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아무리 내 노력과는 상관없는 로또의 행운을 바란다 하더라도,
적어도 내가 해야만 하는 일 하나는 늘 있는 법이다.
바로 로또를 사는 일이다.
하여, 은총과 구원의 체험이 없다고 실망하기에 앞서,
정말 나는 그 은총을 ‘청했는가’ 돌아볼 일이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제 아무리 옳고도 좋은 신앙의 온갖 조문과 계명들이 그저 의무처럼만 느껴진다고 할지라도,
바로 그 괴로움과 힘듦을 위해서라도 ‘부르짖고’ ‘청할’ 일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갓난아기조차도 그 엄마를 부르는 ‘울음’은 울 줄 아는 것처럼.
실상 우리는 ‘내가 일을 해결할 수 있어서’ 신앙인이 아니라,
‘그 해결해 줄 이를 알고 그분께 청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신앙인일 테니까...
“이스라엘 자손들은 고역에 짓눌려 탄식하며 부르짖었다.
그러자 고역에 짓눌려 도움을 청하는 그들의 소리가 하느님께 올라갔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맺으신 당신의 계약을 기억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살펴보시고 그 처지를 알게 되셨다.”
[탈출 2,23-25]
.
.by 진슬기 토마스아퀴나스 신부님
........
계명보다 앞선 것: 부르짖자 들으셨다 - [2018년 6월 27일 일반알현 교리 교육 중]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중략]...
물론 어떤 이들은
하느님 구원의 실제적 체험이 여태껏 한 번도 없었노라 느낄 수도 있습니다.
네, 실상 이렇게 느낄 수도 있죠.
(네, 늘 상) 자기 내면을 바라보며 그저 의무만을 느끼는 이들.
이른바 '자녀의 마음'이 아니라 '노예 영성'을 지닌 이들 말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선택된 백성들이 했듯이 (해야 하죠)
하여 탈출기는 이렇게 전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고역에 짓눌려 탄식하며 부르짖었다.
그러자 고역에 짓눌려 도움을 청하는 그들의 소리가 하느님께 올라갔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맺으신 당신의 계약을 기억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살펴보시고 그 처지를 알게 되셨다.” [탈출 2,23-25]
(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나를 살피십니다.
(따라서) 십계명의 시작머리에 놓인 하느님의 이러한 해방자로서의 면모는
(온갖) 한숨과 신음들에 대한 대답인 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도움을 부르짖으며 시작할 수는 있습니다.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
"주님, 저에게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주님, 저를 안아 주소서"
"주님 저에게 얼마간의 기쁨을 주십시오"라고 말이죠.
(네, 분명) 이것은 도움을 청하는 외침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죠.
(그럼요) 이기주의와 죄악 그리고 노예의 사슬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싶다고
'청하는 건'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아울러) 이러한 부르짖음은 매우 중요할 뿐 아니라 일종의 기도이자
여전히 우리 안에는 억압받고 자유롭지 않은 것들이 있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이죠.
네, 우리 영혼 안에는 자유롭지 못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저를 구하소서, 저를 도우시고 자유롭게 하소서'(라고 해야 합니다)
이런 것이야말로 주님께 드리는 정말 아름다운 기도 중에 하나이니까요.
하여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부르짖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우리의 족쇄들을 끊을 수 있으며 끊기를 원하시니까요.
(그럼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억압 속에 그냥 머물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그리고 감사함 속에서 살아가라고 부르셨는걸요.
실상 우리가 그분께 드릴 수 있는 것보다 말할 수 없이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그분께 기꺼이 순종함으로써 말입니다.
참 아름다운 일이죠.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신 일'과 '이루고 계신 일' 그리고 '이루실 일'들에 대해
언제나 축복하시길 빕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