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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흘러 드디어 귀국명령이 내게 하달되었고 1971년 9월 28일자로 귀국선에 탑승을 하게 되었으니 가슴이
울렁거릴 수 밖에 없었다
1969년 12월 말에 파월되어 쾅남성 호이안시 1번도로가에 위치한 남푹마을 근처의 3대대 11중대 3소대 근무 만
5개월, 그 후 청룡여단본부에 위치한 월남어교육대 교육 3개월, 그 후 청룡여단본부 민사참모실 근무 14개월,
도합 만 22개월, 일년 하고도 십개월의 파월근무를 마쳤다
보통 파월장병들에게는 일년 파월근무 후 귀국할 때 여러가지 귀국준비 물품들을 소지하고 귀국할 수 있도록
아래 그림과 같은 대형 나무박스 하나씩 가져갈 수 있도록 배려되었는데 나는 파월 후 이년 가까이 근무하면서도
그런 귀국박스 준비를 안했다
3대대 11중대 소총중대 근무 시 전투생활을 하다 보니 언제 전사할 지 모르는 입장에서 그러한 귀국준비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여기 전투를 하러 왔다 그런 것 준비 안하겠다> 라는 강한 관념은
소총중대를 떠나서 안전한 후방지역인 여단본부 민사참모실에 배치 받고도 잊혀지지 않았다 그와같이 잠시
있다가 살아질 물건들을 비록 준비를 못했으나 나에겐 더 소중한 것을 얻은 것이 있었다
소총중대 근무를 통해 하나님을 찾게 되고 기도를 올리는 가운데 하늘로 부터 오는 힘을 얻고 이제 귀국하여
전역하면 하나님을 참되게 믿고자 하는 마음이 내 마음 속에 가득하였으니 내 마음은 감사함과 기대감으로
부풀어 있었고 남들이 필요하다고 여기며 준비하는 귀국물품들이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애초부터 월남전선에는 나라를 위해 싸워보겠다는 일념으로 해병대에 지원하여 온 몸이다 물론 나라가 그러한
젊은이들에게 목숨걸고 싸우느라고 수고했다며 전선에서 돌아갈 때 특혜를 베푸는 차원에서 귀국박스를 허용
하는 일이겠으나 특혜란 내가 원하지 않아서 안받으면 그만이다
나에겐 조국과 해병대가 나에게 나라를 위해 명예와 목숨을 걸고 마음껏, 힘껏 싸울 수 있도록 기회를 준 자체가
특혜라 생각되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무었보다도 제일 중요한 것은 이제 귀국하면 이 전선에서 내게 은혜와 도움을 베풀어 주셨던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으니 이 보다 더 귀한 선물이 없었다 나는 귀국물품들도 없고 그것을 담을 귀국박스도 없었으
나 감사한 마음 뿐이었다
귀국명을 받고 귀국장병들 집결시간에 맞추어 청룡여단본부 내의 집결장소로 가야하니 그간 모셔왔던 민사참모
님과 보좌관님, 선임하사님께 마지막으로 절도있게 경례를 부치며 귀국신고를 하였다 모든 분들이 그간 수고했
다며 다정히 악수를 청하시고 잘가라고 손을 굳게 잡아주신다 후임 해병들에게는 내가 먼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서로가 섭섭한 정을 나누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곧 갈길이 있으니 등을 돌려야했다
귀국자 해병들 집결 장소로 오니 귀국자들이 약 오십명 정도 밖에 안되었다 내가 월남전선에 올 때는 대략 오백명
정도의 해병들이 왔는데 그들이 일년 근무후 다 귀국했고(얼마나 전사하고 다쳐서 몇명이 무사히 귀국했는지 ?)
