와 점폴 뛰어들어 도망쳤고, 노동자들은 그 뒤를 따라가 닥치는 대로 붙잡아 두들겨 팼다. 은하이발관 앞, 단골상회 앞, 보건원 주변 등에서 낙오된 경찰관들은 노동자들에게 짓밟히고 각목으로 맞아 쓰러졌다. 11시경에는 사북지서가 다시 노동자들에 의해 점거되어, 그 속에 있던 50여 명의 경찰관들은 무수히 얻어터지며 담을 뛰어넘어 도주, 산을 타고 도망쳐 버렸다.
역앞에 대기 중이던 40여 명도 노동자의 습격을 받고 달아났는데 45도나 되는 가파른 언덕이라 여럿이 한꺼번에 넘어졌음에도 이를 일으켜 주기는커녕 자기 발로 자기 동료를 마구 짓밟고 달아나 경찰 자신에 의 여러명이 다쳤다. 어떤 경찰은 도망칠 겨를이 없자 죽은 체하고 엎어져 있다가 들통났는데, 격분해 있던 한 노동자가 큰 돌을 들어 찍으려 하자 동료 노동자들이 마려 살려 보내기도 했다. 민가로 숨어들어간 40여 명은 주로 고위공무원이나 부유한 사장집등에 숨어들어가 추리닝 등 허름한 노동자 옷으로 바꿔입고 사북읍을 빠져 나갔다. 어떤 집은 경찰을 숨겨준 것이 들통나 노동자들에 의해 유리창이 박살났다.
경찰 색출은 3시간이나 계속되었다. 그동안 경찰들은 산을 넘거나 민간복으로 갈아입고 뿔뿔이 도망쳐 버렸는데, 이 때 고위관료 등 50여 가구도 함께 도망쳤다. 노동자 6천가구의 분노를 피해 50여 가구가 도주한 것이다.
오후 2시경 경찰은 사북읍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300명 중 순경 이덕수가 사망하고 20여 명이 1개월 이상의 심한 부상을 입었으며 50여명이 중상을 입었다.
(3) 노동자의 사북
노동자들은 경찰이 철수한 사북을 즉각 노동자만의 도시로 만들었다. 사북역은 물론, 사북에서 외부로 통하는 유일한 국도인 고한과 증산으로 통하는 두 곳을 완전히 봉쇄하였다. 각 백여명의 노동자들이 각목 등을 들고 서서 출입자를 엄격하게 심사하였다. 노동자가 아닌 어느 누구도 사북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였는데 그 중에는 신문기자도 포함되었다.
분명히 전날 취재를 해갔음에도 불구하고 신문에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고 있는데 대한 보복이었다. 계엄사령부는 사북파업이 다른 노동자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일체의 보도를 금지시켰던 것이다.
한편 경찰도 실탄을 장전한 소총으로 완전무장한 채 사북으로 들어가는 도로를 차단했다. 이들은 어제든지 사격명령이 내릴 때 만을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었다. 또한 계엄 사령부가 노동자들을 효과적으로 진압하기 위해, 공중에서 총을 쏘아댈 수 있는 공수부대를 긴급 출동시켜 영월에 배치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러한 유혈 학살의 위협 속에서 노동자와 부녀자들은 과연 어떻게 지냈는가?
노동자들에 의해 점령된 사북은 외견상으로는 전쟁 직후처럼 황량하였다. 사무실은 초토화되어 폐허 같았고, 10여 채의 노조 간부집도 폐가처럼 박살났다. 동원타니좌 소속 버스 7대는 창과 껍데기가 폐차처럼 부숴져 버려졌고, 4대의 지프와 10대의 특럭도 본네트까지 박살나고 바퀴도 모두 터진 채 버려졌다. 읍내에서도 관용차의 상징인 검은색을 칠한 차는 지프건 자가용이건 모조리 박살이 나 버렸다.
