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BC 제15강 약속의 땅 가나안 : 여호수아 II -
(6) 여호수아의 고별 설교(2) 여호수아 23:9-16
저희는 지금 여호수아의 고별 설교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여호수아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과 앞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을 이야기하고 나서, 세 가지 권면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잠시 복습해볼까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 모든 나라에 행하신 일을 너희가 다 보았거니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는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 이시니라.”(수23:3)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 앞에서 그들을 쫓아내사 너희 목전에서 그들을 떠나게 하시리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그 땅을 차지할 것이라.”(수23:5)
이 약속의 말씀과 현실 사이의 간격, 어떻게 좁힐 수 있다고 말씀드렸지요? 이스라엘은 이미 경험했습니다. 불순종하면 40년을 돌아가는 것입니다.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이 모든 나라에 행하신 일을 다 보며, 하나님께서 싸우시는 것을 확인하며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비전과 약속은 늘 새롭습니다. 오늘도 힘을 내시어 하나님 말씀하신 시간, 하나님 말씀하신 장소에 순종과 믿음의 걸음을 옮겨내시어, 하나님 행하시는 일을 보시고 오늘도 하나님 신뢰를 더욱 두텁게 쌓아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에게 세 가지 권면을 했습니다.
첫 번째 권면은 ‘크게 힘써 말씀을 지켜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수23:6)
여호수아의 두 번째 권면은 ‘우상 숭배하는 가나안 사람들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이 민족들 중에 들어가지 말라. 그들의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 그것들을 가리켜 맹세하지 말라. 또 그것을 섬겨서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라.”(수23:7)
마지막 세 번째 권면은 ‘하나님을 꼭 붙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는 것입니다.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가까이 하기를 오늘까지 행한 것 같이 하라.”(수23:8)
요약하면 무슨 이야기이지요? 상황과 환경과 조건이 달라져도, 말씀을 대하는 태도, 세상을 대하는 태도, 하나님과의 거리감이 달라져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유혹과 도전, 핍박과 회유 앞에서, 더욱 힘써 말씀을 지키고, 더욱 세상과 구별되기 위해,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지난 주일 살펴보신, 감정의 담장, 환경의 담장, 신앙의 담장을 잘 넘어서야 함을 이야기 했던 것이지요. 특히 이 말씀은 뉴노멀, 새로운 환경, 새로운 문화, 새로운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도 역시 중요한 말씀입니다. 어떤 말씀이요?
‘오늘까지 행한 것같이 잘 해나가라’(수23:8)는 말씀 말입니다.
‘배우고 확신한 일에 계속해서 거하라’(딤후3:14)는 말씀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고집스럽게 버티고 견디라는 말씀만은 아니더라구요. 다시 말해 세상과 구별되고 신앙을 지켜나간다고 하는 것이, 세상 속에 고립되어 스스로 왕따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에 영향력을 미치는 존재로 서야 하는 것입니다.
어제 충청연회 2차 온라인 목회자 세미나가 열렸는데, 이 말씀에 대한 의미를 조금 다르게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마지막 시간, 심리학을 전공하신 한상열 고려대학교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해 없이 들으셔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국교회가 기도할 때, 예전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예전의 상황, 예전의 모습을 회복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전과 같은 상황을 기대하고 기다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좋았던 시절은 다시 올 수도 없고 결국 오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한국교회의 모습이 지금까지와 같이 계속 머물러 있다면...)
괄호안의 말은 아마 교수님께서 행간에 숨기신 내용이지 싶어 적어보았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교회와 성도들이, 이 시대의 현실과 상황을 일어나서는 안될 일 일어난 것처럼 부정하거나 부인만 하고 있지 말고, 우리 때문에 생겨난 문제가 아니라며 책임전가하며 모르쇠 하고 있지만 말고, 그 흐름에 발 빠르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을 찾아야 한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무슨 말씀이예요? 오늘도 떠내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우리 책임 아니라고 우리 잘못 아니라고 그냥 구경꾼 되어 혹은 방관자 되어 머물러 있는 한국교회를 지적 하신 것입니다. 힘들지만 지금 순간을 잘 견디고 버티고 있으면 예전과 같은 상황으로 회복될 거라고 믿고 기다리고 있는 순진한 한국교회를 정확하게 보신 것입니다. 한국교회만 그럴까요? 아뇨, 대부분의 직종에서 지금 이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전의 상황, 조금만 버티면 돌아올거다 하면서 말입니다.
