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1
A. 연구의 동기와 목적 1
B. 연구의 방법과 범위 3
Ⅱ. 중국문화의 특성 5
A. 형성요인 5
1. 지리적 조건 5
2. 역사적 배경 6
3. 사상적 배경 7
B. 특성 10
1. 사고 구조 10
2. 종교관 12
3. 기질 15
4. 금기 17
Ⅲ. 중국선교의 역사와 중국교회 21
A. 중국선교의 역사 21
1. 당나라 시대의 경교 선교 21
2. 몽고 때의 서구 선교 23
3. 16세기 예수회 선교 24
4. 19세기 개신교 선교 25
B. 개신교의 중국선교 27
1. 초기의 선교사들 27
2. 네비우스의 선교 30
3. 허드슨 테일러의 선교 32
C. 중국교회의 현황 35
Ⅳ. 개신교의 중국선교에 대한 문화적 평가 38
A. 자문화중심주의(Cultural Ethnocentrism) 41
1. 문화적 우월감 42
2. 기독교와 서구문화에 대한 혼동 43
B. 중국문화의 특성에 대한 몰이해 45
1. 문화적 자존심을 고려하지 않은 선교 45
2. 변화를 강요한 선교 50
3. 지도자의 양성을 간과한 선교 52
C. 복음과 중국문화의 충돌에 대한 인식과 대처의 부족 56
1. 혼합주의와 배타주의의 충돌 57
2. 실리적 현실주의와 영적 미래지향적인 가치관의 충돌 58
3. 가족주의와 개인주의의 충돌 59
4. 국가지상주의와 하나님 지상주의의 충돌 61
Ⅴ. 결론 66
참고문헌 71
Ⅰ. 서 론
A. 연구의 동기와 목적
중국은 1995년 현재, 세계인구의 약 21.2%에 해당하는 11억 9,850만 명의 인구를 가진,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큰 나라이다. 통계청,「중국의 주요경제사회 지표」(서울: 강문인쇄사, 1995), p. 21.
그러나 국가에 등록하지 않은 무적아(無籍兒, 黑核子) 중국정부의 “한가족 한자녀 갖기운동”의 부작용으로 호적에 등록하지 못한 아동이며 이들은 교육, 의료보험 등의 혜택을 받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까지 포함한다면 중국인구는 대략 14억 혹은 15억으로 추정되고 있다. 노봉린 박사 중국어문선교회 1993년 2월 정기 세미나 내용 중 (재인용, 은향란, p. 3)
이러한 중국대륙에 일찍이 복음이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 동안 중국 선교를 위한 수많은 선교사들의 헌신과 선교본부의 지원, 또 장구한 선교기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중국에서 한 번도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J. Herbert Kane, Understanding Christian Missions (Michigan: Baker Book House, 1978), p. 207.
중국에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한 시도는 지난 1300년에 걸쳐 크게 4번 있었다. 당나라 때 들어왔던 경교를 시작으로 원, 명, 청 그리고 근대에 이르는 장구한 세월과 수차에 걸친 큰 계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천주교와 개신교 모두, 어떤 특정한 시기에도, 중국 전체인구의 1%이상을 넘은 적이 없었다. Robert G. Orr, 신대균 역,「현대중국의 종교」(서울: 로출판, 1987), p. 7.
그 후 중국은 1949년 공산주의 혁명으로 죽의 장막에 가려져 선교가 불가능하게 되었으며 그나마 혁명 이전에 세워진 교회들도 혹독한 마르크스주의의 핍박가운데서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70년대 말, 중국의 실권을 장악한 등소평은 괄목할 만한 개혁과 개방을 시도하였으며 이러한 개혁의 일환으로 82년에 제정된 헌법에 종교의 자유를 명시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중국은 아직도 마르크스 사상을 쫓는 공산주의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또 헌법의 종교자유 조항이 많은 문제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에 대한 선교는 결코 유보할 수 없는 단계이다. 그러므로 차제에 지금까지 진행되어 왔던 중국선교에 대하여 철저한 연구가 요청되며, 이에 따라서 과거의 선교사역에 있었던 오류를 다시 반복하지 않는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선교가 가장 적절한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선교를 평가하는데는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정치적인 면에서, 경제 사회적인 면에서, 또 신학적인 면에서 선교의 평가가 가능하겠지만 무엇보다도 더 중요한 방법은 문화적인 방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문화는 선교와 서로 뗄 라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교는 엄밀히 말해서 타문화권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전호진, 「선교학」(서울: 개혁주의신행협회, 1994), p. 141.
그러므로 선교사에게 있어서 선교지의 문화연구는 전쟁을 수행하는 군 지휘관이 지도를 놓고 작전을 연구하는 것과 같이 필수적인 일이다. 장중열, 「교회 성장과 선교학」 (서울: 성광문화사, 1988), p. 117.
선교사는 특정 문화의 우위사상을 배제하며 모든 문명의 개별적 특수성을 인정하는 문화인류학을 통하여 선교지의 특수성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적절한 선교정책을 수행할 수가 있는 것이다. 정준기, 「선교적 문화비평」(서울: 새한기획출판부, 1993), pp. 228-229.
그러므로 “훌륭한 선교사란 훌륭한 인류학자” Eugene A. Nida, Customs and Cultures (New York: Harper and Row Pub., 1954), p. 11. (재인용, 전호진, p. 141)
라고 말한 선교와 문화의 최대 권위자 나이다(Eugene A. Nida)의 말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선교지의 문화에 대한 철저한 연구가 선행되지 않은 선교활동은 그것에 부어진 모든 자원을 무력화시키며 선교의 열매를 부실하게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본 논문은 19세기 초에서부터 20세기 중반에 이르는 개신교 중국선교의 성과가 미미하게 된 원인을 선교사들의 문화 이해의 부족으로 보고 그 동안의 개신교 중국선교에 대하여 문화적 접근을 시도하였다.
B. 연구의 방법과 범위
본 논문에서는 Ⅱ장에서 중국의 문화가 형성되어 온 배경과 중국문화의 특성을 살펴본다. 중국문화가 형성되는데 기초가 된 중국의 지리적인 조건과 역사적인 배경, 또 중국인의 정신을 지배해 온 그 사상적인 배경이 무엇인지를 논하고 중국문화의 특성을 중국인의 사고구조, 종교관, 중국인의 기질과 금기로 나누어 연구한다.
다음 Ⅲ장에서는 지금까지 진행되어 왔던 중국에 대한 기독교 선교의 역사와 방법을 약술한 후, 그 선교의 결실인 오늘의 중국교회의 현황을 살펴본다. 중국선교의 역사는 당나라 시대의 경교 선교로부터 20세기 중엽의 개신교 선교까지를 개신교를 중심으로 간단히 개관해 보며, 다음으로 그 모든 선교의 결실인 현재의 중국 기독교의 실태를 조명하여 보았다.
다음으로 Ⅳ장에서는 현재까지 개신교 선교사들이 중국선교에 사용한 선교방법을 문화적인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논하였는데 그 논거의 기준은 선교사들의 문화이해와 적용에 대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Ⅴ장에서는 결론과 제언을 약술하였다.
그리고 본 연구에서 개신교의 중국선교를 비판적으로 보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먼저, 중국선교는 선교사들의 헌신과 막대한 지원, 그리고 긴 선교역사에도 불구하고 그 성과가 전 인구의 1%에도 미치지 못했으며, 또 교회가 토착화하지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다음은 중국의 기독교는 한번도 중국의 국민들에게 호응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계속적인 저항을 받아왔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독교에 대한 저항이 정부나 권력으로부터 왔다기 보다는 오히려 일반 국민들이 저항의 주체였다는 사실은 중국선교에 대한 심각한 문제점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Ⅱ. 중국문화의 특성
A. 형성요인
1. 지리적 조건
중국속담에 “산에 기대면 산을 먹고 강에 기대서는 강을 먹는다” 라는 말이 있다. 모든 민족문화에 지리적인 환경이 미치는 영향이 대단히 크다는 의미이다. 이수웅 김경일,「중국문화의 이해」(서울: 대한 교과서, 1995), p. 5.
중국의 북단은 북위 57도의 흑룡강성이며 남단은 북위 18도인 해남도이다. 이 위도 차는 39도이며 거리로는 4,300km에 달한다. 또 중국의 동단은 러시아 하바로크시 대안의 동경 135도이며 서단은 신강 위그루 자치구까지 동경 75도로 약 4시간의 시차가 난다. Ibid, p. 6.
이와 같이 광활한 중국대륙은 동남으로는 바다, 북과 남으로는 사막과 고원이라는 천혜의 지형조건을 구비함으로서 넓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그들만의 고유한 단일문화 형태를 일구어 내고 또한 간직할 수가 있었다. Ibid, pp. 6-7.
그러나 이러한 지리적 조건은 문화적 통일이라는 긍정적인 면이 있는 반면에 폐쇄적이고 자기 우월적인 민족정서를 형성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Ibid., p. 7.
중국의 기후는 지역에 따라 다양하다. 북부는 춥고, 남부는 더우며, 중부는 온화하다. 그래서 동북지방에는 삼림들이 많고, 서부에는 보리밭이 많으며, 몽고 및 서북부는 황무지가 많다. 강문석,「중국대륙선교」(서울: 칼빈서적, 1995), p. 31.
이러한 중국의 척박한 기후와 풍토는 중국인으로 하여금 근로 분투하고 노고를 견디는 민족이 되는데 기여하였다. 錢穆, 차주환 역,「중국 문화사 총설」(서울: 한국번역도서주식회사, 1959), p. 8.
중국의 문화는 처음부터 현재까지 농업 위에 세워져 있으며, 인류문화는 농업문화에서 상업문화로 진보하여 간다는 서방의 견해에 동조하지 않고 인류의 생활은 영원히 농업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원칙을 고수하여 왔으나 Ibid., p. 19.
70년대를 기점으로 서서히 변화되고 있다.
2. 역사적 배경
첸 무는 중국의 역사를 넷으로 분류하였다. 제1기는 상고부터 선진(先秦)까지이며, 이 시기에는 중국민족이 통일되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 때 중국민족은 화하족(華夏族)을 중심으로 동이(東荑), 남만(南蠻), 서융(西戎), 북적(北狄) 등의 부족을 받아들여 더 큰 민족을 형성하였다.
제2기는 진 한(秦漢)부터 남북조(南北朝)에 이르는 시기인데 이 때에 다시 흉노(凶奴), 선비(鮮卑), 저강(底羌) 등, 또 다른 족속을 흡수하여 더 큰 민족을 이룬다.
제3기는 수, 당부터 원대 말기에 이르는 시기로서 거란, 여진(女眞), 몽고(蒙古)를 흡수하여 명대에 전성기를 이루게 된다.
그리고 제4기는 만주인의 입관(入關)으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시기로서, 이 시기에도 만주족(滿洲族), 강족(羌族), 서정족(西藏族), 회족(回族), 묘족(苗族), 요족(搖族) 들을 흡수하여 융화시켰으며 이러한 추세는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Ibid., p. 1.
이와 같이 중국민족은 서방과 달리 민족의 융화와 국가의 융성이라는 대공사를 벌써 선진시대에 종결시켰으며 Ibid., p. 32.
현재의 중국민족은 전체 인구의 92%인 한족(漢族)을 중심으로 55개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소수 민족중 가장 큰 민족은 쫭족(壯族)으로 18,489,630명이고, 가장 작은 민족은 2,312명의 뤄바족(珞巴族)이다. 한윤숙, “오늘의 중국 소수민족” 「중국교회와 선교」(서울: 중국복음선교회, 1996), 창간호, p. 161.
그리고 한족(漢族)과 후이족(回族) 그리고 만족(滿族) 중 90% 이상은 보통어(북경어, 표준어, 만다린)를 구사하고 기타 53개 민족은 각각 고유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은향란, “삼자교회를 통한 중국선교 연구방안”, 석사학위논문, 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1995, p. 4.
그리고 중국은 외부의 침략도 많이 받아왔다. 중국에는 전란이 항상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으므로 정권이 자주 바뀌고 수도가 자주 바뀜으로 중국인의 의식은 정치는 무상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농후하게 되었다. 강문석, op. cit., p. 34.
3. 사상적 배경
중국인을 지배하는 사상은 중화사상과 유교이다. 중화(中華)라는 말은 ‘중(中)’은 지리적 문화적인 중심을 의미하고 ‘화(華)’는 뛰어난 문화를 의미한다. 姬田光儀 외 공저, 일월서각 편집부 역, 「중국 근 현대사: 아편전쟁에서 1982년까지」(서울: 일월서각, 1984), p. 14.
중국인은 천자(天子, 王)를 절대적인 존재로 생각하며 천자가 있는 곳을 세계의 중심으로 보았다. 중국이 인류문화의 원천지이며 중국의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일수록 문명이 저급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타민족에 대하여 우월감을 가지고 자신들을 세계의 중심, 즉 중화(中華)라고 부르고 한족(漢族)만이 문화민족으로 자처하며 다른 민족은 모두 오랑케로 불러 왔다. 은향란, op. cit., p. 4.
이렇게 중국인들에게는 자신의 것을 최고의 가치로 인정하며 이것을 타민족에게 전파하고 교화하려는 사고가 바탕에 깔려 있는데, 이것이 중화사상의 본질이다. 이수웅 김경일, op. cit., p. 2.
중국의 칭륭대제(1735-96)가 프랑스 죠지 3세에게 보내는 서신의 내용에 보면 이러한 중국인의 자존심이 잘 나타나 있다.