금번에 귀국하는 해병들은 전역이 다 되었거나 나 같이 전역을 넘겨서 귀국하면 곧 전역할 해병들 뿐이다
먼저 피복을 반납하라고 하는데 내가 현재 입고 있는 얼룩무늬 군복은 소총중대 시절 부터 입었던 것이고 그 외에
오래 전에 한벌 새로 받은 것이 있기에 새것을 입고 헌것을 반납하려 하니 귀관은 파월기간이 너무 오래 되어 피복
반납을 안해도 된단다 덕분에 화약냄새가 묻어있는 소총중대 시절 입었던 얼룩무늬 군복을 입고올 수 있어서 지금
까지 보관하고 있고 지금 근무하는 대학의 해병대 출신 제자들의 해병대 동아리 출범식 때 한번씩 입곤한다
이어 귀국자 해병들이 자기들이 귀국시 가져갈 귀국박스들을 몇개 줄을 만들어 나란히 정렬해 놓고 자기 박스 옆
에 나란히 서서 귀국물품들을 조사받는 시간이 있었는데 나는 조그만 가방 하나만 덜렁 있었으니 조사받을 것도 없
는 처지라 전우해병들의 귀국박스 물품 조사가 끝날 때까지 옆에 서서 대기하고 있었고 가져갈 물건은 가방 안에
옷가지 몇벌과 월남어 교육대에서 지급 받은 교육용 책 몇권 뿐이었으나 마음 하나 만큼은 편안하고 만족스러웠다
(귀국명을 받고 귀국자 해병들과 함께 청룡여단본부 집결지에 서서 전우들이 귀국물품들을 조사받는 것을 지켜보던 모습)
귀국자 해병들의 귀국박스 조사가 끝나자 모두가 부지런히 벤딩작업(철끈으로 박스를 묶는 작업)들을 하고 이어
공병대의 지게차가 동원되어 대기 중인 해병트럭들에 귀국박스들을 싣고 박스들을 로프줄로 단단히 묶는다
트럭에 귀국박스들을 다 싣고 묶고나니 이젠 귀국자 해병들이 트럭 위에 분승하여 다낭항으로 떠날 일만 남았다
"전원 탑승!~" 명령에 따라 귀국자 해병들 모두가 날쌔게 트럭 위로 올라간다 맨 앞에 우리 귀국자 해병들을 에스
코트할 컨보이(convoy) 차량(짚차)이 시동올 걸고 대기중이다
"출발!~" 명령에 따라 드디어 귀국자 해병들을 실은 해병트럭들이 컨보이 차량을 따라 호이안 청룡부대 여단본부
를 떠나 귀국선이 대기하고 있는 다낭항으로 출발을 하기 시작한다
'아 !.... 드디어 떠나는구나 세월은 흘러 다시는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지 못했던 조국으로 마침내 돌아가는구나'
(귀국자 해병들과 귀국박스들을 실은 병력수송용 청룡부대 트럭들이 드디어 출발하여 다낭항으로 이동한다)
참으로 감회가 깊었다 호이안에서 다낭 항구까지 대략 30 여분 내외의 시간이 걸린다 우리 귀국자 해병들을
실은 차량행렬들이 지나가는 도로와 교량은 우리 청룡부대원들이 적들의 부비츄렙(지뢰) 설치 공격에 대비
하여 미리 도로정찰을 실시하였을 것이고 도로 중간 중간 산비탈에는 아 해병대원들이 주간 매복조를 만들어
이동하는 우리 해병대 차량들을 불시에 공격할 지도 모를 적의 기습에 대비하여 작전을 펼치고 있을 것이다
22개월 전 내가 월남땅에 처음으로 발을 딛고 다낭항에서 내가 배속된 3대대 본부로 차량으로 올때는 이 주간
매복대원들이 산골짜기에 숨어 있다가 월남신병 해병들을 실은 트럭이 닥아오자 환영의 뜻으로 불시에 조명탄
들과 신호탄들을 타타탕!!!~~~~~~~~ 쏘아대며 귀신들 같이 모습을 보이는 바람에 이것이 적의 기습인가
하여 저윽이 놀란적이 있었으나 이제 귀국하는 선임자 해병들에게는 존대의 뜻으로 우리 주간 매복조들이 그런
장난을 하지 못하고 있으리라
(많은 농토가 군사작전지역으로 묶이는 바람에 가난하게 살았던 월남전 당시 월남농민들의 모습 / 잘 있거라 베트남)
호이안에서 다낭으로 행하는 이 길은 그간 민사참모실에 근무하면서 대민지원 물품들을 트럭에 싣고 수 없이
다니던 길이다 그러나 오늘은 이 길이 나에게 특별하였다 이제 가면 언제 다시 올지 모를 길이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길 주변의 풍광들을 순식간에 뒤로하며 달리던 트럭 행렬이 무슨 일인지 모르나 갑자기 멈추어 선다 아마도
맨 앞에서 선도하던 컨보이 차량이 무슨 정보를 입수하였는지 컨보이 차량에 탑승하고 있던 호송병력들이 하
차하여 내려서 전진할 도로를 정찰한다
