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해가 서쪽 하늘로 기울고 있다. 휴대전화의 시계를 보니 일곱 시. 아산 봉재지 좌대에 배를 타고 들어와 낚싯대 두 대를 펴고, 떡밥을 개고 자리를 잡고 앉아 낚시를 시작한 지도 두 시간이 흘렀다. 그래도 해가 지려면 아직 한 시간은 더 남았다. 어쨌거나 한낮에 그토록 맹위를 떨치던 더위는 한풀 기세가 꺾였다.
허 군에게 전화를 걸어보니 이제 막 일이 끝났다며 집에 들려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고 한다. 부여에서 아산 봉재지까지 오려면, 또 배를 타고 좌대까지 들어오려면 앞으로 세 시간은 더 기다려야겠군, 하고 낚싯대를 챘다. 이번에는 왼쪽 2.0칸 대에 어신이 왔기 때문이다. 잘 생긴 토종붕어 뼘치였다.
허 군이 배를 타고 좌대로 따라 들어온 것은 그로부터 세 시간 뒤인 밤 열 시쯤. 허 군이 저녁식사도 거르고 달려왔기에 아까 먹다 남긴 밥과 된장찌개, 그리고 꽁치통조림과 복숭아 등으로 아예 술자리부터 벌였다.
해 떨어질 무렵 허 군을 기다리면서 소주 한 병을 자작으로 마셨는데,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고 밤이 깊어가니 술기운이 어느새 죄다 달아나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술은 아직도 세 병이나 있었다. 내가 남긴 것이 한 병, 허 군이 추가로 사가지고 온 것이 두 병… 그런데 모두가 3홉짜리였으니, 2홉들이로 환산하면 네 병 하고도 반 병이 되는가. 에라, 술꾼이 뭐 그런 걸 따져서 무엇하랴.
“죄송허구먼유, 선생님. 지가 일을 일찍 끝내서 모시구 들어왔어야 허는디요….”
“별 말을 다 하는군. 우리 사이에 그런 인사치레는 할 것 없네. 그런데 요즘 자네가 인터넷에 연재하는 소설을 읽어보니 갈수록 재미있더구먼. 역시 자넨 이야기꾼 소질이 다분해! 나보다 방문자 수가 두 배나 되더구먼!”
“아이구, 부끄럽습니다요! 아직두 멀었지유, 뭐!”
“아냐. 가끔 가다가 문법과 맞춤법에 어긋나는 데가 있어서 그렇지, 스토리를 끌고나가는 재주는 아주 좋아! 전두환이처럼 말해서, 아~주 좋아!”
“다 선생님께서 지도해주시지 않으면 이 넘이 어떻게 그렇게라두 글을 쓸 수 있겠남유?”
“좌우지간 발자욱이니, 해변가니, 모래사장이니, 수많은 관중들이니, 아름다운 미인이니, 늙으신 노부모니, 배신감을 느낀다느니 하는 헛소리만 조심하면 되네.”
“네, 조심허느라고는 허는디 지두 모르게 가끔 튀어나오는구만유. 어쨌든 이 넘이야 가방끈이 짧으니 족탈불급이쥬 뭐.”
“허허허, 그래, 그렇게 가끔 문자도 쓰고, 고사성어도 필요한 경우에는 써야겠지. 그리고 말일세. 자네 말대로 가방끈이 짧다면 짧을수록 남보다 더욱 열심히, 몇 배나 더 노력해야 하네. 사실 뭐, 요즘 말 많고 탈 많은 허위 학력, 가짜 박사로 행세하다 들통나서 쪽 팔린다는 그따위 인간들도 자네보다 나은 인간은 하나도 없지만 말일세."
"그레셤의 법칙이 어디 가남유?"
"하하하하, 맞네 맞아! 가짜가 진짜 행세하는 세상, 진짜보다 더 설치고 날뛰는 터무니없고 어처구니없는 세태가 더 문제겠지. 고졸이 대통령도 한 나라에 웬놈의 학벌은 그렇게 따지는 거야? 사실 내 생각에는 가짜 박사들보다 진짜 박사들, 덜 배운 사람보다 좋은 학교 나온 자들 가운데 문제아가 더 많은 것 같아! 이른바 명문 대학을 나왔다는 인간, 교수니 박사니 하는 그런 자들이 돈에 눈 멀고 출세에 눈 멀고 명예욕에 환장해서 입만 열면 거짓말을 떠벌이며 곡학아세하고, 혹세무민하며, 세상을 이렇게 혼탁하게 만들지 않고 있는가 그거야!"