우리 황실의 위엄은 하늘아래 모든 나라에 이르고 또한 모든 나라의 왕들은 바다와 육지를 통하여 조공을 바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있기에 이상하고 값진 것에 관심이 없으며 당신의 토산품이 우리에게는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선물을 받는 이유는 먼바다를 건너온 정성 때문입니다. .... 당신의 청(무역과 선교)은 들어 줄 수 없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 때문에 우리의 방법과 관습을 버려야 합니까?.... 황태연,「아시아선교론」(서울: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1993), p. 87.
이러한 중국의 태도는 누구로부터도 간섭을 받지 않음은 물론, 모든 대외 관계에 있어서도 우위를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며 대외관계에서 발생하는 외교관계나 무역거래 조차도 ‘조공’이나 ‘책봉’의 형식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안맹호, “중국의 반기독교운동의 역사에서 살펴본 오늘의 중국선교 이해”, 석사학위논문,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1993, p. 10.
실제로 19세기 서구의 국가들이 중국과의 교역을 위하여 압력을 가했을 때도 중국은 이러한 일을 전통적인 ‘조공제도’의 범주 내에 적용시키려고 기도하였다.
다시 말하면 교역을 목적으로 입국한 상인을 외교사절로 인정하고 그들이 제공하는 선물은 조공으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중국인에게는 외교관계나 무역거래가 그 자체로서 중요성을 갖기보다는 정치적 관계의 부속물이나 예전 절차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중국인의 사상을 지배하는 힘은 유교이며 중국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공자이다. 공자는 예(禮)와 인(仁)과 화(和)를 가르쳤는데 그 내용은 인간 모두가 군자(君子)가 되어 임금은 임금으로서, 신하는 신하로서,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아들은 아들로서, 자신의 본분을 다하여 타인과의 생활규범을 잘 지키고 화합하면 최고의 이상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관숙,「기독교와 중국문화의 충돌」(서울: 쿰란출판사, 1997), pp. 22-3.
이러한 유교의 가르침은 한나라 때부터 관료를 선발하는 공식적인 시험과목으로 등장하게 되었으며 황태연, op. cit., p. 91.
이에 따라 중국의 학문은 주로 조정의 학문과 통치의 이념인 유교적인 범주 안에서만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 말은 모든 학문이 유교와 일치해야한다는 말은 아니지만 적어도 유교의 학문을 전적으로 반대해서는 존립할 수 없다는 뜻이다. Ibid., p. 94.
이와 같이 유교가 중국에 깊이 뿌리내린 이유는 중국과 같이 넓은 영토를 다스리는데 관료제도는 유용한 제도였으며, 또 유교의 교훈은 관료제도의 유지에 적절한 내용이었으므로 이를 역대 통치자가 신봉하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국은 지배체제가 20번이나 교체되었으나 지배자마다 유교의 가르침을 존중하였고 국시의 기본으로 삼아왔다. 이관숙, op. cit., p. 32.
유교는 또한 종교적인 측면도 가지고 있는데 제천, 묘당, 사당, 위폐 등을 통하여 위로는 황제의 제식으로부터 아래로는 백성의 조상숭배애 이르기까지 모든 제례의식을 이루고 있다. 과연 유교는 중국인들의 현실적인 모든 생활에 질서를 주는 강력한 도덕률이며 국가나 역사의 존립에 명분을 제공하는 통치 이데올로기요 이념이다. 박평식, “소그룹 운동을 통한 중국선교에 관한 연구”, 석사학위논문,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1993. pp. 14-5.
B. 특성
1. 사고구조
중국인의 사고구조는 그들의 세계관에서 기인한다. 중국인에게 있어서 자연은 신이나 인간에게 지배를 받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조화를 이루고 살아야 할 대상이며, 대화가 가능한 인격적인 존재이다. 황태연, op. cit., p. 91.
이러한 세계관은 중국인들을 매우 현실적이 되게 하였다. 중국인은 현실을 중시하며 현실 위에 서있는 추상을 이끌어 낸다. 예를 들면, 중국어 가운데 산을 가리키는 단어가 18개나 되며, 말(語)을 가리키는 어휘는 23개나 되는데 이렇게 많은 단어와 어휘는 그들이 산과 말을 경험한대로 글자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Ibid., pp. 91-92.
중국인들은 죽어서 극락에 가기보다는 현세에서 다시 한 번 더 태어나기를 원한다. 그들에게는 죽음 이후의 천당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죽음 이후의 천당은 너무나 먼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중국인의 의식 속에 종교적 내세는 없다. 그들은 단지 눈앞의 사건이 초능력을 통해 해결되기를 바랄 뿐이다. 김경일, 「중국인은 화가 날수록 웃는다」 (서울: 도서출판 청맥, 1996), pp. 213-4.
다음으로, 중국인은 매우 보수적이다. 중국인은 사물을 바라볼 때 변화하는 외관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지 않는 본질, 즉 원 존재를 본다. 황태연, op. cit., p. 93.
그러므로 중국인에게 있어서 변화라는 것은 대단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며 언제나 그들은 과거의 것을 고수한다.
다음으로, 중국인은 극단적인 사고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 사람에게는 철천지원수가 저 사람에게는 아주 소중한 은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양과 음이 서로 반대적인 힘이지만 서로 보완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중국인들은 사물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데 약하다. 그들은 직언을 좋아하지 않으며 언제나 은유와 비유의 시적 언어로 돌려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그들의 말에는 언제나 ‘말속의 말’이 있다. 이것은 그들에게 사기성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그들이 어려서부터 이중언어를 습득하기 때문이다. 김경일, op. cit., pp. 98-104.
박원호 교수는 중국문화의 특성을 현세성, 실용성, 그리고 경험성으로 말하기도 하는데 박원호 편, 「중국역사와 문화」(서울: 고려대학교 출판부), p. 56-70.
이러한 특성은 현실적인 모든 문제를 정치의 문제로 수렴하려는 의지로 나타났으며 박일봉 편, 「중국사상사」(서울: 옥문사), p. 11.
모든 문화, 사상, 예술, 학문, 그리고 종교까지도 정치력의 강화를 위한 수단이 되며 정치에 예속되는 것이다.
2. 종교관
중국은 서양과 달리 한 번도 종교가 정치나 경제를 지배해 본적이 없는 나라이다. Yang, C. K. 1970, Religion in Chinese Society, Berker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pp. 180-217.
중국인에게는 황제가 백성을 위한 최고의 권위이다. 이 통치권은 백성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종교는 언제나 통치자의 지배하에 놓인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였다. 황태연, op. cit., p. 96.
그리고 중국인의 사상의 배경에 짖게 깔려 있는 것은 유교적인 사상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유교가 모든 중국인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중국의 유교는 중국의 정치철학은 설명해 줄 수 있어도 중국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평민들의 삶은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Ibid., p. 97.
그렇기 때문에 중국인에게도 하늘에 대한 사고는 있다. 이는 매우 현실적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의식은 방종에 한계를 만드는 구실을 한다. 어떠한 종교를 믿든지 하늘을 어기면 안되며 어떠한 신분일 지라도 하늘을 거역할 수는 없다. 여기에서 중국인의 에니미즘 신앙의 신학적 기반을 찾을 수 있다. Ibid., p. 98.
이와 같은 배경에서의 중국인의 종교관의 특징은 먼저, 모든 종교에 대하여 관용적인 자세를 가진다는 것이다. 종교가 생활을 위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면 종교에 대한 이같은 자세는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중국의 황실에서는 능동적으로 종교집단을 핍박한 일은 없다. 단 종교집단이 황실의 안전이나 사회질서를 위협할 때, 혹은 외국의 이용물로 사용될 때나 종교집단끼리의 모함이나 대립이 있을 때뿐이었다. Ibid., p. 97.
중국인의 종교관의 두 번째 특징은 종교혼합현상을 들 수 있다. 종교에 대한 관용은 대체로 교육을 받지 못한 중국 서민층에 의하여 혼합되어 질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것저것 듣는 대로 자기 나름의 종교관을 형성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국의 종교는 도교도 유교도 불교도 아닌 에니미즘이라고 볼 수 있다. Ibid., p. 97.
그들은 수많은 영적 존재들과 함께 세상을 살아간다. 집에는 집귀신, 아궁이에는 아궁이 귀신, 산에는 산귀신, 강에는 강귀신, 별에는 별귀신, 이렇게 모든 것에 귀신이 있다고 생각한다. Roger Steer, 윤종석 역,「허드슨 테일러 (상)」(서울: 도서출판 두란노, 1997), p. 78.
이러한 중국인의 미신적인 종교현상은 극에 달하여 조금만 나쁜 것과 관련되어 있으면 무조건 피하고 또 제거하려고 한다. 아이를 못 낳는 집에서는 암소, 암퇘지, 암양으로만 제사를 지내고, 결혼식 때는 기러기를 상징물로 사용했으며 남녀간의 선물로는 우산과 부채를 쓰지 않는다. 기러기는 일평생 한 번 정한 짝과만 지낸다는 속설 때문이고, 우산과 부채는 그의 발음이 헤어진다는 산(散)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나쁘다면 무조건 피하고 보자는 것이다.
서방의 사회학자가 중국의 한 촌락에서 미신과 관계된 비용을 조사했는데 중부지역인 강소(江蘇)의 경우, 평균 일년 소득의 48%가 제수거리와 향을 사는데 쓰여졌으며 농업 생산 재투자에는 단17%만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김경일, op. cit., pp. 214-7.
이러한 사실만 보아도 중국인들이 얼마나 미신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생활하는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중국의 종교는 종단의 건물이나 조직보다는 인물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신앙인은 경전이나 전통보다 종교지도자의 역량이나 영향력을 보고 그를 찾아간다. 황태연, op. cit., p. 98.
그러므로 큰 종교인은 많은 제자를 두고 있으며, 또한 제자를 기르는 데에 역점을 둔다.
3. 기질
중국인의 공통된 기질, 즉 중국인의 성격중 중요한 것은 다음의 다섯 가지를 들 수 있다.
① 서둘지 않는다. 중국인들은 그 지역에서 태어나서 그 지역에서 생애를 마치는 경우가 많으며, 부모에게 직업을 물려받으면 그것을 천직으로 알고 일생동안 그 직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바쁘게 서둘러도 잘사는 것이 아니고, 천천히 게으르게 일하여도 더 이상 가난해지지 않는다는 체념이 있다.
그러므로 이들은 어떤 일에든지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강문석, op. cit., p. 35.
이러한 만만디적(慢慢的,천천히) 민족성은 수많은 변화 속에서 전통을 지키게 하였고 이러한 민족성이 만리장성을 만들어 내었다. Jonathan Chaow, 중국어문선교회 편,「중국선교핸드북」(서울: 두란노서원, 1991), p. 19.
② 그들은 또한 인내심이 강하다. 오랜 역사 속에서 전쟁과 투쟁을 겪어 온 중국인들은 ‘싸움이 곧 삶’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인간이 살아가는 삶이 곧 싸움이라면, 이것으로 고통하고 불안해하기보다는 오히려 참고 견디어야 한다는 생활의 체념과 지혜를 터득하여 온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곁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많은 사람들이 죽어도 별로 피난을 가려고 하지 않고 그대로 그곳에서 참고 견딘다. 강문석, op. cit., p. 40.
③ 좀처럼 남을 믿지 않으며 자신을 내어주지 않는다. 중국의 역사 가운데는 수많은 정권교체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그 정권을 믿고 충성을 바쳤지만 정권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으므로 백성들의 의식 속에는 두터운 불신이 쌓이게 되었다.
그래서 중국인은 말보다 글을 더 신뢰한다. 말로 백마디 약속을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종이에 글로써 증거를 남겨야만 마음을 놓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함부로 붓을 들지 않는다. 말은 풍성해도 글에는 더없이 인색한 것이 중국인이다. 그러므로 중국인이 서류에 서명을 할 때는 시간을 넉넉히 주어야 한다. 보고 또 보기 때문이다. 김경일, op. cit., p. 121.
그리고 중국인들은 상대방과 피부의 접촉을 꺼린다. 그것은 피부의 접촉이 빠른 감정교환과 상대방에게 자신의 마음을 내어놓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피부의 접촉은 감정이입의 수단이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악수를 즐겨하지 않는다. 손이 따뜻한지, 힘이 센지, 떨고 있는지, 좋아하고 있는지 악수만으로도 순식간에 상대방을 읽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악수대신 두 손을 모아 상대의 눈을 향해 흔드는 ‘공서우(拱手)’라는 인사법을 사용한다. 공서우를 할 때 서로의 거리는 적어도 2-3미터인데 이것은 악수에 비하여 서로의 영역을 철저히 지켜주는 것이다. Ibid., p. 110.
상대방과 악수를 할 때 서로 친밀감을 느끼기보다는 자기의 공간을 빼앗긴 것을 못내 불안해하는 것이 중국인이다.
중국인들은 누구에게든지 먼저 의심을 가지고 대하지만, 또한 일단 한 번 믿은 상대는 전부를 내어 줄 정도로 신용을 한다. 중국인과 사귀기는 어렵지만 일단 사귀어서 믿음직하다고 인정을 받으면 자기 목숨까지도 버릴 만큼 의리를 지킨다는 것이다.
④ 먹는 일에는 아끼지 않는다. 중국인들은 옷이나 집에 대하여는 별 관심이 없는 반면, 먹는 것에 대하여는 가장 많은 투자를 한다. 이들은 한 달에 몇 번씩 외식을 하며, 또 한 번 식사가 시작되면 대개 두 시간 이상 지속된다. 먹는데는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는다. 강문석, op. cit., p. 36.
