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저항의 원리-맹자와 아리스토텔레스4
요약
어제 나는 부과 권력은 막대한 책임이 따르는 사회적 위치라고 썼다. 그 전제로 모든 재화는 사회적 협동에 의해 이뤄지는 사회적 산물이라는 점에서 공공재라는 전제를 가져야 한다는 점을 들었다. 하지만 사적소유 팽배한 이 시대가 무슨 원시공산제사회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아니,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사회적 존재이고, 인간의 자아 자체가 사회의 산물인 동시에, 인간이 생산하는 모든 것이 사회의 역사 문화적 맥락 안에서 축적되어온 공공의 자신의 결과이자 연장이라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타자에 대한 카인이 아닌 이상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그러나 회피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 그래서 도덕적 추궁을 멈추지 말아야 하고 도덕을 행위와 판단의 원리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나는 사회적 독점에 의한 지배에 굴종할 것을 거부하는 도덕적 삶의 실천을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쯤 되면 공자에 대한 복고주의나 도덕설교가 아닌가? 복고도 설교도 아니다. 하지만 도덕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맹자의 문제의식과 무관하지는 않다.
명예의 전도
상식과 편견에 의해 이해하고 있는 세속은 이렇다. 사람들은 부귀영화를 위해 경쟁을 하며 살아간다. 부귀영화에 필요한 요소는 건강과 가족, 재산, 지위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다른 모든 것들을 안정적으로 얻을 수 이게 하는 것을 부와 권력이라고 믿는다. 부와 권력은 경젝적 정치적 힘이다. 힘은 타인을 자기 의지대로 조정하는 능력이다. 그렇다면 세속적 욕구는 힘의 추구이며 힘은 타인을 지배할 수 있는 위치인 셈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우리는 졸부와 독재자를 비난하고 비웃는다. 근거는 물론 도덕이다. 사회적 책임과 비도덕성 때문이다. 한편 우리가 도덕을 추구하는 사람은 현실적이지 않은 이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순수하고 착하기는 하지만 소위 세상물정 모르는 이상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상가들이 느끼는 현실주의자들에 대한 우월의식이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도덕적 우월감일 것이다. 도덕적 우월감이야말로 이상가가 현실에 대처하는 막강한 무기임에 틀림없다. 그럴 때 명예는 이상가에게 주어진다.
하지만 명예에도 전도현상이 벌어졌다. 공공을 파괴하고 힘을 획득한 부와 권력자들이 명예까지도 차지하려고 하는 현상이다. 최근 미국의 억만장자가 미국대통령이 되기 위해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참여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돈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스스로를 대단히 명예롭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명예란 사실 세속적 힘에 대한 타인의 질투하고 찬탄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가 망상에 빠진 것에 불과할까? 우리는 억만장자를 위인전기에 편입시키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이미 사회적 명예를 그들에게 부여하고 있다. 도덕성이 기준에서 밀려나 버렸다. 실제로 지난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던 시절 많은 국민은 그가 도덕적 결함이 있지만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으로서 한국경제를 이끌어갈 수 있다고 믿었던 듯하다. 정치를 담당한 대통령에 경제대통령을 뽑아 부국강병이 되기를 희망했다.
부와 권력이 명예까지 갈취하고, 오히려 가난한 자들을 도덕적 결함 있는 자들로 매도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그때의 도덕적 기준은 인내, 근면, 성실 따위이다. 소위 베버식의 프로테스탄트의 자본주의 윤리들이다. 희한하지 않은가? 도덕의 내용이 타인에 대한 책임과 의무가 아니라 개인의 이기적 목적 성취를 위한 노력과 인내로 뒤바뀌었다. 이런 사회에서는 지독하게 노력해 성공한 사람이 곧 도덕적인 사람이 되었다. 아니지 않은가? 근면, 성실, 인내는 도덕성과 아무 관련 없는 개인의 기질적 특징일 뿐이다. 근면, 성실, 인내는 타인을 위한 목적일 때만이 도덕적인 것이다.
도덕의 명예회복이 필요하다. 명예의 도덕회복이 필요하다. 부와 권력 독 힘의 소유와 지배에 대해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묻고, 공공재와 공공영역의 확충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저항의 원리
양심과 도덕과 신념은 지녔지만 가진 것 없는 자에게 명예야말로 자존심에 대한 보상일 것이다. 때문에 공자는 가난한지만 바르게 살고 열심히 공부하는 안회에 대해 인자라고 말했던 것이다. 간디의 비폭력운동의 핵심도 바로 식민당국에 대한 도덕적 우월감이었다. 그러기 위해 간디는 사티야그라하(진리파지) 운동을 전개했다. 즉 식민당국의 폭력성 앞에 인도민중은 도덕적 원칙을 지키며 비폭력무저항으로 대응했던 것이다. 어찌 보면 간디는 맹자의 인의(仁義)를 사회적 저항에 적용한 가장 좋은 사례이기도 하다.
