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싹을 틔우고 스스로 줄기를 뻗어서 배구공만한 수박 두 덩이가 맺혀졌습니다. 아마 초여름에 수박 한덩이 사다가 다 먹고나서 씨와 껍질을 버려두었던 밭 한 귀통이에서 싹을 틔운 것입니다. 여러 개가 싹을 틔우긴 했지만 가을채소들 모종하느라 대부분 거두어버리고 실한 놈 두 개를 남겼더니 놀랍게도 수박이라는 형태로 제 수준에서는 끝마무리까지 다 해서 과실을 맺어주었습니다.
지난 토요일 코로나백신 2차 접종 후 심한 감기몸살처럼 밤새 끙끙 앓고난 후유증으로 멍하다싶었는데 수박을 보고, 수박을 가르고, 한입 먹어본 순간 원기회복이 되는 듯 합니다.
일단 자연 속에서 맺어진 수박은 유전자 힘을 다해도 크기는 잘해야 배구공 정도입니다. 그리고 수박껍질에 삐뚤빼뚤하게 그어진 검정선도 그다지 촘촘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고있는 농작물, 특히 과일과 야채들은 크기를 조작한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과일과 야채에 퍼부어지는 성장촉진제는 일정한 수준의 영양분을 확대한 것이라서 그야말로 양만 많을 뿐 실속은 별로 찾을 수 없는 지경입니다.
올해는 그래도 가격이 그런대로 수용할만하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너무 비싸서 감히 사볼 수도 없었던 샤인머스캣 역시 우리가 아는 청포도를 다른 과일과 접목시켜 엄청난 성장촉진제를 투여해 크게 부풀린 것입니다. 특히 망고맛까지 느끼게 하는 샤인머스캣에 사람들이 열광하지만 조만간 이런 류의 과일들은 아이들에게 성조숙증을 유발해서 큰 사회적 문제가 될 것입니다. 실제로 샤인머스캣을 어린아이들에게 주는 것은 주의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듭니다.
이미 성장촉진제를 과다하게 투여한 대부분의 상업용 농작물들의 크기는 매해 커지고 있습니다. 자주 장을 봐야하는 제 입장에서 매해 점점 크기가 커지는 농작물들이 걱정이 됩니다. 특히 올해는 그 크기가 더 커져서 더욱 마음이 어둡습니다. 자본주의 체제 속에 이제 농업도 확실히 한 영역으로 자리매김을 해나가는데 농업기술의 발달은 불가피한 일이지만 이런 농업기술들이 GMO농작물에 이어 향후 우리의 건강에 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다같이 고민해봐야 될 것입니다.
태균이때문에 오래살기로 결심한 제가 그래서 자연 속에서 자연스럽게 성장한 자기유전자대로 맺어준 농작물들을 매일 접하는 것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지만 감사한 일입니다. 많은 분들이 그렇게 하기는 불가능한 일이고, 저 역시 한계가 있지만 그래도 어떤 노력없이 시대를 받아들이는 것과 고뇌하며 반문하면서 시대를 반추해 보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인 듯 합니다.
어제 무성히 자라난 열무를 솎아서 다듬은 후 절여서 열무김치를 담갔습니다. 열무김치에 함께 들어간 고추, 파 등도 자기유전자대로 자라준 우리 텃밭의 수확물들입니다. 이 정도만 되어도 우리 아이들하고 나누기먹는 것 자체가 행복입니다. 시대에 역행하는 것은 많은 부분 불편하고 이단자의 고단함을 감수해야 하지만 때로 꼭 필요한 시대에의 역행은 좋은 방향이 되기도 합니다. 비록 나누어 먹지는 못하지만 눈으로 맛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