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1485년 잉글랜드 왕 헨리 7세(Henry VII), 영국왕실 근위병(The Yeomen of the Guard)을 창설함
1650년 종교단체 '프렌드협회(Society of Friends)'의 더 널리 알려진 이름인
'퀘이커교도(Quakers)'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됨. 이는 창시자인 조지 폭스(George Fox)가
투옥되어 재판을 받을때 판사에게 '신의 말씀에 두려워하며 떨어라
(quake and tremble at the word of God)'
1735년 존 애덤스(John Adams), 미국 2대 대통령 출생
1751년 리처드 브린슬리 셰리든(Richard Brinsley Sheridan), 아일랜드 극작가 출생
1757년 에드워드 버논(Edward Vernon), 영국 해군제독 세상떠남
1823년 에드문드 카트라이트(Edmund Cartwright), 영국 방직기 발명가 세상떠남
1840년 알프레드 시슬리(Alfred Sisley), 프랑스 화가 출생
1861년 오스트리아, 루마니아와 동맹 결성
1861년 프랑스 조각가 부르델 출생
1871년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 출생
1885년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미국 시인 출생
1905년 러시아황제 니콜라이 2세 국민참정권 인정. 의회소집 선언
1910년 국제적십자 창시자 앙리 뒤낭 사망
1911년 다섯살의 중국 황제 푸이(부의 溥儀),
3세기 동안 중국을 지배해온 만주 제국을 공식적으로 종결하며 새로운 헌법과 체계를 인정함
1913년 부제(府制) 공포 (일본인거류민단법, 거류지제도철폐)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Republic of Czechoslovakia)이 선포됨
1920년 경성복심법원, 3.1운동관계자 48인에 대한 공소심 경성복심법원에서 열림
1922년 이탈리아 파시스트당 로마 점령
1923년 앤드류 보나르 로(Andrew Bonar Law), 영국 정치가 세상떠남
1925년 스코틀랜드의 발명가 존 베어드(John Baird),
최초의 텔레비전 매체 실험에 성공, 움직이는 물체를 화면에 띄움
1929년 나주역 사건, 광주 항거 시작
1930년 일본 발명가 도요다 사키치 사망
1932년 루이 말(Louis Malle), 프랑스 영화 감독 출생
1938년 미국, ‘화성인 습격했다’ 대소동
1938년 미국의 영화배우 오손 웰즈(Orson Welles)가 웰즈(H G Wells)의 <The War of the Worlds>를
라디오 방송물로 제작하여 방송하자 시청자들이 이를 실제 상황으로 오인하여 큰 소란이 벌어짐
1943년 일화(日華)동맹조약 체결
1945년 군정청, 출판등록제 실시
1947년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조인
1947년 軍政長官에 딘 소장 임명, 통위부에 軍紀司令部 설치
1948년 유엔임시총회, 총회에 대하여 남북평화교섭 달성시까지 점령군 계속 주둔 요청
1950년 영자신문 <코리아타임즈>가 창간되다.
1951년 육군대학 창설(대구)
1951년 육군사관학교 4년제로 재개교(진해)
1953년 일본-중국, 무역협정 조인
1954년 북한, 남북한 연석회의 제의.
1956년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 등 3국군, 수에즈운하 진격(11월 6일 정전).
1956년 피오 바로자(Pio Baroja), 스페인 소설가 세상떠남
1957년 혼혈아 80명 미국으로 첫 이민
1959년 서울지검, 위장자수간첩 김승균 월북 직전 체포
1959년 짐 몰리슨(Jim Mollison), 스코틀랜드 비행사 세상떠남
1960년 디에고 마라도나(Diego Maradona), 아르헨티나 축구선수 출생
1960년 부산 밀수깡패 100여명의 경관납치 구타사건
1961년 소련 공산당대회, 레닌묘에서 스탈린유골 추방 결의
1962년 유엔총회, 중국 가입안 부결
1962년 이스라엘, 벤스비대통령 3선
1963년 알제리와 모로코간 사하라전투 휴전에 합의(2일 재발)
1965년 락 그룹 롤링 스톤즈(Rolling Stones)의 브라이언 존스(Brian Jones), 마약 소지혐의로 구속됨
1966년 아베베 동아마라톤(서울~인천)서 2시간 17분 04초로 우승, 1위로 골인한 마지막 레이스
1967년 소련 인류 최초로 무인원거리조종 위성 코스모스 186,188호 자동도킹 성공, 3시간 30분 궤도 돌고 분리
1967년 중국-인도네시아, 쌍방 외교관 완전철수 합의 (사실상 단교)
1968년 울진·삼척지구에 북한 무장공비 120명 침투, 양민 23명 학살
(12월28일 107명 사살, 5명 생포, 2명 자수로 막을 내렸다)
1971년 경남항, 목포 근해 소허사도에서 소형 간첩선 나포 및 간첩 4명 사살.
