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7년 12월 24일, IMF의 구제금융을 받고 우리는 ‘산타클로스의 선물’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5개 은행 퇴출, 제일은행 매각으로 숨가쁘게 진행된 은행 구조조정에는 86조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됐다.
그후 7년. 구조조정의 사령관이던 이헌재 당시 금감위원장은 경제부총리로 다시 돌아왔다. 그 세월 동안 우리 은행들은 얼마나 변했는가. 조선일보는 세계적 컨설팅회사 베인&컴퍼니와 함께 한국 은행들의 글로벌 경쟁력을 해부한다.
한국 금융의 2004년은 LG카드 사태로 새해 벽두부터 뒤숭숭했다. 채권은행들이 LG카드를 책임지지 않으려 떠미는 바람에 정부가 팔걷고 나서고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에 떠안겨 겨우 해결을 보았다.
시계바늘을 1년만 앞으로 돌려보자. A시중은행 임원의 2002년 겨울에 대한 고백이다. “당시만 해도 LG카드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처럼 보였다. 각 은행들이 LG카드에 대출을 주려고 서로 경쟁을 벌였다. 나도 LG카드 자금부에 가서 제발 돈을 써달라고 부탁했다가 냉정하게 거절당한 일도 있다.”
불과 1년 앞도 내다 보지 못하는 우리 은행들의 맹목(盲目)은 엄청난 부실로 이어졌다. LG카드에만 모두 7조원대 자금을 빌려준 은행들은 그중 1조4000억원(약20%) 정도를 떼일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해 8대 시중은행 전체 순이익(6000억원 추정)의 2배를 한꺼번에 물린 것이다.
재벌의 이름만 보고 빌려주었다가 몇 조원 단위로 떼이는 한국 은행들 관행은 IMF위기를 겪은 뒤에도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대우(1999년)·하이닉스(2001년)·SK글로벌·카드채(2003년) 등 외환위기 이후 2년에 한 번 꼴로 대형 부실을 얻어맞고 있다. 국내 은행들의 큰 대출 손실 뒤에는 ‘우르르’ 몰려다니는 ‘패거리주의(herd mentality)’가 자리잡고 있다. 다른 은행이 시작하면 앞 뒤 재지않고 함께 덤벼들다 손실을 보는 경우가 많다는 얘기다.
지난 2003년 국내 최대은행인 국민은행이 ‘소호’로 대표되는 중소업체 대출에 나서 재미를 보자, 나머지 은행들도 전담팀을 구성하며 부동산업체는 물론 러브호텔·룸살롱까지 ‘소호’ 딱지를 붙여 대출세일에 들어갔다. 그 2개월 뒤 국민은행 월례회의. 김정태 국민은행장이 이번엔 ‘연체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소호대출에 드라이브를 걸다 연체가 늘어나자 갑자기 급제동을 건 것이다. 모든 은행들이 특색도, 전략도 없이 기업대출에서 가계대출로, 소호대출로 함께 몰려다니다 동시에 손해보고 있다.
금융 경쟁력의 핵심은 리스크 관리지만, 국내 은행의 실정은 외환위기 이후 7년간 별로 나아진 게 없다. 지난 2002년 말 현재 국내 은행들은 1000원을 벌면 무려 188원을 부실로 떼였다. SK글로벌 등의 손실이 반영된 지난해 9월 기준으로 보면, 국내 은행들의 손실금은 333원까지 올라간다. 완전히 헛장사한 셈이다.
이 같은 손실비율은 조선일보와 ‘베인&컴퍼니’가 분석 대상으로 삼은 세계 160개 은행(시가 총액 8000억원 이상·국내 11개 은행 포함)을 배출한 전세계 20개국 가운데 가장 높은 것이다. 아일랜드(48원)·미국(70원)·영국(84원)과는 큰 차이가 나고, 20개국 평균 손실금(102원)의 2~3배에 육박한다.
이성용 베인&컴퍼니 대표는 “이런 취약한 경쟁력으로는 동북아 금융허브는 고사하고, 안방으로 몰려오는 외국 은행과 싸워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특별취재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