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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중기 연대 미상 작품인, 변강쇠전. 소개하기 민망한 내용이 많은 변강쇠전. 먼 옛날 성풍속을 알만한 중요한 자료. 변강쇠전의 남녀주인공은 변강쇠와 옹녀. 변강쇠는 춘향전 강철 같은 성기로 여색을 탐한다는 뜻이다. 옹녀는 나무의 옹이와 같이 단단하면서도 관솔 같이 불이 잘 붙는 뜨거운 여자란 뜻. '변강쇠전의 시대적 배경은 언제일까?' 성풍속이 문란했던 이조 시대 후반인 듯. 임진왜란에서 병자호란 전후로 추정된다. 그 후 변강쇠전은 시대에 따라 바뀌어 온 듯. ...................................... ...................................... 변강쇠전 소설은 이조 서민들의 애환을 담은 판소리로도 발전. 병자호란 당시 불모로 잡혀갔던 환향녀의 애환도 담겨 있는 듯. 변강쇠전은 희극적으로 보이지만 속으로 비극적 구조를 감추고 있다. 등장인물 대부분 떠돌이 삶을 즐기는 인물들이 아니다. 삶의 터전을 잃고 살려고 온갖 짓 다 해야 하는 인물들. 등장인물들은 결국 죽거나 파멸하는 것으로 비극적 종말. 다른 판소리 작품과 마찬가지로 풍부한 문학적 표현력을 보여준다. 특히, 남녀의 성기를 묘사하는 기물타령 놀라운 상상력과 다양한 비유는 경이롭다. 이러한 외설적이고 감각적인 묘사, 당시 사회 현황을 적나라하게 표현. 생산 주체인 서민과 양반의 빈부격차. 오직 하층민 문화만 보여주는 '판소리' 변강쇠전. 고종때까지 공연된 ' 현재 전수가 끊어졌지만, 되살리려고 애쓰고 있다. 현재, 변강쇠전은 남원군 무형문화제 남원에는 '백장(변강쇠)공원'이 있다. 산청군 변강쇠와 옹녀의 옛 집터 하여 산청군 무형문화제라는 주장. 변강쇠 전을 관광자원화 하려는 남원군 산청 남원 간의 경쟁은 귀추가 주목된다. ..........변강쇠 전 (일명 : 가루지기전)................. 평안도 월경촌(月景村)에 계집 하나 있으되, 얼굴로 볼작시면 春二月 半開桃花 옥빈에 어리었고, 초승에 지는 달빛 아미간에 비치었다. 앵도순 고운 입은 빛난 唐彩 朱紅筆로 떡 들입다 꾹 찍은 듯, 세류같이 가는 허리 봄바람에 흐늘흐늘, 찡그리며 웃는 것과 말하며 걷는 태도 서시와 포사라도 따를 수가 없건마는, 사주에 청상살(靑孀煞)이 겹겹이 쌓인 고로 상부(喪夫)를 하여도 징글징글하고 지긋지긋하게 단콩 주어 먹듯 하것다. 열다섯에 얻은 서방(書房) 첫날밤 잠자리에 급상한(急傷寒)에 죽고, 열여섯에 얻은 서방 당창병(唐瘡病)에 튀고, 열일곱에 얻은 서방 용천병에 펴고, 열여덟에 얻은 서방 벼락맞아 식고 열아홉에 얻은 서방 천하에 대적(大賊)으로 포청에 떨어지고 스무 살에 얻은 서방 비상먹고 돌아가니, 서방에 퇴가 나고 송장 치기 신물난다. 이삼 년씩 걸러 가며 상부를 할지라도 소문이 흉악해서 한 해에 하나씩 전례(前例)로 처치(處置)하되, 이것은 남이 아는 기둥서방, 그 남은 간부 애부(愛夫), 거드모리, 새호루기, 입 한번 맞춘 놈, 젖 한번 쥔 놈, 눈 흘레한 놈, 손 만져 본 놈, 심지어(甚至於) 치마귀에 상척자락 얼른 한 놈까지 대고 결단을 내는데, 한 달에 뭇을 넘겨, 일 년에 동반 한 동 일곱 뭇, 윤달 든 해면 두 동 뭇수 대고 설그질 때, 어떻게 쓸었던지 삼십 리 안팎에 상투 올린 사나이는 고사(姑捨)하고 열다섯 넘은 총각도 없어 계집이 밭을 갈고 처녀가 집을 이니 황(黃) 평(平) 양도(兩道) 공론하되, "이 년을 두었다가는 우리 두 道內에 좆 단 놈 다시 없고, 여인국이 될 터이니 쫓을 밖에 수가 없다." 양도가 합세하여 훼가(毁家)하여 쫓아 내니, 이 년이 하릴없어 쫓기어 나올 적에, 파랑 봇짐 옆에 끼고, 동백기름 많이 발라 낭자를 곱게 하고, 산호 비녀 찔렀으며, 출유 장옷 엇매고, 행똥행똥 나오면서 혼자 악을 쓰는구나. "어허, 인심 흉악하다. 