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궁 [迷宮]
5-1. 가면의 에덴동산.
혜교씨 그만 일어나세요. 하고 누군가 다혜를 깨웠다. 잠에서 덜 깬 다혜는 두 팔을 허공에 휘저으며 태양이… 태양이 없어… 요 하고 말했다. 네, 해가 벌써 지려 하고 있네요. 조금만 더 있으면 없어질 것 같아요. 하고 닥터화이트가 말했다. 그제서야 다혜가 게슴츠레한 눈동자를 굴리며 아! 깜빡 잠이 들었었구나. 하고 깨달았지만, 해는 이미 서산 마루를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서둘러야 하겠어요. 하고 말하며 닥터화이트가 일어나 다시 앞장 서 걸어나갔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곳의 입구로 보이는 곳에는 결핍된 자들을 위한 위로 공동체 캠프라고 적힌 현수막이 이리저리 구부러진 나무와 나무 사이에 허술하게 걸린 채로 위태롭게 펄럭이고 있었다. 그 뒤로는 산 골짜기의 계곡을 끼고 여기 저기에 각양 각색의 수 많은 텐트들이 자유분방하게 펼쳐져 있었는데, 그 자유분방함이 너무나 지나쳐 뭔가 정리가 필요해 보였고, (현수막에 적힌 내용대로) 위로 캠프라고 하기에는 몹시 어수선하고 난잡 해 보이는 것이 정서적으로 전혀 안정되 보이지 않았다. 그러한 곳이었기에,
이 곳에 대한 뭔가 설명이 필요하다. 고 생각하며 닥터 화이트를 힐끗 한번 쳐다 보았는데, 그것이 의심의 눈초리로 생각되었던지 닥터화이트가 빙긋이 웃어 보이며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이곳은 저 현수막에 적혀있는 그대로 무언가 결손 되었거나 결핍된 사람들의 자유로운 모임입니다. 이 곳에서는 누구나 서로의 멘토이자 멘티가 되어 집니다. 자유로이 소통하고 자유로이 침묵하며 치유의 단계를 밟아 갑니다. 이곳에는 어떠한 규칙도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그 누구의 지시나 간섭도 일체 허용하지 않습니다. 물론, 입소나 퇴소 또한 자유롭습니다. 다만, 모임의 성격상 본인의 치부가 드러날 수 있는 만큼 서로의 사생활 보호를 위하여 회원들이나 모임에 초대받은 사람들 외에는 가급적 비밀리에 은밀히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여기 회원들 모두는 일체 실명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많은 사람들이 가면을 착용하고 있지요. 그 모든 것을 우리는 자유로이 허용하며 존중해 주고 있습니다. 프라이버시 존중 이야 말로 이 모임의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닥터 화이트의 (다소 거창한) 설명을 들으며 다혜는 자못 진지하게 고개를 끄떡여 보이곤 하였지만, 자꾸만 가면을 쓴 사람들의 기괴한(?) 모습이 필요 이상으로 상상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5-2. 가면의 에덴동산 #2
닥터화이트는 이런 극히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모임의 주체자들 중 한 명 이었고, 이곳에서 닥터화이트는 일종의 조정자(?) 역할을 하며 지낸다고 하였다. 구체적으로 어떤 조정(?)을 하고 있는 지 물어보기도 전에 닥터 화이트가 예사롭지 않은 눈빛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이 모임에서의 여러 경험으로 비추어 보건대 다혜씨를 처음 본 순간 무언가의 큰 결핍이 다혜씨에게서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실례를 무릅쓰고 초면에 말을 걸게 된 것입니다. 부디 이곳에서 그 무언가의 결핍에서 꼭 치유되시고 해방(?)되어 나가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별 문제 될 것 없는 덕담일 뿐 이었는데, 왠지 몸에서 오싹함이 느껴졌다. 예사롭지 않은 그의 눈빛에 반응한 여자의… 직.감. 이랄까? (물론, 다혜의 직감이 들어 맞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불길한 뭔가의 냄새가 풀풀 풍겨지는 것 같았다. 번뜩, 사실 여기는 사이비 종교의 소굴이 아닐까? 결핍된 자들을 위한 위로 공동체 캠프 라니… 그런 잡스러운 모임 따위 들어 본 적도 없어. 뭐? 가면을 쓰고 생활한다고? 이런 변태 같은 새끼들. 하긴 이 남자 처음 만났을 때도 사이비 종교 신자라고 생각 했었지?!! 라는 매우 주관적인 관점에서의 합리적인(?) 의심이 솔솔 피어 오르며, 이런 수상한 소굴에 자진하여 방문한 자기 자신이 너무나 무모하고 한심하게 여겨졌다.
