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방문화와 규방다례
규방다례(閨房茶禮)를 설명하기 전에 우선 규방다례의 단어 구성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규방(閨房)의 사전적 풀이는 부녀자가 거처하는 방이다. 그리고 다례(茶禮)는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전들에서는 차례(茶禮)와 같은 말이라며 명절이나 조상의 생일, 또는 음력으로 매달 초하루와 보름날 등의 낮에 간단하게 지내는 제사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다례는 차(茶) 다루는 법과 관계되는 제반 다사법(茶事法) 및 이에 수반되는 예의범절과 마음가짐까지를 포괄하는 말로 정의할 수 있다.
규방다례는 결국 위에서 설명한 단어의 의미와 같이, 부녀자들이 방에서 행하는 차를 다루는 법과 제반 다반사(茶飯事)를 의미한다.
규방문화(閨房文化)에 대한 논의는 조선시대에만 국한해 설명하기 쉬우나, 남자와 여자의 할 일이 엄격하게 나눠져 있던 삼국시대 이전까지 거슬러올라갈 수 있다.
집안살림을 도맡아 했던 아낙네들이 주로 바깥일을 하던 남편들을 내조하면서 집안의 경조사를 주관했는데, 아낙네들의 바깥 출입이 상대적으로 제한되었던 시기에 자연스럽게 생성되어 꽃피운 우리나라의 고유문화가 바로 규방문화인 것이다.
유교사상을 중시했던 조선의 경우 아내는 반드시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여필종부(女必從夫)와, 아내를 내쫓는 이유가 되는 일곱 가지 사항을 열거한 칠거지악(七去之惡) 등을 내세우며 여성들의 행동과 사상을 규제했는데, 규방다례의 발전은 당시 시대상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것을 뜻하는 가부장제(家父長制)를 바탕으로 한 사회문화 체계는 17-18세기의 조선시대에 두드러지게 된다. 이때는 임진왜란․병자호란 등 대외적으로도 힘들었고, 대내적으로도 봉건질서의 심각한 혼란을 안정시켜야 하는 어려운 시기였다. 그러므로 여성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불평등구조의 가부장제 질서를 통해서, 기존의 신분체계․정치․경제구조를 유지․강화시키고자 했다. 그리하여 그것은 가족주의로 미화되기도 하면서 보편적인 지배이데올로기로 뿌리 내리게 되었다.
조선조의 여성들은 공식적인 대표권이나 자격 면에서 철저히 배제된 채, 조선 후기로 갈수록 부계혈통이 절대화해 갔다. 이러한 부계혈통 체제의 경직화와 가문 중시의 현상에 따라 여성의 삶에 대한 통제가 심해졌다.
그 통제의 성격은 비인간적 수준이었다. 열녀관과 재가 금지 그리고 출가외인의 이데올로기가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여성은 남편을 위해 수절하고, 남편을 따라 죽는 것이 바람직한 것으로 장려되었다. 또한 친정으로부터는 출가외인으로 철저히 배제되었다. 결국 여성은 남편 가문의 혈통을 잇는 것을 지상의 과제로 삼고 시집에 충성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어떤 가능성도 없는 삶을 살게 된다.
유교적 가부장제의 핵심적 이데올로기는 여성에게는 세 가지 따라야 할 도리가 있으니 집에서는 아버지를 좇고, 시집가서는 남편을 좇고, 남편이 죽거든 아들을 좇아 잠깐도 감히 스스로 이룰 수 없다라고 하는 삼종지도(三從之道)이다. 여성이 남성과 관계를 맺지 못하면 사회적 존재가 될 수 없는 게 명백하다. 『내훈(內訓)』에서도 역시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의 도리를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길만이 여자의 도리로 제시되었다. 또한 자신의 모든 욕망을 억제하고 시집살이를 견디어 나갈 것에만 관심을 기울여야 했던 당시의 사회조건은, 칠거지악의 처벌조항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한편 조선조 사회가 도덕적 인간상을 표방한 만큼 여성은 열녀로서 사회적 인정을 받을 수 있었고, 죽어서는 남녀가 동등하게 조상으로서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또한 상류층의 경우, 혈통을 중시한 까닭에 어머니로서의 혈통 역시 여성의 지위를 받쳐 주는 주요 요건으로 작용했다.
이에 따라 경직된 가족생활 규범에서 제외된 여성의 삶, 예를 들면 아들을 못 낳은 여자, 남편을 잃은 여자, 그리고 이혼이 없는 세상에서 소박 맞은 여자들이 설 자리는 없었다.
태종 4년 6월에는 여자들이 외출시에 평교자(平轎子)가 아닌 지붕이 있는 옥교자(玉轎子)를 타도록 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 뚜껑이 없는 가마를 타게 되면, 가마꾼들과 옷깃이 닿고 어깨를 부딪치게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여자들이 출입시 얼굴을 가리고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피하게 하는 장치가 여기에서부터 비롯되기 시작하여 후대로 갈수록 강화된 것이다. 남자들이 남의 집에 손님으로 가서 이리 오너라 하는 것도 다 내외법이 강화된 결과인 셈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선비 가문의 부녀로서 산이나 물가에서 놀이나 잔치를 하거나 야제(野祭)나 산천 성황(城隍)의 사묘제(祠廟祭)를 직접 지낸 자에 대한 처벌 규정이 명시되어, 그 규제를 어긴 자에게는 곤장 일백 대의 형벌이 가해졌다.