황평 兩西 아니며는 살 데가 없겠느냐. 三南 좆은 더 좋다더고." 노정기로 나올 적에 중화 지나 황주 지나 동선령 얼핏 넘어 봉산, 서흥, 평산 지나서 금천(金川) 떡전거리, 닭의 우물, 청석관에 당도하니, 이 때에 변강쇠라 하는 놈이 천하의 잡놈으로 삼남에서 빌어먹다 양서로 가는 길에 년놈이 오다가다 청석골 좁은 길에서 둘이 서로 만나거든, 간악한 계집년이 힐끗 보고 지나가니 의뭉한 강쇠 놈이 다정한 말로 묻기를, "여보시오, 저 마누라 어디로 가시는 거요." "삼남으로 가오." 강쇠가 연거푸 물어, "혼자 가시오." "혼자 가오." "고운 얼굴 젊은 나이인데 혼자 가기 무섭겠소." "내 팔자 무상(無常)하여 상부하고 자식없어, 나와 함께 갈 사람은 그림자뿐이라오." "어허, 불상하오. 당신은 과부요, 나는 홀애비니 둘이 살면 어떻겠소." "내가 상부 지질하여 다시 낭군(郞君) 얻자 하면 궁합(宮合)을 먼저 볼 것이오." "불취동성(不取同姓)이라 하니, 마누라 성씨가 누구시오." "옹(雍)가요." "예, 나는 변서방인데 궁합을 잘 보기로 삼남에 유명하니, 마누라 무슨 생이요." "갑자생(甲子生)이오." "예, 나는 임술생(壬戌生)이오. 천간(天干)으로 보거드면 갑은 양목(陽木)이요, 임은 양수(陽水)이니, 수생목이 좋고, 납음(納音)으로 의논하면 임술계해 대해수(壬戌癸亥 大海水) 갑자을축 해중금(甲子乙丑 海中金) 금생수(金生水)가 더 좋으니 아주 천생배필(天生配匹)이오. 오늘이 마침 기유일(己酉日)이고 음양부장(陰陽不將) 짝 배자(配字)니 당일 행례(行禮)합시다. " 이상히도 생겼구나. 맹랑히도 생겼구나. 늙은 중의 입일는지 털은 돋고 이는 없다. 소나기를 맞았던지 언덕 깊게 패였다. 콩밭 팥밭 지났는지 돔부꽃이 비치였다. 도끼날을 맞았든지 금바르게 터져 있다. 생수처(生水處) 옥답(沃畓)인지 물이 항상 고여 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옴질옴질 하고 있노. 천리행룡 내려오다 주먹바위 신통하다. 만경창파 조개인지 혀를 삐쭘 빼였으며 임실 곶감 먹었는지 곶감씨가 장물이요, 만첩산중 으름인지 제가 절로 벌어졌다. 연계탕을 먹었는지 닭의 벼슬 비치였다. 파명당을 하였는지 더운 김이 그저 난다. 제 무엇이 즐거워서 반쯤 웃어 두었구나. 곶감 있고, 으름 있고, 조개 있고, 연계 있고, 제사상은 걱정 없다." 저 여인 살짝 웃으며 갚음을 하느라고 강쇠 기물 가리키며, "이상히도 생겼네. 맹랑이도 생겼네. 전배사령(前陪使令) 서려는지 쌍걸낭을 느직하게 달고, 오군문(五軍門) 군뇌(軍牢)던가 복덕이를 붉게 쓰고 냇물가에 물방안지 떨구덩 떨구덩 끄덕인다. 송아지 말뚝인지 털고삐를 둘렀구나. 감기를 얻었던지 맑은 코는 무슨 일인고. 성정(性情)도 혹독하다 화 곧 나면 눈물난다. 어린아이 병일는지 젖은 어찌 게웠으며, 제사에 쓴 숭어인지 꼬챙이 구멍이 그저 있다. 뒷절 큰방 노승인지 민대가리 둥글린다. 소년인사 다 배웠다, 꼬박꼬박 절을 하네. 고추 찧던 절굿대인지 검붉기는 무슨 일인고. 칠팔월 알밤인지 두 쪽이 한데 붙어 있다. 물방아, 절굿대며 쇠고삐, 걸낭 등물 세간살이 걱정 없네." - 중략 - ...................... ...................... '가루지기 타령'에서 와전된 제주도 민요 '오돌또기' <가루지기>란 거적으로 말아 지고가는 송장이란 뜻. 서도(西道)의 옹녀(雍女)와 남도(南道)의 사내 변강쇠 각기 상당한 음란경력을 갖고있는 남남북녀(南男北女) 변강쇠와 옹녀는 개성 청석관에서 만나 함께 살게 된다. 둘이 지리산 속으로 들어가 살던 중 하루는 변강쇠가 장승을 패어 때다가 동티가 나서 장승처럼 서서 죽게된다. 옹녀가 장사만 지내 주면 누구든지 같이 살겠다고 하니 중·초라니·풍각쟁이들이 서로 덤벼들다가 모두 죽는다. 