나는 이대로 개미 지옥에 빠져버리게 될 거야. 나는 개미 지옥에 빠져버린 한낱 가련한 곤충일뿐이지. 몸부림 쳐봐야 결국에는 벗어나지 못해. 그 무언가의 큰 결핍이라고? 이런 내 인생 자체가 이미 큰 결핍 덩어리일 뿐이야.
그렇게 다혜가 홀로 자책에 빠져있던 그 순간에도 태양은 어김없이 기울어 갔고, 어느덧 달빛이 은은하게 온 산중을 밝히고 있었다. 여기 저기 멀리에서 모닥불이 피어 오르며 모닥불 주위로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 들고 있는 것이 보였고, 예사롭지 않은 곳에서의 괴이한 하루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5-3. 연쇄 실종사건 파일 #1
성명은 나선미. 첫번째 실종자이다. 서울에 거주 하였고, 23세의 여성이다. 실종 최종 목격 장소는 고속버스터미널. 특이점은 그녀가 고속버스를 탑승한 (cctv 탐문 영상) 기록은 있지만 버스 목적지에서 하차한 기록은 없다는 것이다. 중간 경유지 어딘가에서 사라졌다는 것인데 그 명확한 위치는 확인이 불가 하였다. 사체가 유기된 장소는 강원도 허향산 이다. 약초꾼이 발견하였다. 사체의 훼손 상태는 매우 심각하였는데, 그 중에 특이점은 그녀의 두 유방이 절단되어 사라져 있었다는 점이다. 범인은 가학적 성향이 뚜렷해 보인다.
박철은 네 번째 실종자(박현아)의 아버지이다. 그는 생계의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외동딸의 행적을 쫓고 있다. 전직 조폭출신으로 주먹만 믿고 살다 일찌감치 패가망신하고, 동거중인 여자와의 사이에서 생긴 딸을 홀로 키우며 일자리를 따라 이리 저리 떠돌며 어렵게 살았다. 박철의 외동딸인 박현아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이제 막 19살이 되어 취업을 목적으로 서울에 상경하여 면접을 본 후 실종되었다.
현재까지의 연쇄 실종사건은 총 다섯 건으로 작년에 신고된 다섯 명 째의 실종자(김다혜)를 마지막으로 멈춰져 있다. 사건 발생의 주기는 일정치 않지만, 다섯 건의 사건 모두 작년 한해에 이뤄졌다. 첫번째 실종자가 사체로 발견됨에 따라 단순 연쇄 실종사건에서 납치 살해 강력 범죄사건으로 전환되어 사체 발견 지를 중심으로 대대적 수색이 이뤄졌지만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로부터 얼마 뒤 두번째 실종자의 사체가 발견되었다. 사체의 발견자는 박철 이다. 박철은 당시 심각하게 훼손된 사체 상태에 심하게 충격을 받은 듯 매우 횡설수설 하였다. 박철은 횡설수설하며 놀랍게도 실종자들이 납치(?)되어 있는 곳을 경찰에게 알렸다. 하지만, 진술의 신빙성이 부족하여 끝내 경찰은 박철이 말한 곳의 실체를 확인할 수 없었다. 이후로도 경찰은 사실 관계 확인을 위해 여러 방면으로 박철을 수소문하였지만, 박철의 행적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당시 박철이 말한 실종자들이 납치되어 있는 곳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특정 안개 지대를 통과 해야만 한다고 하였으며, 박철은 그곳을 가면의 에덴동산 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