⑤ 용과 붉은 색을 좋아한다. 용은 중국인의 기상이다. 중국인이 사는 곳에 가보면, 어디든지 용을 상징하는 형상을 보게 되는데 용은 땅에서는 기어가나 한 번 웅지를 품으면 하늘을 나른다. 용의 입에서 나오는 붉은 입김은 천하를 삼키는 위용을 나타낸다. 따라서 중국인은 용을 그린 그림을 좋아하고 또한 붉은 색깔을 좋아한다. Ibid., p. 41.
4. 금기
중국인의 금기로는 성과 혼인에 관한 것, 호칭과 숫자에 관한 것, 그리고 색깔에 관한 것이 있다.
1) 성과 혼인에 대한 금기
중국인의 성금기의 대상은 주로 여성이며, 이와 같은 생각은 여성은 만 악의 근원이며 타락의 상징으로 여겼던 고대의 문화에서 유래하고 있다. 이수웅 김경일, op. cit., p. 223.
여성은 한가로이 돌아다니지 못하며, 제사에 참가할 수가 없으며, 남성들의 활동에 참여할 수 없으며, 복장과 외모에도 상당한 제약을 받는다. 중국인들에게는 기본적으로 “남자는 대장부이며 여자는 작은 두부(하찮은 것)이다(男子大丈夫, 女子小豆腐)”라는 사상이 지배적이다. Ibid., p. 224.
그리고 혼인 금기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씨족외혼(氏族外婚)과 등급혼금기(等級婚禁忌)이다. 씨족외혼은 정치적, 생물학적인 경험에서 나온 것으로 다른 부족과의 연계와 열성후손의 탄생을 막기 위한 것으로 동성금혼으로 발전되었다. Ibid., pp. 225-6.
2) 호칭에 대한 금기
피휘(避諱)는 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것으로서 주대에 시작되어 진시황 때에 보다 강화되었다. Ibid., p. 228.
피휘는 정치지도자의 경우만 아니라 스승이나 가족 중의 어른의 이름을 당사자 앞에서는 물론, 다른 사람 앞에서도 함부로 부르지 않는 것이며, 이렇게 해야만 일찍 죽지 않는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이러한 피휘의 금기에 따라 자식의 이름을 지을 때에도 조상이나 어른의 이름과 동일한 글자는 쓰지 않는다.
3) 숫자에 대한 금기
중국인들은 4(四,Si)를 싫어한다. 그것은 4(四,Si)가 죽음을 뜻하는 사(死,Si)와 음이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死, Si)음을 피하기 위하여 4월에는 혼인을 꺼리며 축의금도 4의 단위가 들어가는 것을 피한다. 또 나이와 관계된 금기의 숫자는 45, 73, 84, 100세 등이 있는데 45세는 송대 포공(包公)이라는 사람의 전설에 의하여 45세에는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는 때문이고, 73세와 84세는 공자와 맹자의 죽음과 관계가 있고, 100세는 100을 만수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Ibid., pp. 229-30.
4) 색깔에 대한 금기
중국인은 색깔을 중요시하는 민족이다. 중국인들은 체크 무늬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며 또 은은한 색이나 중간색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원색을 좋아한다. 김경일, op. cit., p. 166.
중국인에게 있어서 황색, 자색, 향색(香色, 붉음과 황색의 중간색) 등은 이른바 귀색(貴色)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이러한 색깔의 옷은 아무나 입지 못하며, 특히 황색은 천자를 상징하였으므로 평민이 황색 옷을 입으면 반역의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반면에 녹색이나 벽색(碧色), 또는 청색은 천색(賤色)으로 분류되어 배우나 창기와 같은 사람들이 이 색깔의 옷을 많이 입었다. 이수웅 김경일, op. cit., p. 231.
중국인들이 가장 꺼리는 색은 백색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백색은 죽음의 색이다. 흰 양초는 장례식 때만 쓰고, 흰 봉투는 조의금을 낼 때만 사용한다. 김경일, op. cit., p. 170.
대신 중국인들은 붉은 색깔을 가장 좋아하는데 이것은 황토 애착에서 비롯되었으며 황토는 삶의 모태이며 삶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Ibid., p. 175.
지금까지 살펴 본 중국의 문화는 서구의 문화와 모든 점에서 너무나 큰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중국선교를 담당했던 서구의 선교사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문화적 차이를 바로 이해하는 일, 그리고 중국의 문화를 존중하며 수용한다고 하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적 간격을 극복함이 없이는 성공적인 선교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이 일은 또한 불가피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Ⅲ. 중국선교의 역사와 중국교회
A. 중국선교의 역사
중국선교의 역사에 대하여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학자는 구약의 이사야 시대에 중국과 유대인의 교류가 있었다고 추정하기도 하고 박윤선, 「이사야 주석」(서울: 영음사, 1966), p. 477.
, 또 다른 학자는 기원후 50년경 도마시대에 중국에 기독교가 전래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K. S. Latourette, A History of Christian Missions in China. (New York : The Mac Millian Co, 1929) p.48.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모두가 역사성을 결여하고 있다.
선교학자 전호진 교수는 중국의 선교를 네 단계로 구분하고 있는데 그것은 당나라 시대의 경교 선교, 몽고 때의 서구선교, 16세기 예수회 선교, 그리고 19세기 개신교 선교이다. 전호진,「아시아 기독교와 선교전략」(서울: 도서출판 영문, 1995), pp. 116-125.
본 장에서는 위와 같은 구분에 의하여 중국선교의 역사를 개관한다.
1. 당나라 시대의 경교 선교
중국의 기독교에 대한 최초의 역사적 기록은 1629년에 발견된 대진경교중국유행비석(大秦景敎中國流行碑石)이다. 이 기록에는 중국에 처음 기독교를 전한 사람은 아라본(阿羅本, Alopen)으로서 대진(大秦) 당나라 장안에 처음 도착하여 당시 태종 황제로부터 환영을 받고 궁중 도서관에서 경전을 번역하였는데, 그후 당태종은 자신이 직접 이 종교에 대하여 배운 뒤, 다음과 같이 포교를 명령하였다고 한다. “이 교는 도덕적으로 숭고하고 심오한 신비성을 풍부히 가지고 평화를 존중하는 종교임으로 나라가 공인하는 종교로 한다.” 오윤태, 「한국기독교사」(서울: 혜선문화사, 1973), p. 138.
태종에 이어 고종 황제의 통치기간에도 경교는 더욱 견고한 지위를 얻어 당시에 국내 13도 358주에 경교 사원을 하나씩 건축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장식, 「아시아 고대 기독교사」(서울 : 기독교문사, 1990), pp. 222-3.
고종이 죽은 후 불교의 숭배자인 즉천무후(則天武后)가 집권을 하게 되었는데 이 때부터 경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어 예종, 현종(712-756)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박해는 기존의 종교인 유교와 도교가 경교의 급속한 포교에 대한 견제로서 비롯되었다. Ibid., pp. 222-3.
열열한 도교신자인 무종 때에 이르러 경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 극심해졌다. 이 박해는 불교에 대한 박해로 시작하여 조로아스터교와 이슬람교 그리고 경교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었다. 이때 많은 경교 사원들이 파괴되었고 교회의 재산이 몰수되었으며, 많은 경교승들이 환속되는 등 점차로 경교는 쇠퇴하여 갔다.
당시의 경교 신앙은 전통 기독교의 교리와는 다른 교리체계로서 이단의 색채가 농후하다. 전호진 (1995), op. cit., p. 117.
경교비의 내용을 보면 창조, 타락, 메시야의 출생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으나 십자가와 부활에 관하여는 언급이 애매하며, 신앙은 인간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산 자를 번성하게 하며 죽은 자를 기쁘게 한다고 하며, 신자의 덕으로서는 사랑, 자비, 친절, 평등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매 7일마다 성찬식을 행하며, 동쪽을 향하여 절하고 예배시에는 목탁을 쳤다고 한다. Ibid., p. 118.
라토렛 교수는 경교 선교의 실패 원인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첫째, 경교는 토착화에 실패하여 계속 외국인 신앙공동체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원주민 지도자의 양성에 실패하였다.
둘째, 당시의 사람들은 새로운 종교에 대한 열망이 없었다. 기독교가 로마에 들어갈 당시에는 로마의 국가종교나 철학이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지 못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영적 갈증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경교의 경우에는 불교가 이미 사람들의 영적인 공백을 메우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경교는 오히려 불교의 한 종파로 간주되었으므로 경교의 포교에 대하여 부정적이었다.
셋째, 경교의 선교사들이 본국의 교회와 선교 본부로부터 너무 멀리 있었으므로 지원을 받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K. S. Latourette, op. cit., pp. 51-60.
이러한 이유들로 인하여 경교는 중국에서 뿌리를 내리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2. 몽고 때의 서구선교
두 번째 단계인 몽고 때의 서구 선교는 1246년 교황 이노센트 4세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이노센트 4세에 의하여 파송된 선교사 아곤(Agohn)은 기독교 신자에 대한 몽고의 공격을 항의하고 기독교의 교리를 설명하였으나 별 성과는 없었다. 그 후 계속된 몽고 시대의 선교는 정치성을 띤 무성의한 선교였으므로 큰 결실을 거둘 수가 없었다.
예를 들면 몽고의 쿠빌라이가 로마 교황에게 종교와 예술에 있어서 탁월한 선교사 100명의 파송을 요청하면서 그렇게 해주면 많은 백성들이 개종할 것이라고 했으나, 교황이 파송한 선교사들은 선교보다는 정치에 목적을 두었으며 몽고군의 사정을 파악하는데 더 열심이었다고 한다. 전호진(1995), op. cit., p. 119.
결국 몽고시대의 선교는 약간의 교회를 설립하고 6,000여명의 신자에게 세례를 베푸는데 성공하였을 뿐 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이들 교회는 몽고족의 패배와 명왕조의 설립으로 경교와 함께 단명하였으며 Ibid., p. 120.
결국은 경교도 로마카도릭도 중국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Paul E. Kauffman, 김영국 역,「공자, 모택동, 그리스도」(서울: 생명의 말씀사, 1980), p. 66.
3. 16세기 예수회 선교
종교개혁 이후 30년간의 종교전쟁을 치르면서 천주교는 많은 내부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때 가톨릭 내에서 많은 경건파가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예수회이다. 예수회는 1540년 교황의 인정을 받고 교황에게 충성을 맹세하였으며 서구 여러 나라에서 천주교인들의 영적, 도덕적 개혁을 주도하였다. 이관숙 (1997), op. cit., pp. 64-5.
이들은 교황의 명령이면 세계 어디든지 생명의 아끼지 않고 선교사로 헌신하였는데 그 중에 교황 니콜라스(Nicholas) 4세의 파송을 받은 존 코르비노(Jonn Corvino)신부가 1293년 인도를 경유하여 중국 연경에 도착하므로 예수회의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다. Ibid., p. 66.
그 후 많은 예수회 선교사가 중국선교에 헌신하였으나 그들 중 중국선교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은 마태오리치이다. 그는 중국선교를 준비하기 위하여 중국어와 한문을 열심히 공부하고 중국의 풍습과 환경, 그리고 중국인의 기질을 연구하는 일에도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는 중국인의 옷을 입고 중국의 환경에 적응하는 일과, 또 사대부의 반감을 사지 않기 위해서도 항상 조심하여 조정의 인정을 받았으며 결국 대명제국의 신종황제(神宗皇帝)로부터 북경을 위시하여 전 중국에 자유로이 선교할 수 있는 허락을 얻기에 이르렀다. Ibid., pp. 76-7.
그러나 마태오리치는 복음전도의 과정에서 생기는 문화 충돌을 지나치게 회피하여 중국을 기독교화하기 보다는 복음을 중국화하는데 전력하였으므로 중국인들에게는 호응을 얻었으나 혼합주의에 대한 프랜시스코 수도회의 고발로 인하여 교황청의 불법판정을 받게 되었다.
그 후 천주교는 신자의 제사참여를 금지시킴으로 중국 임금의 노를 불러 선교사가 추방되거나 박해를 받게 되었는데 이러한 중에서도 19세기의 활발한 선교는 천주교회가 중국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굳히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으나 토착화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4. 19세기 개신교 선교
중국선교의 제4단계는 19세기초에 시작된 개신교 선교이다. 이 때의 선교는 영국이 아편전쟁에서 승리하므로 대포를 따라 들어온 강압적인 선교였으므로 이 일은 오늘날까지도 중국선교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위대한 선교의 세기’인 19세기 서구 기독교는 경쟁적으로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하였으며 중국은 서구선교의 경쟁장이 되어버렸다. 이때 중국 선교사의 수는 무려 1,300명이나 되었으며 1900년에는 약 2만 명에 달하는 개신교 선교사가 중국에서 활동하였다. 홍성현 편,「중국교회의 전기와 새로운 중국의 신학」(서울: 한울, 1992), p. 34.
이들은 복음전도 뿐만 아니라 의료, 교육, 문화 등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1899년까지 선교사들은 중국에 60여 곳의 병원을 세우고, 1천여 곳의 초등학교와 70여 곳의 중등 이상의 학교를 세웠다. 李時岳, 이은자 역, 「근대 중국의 반기독교 운동」(서울: 고려원, 1992), pp. 79-80.
그러나 그 당시 기독교와 함께 계몽주의, 무신론 사상, 진화론 등도 들어와 중국 지성인들에게 영향을 끼치므로 기독교 선교에 많은 도전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도전은 지금까지의 교파선교를 연합선교로 바꾸는데 기여하기도 하였다. 전호진 (1995), op. cit., p. 122.
