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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장
그날 오후 4시 40분, 엘렌 프루아시는 아담스베르그의 침실에 설치한 수신기 상태를 점검했다. 베이렝의 목소리는 잘 들렸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말소리와 의자 긁히는 소리, 발소리, 종이 구겨지는 소리와 한데 섞여 들렸다. 스피커 볼륨이 너무 강해 휴대전화의 도청 장치는 5미터 안에서만 쓸모가 있었다. 그 장치만으로도 베이렝의 스튜디오를 충분히 커버할 수 있기 때문에 잡음 제거 장치 대부분은 꺼놓았다.
베이렝의 말소리는 아주 깨끗이 들렸는데, 르탕쿠르와 쥐스탱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프루아시는 외부의 잡음을 제거한 뒤 부드럽고 밝은 경사의 목소리를 잠시 들었다. 베이렝은 자기 자리에 앉아 있었다.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에 뒤이어 “내 아픔을 감출 동굴도 이제 더 이상 없어졌구먼.”이라는 혼잣말 소리가 들려왔다. 베이렝의 속마음을 아담스베르그의 침실에 그대로 이어주는 그 대단한 장치를 프루아시는 기분 나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베이렝을 겨냥한 이 장치에는 폭력적인 면이 보였다. 그녀는 설치를 끝내고 장치를 연결하려다가 한참을 망설였다. 그리고 스위치를 하나하나 올렸다. 악착같은 사람들의 싸움이야. 문을 닫으면서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도 이 싸움에 이제 막 끼어든 참이었다. 물론 책임은 가볍지 않겠지.
37장
4월 4일 월요일. 당글라르는 ‘주교 회의실’ 벽면에 외르의 지도를 압정으로 붙였다. 손에는 메스닐보샹 근교 20킬로미터 이내에 살고 있는 30~40대 여자 중 처녀로 간주되는 스물아홉 명의 명단을 들고 있었다. 그들의 주소도 목록으로 만들어졌는데 그들의 주소에 쥐스탱이 빨간 핀으로 표시했다.
“하얀 핀으로 표시하는 게 좋지 않아?” 부아즈네가 말했다.
“제기랄, 하얀 게 없어.”
대원들은 지쳐 있었다. 이 교구 저 교구의 신부들을 찾아다니며 서류를 모으느라 일주일을 보냈다. 한 가지 소득이 있다면, 기준에 드는 여자들 가운데 지난 몇 달 동안 사고로 죽은 여자는 한 명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제3의 처녀는 아직 살아 있는 듯했다. 과장의 수사 방향에 대한 불신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확신도 대원들의 어깨를 무겁게 누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기본 전제, 즉 사체 훼손과 『성물론』의 연관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대원들은 이의 제기의 정도에 따라 여러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가장 고집 센 그룹은 돌에 나 있는 이끼 흔적이 타살의 증거로는 충분치 못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아담스베르그가 짜낸 사건의 전모 역시 꿈, 아니 그 희한한 세미나 시간 동안 대원들의 혼을 빼간 악몽만큼이나 덧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말이 별로 없는 다른 대원들은 고양이 사체 훼손과 성물 도난이 어느 정도 연관 있음을 인정하여 엘리자베트와 파스칼린의 타살은 받아들였지만 케케묵은 중세 기록에 나오는 약제술은 믿지 않았다. 『성물론』을 전혀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영약 제조법의 해석은 화제가 되어 있었다. 기록에는 고양이가 한 마리도 나오지 않으니 남성의 근본은 때에 따라 황소의 정액도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약을 조제하려면 세 명의 처녀가 필요하다는 언급도 없지만 정반대 이야기를 하는 대목도 없지 않은가. 어쩌면 두 명의 처녀로도 충분할지 모르는데 괜한 일에 고생하는 것은 아닐까. 새 포도주가 나오기 석 달에서 여섯 달 전에 세 번째 처녀가 죽어야 한다는 구절은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잖은가. 그럴듯하지 않은 근거에서 나온 아담스베르그 과장의 추리는 터무니없는 옛날이야기와 같은 게 아닌가.