정부가 공안정치를 펼칠 때 쓰는 두 가지 전략이 있다. 하나는 빨갱이 컴플렉스를 이용해 북의 위협과 종북좌빨론으로 국민의 공포와 증오심을 이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조작이나 폭로를 통해 좌파진형을 비도덕성으로 포장하는 것이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이 한나라당 유승민 원내대표를 항명이나 배신의 정치로 맹비난하는 것도 그 한 예이다. 내가 대학 다니던 91년의 여름이 생각난다. 그해 강경대군의 경찰의 과잉진압에 맞아죽는 사태가 벌어졌다. 연일 데모가 있었고 분신자살이 이어졌다. 정부의 진화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올해 무죄판정을 받는 강기훈씨 유서대필조작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외대에 강의하기 위해 방문한 정원식 총리에게 밀가루와 계란을 던진 행위에 대해서다. 주요일간지는 연일 계란과 밀가루로 범벅이 된 정원식 총리를 1면 사진으로 싣고 스승도 몰라보는 학생들의 폐륜을 질타했다. 연일 언론을 도배한 것은 유서대필 조작사건과 운동권의 폐륜집단화 기사였다. 결국 언론을 장악한 정부의 의도대로 되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언론은 정부의 기관지 아니 선전지 이상의 수준이 아니었다.
부과 권력이 도덕까지 강탈하는 사회야말로 미래가 없는 사회일 것이다.
하지만 간디와 인도민중의 저항운동에서도 알 수 있듯이 희생을 감수하며 도덕적 우월성을 지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일종의 컨트롤 타워 역할을 했던 간디의 절대적 카리스마 없었더라면 쉽게 적용하기도 어려웠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왜냐하면 비폭력무저항운동은 확고한 진리파지를 전제로 하는데, 진리파지 자체가 꾸준한 노력과 고도의 정신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 때문에 현실주의자에게는 간디가 이상가일 수밖에 없다.
같은 맥락에서 모든 사람이 성인될 자질을 타고 났지만 그 완성은 꾸준한 노력에 의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이었다. 때문에 공자가 안회를 크게 칭찬하였던 것이다. 현실적으로 가난하고 누추했지만 안회는 도덕적 자기수양에 매진하며 안빈낙도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제 맹자로 돌아올 때다. 맹자는 공자의 인(仁)에 덧붙여 의(義)를 강조했다. 맹자의 철학이 공자의 철학에서 성큼 나아간 지점이다. 인은 사랑이고, 의는 정의이다. 맹자는 인을 ‘측은(惻隱)지심’ 즉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라고 말했고, 의를 ‘수오(羞惡)지심’ 즉 아닌 것에 대해 부끄러워 하고 싫어하는 마음이라 말했다. 또한 ‘인은 살아가야 할 집이고 의는 나아가야 할 길’이라고 말했다. 인의라는 것은 꾸준히 길러가야 할 것이었다. 그래서 맹자는 제자에게 40이 되어 자신이 비로소 부동심(不動心)에 이르게 되었다고 말한다. 부동심 즉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공자의 40 즉 불혹(不惑)과 일치한다. 마흔은 꾸준한 외적 내적 공부를 통해 도덕적 자아가 완전히 자리잡은 상태이다. 더불어 맹자는 제자의 질문에 자신은 두 가지를 잘 한다고 말한다. 하나는 지언(知言) 독 말을 잘 이해한다는 것이다. 사리분별을 잘 한다는 것이다. 둘은 호연지기를 잘 기른다는 것이다. 호연지기는 용기와 비슷한 점이 있다. 크고 활달하고 흔들림 없는 기운이기 때문이다. 맹자는 호연지기를 기르는 방법으로 꾸준한 의(義)의 실천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위에서 언급했듯 의는 정의다. 비도덕적인 것에 대해 부끄럽고 싫어하는 마음을 내어 도덕적인 일(仁)을 적극적으로 선택해 행동하는 것에 의해 길러진다. 그러니 당연히 용기와 실천력이 필요하다. 즉 맹자의 공부는 지언과 호연지기로서, 앞의 지언은 궁리명선(窮理明善)의 이치 공부이고, 호연지기는 실천궁행(實踐躬行)의 마음과 몸 공부였다. 그리고 이런 공부를 한 20~30년 하여 부동심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때문에 실천을 강조하는 맹자의 정의관은 투철하다. 유교적 이상인 내성외왕(內聖外王) 즉 안으로 도덕적 인격을 완성하고 밖으로 도덕적 사회를 실현해나가는 일은 이런 과정을 통해 이룩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호연지기의 정신적 힘이 호호낙낙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측면에서 간디가 맹자의 내성외왕의 면을 보여주는 예라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문제가 발생한다. 과연 도덕의 실현이 이렇게 어렵고 험한 것이라면 어떻게 자기를 완성하고 사회를 도덕적 사회로 바꿀 수 있단 말인가? 일반인은 아예 꿈도 꾸지 못할 일 아닌가? 이런 점 때문에 성리학은 사람들 사이의 성품과 기질의 차이를 인정하여 만인평등의 사상을 수정한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다시 인간의 차이를 바탕으로 한 차별을 수용하는 일이 벌어진다. 조선의 성리학이 사농공상과 적서 차별을 자행했던 것은 성품과 기질의 차이를 용인하면서 이데올로기적으로 위계화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인을 죽이자.