무슨 말씀이예요? 과거의 상황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멈추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상황이 회복 되어야지만 움직일 수 있는 교회와 성도로 남아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상황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는 것을, 지금 우리의 헌신과 수고를 멈추고 마는, 멈추어도 되는 합당한 이유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 도태시키는 일이 될 뿐이라는 것이지요?
오히려 지금의 상황 속에서 교제를 나누고, 선교를 하고, 예배를 드리고, 교육을 하고 봉사를 하고, 성찬을 하고, 기도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되는데, 회복이 되면 전도하고, 회복이 되면 속회하고, 회복이 되면 성찬을 하려고 하면서 교회가 지금 이렇게 멈춰있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아니, 저분! 우리 교회를 지켜보고 계셨나?
교회학교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하고, 속회를 드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하고, 심방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하고, 젭스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하고 성찬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하고 전도를 하고 양육을 하고 봉사를 하고 교제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다시 상황이 회복되기를 잘 준비하고 있다가 그동안 못한 것까지 뛰어나가자는 말씀만 드려왔지, 지금의 상황, 지금의 환경, 지금의 관계 속에서 답을 찾아가자는 말씀을 드려오지는 못했던 것이지요. 뒤통수를 된통 한 대 맞았습니다.
그렇지요. 그것이 말씀드린 것과 같은 감정의 담장을, 그것이 환경의 담장을, 그것이 신앙의 담장을 넘어가는(climb over) 살아있는 신앙인의 모습일진대, 지금까지의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기도하기를, 그 감정의 담장이 무너지기를, 환경의 담장이 무너지기를, 신앙의 담장이 무너지기를 기다리고만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어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를 기다리고만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진노가 풀리지 않으셨나보다. 아직도 하나님의 때가 아닌가보다 하면서 말입니다. 언덕에 서서 파도가 잦아들기만을 기다렸던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창파에 배 띄우면 예수님께서 함께 가주실텐데, 우리는 찰싹거리는 파도보고 마음 졸여 못가는 사람들이었던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아.. 나는 지금까지 뭐 한거지? 이런 생각이 들어서 어찌나 하나님께 죄송하고 성도님들께 죄송한지 아주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지금 저에게 그리고, 여러분에게 주어진 우리 하나님 내주신 숙제입니다. 6개월 멈춰 있었습니다. 6개월 시행착오를 겪으며 도전하고 연습하고 수정하고 고쳐가며 개선하며 준비했더라면 참 많이 앞장 섰을텐데 싶으면서 말이지요. 그러나 이제라도 더욱 저와 함께 기도하시며 하나 하나 새 시대에 맞는, 성경적인 내용과 의미를 다 담는 그런 그릇과 모양들을 찾아가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자, 각설하구요. 오늘 우리가 묵상할 말씀도 지난 고별설교와 비슷한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선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또다시 언급합니다. 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강대한 나라들을 너희의 앞에서 쫓아내셨으므로 오늘까지 너희에게 맞선 자가 하나도 없었느니라.”(수23:9)
앞에서는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셨다’(수23:3)고 했는데, 그와 비슷하게 ‘하나님께서 강대한 나라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셨다’고 합니다. 바로 그 때문에 지금까지 가나안 땅 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당할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얻은 승리와 성취를 자신의 능력이나 수고의 결과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일을 이루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앞서 가시는 하나님을 순종하며 따랐을 뿐입니다.
지난 말씀 떠올려 볼까요? 약속의 땅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동안만 살아갈 수 있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는 순간 약속의 땅에서 살아갈 자격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 이후의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불행한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래서 그들은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문득 이솝의 우화가 생각이 났습니다. ‘신상을 운반하는 당나귀’라는 이야기인데요, 어느 당나귀가 유명한 신의 조각상을 운반하고 있었습니다. 숲과 들판을 지나 사람들이 많은 어느 마을을 지나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성스러운 조각상을 보자 모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에게 절을 한다고 생각한 당나귀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머리를 꼿꼿이 들고는 거드름을 피워 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보다 못한 마부가 채찍으로 당나귀의 등짝을 후려치며 말했답니다.