큰 이상은 없었는지 잠시 후 호송 차량들은 다시 출발하여 다낭을 향해 계속 달렸고 다낭이 가까와 오면서
다낭에 진입하기 위한 다리를 건넜으니 이 다리는 22 개월 전에 파월되어 다낭항에 도착하여 청룡부대가
위치한 호이안으로 향할 때도 건넜던 다리였다
(호이안에서 다낭까지 가는 길에 놓여진 교량 - 다낭 근처에 있다 / 월남전에 파병되는 해병들이 건너던 애환의 교량이다)
드디어 귀국자 해병들을 실은 트럭들이 다낭항구에 무사히 도착했고 다낭항에는 베트남의 중부 퀴논에서 육군
맹호부대원들과 백마부대원들을 싣고온 미국 국적의 병력수송선 셔만호가 대기하고 있었다 22개월 전에 이 배
를 타고 부산항 제 3 부두를 떠났었는데 22 개월이 지난 지금 전선에서 살아남아 다시금 이 배를 다시 볼 수 있고
다시금 타고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감개무량하였다
22개월 전에 조국을 떠나 이곳에 올 때는 우리 해병대원들이 약 500 여명 가량 되었는데 이제 나와 같이 귀국
하는 해병대원들은 귀국하면 곧 전역할 인원들로써 약 50 여명 정도 뿐이니 귀국자 해병들의 배에 오르는 탑승
은 금방 끝났다
(다낭항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었던 병력수송선 셔만호를 탑승하는 50 여명의 귀국자 해병대원들)
우리 해병대원들의 탑승과 귀국박스의 탑재가 끝나고 인원점검이 끝나자 셔만호는 잠시 후 출발한다 22개월
간 생사고비를 숱하게 넘기며 전우들과 함께 피와 땀을 흘렸던 베트남 땅을 드디어 떠난다
셔만호 상갑판 난간에 기대어 점점 멀어져가는 베트남의 푸른 땅을 보니 월남전선에서 겪었던 생사간의 험난
했던 순간들이 주마등 처럼 내 기억속을 스쳐간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서 귀국한다는 것이 정녕 꿈만같고 믿어
지지가 않는다 그래도 이것이 사실이니 이렇게 살아서 무사히 귀환하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늘에 감사했다
배는 다낭항을 떠나서 진로를 잡은 후 속도를 내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남지나해의 거친 파도를 가르며 전속력을
내어 힘차게 항해를 하기 시작한다 앞으로 이 배는 우리를 한국에서 싣고 월남으로 올 때와 마찬가지로 일주일
동안을 쉴새 없이 그리운 고국으로 달려갈 것이다 베트남 땅을 멀리한 배는 곧 남지나해로 나와 망망대해를 사방
에 보이며 거칠게 항해한다
(다낭항을 출항하는 병력수송선 셔만호 / 조국을 떠나올 때는 어린 학생들의 열띈 전송이 있었으나 귀국 시는 조용했슴)
한국에서 올 때와 같이 육군 병력은 선체 앞부분과 중간 부분에, 해병대원들은 선체 후미 부분에 탑승한다 배를
타고 보니 육군인 맹호부대와 백마 부대원들은 월남으로 올때와 비슷하게 합쳐서 대략 3000 여명의 대병력이고
우리 해병대원들은 달랑 50 여명 뿐이다 그래도 올 때와 마찬가지로 배의 군기와 질서유지는 해병대가 맡았는데
나는 귀국자 해병대원들 중에서도 최고참이라 질서유지 근무는 안했고 그 대신 시간이 나므로 미국인들로 구성된
식당요원들의 요청에 따라 식당에 내려가서 그들이 빵을 굽는 일을 거들어 주었다
그 식당에 빵을 굽는 주방장은 몸무게가 아마도 백수십 킬로그램 정도나 나갈 무지무지하게 크고도 뚱뚱한 민간
인 흑인이었다 밀가루는 대형 원통안에서 자동으로 반죽이 되고 있었고 반죽이 끝나자 그 주방장의 설명에 따라
반죽된 밀가루를 빵틀에 조심스럽게 넣은 후 대형오븐 안에 넣었는데 이때 이 주방장이 내가 두손으로 들고 운반
하는 빵틀을 어딘가에 부딪히면 안된다는 뜻으로 "테이크 이지!~ (Take ease) 테이크 이지!" 라고 말한다
대부분 조심스럽게 운반하여 별탈이 없었는데 어느 한개는 마침내 어딘가에 부딪히고 말았다 빵을 구어 본 경험
이 없으니까 이것이 나중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채 그대로 오분 안에 넣었는데 일정 시간이 지나 빵이 구어진