전통적인 가옥구조가 안채와 사랑채로 나뉘어 있으며 서로 바라볼 수 없게 격리되어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남자는 밖에 거하고 안에 들어와 이야기하지 않아야 하며, 여자는 안에 거하고 밖에 나가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또 여자는 제 고장 장날을 몰라야 팔자가 좋다는 속담대로 안방에만 들어앉아 세상사와는 격리되는 것이 이상적인 여자인 줄 알고 있었다. 남편은 부인과 침실만을 같이하면서 식탁은 같이하지 않는다. 여자와 아이와 이야기하는 자체를 권위의 손상이라고 여길 정도였다. 그러므로 부인은 남편을 사랑양반또는 바깥주인이라고 호칭하고, 남편은 부인을 내자 또는 안사람 아낙네라고 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남녀의 격리된 생활을 내외한다고 칭한다. 얼마 전까지도 시골에서는 여자아이를 도시에 보내면 남녀의 접촉으로 말미암아 그 여자아이는 버리게 된다고까지 여겼다.
그래서 조선조 여성들은, 특히 사대부층의 귀부인들은 얼굴을 외간 남자에게 보이지 않도록 너울이나 장옷을 썼다. 너울은 둥근 모자 모양에 긴 자루 모양의 천을 이어 붙여 머리에 쓰면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얼굴에 걸치는 부분은 앞을 투시해 내다볼 수 있는 정도의 얇은 천을 대었다. 청색이나 흑색을 주로 썼고, 신분이 높을수록 너울을 길게 늘어뜨려 품위를 높였다.
이렇게 조선시대 사회 전반에 걸친 여성에 대한 편견과 구속은 당시 여성들을 사회로부터 격리시켰다. 규중처녀(閨中處女)라고 해서 규중에 있는 처녀를 이야기하면서 이를 빗대어 집안에서만 생활해 세상물정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치부했으니,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유교 도덕의 기본이 되는 세 큰 줄기와 사람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리를 묶은 삼강오륜(三綱五倫)을 필두로 한 조선시대의 유교사상은, 오히려 규방문화가 나름대로의 영역을 구축하도록 하는 촉매제 역할을 한 것이 됐다.
조선조 여인들의 규방문화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규방가사(閨房歌辭)가 대표적인데, 이는 내방가사(內房歌辭)로도 불리며, 「계녀가(誡女歌)」를 비롯해 「규중행실가(閨中行實歌)」 「석별가(惜別歌)」 등의 대표적인 작품들이 있다. 이런 작품들을 통해 각종 사회 규범에 얽매여 있던 조선조 여인들이 나름대로의 문화생활을 영유했음을 알 수 있다.
과거의 우리나라 여성들은 남성에 예속되어 시간적․경제적으로, 심지어는 정신적으로 여유를 갖지 못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따라서 혹자는 여성작가들의 출현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양반계급의 부녀들만은 그래도 남녀노복(男女奴僕)과 침모(針母)․유모(乳母)를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책을 읽고 자수(刺繡)를 하고, 사군자(四君子)를 칠 만한 마음의 여유는 있었다. 때로는 규중 여자들이 모여 화조월석(花朝月夕)을 즐길 줄도 알았고, 춘삼월 좋은 시절에 농춘(弄春)도 하는 풍류까지 즐겼다. 또 장성한 딸을 앉혀 놓고 엄숙하게 『여사서언해(女四書諺解)』 『내훈(內訓)』 등을 가르치기도 했다.
조선왕조는 소위 유한정정(幽閑貞靜)의 부덕(婦德)을 함양시키기 위한 부녀 전용의 교과서를 많이 보급시켰는데, 『내훈』 『여사서언해』 등이 대표적이다. 『내훈』은 성종의 생모 인수왕후(仁粹王后)가 『소학(小學)』 『열녀(烈女)』 『여교(女敎)』 『명감(明鑑)』에서 여계(女誡)에 필요한 것만을 발췌하여 편찬한 것이다. 한편 여사서(女四書)는 명(明)나라 인효문황후(仁孝文皇后)의 『내훈』, 후한(後韓) 조대가(曹大家)의 『여계(女誡)』, 당(唐)나라 송약소(宋若昭)의 『여논어(女論語)』, 명나라 왕절부(王節婦)의 『여범(女範)』을 묶어 부르는 말인데, 영조 12년에 어명에 의해 이덕수(李德壽)가 여사서를 언해한 것이 바로 『여사서언해』이다.