도로는 짱돌과 동발로 걷기조차 어렵게 어지러워졌고, 사원사택 마당에는 전날 밤 꺼내어 부숴진 가구나 불태워진 이불, 옷 등의 검은 재가 널려져 있었다. 가장 싸움이 격렬했던 안경다리는 井자로 우뚝선 바리케이트 밑으로 머리통만 한 바위돌과 갱목이 수북히 쌓여 걸어다닐 수도 없었다. 읍내에 있는 경찰관 집과 과장급 이상 회사 간부들의 집, 이재기, 홍금웅의 집은 유리창과 장농, 전축 등의 파편으로 어지러웠다. 읍내 3개 국민학교와 중.고등학교는 오전 수업만 햇다.
낮 12시경 국민학생들은 열을 지어 교사의 인솔 아래 사택으로 돌아갔다. 상점들은 대부분 문을 닫았다. 그러나 반찬가게는 평상시 같이 열어 놓았고, 쌀, 연탄가게 등은 쪽문만을 열아 놓고 장사를 계속했다. 노동자들은 곳곳에서 술을 마시며 정부와 회사를 성토했는데, 가게의 술들이 떨어지자 주류도매상 창고로 몰려가 일부는 지불하고 일부는 돈은 내지 않은 채 가져다 마시기도 했다.
22일 오후 3시, 부녀자 200여 명이 가두시위를 했다. 이들은 탁자 크기의 베니어판에 “광업소 계장은 사퇴하라!”,“임금과 상여금을 인상하라!”,“이번 사태는 없던 것으로 하라!”등을 써서 들고 구호를 외치며 고한 쪽 바리케이트가 있는 곳까지 행진했다. 부녀자들의 맨앞에는 김순이와 그동안 경찰에 정보를 제공해 주던 공화당 사북읍 관리장 최홍헌이 강제로 피켓을 든 채 앞장서 걸었다. 부녀자들은 시가지를 다시 한번 행진하고 광업소에 돌아가 김순이를 다시 가두어 놓았다.
노동자들의 폭력은 사북읍내와 사택의 거의 모든 가옥에는 전혀 피해를 주지 안았다. 사북읍민 거의 모든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가옥이 바로 자신들의 것이요, 읍민 거의 모두가 바로 시위자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외견상으로는 사북읍 전체가 혼란의 와중인듯이 보였지만 실제로는 극소수 착취자들만이 응징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노동자들은 스스로 자치방범대를 만들어 노동자 사이의 폭력이나 폭약 유출을 막았다. 사북읍내는 이후 3일간, 경찰이 치안을 담당할 때보다 훨씬 질서정연했다. 그 흔한 폭력사건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어용신문과 경찰은 이를 전적으로 왜곡시켜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었다. “폭력 휩쓴 무법천지”,“공포의 탄광촌”,“곡괭이와 도끼로 무장, 파괴와 방화”,“부녀자들도 흉기 들고 가세”,“사십대 남녀, 피흘리며 질질 끌려가다”,“술취한 광부들 몰려다녀”,“기자들에게도 폭행”,“지서습격, 경찰관 1명 사망”,“길목마다 고괭이 들고 난동”. 이것이 당시 신문 제목들이었다. 곡괭이와 도끼로 무장하고 파괴와 방화를 한 것은 사실이다. 여러 사람이 폭행을 당하고 40대 남녀가 질질 끌려갔었던 것도 사실이고, 기자들이 폭행당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매는 맞을 사람이 맞았고, 그 숫자는 전 사북읍민의 티끌만큼도 안 되는 극소수였다. 파괴와 방화도 대상은 그들 극소수 지배자에 대한 것이었다. 계엄사령부와 기업주 편인 일간신문들의 미친듯한 성토와 다리, 사북읍은 너무도 조용하고 깨긋했을 뿐이었다.
공격의 대상은 명확했다. 악덕 기업주와 그에 기생하여 노동자를 착취해 오던 과장급 이상 관리자들, 노동조합을 장악하여 노동자를 기만해 온 어용노조 간부들, 독재정권의 하수인으로서 기업주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를 탄압해 오던 경찰들, 독재정권의 시녀노릇을 하던 당시 집권당 공화당의 고위 간부들, 그밖에 이들을 도와주던 부유한 몇 사람의 상인이나 행정관리들이었다.