"흥분하지 마셔유, 선생님! 혈압 올라가십니다요! 시력두 자꾸만 나빠져가시잖아유? 그러나 저러나 연초에 월에 펴내신 장편역사소설 <연수영-불멸의 전설>은 잘 팔리남유?"
"염병할! 광고를 해야 사람들이 알고 책을 사지. 2쇄니 재판이니 이젠 포기했다네."
"출판사에선 왜 광고를 하지 않는데유?"
"내가 아나? 광고할 돈이 없든지, 무슨 사정이 있겠지. 광고는 고사하고 서점에 붙일 포스터라도 만들었으면 좋겠네!"
"지가 한 번 올라가서 그 녀석 손을 좀 봐줄까유?"
"됐어! 그 얘긴 더 하고 싶지 않아. 자식뻘 되는 녀석에게 사기를 당한 것 같긴 하지만...... 책이 많이 안 팔리면 뭐 어떤가? 내가 이 나이에 더 유명해지면 뭘 하고, 돈을 벌어야 얼마나 많이 벌겠는가? 자넨 부지런히 낮에 일하고 밤엔 글을 쓰게. 그대신 너절한 연애 이야기, 특히 이혼을 몇 번 해서 애들 성이 각각 다르다느니 하는 따위 얘기를 소설이랍시고 쓰거나, 고증도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을 역사소설이랍시고 내놓을 생각도 말고, 알겠는가? 염병할! 좌우지간 나야 그저 자네와 한 번이라도 더 이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가면 됐지. ........그런데, 자네 말이야. 쥐뿔도 모른다는 말이 어떻게 해서 생겼는지 아는가?”
“모르겄는디유.”
“옛날에 어느 집에 백년 묵은 쥐가 있었는데, 도술을 부려 주인으로 둔갑을 해서는 진짜 주인을 내쫓고 마누라까지 꿰차고 주인 노릇을 했다는 거야. 그러다가 진짜 주인이 도사의 도움으로 백년 묵은 쥐를 처치하고 주인 자리를 되찾은 다음에 마누라에게 이랬다는 걸세. ‘쥐불알도 모르는 게!’ 하고 말일세. 쥐불알이 쥐불로 줄었다가 발음이 변해서 쥐뿔이 됐다는군. 어때, 재미있지?”
“으흐흐흐흐! 요렇게 요상시럽게 재미있는 야그는 오늘 선생님한테 첨 듣습니다요!”
"좌우지간에 자네 두 번 다시는 흑도에 발을 넣고 '학교'에 들락거리면 안 돼네? 내가 취재를 해보니까 자네가 한때는 충청도에서 최고의 싸울아비였다면서?"
"아이구, 선생님! 옛날 얘기는 지두 더 듣구 싶지 않구먼유!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지가 맴을 잡았으니께 이렇게 새사람이 되려는 게 아니겠시유?"
"그래그래, 아~주 좋아! 요즘은 '깜'도 안 되는 자들이 설치니 이 사부도 심사가 매우 불유쾌해요! 에잇, 잡추들 같으니라구!"
"아이구, 존경하는 선생님! 진정하시라니께유!"
그러는 사이에 술병이 모두 비고 본격적으로 낚시에 들어간 것이 자정을 막 넘긴 시간이었다.
그리고 근래 보기 드문 불상사(?)를 당한 것이 새벽 두 시쯤이었다. 왼쪽 대가 거의 30분이 다 되도록 소식이 없기에 떡밥을 갈아주려고 대를 드는 순간, 오른쪽 대가 덜컥! 하는 짧은 예신(?)을 남기고 마치 투창수가 던진 투창처럼, 궁수가 쏜 날살처럼 쌩하고 끌려 나가는 것이었다. 얼마나 힘차게, 날쌔게 끌고 나가는지 미처 잡을 새도 없었다.