이러한 속에서 여성문학은 싹이 트고 자라날 수 있었으며, 또한 가사문학의 일반 유행과 함께 규중에서도 가사작품이 산출되었고, 그것이 좋은 작품이라면 멀고 가까운 친척의 연줄을 타고 널리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소지하고 애독(愛讀)하는 가사는 그들의 작품뿐 아니라 부형(父兄)들이 자녀교육을 위해 지은 것도 있었으며, 유명한 학자들의 작품도 개중에는 섞여 있게 되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이 간다.
규방가사란 조선 영조 중엽경부터 영남지방에서 주로 양반집 부녀자들 사이에서 유행된 가사를 말하는데, 가# 또는 두루마리라는 이름 아래 창작․전파․애독되었다가 육이오 전쟁 이후 소멸되었다. 내방가사(內房歌辭)․규중가도(閨中歌道)․규방문학(閨房文學)․규중가사(閨中歌辭) 등으로도 불린다.
규방가사 가운데 계녀가사(誡女歌辭)로서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대표적인 것은 영천(永川) 정씨가(鄭氏家) 소장인 「계녀가」와, 영조 때 마전공(麻田公) 오대손(五代孫)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유실경계사(柳室警戒詞)」와, 인동지방(仁同地方)의 「규중행실가」 등을 들 수 있으나, 이 밖에도 계녀가사는 비교적 많이 남아 있다.
비록 규방가사의 내용 중 상당수가 계도적이거나 교훈적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상당수를 생활적인 모티프와 감상적인 모티프로 나눌 수 있다. 전자로는 혼인(婚姻)․회혼례(回婚禮)․회갑근친(回甲覲親)․화전(花煎)놀이․승경유람(勝景遊覽) 등이 있고, 후자로는 연모(戀慕)․회고(懷古)․우국(憂國) 등을 들 수 있다. 즉 규방가사는 부녀자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생활을 노래한 것으로, 주된 내용은 교훈적인 삶과 규방생활의 감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규방가사는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창작․전파되어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에 정착되었다. 영남지방은 조선조 예학(禮學)을 깊이있게 연구한 유림(儒林)들, 즉 영남학파의 고장으로, 이러한 예학적 전통이 규방문화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지역적 특성은 차의 재배지와 일치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이는 규방가사의 창작층과 수요층이 삼남지방의 특징을 그대로 반영하는 동시에 차 재배 및 소비층과 맞물려 있다는 말이 된다. 규방가사의 창작 및 향유층이 양반가의 여인들이었다는 것에서도 충분한 근거를 얻을 수 있다. 전통사회에서 차란 쉽게 마실 수 있는 음료는 아니었으므로 양반가가 아니라면 접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양반가 부녀자라면 내용이 달라진다. 우리나라 차의 주산지인 영남 지역의 양반가 부녀자라면, 차란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음료이다 보니 관심이 없을 수 없다. 이는 조선조에 발행된 여러 계녀서(誡女書)의 내용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우암선생(尤庵先生) 계녀서(戒女書)』를 살펴보면, 제14장의 제목이 의복 음식CH 도리라고 하여 관념적인 윤리교훈보다는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내용이 담겨 있는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규방가사를 주제 및 내용에 의해 분류하면, 교훈류․송축류․탄식류․풍류류 혹은 교훈적인 모티프, 자탄적인 모티프, 풍류적인 모티프, 자과적(自誇的)인 모티프, 송경적(訟慶的)인 모티프, 애도적인 모티프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러한 범위는 규방 여인들의 삶을 전체적으로 아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풍류적 성격이 강한 것으로 분류된 규방가사들이다. 화전가(花煎歌)류의 서정성 짙은 노래로 대표되는 이러한 종류의 규방가사들은 여인들의 풍류적 성격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쉽게 말해 먹고 마시는 일상사를 소재로 하여 창작된 규방가사들이다.
이러한 규방가사의 내용은 차를 마시는 행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규방다례란 결국 규방가사 등 이러한 규방문화, 그 중에서 조선조 양반가 여인들의 음다풍속(飮茶風俗)을 계승한 것으로, 그 뿌리는 결국 삼남지방의 전통문화에서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규방다례는 우리나라 주요 차의 재배지이자 소비지인 영남지방에서 발생하여 전라와 충청 지역, 즉 삼남지방에 정착된 우리 고유의 차예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그 문헌적 자료가 규방가사에서나 흔적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적지만, 이것은 당시의 사회적 구조를 볼 때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것이다.
조선조 문화의 주류는 어디까지나 남성문화․선비문화였던 것이고, 이러한 선비문화와 대비되는 지점에 규방문화가 존재하기는 했지만 선비문화에 비해 규범화가 덜 되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규방문화를 대표하는 다른 것으로는 규중칠우(閨中七友)가 있다. 선비들에게 좋은 벗이 된다는 종이․붓․먹․벼루 등 문방사우(文房四友)가 있다면, 규중칠우는 바느질을 하는 데 필요한 침선(針線)의 일곱 가지 물건인 바늘․실․골무․가위․자․인두․다리미를 통칭하는 것이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 작자미상의 『규중칠우쟁론기(閨中七友爭論記)』는 이런 규중칠우를 의인화(擬人化)해 인간사회를 풍자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한편, 현재도 이 규중칠우에 속하는 바늘․실․골무 등을 이용한 자수나 한복 등이 많은 분들의 관심을 받으며 활발하게 보급되어 우리 전통문화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했으며, 많은 기능보유자들이 생겨 활발하게 활동을 벌이고 있다.