1972년 탄도탄 요격 미사일 조약(ABM) 발효
1974년 무하마드 알리, 조지 포먼에 KO승
1974년 아랍 정상회담. 석유무기화 금지합의.
1975년 스페인왕에 후안 카를로스 즉위
1976년 중앙정보부, 거문도 침투간첩 김용규의 자수 발표
1979년 반즈 네빌 월리스(Barnes Neville Wallis), 영국 항공기술자 세상떠남
1979년 일본, 오오히라(大平)내각 총사퇴
1981년 정전위 중립국감독위 소속 체코병사, 판문점 유엔군 관할지역으로 망명
1981년 폴란드, 파업금지법안 의회에 제출
1983년 그레나다 북한 군사동맹
1987년 신민주공화당 창당(총재 김종필)
1988년 가입전화 1천만회선 돌파
1988년 통일교의 지도자인 문선명, 서울에서 6,516쌍의 결혼을 진행시킴(이들은 모두 전날 처음 만났다).
1990년 서울 국제무역박람회 개막
1990년 영국-프랑스간 해저터널 관통
1991년 중동평화회담 마드리드서 개막
1992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 경기민요 '선소리산 타령' 예능보유자인 정득만씨 별세
1992년 프랑스 화가 존 미첼 사망
1997년 메사추세츠 캠브리지 법정,
영국인 보모 루이즈 우드워드(Louise Woodward)의 아이 살해 혐의에 유죄 판결.
1997년 유럽 12개국 공동상업위성 '아리안5호' 발사
1998년 정주영회장, 김정일과 요담. 김이 정회장 숙소인 <백화원초대소>방문.
1)금강산 장기독점개발료 2004년까지 매월 분할지불, 관광선 11월 18일부터 운항.
2)서해안에 2천만평 규모의 공단조성.
3)고선박해체, 자동화 조립공장 건설, 평양 화력발전소 건설, 광천수 개발등 9개?/td>
1999년 인천 호프집 화재로 중-고생 등 56명 사망
2000년 동아건설, 채권단의 자금지원-워크아웃 중단 결의로 사실상 퇴출
2001년 초음속 경(輕)공격기 한·미 공동개발
2001년 한·미연합특수전 전술토의
2002년 국산 초음속 항공기 T-50 첫비행 성공. 초음속기 보유 세계 12번째
2002년 중국, '양빈 재산몰수·국외추방' 북에 공식통보
2005년 가장 오래된 광개토대왕비 유리원판 사진 공개
1950 영자 신문 <코리아 타임즈> 창간
1966 제3회 경인 국제마라톤 대회 열림
1981 정전위원회 중립국감독위소속 체코병사, 판문점을 통해 망명
1988 일본 동경 동쪽 600마일 북태평양해역서 오징어잡이 원양어선 침몰
27명 실종
1988 울진원전, 합선사고로 발전 중단
1988 가입전화 1천만회선 돌파
1990 서울 국제무역박람회 개막
1991 실리콘 발광실험을 국내 처음으로 성공
한국전자통신연구소의 이일항, 박경호, 장순호 박사팀
1885 미국 시인 에즈라 파운드 태어남
"예술의 역사란 걸작의 역사이며, 결코 실패작과 보통작의 역사가 아니다."
1861 프랑스 조각가 부르델 태어남
1871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 태어남 대표작: 젊은 파르크, 해변의 묘지
1910 적십자의 아버지인 스위스 인도주의자 앙리 뒤낭(1828-1910) 세상 떠남
뒤낭은 이탈리아 통일전쟁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책 <솔페리노의 추억>에서
전시에 부상자를 구호하기 위한 중립적인 민간기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는데
이 제안으로 1863년에 국제적십자사가 창설되었다.
1901년 제1회 노벨평화상을 받은 앙리 뒤낭은 전재산을 적십자에 기증하고
빈민촌에서 살다가 양로원에서 삶을 마쳤다.
국제적십자사의 깃발은 뒤낭이 태어난 스위스의 국기를 거꾸로 한 것이다.