그러나 그 후 유사 기독교운동 혹은 반 기독교운동 등이 일어나 교회에 큰 타격을 가했는데 이 때 190명의 선교사가 순교하게 되고 수천 명의 신자가 죽거나 박해를 받게 되었다. 유사 기독교 운동이란 19세기 중엽 홍수전이 자신을 예수의 동생이라고 자처하면서 농민반란을 전개한 운동이며 반 기독교 운동이란 1900년에 일어난 반외세 운동인 의화단 사건을 말한다. Ibid., p. 123.
또 공산당이 조종하는 반 기독교 운동도 교회에 큰 고통을 안겨 주었으며 결국 중국의 기독교는 계속하여 민족주의, 과학주의, 계몽주의, 공산주의의 도전으로 시달리다가 1949년 중국의 공산화로 고난의 시대에 돌입하게 되었다. Ibid., p. 123.
B. 개신교의 중국선교
개신교 중국선교를 인물을 중심으로 좀 더 자세히 개관하여 본다.
1. 초기의 선교사들
1) 로버트 모리슨
개신교의 중국선교의 시효는 웨슬레의 부흥운동이다. 감리교의 탄생과 부흥은 다른 교단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으며 각 교단들은 복음의 열기를 해외로 확산시키기 위하여 1799년 4월에 “아프리카 및 동양 선교협회”(The Church Missionary Society for Africa and East)를 탄생시키고 선교사들을 각국에 파송하였다. 강문석, op. cit., p. 58.
1807년 런던선교협회(The London Missionary Society)에서는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 1782-1834)을 중국에 파견하였는데 이것이 개신교 중국선교의 시작이었다. E. S. Moyer, 곽한전 심재원 역,「인물중심의 교회사」(서울: 대한 기독교 서회, 1977), p. 412.
1807년 6월에 약관 25세의 모리슨은 광동(廣東)에 상륙하였으나 당시 중국사회에는 영국에 대한 불만이 극도로 고조되어 선교활동이 불가능하였으므로 그는 동인도 회사의 통역관 자리를 얻어 미국인으로 행세하면서 극히 제한적인 선교활동을 하였다. 모리슨은 중국선교를 시작한 지 27년 만인 1834년 8월 1일, 52세의 나이로 죽기까지 약 10명의 중국인에게 세례를 베풀었을 뿐이다. 강문석, op. cit., p. 59.
그러나 모리슨의 위대한 업적은 주로 문서선교에 있다. 모리슨은 1811년 신약성경의 번역을 완성하였고, 1823년에는 윌리암 밀룬(William Milne)과 더불어 신구약 전부를 번역하여 이를 신천성서(神天聖書)라는 이름으로 출판하였다. 그리고 그후 화영사전(華英辭典)을 편찬하는 등 10여종의 한문 서적을 간행하므로 중국선교의 초석을 마련하였다. Ibid., pp. 59-60.
그 외에 그는 의료사업에도 초석을 마련하였다.
2) 헨리 메드할스트
모리슨을 잃은 런던 선교협회는 그를 계승하기 위하여 헨리 메드할스트(Walter Henry Medharst 1796-1857)를 중국에 파송하였다. 인도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헨리는 1835년에 광동에 도착하여 선교활동을 시작하였으며 8개국어에 능통했던 그는 중국어도 속히 배워 한역성경을 일반인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정정하였으며 전도지를 만들어 배를 타고 중국연안을 돌며 전도하였다. Ibid., p. 60.
이 때는 아편전쟁이 발발하기전 험악한 분위기였으며 특히 외국인에 의한 중국 내륙선교가 금지된 상황이었는데 헨리의 20년간의 선교활동은 중국 전역에 복음이 전해지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3)데이빗 아빌(David Abeel 1804-1846)과 브릿지멘(Elijar Coleman Bridgman 1801-1861)
미국의 중국선교는 영국보다 늦게 시작되었다. 남북전쟁 후에 교회가 부흥되자 선교의 열기가 고조되어 1829년 미국외지선교협회(The 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가 조직되었고 이 협회에서 데이빗 아빌과 브릿지멘을 중국에 파송하였다. 두 사람은 1829년 10월 14일에 미국울 떠나 다음 해 2월 25일에 광동에 도착하여 활동하였으며 그 중에서 특히 브릿지멘의 활동은 의욕적이었다. Ibid., p. 61.
그는 중국지식 보급회(The Society for the Diffusion of useful Knowlege in China)의 서기로, 모리슨 교육회(The Morrison Education Society)의 총무로, 또 의료선교협회(The Medical Missionary Society)의 부회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중국을 세계에 소개하는 글(The Chinese Repository)을 20년간이나 씀으로써 중국선교현황과 현지사정 뿐만 아니라, 중국의 법률, 습관, 생활양식, 역사와 문학까지도 자세하게 알 수 있도록 공헌하였다. Ibid., pp. 61-2.
이와 같은 초기의 중국선교는 영국과 미국이 중심이 되었으며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은 이전의 가톨릭 선교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선교에 임하였다. 김광수,「아시아 기독교 확장사」(서울: 기독교문사, 1981), p. 67.
그들의 선교는 다음의 세가지 특징을 가지는데, 첫째는 선교의 기초를 마련하고 문서선교에 치중했다는 것이다. 성경을 번역하는 일, 사전을 편찬하는 일, 중국의 문화를 알리는 일, 그리고 전도문서를 작성하여 전파하는 일이 그것인데 이러한 일은 중국선교에 대한 기틀을 마련하는데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둘째는 의료사업와 교육사업을 중시하였다는 것이다. 선교사들은 열악한 중국의 의료상황에서 많은 무료 의료활동을 전개하였으며 기독교 학교도 세워서 교회지도자의 양성과 일반 교육까지 담당하게 되었다. William Pureviance Fenn, Christian Higher Education in Changing China 1950-1980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1976), p. 25.
셋째는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원칙을 강조하였다는 것이다. 서진원, “중국선교의 성공과 실패”, 석사학위논문, 아시아연합신학대학원, 1987, p. 58.
과거 중국정부에 밀착했던 로마 가톨릭이 정부의 정책변화에 따라서 동요하였던 전철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은 잘 지켜지지 않았는데 서구 제국주의와 중국 사이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하여 기독교가 서구의 입장을 지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강근환, “구미교회의 아시아 선교정책에 대한 선교사적 고찰”, 「신학과 선 교」제5집 (1979), pp. 83-4.
2. 네비우스의 선교
네비우스(John L. Nevius)는 네델란드계 미국인으로, 1861년 장로교 해외 선교부(the Presbyterian Board of Foreign Mission) 의 파송을 받아 중국 산동성에서 사역하였다. 네비우스는 일찍이 중국 선교에 있어서의 자양, 자치, 자전을 강조하였으며 각 교단의 선교사들이 자신이 속한 교단을 확장하기 위하여 채택한 라이스 크리스찬 제도, 신앙고백자 월급 제도 등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이관숙,「중국기독교사」(서울: 쿰란출판사, 1995), pp. 273-4.
네비우스는 또한 단순히 선교 자체에만 치중하지 않고 선교방법론의 연구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 때까지의 선교사들은 교회개척이나 의료봉사, 또는 교육사업에 몰두하여 선교자체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부족하였으나 네비우스는 선교이론을 구체화하였다. 김남식, “네비우스 선교방법 연구”, 「네비우스 선교방법」(서울: 성광문화 사, 1985), pp.158-149.
네비우스의 선교방법은 다음과 같다.
① 상류계급보다는 근로계급을 전도하는 것이 좋다.
② 부녀자들에게 전도하고 크리스찬 소녀들을 교육하는데 힘쓴다.
③ 기독교 교육은 시골에서 초등학교 수준의 학교를 운영함으로써 크게 효력을 낼 수 있다.
④ 장차 교역자는 기독교 학교에서 배출한다.
⑤ 의미가 명확한 성서를 주도록 한다.
⑥ 모든 종교서적은 외국어로 쓰지 말고 자국어로 쓴다.
⑦ 자급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⑧ 토착인을 이용하여 전도하게 한다.
⑨ 의료 선교사들은 환자와 친숙하게 함으로 전도해야 한다. Ibid., pp. 152-3.
이러한 네비우스 선교방법은 평신도의 활용, 성경중심의 교회, 교회의 자립과 토착화 등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많은 문제점도 내포하고 있는데 신학적인 부분을 소홀히 한다는 것과 학문적인 훈련을 경시한다는 것, 자립을 너무 강조한 결과 개교회주의로 흐르고 경제적인 자립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물질주의적인 풍조에 젖기 쉽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Ibid., pp. 173-4.
네비우스 선교방법은 토착교회를 위하여 좋은 선교 정책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선교에 있어서 선교사들의 주의를 끌지 못했으며 따라서 채택되어 실행되지 못했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선교에 참여한 교파의 다양성과 이들의 협력관계의 부족이 중요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3. 허드슨 테일러의 선교
허드슨 테일러는 1832년 영국 요크셔(Yorkshire)에서 출생하여 감리교 평신도 설교자이며 약사였던 그의 아버지 아래에서 신앙교육을 받고 자라나 17세에 회심하였다. 그 후부터 그는 목표를 중국 선교에 맞추고 그 일을 위하여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18세에 의학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런던 병원의 수련의가 되어 선교사로서의 혹독한 훈련에 돌입하였다.
테일러가 중국으로 가기 위한 문은 갑자기 열려졌는데 중국에서 홍수전의 태평천국의 난이 절정에 이르자 그 동안 테일러를 후원하던 중국 복음화 선교회는 테일러가 의학 공부를 중단하고 즉시 중국에 가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1853년 9월, 테일러는 21세의 나이로 중국을 향해 떠나게 되어 1854년 이른봄에 상해에 도착하였다. Ruth A. Tucker, 박해근 역,「선교사 열전」(서울: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1996), p. 221.
중국에서 다른 선교사들의 사치하고 방종한 생활에 회의를 느끼게 된 테일러는 그 후 런던 선교회 지역을 떠나서 판자촌으로 이사하였으며 올바른 선교 방법은 중국인의 옷을 입고 중국인의 풍습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결과 테일러는 자기의 머리 색깔을 검게 물들이기 위하여 암모니아수를 사용하다가 실명할 뻔하기도 했다.
한편 테일러를 지원하던 중국복음화 선교회의 지원금은 최소 생활도 어려울 만큼 너무나 적은 데다가 송금도 일정치 않았으며 또한 선교회 측은 테일러의 이와 같은 선교 방식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테일러는 선교회와 3년동안 서로 불편한 관계를 가져오다가 1857년, 정식으로 중국 복음화 선교회를 탈퇴하게 되었다.
그 후 테일러는 영국으로 가서 중국선교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였다. “한 달에 100만 명의 사람들이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어 가고 있습니다”라는 테일러의 호소는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어 많은 후원자를 모으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중국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가 탄생하게 되었다. Ibid., pp. 228-9.
중국내지선교회는 허드슨 테일러의 선교 경험과 성격이 반영되어 독특하게 조직되고 운영되었는데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어떤 교파에도 소속되지 않고 노동자 계급에 의존하였다. 테일러는 지식인들과 정식 목회자들로서는 중국 복음화가 요원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영국의 많은 노동자들 중에서 지원자를 선택하였다. 그것은 중국에서의 다른 선교 단체와의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는데도 유익하였다.
② 선교 본부를 중국에 두도록 하였다. 테일러가 중국 복음화 선교회에서 일해 본 경험을 통하여 볼 때, 선교회 본부는 중국 현지에 두는 것이 더욱 합리적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래야만 선교사들의 모든 필요를 제때에 채워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③ 자신이 선교회의 책임자가 되었다. 처음에 그는 선교회의 책임자가 되는 것을 사양하였으나 효과적인 선교 사역을 위해서는 강력한 지도력이 요청된다는 점을 인식하고 그 직분을 수락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휘하에 있는 모든 선교사들의 필요에 민감하게 그 역할을 수행하였다.
④ 중국내지선교회는 모든 필요를 인간적인 도움에 의존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였다. 그는 선교사들에게 정규적인 봉급을 약속하지 않고 또한 인간적인 도움을 호소하는 것도 금하였다.
내지선교회의 선교사들은 다른 선교사들에 비하여 비록 세상적인 학식은 적었지만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복음에 대한 열정은 탁월하였다. 그들은 약탈과 위험을 개의치 않고 중국 내지에 들어가 헌신적으로 선교하였으며 이 일은 중국인들에게 많은 감화를 주었다.
테일러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선교에 임하였다.
수억의 사람들이 복음을 모른 채 죽어 가고 있다. 매 시간마다 1천명이 죽음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만약 1천명의 복음 전파자를 확보한다면, 그리고 이들이 매일 50명 내지 200명에게 복음을 전한다면 3년 이내에 모든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K. S. Ratourette, A Histoty of the Expansion of Christianity, (Michigan: Zondervan Pub. House, 1978), vol. Ⅵ, p. 326.
그러므로 테일러는 중국에 교회를 세우는데 주력하기보다는 빠른 시간 안에 중국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을 듣게 하는데 목적을 두었는데 이러한 전략은 그대로 실천되지는 못했지만 중국내지선교회가 중국에 끼친 공헌은 지대하다. 1882년까지 내지선교회는 중국의 모든 성에 선교사를 파송하였고 선교회가 설립된지 30년이 경과된 1895년에는 640명 이상의 소속 선교사들이 중국을 위해 헌신하기에 이르렀으며 1914년에는 세계에서 제일 큰 선교회가 되었고 최대 전성기인 1934년에는 1368명의 선교사가 중국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Ruth A. Tucker, 박해근 역,「선교사 열전」(서울: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1996) p. 239.
