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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사찰순례. 내금강 표훈사. 구룡폭로 (2)
글/김형근
구룡폭포 가는 모습
구룡폭포배경으로 북한주민들과 함께
금강산에는 9월 3일 도착하였다. 금강산 호텔이나 외금강 호텔에 갈 것으로 생각을 하였는데 막상 도착한 곳은 금강산 가족호텔이었다. 현대가 금강산 관광사업을 하던 시기에 신혼부부나 가족 단위로 와서 묵던 호텔이었고 바로 앞은 장전항으로 배로 와서 수상호텔에서 투숙하던 그곳이었다. 필자도 하루 밤 지낸 적이 있는 수상호텔은 그 모습 그대로 있었다. 우리 일행은 이곳에서 이틀을 지냈다. 10월 4일 2차 3차 순례시 금강산 해설을 맡았던 김금순 안내강사와 다시 만나게 되었다. 올해 10년째 안내 강사를 한다는 김금순씨를 모든 참가자들은 미인이라고 좋아하였고 이 강사를 오게 한 것이 이 참가단 단장인 필자가 지금까지 한 일 중에서 제일 잘한 일이라고 칭찬하였다. 김 강사는 본인 소개를 멋들어지게 하고 난 후에 우리는 마치 전에 잘 아는 사람처럼 아주 친밀감을 느끼게 되었다. 비가 왔지만 우비를 입고 우산을 쓰고 모든 참가자는 김 강사와 함께 외금강 구룡폭포와 해금강, 삼일포 관광을 하고 이어서 5일에는 내금강으로 들어갔다. 80살이 넘은 참가자 2명이 있었지만 모두 다 빗속을 뚫고 올라간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돌로 잘 포장된 도로 때문이었다. 유홍준은‘나의 북한 문화유적답사기’에서“금강산에 와서 내가 건축적으록 가장 감동을 받은 것은 산길이었다. 옥류동이건 내금강이건 만물상이건 밟고 오르는 길에 포장한 박석 길을 보면 돌 하나 하나의 선택과 시공에 온갖 정성을 다해 아름다움이 넘쳐 흐른다. 금강산의 박석길은 옛날엔 스님들이 손을 보기도 하고, 해방 전에는 마을의 석수쟁이들이 매만졌는데 그들의 문화 속에는 금강산을 사랑하고 자랑하는 마음, 자연을 다치지 않게 하면서 자연을 다듬는 정성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라고 썼다. 북한 도로는 비단 금강산 뿐만 아니라 구월산, 칠보산 모든 산을 가보아도 마찬가지로 잘 다듬어져 있다. 우리는 2주 동안에 차로 북한의 많은 지역을 다녔는데 여행기간 중에 비가 많이 왔기 때문에 구멍나고 훼손된 비포장 도로를 보수하는 북한 주민들을 여기 저기에서 많이 볼 수 있었다. 다행이 비는 많이 오지 않았다. 이런 날씨 때문에 봉우리에는 구름들이 엉긴 모습은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았다. 김금순 강사는 이런 날씨에만 볼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장면이라고 설명를 하였다. 우리 일행 외에도 구룡폭포를 오르는 많은 북한 주민들을 만날 수 있었고 구룡폭포를 정면에서 볼 수 있는 관폭정에서는 북한주민들과 함께 기념촬영도 했다.