시간이 지나자 수사대 안에서 전례 없는 저항의 기운이 일어났다. 갈수록 피곤이 쌓이면서 흉흉한 소문도 나돌았다. 대원들은 아무런 사전 양해도 없이 진행된 노엘 경사의 시골 좌천을 떠올리기도 했다. 비록 아담스베르그 과장이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후임자에게 못마땅한 마음을 감출 수 없을 정도로, 그 당시 인사이동은 납득하기 힘들었다. 악몽 같은 퀘벡 사건뿐 아니라 카미유와의 결별 그리고 한순간에 나이를 많이 먹게 만드는 부친상과 아들의 탄생 같은 뜻밖의 사건에서 과장이 아직 회복하지 못했다는 말들이 나돌았다. 어떤 대원은 과장이 책상 위에 놓아주었던 조약돌을 떠올리며 아담스베르그가 신비주의 쪽으로 돌아섰다는 가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수사에 있어 자기뿐만 아니라 대원들까지 말도 안 되는 방향으로 몰아가는 것은 과장이 그런 수렁에 빠졌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아담스베르그의 행동이 거기서 머물러 있었다면 그런 불만은 흔한 불평 수준을 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세 번째 처녀가 죽는다는 결론을 내린 세미나 다음 날부터 과장은 전혀 만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주교 회의실에는 발길을 끊은 채 냉엄하고 서글픈 명령만 내리고 있었다. 그의 피가 얼어버린 듯했다. 사정이 이렇게 되면서, 구름 보고 삽질하는 쪽과 실증주의 쪽 사이의 논란이 재개되었다. 하지만 아담스베르그가 나타나지도 않으면서 냉엄한 명령만 내리자 구름 보고 삽질하는 쪽의 수는 줄어들었다.
이틀 전에는 대원들의 저항을 불러온 그 망할 유골과 말도 안 되는 영약 재료들을 찾는 짓을 중단해야 할지 계속해야 할지를 두고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메르카데, 케르노르키앙, 모렐, 라마르, 가르동과 에스탈레르는 과장 편에 섰는데, 수사대 전체를 흔들고 있는 이런 반란에 대해 정작 과장 자신은 전혀 관심이 없는 듯했다. 당글라르는 아담스베르그의 명령에 가장 먼저 이의를 제기한 축에 들었지만 대원들의 반란을 인정하지는 않았다. 또 자신은 과장의 『성물론』을 신뢰하지 않았지만 신경 무딘 사람처럼 포커페이스로 무덤덤하게 과장을 옹호하는 중간 역할을 그럭저럭 수행하고 있었다. 베이렝은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지 않으면서 자신의 임무를 묵묵히 수행하는 데 만족해하는 것 같았다. 베이렝과 과장 사이의 전쟁은 세 처녀 이야기가 나온 세미나 다음 날 시작되었는데, 베이렝은 그 까닭을 모르고 있었다.
정말 이상한 일은 수사대 안에서 실증주의 진영의 선두 그룹에 속하는 르탕쿠르가 아주 시끄러운 놀이터에서도 자기 일만 묵묵히 하는 신경 무딘 감독관처럼 수사대 안의 논쟁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평소보다 더 말도 없이 일에 빠져든 르탕쿠르는 자신만의 문제에 몰두해 있는 것 같았다. 오늘은 수사대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당글라르가 르탕쿠르에 대해 가장 정통한 전문가로 통하는 에스탈레르에게 그녀의 근황을 물었다.
“지금 에너지를 한곳에 다 쏟고 있는 것 같아요.” 에스탈레르의 진단이었다. “그래서 우리에게 신경 쓰지 못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저 고양이에게도 신경 쓸 겨를이 없어요.”
“어디에 몰입하고 있는데?”
“정부 일도 아니고 집안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몸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에요.” 에스탈레르는 가능성을 하나하나 검토해 나갔다. “제 생각에 그건, 말하자면…….” 에스탈레르는 자기 이마를 가리켰다.
“지적인 문제인가?” 당글라르가 짐작으로 물었다.
“맞아요. 그녀는 지금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어요. 그것에 대한 호기심에 푹 잠겨 있어요.”
아담스베르그는 자기 때문에 수사대 분위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고 있으면서 이를 조절하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하지만 베이렝의 전화 도청 결과는 마음의 평정을 되찾기 힘들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도청 내용에는 어린 시절 두 골짝 마을 사이에 벌어졌던 싸움이나 페르낭과 뚱보 조르주의 죽음에 대한 수사 내용은 조금도 들어 있지 않았다. 베이렝은 몇몇 친척과 여자 친구들한테만 전화했는데, 수사대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베이렝과 카미유의 동침은 두 번이나 들을 수 있었다. 엉켜 있는 두 개의 몸뚱이 생각에 완전히 짓이겨진 그는 다른 사람들의 실생활이 정숙하지 못한 데 큰 상처를 받았다. 도청을 생각한 것이 후회될 정도였다. 베이렝과 카미유의 관계를 확인함으로써 그들과 더 가까워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로부터 더욱더 멀어지고 있었다. 그 침실에 자신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 공간은 자신의 공간이 아니었다. 해적이나 약탈자처럼 끼어든 자신의 상황 때문에 거길 뜰 수밖에 없었다. 그곳은 카미유의 공간일 뿐, 자신이 도달할 수 없는 낯선 공간이라는 실망감은 점차 분노로 변해 갔다.
