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콥틱교회

엄격한 예배의식과 콥틱 그리스도인들을 응집케 하는 교황의 권위와 지도력 그리고 사막에 은둔하며 많은 영적인 지도자들을 배출한
수도원의 영성은 오늘날의 콥틱교회를 지탱하게 하는 힘이 된다
이집트의 콥틱교는 17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교회이다. 이집트의
교회는 주 후 40년경 전도자 마가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와서 복음을 전함으로 시작되었다. 세계 교회 중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중에 하나인
콥틱교회는 그리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 이유는 541년 칼케돈 회의에서 단성론자로 낙인찍혀 로마교회로부터 갈라져 나왔기 때문이다.
콥틱교회는 그들의 기원을 서기 248년으로 삼고 있는데 그것은 디오클레시안 로마 황제시대의 박해로 많은 순교자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641년에 이집트가 이슬람교도들인 아랍인들에게 정복당한 후 이슬람교의 수많은 박해 속에서도 오늘까지 신앙을 지켜 오고 있는데 콥틱 그리스도인들의
손목에 새겨진 십자가 문신은 그들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이집트 주거지는 나일강이
가져다주는 옥토를 따라 형성되어있다. 많은 수의 콥틱 그리스도인들은 나일강 중류 상류지역에 그들의 마을을 형성하여 살고 있다. 예수님께서
애굽으로 피난 오신 것을 기념하는 교회들도 나일강을 따라 세워져있음을 볼 수 있다. 1800년대 중반부터 이루어진 이집트 개신교의 역사는 이들
콥틱 그리스도인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회심자의 대부분이 무슬림이 아닌 콥틱 그리스도인 출신들이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동안의
박해를 견디며 중동지역의 가장 많은 교회를 존재하게 한 콥틱교는 아랍선교에 많은 가능성을 볼 수 있게 해준다. 비록 그들의 마리아와 성자들을
숭배시하는 등 개신교의 교리와 부딪히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콥틱 교회 안에 성경공부운동이 일어나는 등 긍정적인 분위기가 일고 있다.
엄격한 예배의식과 콥틱 그리스도인들을 응집케 하는 교황의 권위와 지도력 그리고 사막에 은둔하며 많은 영적인 지도자들을 배출한
수도원의 영성은 오늘날의 콥틱교회를 지탱하게 하는 힘이 된다. 콥틱교회의 교황인 바바 슈누다(‘바바’란 이집트어로 ‘아버지’란 뜻이다)와
마카리우스 수도원의 ‘마타’가 바로 그 두 기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콥틱교회의 두 기둥
콥틱 정교회의 교황
슈누다가 교회의 성소에 들어 갈 때면 주교와 사제들은 축복을 받기위해 교황을 만지려 몰려드는 사람들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한다. 84세인 슈누다 교황은 아직 정정하다. 그는 설교에 은사가 있어 카이로 중앙에 있는 콥틱 대성당으로 수천 명의 성도들이 그가 이끄는
성경공부에 참여하기 위해 모여든다. 그는 어느 때이건 성도들이 교황에게 질문하는 것을 허락하게 한 최초의 교황이기도 하다. 성경강해 시간이
시작되면 성도들의 질문이 적힌 작은 쪽지들이 교황에게 전달된다. 교황은 가끔 유모를 섞어가며 한사람 한사람의 질문에 대답한다. 주의 깊게 그의
이야기를 듣고있는 사람들은 그가 얼마나 신중하게 그들의 문제를 다루는지 깨닫게 된다.
이집트는 아랍어 권에서 가장 많은 기독교
인구를 가진 나라이다. 그 수는 약 340만에서 1,350만에 이르며 대부분의 기독교 지도자들에 의하면 인구의 10~12%를 차지한다고 한다.
그러나 프랑스의 학자 필립 파르지스의 현장조사에 의하면 기독교인은 5%에 해당하는 350만명이 될 것으로 추정한다. 기독교인의 90%이상은 콥틱
기독교인이다. 콥틱 교회는 성 마가를 그들의 초대 교황로 여기고 있다. 이집트 기독교인의 10%는 로마 카톡릭이며 소수의 개신교가 있다.
‘세계기도정보’에 의하면 비 콥틱 그리스도인은 50만 명에 이른다. 카톨릭과 개신교는 콥틱보다 서구와 더 많이 연결되어있으며 가난한 층의 비율은
적다. 그들은 사회활동 프로그램은 가난한 콥틱교인들과 무슬림들을 대상으로 하고있고 믿고 있다. 그 반면 많은 정교회 주교들은 그들의 재정을 그들
그리스도인을 우선으로 사용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87세의 유명한 콥틱 수도사인 마타 엘메스킨은 이에 대한 강하게 반대한다. 이집트 전역에
걸친 거대한 영적 물질적인 궁핍함을 증거하면서, 집단들에게 접근해왔다. 바바 마타의 수제자인 바바 발실리우스는 “ 바바 마타는 사람이 하나님으로
그들의 소유로 무엇을 받든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야 한다고 믿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슈누다와 마타 모두 20세기의 후반 반세기동안 이집트교회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친 사람들이다. 이들은 다른 모습이지만 교회에 대한
상호보완적인 관점을 가지고 개혁을 주도해 왔다. 슈누다는 회중의 리더요 교리의 선생으로 마타는 이집트의 고대 수도사들의 영성을 부흥시켰다. 이
두 사람은 매우 다른 기질을 소유했다. 존 와슨의 저서인 ‘among the Copts'에 20세기 말의 주교들인 사무엘과 아타나시우스의 견해에
의하면 마타를 비록 그가 교회내에 성직의 자리를 갖고 있지 않았지만 천부적인 리더로 묘사했다. 그들은 마타가 비록 자신의 리더십을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마타를 무리들의 리더로 간주했다. 반면 왓슨이 슈누다를 묘사할 때에는 그가 성직 계급적인 리더십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두 리더는 1930년대에 콥틱 평신도가 시작하여 콥틱교회에 높은 영향력을 미친 개혁인동인 주일학교 운동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마타 엘
메스킨이란 성호를 가지기 전의 그의 이름은 요세프 이스칸더르였고 카이로 근교인 ’기자(파라미드가 있는 곳)‘에 위치한 주일하교 센터의
지도자였다. 이 센터는 가난한 자들의 영적 물질적 필요를 위해 헌신적이었다.