C. 중국교회의 현황: 중국선교의 결과
첫선교사 모리슨이 1807년에 도착한 후 7년만에 첫 세례교인을 얻었고, 25년만에 10명의 신자를 얻었으며 100년 후에는 13,000명이었던 것이 1949년 공산화되기 전에는 7,80만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아아더 글라서는 그 당시의 중국교회의 현황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공산정권이 선교회들을 중국에서 물러갈 것을 요구하기 시작한 1949년까지, 중국의 어느 방향으로든지 줄을 쭈욱 그어 놓고 볼 때, 평균 20 내지 30마일마다 그리스도를 높이고 성서를 믿는 복음적 교회가 하나씩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세례 받은 개신교도들이 약 100만 명 쯤 있었으며 가톨릭교회는 그 수효의 거의 3배에 달하였다. Marlin L. Nelson, 윤두혁 역,「오늘의 아시아 선교」(서울: 보이스사, 1992), p. 56.
정확한 수효는 알 수 없지만 중국의 공산당 혁명 직전의 중국의 개신교도의 숫자는 대략 100만 명 이내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그 후 1949년 중국에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모든 선교사들은 남김없이 추방되었으며, 특히 문화혁명은 교회의 존재를 말살하려는 시도를 하기에 이르렀으며 이 시기에 중국선교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공산당 혁명 후 50년이 지난 현재, 중국 내에서의 기독교 신앙의 형태는 대체로 다음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삼자교회인데 이 교회는 종무국이라 불리는 정부기관의 책임과 지도하에 있는 공인된 교회이다. 문화혁명 이후 다시 문을 열게 된 삼자교회는 크게 성장하여 현재 약 2,000여개의 삼자교회가 존재하고 있다. Lesley Francis,「중국대륙에 부는 바람」(서울: 죠이선교회, 1988), p. 23.
그러나 삼자교회의 문제점은 그것이 순수한 기독교라기 보다는 정부에 충성을 바치는, 정치와 이데올로기 등의 복합적인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박명숙, “중화민족주의와 중국선교”, 석사학위논문, 고신대학 신학대학원, 1993, p. 37.
둘째 형태는 가정교회이다. 이 가정교회는 중국정부의 공인을 받지 못하는 불법기관으로서 언제라도 정부의 탄압을 받을 수 있는 비공인 교회이다. 가정교회는 1950년대 극심한 핍박 가운데서도 10배 20배의 급격한 증가를 보였는데 이것은 하나님에 의하여 이루어진 일이며 성령의 역사였다. 張西拉, 김영국 역,「중국교회의 실상」(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3), p. 41.
그리고 가정교회의 대부분은 삼자 교회가 거의 없는 농촌지역에 산재해 있으며 도시의 경우에는 삼자교회에 가입하지 않은 소수의 학생들과 전문 직업인과 지식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Lesley Francis, op. cit., p. 23.
이 가정교회의 숫자는 대략 20만여 개로 추정하고 있는데 가정교회의 취약점은 신자의 80%가 농민이요, 90%가 비 지식층이라는 점이다. 전호진 (1995), op. cit., pp.136-7.
농민들은 대부분 문맹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가정교회 안에 성경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90%에 달한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들은 미신적인 방식을 버리지 못한 경우가 많은데, 예를 들면 성경을 구입해서는 붉은 보자기로 싸서 보관하였다가 병자가 생기면 병자의 머리맡에 놓아두고, 또 밖에 나갈 때에도 몸에 지니고 나가는데 이렇게 하면 성경이 마귀를 쫓아 사람들이 평안하도록 보호해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손선령, “중국의 민간 기독교”, 「기독교와 중국의 현대화」(서울: 장로회 신학대학교 출판부, 1995), pp. 166-7.
또 한가지 중국 기독교의 신앙형태는 개인적인 신앙형태인데 이들은 삼자교회에도 가정교회에도 가입하지 않고 스스로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는 사람들이다. 이와 같은 개인적인 신앙형태를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확실히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이들의 신앙의 내용이 어떠한 모습인지 단정할 수는 없지만 오랜 신앙지도의 단절로 아직까지 건전한 신앙을 가졌을 것이라는 데는 회의적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현재 중국에 있는 기독교 신자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삼자교회 발표로는 330만 여명이며 비공식 집계로는 약 3천만 명에서 5천만명 내외로 추산하고 있다. CCL 편, 「중국교회 얼마나 알고있나」, (서울: 전문인 협력기구, 1990), p.4-5.
Ⅳ. 개신교 중국선교에 대한 문화적 평가
개신교의 중국선교는 많은 문제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과를 과소 평가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선교사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중국인들을 사랑하여 복음을 들고 그곳에 갔으며 생명을 바쳐 헌신했기 때문이다. 넬슨 박사는 선교사들의 공헌을 이렇게 말했다.
비록 많은 실수를 하긴 했지만 서양 선교사들은 다른 문화권에 있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성경을 다른 언어로 번역했고, 많은 다른 나라들 안에 교회를 세웠다. 세계 복음화를 위한 비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역경, 고난, 질병을 견뎠으며 많은 이들이 생명을 잃었다. Marlin l. Nelson, “아시아 선교”, 「화해」, 서울신학대학 학도호국단, 1977, p. 11. (재인용, 이영기, p. 24.)
라토랫 박사는 복음전도 외에 구체적인 서구 선교사들의 공로를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다.
① 기독교 공동체의 높은 도덕적 표준들은 중국인들에 무엇보다도 더 큰 영향을 끼쳤다..
② 중국의 건설적 혁신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중국인은 기독교 교육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다.
③ 새로운 학문에 대한 처음 대다수의 교재들은 선교사들이 만든 것이었으며 국립과 사립학교의 교사들 중 대부분은 기독교 교육기관에서 수련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④ 선교사들은 서구의 여러 학문을 신속하게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이것들이 사적인 이익이 아니라 공적인 이익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한다는 이상을 선포했다.
⑤ 윤리적 표준들을 보강하고 퇴폐적인 풍조를 몰아내고 윤리적으로 건강한 사회가 되는데 도움을 주었다.
⑥ 개인의 존엄성을 고양시켰다. 버려진 여아나 거지 소년, 실직한 품팔이나 아편 중독자, 문둥이나 악당, 그 누구나 구원의 가치가 있는 존귀한 사람임을 알게 하였다.
⑦ 기독교 서적을 보급하여 기독교인들에게나 비기독교인들에게나 윤리와 하나님과 종교적 생활에 새로운 개념들을 가져다주었다. 물론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은 성경이다.
⑧ 도교, 불교, 유교 등의 종교들에 강력한 영향을 주어 중국인의 혼합주의적 종교생활에 새로운 면을 소개하였다.
⑨ 중국을 서방 세계에 해석하고 소개한 일이다. 중국연구에 있어서 여러 세기에 걸친 선교사들의 공헌은 지대한 것이었다. K. S. Latourette, op. cit., pp. 834-843.
그러나 이러한 선교사들의 공헌에도 불구하고 중국에 쏟아 부어진 막대한 선교자원과 긴 선교역사에 비하여 그 선교적 성과가 전 인구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는 사실과 David C. E. Liao, L World Christianity : Eastern Asia Vol. Ⅱ, (MARC, 1979), p. 41.
1949년 공산당 혁명정부가 들어서면서 거의 모든 선교사들이 축출당한 사실은 중국선교가 결코 성공한 선교라고는 말할 수 없게 한다. 강근환, op. cit., p. 83.
매년 6,500명의 선교사가 150년간 투입되어 얻은 결과가 단지 75만의 교인을 얻는데 그쳤다면 김관숙, p. 179.
그 결과는 흡족한 결과라고는 할 수 없다. 1941년부터 10년간 중국내륙선교회에서 선교사로 일했던 아더 글래서(Arthur F, Glasser)는 다음과 같은 말로서 이 사실을 인정하였다.
우리는 우리 서구교회들과 선교회들이 아시아에서 별로 좋은 기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고통스럽게 자각한다. 우리가 아시아 인들을 좀더 성서적으로, 좀더 충실하게 섬겼더라면 좋았을 텐데. Arthur F, Glasser, “Timeless Lesson from Western Missionary Penetratian of China,” New Forces in Missions, ed. David J. Cho (Seoul: the East-West Canter bor Missionary Research & Development, 1976), p. 178.
그러면 중국선교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요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정치적인 요인과 경제 사회적인 요인, 또 신학적인 요인 등, 여러 가지 관점에서 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요인은 문화적 요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선교는 복음을 전하는 자가 중심이 아니라 복음을 받는 자의 편에서 적절한 전달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Chales H Kraft, Communicating the Gospel God's Way , (Ashland, Ohio: Ashland Theological Seminary, 1979), P. 19.
이러한 과정에서 문화 인류학적인 연구와 적용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선교사들은 중국의 문화적 장벽을 과소평가한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언어를 습득하는 일, 또 성서를 번역하는 일, 그 밖에 가벼운 선교전략에 대한 노력은 지대하였으나 그 문화 자체를 연구하는데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선교사들은 중국의 문화에 대하여 더 많은 이해를 한 후 중국선교에 착수하여야만 했다. 이관숙, op. cit., p. 47.
이 장에서는 개신교의 중국선교를 비판적인 관점에서 평가하려고 한다. 그리고 평가의 기준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기준을 마련하였다. 첫째, 중국 선교사들이 문화에 대하여 선교학적으로 바른 이해를 가지고 있었는가? 둘째, 선교사들에게 피선교지인 중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있었는가? 셋째, 피선교지에서의 복음과 문화의 충돌을 적절히 대처하였는가?
A. 자문화중심주의(Cultural Ethnocentrism)
선교사들의 잘못된 문화이해는 문화적 우월감으로 인하여 서구문화를 중국에 심으려고 하는 노력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들은 서구의 문화가 중국문화에 비하여 월등한 문화라고 믿었으며 또한 서구문화를 이식하는 것이 곧 기독교 선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1. 문화적 우월감
선교학자 바빙크는 모든 선교사는 자신의 생활과 함께 자기도 모르게 선교지로 가지고 가는 선교사 자신의 문화에 대해 비판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J. H. Bavinck, 전호진 역, 「선교학개론」(서울: 성광문화사, 1980), p. 121.
선교사는 어느 한 문화가 다른 문화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장중열, 「교회성장과 선교학」(서울: 성광문화사, 1979), p. 147.
그러나 서구 선교사들은 대체로 서구문명을 우월한 것으로 생각하고 중국의 전통과 문화를 낮추어 보는 단문화적 시각(Mono Cultural Perspective)을 가지고 있었다. 이영기, “기독교의 근대 중국선교의 평가와 전망”, 석사학위논문, 서울신학 대학 대학원, 1983, p. 31.
그러므로 선교사들 가운데는 서구식의 사치하고 풍부한 생활을 그대로 현지인들에게 과시함으로써 자신들의 우월성을 드러내려고 하기도 했으며 楊其糴,「福音聖敎与華人」(香港: 中華福音出版社, 1977), p. 100. (재인용, 유전해, p. 81.)
그들의 주택에 서양식으로 담을 두르고 잔디를 심은 넓은 정원을 가꿈으로서 K. S. Ratourette (1929), op. cit., p. 418.
중국인들에게 이질감을 유발하였던 것이다.
물론 허드슨 테일러와 같은 선교사는 중국인의 관습을 많이 채용한다는 생각으로 중국인의 복장을 하고 머리를 까맣게 물들였으며 선교사촌을 떠나서 중국인들과 같은 수준의 삶을 살았다는 것과 Ruth A. Tucker, op. cit., p. 231.
내지선교회 소속의 많은 미혼 선교사들이 내지에서 최저 생계비로 부녀자들을 위해 활동하기도 했다는 順長聲,「傳敎士與近代中國」(上海: 人民出版社, 1981), p. 118.
사실은 예외적인 일이지만, 이들도 선교의 한 방법으로서 이와 같은 생활을 했을 뿐, 중국의 문화를 존중했다는 증거는 없다.
많은 중국선교사들은 몇 가지 중국인에 대한 예절을 제외하고는 오히려 중국의 종교와 문화, 그리고 역사를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였으며 배재규, “중국선교의 역사적 고찰과 문제점 연구” 석사학위논문, 서울신학 대학 신학대학원, 1987, p. 70.
중국의 것을 존중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것을 중국에 주는 일에 몰두하였다. 황태연, op. cit., p. 121.
43년 동안 중국선교사로 사역한 윌리암스(S. Wells Williams)는 노골적으로, 중국인이 비겁하고 잔인하고 이기적이기 때문에 이들을 설득하는데 무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기까지 하였다. Robert G. Orr, Religion in China, (New York: Friendship Press, 1980), p. 17.
이러한 선교사들의 잘못된 문화인식은 중국인으로 하여금 기독교를 배척하고 복음을 향하여 문을 닫게 하였다. 사실 중국사람들의 기독교 저항운동은 복음 그 자체에 대한 반대보다는 선교사들의 서구문화에 대한 우월의식과 선교방법에 대한 저항이었다. 배재규, op. cit., p. 68.
2. 기독교와 서구문화의 혼동
글레서는 중국선교의 실패원인 가운데 하나를 선교사들이 중국인들에게 서구식 기독교를 제시한 것과 유교문화의 진가를 인정하고 이용하려는 자발성이 결여되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Arthur F, Glasser, op. cit., p. 178.
개신교 선교사들은 복음을 곧 서구의 문화와 동일시했으며 강근환, op. cit., p. 88.