자기가 할 일은 과거의 추억만 지닌 채 자기 과실로 벌을 받아 남루해진 모습으로 자신의 영토로 돌아가는 일밖에 없을 것 같았다. 남아 있는 추억도 이제는 모두 지워야만 할 것 같았다. 아담스베르그는 갈매기 울음소리를 들으며 오랫동안 강가를 산책했다. 스스로 만든 상상 속 성채 안의 자리도 이제는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온몸을 짓누르던 열병에서 이제 막 벗어난 것처럼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아담스베르그 과장은 주교 회의실을 들어섰다. 그리고 쥐스탱이 무언가 적어 넣고 있는 벽의 지도를 쳐다보았다.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본 베이렝이 즉각 방어 태세를 취했다.
“모두 스물아홉 명이군.” 지도의 빨간 핀을 세어본 아담스베르그가 말했다.
“아직 끝이 아닙니다. 범위를 좀 더 좁혀야 하거든요.” 당글라르가 말했다.
“주거 형태는 어떨까요?” 모렐이 제안했다. “부모 형제나 친척과 함께 사는 처녀라면 범인이 접근하기가 쉽지 않잖아요.”
“아니야.” 당글라르가 말했다. “엘리자베트는 일하러 가는 길에 살해됐어.”
“십자가 나무는 어떻게 되어가나? 그게 무슨 뜻이지?” 한동안 천식으로 고생한 사람처럼 아담스베르그가 쉰 목소리로 물었다.
“오트노르망디 지역에는 성인의 유골이 하나도 없습니다.” 메르카데가 대답했다. “그리고 그 기간에 이런 식의 도난 사건도 없었고요. 기록에 남아 있는 성물 불법 거래 사건 중에서 가장 최근의 것은 데메트리우스 드 살로니크 성인의 유골 밀거래 사건인데, 그것도 54년 전의 일입니다.”
“죽음의 천사는? 현지 조사는 해보았나?”
“한 가지 가능성은 있어요.” 가르동이 대답했다. “하지만 단서가 세 개밖에 없어요. 가정 방문 간호사 하나가 6개월 전 베키니에 정착했답니다. 메스닐에서 북동쪽으로 13킬로 떨어진 곳이죠. 그런데 그 여자의 인상착의가 아주 모호해요. 나이는 60에서 70세 사이에 키는 작고 차분한데, 아주 수다스러운 여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연령 대의 여자라면 모두 있는 그런 특징뿐이에요. 메스닐, 베키니, 메일레르 사람들은 그녀를 기억하고 있어요. 거기서 약 1년간 일했으니까요.”
“그러니까 정보를 얻을 만큼 충분한 시간은 되는군. 그 여자가 떠난 이유는 알고 있던가?”
“아뇨, 모르고 있습니다.”
“그건 이 정도로 해둡시다.” 한창 저항파와 긍정파 양쪽으로 갈려 있을 때 긍정파 진영에 가담했던 쥐스탱이 말했다.
“무얼 그만두자는 거지, 경사?” 아담스베르그가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 모든 것 말입니다. 책, 고양이, 세 번째 처녀, 성인 유골, 모두 다 실없는 것들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이 사건에 힘을 쏟지 않아도 됩니다.” 대원들의 시선이 집중된 홀의 중앙에 앉으면서 아담스베르그가 말했다. “모든 정보는 다 수집됐으니 이제는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요. 서류 조사든 현장 조사든 간에.”
“그럼 어떻게 하실 건데요?” 아직까지 희망을 놓지 않고 있던 가르동이 물었다.
“머리를 써야지요.” 대화 속에 에스탈레르가 대범하게 뛰어들었다.
“아, 에스탈레르 자네가 이제부터 이 사건을 지적으로 해결할 계획인가?” 모르당이 물었다.