그러자 각설이패 마종꾼들이 송장 여덟을 나누어 가로지고 북망산으로 가는데 그 일행 가운데 마종 업뜩이 등에 변강쇠와 초라니의 송장이 등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하여, 그도 북망산 언덕 장승이 된다는..변강쇠전 줄거리. ......... 오돌또기. .......... '오돌또기' 뜻은 알 수 없으나 할미꽃(老姑草)이란 설이 있다. "오돌또기 저기 춘향 나온다 달도 밝고 내가 머리로 갈거나 한라산 허리엔 시러미 익은숭 만숭 서귀포 해녀는 바당에 든숭 만숭 제주야 한라산 고사리 맛도 좋고 좋고 산지야 축항 끝 뱃고동 소리도 좋고 좋고 성산포 일출봉 해돋는 귀경도 좋고 좋고 성내야 사라봉 해지는 귀경도 좋고 좋고 가믄은 가고 말믄은 말앗지 초신을 신어근 씨집 가랜 말이우꽈 청사초롱에 불 밝혀 들고 춘향의 방으로 찾아나 갈거나" 등구마을. 양전동 북쪽에 거북이 기어올라간 지형이라 '등구 마을'. 취락이 처음으로 형성된 시기는 언제인지 확실하지 않다. 이조 선조때 달성서씨가 대구에서 와서 살았고 광산김씨가 파주에서 와서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옛부터 등구마을에는 감나무가 많았으며 함양의 민요 가사가 그 사실을 대변해준다. "등구 마천 큰애기는 꽃감깍이로 다나가고 효성 가성 큰애기는 산수유 따러 다 나간다" '옹녀와 변강쇠가 살았다는 등구마을' '...옹녀는 들병장사 약장사 넉장질로 돈푼 모아놓으면 강쇠란 놈 고누두기 윷놀기에 막쳐먹기 돈치기 의복전당 술먹기에 계집 치기로 일삼는다. 이에 옹녀가 산중에 들어가 살면 노름도 못하고 강짜도 못할 테니 산속에 들어가 살자고 하여 지리산속을 찾는다.' '...첩첩 깊은 골짝에 빈집 하나 있어 들어가 사는데, 임진왜란 때부터 부자 하나가 피난해 살았던 집으로 오칸 팔작 빈집이었다. ...곧 변강쇠와 옹녀가 살았던 집은 함양이요, 함양에서는 유지들이 모여 전설을 추적하고 왜란 때 피난해 살았다는 구전의 골짝을 찾아 함양군 휴천면 월평리로 그 집터를 추정했다.' 함양군 휴천면 월평리 ..................................... (함양읍 조동마을에서 지안재 넘어 그러니까 즉, 지안재~ '두 년놈이 지리산중에 찾아가 등구 마천에 이르니', '지리산 등구 마천 강냉이 방아가 웬일인고', '소장은 경상도 함양군 등구 마천 산길을 지키는 장승의 아내로써' 등 '등구 마천'은 어디를 말하는걸까? 등구 마천은 휴천면 월평리는 변강쇠가 지리산을 찾을때 상황을 알려주는 타령 대목 '...약간 남은 살림살이를 짊어지고서 지리산중을 찾아가니, 첩첩한 골짜기에 기와집 한 채가 덜름 서있구나. 이 집은 어떤 부자가 임진왜란 때에 난리를 피해서 산중으로 들어와 이 집을 짓고 살다가 난리가 평정된 뒤 뜯어갈 수 없어 그저 두고 갔는지라...' 산속 폐기와집은 마천면 구양리뒷산 '빈대궐터' 빈대궐터란 가락국 마지막 왕인 구형왕 대궐터 여기서 가까운 왕산 돌 피라미드가 구형왕 무덤 빈대궐터란 등구사(登龜寺)를 뜻한다는 또 다른 주장. 1489년 김일손은 때마침 많은 비가 내려 등구사에 갇히게 된 것이라 한다. 이곳에는 지금도 '등구마을 및 등구폭포도 있다. 변강쇠와 옹녀는 휴천면 월평리에 살았던 것일까? 아니면, '그 두 마을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변강쇠와 옹녀가 살았던 곳은 곧 등구사가 자리했던 빈 대궐터였을듯 싶다. 이곳에서는 그들의 쌍분이 있는 오도재가 가깝고, 산등성이 넘어 백장암계곡도 오고가며 노닐었을듯. 그런데 <가루지기 타령>에 등장하는 '등구 마천'을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벽송사 골짜기란 견해도 있다. 