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길
글 : 김민숙
앞을 막아서는 우뚝 솟은 바위와 마주쳤다. 돌아가는 길이 있음직한데 둘러보아도 쉽사리 눈에 띄지 않는다. 우리를 향해 일어서고 달려오던 산줄기, 멀리 펼쳐진 들, 손바닥만하게 보이던 도시의 광경에 도취한 자신감인가. 한 친구가 먼저 바위를 기어오른다. 불안한 듯 머뭇거리던 다른 친구가 따라 오르고, 도리 없이 나도 기어올랐다. 아래에서 올려다볼 때는 선돌 같았지만 올라와 보니 평평한 너럭바위가 여럿 이어져 있어 신선대인가 싶다. 이어진 바위를 건너가다가 바른편으로 눈을 돌렸다. 까마득한 절벽이었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자세를 낮추는 것으로는 모자라 네 발로 긴다. 안 보려고 시선을 피하는 벼랑 아래가 자꾸 곁눈으로 들어온다. 마지막 바위에 섰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겨우 한 사람 발 디딜 틈의 바닥이 보일 뿐 왼편은 나무로 막히고 오른쪽은 다시 낭떠러지다. 오금이 굳는다. 버팀이 될 만한 요철도 없는 급경사의 바위에 밧줄도 없다. 건너온 바위를 되돌아보니 돌아설 용기도 나지 않는다. 눈 아래 보이는 세상은 허공에 불그레하게 번진 핏빛이다. 눈을 감고 싶다.
먼저 배낭과 스틱을 아래로 던졌다. 손바닥에 침을 두 번 뱉고, 다섯 살 언니 등에 업힌 아이처럼 앙버티며 온몸을 바위에 밀착시켰다. 손바닥이나 등산화의 바닥 중 하나만 바위에서 떨어져도 나락이다. 팔공산은 바위가 많아서 아버지 같은 힘이 있다고, 조금 전까지 떠들어댄 경솔이 마음에 걸린다. 손바닥 길이만큼 손을 한 번 낮추고 발바닥 길이만큼 발을 낮추어 갔다. 왼발 옆으로, 오른발 아래로, 오른손 떼고, 먼저 내려선 친구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절반이나 내려왔을까. 순간 몸이 기우뚱하면서 한 발이 미끄러졌다. 무조건 매달렸다. 하늘에, 조상님들께, 천지신명께, 바위에…. “눈 감지마!” “오른발 옆으로 벌려.” “내려다보지 마.” 친구의 주문이 내 기도보다 더 다급하다. 아득하다. 그날이 어지럽게 겹쳤다.
스무 해도 더 지난 일이다. 초여름쯤이었나? 매화산으로 올라가 가야산으로 내려오는 코스가 기가막히게 아름답다는 말만 듣고 운동화에 청바지 차림으로 배 선생을 따라나섰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설악산 흔들바위까지 올라간 이후 산은 처음이었다. 남산 제일봉에 막걸리를 나누어 주는 신선이 있다는 말에 상기되어 덤비듯이 산을 올랐다. 숨이 목에 걸리고 점퍼를 한 겹 벗을 무렵부터 안개구름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얼굴에 내리는 청량한 습기에 기분이 상쾌했다. 어슴푸레해지는 시야 속의 산은 신비스러워서 신선이라도 된 듯 가슴이 벅차올랐다. 어느 지점에서인가부터 서너 발자국 앞선 배 선생이 보이지 않았다. 구름이 세상을 온통 집어삼켰고, 우리는 구름의 검은 입속에 갇혔다. 충혈되도록 눈에 힘을 주어도 시계視界는 제로였다.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는 구름 위로 올라설 것이라는 믿음으로 오직 촉각에 의지해서 발길 닿는 대로 나아갔다. 수도 없이 많은 바위가 앞을 막아섰다. 기어오를 수 없는 바위는 양팔을 휘둘러 안고 돌았고 보이지 않는 면에 부딪히고 상처 났다. 정상은 어디쯤 있는지, 지금 여기가 산의 허리인지 어깨인지 전혀 가늠할 수 없었다. 앞서던 배 선생이 길을 잘못 든 것 같다고 선포하듯이 말했다. 하지만 돌아 설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길을 돌아선다는 것은 벼랑 아래로 떨어지는 일 같아서 휘청거리면서도 높은 곳으로 내디뎠다. 볼 수만 있게 해달라고 생각나는 모든 신께 빌었다. 언제 구름 위에 올라섰는지 기억에도 없다. 남산 제일봉에 올라서고야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우리의 행색이 걸레 꼴이었음을 알아챘다. 목을 축여준다는 신선은 없었지만 우리는 살았음에 감사했다. 보이지 않는 신을 찾느라 십방으로 돌아가면서 감사의 절을 했다. 산은 이것으로 마지막이라는 고별의 인사도 덧붙였다.
오른발의 밑창에 바닥이 닿는 느낌이 온몸으로 퍼졌다. 눈을 떴다. 살았다. 감사합니다. 뒤죽박죽 기도가 솟구쳤다. 나머지 왼발을 바닥에 찍고 축축한 손으로 바위를 밀어내며 일어서려다가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한 무리의 등산객이 바로 아래 왼편 우회로를 떠들썩하게 웃으며 지나가고 있었다.
해가 저물녘에야 출발 지점에 돌아왔다. 올라갈 때 스치고 지나간 산행안내도 앞에서 오늘의 행로를 되짚어본다.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길, 그 지점으로 보이는 암릉이 염불봉이다. 기도 없이 땅에 내려설 수 없는 바위. 인간이 자연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언제 간절한 기도를 하고, 어디서 이다지도 절절하게 몸과 마음을 낮추어 바닥에 엎드릴 것인가. 도심에서 자동차로 30분 거리에 우리 도시를 감싸고 있는 아버지를 닮은 산이 있고, 그곳에 사람을 만드는 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