1938 미국에서 라디오 드라마 <우주전쟁>의 혼란 일어남
1947 제네바에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체결
1983 터키 전역에 진도 7.1의 지진 발생. 1,300명 사망
1991 홍콩과 베트남,월남난민 송환에 합의
홍콩에 수용되어 있는 월남난민 6만여명을 3년 이내에 모두 송환키로 합의
【오늘의역사】10월30일 동양일보 dynews1991@dynews.co.kr
△충주농업고 개교(1929)
△영자 신문 ‘코리아 타임즈’ 창간(1950)
△3회 경인 국제마라톤 대회 열림(1966)
△일신여고 개교(1967)
△정전위원회 중립국감독위소속 체코병사, 판문점을 통해 망명(1981)
△일본 동경 동쪽 600마일 북태평양해역서 오징어잡이 원양어선 침몰. 27명 실종(1988)
△울진원전, 합선사고로 발전 중단(1988)
△가입전화 1000만 회선 돌파(1988)
△서울 국제무역박람회 개막(1990)
△실리콘 발광실험을 국내 처음으로 성공. 한국전자통신연구소의 이일항, 박경호, 장순호 박사팀(1991)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 경기민요 `선소리산 타령` 예능보유자 정득만씨 별세 (1992)
△유럽 12개국 공동상업위성 `아리안5호` 발사(1997)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정몽헌 현대전자 회장, 평양에서 김정일 면담(1998)
△인천 호프집 화재로 중-고생 등 56명 사망 (1999)
△동아건설, 채권단의 자금지원-워크아웃 중단 결의로 사실상 퇴출(2000) △초음속 경(輕)공격기 한·미 공동개발(2001)
△국산 초음속 항공기 T-50 첫비행 성공. 초음속기 보유 세계 12번째(2002)
△가장 오래된 광개토대왕비 유리원판 사진 공개(2005)
●1741년 화폐속의 인물 카우프만(오스트리아100Schilling-) 출생 1969년 발행
카우프만(Angelica Kauffmann) 1741. 10. 30 ∼ 1807. 11. 5 스위스 화가(초기 신고전주의 양식의 화가.
로베르트 아담이 설계한 저택에 장식적인 벽화를 그린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화가인 요한 요제프 카우프만의 딸이다. 어린 시절 음악과 회화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여 어려서 이미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초기에는 앙리 그라블로와 프랑수아 부셰 등 프랑스 로코코 회화의 영향을 받았다. 1754년에 이탈리아를 방문해 예술적인 재능뿐 아니라 인간적인 매력으로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로마에 있는 동안에는 안톤 라파엘 멩스의 신고전주의에 영향을 받았다. 카우프만은 영국 대사의 부인인 웬트워스 여사의 권유로 1766년에 그녀를 따라 런던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왕가의 총애를 받았다. 그녀는 조슈아 레이놀즈 경과 친하게 지냈는데, 그녀가 영국에 머무르는 동안 그린 수많은 초상화와 자화상의 대부분은 그의 초상화 양식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영국 왕립아카데미의 창설을 위한 청원의 서명목록 중에 그녀의 이름이 들어 있다. 이 아카데미에서 1769년에 발행한 최초의 책자에는 그녀가 친구인 화가 메리 모저와 함께 회원으로 올려져 있다. 1770년대에 카우프만은 아담이 설계한 인테리어들(예를 들면 런던의 '20포트맨 광장'에 있는 지금의 코톨드 미술관)의 장식에 사용될 그림을 그리는 일에 가담했다. 1781년 그녀의 첫 남편이 죽은 뒤 당시 영국에 머물고 있었던 베네치아의 미술가 안토니오 축키(1726~95)와 결혼했으며 그뒤 곧 로마로 돌아갔다 .
●방직기 발명가 카트라이트 사망(1823.10.30)
근대 방직기의 기초를 확립한 영국의 발명가 에드먼드 카트라이트가 1823년 10월 30일 사망했다. 80세였다. 옥스퍼드대학을 나온 카트라이트의 본업은 성직자였다. 우연한 기회에 알게된 면직물 기계에 흥미를 느껴 기계 제작에 매달린 것이 그의 이름을 오늘날에까지 남기게 된 계기가 됐다.최초의 역직기(동력 방직기) 발명이 첫 성과물이었다. 원동기를 이용한 역직기는 그때까지 손으로 하던 길쌈 작업의 대부분을 기계화했다. 개량에 개량을 거듭한 역직기가 많은 공장에서 가동을 시작했으나 방직기의 출현으로 실직을 우려한 직공들의 폭동으로 많은 기계가 파괴됐다. 산업혁명기의 러다이트운동(기계파괴운동)때문이었다.그는 이 밖에도 소모기 등 몇가지의 발명으로 산업혁명을 더욱 발전시켰다. 특히 소모기는 당대의 방적기술을 한 단계 발전시킨 발명품이었다. 1809년 영국 의회는 그의 공적에 감사하며 1만달러의 상금을 수여했다.