금강산 가족호텔
금강산은 크게 외금강, 내금강, 해금강으로 분류를 한다. 외금강 지역에 만물상이 유명하다. 이곳은 산행을 좋아하는 사람들, 자연을 그리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그러나 여기에는 사찰이 없다. 그래서 대부분 불교신자들은 내금강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필자도 1995년부터 금강산을 6~7번을 방문하였지만 만불상의 귀면암까지만 잠깐 올랐고 한번도 만물상을 오르지 않았다. 옛부터 금강산 구경을 하는 사람들은 내금강을 기본으로 하여 관광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유홍준의 답사기에 의하면 “조선시대 문인들의 금강행에도 일정한 탑승 코스가 있었다. 금강산의 종주 코스는 내금강, 장안사에서 만폭동을 거쳐 안문재(내무재령) 너머 유점사에 이르는 길이 기본이었다.”라고 되어 있다. 우리는 9월 4일 일찍부터 내금강으로 들어갔다. 그즈음 매일 아침 날씨를 살피는 것은 나의 하루 일과의 시작이었다. 오늘은 어제와 달리 장전항을 둘라싸고 있는 산과 마을들이 확연하게 보였다. 하지만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덮여 있었다. 호텔 경비원은 금강산에서 이런 날씨에는 비가 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 이 날은 비가 오지 않았다. 우리 일행은 표훈사에서 정양사를 가는 사람들과 마하연터와 묘길상으로 가는 팀으로 나누져야 하기 때문에 김명주라는 안내 강사를 한 사람 더 추가하여 함께 갔다. 비가 멈춘 후의 구름이 금강산의 여러 봉우리에 걸려있는 다양한 모습에 참가자들의 감탄이 쏟아졌다. 그러자 김 강사는 금강산에 와서 아껴야 할 것이 3가지가 있다. 무엇인지 맞추어 보라고 했다. 우리는 알지 못했고 김 강사는 첫째는 카메라 밧데리, 둘째는 감탄을 아껴야 한다. 셋째는 체력을 아껴야 한다고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설명을 했다. 김금순 강사와 김명주 강사가 번갈아 가면서 하는 해설을 들으면서 우리는 내금강으로 들어갔다. 가면서 금강산 주봉인 비로봉으로 가는 자동차 길이 보였다. 전에는 보지 못했는데 차로 비로봉 정상까지 가는 길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금강산 3고탑 중의 하나인 장연사 고탑을 보고 싶었지만 시간상 그냥 통과할 수 밖에 없었다. 장안서 터를 잠깐 보고 표훈사에 갔다. 차에서 내리면 코앞에 표훈사가 있고 맨 먼저 2층 누각형식으로 된 능파루가 보인다.
표훈사에는 2명의 스님이 있었는데 새로운 스님들이었다. 주지는 청학스님과 젊은 백운 스님이었다. 필자는 2013년, 2015년 방문에 이어 이번이 3번째 방문이다. 내금강을 들어올 때마다 표훈사를 방문하였으니 벌써 내금강을 3번째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하루 만에 잠깐 방문하여서는 내금강의 진면목을 볼 수가 없다. 옛 문인들의 금상산 여정은 보통 내금강에서 만폭동을 비롯한 명승지를 닷새 정도 다 둘러보고 안문령 너머 유점사에 가서 사나흘 놀다가 온정리로 나오면 대개 여기서 지쳐 외금강은 들리지 못하고 삼일포, 해금강, 총석정을 보는 것으로 금강산 유람을 마친다고 한다. 언젠가는 최소 3일 정도 시간을 내어 비로봉도 오르고, 내금강의 금장암 사자탑, 장연사터 3층석탑, 연화대 등을 가보고 또한 부도와 공덕비를 꼼꼼히 보고 싶고, 스님들과 충분한 대화를 하고 싶다.
우리는 이곳에서 향을 사르고 절도 하고 2 스님과 함께 간략하게 예불을 하고 주지스님으로부터 표훈사의 설명을 들었다. 주지 스님의 설명에 의하면 658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2년 걸려 670년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표훈사는 현재 공사중인데 비로 인해 오른쪽 구석이 빗물이 흘러내린 자국이 보였다. 표훈사에 대해서는 그 동안 2차례에 걸쳐 소개하였으니 이번에는 생략한다.
표훈사 예불
표훈사라는 이름과 관련있는 표훈스님은 의상대사의 십대제자의 한 사람으로서 도력이 매우 높았으며 특히 화엄학에 깊은 깨달음이 있어서 신라 십성(十聖)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범어사 창건사적에 올라 있는 것으로 보아 범어사와 깊은 인연이 있는 스님이다. 의상 스님을 도와 범어사를 창건하고 화엄사상을 전파하는 데도 진력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751년 신라 경덕왕 10년에는 김대성이 불국사와 석불사를 짓고 표훈과 신림 두 스님을 청하여 있게 하였다.
기념촬영을 마치고 우리 일행은 2게조로 나누어 한 조는 김명주 안내강사의 인솔로 표훈사 뒤 정양사로 갔고 필자를 포함한 한 조는 김금순 안내강사를 따라 금강굴을 지나 만폭동 계곡으로 들어가 보덕암, 마하연터, 묘길상을 보러갔다 필자는 3년 전인 2013년에 이곳을 방문하였는데 당시에는 보덕암과 묘길상을 갔는데 마하연터와 칠성암, 불지암을 가보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우리나라 제일의 선방이었던 마하연 터를 꼭 가보고 싶었다.
