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섬은 태조 때부터 임금의 사냥터 였던 곳으로 임금의 행차시에는 그것을 알리는 대장군의 기인 '독기'를 세워 그것을 알렸다. 중랑천과 한강이 합류되는 지점으로 지형의 형태가 주변으로 강이 흘러 마치 섬모양 같다고 하여 독기를 세운섬 '뚝섬'이라 부르게 되었다. 1908년 대한민국 최초 정수장이 세워졌으며 1940년 뚝섬유원지, 1954년 서울경마장, 1986년 체육공원으로 변천해 왔다.
2003년 1월 10일 서울숲 조성방침이 수립되었고, 주민설명회를 거쳐, 12월 18일에 조성 공사 착공을 했고, 2005년 6월 18일 서울숲으로 개장했다
뚝섬
뚝섬(纛島)은 성동구 성수동 일대로 한강에 홍수가 날 때마다 지대가 낮아 물길이 생겨 일시적인 섬이었다. 1980년대 초 한강종합개발사업에 의해 한강을 직강화(直江化)하면서 남쪽의 많은 부분이 잘려 나갔다. 지하철 2호선 성수역과 뚝섬역, 7호선 뚝섬유원지역이 자리잡고 있다.
ㅇ 뚝섬의 유래를 알려면 원래 뚝섬을 한자로는 '독도(纛島)'로 '살곶이벌'로도 불렸다. 뚝섬은 태조 때부터 임금의 사냥터여서 임금이 나오면 그 상징인 독기(纛旗)를 꽂았으므로 이곳을 ‘독도(纛島)’라고 불렀다. 이것이 변해 ‘뚝섬’ 혹은 ‘뚝도’라 부르게 된 것이라 한다. 또한 이곳에서 군사들이 활솜씨를 겨루는 등의 무예를 연마하고 왕이 직접 사열하던 곳이므로 ‘살곶이벌’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처럼 모두 독기(纛旗)와 화살에 얽혀 있는 얘기들이어서 화살과 관련이 많은 곳이다.
ㅇ 살곶이벌의 유래는 태종 이방원이 왕위에 등극한지 2년후 무학대사의 간청으로 1402년 함흥에 가 있던 태조 이성계가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 (위화도 회군 당시 이성계와 생사고락을 함께 하였고 오랫동안 친구이자 군신의 관계를 가진 상장군 박순이 어미소를 끌고 함흥에 가서 태조의 마음을 돌려 서울에 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부왕을 맞을 준비를 하던 태종은 이곳에다 큰 차일을 치면서 굵고 높은 기둥을 세우는데 멀리 도착한 태조가 갑자기 활을 쏘자 급히 기둥을 안고 피하였고 화살은 기둥에 꽂혔다. 이후 화살이 날아와 꽂혔다는 의미로 ‘살꽂이벌’,‘살곶이벌’로 불렸다는 것이다. 한양대 옆의 '전곶교(箭串橋)'라 불리는 '살곶이다리'와도 연관이 있다. 살곶이다리는 1967년 12월 15일 사적 제160호로 지정되었다.