필자의 규방다례는 이렇게 명맥으로 이어져 온 규방문화를 근간으로 하여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켰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2. 행다법의 연원과 정신
여기서는, 앞에서 서술한 우리 전통문화의 연장선상에서 실용다례와 생활다례는 물론 규방다례가 과연 어떤 정신으로,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설명하려 한다.
규방다례를 비롯한 생활차․선비차․가루차의 행다예법은 문헌적 고증에 바탕하고, 과학적 이치에 입각하여 만들어졌으며, 다음과 같은 기본정신이 내포되어 있다. 한국차문화협회 설립 이후 이 행다법이 꾸준히 보급되고 있고 많은 차인들이 이를 익히고 있다.
첫째, 전통 존중의 정신이다.
규방다례에서 존중하는 것은 전통 행다례(行茶禮) 정신이다. 즉, 중국 차문화의 개조(開祖) 육우의 『다경』에 나타나는 차문화와 우리나라 다성(茶聖)으로 추앙받고 있는 초의선사의 『동다송』 및 『다신전』에 나타나는 차문화 예절법 등을 기초 자료로 해서 만들어진 것임을 밝힌다. 이 밖에 『고려사』를 비롯해 『삼국사기』 등 정사(正史)에 보이는 기록들과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주자가례(朱子家禮)』 외에 근대 이후 출판된 여러 가지 문헌들을 참고했다.
둘째, 예절 존중의 정신이다.
차문화의 기본은 예(禮)와 경애사상(敬愛思想)으로, 규방다례 등은 예절에서 시작하여 예절로 끝난다고 할 정도로 예와 경애를 존중한다.
필자가 정립한 규방다례에서는 손님을 초청하는 것을 시작으로 차를 내고 다식(茶食)을 먹으면서 다담(茶談)을 나누고 손님을 배웅하기까지의 모든 과정들이 포함된다. 특히 규방다례의 행다과정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예의 정신은, 유교를 바탕으로 구속되어 있던 조선조 여인들이 지성을 높이고 자녀와 며느리에게 시키는 교육의 한 방편으로 활용했던 독특한 규방문화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으로, 몸과 마음 중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고 생활에서의 예절 정신이 그대로 녹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셋째, 과학 존중의 정신이다.
규방다례를 비롯해 한국차문화협회에서 펼치고 있는 행다례는 모두 과학적 이치에 최대한 접근하려는 다례법이다.
행다에서 전통적이고 예절적인 부분을 강조하더라도 현대과학을 통해 밝혀진 사실 등을 존중하는 다법이 아니면 차의 효능과 맛과 향을 십분 발휘시켜 음용하기 어렵다. 특히 현대의 차생활이 건강학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관계로, 이같은 과학 존중은 시대의 흐름에 부응하는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차의 분량은 차의 종류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잎차의 경우 일인분은 2-2.5그램이 적당하며, 삼인분의 경우에는 5-5.5그램 정도가 알맞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투다법(投茶法)에서는 여름에는 상투법(上投法), 봄․가을에는 중투법(中投法), 겨울에는 하투법(下投法)을 사용한다. 차를 넣고 차가 우러날 때까지의 소요되는 시간은 이삼 분 정도가 가장 알맞은데, 생활차를 비롯해 규방다례 등에서 다관에 차를 넣은 후 찻잔을 데운 물 등을 퇴수기에 버리는 동작의 시간이 이와 일치하는 것은 오랜 정립과정의 결과인 것이다. 차의 알맞은 물의 온도는 차의 등급에 따라 다소 다른데, 상품(上品)은 섭씨 60-70도, 중품(中品)은 70-80도, 하품(下品)은 80도 이상이 알맞다.
이러한 수치들은 이미 과학적으로 증명된 만큼, 차를 내는 사람은 이에 유념해 규방다례 등의 차생활 예절에 적용해야 한다.
넷째, 생활 존중의 정신이다.
규방다례 및 기타의 차생활 예절에서는 기존의 구태의연하고 형식 중심적인 차예절에서 벗어나 차를 내는 사람이나 차를 마시는 사람 모두 편해야 하며, 자연스럽게 행다의 내․외면에 있는 일정한 순서를 이해해야 한다. 형식적인 부분에만 치우치다 보면 사람이 차의 뒷전으로 밀려나는바, 주객전도가 되기 때문이다.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인설 행다법은 값비싼 다구를 갖추지 않고도 쉽게 행다례의 묘미를 살릴 수 있도록 한 것이 특징이며, 번거로움으로 인해 차생활을 외면하지 않고 일상생활에서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도록 짜여 있다.
다섯째, 청결 존중의 정신이다.
여기서 말하는 청결은 다구(茶具)의 청결함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구의 청결은 손님을 맞거나 본인을 위해 기본이 되는 것이며, 마음의 청결함까지를 뜻함이다.