“이런 멍청한 놈아! 사람들이 너에게 경배를 하는 게 아니고, 네 등에 있는 신께 경배를 하는 것이야!”
이 이야기는 또한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장면을 생각나게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사용해 주셨던 나귀새끼와 같습니다. 사람들이 종려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외친 것은 바로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앞에서 말한 이솝 우화의 당나귀처럼, 사람들이 우리에게 그러는 줄 알고 거드름을 피운다면 어떻게 될까요?
순종의 사람은, 아무리 위대한 일을 성취했다고 하더라도 그 일을 이루신 분은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면서 살아갑니다. 그것이 믿음의 변질을 막는 묘약입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신 일을 기억, 소환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앞으로 행하실 일들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하고 기대를 불러옵니다. 하나님께서 과연 어떤 일을 행하실까요? 1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 중 한 사람이 천 명을 쫓으리니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 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우심이라.”(수23:10)
‘일당백’(一當百) 정도가 아니라 ‘일당천’(一當千)이 되게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의 힘으로 그렇게 할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미 약속해주신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싸워주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God fights for you, just as he promised you).
물론 이 말씀은 25년 전에 이미 분배 받은 땅에 아직도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지파들을 향한 도전과 격려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생명의 말씀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에게도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으로 낙심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자기를 대신하여 싸워주시는 장수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금 용기를 내어 종교개혁을 끝까지 완수했습니다. 그 깨달음을 얻었을 때에 만들어진 찬송이 바로 ‘내 주는 강한 성이요’(585장)입니다.
2절 가사를 보시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도다. 힘 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당할 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싸워주시기 때문에, 나는 반드시 이길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비록 약하지만 얼마든지 ‘일당천’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은 확신을 가지고 모든 시간 모든 장소에서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계속해서 여호수아는 권면의 말씀을 이어갑니다. 1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수23:11)
요단 동쪽 지파들을 떠나보낼 때에도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권면을 했었습니다(수22:5). 그런 것을 보면 ‘하나님 사랑’이 ‘순종’이나 ‘계명 준수’보다 늘 먼저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에 하나님 사랑이 먼저입니다. 사랑이 동기가 되지 않는 율법 준수는 율법주의의 함정에 빠지게 되거나 아니면 기복주의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한 번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스스로 조심하여’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스스로 조심하여’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NIV 성경은 ‘So be very careful to love the LORD your God.’이라고 번역합니다. AMP 성경은 ‘Be very watchful of yourselves to love the LORD your God.’이라고 합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조심해서 잘 살펴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왜 그럴까요?
‘신앙의 변질’은 ‘사랑의 변질’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향한 사랑만 변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사랑하는 동안 우리는 늘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에 문제가 생기면, 그때부터 신앙생활 여기저기서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합니다.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현상은 우상숭배자들에게 한 눈을 파는 것입니다. 12-1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가 만일 돌아서서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이 민족들을 가까이 하여 더불어 혼인하며 서로 왕래하면 확실히 알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며 너희의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의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마침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하리라.”(수23:12-13)
하나님을 바르게 사랑하는 동안에는 우리의 시선이 늘 하나님을 향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에 뭔가 문제가 생기면 우리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하게 됩니다. 본문에서 ‘돌아서서’(turn away)라는 말이 그 상태를 가장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등을 돌리면 세상이 보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들 가까이에 살고 있는 다른 민족들이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들과 어울려 살고 혼인도 하고 서로 가까지 지내다 보면 결국 그들이 섬기는 우상숭배의 덫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지금 그것을 가장 염려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을 빌리면, 시기하기까지 사모하시는, 강렬하게 질투하시는(envies intensely)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자기 이외의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을 참아내지 못하십니다. 그래서 징계하십니다. 아무리 당신이 특별하게 선택한 민족이라고 하더라도, 아무리 그들에게 약속의 땅을 주셨다고 하더라도, 만일 더 이상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 아름다운 땅에서’ 추방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추방당했던 이 땅의 가나안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호수아는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가 되지 않도록, 그런 싹이 자라나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항상 살펴보아야 함을 말입니다. 우리 역시 이 말씀을 언제나 마음에 새기고 있어야 합니다. 사역이 먼저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어떤 사역도 기쁨으로 해낼 수 있습니다.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지시길 바랍니다.