따라서 중국의 그것은 마땅히 파괴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귀주교안 1861년 귀주순무와 제독이 멸교운동을 이르켜 귀양교회의 학당을 불태우 고 선교사와 교민 8명을 살해한 사건이다.
, 천진교안 프랑스 영사와 비서 등, 외국인과 선교사 22명이 살해되었으며 프랑스, 영 국, 미국 계통의 교회와 영사관 건물이 파괴되고 신도 5만명이 피살된 사 건이다.
, 대족교안 1861년 사천성 대족현에서 과거 응시자들이 신부를 집단 폭행한 사건을 시작으로 1,2차 교안을 통하여 교민 2-300명이 살해되고 교당과 병원 20여 곳이 파괴된 사건이다.
등이 문화적인 문제, 즉 전통제례의 거부에서부터 비롯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은 이를 대체할 만한 아무런 대체물도 없이 중국의 문화적인 전통을 거의 전적으로 무시해 버렸으며 장경희, “19C 중국 반기독교 요인 연구”, 석사학위논문, 이화여자대학교 대 학원, 1994, p. 80.
대신 많은 문화사업에 열을 올렸는데 그 결과 1860년부터 1890년까지 개신교는 중국에서 70여종의 잡지를 발행하였으며, 1899년까지 60여 곳의 병원을 설립하고, 1천여 곳의 초등학교와 70여 곳의 중등 이상의 학교를 세웠는데, 이들 학교에는 각각 1만 6천명, 4천명의 학생이 있었다.
물론 이와 같은 문화사업은 복음을 전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되거나 혹은 중국인에 대하여 순수한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복음을 서양의 문화와 동일시하고 그 문화를 중국에 심기 위한 목적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실제로 중국인들의 눈에는 선교사들의 문화사업이 중국인들에게 서양문화의 우월감을 심어주어 서양 자본주의 국가를 숭배하도록 하기 위한 문화적 식민지화의 노력으로 비추어 졌으며 李時岳, op. cit., p. 80.
그러므로 반기독교 운동기간 중, 중국인들은 선교사들의 저택과 예배당만 불태운 것이 아니라 병원과 학교까지 불태우고 파괴했던 것이 Ibid., p. 83.
이를 증명한다.
B. 중국문화의 특성에 대한 몰이해
선교사가 그 문화권에서 사는 사람들의 문화를 파악한다는 것은 가장 필수적인 과제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선교사들에게는 중국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다. 배재규, op. cit., p. 68.
선교사들은 열심으로 언어를 연습하였으며 또 문서사역 및 교육사업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러한 활동이 중국사회와 문화에 대한 깊은 통찰력으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장경희, op. cit., p. 80.
이와 같은 선교사들의 중국문화에 대한 몰이해는 선교과정에서 언제나 서구적인 관점을 고집했으며 선교방법에 있어서 많은 문제점들을 야기시켰다.
물론 선교사들은 중국인의 악습을 교정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이 분야에 많은 공헌을 하기도 하였다. 성적 부도덕성, 일부다처제, 전족, 도박, 우상숭배, 아편, 조기결혼과 이혼, 여성해방 등에 대한 선교사들의 공헌은 절대로 과소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문화에 대한 몰이해는 선교상 많은 시행착오를 낳았으며 반기독교 운동의 불씨로 작용하였다.
1. 문화적 자존심을 고려하지 않은 선교
중국인은 자존심이 강한 민족이다. 중화사상은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요 중국인이 가장 문명한 민족이라는 내용이다. 이러한 중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은 이들의 자존심을 고려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무시하고 손상시키는 선교방법을 사용하였다.
자신들의 전통문화를 자랑하며 가장 높은 자존심을 가진 중국인들에게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태도로 선교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많은 문제점을 지닐 수밖에 없는 것이고 반격을 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인들은 서양의 선교사들을 미개인으로 생각했는데 선교사들은 오히려 중국인들을 미개인으로 취급한데서 큰 과오가 발생했다. 이관숙 (1997), op. cit., pp. 46-7.
먼저, 선교사들은 서구 제국주의의 무력에 편승하여 선교의 발판을 넓혀감으로서 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였다. 중국에서의 개신교 선교는 불평등 조약에서 시작되었다. 기독교는 서구의 무력에 의하여 선교의 권리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선교의 많은 부분에 걸쳐 열강의 무력에 의존하였다.
1724년 옹정제의 금교칙서 이후 19세기초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의 기독교 선교는 금지되어 왔는데 이러한 100여 년 간의 금교는 아편전쟁으로 인하여 무너졌다. 아편전쟁의 결과로 1842년 남경조약이 맺어졌으며 이 남경조약 가운데 특별히 종교조항이 있지는 않았지만 외국 영사와 상인들에게 개방된 5개 항과 치외법권의 혜택은 선교사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중국의 선교가 재개되기에 이르렀다. 장경희, op. cit., p. 42.
그리고 더 중요한 일은 이 남경조약의 조문화 과정에 선교사가 개입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조약을 기초한 사람은 선교사 모리슨(J. R. Morrison)이었으며 조약의 중문 원고는 선교사 구츠라프(C.Gutzlaff)에 의하여 작성되었다. 李時岳, op. cit., pp. 14-5.
그후 계속된 불평등 조약들, 즉 망하조약(望廈條約), 황포조약(黃浦條約) 등에도 선교사 브릿지맨(E. C. Bridgman) 과 파커(P. Parker) 그리고 카레(Callery)가 개입되었다. 里井彦七郞 (1992), pp. 157-8. (재인용, 장경희, pp. 34-4.)
다음으로 중국의 내지선교가 가능하게 된 것도 아편전쟁이었다. 1856년 광서 서림에서 처형당한 샤쁘들렌 선교사를 문제 삼아 프랑스는 영국과 함께 제2차 아편전쟁을(1856-1860)을 일으켰으며 그 결과 청정부는 중국과 영국 프랑스 사이의 조정에 나섰던 러시아와 미국과도 천진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揚森富 編著,「中國基督敎史」(台北: 臺灣商務印書館, 1984), p. 253.
1858년 6월 천진조약에서 각국은 11개의 새로운 개항장, 내지로의 무제한 여행, 북경에서 거주할 수 있는 치외법권, 홍콩근교의 중국영토, 아편의 합법화, 선교회의 보호, 배상금 등을 요구했다. F. Wakeman, 김의경 역,「중국제국의 몰락」 (서울: 예전사, 1987), pp. 176-177.
실제적으로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중국은 서구열강들과 계속적으로 불평등 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러한 불평들 조약의 조문 가운데는 언제나 선교권에 대한 항목이 포함되었으며 姬田光義 외 공저, op. cit., p. 72.
서구의 선교사들은 강제로 얻어낸 선교의 자유를 힘입어 활발한 선교활동을 했지만 그 배후에 있는 중국인들의 심정은 별로 염두에 두지 않았다. 澤正彦, “중국에서의 기독교와 반기독교운동”,「신학사상」1974. 9. p. 646.
그러므로 중국인의 눈에 서구선교사들은 서구의 세력을 확장키 위한 앞잡이로 보였으며 미움의 대상이었다.
둘째로, 선교사들의 무례한 복장이나 거동도 중국인들의 반발심을 불러왔다. 당시 중국의 사회계층은 황제, 관료(上部 神士層), 일반신사(下部 神士層), 평민 등으로 되어 있었는데 F. Wakeman, op. cit., p. 36.
이들 집단은 서로 엄격히 분리되었다. 신사층의 사람들은 장식과 정대(頂戴) 및 의복에서 평민과 달랐는데 의복은 1품관의 경우 아홉 마리의 이무기가 그려진 조복을 입었고 신사층은 푸른색의 띠를 두른 검은 도포를 입었다. 아름다운 장식과 말 안장의 장식도 평민에게는 불가하였으며 이 규정을 위반하면 처벌되었다. 張仲禮, 김한식 정성일, 김종건 역, 「중국의 신사」(서울: 신서원, 1993), pp. 53-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선교사들은 의제(儀制)와 복장의 규정을 남용하였으며 이러한 사실은 중국인들에게 민감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예를 들면 귀주의 파우리(L. Faurie)는 자주 순무(巡撫)전용의 자색 가마를 타고 의장을 성대히 하여 시가지를 활보하였으며 里井彦七郞 (1992), op. cit., p. 183.
더욱이 1861년에는 자주색 가마를 타고는 북치는 사람을 이끌고 거리에서 요란스럽게 천진조약과 북경조약의 체결을 경축하였다고 하는데, 이 일은 중국인에게 심한 모멸감을 주었으며 후에 귀주교안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장경희, op. cit., p. 94.
셋째로 선교사들의 중국내정 간섭도 중국인의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하였다. 선교사들은 치외법권적 신분을 이용하여 중국의 특권층과 같은 행동을 서슴지 않았으며 중국의 관리들에게 직접 문서를 보내거나 사람을 추천하고 임명을 종용하였으며 마음에 들지 않는 관리에 대해서는 해임을 요구하기도 했다. 특히 독일 선교사 앤저(Anzer)는 지방관서를 수시로 드나들면서 호령을 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관리는 상급기관에 보고하고 처벌과 해임까지 요구하였다고 한다. 里井彦七郞 (1992), op. cit., p. 139.
이와 같은 일들은 중국인의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하는 결과를 불러왔으며 기독교를 배척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리고 선교사들은 예전의 집행에 있어서도 중국인의 높은 자존심을 고려하지 않았는데 성찬식에서 회중들로 하여금 무릎을 꿇고 떡과 잔을 받게 한 사실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가 아니라 외국인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기독교를 믿는 것은 곧 외국인의 지배를 받는 것이라는 오해를 심기도 하였다. 유전해, op. cit., p. 64.
이와 같은 점은 선교사들이 얼마나 문화적인 면에 무관심하였으며 중국인의 자존심 문제에 대하여 무지했는가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이시악(李時岳)은 기독교의 배척 원인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기독교는 단지 외래종교라는 사실 때문에 중국에서 배척받은 것이 아니다. 중국은 결코 외래종교를 배척한 적이 없다. 불교와 마니교는 모두 외래종교이며 기독교의 한 지파인 경교도 외래종교였지만 배척을 당하지 않았다. 그리고 명말 마태오 리치 등이 중국에 서양문명을 소개했을 때도 그들은 중국인의 우대와 환영을 받았었다. 그러나 선교가 식민주의와 혼합되면서 상황은 달라지게 되었다. 李時岳, op. cit., p. 17.
레닌도 이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들이 중국에 온 것은 단지 횡재를 위해서였다. 저들은 자신의 소위 문명을 이용하여 사기, 약탈과 진압을 행했던 자들이고 사람들에게 해독을 주는 아편의 권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중국과 전쟁을 하였던 사람들이다. 저들은 선교의 허튼 소리로 약탈전쟁을 은폐한 사람들인데 중국인이 어찌 그들에게 원한을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Ibid., p. 17.
선교사들은 자존심이 가장 강한 중국인에 대하여 자존심의 문제를 간과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짓밟는 선교방식을 사용한 것은 중국선교의 가장 큰 문제점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변화를 강요한 선교
선교사들은 중국인으로 하여금 기독교를 받아들이려면 자국의 문화와 전통을 버려야 하는 것과 같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선교사들이 중국인의 민족성을 고려하지 않고 선교에 있어서 자국문화의 냄새를 지나치게 풍긴 탓이었다. 이병길, “아시아 선교의 과제”, 「한국교회와 선교」(서울: 정음출판사, 1987), p.198.
실제로 선교재개 초기의 선교사들은 공자를 개종의 우선적인 적으로 간주하였으므로 신사 층의 적극적인 반대를 불러 일으켰다. Cohen(1976), op. cit., p. 565.
한 예로 왕병섭(王炳燮)은 “중국사람들은 중국백성을 위한 중국의 가르침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마땅히 중국 성인의 가르침을 존중해야 한다. 이는 외국 백성을 위하여 외국의 가르침이 있고 그것을 지키는 것과 같다” 敎務當直隸敎務, 同治8年6月14日總署收署直隸廣平府辰啓等稟 (재인용, 장경희, p. 60.)
고 주장하면서 전교(傳敎)에 대하여 강하게 저항하였다.
선교사들의 가르침 가운데 중국인의 변화를 강요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먼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가르침은 중국의 전통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이는 ‘무부무군(無父無君)은 금수와 같고 무모(無母)는 금수만 못하다’는 전통을 가진 중국인 들에게 ‘아버지는 노형(老兄)이라 부르고 어머니는 노자(老姉)라고 부르니 아버지도 아들도 없다’ 또는 ‘예수의 가르침은 상하존비(上下尊卑)의 구분이 없고 무군무부(無君無父)이다’라는 비난을 받게 하였다.
또 부녀자에 대한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유가의 전통은 남녀의 구분이 엄격하여 부녀자는 매우 낮게 취급되었다. 그러나 교당에서는 남녀가 함께 설교를 듣고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하는 등, 여자가 남자와 동등하게 활동하는 것은 중국인들에게 용납되기 어려운 일이었다. 중국선교사들도 초기의 한국선교사들처럼 예배당 사이에 포장을 치고 남녀를 구분하여 앉게 하는 것과 같은 문화적 배려를 하는 것도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는 매우 유익한 방법이었을 것이지만 그러한 흔적은 없다.