후 꺼내 보았더니 "아뿔싸!..." 어디엔가 부딪힌 빵틀의 반죽은 빵 모양이 온데간데 없고 납작하니 짜부러져 있다
주방장에게 미안해서 "오.. 아임 쏘리" 했더니 그가 좀 화가 났는지 손가락으로 내 가슴을 찌르며 또 "테이크 이지"
하는데 덩치가 커서인지 손가락의 힘이 무슨 망치로 쿡!~ 찌르는 것 같다 허... 그 친구 색깔은 나 보다 까매도 힘은
나보다 좋다 아뭏튼 식당에서 일을 한고로 일을 마치고 나올 때는 맛있는 빵과 케익을 가지고 나올 수 있어 전우들
과 함께 밤참으로 맛있게 나누어 먹을 수 있었다
귀국할 때 배의 상태는 올 때 보다 훨씬 더 흠이 많고 더러워져 있었는데 특히 화장실이 더러워져 있었다 아무래
도 한달에 두번씩 쉴새 없이 대병력을 나르다 보니 배가 흠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파월될 때 이 화장실에 와보니
재미있는 그림이 화장실 수세식 변기 옆에 붙어 있었는데 그 그림은 병사가 양변기 위에 발을 올려놓고 일을 보는
그림이었다 그 그림에 크게 X 표시를 해놓고 제발 이렇게 앉지마라 그리고 그 옆에 제대로 변기에 걸터 앉은 병사
를 그려놓고 크게 O 표를 하고 제발 이렇게 앉으면 이쁘겠다고 한 그림들이었다
60년대 가난했던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평소에 볼 수 없었던 선진국형의 서양식 변기를 처음 대하다 보니 사용법을
몰라 우왕좌왕하다가 급기야 군화를 변기 가장자리에 올려놓고 변기 위에 높이 올라가 어려운 자세로 일을 보았으니
변기가 쉽게 더러워질 수 밖에 없고 배를 관리하는 주인의 입장에서 청결문제로 인해 이렇게 하지 말고 저렇게 하세
요 하는 식의 친절한 그림을 그려놓은 것인데 22개월 만에 다시 보니 그 그림은 여전한데 그림이 많이 탈색도 되고
찢겨져 나가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하였다
출국할 때는 전쟁터에 출정하는 병력임을 감안하여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선상 노래자랑도 열고 흥을 돋우는 시간
도 있었으나 귀국할 때는 조용한 분위기였다 그래도 어떤 육군 병사 하나가 우리 해병대 쪽으로 와서 군대에 온 남자
들만이 부르는 노래로 흥을 돋아주느라 수고를 했다 저런 개그도 타고 나야지 인위적으로 안되는 것 같다
며칠 후 해병대와 육군이 서로 낯이 익어서인지 점심식사 시간에 육군 병사 한명이 근무자 해병대원의 경고와
제지를 무시하고 새치기를 하다가 근무자 해병대원의 구타를 받는 일이 발생하였다 배에 탑승한 병력은 3000 명
이 넘고 사병식당의 수용인원은 300 여명 밖에 안되므로 장시간 줄을 서서 기다려야하는데 그나마도 해병대가
먼저 식사를 하고 난 후 육군이 하게 되니 젊디 젊은 시절의 청년이 배가 고파 새치기를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무언가 서로가 이해가 부족하였나보다 식당 입구 쪽에서 큰 소리가 나기에 식사를 하다가 그 쪽을 보니
근무자 해병대원이 새치기를 하던 육군 한명을 구타하고 있다 순간 그것을 본 해병대원들이 식사를 하다 말고
벌떡들 일어나 식탁 위로 날아가며 일이 벌어진 쪽으로 뛰어가기 시작한다 식사를 하던 육군들의 트레이 식판
들이 식탁 위로 날아 뛰는 해병대원들의 군화에 짓밟혀 튀면서 음식과 함께 여기저기 공중으로 날아가버린다
해병대원 근무자의 경고와 제지를 무시했던 그 육군이 몇명의 사나운 해병대원에게 잡혀 식당 밖으로 끌려나간
다 일이 크게 될 것 같아 나도 식사를 하다 말고 그들 뒤를 따라 나갔는데 이윽고 갑판 위로 끌려나간 그 육군은
해병대원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기 시작한다 주위에 육군은 수천명이고 해병대원들은 겨우 수십명인데도 아무
도 이것을 만류하는 육군이 없고 그대로 두었다가는 안될 일이었다 그런 사나운 기세는 월남전에서 적과 싸울때