이상 다섯 가지 원칙 외에도 행다를 하는 사람이나 차를 대접받는 손님의 편안하고 원활한 동선(動線)까지 고려해 행다례가 주인이나 손님 모두에게 불편함이 없도록 했으며, 이는 처음 차생활 예절을 배우는 청소년들은 물론 미래 차인들의 차생활에 도움을 주고자 고려된 것이다.
또한 규방다례를 비롯한 선비차 등은 모두 생활차 예절에 근간을 두고 있으며, 이는 상보 접는 법, 다관을 잡는 법, 찻잔을 들어 손님에게 전달하는 법, 다식을 대접하거나 다식저를 다루는 방법 등 모든 부분에 일관성있게 그대로 적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행다법
행다법(行茶法)이란 차를 마실 때 행하는 차 다루는 법과 관계되는 제반 다사법(茶事法), 그리고 이에 수반되는 예의범절과 그 분위기까지를 포함한 것을 말한다. 실제로 차를 음용하는 일체의 행위, 즉 차를 우려 마시는 모든 일이 바로 행다법인 것이다.
우리 행다(行茶)의 일반적인 특성은, 첫째, 차의 품성에 맞춰 차 고유의 맛을 내는 데 정성을 들이며, 둘째, 나와 남을 구분하지 않고 분수에 맞는 넉넉함이 있으며, 셋째, 물과 불, 차와 다구, 손님과 주인 등이 모두 하나가 되어 더불어 즐기는 것이다. 또한 물 흐르는 것과 같이 자연스러우면서 동선(動線)이 간결하고 과장됨이 없는 것, 바로 그것이 행다례(行茶禮), 즉 차 예절법인 것이다.
차를 마시는 형식에 따라 다례(茶禮)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의식(儀式)과 관련된 행다법과 일상생활과 직결된 생활행다 형식이 그것이다.
전자를 흔히 의식다례(儀式茶禮)라 말하고, 후자를 생활다례(生活茶禮)라고 표현하는데, 한국차문화협회에서 실시하고 있는 규방다례, 생활차 예절, 선비차 예절, 가루차 예절 등은 모두 생활행다 형식, 즉 생활다례로 보면 된다.
의식다례를 다시 기본의식다례와 구상의식다례(具象儀式茶禮)의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으며, 여기에는 추모헌다례․접빈다례․경축다례 등이 포함된다. 기본의식다례는 모든 의식다례의 기본이 되는 다례법이 된다.
규방다례는 조선조 선비다례와 비교해 볼 수 있는데, 전통 차문화 정신에 예술성과 전통성, 그리고 현대적 차 음용의 편리성 등을 더한 다례법으로, 오늘날 한국차문화협회에서 사범 자격 심의 때 실기시험 과목으로 채택하고 있다.
행다법은 다시 종교적 관점에 따라 불교식과 유교식으로 나누기도 하며, 그 밖에 기독교와 천주교․도교 등에서도 나름대로의 행다법을 펼치고 있다. 때에 따라서는 제례에서 이루어지는 다례를 따로 분리시켜 특별히 제례다례(祭禮茶禮)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포괄적 의미에서는 제례도 의식의 한 형태로 의식다례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의식다례는 격식이나 절차를 중요시하지만, 생활다례는 형식을 대폭 생략하고 절차를 간소화해 현대인들의 차생활에 편리하도록 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일각에서는 행다법, 즉 차생활 예절에 일정한 형식의 예절법이 무슨 필요가 있냐며 무용론을 제기하고 있다. 어떤 이는 행다 예절이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음다를 방해하는 요소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필자의 견해는 다르다. 어른을 만나 뵐 때 아무렇게나 고개만 숙인다고 해서 그것이 인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때 두서 없이 이야기한다면 분명 그 대화는 아무 뜻이 없는 소리에 그칠 것이다. 어디에나 예절과 형식은 필요하다. 인사예법이 있고 어법(語法)이 있으며 공대법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가령 군인들의 인사법인 거수경례(擧手敬禮)를 생각해 보자. 거수경례는 주로 군인들이 오른손을 모자 챙 옆에까지 올려(擧手) 상사에게 경의를 표하는 행위(敬禮)이다. 이때의 거수는 행위이며 경례는 마음으로, 거수와 경의(敬意)가 일치되어야만 참다운 의미의 인사라고 보는 것이다.
의식다례의 계승․발전을 추구하는 입장에서 보더라도 행다법은 마땅히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 형식이 없는 문화는 원형의 보존과 전승이 어렵기 때문이다.
다례를 전통문화라는 측면에서 접근할 때도 내용과 형식이 상호 불가분의 관계임은 주지의 사실이며, 어떤 문화가 온전하게 계승․발전되기 위해서는 내용과 형식이 상호 작용하며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차생활에서 행다법은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 다만 너무 형식에 치우쳐 차생활 자체를 그르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차문화협회나 가천문화재단에서 실시하고 있는 차생활 예절은 예절과 전통을 중시하면서 결코 현대적 감각에 뒤떨어지지 않게 오랜 연구와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행다 예법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다만, 다른 문화가 그렇듯 차문화도 시대나 환경에 따라 변형될 수 있으며, 결국 변형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는 이치이다.