어용언론도 공격대상이기는 했지만 실재로 노동자들은 그래도 신문기자들만은 믿고 출입은 많이 허용해 주었다. 이렇게 공격당해 사북으로부터 도망쳐 나간 이들의 숫자는 사만여 사북읍민 중 불과 백여 명에 불과했다. 이들의 도주를 놓고 사북전체가 유혈과 혼란에 빠졌다고 말한다면, 그야말로 가진 자들의 새빨간 거짓말일 뿐이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이들이 도망치고 나자, 질서 있고 활기찬 가운데 노동자 자치는 4월 24일 오전까지 만 3일 동안 계속되었다.
4) 기만적인 협상과 해산
노동자와 부녀자들이 사북읍을 점거하자, 다급해진 정부는 강원도지사 김성배를 위원장으로 하고, 기업주측 고위간부와 경찰로 구성된 대책위원회를 만들었다. 노동자측에서는 이원갑, 신경 등 20여 명이 대표로 나섰다.
4월 22일 오후 5시, 1차 협상이 시작되엇다.
정부측은 처음에는 무조건 해산만을 요구하다가 서울로 도망친 이재기가 사표를 제출하는 것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하였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이재기의 어용행각이 문제가 되기는 했으나 근복적으로는 기업주 측의 악랄한 착취로 인해 파업이 일어났음을 밝히고, ①임 30% 인상, 1월부터 소금 지급, ②연 400%보너스 지급, ③민간인 피해를 회사에서 책임질것, ④1979년도 암행독찰대에 의해 징계 감봉되었던 임금을 전액 반환할 것, ⑤이재기 사퇴할 것, ⑥이재기는 이 사태의 책임자로서 각성할 것, ⑨사장은 이번 사태의 책임을 질 것 등 9개항을 요구했다. 정부측은 이재기 부인의 석방과 질서 유지를 전제조건으로 계속 협상할 것을 합의하였다.
4월 23일 오후 이원갑 등 70여명의 광부들이 대표로 나선 2차 협상이 읍사무소에서 열렸다. 협상은 노동자들의 요구를 축소시키려는 정부측의 줄다리기로 12시간 이상 철야로 계속되었다.
마침내 24일 오전에 11개항의 합의문서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 내용은 가장 중요한 임금인상 부분이 관철되지 않았고 나머지 조항도 사실상 파업과정의 피해복구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 합의 문서으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이재기와 노조 집행부 사퇴.
② 부상자 치료 및 보상금 회사 부담.
③ 피해주택 복구 회사 부담.
④ 하청업체 노임과 상여금 상향조정 건의(* 건의에 불과함).
⑤ 신용협동조합 미지급금 회사 부담.
⑥ 79년도 징계자 상여금 삭제금 지급
⑦ 파업 4일간의 휴업수당 지급
⑧ 1,2월 임금인상 소급분 20%를 5월에 지급하고 탄가인상 때 재조정
(* 임금 인상은 사실상 안 된 것임).
⑨ 여금 250%를 400%로 인상.
⑩ 경찰 실력행사 절대 삼가.
⑪ 회사와 당국, 사태 해결에 절대 노력.
엄청난 힘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이 얻어낸 성과는 고작 상여금 150%인상과 이재기를 쫒아낸 것에 불과했다. 파업과정 중에 피해를 본 관리자 집이나 부상자를 회사에서 복구, 치료해 준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그나마 경찰이 주동자를 처벌하지 않겠다는 약속은 그 후에 전혀 지켜지지 앟았다. 노조집행부도 물론 물러나지 않았다.
이토록 어이없이 파업을 종료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우선, 협상에 나선 이원갑 등 노동자 대표들은 주로 노조 대의원들로 일반 노동자들의 열화 같은 힘을 스스로 두려워 한 것이 사실이었다. 이원갑 등은 충분한 사회의식이나 투쟁성을 갖지 못한 채 의식적으로는 어용노조 집행부와 다를 바가 없었던, 단지 좀도 양심적인 세력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들은 파업의 열기를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집중하기보다는 파업 자체를 없던 것으로 해서 후환을 막는 데만 급급했을 뿐이었다.