“이 사건에서 손 뗄 사람은 그래도 좋아.” 아담스베르그가 조금 전과 같이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신 미로메스닐 가의 살인 사건과 알레시아의 폭행 사건에 여러분들의 손이 더 필요합니다. 오퇴유 요양소의 집단 중독 사건 수사에도 필요하고 말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일은 수두룩합니다.”
“쥐스탱이 맥을 제대로 짚은 것 같은데요.” 모르당이 절제된 목소리로 말했다. “과장님, 우리 모두 수사 방향을 잘못 잡은 것 같습니다. 실은,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한 고양이 한 마리에서 이 사건은 시작되었습니다.”
“그 고양이에서 나온 음경 뼈로부터죠.” 케르노르키앙이 거들었다.
“세 번째 처녀는 믿기지 않습니다.” 모르당이 말했다.
“저는 첫 번째 처녀도 믿기지 않는걸요.” 쥐스탱이 우울하게 말했다.
“아니, 엘리자베트는 분명히 살해되었다는 걸 알고 있잖아?” 라마르가 말했다.
“아니, 내 말은 동정녀 성모 마리아를 두고 한 말이야.”
“나는 갈게.” 윗도리를 걸치면서 아담스베르그가 말했다. “내가 말한 세 번째 처녀는 지금 어딘가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을 거야. 난 그 여자가 죽도록 내버려 두진 않을 거야.”
“어떤 커피를 마시는데요?” 에스탈레르가 물었다. 하지만 아담스베르그는 이미 주교 회의실을 떠나고 없었다. 대신 모르당이 말했다.
“그런 게 아니야. 바로 그 여자가 살아 있다고 말하는 과장님 특유의 방식일 뿐이야.”
38장
프랑신은 낡은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들은 더러울뿐더러 옳지도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닦고 씻고 정리하는 깨끗한 약제실 안에 있을 때에만 마음의 평화를 느꼈다. 때문에 항상 더럽고 엉망인 늙은이들의 집으로 다시 들어갈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살아생전에 아버지 오노레 비도는 누구든 자신을 건드리는 것을 참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달라질 게 뭐람. 2년 전부터 그녀는 낡은 시골 농장을 떠나 도시의 새집으로 이사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부엌의 그릇이든 키 높은 옷장이든 쓰던 물건들은 모두 다 시골집에 놓고 갈 요량이었다.
저녁 8시 반은 하루 중 가장 좋을 때였다. 설거지를 끝낸 프랑신은 음식 쓰레기통을 두 번이나 털고 뚜껑을 잘 닫은 뒤 문간 계단에 놓아두었다. 벌레들이 몰려드는 음식 쓰레기통을 밤새 집 안에 두는 것보다는 바깥에 두는 것이 더 나았다. 그녀는 혹시 생쥐나 지네, 거미가 기어다니거나 날벌레 같은 게 있을까 싶어 부엌을 꼼꼼히 점검했다. 아무 기척도 없이 들어왔다 나가는 온갖 종류의 더러운 것들로 집 안이 가득 차 있는 듯했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바로 집 주변에 밭이 있고, 천장 위에는 다락이 있고 아래에는 지하 창고가 있기 때문이다. 외부의 침입자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벙커는 침실뿐이었다. 그녀는 벽난로를 비롯해 벽에 난 모든 틈새를 시멘트로 막고, 창문과 문간의 갈라진 곳도 모조리 막고 벽돌을 놓아 침대를 한 층 더 높이는 데 몇 달을 보냈다. 그녀는 침실에 무언가가 들어오는 것보다는 차라리 통풍이 안 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밤새 머리 위의 낡은 들보를 파먹어 들어가는 벌레들을 없애기 위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밤마다 프랑신은 바로 침대 위 천장에 나 있는 조그만 구멍들을 바라보며 그 구멍에서 벌레가 머리를 내밀고 나올까 봐 걱정했다. 지렁이 비슷한 것일까, 지네를 닮았을까 아니면 집게벌레 같은 것일까. 어떻게 생겼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러면서 매일 아침마다 그녀는 침대보에 떨어져 있는 나무 가루들을 쓸어내야 했다. 정나미 떨어지는 일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프랑신은 뜨거운 커피를 따른 커다란 잔에 각설탕 하나와 럼주 두 방울을 넣었다. 이때가 하루 중에서 가장 좋은 시간이었다. 그다음엔 럼주 작은 병과 커피 잔을 들고 침실로 들어가 영화 두 편을 보았다. 그녀는 812편의 영화를 수집해 놓았는데, 제목과 장르를 나타내는 스티커가 붙은 영화 테이프들은 예전에 아버지가 쓰던 침실 진열장에 정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습기 때문에 얼마 안 가 상할 것 같았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지 5개월이 지나 건축 구조 전문가가 집을 진단한 뒤에 그녀는 그 집을 떠나기로 마음을 정했다. 전문가는 서까래에서 하늘소가 쏠아놓은 일곱 개의 구멍을 발견했다. 일곱 개씩이나! 손가락이 드나들 정도로 커다란 구멍이었다.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조용히 귀를 대고 있으면 그 녀석들이 나무 파먹는 소리가 들릴 겁니다.” 전문가가 웃으면서 이런 농담도 해주었다.