예를 들면, 『삼국사기』의 기록 이후 전개된 삼국시대의 행다법과 오늘날의 그것이 같을 수 없다. 제다과정을 비롯해 차와 관련된 일련의 모든 일들이 기록 부재 등으로 인해 그대로 보존되지 못한 것에 대해 필자 또한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만약 우리만의 독특한 차문화 예절법이 확실한 증거들로 오늘날까지 전승되었다면 현재의 논란들과 차문화 예절법에 대한 여러 목소리들은 모두 불식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행다법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다섯 가지 원칙과 그 동안의 필자의 오랜 차생활과 경험, 그리고 여러 차인들의 관심의 결과로 1979년 한국차인회 설립 이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여기서는 생활차 행다법을 시작으로 선비차 행다법(일인용 다기 사용), 가루차 행다법 등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응용할 수 있는 행다법의 면면을 살펴보고 실제 행다법을 사진을 통해 선보이고자 한다.
또한 우리나라 조선조 여인들의 차문화의 진수를 엿볼 수 있으며, 훌륭한 문화 자산으로 국내는 물론 세계 각국에서 선보여 박수갈채를 받았던 규방다례도 세밀하게 설명하려 한다.
4. 규방다례의 실제
규방다례는 그 동안 미국을 비롯해 중국․일본․대만․독일․인도․스리랑카 등 세계 각국을 돌며 우리 차문화의 우수성을 소개하는 자랑스런 전통문화로 자리잡았다.
그 동안 해외 현지에서 규방다례를 선보이는 데 있어 부대행사로 소개되었던 것이 전통 궁중의상 발표이다. 현지의 외국인들은 그 동안 한국 안내 관광 책자 등에서나 보아 왔던 우리 전통의상의 화려함에 놀라며 깊은 관심을 보였다. 정적인 차문화 시연에 이어 벌어진 패션쇼 형식의 궁중의상의 동적인 면들은 오천 년 역사의 한국문화를 소개하는 데 더없이 좋은 기회를 제공했고, 기립박수 갈채를 받기에 충분했다.
이에 필자가 정립해 시행해 온 규방다례의 과정을 사진과 함께 싣는다.
더불어 필자는 규방다례 시연 참가자들의 올바른 한복 착용을 통해 궁중의상에서 선보일 수 없는 다른 부분을 소개하고자 했는데, 그것은 바로 시연 당시 착용하는 한복 복장의 구성이다. 이것은 비록 강제 사항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를 지켜 입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여 덧붙이는 것이다.
주인은 분홍 저고리에 자주색 치마, 돕는 이는 색동이나 노란 저고리에 꽃분홍이나 빨간 치마, 손님은 미색 저고리에 주황 치마나 옥색 저고리에 남색 치마, 혹은 은행색 저고리에 초록(수박색) 치마 등이 그것인데, 이는 전체 출연진의 색 조화뿐만 아니라 음양의 이치와 결부된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생활 속에서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이치를 중요시하고 이를 지키려 했다. 이는 단지 주술적인 내용만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 밝힌 규방다례 시연의 한복 색의 조화는 오방(五方), 즉 동․서․남․북․중앙을 나타낸다. 이를 색으로 표현하면 동은 청색(靑色)으로 목(木)이요, 남은 적색(赤色)으로 화(火)요, 서는 백색(白色)으로 금(金)이며, 북은 흑색(黑色)으로 수(水)이고, 중앙은 황색(黃色)으로 토(土)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오색이 나온 것이데, 오색영롱에서의 오색은 오행(五行)․오덕(五德)․오방(五方)․오미(五味)와 같은 관념으로 만물의 조화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규방다례(閨房茶禮)』무용문화재 신청경위
우리나라 전통의 올바른 차문화 정립을 위하여....
차(茶)와 동고동락(同苦同樂) 한지도 어느덧 30여년이 지나 불혹지년(不惑之年)에 접어들었습니다. 덧없는 것이 세월이라고 했지만 처음 차를 접한 것은 저의 조부님에 의해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전북 군산지역에서 동학운동을 참여하셨던 조부님께서는 함께 이 운동을 하시던 지인(知人)들과 만나 환담을 나누실 때마다 항상 어린 저를 동행시키셨습니다. 그 자리에는 어김없이 잘 끓인 자연수에 정성스럽게 갈아 말려두었던 솔잎 가루를 넣어 우려 마시는 대용차인 솔잎차와 함께 전차, 떡차등이 대접되었습니다.
