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회(韓明澮.1415~1487)는 조선조 한씨 융성의 큰 길을 연 인물이다. 수양대군의 심복으로 단종 1년 계유정난에 가담, 단종과 그 추종세력들을 물리친 공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해 영의정에까지 오른다.
세조에 이어 예종과 성종을 섬기면서“남이의 옥사”사건 등 4 차례의 크나큰 역사적 사건의 중심세력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계유정난 이후 한명회를 중심으로 한 한씨 일문은 10촌 이내의 친척만도 17명이 조정 핵심부에 등장한다.
영의정을 비롯해 좌.우의정에 오르거나 판서를 지내는 등 참판급 이상의 요직에 오름으로써 난공불락의 정치적 세력을 형성한 것이다. 한명회가 영의정, 한확이 좌의정, 한확의 조카 한치형이 다시 영의정에 이어지기도 했다. 그의 아들과 딸 넷은 모두 권력의 핵심이던 왕실, 세가와 혼인했다.
맏딸은 세종의 사위인 윤사로의 며느리이고 둘째딸은 한명회와 함께 수양의 쿠데타 주체세력이었으며 영의정에 오른 신숙주의 맏며느리다. 셋째, 넷째 딸은 각각 예종, 성종의 비(妃)가 된다. 한명회의 손자 한경침은 성종의 부마가 되는 등 청주한씨는 조선 왕실과 두 겹, 세 겹의 인연으로 얽혔다.
한명회의 본관은 청주(淸州)다. 호는 압구정(狎鷗亭)이다. 할아버지는 예문관제학 한상질(韓尙質), 아버지는 증영의정(贈領議政) 한기(韓起), 어머니는 예문관대제학 이적 의 딸이다. 딸이 예종비 장순왕후(章順王后)와 성종비 공혜왕후(恭惠王后)이다.
한명회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냈다. 여러 번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하고 권람 과 더불어 산천을 주유했다. 1452년(문종 2) 문음으로 경덕궁직(敬德宮直)이 되었다.
문종이 죽고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과 의기투합하여 무사 홍달손 등 30여 명을 추천했다. 1453년(단종 1) 10월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 계유정난 때 심복 참모로서 큰 공을 세운다.
1456년(세조 2) 단종 복위운동을 좌절시켰으며, 사육신의 주살(誅殺)에 적극 협조했다. 이어 좌승지·도승지를 거쳐 1457년 이조판서·병조판서가 되었고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다.
상당군은 군호로 공신이나 왕자에게 내려지는 특권적인 명칭이다. 주로 관향이나 세거지명을 이용해 붙인다. 상당이란 청주의 옛날 이름이다. 즉 청주한씨인 한명회에게 붙여진 군호였다.
1459년 황해·평안·함길·강원 4도의 체찰사(體察使)가 되었다. 그 뒤 우의정·좌의정을 역임하고 1466년 영의정에 올랐으나 곧 병으로 사임했다. 1467년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모함을 받아 투옥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1469년(예종 1) 영의정에 제수되었으나 곧 사임했다. 성종 즉위 후 병조판서가 되었다. 1484년 나이가 많아 벼슬을 그만두고자 했으나 허락받지 못하고 성종으로부터 궤장(几杖)을 받았다. 그는 성종 대까지 고관요직을 역임하면서 부와 영화를 한 몸에 누렸다. 성종의 만류로 치사(致仕)를 못하다가 73세에 죽었다. 세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한명회의 큰딸은 세종의 서녀 정현옹주의 아들 윤반 과 혼인을, 그의 작은 딸은 신숙주의 맏아들 신주 와 혼인하였다. 셋째 딸은 예종의 정비(장순왕후), 막내딸은 성종의 정비(공혜왕후)가 되어 영화를 누렸다.
그러나 이 딸들은 모두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그 이후 폐비 윤씨 사건에 책임이 있다고 하여 연산군 대에 와서 그 시체가 무덤에서 꺼내져 부관참시 되었다가 중종반정 뒤에 신원되었다.
그는 훌륭한 문중의 자손이지만 칠삭동이에 우스꽝스러운 당나귀 상으로 태어나면서부터 멸시를 받았다. 그러나 깊이 있는 학문과 세상에 대한 통찰력과 예지력, 사람을 꿰뚫어보는 눈, 그리고 경륜이 뛰어났다. 촌티 나는 그의 웃음 뒤에는 범상치 않은 날카로운 직관의 칼이 숨어있었다.
한명회는 자신의 능력이 발휘 될 때까지 때를 기다렸다. 결국 그가 택한 인물이 수양대군이었다. 수양대군은 한명회를 장자방으로 택했으며, 한명회는 왕으로 만들 인물로 수양대군을 택한 셈이다.
‘한명회 생살부’는 처절한 권력투쟁의 생산물이다. 수양대군의 책사인 한명회가‘죽일 사람과 살릴 사람’을 구분하기 위해 만든 비밀명단인 생살부는 조선조‘리스트’의 대표 격으로 꼽힌다.