결국 노동자들의 숙원이던 노조 직선제, 임금 40% 인상등은 해결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긴 파업기간 동안 진정으로 노동자에 의한 노동자 조직을 건설하는데에도 실패했다. 스스로 그러한 전망을 가지지도 못했을뿐더러 4천여 노동자와 부녀자들을 지도할 역량도 부족했던 것이다. 조직화만 되엇더라도 미해결된 문제를 계속 추진해 나가고 이후에 가해지는 탄압을 막아 노동운동의 새로운 길을 열었을 것이다. 르렇지 못한 것이 지도부의 한계이자 바로 자연 발생적인 파업의 한계였다. 또한 기만적인 협상은 일반 노동자의 의식의 한계이기도 했다.
노동자들은 4월 24일 오전, 협상의 결과가 발표되자 농성을 해산하고 바리케이트를 철거했으며 거리청소를 시작했다. 돌무더기와 갱목이 치워지고 차량이 다시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점포들은 다시 문을 열기 시적했다. 김순이도 풀려나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아직가지 정부의 발표를 신뢰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불안스러운 가운데 군데군데 운집하여 있었다.
4월 25일, 정선경찰서에서 새로 발령받은 신임 지서장과 형사 2명이 겁에 질린 얼굴로 사북에 들어왔다. 이들이 지서에 들어가려 할 때는 소식을 듣고 몰려온 노동자 100여 명이 지서 앞에 모여 있었다.
“인사도 안하냐!”,“똑바로 해!”
노동자들이 슬그머니 집무에 들어가려는 경찰을 향해 야유를 퍼부었다. 지서장은 얼굴이 하얗게 변하여 사람들 앞에서 허리를 직각으로 구부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경찰이나 노동자들이나 서로 불안한 긴장이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지서장의 태도에서 보여진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은 일단 승리를 거두었다 정부와 경찰, 기업주와 어용노조는 노동자의 거대한 힘앞에 물리력으로조차도 패배했던 것이다. 그러나 등대도 나침반도 없는 밤바다에서의 향해처럼 사북 노동자들이 탄 배 앞에는 조만간 닥쳐올 난파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바로 조직화의 실패로 인하여...
5) 악랄한 탄압, 협상의 위반
사북파업은 해산되었다. 그러나 사북 노동자 봉기의 소식은 전국으로 알려졌고 매스컴의 온갖 비방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노동자들에게 희망을 안겨 주었다. 소식을 접한 노동자들이 전국적으로 파업을 일으키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선은 25일, 동원탄좌 하청업체 3군데 노동자 1천여 명이 직영과 하청의 동등한 대우를 요구하며 파업을 시적했다. 같은 날, 서울에서는 일신제강 노동자 600여명이 사무실과 사장차를 파괴하며 격렬한 시위농성에 돌입했고, 인천제철 300여명의 노동자도 사장차를 불태우고 출동한 경찰을 박살내 버렸다.
구로공단의 대한광학 노동자 500여명, 충북 중원의 일신산업 노동자 550여명, 국제실업 150여명, 삼중화학 공업의 남성노동자가 중심이 된 격렬한 파업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져서, 부산 동국제강 노동자 2,000여명이 경찰과 맞서 치열한 투석전과 육박전으로 경찰차량까지 불태웠고 부산파이프, 원진레이온, 금강제화, 신일인쇄 등에도 들불처럼 파업이 번져갔다. 이들 파업들은 하나같이 사북파업의 영향으로 단순파업을 넘어서 경찰과의 치옇한 투석전, 육박전을 전개했다. 가히 노동운동의 봄이 돌아온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군사독재정권은 노동자들의 치열한 생존권 요구를 무자비하게 짓밟으려고 하였다. 여러 파업 주동자들이 연행되었다. 사북에도 검거바람이 불어 70여 명의 노동자, 부녀자들이 경찰과 군대에 의해 끌려갔다. 그리고 5월 17일, 사북파업이 종료된지 3주일만에 계엄령은 전국으로 확대되고 모든 수사권과 재판권, 민간치안이 군대의 손으로 넘어갔다. 전국에서 9천여명의 민주인사, 학생, 종교인들이 연행되어 처참한 고문을 당하기 시작했다.