***경마장이야기***
뚝섬이 위치한 성수동은 대한제국이 1906년 8월초에 공사에 착수해 1908년 준공한 뚝도수원지 제1 정수장이 있던 곳이다. 1922년에 조선경마구락부가 발족됐고 1945년 광복과 더불어 한국마사회로 이름을 바꿨다. 한국마사회에서는 1930년대 조선경마구락부가 경마장 이전 목적으로 매입했던 뚝섬에 경마장 공사를 시작했다. 그 날이 바로 휴전협정이 맺어진 다음날인 1953년 7월 28일이다. 뚝섬은 옛날부터 말과 인연이 깊었다. 조선시대 초부터 말을 먹이는 목장이 있었고 임금이 직접 사냥을 했던 곳이며[3] 군사들의 무예훈련을 사열하던 성덕정(聖德亭)이란 정자도 있었다. 한국마사회는 보유한 모든 자산을 팔아, 천신만고 끝에 이듬해인 1954년 5월 8일 뚝섬경마장의 문을 열었다. 비록 채소밭 속의 보잘것 없는 경마장이었지만 전쟁으로 중단된 경마가 3년 11개월만에 명맥을 잇게 된 것이다. 하지만 어렵게 시작한 경마는 그야말로 초보 수준. 말(馬)도 지금처럼 미끈하게 생긴 경주마가 아니고 조랑말이었다. 충분한 마필 자원을 확보하지 못했던 마사회는 광주, 목포 등에서 몽골계 재래종마를 겨우 모아 명맥을 이었다. 경주로는 모래와 초지가 섞였고 경주로 가운데 채소밭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터지는 풍경이다. 또 관람대는 미제 맥주깡통을 이어 붙인 허름한 모습이었다. 토털리제이터(배당률 계산기)가 없어 경주 20분전에 베팅을 마감하고 수십명의 직원들이 주판으로 배당률을 산출하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1968년에는 경마장 가운데 골프장이 들어선다. 고 박정희 대통령이 채소밭으로 쓰이던 경주로 가운데를 골프장으로 개발하라고 한마디하자 전혀 연관이 없는 골프와 경마가 함께 있게 된 것이었다. 35년 간 서울시민의 애환을 간직하던 뚝섬경마장은 1989년 과천경마장 개장과 더불어 막을 내린다. 골프장도 1994년 문을 닫고 2005년에 서울시가 대규모 생태공원인 서울숲으로 조성했다. 과거 뚝섬은 주위 풍경이 아름답고 강물이 잔잔해 유원지로 좋은 조건을 갖춰 조선시대 도성민들만이 아니라 근래까지도 술ㆍ노래ㆍ춤을 즐기던 행락 장소로 애용됐다는 것에 뚝섬의 가치를 느낄 수 있다.
수도 박물관
서울시 수도박물관은 1908년 완공된 뚝도수원지 제1정수장으로 1989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72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으며 2008년 수도박물관으로 재탄생되어 2008년 개관 이후 많은 시민이 다녀가는 등 체험학습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서울시는 성동구 성수동에 위치한 수도박물관에서 2008년에는 '우리나라 상수도 100년 역사의 출발지, 뚝섬의 기억을 거닐다 기획전'을 개최하였다. 뚝섬 지역의 역사와 문화, 지명의 유래, 변천과정 등을 담은 전시회로 '▲뚝섬은 섬인가요?, ▲한강 그리고 뚝섬의 기억, ▲뚝섬 일대의 문화유적과 출토유물, ▲뚝섬, 근대 상수도 역사의 서막을 열다, ▲나의 살던 고향 뚝섬' 등을 기획한바 있다.
응봉산-서울 야경 찍기 좋은 곳
응봉산은 성동구 금호동・응봉동과 용산구 한남동에 걸쳐 있는 산으로서, 매봉・응봉・응봉산・매봉산
이라고도 한다. 한강 가에 솟아 있는 봉우리인데, 조선 초 임금이 이곳에서 매를 놓아 사냥을 하였다고
전하는 데서 매봉, 또는 한자명으로 응봉이라고 하였다.
이곳에 두 개의 매봉이 있는데, 이 산이 작으므로 작은 매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 봉우리 밑에
있는 바위가 한강을 향하여 깎아지른 듯하여 천연적으로 낚시터가 되어 있으므로 ‘입석조어(立石釣魚)’라
해서 경도십영의 하나로 유명하였다.
지금은 전철, 성수대교, 강변북로. 동부간선도로가 만나는 교통의 요지이고 서울숲과 한강건너 강남이
잘보이는 곳이어서 야경 촬영지로 이름이 높다.