교황 슈누다의 성호 이전의 이름은 나지르 게이드였고
그는 카이로의 쇼브라지역(카이로에서 기독교인이 가장 많은 지역)의 성 안토니우스 주일학교 센터의 한 리더였다. 그들은 교사를 훈련시켜 하나님께
대한 강한 개인 신앙을 키우게 하는 사역에 주력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접근은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잘 조화를 이루었다.
이스칸더르는 교회는 반드시 그 안에서 개혁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의견에 반대하는 친구들의 조언이 있었음에도 그는
1948년 수도사가 되었고, 마타라는 명칭을 받았다. 그리고 요원해 보이기만 한 콥틱 정교회 안에 개혁을 시작하였다. 그 당시의 콥틱 지도자들은
교회와 수도원에서 전통에만 머물러 그것을 답습하고 있었다. 또한 많은 수의 수도사들은 타락해 있었다. 소수의 몇몇 수도사들은 거의 교육을 받지
못했고 그들 중에서 지도자를 선출하는 교회로서는 위험을 일으킬 소지가 있는 상태였다.
마타는 초기 교회 선배들의 엄격한 연구에
기초를 두고 영적인 발전을 도모했다. 주일학교 출신의 학생들을 그를 존경했다. 많은 이들이 수도사적인 삶에 동참했고 개혁적 수도사 그룹을
형성했다. 게이드(현 슈누다)가 'Sunday School' 간행물의 편집장으로 있을 때 그는 당시 교황인 유샙2세를 포함한 콥틱 성직자들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개혁과 변화를 가져오면서 그는 차기 교황은 주일학교 운동으로부터 나와야한다고 주장했다. 1954년에 그는 마타의 추종자
그룹에 합류하였고 마타는 그의 고해 사제가 되었다. 게이드는 안토니우스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1956년 교황 유셉2세의 사망
후 그의 후계자로 개혁주의자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전통주의자를 선택해야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교회 회의를 주도하던 보수주의 사제들은
교황 후보로 유력한 마타가 있는 사무엘 수도원의 수도사들과 그의 개혁주의자 추종자들을 제외시켰다. 그 후 안토니우스(현 슈누다)는 잠시 마타의
그룹을 떠났다.
1년 정도의 논쟁 후, 1959년 사이릴 6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사이릴은 개혁적인 수도사 출신은 아니지만
그들은 높이 존중했다. 그는 재직기간동안 교회를 쇄신하는데 힘을 쏟았다. 안토니우스는 1962년 주교로 임명받고 슈누다라는 새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1969년 마타는 6명의 고령의 수도사들만이 있는 마카리우스 수도원을 재건해줄 것을 부탁 받았다. 대부분의 건물은
붕괴되어 있었고 주위의 땅또한 방치되어 있었다. 32년이 지난 지금의 마카리우스 수도원은 농업 프로그램으로 풍성함을 누리고 있고 수도사들도
100명에 이르며 100여권이상의 콥틱 신앙문서들을 발간해왔다.
슈누다는 회중을 위한 목회자들의 지도력에 대해 관심을 쏟으면서
이미 1960년대부터 시작된 콥틱 신학교교육을 새롭게 고무시켰다. 그 결과 신학교의 학생은 세배로 늘어나게 되었다. 1971년 교회성회는
슈누다와 다른 두 명을 교황 후보로 세웠고 슈누다가 교황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콥틱 교황으로서 슈누다는 신학교육과 훈련을 확장시켰고 교회
지도력을 성장에 통계적으로 놀라운 결과를 얻었다. 1900년에서 1961년 사이에는 단 500명의 신학생이 배출되었는데 1961년부터
1994년까지 배출된 신학생은 2,300명에 이른다. 그들 중 뛰어난 자들은 사제와 수도사 가되고 결국 주교가 되었다.
이집트
콥틱교회의 상황
근래에 콥틱교회 안에 지속적인 것은 아니지만 놀라운 성령운동과 성경공부에 대한 노력 등이 있어왔다. 그러나 성도들이
이해할 수 없는 콥틱어로 된 성경을 읽거나 기도문을 암송하는 성도들의 마음 안에는 성령의 감동과 열매가 없다. 더구나 교인를 빼앗길 것을
염려하는 지도자들은 개신교에 대해 경계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나일강 중류 상류지역의 시골에는 교회 없이 이름만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들 안에 말씀이 없기 때문에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은 무슬림으로 개종하면 주어지는 보상금에 현혹되거나 무슬림 이성을
만다 결혼을 통해 개종해야할 상황에서 쉽게 신앙을 저버리게 된다. 지금도 하루에 3-40명의 기독교인들이 무슬림으로 개종을 하고
있다.
2000년의 역사가운데 많은 핍박을 거치며 자신들의 신앙을 지켜온 콥틱 기독교인은 여전히 소수 집단으로서 무슬림들과의
긴장가운데 있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최근 몇 년간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박해의 분위기를 조성해가고 있다. 크게는 21명의 교인들의 목숨을 잃
게한 2000년 알 코사에서 있었던 충돌이 한 실례가 된다.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4-02-17 2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