자족 ; 저항과 실천의 방법
결국 모두가 성인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성인이 모두를 이끌게 허용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도덕에 명예를 돌려주고 도덕의 원리를 개인의 생활은 물론 사회에도 적용하는 것은 절대로 필요한 일이다.
다시 안분지족의 대명사로 불리는 안회를 생각해보자. 호연지기든 안분지족이든 키워드는 자족(自足)이다. 자족은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다. 스스로 만족한다는 것은 외부의 다른 무엇을 필요로 하지 않고 나 자신에 근거해 행복을 느낀다는 말이다. 하지만 자족은 정신과 물질로 나누어볼 필요가 있다. 불의에 저항하는 사람이 불행을 느낀다면 그 일을 오래 할 수도, 또 남을 설득할 수도 없다. 도덕적 명예로만은 부족하다. 그래서 자족이 필요하다. 기쁨과 자신감-이것이 맹자의 호연지기일텐데-이 없다면 남을 설득하는 힘도 없다. 도덕적 우월을 한낱 공상적 사유 안에서만 찾는다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현실의 삶 안에서 도덕의 효용이 발휘되어야 한다.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안회는 물질적으로 보다 정신적으로 자족한 사람이다. 하지만 안분지족은 꾸준한 공부와 인(仁)의 실천이 필요하다. 그래서 물질적 가난에 정신적 풍요가 영향을 받지 않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하지만 안회의 인자함이 사회적으로 발휘되지 않는다면, 즉 용의 실천이 겸비되지 않는다면 안회의 안분지족은 개인의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니 맹자의 의의 공부와 실천이 필요하다. 아마도 맹자의 의의 실천은 개인의 도덕실천이 사회적으로 외화 되어 때로는 저항과 운동의 성격을 가지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정치운동의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 사회가 도덕의 원리에 의해 운영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맹자는 경제적 평등과 교육을 중요시 여긴다. 일반 백성은 군자가 아니기 때문에 자급자족할 수 있는 경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을 맹자는 ‘항산이 있어야 항심이 있다’는 말로 압축한다. 어느 정도의 경제적 자급자족이 필요하다. 그래야 종속을 거부하고 자신의 의로움을 실천해갈 용기를 발휘할 수 있다. 이것을 위해 맹자는 1/10 세금 외의 세금 철폐를 주장한다. 정전법으로 모든 백성이 자급자족의 기반을 마련하고, 시장과 교통의 활성화로 필요한 물품을 자유롭게 교환할 수 있도록 한다. 즉 정전법과 1/10 외 세금 철폐는 도덕사회를 위한 방법이자 목표였다. 도덕사회는 이러한 경제적 바탕 위에 교육을 통해 실현될 것이었다. 이것이 왕도정치의 내용이다. 이러한 도덕 정치에 성인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현대사회는 어떠할까? 알다시피 우리는 세계자본주의시대를 살고 있다. 전지구적 생산관계에 의존해 원자화된 개인을 살아가고 있다. 당연히 교환과 교통도 돈에 의해 매개된다. 문제는 이러한 형식보다 모든 것이 사적 소유의 대상이 되어 철저히 시스템 내 종속상태를 강요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왼손과 오른손에 각기 두 가지 자족을 쥐고 나아가야 한다. 호연지기를 위한 최소한의 경제적 자급자족력을 확장하는 문제, 그것은 고립된 자급자족이 아니라 상호지원하는 자급자족의 연대와 관계망을 확대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인의의 도덕을 내 삶에 꾸준히 실천하며 호연지기를 기르는 문제이다. 후자는 자급자족하며 동시에 안분지족하는 길을 찾지 않으면 물적 빈곤과 정신적 빈곤에 동시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도덕적 우월감과 명예란 사실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세속에서 기능할 수 있는 사회적 평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안분지족과 자급자족을 강조하는 것이다. 밖에서 구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종속의 길이다. 안의 것을 밖으로 실현해가야 한다. 그것이 인의의 길이고 도덕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