살곶이다리
살곶이다리는 조선의 수도인 한성부와 한반도 남동부를 잇는 주요 교통로에 세워진 다리로 강릉·충주 지방을 연결하는 주요 통로였다. 전곶교(箭串橋)라고도 한다. 현존하는 조선 시대 돌다리 중 가장 길다. 살곶이다리는 1420년(세종 2년)에 다리를 짓기 시작해 1483년(성종 14년)에 완공했다. 명칭에 대해서는 '제반교(濟磐橋)', '전곶교', '전관교(箭串橋)' 등 다양한 이름이 있지만 '살곶이다리'나 '전곶교'가 맞고 한자 이름 ‘箭串橋’는 ‘전관교’가 아니라 ‘전곶교’로 읽는 게 옳다고 한다. 1967년 12월호로 지정되었다. 살곶이는 청계천이 중랑천과 만나 한강으로 흘러드는 지역으로,
한양대학교에서 내려다보이는 개울 부근이다. 이곳은 넓고 풀과 버들이 무성하여 조선 초부터 국가의 말을 먹이는 마장(馬場) 또는 군대의 열무장(閱武場)으로 사용되었던 곳이기도 하였다. 이곳에 다리를 만든 것은 정종과 태종의 잦은 행차 때문이었다. 세종 즉위 후 태종은 광나루에서 매사냥을 즐기고, 살곶이에 있는 낙천정(樂天亭)과 풍양이궁(豊壤離宮)에 수시로 행차하였다. 따라서 이곳의 하천을 안전하게 건너기 위하여 다리를 놓게 되었다고 한다. 세종 2년(1420) 5월 태종은 영의정 유정현(柳廷顯) · 박자청(朴子靑)으로 하여금 비로소 돌다리 세우는 공사를 담당하게 하였으나, 완공을 보지 못하였다. 세종 4년(1422)에 태종이 죽자 이곳을 통한 행차가 거의 없어지고, 또한 세종 3년부터 시작된 도성 안 개천(開川) · 제방축조공사로 인해 도성 밖 이곳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길을 이용하는 백성들로 인하여 살곶이다리를 만들 필요성이 다시 제기되어, 성종 6년(1475) 9월 살곶이다리를 완성시킬 것을 양주목(楊州牧)에 명령하였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考)》에 따르면 성종 13년(1482) 한 승려가 방법을 고안하여 다리를 완공하자, 왕이 이를 치하하고 다리가 집과 같이 평평하여 마치 평지를 걷는 것과 같다 하여 ‘제반교(濟盤橋)’ 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렇게 완성된 살곶이다리는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장석판교(長石板橋) 중 가장 큰 규모의 다리로서, 가로로 놓인 기둥이 4열, 세로로 16열에 모두 64개의 돌기둥으로 만들어졌다. 다리 높이는 하상(河上)으로부터 10척 내외이며 기둥의 높이는 4척 가량이다. 좌우의 교안(橋岸)을 장대석(長臺石)으로 쌓고 네모난 돌기둥 교각 16개소를 세웠다. 교각의 간격은 대략 11~13척 정도이며, 돌기둥 위를 3장의 장대석을 건너지른 다음 그 위에 다시 귀틀돌을 놓아 청판돌을 받게 한 구조이다. 기둥돌 아래에는 물밑의 받침돌이 네모난 주춧돌을 지탱하고 있으며, 주춧돌 사이에는 포석을 깔아 기초를 단단히 하였다. 따라서 물이 줄 때는 이 포석 면이 드러나 마치 지금의 잠수교와 같아 ‘이층다리’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돌기둥은 흐르는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마름모형으로 만들어져 있다. 큰 혹띠기로 표면을 가공하였고 조립할 때 잔돌을 많이 사용하여 뜬 곳을 메꾸었으며 돌난간은 없다
고종 때 경복궁(景福宮)을 중건하면서 살곶이다리의 일부를 가져다가 석재로 썼다고 하지만 확인할 수 없다. 1913년에 다리 윗면을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보수하였으며, 1925년에 서울 지방의 을축년 대홍수로 다리 일부가 물에 떠내려간 채 방치되었다. 그 후 1938년 5월에 이 다리 옆에 성동교가 가설되자 이 다리는 방치된 채 최근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1972년에 서울시가 무너진 다리를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하는 과정에서 하천의 폭이 원래보다 넓어져 있었기 때문에, 다리 동쪽에 27m 정도의 콘크리트 교량을 잇대어 증설함으로써 원래의 모양과는 다소 차이가 난다. 2009년 12월 서울시 성동구가 발굴조사를 거쳐 살곶이다리 복원에 나선다고 밝혔다.