그 밖에도 선교사들이 강조한 신 기술, 신학문, 의학기술, 새로운 건축 구조, 새로운 사회 구조와 같은 것들은 전통적인 것과 무조건 반대되는 것은 아니지만 모두가 변화를 요구하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를 중국사회가 원할 때는 이와 같은 선교가 효과적일 수 있지만 그 반대일 경우에는 오히려 복음전파에 큰 거침돌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은 마땅히 중국인들이 지금까지 고수하던 모든 것을 버려야만 복음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오해하도록 한 것은 변화를 싫어하고 변화에 저항하는 중국인의 특성을 간과한 너무 성급한 선교방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3. 지도자의 양성을 간과한 선교
중국은 지도자를 중시하는 나라이다. 지도자를 중심으로 사람이 모여들고 큰 스승은 많은 제자를 둔다. 중국에서는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큰 지도자 하나를 기르는 것이 그 아래 많은 사람을 몰려들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전도방법임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은 중국인 지도자의 양성에 주력하지 않았다.
선교사들은 중국인을 단순히 선교 보조자로만 생각하고 활용하였다. 김광수, "중국선교 전략에 관한 고찰", 석사학위논문, 서울신학대학 신학대 학원, 1986, p. 34,
선교사들은 선교활동 상의 경제와 행정에 있어서의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중국인은 거의 고용인과 같이 선교사를 보조하기만 하였다. 더욱이 선교사들은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지나치게 독단적이었으며 현지인들을 믿으려하지 않았다. 楊其糴, op. cit., p. 100. (재인용, 유전해, pp. 80-81.)
다음으로 선교사들이 중국교민 중국교민이란 중국인 기독교 신자를 의미한다.
들을 지나치게 보호한 사실도 중국인 지도자를 기르는데 방해가 되었다. 중국교회의 신자들은 중국인들에게 본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교회를 이용해서 덕을 보려는 쌀신자들이 많았으며 선교사들은 이들을 이권을 보호하는 데만 주력하였다.
당시 중국의 신자들은 4종류로 구분되었다. 첫째는 신교(信敎)로서 진심으로 하나님께 구복하고 사후에 천당에 가기를 바라는 선남선녀들, 둘째는 의교(依敎)로서 교회의 부동산에 의지하여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부득불 입교한 사람으로 대개 교회의 토지를 부치는 농민과 교회의 일을 관리하는 자들이 이에 속한다. 셋째는 흘교(吃敎)로서 교회의 하찮은 은혜를 탐내어 교민을 일종의 직업으로 생각하는 자, 넷째는 투교(投敎), 즉 교회세력에 기대어 타인을 착취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신자들은 대부분 신교와 의교이었으나 소수의 걸교자와 투교자가 선교사의 비호를 받아 교민의 대표를 이루었다. 李時岳, op. cit., p. 23.
선교사들은 교민이 비교민보다 높은 사법권을 누려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그 결과 교민에게도 치외법권을 적용시키려 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동족으로부터 ‘입교 전에는 쥐와 같더니 입교 후에는 호랑이와 같다’는 말을 듣기도 했으며, 또 교민들의 영신새회(迎紳塞會)와 같은 향촌 축제 기금의 납부 거부운동 등은 신사층의 지방통치권에 큰 타격을 안겨주었다.
이와 같은 결과로 중국교회 안에는 중국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큰 인물이 없었으며 오히려 중국인 기독교인들은 그 동족으로부터 ‘외국인의 충실한 개들’ 이라는 모욕적인 말을 듣는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다. K. S. Ratourette (7권), op. cit., p. 366. (재인용, 이영기. p. 33.)
물론 중국내의 교민을 보호하기 위한 선교사들의 순수한 열정은 이해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많은 신자들이 선교사의 보호아래 강탈이나 조세거부, 불공평한 소송결과를 만들어 냄으로 반기독교 심리를 크게 자극하였으며 존경받는 기독교 인물을 만들어 내는 데는 전혀 실패하였다.
특히 내지선교회의 선교정책에서도 이와 같은 사실을 볼 수 있다. 중국에 교회를 세우는 것보다는 먼저 모든 중국인에게 복음을 전하겠다는 내지 선교회의 의욕은 고귀한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내지 선교회의 결정적인 약점이 되기도 했다. 저명한 선교 역사가인 라토렛은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중국 내지 선교회의 주된 목표는 개종자를 만든 다거나 중국인 교회를 설립하는 것이 아닌, 단순히 가능한 한 빨리 중국의 전지역에 기독교 복음의 진리를 퍼뜨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비록 중국인들을 고용하여 복음의 조력자로서 활용하기는 했어도 중국인 목회자를 훈련시켜 세우는 일에는 소홀히 하였다 Kenneth Scott Latourette, The Great Century: North Africa and Asia, vol. 6 of A History of Expansion of Christianity (Grand Rapids: Zondervan, 1970) p. 329. (재인용, Ruth A. Tucker p. 238.)
이러한 내지선교회의 선교 정책은 결코 현명한 것이 아니었다. 그 후 외국인에 대한 증오심과 반발심에서 비롯된 의화단 사건, 또 수 십년 뒤 공산주의자들의 공격은 지역 선교의 강력한 거점으로 건물과 교회의 건축에 우선권을 두지 않는 선교 정책이 내부적으로 허약한 정책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Ruth A. Tucker, op. cit., pp. 238-9.
그러므로 내지선교회는 중국인들에게 많은 저항을 받아 왔으며 1900년 6월 중국황제의 칙령으로 외국인과 기독교에 대한 말살정책이 집행되었을 때에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 때 135명의 선교사와 53명의 선교사 자녀들이 학살을 당했는데 이들 중 대부분은 내지선교회 소속의 선교사들이었다. Ibid., p. 239.
이와 같이 중국문화를 고려하지 않은 선교방식, 즉 중국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변화를 강요하고, 또 지도자를 양육하지 않은 선교는 계속적으로 반기독교 운동을 야기시켰으며 기독교가 중국에 뿌리를 내리는데 많은 저해요인이 되었다.
그 실례로 1922년 중국에 NCC 가 창설되었는데 이의 창립취지는 본색교회(本色敎會)를 육성한다는 것이었다. 澤正彦, op. cit., pp. 651-2.
본색교회란 ‘중국적이며, 중국고유의 중국인의 교회’라는 의미이며 본색화 란 토착화라는 뜻이다.
그러나 중국 NCC는 얼마 되지 않아 민족주의적인 방향으로 기울어졌으며 1927년에는 16개 교파를 연합한 ‘중화기독교회’가 창설되어 자치(Self-government), 자립(Self-supporting), 자전(Self-propagation)의 정책을 강조하였는데 Ibid., pp. 651-2.
이는 다분히 서구 기독교에 대한 반발이었다. 이영기, op. cit., p. 22.
중국 내에서 일어났던 반 기독교 운동, 즉 1854년 프랑스 선교사 살해사건, 1870년 천진의 박해사건, 의화단 사건, 그리고 1922년에 전국적으로 전개된 반기독교 운동은 모두 반제국주의 운동과 결부되어 일어난 운동이다. 澤正彦, op. cit., pp. 649-50.
중화민국 11년(1922년) 3월 9일, 북경에서 반기독교 청년학생들은 ‘비기독교 학생동맹 선언’을 통하여 기독교는 자본주의의 도구이며 중국에 절대적인 해가 되므로 추방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또 같은 해 3월 17일 반기독교 청년 학생들은 ‘비종교 대동맹 선언’을 통하여 기독교는 사상을 속박하고 청년을 마취시키며 중국의 진보를 가로막는 방해요인이므로 인류사회에서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배재규, op. cit., p. 65.
이와 같은 반기독교 운동은 계속되는 전쟁과 조약으로 그들의 오랜 정치 문화적인 우월주의가 좌절감으로 바뀌게 되었고 이 좌절감은 또한 외세에 대한 반감이 되었으며 이러한 반감은 기독교에 대한 혐오감과 반기독교 운동으로 나타나게 된 것인데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안맹호, op. cit., p. 54.
첫째, 자존심을 크게 상한 중국인들은 명예회복을 위한 의지를 결집시키기 시작하게 되었다.
둘째, 전통적인 미신을 섬겨오던 중국인들은 외래종교인 기독교로 인하여 가뭄이나 홍수와 같은 재해가 있게 되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셋째, 기독교는 중국의 전통적인 가치관인 유교와 유교적인 가치질서를 물란 시키는 집단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선교사들에게 중국의 문화와 중국인의 의식구조에 대한 연구와 배려가 있었더라면 결코 군함을 타고 선교지에 도착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또 서구 제국주의의 힘을 빌려 선교의 영역을 넓히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선교사들이 중국인의 문화를 고려하여 좀더 신중하고 겸손한 선교를 했더라면 많은 부분의 반기독교 운동을 미리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C. 복음과 중국문화의 충돌에 대한 적절한 대처의 부족
선교사가 아직 회심자가 없는 곳에서 일하기는 비교적 쉽다. 그러나 타문화권의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될 때부터는 많은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Paul G. Hiebert, 채은수 역,「문화 속의 선교」(서울: 총신대학 출판부, 1995), pp. 32-3.
회심자들이 생기기 전에는 단순히 설교하고 가르치고 전도지를 나누어 줄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회심하게 되면 많은 문화적인 문제들이 발생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계속해서 여러 명의 아내를 둘 수 있는가?” “죽은 조상에게 음식을 드려야만 하는가?” 하는 것과 같은 문제들이다.
물론 선교지의 문화 가운데는 복음과 화합할 수 없는 이교적인 것이 있지만 또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는데 이 둘을 공정하게 구분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선교지의 문화와 복음이 충돌하지만 그렇다고 그 충돌하는 문화를 무조건 파괴해서는 안된다. 전호진 (1994), op. cit., p. 143.
중국인에게 기독교의 복음이 수용되기 어려운 점, 중국의 문화와 복음이 충돌되는 부분은 대개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첫째는 혼합주의적인 종교의식을 가진 중국인에 비하여 기독교는 오직 그리스도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배타적인 교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며, 둘째는 실리적이고 현세적인 중국인에 비하여 기독교의 복음은 영적이요 미래지향적이라고 하는 점이다. 셋째는 가족 중심적인 중국인에 비하여 기독교는 다분히 개인 중심적이라는 점이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가 지상주의의 중국인에 비하여 기독교는 하나님 지상주의, 혹은 교회 중심적이라는 점이다.
1. 혼합주의와 배타주의의 충돌
중국인의 종교관은 모든 종교가 근본적으로 다 같다고 하는 종교 혼합적이다. 그래서 이들은 어떤 종교든지 별 저항 없이 다 받아 들여서 기존의 것과 혼합시키는 민족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만 구원이 있으며 예수를 믿음으로서만이 살 수 있다고 가르친다. 먼저 여기에서 중국인이 수용하기 어려운 복음과 중국 문화의 충돌이 발생된다.
이에 대하여 선교사들은 기독교로 개종하기 위하여 무조건 중국의 전통 예속을 버리고 천자를 숭배하지 말 것이며 조상을 모시지 말라고 요구하므로 봉건 관신들의 반발과 불만을 초래했다. 李時岳, op. cit., p. 26.
중국인들에게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기 전에, 먼저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므로 복음을 들어보기도 전에 듣기를 거부한 것과 같은 경우이다. 오히려 성경에 있는 내용 가운데서 중국의 문화를 수용하며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내용을 강조하고 그 바탕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강조하여야 했을 것이다. 예를 든다면 효도와 국가권력에 대한 복종 등과 같은 성경의 내용이며 또 십계명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2. 실리적 현실주의와 영적 미래지향적인 가치관의 충돌
중국인들은 무엇보다도 실리를 추구하는 민족이다. Paul E. Kauffmun, 김영국 역,「공자 모택동 그리스도」(서울: 말씀사, 1980), p. 48.
그들은 내세의 문제보다는 당장 현실의 문제를 더 절실하게 생각하는 다분히 현실적인 사람들이다. J. H. Cane, A Global View of Christian Missions, p. 208. (재인용, 배재규, p. 71.)
그런데 기독교는 그 자체가 영적인 것들을 강조하며 당장 눈에 띄는 어떤 이득을 보장하기보다는 먼 천국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므로 중국인에게 영적인 가치의 소중성과 성경이 말하는 재림이나 심판, 또는 천국과 지옥과 같은 내세의 문제를 증거할 때에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그들에게 현실적인 이득을 보장하기 위하여 소송에 개입한다든지 그들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주고자 했지만 그러한 노력은 오히려 많은 문제점만 양산하게 되었다. 안으로는 교회를 이용하여 세상적인 이득을 보려는 저질 신자가 많이 만들어졌으며 밖으로는 백성들의 지탄과 국가권력의 반감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에게는 성경의 가르침을 좀 더 구체화시켜서 가르치는 일이 요청되었다. 추상적인 용어보다는 구체적인 표현, 또는 역설적인 표현이 중국인의 사고 구조에 적절하다. 황태연, op. cit., p. 122.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는 것과 같은 말씀은 중국인들에게 피부로 느껴지는 실제적인 내용이다.
그리고 중국의 전통적인 가정에 격언이나 족자를 배열하는 것처럼 산상수훈이나 십계명, 또는 시편의 구절들을 액자나 족자에 넣어 걸어 두거나 춘절이나 명절에 좋은 글을 문설주나 인방에 써 붙이는 것처럼 성경구절을 대신 활용하는 방법 등은 그들의 미신적인 행위를 대치하는 대단히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관숙 (1997), op. cit., pp. 172-3.
그러나 선교사들의 선교활동 가운데 이러한 토착화 노력이 부족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3. 가족주의와 개인주의의 충돌
중국인들은 개인을 경시하고 가족을 중시하는 민족이다. 유전해, op. cit., p. 59.