산길은 어제 구룡폭포 오르는 길보다도 더 쉬웠다. 하지만 보덕암 오르는 길은 매우 가파르다. 만폭동 계곡을 따라 오르다 보면 불교인들에게 사진이나 그림을 통해 널리 알려진 보덕암을 볼 수 있다. 저 멀리 낭떨어지에 기둥 한 개에 의지하여 서 있는 암자다. 평양을 비롯해 금강산, 원산, 개성 등 많은 곳에서 보덕암을 소재로 한 그림이나 자수로 만든 작품을 팔고 있다. 깊은 산속 절벽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보덕암은 누구에게나 신비함을 느끼게 한다. 고구려 시대에 보덕스님이 암자를 짓고 그 아래 굴에서 기도를 하였는데 그 굴 앞에 누각을 세운 것이 현재의 보덕굴이고 원래 보덕암은 한국전쟁중에 폭격으로 사라졌다. 안내판에는 기둥의 높이가 9미터로 되어 있으나 김금순 안내 강사는 그것은 잘못된 표기이고 7.3미터라고 한다.
인터넷 검색을 하면 보덕굴에 대한 많은 시와 전설이 소개되어 있다. 이중에서 보덕굴에 대해 쓴 양사언 시와 보덕 각시와 파랑새 전설을 소개한다.
鑑湖堂 (蓬萊 楊士彦)問君何事卜閑居 天下名區盡不如沙白海靑松翠路 芙蓉萬朶畵吾廬보덕굴 (봉래 양사언)구리 기둥 받친 암자하늘에 떠있고흩어진 봉우리들하얗게 하늘에 기댔다신선깊은 굴에 노닐며 살아청란에 나 태워자주빛 안개속 달린다.
보덕암
보덕각시와 파랑새 전설
옛날에 희정이라는 젊은 중이 금강산에 들어와 표훈사 건너편 송라암에서 천일수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어느 날 경전을 읽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꿈에 한 여인이 나타나서 자기의 이름을 보덕각시라고 하였다. 그는 뜻밖에 절세미인을 만나 너무 황홀해진 나머지 자신이 수도승의 몸이라는 것도 까맣게 잊고 그녀에게 사랑을 느껴 그녀를 덥썩 안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시지 말라며 몸을 빼더니 후에 만폭동에서 다시 만나자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어디론가 사라졌다.
희정이 화들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다. 그러나 꿈이 아니었던 것처럼 보덕각시의 아리따운 모습이 너무나 생생해 눈앞에 어른거려 그는 경전을 읽어도 하나도 머리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생각다 못해 무작정 만폭동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금강문을 지나 한참 올라가니 주위의 경치는 점점 절경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금강대를 옆에 두고 얼마쯤 더 가니 개울 한복판 큰 바위 위에 널어놓은 하얀 수건이 눈에 띄었다. 웬 사람이 여기에 왔을까 하고 가까이 다가가 보니, 꿈에 본 그 보덕각시가 거기서 머리를 감고 있었다.
희정은 너무나 놀랍고도 기뻐 큰 소리로 이름을 부르며 달려갔다. 그러나 보덕각시는 희정을 보자 수건을 걷어 가지고 개울 위쪽으로 바람처럼 사라지는 게 아닌가. 희정은 계속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따라갔으나 어느새 그녀는 온데 간데 없었다.
희정은 어이가 없어 넋을 잃고 있는데, 어디선가 파랑새 한 마리가 날아오더니 따라오라는 듯이 날개를 파닥이며 날다 법기봉 아래 절벽에 있는 작은 굴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희정은 저 굴이 이상하다 싶어 풀뿌리와 나뭇가지를 붙잡으며 간신히 그 벼랑을 기어 올라갔다. 그리고 겨우 굴 입구에 이르러 안을 들여다보니 파랑새는 온데 간데 없었다. 다만 그 안에는 작은 부처가 하나 앉아 있었고, 그 앞엔 불경이 놓여 있었다.
그제서야 희정은 보덕각시가 관음보살의 화신이며, 자기의 수업을 시험하기 위해 보덕 미녀로 현신한 것임을 깨닫고, 거기에다 암자를 짓고 살면서 오로지 수도에만 정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희정은 훗날 훌륭한 학자승으로 이름을 날리었다고 하며 그 굴을 보덕굴이라 했다고 전한다.