중랑천
중랑천(中浪川)은 한강의 여러 지류중 하나로, 경기도 양주시에서 발원해 의정부시를 거쳐 서울특별시 성동구 금호동과 성수동 1가의 강변북로 다리에서 한강과 합류하는 하천이다. 경기도부분의 중랑천은 지방하천으로 분류되며 서울특별시에 접어들면 국가하천으로 등급이 바뀐다. 또, 동부간선도로 강북 구간이 서울특별시 구간부터 중랑천과 나란히 뻗어있다.
** 범람 사고**
1998년 5월 2일 집중호우로 인해 중랑천이 범람하여 태릉입구역으로 하천수가 다량 유입되어 침수되었고, 9일간 서울 지하철 7호선의 전구간 운행을 중단시키거나 서울 지하철 6호선 개통이 늦어지게한 사고있었다.
중랑천은 길이 20km. 최대너비 150m. 유역면적 288㎢. 경기와 서울의 경계 부분은 서원천(書院川)이라 하고 도봉구 창동(倉洞) 부근에서는 한내[漢川]라고 한다. 서울의 시계 밖을 흐르는 부분 700m를 제외하고 서울의 직할하천으로서는 19.3km이다. 동대문구 이문동(里門洞) 부근에서는 중랑천 혹은 중랑개[中浪浦]가 되어 계속 남류하다가 장안교(長安橋)·군자교(君子橋)를 지나서 청계천(淸溪川)과 만나 서쪽으로 꺾여 한강으로 들어간다. 청계천외에 도봉천(道峰川)·우이천(牛耳川) 등의 지류가 있다. 옛날에도 청계천과 중랑천의 하천오염은 심했던 모양으로 서빙고(西氷庫)에서 하던 채빙(採氷)을 두모포(豆毛浦:현재 玉水洞) 쪽으로 장소를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1979년에 중랑천 하수처리장이 건설되었다.
청계천 [淸溪川]
서울특별시 종로구와 중구의 경계를 따라 흐르는 하천.
'개천(開川)'이라고도 함. 총길이 5.84km, 산책로 12.04km, 하루 물 소비량 120,000톤. 청계천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상대적으로 지대가 낮은 서울 도심으로 모인 물길이 동쪽으로 흐르다가 살곶이다리 근처에서 중랑천과 합류하여 한강으로 빠져나간다. 자연상태의 하천이었던 청계천은 비가 많이 와서 물이 넘치면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서울을 도읍으로 정한 조선시대부터 정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태종은 즉위 초인 1406~07년 청계천의 바닥을 넓히고 둑을 쌓는 등 처음으로 청계천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1411년(태종11) 12월 하천을 정비하기 위한 임시기구로 개거도감(開渠都監, 이듬해 개천도감으로 명칭 변경)을 설치하고, 다음 해부터 대대적으로 정비를 했으며 광통교·혜정교 등 돌다리를 만들었다. '개천(開川)은 '내를 파낸다'는 뜻으로 하천을 정비하는 토목공사의 이름이었는데 이를 계기로 청계천을 '개천'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1441년(세종 23)에는 홍수를 예방하기 위해 마전교(馬前橋) 서쪽 수중(水中)에 눈금을 새긴 수표(水標)를 세워 개천의 수위를 측정할 수 있도록 했다. 1759년에는 영조가 준천을 관리하기 위해 준천사(濬川司)를 설치하고 이듬해부터 본격적으로 정비를 했다.