나 필요한 것이지 좀 잘못했기로써니 전선에서 같이 고생했던 아군을 왜 그렇게 무수히 때리나
귀국하는 해병대원들 중에는 전역을 두달이나 넘긴 내가 최고참이었으므로 구타를 가하는 해병대원들을 뜯어
말렸다 그 때에 비로소 맞고 있던 육군사병의 계급을 보니 하사였다 나는 구타를 가하던 해병대 전우들에게
이는 부사관이 아니냐 부사관은 일반 사병들 보다 먼저 먹도록 허용하라고 말했으니 함께 월남전선에서 고생하
며 싸웠던 전우들 간에 있어서는 안될 불상사가 벌어진 셈이었다
아뭏튼 귀국자 병력을 실은 셔만호는 그렇게 그리운 고국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으니 저 배 아래쪽에서 배가 바다
물살을 가르는 수면에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긴 아가미 수염이 달린 날치 고기들이 수면을 박차고 나와 배를 따라
날아 다녔다 이 날치들은 아마도 배에서 던지는 음식쓰레기를 먹을 수 있기에 배를 계속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
(월남으로 파병될 때 보았던 남지나해의 망망대해는 귀국할 때도 그 모습 그대로였다)
휴식시간에 선상 갑판에 나와 남지나해 망망대해를 바라보니 22개월 전에 고국을 떠나올 때와 조금도 달라진
것 없는 무심한 모습이었다 그래도 저 망망대해를 다시 못보고 전사한 전우들이 얼마나 많은가 ...
파월되어 이 바다를 건너올 때 나 역시 다시는 저 바다를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이 되어 대중가수 배호의
<떠나야할 당신> 이라는 노래의 마지막 부분 <... 다시는 못올 머나먼 길을 가야만할 당신> 귀절을 되뇌이며
이제 내가 이 노래 대로 다시는 못올 길을 가기위해 이 바다를 건너 저 월남전선으로 향한다고 생각지 않았나 ...
그런데 이렇게 살아서 돌아간다니 ...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22개월 전 21세의 나이로 월남전선으로 향할 때는 살아돌아 올지 전사해서 하얀 뼈가루로 박스에 담겨올 지
알 수가 없었고 그저 나라를 위해 싸우겠다는 마음 하나로 해병대에 입대하여 가는 길이었므로 남지나해를
건너가는 이 출정길이 내 인생에 무었을 의미하는 것인지 전혀 몰랐으나 이제 22개월이 지나 23세의 나이로
다시금 남지나해를 지나 귀국하는 이 길은 나에게 여러 면에서 깊고도 큰 의미가 있었다
무었보다도 생명의 주관자가 계심을 깨닫고 그 주관자 되시는 분을 믿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 것이었다
죽음과 내 사이가 오직 한걸음 뿐인 전선에서의 생활이 없었더라면 나는 결코 그런 생각을 못했으리라 전쟁터
에서의 그 같은 생활이 없었더라면 내 어찌 별이 총총한 전선의 밤하늘 아래 무릎을 끓고 생명의 주관자 되시는
분에게 기도를 올렸으랴 그 생활이 아니었다라면 내 어찌 시편 23편의 영어 귀절(내 비록 죽음의 어두운 골짜
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 아니함은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심이라)을 암송하며 하늘의 힘과 도움을 얻고 감사
했으랴
물론 숙제는 남았다
비록 전선에서 나를 도와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이 생겼고 또한 하나님을 이제 참되게 믿고자 하는
마음은 생겼으나 혼탁한 이 세상에서 과연 어떻게 하나님을 참되게 믿을 수 있는지, 과연 내가 그 옳바른 길을
찾겠는가 하는 문제가 남았다
그러나 그것도 걱정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 험난한 월남전선에서 나를 도와주신 하나님께서 내가 그 분을
참되게 믿고자 하는데 어찌 아니 도와주시랴 하는 든든한 생각과 확신이 있었다 셔만호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실은 채 그렇게 고국을 향해 계속 쉬지않고 달려갔고 이윽고 약속된 항해날짜를 채워가며 그리던 한국, 내