조부님과 지인들의 귀여움을 받던 저는 그 자리에서 할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고사리 손으로 차를 우려 대접하는 것이 작은 기쁨이었고 자상하게 차생활 예절에 대해 설명해 주시며 손수 시범을 보여주시기도 하셨습니다. 또한 할아버지께서는 어린 저에게 여자는 모름지기 집안의 대소사(大小事)를 잘 알아야 한다며 제례의 절차와 지방문(紙榜文)작성등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시며 직접 해 보도록 하셨습니다. 차를 내실 때의 절도 있으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성년으로 자란 후에도 항상 저의 기억속에 남아 있었고 오늘날 제가 차문화(茶文化)에 심취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가 청년이 된 1973년, 당시 성균관(成均館)의 유학대학장(儒學大學長)에 재임하고 계시던 전 한국정신문화원 원장(83, 2~86, 2), 도원(道原) 류승국(柳承國) 선생님으로부터 보다 체계적으로 우리나라의 차문화와 차생활 예절에 대해 배움으로서 오늘 이렇게 규방다례(閨房茶禮)를 비롯해 생활차(生活茶)와 가루차(=말차(抹茶)), 선비차 다례법(茶禮法)등을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저는 1978년부터 명원문화재단 고(故) 김미희(金美熙)선생등과 함께 한학자이신 김두만(金斗萬) 선생님으로부터 차문화의 고전인 육우(陸羽)의 다경(茶經)등을 배워 익혔나갔습니다.
지금은 다경을 비롯해 초의(草衣)선사의 다신전(茶神傳)이나 동다송(東茶頌)등을 번역하고 해설한 서적들이 많이 나와 차문화를 배우려는 후배 차인(茶人)들에게 도움이 되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그런 해설서란 전무한 상태였습니다.
원문 복사본을 앞에 놓고 한 글자 한 글자 밑줄을 그어가며 엄숙하면서도 때로는 화기애애(和氣靄靄)한 분위기에서 1주일에 한번씩 강습을 받았던 저와 동료 차인들에게 그 해 겨울의 유난했던 추위를 달래는 것은 작은 난로 하나뿐이었지만 마냥 즐겁고 보람된 일이었습니다.
그런 중에도 저에게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도원(道原) 류승국(柳承國) 원장님의 가르침에는 차문화가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전파되어 일본 다도의 뿌리를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차문화가 일본에서 시작되어 우리나라로 유입된 왜색 짙은 일본문화로 치부되는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반일(反日) 감정이 거세던 시기라 잘못 알려진 전파경로와 그 역사적 고증이 부족했던 우리의 차문화는 천대받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잖은 사람들이 차를 즐겨 마셨음에도 우리 차의 원류는 물론 예법에 대한 역사적 설명이나 다례법이 정리되지 못한 채 단지 문화보급이라는 미명아래 간신히 그 흐름만이 회자(膾炙)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저는 이에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로서의 차문화 예절에 대한 예법을 나름대로 정립하자는 뜻을 품고 전통의 맥을 이으면서도 현대인들에게 적합한 차생활 예절법을 세우고자 백방으로 노력해 왔습니다.
이 시기 인천 남동구 장수동 72번지에 적을 두었던 전주 이시 인천지원의 지원장인 이덕유 선생과 교유를 하면서 전통 예절을 비롯한 많은 것들을 주고 받을 수 있었습니다.
1980년 저에게 차를 배워 익혔던 제자들이 인천 최초의 차동호인 단체인 인설회(仁 會)를 구성해 회장으로 추대받아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단체는 그동안 인천지역 각급학교와 단체등을 대상으로 한 차문화 보급 행사를 벌이고 있습니다. 2000년 6월엔 인천대공원에서 전국에서도 유일무이한 전국 최대의 차문화전엔 「전국 인설 차 문화전」을 개최, 인천문화의 수준을 한단계 올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런 노력들은 80년대 이후 급격하게 발전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지만 커피로 대표되는 대중음료의 접근은 우리의 미풍양속인 효와 예를 다하는 차문화를 쇠퇴시키는 부작용을 낳았고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하면서 아직도 계속되어야할 실정입니다.
문방사우(文房四友) 못지 않게 우리 조상들이 일상 생활 속에서 가까이 했던 차문화가 우리나라에는 온데 간데 없고 6․25전쟁의 아픔 속에 밀려들어 온 「커피문화」가 우리의 차문화를 대신해 일반 대중들에게 너무나 무방비하고 빠르게 자리잡은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이런 상황들이 저의 의지를 꺽지는 못했습니다. 1970년대 말 저와 몇몇 친우(親友)들은 경제적 성장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문화를 지키는 것이 우리의 자존심을 세우는 길이라고 여기고 「한국차인회(韓國茶人會)」를 조직했으며 부회장으로서 차문화 정립의 최일선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이후 본인은 보다 체계적이고 대중적이며 전통의 멋과 예절을 그대로 살릴 수 있는 우리나라 차문화 예절의 정립을 기치로 전국의 차인들과 다신계(茶信契)를 창립했습니다. 이를 근간으로 (사)한국차문화협회(韓國茶文化協會)를 설립된 후 부회장으로 재직하는 등 이 단체가 전국 조직으로 뿌리를 내리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이 단체에서 부회장으로 오랜 기간 몸담아 오면서 이사장이 되기까지 「현대 차생활 용어집」 발간과 「규방다례 및 생활차 예절을 정립한 비디오 테이프」를 제작해 보급하는 활동을 벌여 왔습니다.