'개천'이라는 이름이 '청계천'이라고 불리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 때였다. 이 시기에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고 방치된 청계천은 1925년부터 '정비'라는 명목으로 지금의 종로구 신교동에서 도렴동까지, 즉 백운동천·옥류동천·사직동천 등이 복개(覆蓋)되었고 1937년에는 태평로에서 무교동 구간이 복개되었다. 1950년대 중반 전쟁이 끝난 후 청계천은 여전히 대표적인 낙후지역이었기 때문에 또다시 복개되기 시작했다. 1955년 광통교 상류 약 136m, 1958년 5월∼1961년 12월 광교에서 청계6가 동대문운동장까지, 1965년∼1967년 청계 6가에서부터 청계8가 신설동까지, 1970년∼1977년 청계 8가에서부터 신답철교까지 복개되었다. 또한 광교부터 마장동까지 총길이 5,6km, 폭 16m의 청계고가도로가 1967년 8월 15일 착공되어 1971년 8월 15일 완공되었다.
복개되어 정비된 청계천은 1960~70년대에는 근대화의 상징이 되기도 했으나 공구·의류 등 여러 가지 산업이 집중되면서 시설낙후, 공해 등 여러 가지 문제점이 나타나 도시발전의 걸림돌이 되었다. 이에 자연환경을 복원시키고 삶의 질을 높이며, 역사문화를 복원한다는 취지로 청계천 복원사업이 시작되었다. 청계천 복원 구간은 태평로 시점에서 신답철교까지이며, 공사는 2003년 7월부터 2005년 9월까지 2년 3개월에 걸쳐 약 3,900억원을 투입하여 진행되었다. 복원된 청계천은 과거와 달리 물이 부족하기 때문에 한강변 자양취수장에서 물을 퍼올려 뚝도 청정지에서 여과시키고 청계천 아래에 묻힌 관로를 통해 올라오게 한 것이다. 청계천 복원과 함께 2004년 4월 개천의 양쪽에 2차로의 양안도로가 건설되었고, 청계천을 가로지르는 22개의 다리가 건설되는 등 청계천 주변은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성수대교 聖水大橋 - 서울특별시 성동구 성수동1가에서 강남구 압구정동을 잇는 다리.
길이 1,160.8m, 도로폭 35m인 8차선 도로교량이다. 1979년 10월에 한강 다리로는 11번째로 준공된 다리이다. 거버 트러스(Gerber truss) 교량으로 한강 다리 중 최초로 경간거리 120m의 장경간(長經間)으로 건설되었다. 상부구조는 강재, 하부구조는 콘크리트로 되어 있다. 교각은 TL형과 T형으로, 기초는 원통형 우물통기초 2기 및 말뚝기초를 사용했다. 시공 방법이 쉽고 공사비가 저렴했을 뿐만 아니라, 종전에 지어진 다리와는 달리 구조물과 주변경관을 고려하여, 한강수면과 어울리는 경관을 이루고 있다. 교량 양쪽에 입체교차시설을 완비했다. 성수대교는 영동지역의 도시개발로 발생한 막대한 교통량을 잠실대교·영동대교·한남대교·반포대교 등과 함께 분산 처리하여 도심 진입을 원활하게 하고 영동의 부도심 기능을 촉진하는 효과를 가져왔으나, 건설 당시의 부실시공으로 1994년 10월 21일 상판 48m가 붕괴되어 수십 명의 사상자(32명 사망, 17명 부상)를 낸 이후 전면 보수공사에 들어가 1997년 7월 3일에 재개통되었다. 복구된 성수대교는 통과하중이 1등급으로 향상되었고, 진도5의 강진에 견딜 수 있도록 내진설계가 되었다. 강남·강북의 올림픽대로, 강변북로와의 연결로가 단절되면서 성수대교 이용 차량의 불편이 가중되고, 진출입 차량이 영동대교로 집중되어 영동대교의 정체현상을 초래하면서 교량폭을 4차로(19.4m)에서 8차로(35m)로 확장하고 남.북단 I.C를 신설하는 공사를 1998년 12.31일 착공하여 2004년 9월 17일 완공하였다. 올림픽 대로와 언주로 방향 8개 램프, 강변북로와 동부간선도로 진입방향 5개 램프 등 13개 진출입 램프도 신설되었다. 확장된 성수대교는 트러스가 붕괴되어도 한강에 떨어지지 않도록 낙교방지턱이 설치되었다. 총 공사비는 1,300억 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