사북에서 연행된 부녀자, 노동자들도 이루 말로 못할 치욕적인 욕설과 고문을 당해야 했다. 노동자가 달결했을 때 그토록 비굴하던 경찰들은 군부 쿠테타가 성공하자마자 기고만장한 야수로 돌변하였고, 배운 것이라고는 자본가들을 위한 봉사밖에 없는 무식한 군보안대는 노동자들을 개처럼 두들겨 패고 고문을 가했다. 노동자들은 아무리 미웠던 자들이라도 매질을 하고 곧 풀어 주었지만, 군부독재의 하수인들은 이들을 고문하고 전원 구속시켜 버렸다. 40여 명의 부녀자와 노동자들이 소요죄, 폭행죄로 구속당했다. 그 중 상당수는 2-3년의 감옥생활을 해야 했다.
그 상태 속에서 파업시 합의된 사항이 지켜질리가 없었다. 물론 연행하지 않겠다는 당초의 합의는 애초에 어겨졌고 노조집행부 사퇴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소위 사회정화란 명목 아래 군사독재는 자신들이야말로 정의 심판관인 양 파업의 원인자와 주동자를 모두 끌로 갔는데 기업주측에는 물론 손끈 하나 안대고 어용노조측에서는 이재기만이 구속되어 몇 달의 실형을 살았을 뿐이었다.
사회혼란을 일소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한다는 미명 아래 민주화세력과 노동운동을 씨까지 말리려는 것이었다. 기업주들의 이익을 위해 총검을 휘두르는 군사독재정권은 모든 것을 압살하고 말았다. 군사독재정권은 이원갑, 신경, 이재기 등을 모두 구속시킨 뒤, 간선제를 통하여 어용노조의 제 2인자였던 홍○○을 노조위원장(1980년 개정된 노동조합법에 의해 각 기업별 노조가 단위조합이 되어 조합장을 위원장으로 부르게 되었음)에 앉혔다. 홍○○은 노조 위원장이 되자마자 노조규약을 개정, 노동자에 관한 징계조항을 확대했는데, 유인물을 뿌리거나 서명운동을 하는 노동자는 해고시킨다는 내용을 삽입한 것이었다. 이후 홍○○은 기업주와 정부의 지지를 기반으로 6년간 계속 노조 위원장을 하다가 1987년 광산노련 위원장이 되었으니 기가 막힌 노릇이 아닐수 없다.
한편, 정부와 동원탄좌측은 아량이라도 베풀듯이 노동자 복지시설을 확대하겠다고 선전하여 2억여원을 들여 복지회관을 건립하고 구판장과 유아원 등을 만들었는데 실제로 거의 사용되지 않고 노조 사무실만이 들어서서 매일 경찰, 관용차들이 드나드는 실정이다. 또 동원탄좌측은 당시 1,200평짜리 대형목욕탕을 만든다고 신문에까지 요란하게 선전했는데, 이 건물은 오늘날 목욕탕이 아니라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다. 기업주측은 목욕탕으로 내주기가 아까웠는지 다 짓고 나서야 물줄기를 찾지 못해 쓸수 없다는 거짓핑계로 용도를 바꾼 것이다. 그 거대한 목욕탕을 짓는데 물줄기도 조사하지 않았다는 말도 안되며, 실재로 가까운 곳에 대형 수도관이 있어 얼마든지 물을 끌어 쓸 수 있다는 것은 세 살 짜리 어린이도 다 알고 있는데도 터무니없는 기만만 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1984년 동원탄좌의 선전용 팜플렛에는 이 목욕탕이 304평방미터의 넓이에 368개의 샤워기를 설치, 일시에 1,200명을 수용한다고 자랑하고 있으니 기가 막힌 노릇이다. 얼굴만 바뀐 어용노조의 비리도 여전히 개선된 것이 없다. 간선제에 의해 자기들 뜻대로 자리에 앉아 노동자들이 낸 엄청난 조합비를 별 명목도 없이 사용하면서, 파업은 커녕 일상적인 투쟁조차 외면하고 있다.
사북 총파업의 교훈은 노동자의 힘이 얼마나 거대한가를 가르쳐 주었으나 또한 그 거대한 힘도 조직화도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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