●프랑스 조각가 부르델 출생(1861.10.30)
프랑수아 로댕에 이어 근대 조각을 발전시킨 프랑스 조각가 에밀 부르델이 1861년 10월 30일 태어났다.1889년의 살롱 출품작이 로댕에게 인정받아 그의 조수로서 장기간 사제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스승인 로댕과는 대조적인 독자적인 작풍을 세웠다.
'활 쏘는 헤라클레스'(사진)는 그의 대표작으로 헤라클레스가 막 활을 쏘려는 순간의 집약된 힘을 나타내고 있다. 청동이 주는 단단하면서도 근력이 넘치는 인체 표현은 에너지를 모두 쏟아 넣어야 한 작품이 완성된다고 믿었던 그의 신념을 잘 드러내고 있다.
●마데로 Francisco (Indalecio) Madero(1873.10.30~1913.02.22
마데로는 독재자 포르피리오 디아스에 반대한 멕시코의 혁명가이다. 혁명의 성공으로 1911년 대통령이 되었으나 보수파와 혁명파, 양쪽 모두로부터 반발을 사 비참한 말로를 맞았다.마데로는 키가 작고 왜소하며 안색이 창백한 편으로 그리 호감을 주는 인상은 아니었고 채식주의자였으며 절대 금주주의자, 유심론자였다. 독재자 디아스가 언론에서 발표한 약속을 어기고 1910년 선거에 재출마하려 하자, 마데로는 '재선반대당'을 결성해 대통령 후보로 등록했다. 반란 선동과 당국을 모독한 죄로 체포되었다가 보석으로 풀려난 그는 혁명군을 결집했다. 혁명군이 1911년 5월 10일 시우다드후아레스를 점령하자 디아스는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1911년 10월 대통령선거 결과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11월 6일 취임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미숙한 정치력과 지나치게 낙관적인 이상주의가 장애가 되어 실패로 끝났다. 심복 빅토리아노 우에르타에게 배신당해 체포된 마데로는 감옥으로 이송되는 도중 호송병에게 암살당했다.
마데로의 죽음은 군부독재에 대항한 끊임없는 투쟁에서 혁명적 단결의 상징이 되었다. 멕시코 혁명의 민주주의 세력들은 그의 순국으로부터 막대한 영향을 받았다.
●1873년 화폐속의 인물 마데로(멕시코) 출생 멕시코 500(1979년 발행)
마데로(Francisco (Indalecio) Madero) 1873. 10. 30 ∼1913. 2. 22. 혁명가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메릴랜드 에미츠버그의 마운트세인트메리대학에서 수학하고(1886∼88), 캘리포니아대학교와 파리의 경영대학원에서 공부했다. 마데로는 채식주의자이며 절대 금주주의자, 유심론자, 온건 민주주의 신봉자였다. 코아우일라 주에서 베니토 후아레스 민주구락부와 한 정당의 조직을 도와(1904~05) 주지사가 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그는 포르피리오 디아스의 독재를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범국민적인 민주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재빨리 깨닫고 이 목적을 위해 정권으로부터 독립적인 언론인들을 지원하고 정치적 조직화 작업을 독려했다. 디아스는 1908년 미국의 한 언론인에게 멕시코는 민주화의 준비가 되어 있으며 따라서 자기는 1910년에 물러날 작정이라고 말했는데, 1909년에 디아스가 생각을 바꾸어 1910년의 선거에 재출마할 의사를 피력하자 그는 독재자 디아스 대통령이 1910년에 물러난다는 약속을 버리고 선거에 재출마할 의사를 피력하자 마데로는 ‘재선반대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어 “실질적인 참정권-재선불가”를 구호로 내세웠다. 반란을 선동하고 당국을 모욕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보석으로 풀려난 그는 텍사스의 산안토니오로 피해 1910년 10월 ‘산루이스포토시 계획’을 발표하여 자신이 멕시코의 합법적인 대통령이라고 선언하고 무장봉기에 참여할 것을 촉구했다. 반란은 계속 번졌으며, 디아스는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1911년 10월 대통령선거에서 마데로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11월 6일 취임했다. 멕시코 전역에서 ‘민주주의의 사도’로서 환호를 받았다. 마데로는 민주화정책을 우선시하여 보수주의 세력과 혁명분자들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었다. 멕시코 시에서 일어난 군부반란으로 감옥으로 이송되는 도중 호송병에 의해 암살당했다. 마데로의 죽음은 군부독재에 대항한 끊임없는 투쟁에서 혁명적 단결의 상징이 되었다. 멕시코 혁명의 민주주의 세력들은 그의 순국으로부터 막대한 영향을 받았다.
