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속의 낮은 음자리표 (2)
- 심재원(心斎園)의 봄
장닭 울음소리로 어둠이 걷히고
제비 부부의 새끼를 기르는 사랑노래
참새들은 장미원에 놓여 있는 닭 모이통을 기웃거린다
내 마음 캔버스엔 신록이 가득
세상욕심을 푸른 물감으로 덧칠하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고 가꾸는
하나님의 설계도엔 한 치의 오차도 없다
탐욕과 오염과 분노로 들끓는 대도시가
황무지로 변한다 해도
여기 자연 속에 순응하는 기쁨은
지상에도 천국을 세울 수 있겠네
꽃과 나무와 무언의 대화
작은 연못에 핀 수련 사이사이
한가로운 물고기들의 속삭임
모든 것을 하나님 손에 맡기고
주어진 행복에 만족하라 다독이네
- 졸시, 「심재원(心齋園) 농장의 오월」
세상을 해석하는데 자연과 신화의 두 축으로 접근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되겠다. 여기서 신화는 종교와 역사가 포함된 넓은 개념이다. 자연을 무대로 펼쳐지는 인간 삶의 다양한 모습이 투영된 것이 신화가 아닐까 싶다.
예술은 자연이라는 악보에, 신화의 음표들을 기록한 것이다. 신화를 불러들여 ‘지금-여기’의 숨결을 담아 신화를 진화시켜 나가는 것이 예술가의 캔버스다. 예나 지금이나 미술도 음악도 문학도 신화의 놀이터라고 보아, 나는 시인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자연이 작곡한
악보 속의
낮은음자리표
- 김철교, 「시인은」, 『아침에읽는시』, 시문학사, 2018
국어사전에 자연이란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아니하고 세상에 스스로 존재하거나 우주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모든 존재나 상태’라고 정의되어 있다. 즉, 인간의 손을 타지 않은 우주만물이다. 창조주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인간도 자연의 일부다. 로봇은 인간의 모습이어도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고 운용되는 것이어서 자연이 아니다. 인간의 손에 의해 관리되는 질서는 자연이 아니요, 하나님의 손에 의해 관리되는 질서는 자연이다.
시인이 ‘자연이 작곡한/ 악보 속의/ 낮은음자리표’라는 것은, 창조주가 세상을 만들고 다스리고 있는데 그중에 예술가는 ‘낮은음자리표’와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높은음자리표’가 중심인 음악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낮은음자리표다. 우주 운행에, 앞서서 휘젓고 다니는 존재가 아니라, 창조주의 원리에 의해 살아지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러기에 모든 인간은 자연의 품을 그리워하기 마련이다.
유구한 인간의 발자취를 담은 것이 신화다. 종교의 경전이나 인류 역사도 신화에 편입된다. 각 민족의 신화에는 과거 발자취와 미래에 대한 꿈과 이상이 담겨있다. 역사가 진실을 모두 담고 있지는 않다. 당시의 시대정신과 문화, 집필자의 식견 등으로 인해 왜곡된 면이 있다. 신화는 당 시대 백성의 염원과 삶의 진면목을 담고 있다. 역사를 달이고 달여서 나온 진액이 신화가 아닐까 싶다. 역사는 기록자의 색안경을 통한 표피적인 사건들의 기록이요, 민족의 신화는 온 백성들의 당시 삶의 지혜와 염원이 담긴 영혼의 기록이다. 예술가는 작품을 통해 신화를 진화시키고 있다. 신화를 지금-여기에서 예술가의 혼으로 재해석하고 덧붙인다. 역사가 역사가에 의해 취사선택되고 각색되듯이, 신화는 예술가에 의해 진화되고 있다.
필자는 요즘 꽃에 관한 신화에 관심이 많다. 사랑이 주제이기 때문이다. 이루지 못한 사랑이 꽃의 전설을 구성하고 있다. 못 이룬 사랑처럼 평생 가슴앓이하게 하는 것이 있을까 싶다. 신화 자체는 사랑의 진액을 담고 있다. 인간 삶의 모든 것이 사랑으로 귀결된다. 사랑은 역사, 종교, 예술은 물론, 모든 존재의 원동력이다. 예술가는 신화를 상상력과 창의력을 동원하여 풍성하게, 음으로(음악) 색으로(미술) 글로(문학) 몸으로(무용 혹은 극) 풍성하게 가꾸어오고 있다. 신화를 진화시키는 것이 문학의 기능이라 할 수 있다(김철교, 『예술 융⸱복합 시대의 시문학』, 시와 시학, 2018, 참조).
필자의 농장에서 맨 먼저 봄을 알리는 전령인 복수초(福壽草)에도 사랑의 신화가 덧입혀 있다. 샛노란 복수초가 피면서 비로소 농장은 잠에서 깨어나게 된다. 복수초(福壽草)는 ‘행복과 장수’를 기원한다는 뜻에서 이름이 붙여진 들꽃으로, 꽃말은 ‘영원한 행복’과 ‘슬픈 추억’이다.
북해도의 전설에 의하면, 크론이라는 아름다운 여신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아버지는 외동딸인 그녀를 용감한 땅의 용신에게 강제로 시집을 보내려고 했다. 크론은 연인과 함께 야반도주하여, 화가 난 아버지는 딸을 찾아내어 꽃으로 만들어 버렸는데 이 꽃이 복수초다. 이들이 찾아 떠난 ‘영원한 행복’은 ‘슬픈 추억’이 되어 버렸다.
복수초는 영어로 아도니스(Adonis)다. 아도니스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미소년으로, 여신 페르세포네와 아프로디테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사냥을 하다가 멧돼지에 물려 죽었는데, 이 멧돼지는 아프로디테의 연인 아레스신(神)이 질투하여 변신한 것이다. 미소년 아도니스가 죽으면서 흘린 피에서는 아도니스꽃이 피어났고, 여신 아프로디테의 눈물에서는 장미꽃이 피어났다고 한다.
장미의 계절은 여름의 초입, 오월에 시작된다. 복수초(아도니스)가 피면 봄이 시작되고, 장미가 피기 시작할 때까지 봄꽃들의 절정기다. 나의 작은 농장에서는 복수초에 뒤이어 수선화와 크로커스, 그리고 매화, 목련, 살구꽃, 자두꽃 등이 화려한 봄날 꽃잔치를 열고 있다.
땅속 깊이에 뜨거운 용암이 들끓듯
가슴에 품은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은
비록 세월의 칼날에 마모되어 가도
해마다 얼음 사이를 뚫고 차갑도록 눈부시다
꿈꾸었던 ‘영원한 행복’은
‘슬픈 추억’으로 남는다 해도
- 졸시, 「복수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