우리나라에 차(茶)가 전래된 것은 1,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5천년 유구한 우리 민족의 역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선조에서부터 오늘의 우리들에게 이르기까지 생활 속에서 차(茶)문화가 면면히 계속되어 온 것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작금의 세태는 어떻습니까. 차(茶)를 팔아야할 다방(茶房)에서는 우리의 차(茶)는 간데 없고 인스턴트 음료인 커피가 팔리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며 이를 아는 이 조차 드문 것이 현실입니다. 율무탕, 둥굴래탕 등이 탕(湯)이라고 불려야 함에도 차(茶)의 대명사처럼 굳어져 버렸고 심지어 일부 사람들은 숭늉을 차(茶)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또한 녹차(綠茶)라는 단어도 1970년대 우리 것 찾기 운동의 일환으로 차 마시기 운동을 벌인 주무 부처인 보건사회부가 차를 굳이녹차(綠茶)로 분류하면서, 국산차의 일종으로 부르는 우(愚)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최근 전국의 뜻 있는 단체와 기관에서 우리 차문화를 통해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우리의 전통 문화를 체험토록 해 그 효과를 보고 있습니다. 저도 한국차문화협회와 가천문화재단(嘉泉文化財團)에 관계하고 있는 사람으로 북쪽 민통선내 대성동마을에서부터 제주도 사회복지시설 등 전국을 순회하며 우리 차문화 무료 보급에 온 힘을 쏟고 있습니다.
이 같은 저의 신념은 일반인들의 잘못된 차문화 상식을 바로잡고 올바른 우리 차문화 보급을 통해 청소년들에게 정서순화와 전통문화 사랑의 순기능(順機能)을 심어주기 위함입니다.
강의를 나가면 청소년 등 수강생들에게 반드시 듣는 질문이 있습니다. 차(茶)가 무엇이냐고.
저를 비롯해 그동안 우리 차문화를 전파․보급시키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라면 대답은 한결 같을 것입니다. 차나무의 어린잎을 채집해 찌거나 덖어 건조시킨 후 100℃로 끓인 물을 70~80℃로 식혀 여기에 우려 마시는 음료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답변을 해 놓고도 개운하다는 생각이 들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차(茶)를 마심이 의식지향적이고 기술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오랜 세월 우리 선인들의 정성어린 손길을 거쳐 오늘까지 내려 온 정신, 즉 정적인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부족한 몇 마디의 설명보다 직접 오랜 시간과 정성을 쏟아 올바른 차생활 예절을 체득(體得)해 진정한 차인(茶人)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동안 정리하고 정립해 체계화시키고 현재 많은 사람들이 배워 익히고 있는 우리의 전통 차문화에 대한 역사부터 예절법, 특히 생활차 예절과 규방다례(閨房茶禮)등을 이 신청서를 통해 자세히 서술하고자 합니다.
이 행다법(行茶法)은 제가 오랜 숙고 끝에 도식화한 것으로 이미 1천여명에 달하는 한국차문화협회 차예절 사범과 가천문화재단 직원, 그리고 이 재단을 통해 차예절 법을 배우고 있는 가천문화학교 수강생과 교직원, 청소년 및 일반 시민들로부터 우수성 등을 입증 받았다고 자부합니다.
제가 자료를 통해 밝힌 규방다례를 비롯한 각 행다법의 생성원칙은 크게 전통과 현대적 요구의 조화라고 표현하고자 합니다.
전통 존중과 예절 존중, 과학존중, 생활존중, 청결존중 이외에도 동선의 자유로움과 행다법을 배워 익혀 생활속에서 우리 전통 문화의 면면들을 계승하고자 하는 분들의 요구에 부흥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배려들이 녹아 있습니다.
이런 원칙들은 우리나라 다성(茶聖)으로 불리는 초의선사(草衣禪師)의 저서인 동다송(東茶頌), 다신전(茶神傳)은 물론,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연등의조(高麗史燃燈儀條),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주자가례(朱子家禮), 불교의식집(佛敎儀式集)외에 각종 고문헌에 나타나 있는 전통 차문화와 행다법을 근간으로 했습니다.
또한 그동안 전통 행다법이 형식위주로 일관해 오히려 차문화를 즐기려는 동호인들의 음다 생활에 방해가 된다는 지적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전통적인 요소들을 그대로 살려 우리나라 전통 차문화의 맥락을 그대로 전승하는 대표적인 생활 행다례로 부끄러움이 없도록 했습니다.
처음 조부님으로부터 차예절을 보고 배웠으며 이후 유승국 원장님으로부터 체계적인 차문화를 익힌 지 어느덧 30여년이 흘렀습니다. 그후 펼쳐 온 저의 차문화 학습기간과 차문화 보급을 위한 노력들이 우리나라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무형문화재로 지정받는 결실을 통해 현재 차문화를 배워 익히고 있으며 앞으로도 배워 익힐 많은 후배 차인들에게 보탬과 자긍심을 심어 주길 기원합니다.
더 나아가 전문 차예절 사범으로서의 길을 걷고자하는 분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였음을 말씀드리며 아무쪼록 국내 차문화 발전의 힘이 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