●러시아 황제, 10월선언 발표(1905.10.30)
1905년 10월 30일(구력 10. 17)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10월선언을 발표함으로써 차르 체제가 무너지고 입헌군주제가 출범했다. 1905년 일련의 혁명적 사태에 위협을 느낀 차르 니콜라이 2세는 군사독재체제를 구축할 것인가 아니면 헌법을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선택의 기로에 직면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르게이 율리예비치 비테의 조언에 따라 10월선언이 공포되었다.10월선언의 주요 내용은 시민권(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보장, 참정권 확대, 두마(의회)의 창설 등이었다. 두마는 인민에 의해 직접 선출되는 대의원들로 구성되며 법령승인의 권한을 부여받았다. 10월선언으로 반정부 세력을 약화시키고 혁명을 진압할 수 있었으나 정부는 선언의 약속들을 잠정적·형식적으로만 이행했다. 10월선언에 따라 1906년 4월 23일 러시아의 헌법으로 효력을 발휘하게 될 기본법이 선포되었다.기본법은 두마에 양원을 마련하고 그 중 하원만을 인민이 직접선거에 의해 구성하도록 규정했다. 두마는 예산에 대해서 제한적인 감독권을 행사할 뿐 행정부서에 대한 통제권은 없었다. 시민권과 참정권 역시 공약에 못 미치는 것이었다.
●1911년 중국 청나라 마지막황제 푸이가 청나라 종결을 정식 선언하다.
청일전쟁에서 청 왕조가 패배한 후 중국 국내 뿐 아니라 일본에 유학한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많은 혁명 단체가 조직되어 활동하였다. 이에 통합의 필요를 느껴 1905년에 중국혁명동맹회를 동경에서 창립하는 데까지 발전하였다. 동맹회는 민족, 민생, 민권을 기본 이념으로 하는 삼민주의 이념을 공식적으로 채택하면서, 기관지인 {民報}를 통해 이를 널리 알리는 한편, 국내에서는 무장봉기를 일으켜 혁명운동을 확산시켜 나갔다. 무장 봉기는 산만한 조직에 의해 산발적으로 진행되었는데, 주로 중국내에 있는 비밀결사인 화남의 천지회나 양자강 유역에 있는 가로회와의 연합에 의존하였으며, 동맹회 이전의 무장 봉기까지 포함하면 전후 10여 차례에 달하였다.
그러나 중국혁명동맹회의 활동만이 청조를 무너뜨린 동력은 아니었다. 중국의 경제적 조건이 악화된 것도 그 중의 하나였다. 청조가 신정비용과 배상금 마련을 위해 과도하게 세금을 부과하자, 납세자들은 항세운동을 전개하였고, 일부 지역에서는 쌀값 폭등에 따라 민중들이 관의 조정을 기대하며 청원하였으나 오히려 탄압을 받자, 쌀가게를 공격하여 쌀 폭동을 야기하였다. 청조는 스스로 경제적인 상황을 악화시켜 자신의 갑작스런 몰락에 기여하였던 것이다. 이권회수운동 과정에서 정부가 철도를 국유화한 조치도 청조의 붕괴를 촉진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성을 중심으로 추진된 이권회수 운동 중에서, 외국인이 소유한 철로를 회수하는 일은 중국인의 애국심과 지방의 이익을 동시에 만족시켜 줄 수 있었으나, 정부는 이를 국유화하여 지배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실천에 옮겼다. 철로를 외국에 팔아 넘길 것이라 생각한 호남과 호북, 양광, 사천 성의 애국주의자들이 철로를 지키자는 보로 운동(保路運動)을 전개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 운동의 시위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혁명파의 공작을 받은 호북성의 신군은 이를 진압하지 않고 오히려 반만 반란으로 선회하였다(1911.10.10. 신해 혁명). 혁명은 전국에 확산되었고, 북경 지역의 군사실력자인 원세개가 이에 동조함으로 청 왕조는 사실상 끝이 났다. 따라서 1911년 10월 30일 당시 다섯 살이었던 선통제 푸이가 3세기 동안 중국을 지배해 온 만주제국을 정식으로 종결하고 새로운 헌법과 체계를 인정한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즉 중국 민중의 동향은 혁명의 기운으로 향해 달려가고 있었으며 멸만흥한(滅滿興漢)의 민족주의는 화교·유학생·민족자본가의 반(反)봉건주의와 합류, 쑨원[孫文]이 주도하는 중국혁명동맹회(中國革命同盟會)에 결집되어 신해혁명(辛亥革命:1911)을 성공으로 이끌었으므로 1912년 선통제(宣統帝) 푸이[溥儀]의 퇴위와 함께 청왕조는 종말을 고하였다. 그것은 또한 중국 민중의 전제군주제와의 결별이기도 하였다.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 맺어짐(1927.10.30)