“아니, 저럴 수가!”
“우왓, 선생님!”
사제의 입에서 똑같이 비명도 아니고 신음도 아닌 괴성이 터져 나왔다. 그럴 수가 없었다. 자동으로 제동이 걸리는 받침틀인데, 고기가 워낙 대어이니 전혀 제 구실을 못 했던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뒷줄을 매놓는 것인데, 하는 후회가 지진 뒤의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정말로 중요한 것은 잉어를 놓친 것도 아니고, 어제 낮에 내려오는 길에 새로 장만한 낚싯대를 잃어버린 것도 아니었다. 이 사람 평해조사가 그래도 명색 조력이 40년인데 낚싯대 한 대 잉어가 끌고 갔다고 해서 그렇게 가슴이 미어질 졸장부는 아니다. 또 그동안 이렇게 물고기들에게 빼앗긴 낚싯대가 어디 한두 대였던가.
정말로 가슴 아픈 이유는 월척인지 4짜인지, 아니면 잉어인지 가물치인지 정체를 불문하고 그 고기의 운명이 새삼스럽게도 애처로웠기 때문이다. 이 넓은 봉재지 어디를 가서 그 불쌍한 고기를 찾아 아가리에 걸린 바늘을 빼내줄 것인가 그것이 못내 안타깝고 가슴 아팠기 때문이다.
“낚싯대를 끌구 갔으니 이제 워쩐대유?”
충청도 제자가 물었다.
“어쩌긴, 짧은 대 하나만 가지고 하면 되지 뭐.”
“그러나 저러나 선생님, 그 괴기 말예유. 아가리가 찢어지도록 아플텐데 참말로 불쌍허구먼유! 지 맴두 오지게, 미어지게 쓰라리구먼유!”
“이심전심이구나!"
"이명박 맴이 전여옥 맴이라구유?"
"그게 아냐! 네 녀석 나이는 마흔이 넘었어도 이 사부를 닮아서 인정이 많다는 말이지. 불쌍한 고기를 위해서 한 잔 해야겠는데, 술 남은 건 없는고?”
“으흐흐흐! 이런 사건이 터질 줄은 몰렀지만, 지가 선생님 건강 생각혀서 반 병을 꼬불쳐 놨구먼유. 흐흐흐….”
“그럼 빨리 가져오게!”
그리고 두 사람의 사제는 좌대 방안으로 들어가 한두 시간을 자고 새벽에 다시 나왔다. 봉재지의 밤은 어느새 신새벽에서 먼동이 훤하게 터오는 새아침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여보게. 허 군. 다음부터는 꼭 뒷줄을 매놓아야겠지?”
“네, 선생님! 이 넘두 앞으론 꼭 뒷줄 가지구 다녀야겠네유! 잉어든 붕어든 무거운 낚싯대를 끌고 돌아댕길라문 주댕이가 얼마나 아프겄시유?”
“아이구, 이쁜 제자 놈! 말은 청산유수로 잘도 하네! 앞으로 말은 네가 선생 해라!”
“으흐흐…. 그런데 선생님, 여자들 히프가 왜 큰지 아셔유?”
“아니, 그건 또 무슨 난데없이 개 풀 뜯어먹는 소린고?”
“여자들 히프가 큰 이유는 요강에 빠지지 말라고 크다는구먼유. 이히히히, 또 여자들이 걸을 때 히프를 좌우로 많이 흔드는 건 가운데 중심잡는 추가 없어서 그렇다네유! 으흐흐흐! 이히히히히!”
“와하하하하! 거 말이 되는 소리구먼! 그런데 말씀일세. 그러고 보니 이 사부가 크거나 작거나 여인네 히프를 만져본지도 꽤 오래됐네 그려!”
"우히히히히!"
두 사제의 웃음소리가 밝아오는 봉재지 수면 위로 파문처럼 퍼져나갔다. 그런데, 물고기들에게도 귀가 있다면 혹시나 산타마리아 성당의 종소리처럼 들리지는 않았을까. 아니면 관음사의 풍경소리처럼 들렸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