마하연터 방문
보덕암에서 니려와 마하연터를 향해 다시 산행을 시작하였다. 우리 일행은 버지니아에서 온 김조명, 제임스 윤, LA 거주 정진옥거사, 필자, 리차드 전, 안내원 2명과 사진사, 김금순 안내인이었다. 마하연은 북한에서 만든 표지판에 의하면 창건에 대한 내용은 없고 ‘오랜 역사를 가진 마하연’이라고 되어 있다. 김금순 안내강사를 비롯한 우리 일행은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잿더미로 변해 잡초만 무성하고 주춧돌만 남아있는 마하연 터를 보면서 웅장했을 전각을 볼 수 없는 아쉬움과 함께 한 숨만 내뿜었을 뿐이었다.
본적도 없는 마하연을 인터넷 검색을 통해 그 내력을 보면서 소개한다.
검색 1
마하연은 범어의 마하야나(Mahayana)의 음역이고 의역하면 ‘대승(大乘)'이다. ‘마하(大)'는 크다는 뜻이고 ‘야나(乘)‘는 생사의 고해로부터 열반의 피안으로 실어나른다는 뜻이다. 마하연寺는 화악지탁선사(1750~1839)의 《마하연중건기》에 따르면 신라 의상대사가 창건했던 고찰이다. 신라ㆍ고려때의 마하연 연역은 기록이 없다.1831년 월송선사의 중창 불사로 전각과 요사채 50여동이 중건됐고 1848년 대운선사가 절 뒤에 선방을 짓고 ‘마하선실(摩訶禪室)'이라 했다. 1923년 화응정진선사가 들어와 정진하다가 1932년 59칸의 당우를 중창하는 3차 중건불사로 장엄한 선사(禪寺)의 위용을 갖추었었다.낙파인성선사(1794-1877)는 27세 때 마하연에 들어와 평생 산문 밖을 나가지 않은 채 참선만 했고 율봉청고ㆍ화담경화선사 등도 마하연에서 주로 정진했다. 근세에는 만공월면선사(1871~1946)를 조실로 모시고 지월ㆍ고송 스님 등이 마하연 선실에서 정진했고 봉암사 결사의 주역이었던 자운(1911~1992)ㆍ성철 스님(1912~1993)과 금봉 스님 등도 마하연 선방을 거쳤다. 고송 스님은 생존시 “마하연 선방은 200여명이 앉는 큰 방이었는데 말석에서는 앞의 조실스님이 까마득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검색 2
1915년 마하연사 선방에는 대중이 서너 명밖에 안 되었다. 경봉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절이 소유하고 있는 경작지나 신도들의 보시가 시원찮았으므로 대중은 잡곡밥, 그것도 하루에 세홉을 넘지 못했다. 그래서 대중은 공양을 ‘세 홉 밥’이라고 불렀다. 동방 제일의 선원이라는 마하연사 선방의 형편치고는 곤궁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니 객승이 두 번을 방부 들이기는 미안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대부분 한 철 안거가 끝나면 다른 선방으로 떠나야 했다. 훗날 도우가 된 동산은 경봉이 떠나고 난 뒤 1922년에 한 철을 안거했다.
마하연사 선방이 여법하게 제자리를 잡은 것은 1933년 만공이 조실로 들어와 앉으면서부터였다. 이후 1939년 하안거 때는 설석우薛石友, 김백운金白雲, 입승 이순호李淳浩(청담)을 비롯해 스물 세 명의 대중이 정진했다. 1940년 하안거 때는 성철과 자운이 정진했는데, 선덕은 신유해申幼海, 입승은 효봉의 은사 석두石頭 스님이었다. 마하연사 선방은 1941년에 최절정기를 맞았는데, 그당시 대중이 쉰세 명이었다. 당시의 상황을 훗날 춘명春明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당시 마하연 선원은 고등선원으로서 선객 쉰세 명으로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선원에 방부를 들이려면 3개월 전에 미리 신청을 해야 했습니다. 마하연은 비로봉 중턱에 있어 교통이 아주 불편했습니다. 그곳으로부터 30리 떨어진 곳에서 모든 물자를 인력으로 운반해야 했기 때문에 백미 세 두이상을 짊어지고는 가지 못하는 곳이었습니다. 당시는 대동아 전쟁 중이라 모든 사람들의 생활이 극도로 빈곤해 모든 물자는 배급제로, 식량은 잡곡이나 깻묵 등으로 보충할 때였습니다. 강원 학인들은 잡곡밥도 양이 차게 먹지 못하고 세 홉 밥에 허덕이고 있었는데, 마하연 선원에서는 각자 양껏 입쌀밥에 송이국과 여러 채소 반찬으로 공양하고 있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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