이제 여호수아 고별 설교의 결론(수23:14-16)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되고 이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씀이 축복의 메시지가 될 수도 있고, 저주의 메시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14절을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보라. 나는 오늘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가려니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말씀하신 모든 선한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아니하고 다 너희에게 응하여 그 중에 하나도 어김이 없음을 너희 모든 사람은 마음과 뜻으로 아는 바라.”(수23:14)
‘모든 선한 말씀이 다 너희에게 응하여 그 중에 하나도 어김이 없다’는 부분을 NIV 성경은 ‘Every promise has been fulfilled; not one has failed.’라고 번역합니다. 이 말씀은 이미 여호수아 21장 끝부분에서 묵상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나는 실패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나의 불순종으로 약속의 성취가 연기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코 하나님의 말씀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들을 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한 말씀’도 실패하지 않지만, ‘불길한 말씀’도 역시 실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15-16절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모든 선한 말씀이 너희에게 임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모든 불길한 말씀도 너희에게 임하게 하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를 멸절하기까지 하실 것이라. 만일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언약을 범하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들에게 절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미치리니 너희에게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가 속히 멸망하리라 하니라.”(수23:15-16)
‘선한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약속하신 축복입니다. 그러나 ‘불길한 말씀’은 하나님에 대한 첫 사랑에서 떠나서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우상숭배자와 연합한 자에게 약속하신 저주입니다. 여호수아는 여기에서 그 자세한 내용을 언급하지 않지만, 이 말씀은 이미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된 것입니다. 그 내용이 신명기 28장에 나옵니다. 먼저 축복에 대한 말씀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여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라.”(신28:1-6)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의 말씀은 14절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그런데 15절부터는 완전히 반대되는 저주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이니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또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소와 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신28:15-19)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에게 임할 저주의 말씀은 68절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양으로 따지면 축복의 말씀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습니다. 저주의 말씀이 이와 같이 긴 이유는 절대로 그 대상이 되지 말라는 강한 경고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 정도로 길게 경고해놓았으니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모세는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순종과 우상숭배의 덫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게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하신 공생애 시작 첫 번째 말씀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이셨던 것이지요.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회개가 빠진 믿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도,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살아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 속에서 ‘스스로 조심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마음에 큰 파장을 일으키며 다가왔습니다. 사랑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도,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 사랑이 아닌, 뭔가 내 스스로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나아가게 되면 하면서도 지치고 힘들고 피곤하고 쉬고 싶어지더라구요. 그래서 힘들어질 때마다 피곤할 때마다 물으려고 합니다.
“서목사야, 너는 지금 하나님을 사랑하니?”
고린도전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얼마든지 대단한 사역을 해낼 수도 있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물 한 컵을 떠도 사랑으로 하십시오. 읽어보겠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3)
그렇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사랑을 가지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을까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히12:2)입니다. 왜요? 우리 안에는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우리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 우리를 위하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신 그 놀라우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우리도 하나님을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4:10)
사랑이 여기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수치와 고난을 달게 받으셨던 예수님의 사랑, 그 사랑 앞에 설 때마다, 우리 안에 소멸되어가던, 참으로 작아져 버렸던 하나님을 향한 사랑, 이웃을 향한 사랑이 조금씩 조금씩 회복되고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토록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고, 나아와 얼굴을 보이라고, 와서 서로 변론하자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교회 나오라, 예배드리라는 말씀이 짐이 아닙니다. 살 길을 주시는 은총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어떠십니까? 오늘 우리의 사랑은 건강하고 안전합니까? 안 건강하고 안 안전하시다면, 얼른 십자가 앞에 나오시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온전하신 사랑에 비추어 내 안에 있는 오염되고 변질된 사랑을 걷어내시고, 하나님 부어주시는 내게 없던 참 사랑을 더욱 채워내시길 바랍니다. 주님 곁에 머무시면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회복하시고, 이웃을 향한 사랑을 흘러보내실 수 있는, 오늘도 지쳐 넘어지고 죽어가고 있는 이 시대를 향한, 축복의 통로로 세워지시길 바랍니다.
‘스스로 조심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로 말미암아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약속의 땅에 서실 수 있는 복된 분들 모두 되시기를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다음시간 예습 - 여호수아 마지막 시간!
성경 여호수아 24장 / 교재 112-11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