한명회는 계유정난을 주도하고 생살부를 작성하여 수많은 충신과 인재들의 목숨을 좌지우지했다. 막강한 권력으로 한 시대 역사의 주도자가 된 셈이다. 한명회는 영의정을 세 번이나 지냈다. 그러나 말년에 정난공신인 자신의 동지들이 하나둘 떠나갔다. 왕후 자리에 오르기도 전에 두 딸은 요절했다. 아내도 먼저 세상을 떠난다.
그는 죽기 전 자신의 사위이기도 한 성종에게 유언한다.“사람들은 처음에는 부지런하다가 나중에는 모두 게을러집니다. 이것은 인지상정이옵니다. 모름지기 끝까지 부지런하기를 처음과 같게 하신다면 반드시 대업을 이룰 것이옵니다.”
최근 도굴로 우여곡절을 겪었던 한명회 지석(誌石)이 충남 천안박물관에 전시되었다. 천안시는 한명회의 일대기를 새긴 지석(가로 25㎝, 세로 30㎝, 두께 2.5㎝) 24점을 서울국립고궁박물관에서 천안박물관으로 옮겼다.
이 분청사기 지석에는 한명회의 가계도, 조선 전기 계유정란 때 왕권을 바꾸는 데 중심역할을 한 행적, 부관참시 후 새로 예장한 풍습 등의 내용이 담겨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한씨 종친회 충성공파 등은 한명회의 묘소와 사당이 있는 천안지역에 기탁하는 것이 좋다는 결론을 내려 서울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관한 지석들을 천안박물관에 기탁하기로 했다.
한편 청주한씨(淸州韓氏)의 시조 한란(韓蘭)은 고려 태조 때 삼한통합에 공을 세웠다. 그러나 한씨는 그 출발점을 기자조선(기원전 115년)으로 한다. 기자조선 929년에 마지막 왕인 41대 준왕이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 뒤 금마(전북 익산시)에 마한을 세우고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했다. 그 뒤 마한도 177년 만에 백제 온조왕에게 망한다.
이 때 8대 원 왕의 세 아들은 고구려와 백제, 신라에 각각 귀의한다. 그러면서 ▲우평 은 북원선우씨(北原鮮于氏) ▲우성 은 행주기씨(幸州奇氏) ▲우량 은 청주한씨가 된다. 따라서 선우, 기, 한씨는 모두 기자의 한 핏줄을 받은 후예다.
청주한씨는 우량 의 31세손인 한지원의 네 아들 중 한란 이 청주한씨의 중시조가 된다. 한란 의 아래대에서 30여 파로 갈린다. 그 중에서도 번창한 파는 ▲양절공(한확) ▲문정공(한계희) ▲충간공(한리) ▲몽계공(한철중) ▲관북(한연) ▲충성공(한명회) 등 6파로 이를 “한씨 6파”라 부른다.
한란 의 12세손 한상질은 태조의 진문사로 명나라에 들어가“조선”이란 국호를 받아 온 인물이다. 그는 계유정난의 주인공 한명회의 조부다.
조선 최대의 명필가 한석봉 역시 한씨 가의 큰 별이다. 그의 이름은 한호, 후기의 추사 김정희와 함께 조선 서예사의 쌍벽을 이룬다. 중국의 서체와 서풍을 모방하던 풍조에서 벗어나 독창적인 석봉체를 창시했다. 지금도 그의 “석봉필법”과 “석봉천자문”이 전해진다.
“님은 갔습니다. 아 아 사랑하는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 빛을 제치고…”“님의 침묵”으로 민족의 가슴에 뜨거운 시혼을 심어준 만해 한용운은 근세 백년 최대의 불교인이자 민족주의자다. 섬세한 언어로 절정의 시상을 표현한 그의 문학적 업적은 인도의 타고르와 비교된다.
문둥이 시인 한하운도 청주한씨가 배출한 인물이다. 그는 천형(天刑)의 한 속에서 인생의 절망과 슬픔을 담은“보리피리”의 주인공이다. 그는 중국 북경대학을 졸업, 경기도청에 근무 중 나병에 걸려 방랑의 길을 나섰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이 시는 소록도로 가는 길에 읊은 “전라도길“이다. 하운은 자신의 불행했던 생애를 시로 아름답게 승화시켰다.
구한말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한규설이 있다. 1905년 일본 특명전권대사 이등박문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보호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서울에 왔을 때 이완용 등 오적으로 불리는 친일파 대신들에게 대항하여 끝까지 반대했다. 애국지사이자 정치가로 독야청청했던 그의 기품은 오늘날도 빛난다.
주요파는 ▲서재공파 ▲문열공파 ▲문간공파 ▲서원군공파 등이다. 인구는 2000년 현재 642,992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