1947년 10월30일 스위스 제네바. 서방진영 23개국이 협정을 맺었다. 이름하여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로 대체되기 전까지 국제무역을 주도한 GATT 체제가 출범한 순간이다.협정의 골자는 관세 장벽과 수출입 제한 완화. 회원국 간 최혜국 대우를 적용해 관세 차별을 제거하자는 합의에는 2차 대전 이전 세계를 휩쓴 대공황의 와중에서 경쟁적으로 관세를 올려 국제무역의 파국을 초래했다는 반성이 깔려 있다. GATT는 당초 국제무역기구(ITO)가 설립되기 전까지만 활용될 잠정적 협약으로 출발했으나 갈수록 위력을 더해갔다. 미국과 영국이 주도한 1944년의 브래턴우즈협약에서 국제통화기금(IMF)ㆍ세계은행과 더불어 전후 경제질서의 3대 축 가운데 하나로 구상된 국제무역기구 창설이 미국 의회의 인준 거부로 무산되자 대역을 맡으며 성장했기 때문이다.GATT는 기대대로 국제무역을 촉진시켰다. 세번째 모임인 1951년 토퀘이(영국)라운드 이후 1964년까지 약 74억달러의 관세가 줄어들었다. 1964년의 케네디라운드 이후 9년 동안은 관세 400억달러를 절감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도쿄라운드(1973년)부터는 비관세장벽과 보조금도 의제에 포함되고 1995년 우루과이라운드에서는 농산물과 자본이동, 지식재산권까지 영역을 넓혔다. 우리 나라는 1973년 정 회원국이 됐다.GATT체제가 1995년 WTO로 확대 개편된 후에는 세계화의 압력이 더욱 거세지고 있다. 현재 WTO 가입국은 151개 국. WTO 시스템은 자유무역의 허울을 쓴 선진국의 기득권 보호를 위한 방패막이이자 빈국과 부국 간 양극화의 주범이라는 지적 속에서도 확대일로다.
●나주역 사건, 광주 항거 시작(1929.10.30)
1929년 오늘 오후 5시 30분쯤, 전남 나주역 개찰구 밖이 소란했다. 일본인 학생들이 한국 여학생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했기 때문이었다. 피해 여학생의 사촌동생 박준채가 따졌으나 사과는커녕 오히려 '조센징'이라며 놀림을 받았다.순간 박준채의 주먹이 일본인 학생의 얼굴로 날아들었고, 이내 두 나라 학생들의 싸움이 벌어졌다. 일본인 순사는 사정도 묻지 않은 채 박준채를 때리고 욕설을 퍼부으며 일방적으로 일본인 학생을 두둔했다. 이날은 일단 이렇게 지나갔다.그러나 다음날부터 광주 시내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11월 3일, 마침내 억눌렸던 민족감정이 폭발했다. 광주 전역의 학생들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지로 진출한 것이다. 하룻동안 40여 명의 학생들이 체포됐으나 이날은 시작일 뿐이었다. 이듬해 3월까지 전국적으로 194개 학교 5만 4000명이 시위에 참가, 퇴학 582명, 무기정학 2330명, 검거 1462명이라는 큰 피해를 입었다. 3ㆍ1운동 후 국내에서 일어난 최대규모의 항일운동이었다.
●미국, '화성인 습격' 방송 소동(1938.10.30)
1938년 10월 30일 밤 8시. 미국 CBS 라디오에서 '화성인의 습격'이라는 라디오 드라마가 방송될 때였다. 드라마는 23세의 배우 오손 웰즈가 '우주 전쟁'이라는 소설을 할로윈 데이(10월 31일 밤에 열리는 서양 축제)에 맞춰 방송용으로 꾸민 것이었다.방송 도중 갑자기 '임시 뉴스'가 흘러나왔다. 드라마 속 인물인 필립스 기자 역할을 맡은 웰즈가 뉴저지의 한 농장에서 "화성군의 습격으로 미국 곳곳이 파괴되고 혼란에 빠졌다"고 전하는 가상 실황 중계였다. 그러나 이 드라마용 뉴스를 실제 상황으로 착각한 미국인들은 공포에 빠져들었다. 뉴욕에서는 수 천명의 시민이 피난하고, 뉴저지주에서는 "유독가스가 퍼졌다"며 20여 가구가 탈출을 시도하는 등 전국이 혼돈에 휩싸였다.역사상 가장 대표적인 방송 사건으로 기록된 이 소동은 드라마를 현실로 착각하게 할 만큼 뛰어난 웰즈의 연출력 덕분이었다. 큰 혼란이 빚어졌지만 웰즈는 이 드라마로 재능을 인정받아 '신동'으로 불렸고 훗날 배우와 감독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무하마드 알리, 조지 포먼에 KO승(1974.10.30)