그곳 서암정사는 벽송사 서쪽에 있는 암자를 말하는데 천왕봉에서 칠선계곡을 내려다보면 '옥녀개화형' 이곳도 유사한 지형으로서'옥녀개화형'이라 한다. 지리산으로 찾아드는 길 중 하나 함양에서 마천으로 넘는 지름길 고개마루(해발773m) 마천 북쪽 삼봉산과 휴천 북쪽 법화산이 만나는 지점. 옛부터 함양 마천 사람들이 장을 보러 다녔던 '삶의 길'. 청매 인오(1548~1623) 스님이 오가며 득도해 명명된 하봉에서 반야봉까지 70리 능선 전망대인 옛부터 지리산을 찾았던 함양 관리들이 넘나들던 고갯길 1472년 8월 김종직(金宗直)은 귀가 길에 그의 제자 김일손은 1489년 4월 김일손은 이 등정을 <두류기행록>으로 남겼는데, 그가 종자가 “말(馬)에서 내려 절을 해야 합니다” 라고 말했다. 누구에게 절하느냐 묻자 그가 답하기를 “천왕(天王)입니다” 나는 천왕이 무엇인지 살피지 않고 말 채찍질하여 지나쳤다. 김일손은 말이 가는 대로 몸을 맡겨 등구사 도착 다큐멘터리 르포 <지리산> 저자 부산 언론인 1987년 3월17일 함양읍을 출발하여 김종직과 김일손이 넘던 옛길을 밟아보기 위해서였다. 제한역(蹄閑驛)이 있던 조동마을에서 지안재를 넘어 살구징이(월평리)에 이르자, 한 사내가 길을 막았다. "여기는 못가오, 여기가 어어디라고 온단 말이여?” 그는 사내가 길을 가로막았던 까닭을 곧 알게 됐다. 두길 억새풀이 길을 덮고, 나무가지가 뒤엉킨 오솔길 삼백년 고목 다섯 그루, 허물어진 돌담 안 목없는 석상 그 옆에 悟道山神靈之神(오도산신령지신)이란 돌비석 그가 조동마을(제한역)에서 세 시간 꼬박 올랐던 오도재 함양군은 1988년~ 2003년 11월30일 2차선 관광도로 완공 1023번 지방도로는 지리산 가는 길이란 별칭을 달고 있다. 오도재에는 주차장, 지득정 관음정 두 전망대. 유별나게 많은 장승들과 성문까지 세워 놓았다. 오도재에서는 변강쇠와 옹녀의 체취가 물씬하다. 판소리 ‘가루지기 타령’에 의하면 오도재 넘어 지리산으로 들어온 그들. 주막 옆에 옹녀샘, 변강쇠와 옹녀 묘도 만들어놓았다. 묘 앞에는 최근에 변강쇠와 옹녀가 발가벗고 합일(合一) 돌 조각에서 변강쇠의 거대한 성기가 그야말로 압권이다. ................................... .................................... '지리산 제1문' 건립 기공식을 가진 경남 함양군 마천면과 휴천면 경계인 오도재 정상은 지리산 관문. 2006년 9월 5일 기관 단체장과 주민 등 200여명이 참석 함양읍에서 휴천, 마천면을 거쳐 지리산을 오르는 오도재 정상에 성곽 90m와 함께 높이 8m,너비 8m의 전통양식 성문 '지리산 제1문'을 2007년 10월까지 관광 명소로 꾸밀 계획. 오도재는 하봉에서, 중봉, 천왕봉, 제석봉, 벽소령 반야봉 등으로 이어지는 능선 전망대. ..................찾아가는 길....................... 24번 국도를 타고 남원시 인월면 방면으로 가다가 난평리를 지난 곳에서 1023번 지방도를 타야 한다. 지안고개를 넘고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오도재 오도재휴게소에서 지리산 능선 감상 후 마천면 벽송사와 서암정사를 답사해보자 칠선계곡 출발점이 되는 추성리 입구 매표소를 거치기 직전 왼쪽으로 산길 그곳으로 오르면 벽송사와 서암정사 ....................................... 삼봉산(三峰山) 경남 함양군 함양읍·마천면과 전북 남원군 산내면 경계선 산. 높이 1,187m 소백산맥 남단에 솟아 있고 주위에 백운산·법화산·상산 등이 있다. 동서로 길게 뻗어 있으며, 전 사면이 급경사.
[ 삼봉산& 오도재 ]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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