그러나 기독교에는 가족보다는 개인을 중시하는 가르침이 많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누가복음 14:26-27
와 같은 말씀은 개인주의를 표방하는 대표적인 말씀이다. 여기에서 가족주의와 개인주의의 충돌이 발생한다.
그리고 중국인의 가족중심의 의식구조에서 조상에 대한 제사가 강조되었는데 중국인들은 죽은 조상이 제사음식을 먹고 살아가게 되며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조상의 영혼이 사멸되기 때문에 이것은 산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더 큰 죄악이라고 생각한다. Herbert Kane, 박광철 역,「기독교 세계 선교역사」(서울: 생명의 말씀사, 1981), p. 182.
그러므로 1704년 천주교에서 제사를 우상숭배로 규정하자 이는 후에 교황청과 청나라의 불화와 충돌을 야기하기도 하는 등 배재규, op. cit., p. 73.
제사문제는 계속되는 기독교와의 충돌점이다.
물론 제사는 기독교 신앙과 화합할 수 없는 미신적인 의식이다. 전호진,「종교다원주의와 타종교선교전략」(서울: 개혁주의신행협회, 1994), p. 270.
그러나 선교사들은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지혜롭고 적절한 방법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예를 들면 한국의 경우와 같이 제사를 추도예배와 같은 것으로 기능적 대치(functional substitute)를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제사대신에 추도예배를 드리고 묘지를 잘 보살피며, 또한 살아있는 부모에 대한 효도를 장려하는 일을 강조하므로서 기독교는 결코 가족이나 효도를 소홀히 하는 종교가 아님을 강조하는 일이 중요하였으며 이러한 노력은 많은 충돌을 피하는데 기여했을 것이다.
4. 국가 지상주의와 하나님 지상주의의 충돌
중국인에게 있어서 국가와 정치는 모든 것을 통합하고 지배하는 최고의 기관이요 기능이다. 종교와 사상도 모두 정치에 예속된다. 그러나 기독교의 가르침은 신앙이 국가보다 우선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절대적이며 하나님만을 경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행전은 국가나 통치권력에 대항한 사도들의 행적이 수없이 많다. 그러므로 권력자들은 기독교가 자국의 백성들을 ‘국가의 통치에 복종하지 않는 인간으로 만들어 가지 않는가’ 하는 우려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선교사는 사회변화에 민감해야하지만 사회변화를 유도한다는 인상을 주어서 안된다. 권력자들에게 불안감을 줄 때에 선교는 극심한 타격을 입게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선교사들은 영사 재판권을 빙자하여 중국인들도 입교하면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교회가 청조 정부의 권위를 능가하고 있음을 보이려고 했다. 평민이 일단 입교하면 관부(官府)는 이들에게 잘못이 있어도 문책할 수가 없었다는 사실은 청조의 통치권력에 큰 타격을 주기에 충분하였다. 일국내에 무수한 자존자립의 적국(敵國)이 출연한 셈이었으며 이는 국가에 중대한 위협이 되었던 것이다. 李時岳, op. cit., pp. 25-6.
특히 선교사들은 교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교민들의 소송사건에 개입하여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특히 1872년 직예심주지주오목(直隸深州知州吳牧)의 보고서는 이러한 사정을 다음과 같이 나타내고 있다.
지방관이 개인의 공사(公事)에 대한 청탁을 받아서는 안되는 것이 중국의 법도입니다. 교민은 중국의 백성인데도 일단 소송이 발생하면 선교사를 호신부(護身符)로 의지합니다. 선교사는 교민이 다른 사람과 소송중이라는 말만 들으면 즉시 공사에 청탁하는 것을 급무(急務)로 삼습니다. 따라서 중국관원은 중국의 법으로 중국백성을 다스릴 수 없게 되어 조약문은 공문(空文)이 될 뿐입니다. ...........평민은 교민에게 원한을 품고 그 억울한 감정이 오래되면 반드시 하루 아침에 그 억울한 감정을 풀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각 성에서 교안이 번갈아 일어나는 이유입니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모두 선교사가 교민을 비호하여 소송사건에 관여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直隸深州吳牧稟, 同治11年5月1日, 敎務當, 第3輯. p. 255. (재인용, 장경희, p. 52.)
이러한 선교사들의 소송간섭 행위는 각지에서 보편화하였으며 이는 중국의 사법권의 침해로서 중국인들의 많은 불만을 야기시켰다. 呂實强,「中國官神反敎的原因」(台北: 中央硏究院近代史硏究所, 1966), pp. 93-5.
물론 이와 같은 소송 간섭행위는 단기적으로는 교민의 증가에 기여하였지만 또한 교민의 질적 저하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유진 라미(Eugene Lamy)와 파우리(Faurie) 선교사는 1863년부터 1865년까지의 귀주성의 포교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이곳에는 하나님을 숭배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의가 왜 믿는지 모르며, 다만 당시의 사회조류를 쫒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이 종교를 가지면 다른 사람의 침해를 면할 수 있고, 소송 중에 선교사가 그들의 유력한 보호자가 될 것이라고 여깁니다. 敎務當四川敎務, 同治4年10月17日 總署收四川總督駱乘章等函. (재인용, 장 경희, pp. 52-3.)
또 다른 보고서에도 같은 사실이 언급되고 있다.
신도 중에서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세속적인 일에 대한 지지를 구하기 위하여 존재하며 부분적으로는 어떤 중한 공고(控告)의 결과를 도피하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敎務當四川敎務, 同治8年12月18日 總署收湖廣總督李鴻章文附法主敎梅西滿節略. (재인용, 장경희, p. 53.)
더 나아가 선교사들은 교민들에게 치외법권까지 적용시키려고 하였다. 중국 근대사가 모스(Hosea B. Morse)는 “선교사는 교민이 마땅히 비교민보다 한 차원 높은 사법권을 누려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이런 신념은 제거될 수 없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呂實强, op. cit., pp. 174-7.
선교사들의 이와 같은 신념은 교민들로 하여금 국가의 권위를 경시하는 풍조를 가져와 신사층의 지방통치권에 큰 타격을 주었는데 교민들의 영신새회(迎神賽會)와 같은 향촌 축제 기금의 납부거부 운동 등은 반기독교 심리를 가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盧仲雜, “鄕神與反洋敎運動”, 「近代史硏究」, 1986年 1期 , pp. 23-4. (재인용, 장경희, p. 54.)
그 외에도 선교사들은 이러한 중국사회를 이해하지 못하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 지방관리나 중국 국가기관을 통하기보다는 자신의 본국을 통해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는데 하지혜, “중국선교사의 위기 극복에 대한 고찰” 석사학위논문, 중국선교사신학원, 1997. p.
이와 같은 일은 모두가 국가 지상주의와 하나님 지상주의 충돌에 대한 적절한 조치가 될 수 없었으며 기독교가 중국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영원한 외국 종교로 남는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지금까지 고찰하여 본 결과, 일부 선교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중국선교사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중국인을 사랑하는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선교사들이었다. 이들은 본국을 떠나 열악한 환경의 중국으로 갔으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선교사업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들은 좋은 문화인류학자는 되지 못했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의 문화적인 몰이해는 선교상의 많은 부작용을 야기했으며 중국인들의 반감을 초래하여 선교의 결과를 풍성하게 하지 못했다.
선교사들과 중국교회는 1920년대, 대대적인 반기독교 운동을 경험하면서 이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 후 본국정부와의 연관을 단절하기 위한 노력과, 또 기독교를 타계적이고 관념적이며 개인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역사적이며 사회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를 중국 본색교회를 중심으로 전개하였지만 제3세계 신학연구소 편, 「중국기독교와 삼자운동」(서울: 나눔사, 1990), p. 14.
이때는 이미 너무 늦은 때였다.
Ⅴ. 결 론
2세기에 걸친 개신교의 중국선교는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코 성공적인 선교라고는 말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투자된 선교적 자원에 비하여 그 결실이 너무나 미약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원인은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은 문화적인 것이다.
선교사들은 서구 문화에 대한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고 복음과 문화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중국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기보다는 일방적으로 서구의 문화를 이식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존심이 가장 강한 중국인들에게 그 자존심을 짓밟는 일을 서슴지 않았으며, 변화를 가장 싫어하는 민족에 변화를 강요하였고, 또한 지도자를 중시하는 민족에 지도자를 키우는 일을 소홀히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복음과 문화의 충돌에 대해서도 인식이 부족하였으며 이를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 혼합주의적인 종교의식과 실리적이고 현실주의적인 가치관, 가족 중심적이고 국가 지상적인 중국인의 의식구조에 이와 정 반대가 되는, 구원에 있어서 배타적이며 또 영적 미래지향적인 가치관, 개인적이요 하나님 지상주의의 복음을 심는데 적절한 방법을 사용하지 못하므로 많은 선교적 자원을 낭비하였으며 또 중국인의 심한 반발과 기독교에 대한 저항운동을 유발시켰다.
그 후, 1949년에 중국의 정권을 장악한 모택동(毛澤東)은 사회주의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을 창설하므로 모든 정치는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 모택동 주의를 행동의 지침으로 삼았으며 Jonathan Chaow, op. cit., p. 23.
선교사를 추방하고 중국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하므로 중국선교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고 중국교회는 수난의 시대에 돌입하게 되었다.
모택동이 사망한 후 1978년 정권을 계승한 등소평(鄧少平)은 제12차 전인대의 개막식을 통해 중국식 특색을 지닌 사회주의 건설을 선언하므로 현대화된 사회주의 부국강병을 국시로 삼게 되었다. 이은규, “중국식 사회주의와 선교전략”, 석사학위논문, 장로회신학대학 신학대학원, 1992, p. 3.
그리고 이의 일환으로 중국 공산당은 개방과 종교의 자유를 선언하기는 했지만 그들은 현재 기독교에 대하여 매우 불안해하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개방 이후 지금까지, 너도나도 중국에 대하여 무계획하고 무분별한 선교를 해 왔으며 그 결과 중국 정부는 한국정부에 대하여 선교를 자제해 줄 것을 여러 번 요청한 바 있으며 기독교신문, 1997. 1. 5일자, 1997. 2. 2일자.
또한 선교의 제약을 강화하는 추세에 있다.
급격하고 무모한 선교는 오히려 선교의 문을 굳게 닫게 하는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만약 하나님이 어렵게 열어주신 중국선교의 문을 닫히게 하고 새로운 선교의 기회를 또다시 잃어버린다면 이는 전적으로 우리들의 잘못이다. 그러므로 이제 중국선교는 철저한 연구와 그 결과를 바탕으로 실행되어야하며 결코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중국선교에 참여하는 모든 교회와 기관이 연합하여 이단의 중국 진출을 막기 위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중국인들은 특별히 이단에 약한 민족이다. 그들의 미신적이고 종교 혼합적인 문화는 모든 종교를 한데 섞어버리는 특성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중국인들에게 따분한 설교나 자기수양의 거룩한 말씀들은 맥을 쓰지 못하지만 재미나 사술이 가미된 사이비는 마약보다 더 무섭게 저들을 사로잡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경일, op. cit, p. 219.
특히 현재 중국인들 가운데 전도의 가장 중요한 대상은 문화대혁명 이후에 태어나서 교육을 받고 자라난 젊은 세대들인데, 이들은 정신적으로 아무런 종교적 면역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예의 범절과 건강한 가치관도 없는, 정신과 영혼의 공백상태에 있는 자들이다. 또한 이들은 외부세계에 대하여 좋은 것은 수용하고 나쁜 것은 버리는 주체적인 의식도 없으며 외국의 것에 대하여 거의 무방비 상태에 있다.
이와 같이 백지와 같은 그들의 정신과 영혼이 무엇으로 채워지느냐 하는 것은 중국의 장래를 좌우하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며 김경일, 「얼굴 없는 중국」(서울: 대한교과서, 1995), p. 308.
만약 이러한 중국의 젊은이들에게 사이비 기독교가 먼저 전해지고 이단들이 먼저 받아들여진다면 그 피해는 실로 엄청날 것이다. 그러므로 차제에 중국선교를 수행하는 모든 교단들은 필요 없는 경쟁을 지양하고 서로 협력하여 이단이 끼여들 수 있는 모든 여지를 없애야 할 것이다.
다음은 선교사들이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하여 중국어는 물론 중국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 하에 선교를 수행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중국선교의 문제점이 주로 문화적인 면에서 발생하였음을 인식할 때에, 이 일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선교사들의 문화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 중국선교는 지금까지 서구 선교사들이 저질렀던 실수를 또다시 반복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며, 선교의 강도에 비례하여 기독교에 대한 저항운동도 커질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모든 경우에 그렇겠지만 특히 중국선교는 철저히 문화적 선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때에 선교사의 중국문화에 대한 교육은 대단히 중요하다.
마지막으로는 신중하고 차근차근히 선교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좀 늦더라도 한발 한발 정확하게 선교를 진전시켜 나가는 것이 중국인에게 효과적이고 적절한 선교방법이다. 급하고 변화를 강요하는 듯한 선교는 삶의 모든 영역을 정치에 예속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중국정부를 불안하게 하고 또 변화를 원치 않는 중국인들에게 저항감만 불러올 뿐이다.
그리고 만약 선교사들이 선교상의 시행착오를 일으키므로 다시 중국인들의 감정을 자극시켰을 때, 그것을 만회하는 일은 현재 기독교에 대하여 좋지 않은 감정으로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중국의 경우, 대단히 출혈이 많을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좀 늦더라도 천천히, 그러나 신중하고 정확한 선교를 진행시켜 갈 때에 하나님은 반드시 좋은 결과를 주실 것이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 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고린도전서 9: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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