1974년 10월 30일 아프리카자이레 수도 킨샤사에서 열린 프로복싱 세계헤비급 타이틀매치. 도전자 무하마드 알리(32)는 8회 종반 챔피언 조지 포먼(26)의 턱에 날카로운 원투 스트레이트를 터트렸다. 휘청거리던 포먼은 알리의 오른손 피니시 블로를 맞고 그대로 매트에 쓰러졌다. 알리의 KO승이었다.TV 위성중계로 이를 지켜보던 전세계 복싱팬들은 `의외의 결과`에 경악했다. 그리곤 약속 이나 한 듯 `역시 알리`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포먼은 KO율 92.7%(40승37KO승)를 자랑하던 '무패의 철권'. 복싱실력이 알리에 못지 않다던 조 프레이저를 6번이나 다운시키고 챔피언에 올라 '사상 최강의 주먹'으로 평가받던 선수였다.이날도 7 회까지 포먼의 일방적인 공격이 있었으나 이 모두가 포먼의 힘을 빼려는 알리의 두뇌플레이였다. 8회 들어 알리는 힘이 빠진 포먼이 잠시 방심하는 틈을 놓치지 않고 집중타를 가해 멋지게 경기를 끝냈다. 이로써 두번째 헤비급 타이틀을 쟁취한 알리는 1978년 2월 7차 방어전서 레온 스핑크스에게 패했으나 리턴매치서 승리, 세 번 헤비급 왕좌에 오르는 최초의 선수가 됐다.
●동독 민주화 요구 시위(1989.10.30)
1989년 오늘 옛 동독 국민 50만 명이 라이프치히 등 여섯 개 도시에서 민주화 시위를 벌였다. 옛 동독 국민들은 공산당의 권련 독점 포기와 자유선거 등 대대적인 개혁을 요구했다.시위 12일전 호테커의 뒤를 이어 취임한 크렌츠 공산당 서기장은 공산당의 정권 고수 입장을 명백히 밝혔다.그러나 옛 동독 공산 정부는 열흘 뒤인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의 개방을 발표하는 등 결국 국민들의 개혁요구에 굴복했다.
●영국-프랑스간 해저 터널 관통(1990.10.30)
1990년 10월 30일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해저터널이 뚫렸다. 터널 착공에 들어간지 3년 만의 일이었다. 도버 바로 옆 포크스톤에서 출발한 영국 토목기술자들과 칼레를 떠나 바다 밑을 파 온 프랑스 기술자는 이날 양국 국기를 흔들며 터널 중간에서 만나면서 역사적인 사건이 탄생한 것이다. 실제 승객이 오가는 철도 개통은 4년 후 이뤄졌지만, 유럽 대륙과 48㎞해협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나왔던 유럽의 변방 섬 나라 영국이 대륙에 문자 그대로 하나로 연결된 것이다. 4년 뒤에는 이 해저 터널을 따라 기차가 다니게 됐다.영국과 프랑스의 해저터널은 200년간 꿈꿔왔던 유럽통합이라는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 대명제였다. 예전에는 국가간의 전략적인 차원에서 추진된 거라면 이번 터널은 순수한 민간투자 형태로 이뤄졌다는 것이 그 차이가 있다. 해저터널은 여객 전용 열차용과 자동차를 싣고 달릴 열차용 2가지로 설계됐다.평균 깊이는 해저 44.4m, 총 거리 48㎞. 7년에 걸친 공사에는 모두 1만 5000명이 투입됐다.
▶ 중동 평화회담, 마드리드서 개막(1991)
1991년 오늘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서 중동평화회담이 열렸다. 걸프전 이후 미국의 주도권이 강화되면서 개최된 팔레스타인 분쟁 당사국들 간의 최초의 다자간 회담이었다. 당시 부시 미국 대통령은 개막 연설에서 '영토와 평화의 교환'이라는 1967년 유엔안보리 의결 내용을 재차 촉구했다. 고르바초프 옛 소련 대통령은 중동의 평화는 팔레스타인의 권리가 존중될 때만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마드리드 중동평화회담은 아랍과 이스라엘의 원칙적인 입장 고수로 별 성과 없이 끝나지만 중동평화를 위한 첫 걸음을 내딛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정주영·정몽헌 회장 평양서 김정일 면담(1998.10.30)
1998년 오늘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정몽헌 전 현대전자 회장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평양에서 면담을 가졌다. 이 면담에서 현대는 금강산 관광사업에 대한 30년 독점권을 확보함으로써 현대의 대북 경협사업이 획기적인 전기를 맞게 됐다.금강산 관광사업은 북한에 고향을 둔 실향민을 비롯한 많은 국민들의 관심을 끌었다. 첫 금강산관광은 1998년 11월 남북분단 이후 처음으로 관광객과 승무원등 천2백여 명을 태우고 동해항을 출항한 금강호가 북한 장전항에 닻을 내림으로써 시작됐다.그러나 금강산 관광이 당초 기대와 달리 해마다 대규모 적자를 내면서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2003년 2월부터 시작된 육로관광으로 탈출구를 찾게 됐다.