“어떤 식으로든 조처를 취해야 할 겁니다.” 전문가가 내린 최종 진단이었다. 하지만 하늘소가 파놓은 구멍의 크기를 보자마자 프랑신은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떠나기로. 동시에 그녀는 하늘소가 어떤 모습을 한 녀석인지 궁금했다. 커다란 벌레일까, 아니면 머리에 구멍 뚫는 드릴 같은 것을 달고 다니는 일종의 풍뎅이 같은 놈일까?
새벽 1시, 프랑신은 하늘소가 쏠아놓은 구멍을 조사했다. 전에 표시해 놓은 선을 보니 서까래의 구멍은 그리 커지지 않았다. 오늘은 집 밖의 고슴도치가 킁킁대는 소리를 듣지 않길 기대하면서 방 안의 불을 껐다. 고슴도치의 헐떡거리는 소리는 정말 싫었다. 밤중에 듣는 그 소리는 사람의 숨소리 같았다. 배를 대고 돌아누운 그녀는 숨 쉴 수 있는 틈만 남겨놓고 시트를 머리끝까지 당겨 덮었다. ‘프랑신, 나이는 서른다섯 살인데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군요.’ 신부님이 해주던 말이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두 달만 지나면 이 집도 오통 신부님도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된다. 여기서 더 이상 여름을 지내지 않아도 될 것이다. 여름이면 사정은 더 나빴다. 어디서 들어왔는지- 그 녀석들은 과연 어딜 통해 집으로 들어온단 말인가!- 램프 갓에 그 징그러운 몸을 부딪히는 커다란 나방들하며, 금파리들과 파리, 말벌, 쇠등에, 진드기 등이 설쳐댔다. 특히 진드기는 사람 피부에도 조그만 구멍을 파고 들어와 알까지 깐다고 했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잠을 청하면서 프랑신은 이사 갈 6월 1일까지 며칠이 남았는지 다시 역산해 보았다. 18세기의 거대한 농장을 에브뢰의 발코니 딸린 방 두 개짜리 집과 맞바꾸는 것은 손해 보는 일이란 소리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지만 프랑신은 자기 일생의 가장 멋진 거래라고 생각했다. 두 달 후면 60제곱미터의 약국과 함께 즐겨 보는 812편의 영화가 있는 희고 깨끗한 아파트에서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은가! 새로 깐 리놀륨 장판 위의 새로 산 파란색 쿠션에 기대앉아 럼주 넣은 커피를 들고 텔레비전 앞에 있을 것이다. 물론 성가신 벌레 걱정은 하나도 없이 말이다. 딱 두 달만 기다리면 된다. 벽에서 저만치 떨어진 곳에 높은 침대를 놓고, 니스 칠을 한 멋진 사다리도 갖다 놓을 작정이었다. 나방이나 파리 같은 것도 날아다니지 않을 것이므로 파스텔 색조의 침대 시트는 오랫동안 청결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그녀는 아기가 없어도 당연히 행복할 것이었다. 프랑신은 이불을 바짝 당겨 뒤집어쓰고 손가락으로 귀를 막았다. 고슴도치 소리는 정말 듣기 싫었다.
첫댓글 아, 그게 과연 고슴도치일까?
오늘은 무려 3장이나 하사하셨넹...무언가 마지막을 향해 질주하는 느낌이 드는데 얼마 남았노?
이번 건 길이가 좀 작아서 3장을 올렸다. 이제 한 반쯤 지나왔나?
고맙다.
이제 프랑스 이름의 주인공들 머하는 머시기들인지 정리좀 하고 따라갈라고.. 넘따라 장에 가는 일도 쉽지 않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