조국으로 더 가까이 닥아가고 있었다
이하에 월남전선에서 22개월 간 군복무를 하며 또 해병대에서 36개월 군복무를 하며 내게 남게된 여러가지
증명서류들과 물품들을 보인다
(국방부장관 명의의 월남참전 기장증이다 귀국을 1971년도에 했는데 이 증서는 1969년에 만들어진 것을 사용하였다)
(1970년 8월 22일자로 청룡부대 월남어교육대를 수료한 수료증이다 수여자는 당시 청룡부대장인 이동룡 여단장님이시다)
(청룡부대 월남어교육대를 수료할 때 일등으로 수료하였기에 받은 여단장 명의의 우등상장 / 군번이 틀렸는데 위의
수료증의 군번 93454351 가 맞는 것이고 이 상장에는 9354780 으로 잘못 기재가 되었다 그래도 주인은 잃지 않고 찾아왔다
(전역 후 받은 해병대 전역증서이다 전역날짜인 1971년 10월 4일은 내가 월남복무를 마치고 부산항에 도착한 그날이다
전역을 넘기고 귀국하였으므로 귀국한 그 날로 전역하였으니 귀국날짜가 바로 전역날짜가 되었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 시절 받은 참전용사증서이다)
(이 얼룩무늬 군복은 귀국시 파월기간이 일년을 넘긴고로 피복반납할 필요가 없게되어 당시 입고 있던 군복을 그대로 입고
귀국하게 되어 아직까지 기념으로 간직하고 있다 이 군복은 소총중대에서도 입었던 군복이므로 소총중대 복무 시 배었던
화약냄새가 그대로 배어있을 법하다 / 소재는 100 % 면이므로 요사이 군에 지급되는 폴리에스터 합성소재 보다도 조금
약하지만 통풍성이 좋아 무더운 월남전에서는 최적이었다 / 왼쪽 상단에 태극기, 유엔기, 지금은 살아진 월남공화국기가
있고 그 밑에 해병대 고유의 빨간명찰이 있다 왼쪽의 팔(내가 입으면 오른쪽)에 천으로 만든 해병대 앵커가 부착되어있다)
첫댓글 월남전을 정말 잘 읽고 있습니다. 생명의 주관자가 계신것을 체험한 것은 월남전에서 경험한 것중 가장 값진 교훈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이 경험담이 많은 사람에게 읽혀서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저에게 있어서 참전의 의미는 하나님을 찾게되고 귀국 후 하나님의 진리의 길을 발견하게 되어 그 길을 걷게 된 일입니다. 감사드리며 늘 건강하시고 모든 것이 뜻대로 잘 이루어지기 바랍니다.
인간이 만든 전쟁에는 22개월간의 많은 변화가 있었음에도 남지나해의 모습은 파병으로 지날 때나 귀국 할때나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우리를 사랑 하시는 하나님도 망망대해 남지나해 처럼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사랑 하십니다. 무한한 사랑이지요. 월남전에서 가장 고귀한 분을 만나신 훈풍님은 축복이십니다. 잘 보고 갑니다. 고운 밤 되십시요.*^^
감사합니다. 제게 주어졌던 하늘의 축복이 해청솔님에게도 주어지기를 바랍니다. 늘 건강하세요.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훈풍님을 기다리고 계셨기에 월남전을 계기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케 하신것 같습니다.많은 증서들이 월남전을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항상 강건하시고 행복하십시요.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영혼의 영원한 장래를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충실히 준비하고 계시는데 우리들이 육신적으로 잘 살고 잘 먹는데 관심은 많아도 그 영적인 그 귀한 가치를 모르고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