▶ 인천 호프집 화재, 중·고생 등 56명 사망(1999)
1999년 오늘 인천광역시 중구 인형동에 있는 4층 상가건물에서 불이나 중·고교생 등 56명이 숨지는 대형사고가 발생했다. 건물 지하에 있는 노래방의 내부수리 공사를 하면서 시작된 이날 불은 10대 중고생들과 20대 초반 청소년 등이 몰려있던 2층 호프집으로 번지면서 엄청난 피해를 냈다. 이들 청소년들은 대부분 있지도 않은 비상구와 비상계단을 찾아 헤매다 연기에 질식되거나 불에 타 숨졌다. 불은 긴급 출동한 소방차 15대에 의해 35분만에 진화됐다. 수사결과 이 호프집은 불법 영업을 해 온 문제업소로 드러났고 소유주의 비밀수첩을 통해 단속기관에 뇌물을 건네는 등 비리행위가 밝혀짐으로써 이번 사고도 안전불감증과 공무원의 부정부패가 빚어낸 인재임이 드러났다. 화재발생 직후 종적을 감춘 소유주는 1999년 11월에 자수했다.
●국산 초음속 항공기 T-50 일반에 첫 공개(2002.10.30)
국내에서 처음으로 개발된 초음속 고등 훈련기 겸 경공격기인 T-50 '골든이글'!2002년 8월 시험 비행에 성공한지 2달여만인 2002년 오늘 일반에 공개됐다.1992년부터 5년간의 탐색 개발을 거쳐 1997년부터 본격적인 체계 개발에 착수한지 5년만에 시험 비행에 성공하고 일반에 공개됨으로써 우리나라는 초음속 비행기를 독자적으로 개발한 세계 12번째 나라가 되었다.최고 속도 마하 1.4, 고도 4만 8000피트의 성능을 갖춘 T-50은 각종 시험 비행을 거친 뒤 2005년 8월1일 출고식을 갖고 우리 공군에 인도됨으로써 상용화 단계에 들어서게 됐다.
<참고> 앙리 뒤낭 세상떠남(1910.10.30)
http://economy.hankooki.com/lpage/opinion/200610/e2006102917311163820.htm
http://www.donga.com/fbin/moeum?n=dstory$c_134&a=v&l=0&id=200710300106
<참고> 영국-프랑스 해저 터널 관통(1990.10.30)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7384&yy=2007이 게시물을..
오늘의 관심뉴스는 도둑질 반성문에 관한 기사입니다. 경찰서에 택배로 송부된 많은 카드들 송부하며 자신의 도둑질을 반성하였으나 그 진위는 확인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 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카드의 주인들을 통해 피해규모가 크지 않다고 확인되면 이에 대한 관대한 조치와 반성하는 사회 분위기 조성에 많은 노력을 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수고하세요~
---오-늘-의--관-심-뉴-스--------------------------------------
"죄송합니다. 다시는 도둑질 않겠습니다" 경찰서에 자백편지 기사입력 2008-10-29 00:06
정말 죄송합니다... 【울산=뉴시스】
27일 오전 울산 남부경찰서에 택배하나가 배달됐다.내용물은 다름 아닌 익명으로 보낸 용서를 구하는 편지 한 통과 신용카드, 지불카드 등 7개.편지에는 남의 집갑을 훔쳐 양심의 가책을 느껴 사죄하는 내용으로 가득했다.
"정말 죄송합니다...정말 이제부터는 도둑질을 하지 않겠습니다. 머리 숙여 사죄 합니다." 라는 내용의 편지다.
익명자는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 너무 불안하고 떨렸다고 한통의 편지로 고백했다.당시 당황해서 지갑은 바로 버렸고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은 카드뿐이라는 내용도 적혀있다. 또 편지에서는 지갑 속에 소중한 사진들과 중요한게 많았는지 연신 "죄송하다"는 내용과 "다시는 이 같은 도둑질을 절대 하지 않겠다"고 전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편지내용을 볼 때 도서관에 공부하러 갔던 학생이 남의 지갑을 훔친 것으로 보인다"며 "편지에는 남의 물건에 손을 댄 뒤 가책을 느껴 떨리고 불안한 마음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관련사진 있음> 최창현기자 chc@newsis.com<ⓒ '한국언론 뉴스허브' 뉴시스통신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