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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진실을 찾아서 (강좌모임 공식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달콤쌉싸름
무묘앙에오--경련하면서 읽는 정신세계 너그러운 수행 명상
무묘앙에오(無明庵回小)에 대해
14세 때 깨달음을 언뜻 넘보는 체험이 있고부터 23세까지 여러 가지 신비학,
도 등을 섭렵했지만 어떤 단체에 소속되는 일은 한번도 없었다.
30세 무렵부터 우발적으로 독자적인 채널링을 시작하여 은하계와 막후 정
보들을 얻었다.
33세에 그것들에 대한 총괄적 결론과 사색의 결과로 생명과 존재에 절망했다.
1992년 2월 17일 우발적으로 대오견성했다.
그후 약 1년 동안 명상센터의 명상가들이나 치료가들에게 일방적으로 자
기의 글을 우편으로 보내는 일을 했다.
거의 모두가 묵살해 버린 가운데 3명의 문하가 생겼다.
1993년 8월부터 그의 지도와 방편이 禪으로 기울고 선문의 본산, 각 지
방 선방의 승려들에게 글을 우편으로 보내기를 계속했다.
그 중에서 문하가 나왔으며 뒤에 그 승려는 대오를 이뤘다. 전통과 형식
에 매달리는 선, 그리고 스승을 맹목적으로 신봉하는 명상센터와의 마찰
과 반감 속을 흐르면서 그의 글은 지금 많은 명상가와 참선 수행자들에
게 개인적인 편지 또는 기관지의 형태로 전해져 소중히 간직되고 있다.
일생동안 단체화, 조직화, 통속적인 사제관계를 거부했다.
1994년 10월 22일 죽었다.
당년 36세 죽은 사람의 직계 문하로 쥬우와 호오장 둘을 남겼다.
****
중국철학사상 왕필이란 천재가 잇지요
노자와 주역이라는 가장 심오한(?) 철학서에
대단한 주석을 남긴 분이지요
20대에 이미 심오한 세계에 대해
달통을 하고 젊은 나이에 요절했지요
에오에 대해 잘 모르지만
상당히 비슷한 궤적의 인생을 산 것 같네요
물론 명상이란 본질에서 볼 때
왕필은 에오와 필적할 수 없을 것 같군요
삼국지 위지에 보면
성인에게 감정이 있느냐는 질문에
성인도 감정이 있으나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
밝음이 잇다는 유명한 말을 남겻지만
기본적으로 노자와 주역이란 지식의 저작에
일일이 주석을 다는 학자적인 정성을 보인 것을 보면
에오와 스타일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겟군요
여기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천재적인 명상가가 더 좋은가
아니면 자상한 스승이 더 좋은가
서로 다름의 차이가 잇을 뿐!
괴팍한 선사가 더 깨달음이 많은 게 아니다
순순연하게 이끌어 주는 생활인가운데
진정한 길을 제시하고 잇는 경우가 많다
에오의 천재성과 비범한 접근방식에
어떤 거부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석가와 예수가 다르고
노자와 공자가 다르고
님과 내가 다르듯이
에오는 에오일뿐
여러 명상가와 다르니까 말이다
누굴 부러워하거나 닮으려고 노력하는자는
영원히 그 아류로 머물게 된다
진리는 벤치마킹할 수 없는 거다
온전히 자신의 길을 가면 된다!!!
그래서 사실 위대한 현인이나 대각견성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자신의 수행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초심자가 진리에 대해 굳센 믿음을 가지거나
나태해질 때 경책이 될 뿐이다
제 목(Title): 경련하면서 읽는 정신세계
무묘앙에오라는 일본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좀 깨는 얘기들입니다만, 자기 속에 가지고 있던 믿음들, 생각들을 깨부수고는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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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묘앙에오의
경련하면서 읽는 정신세계
내가 TAO(道)나 선(禪)에 관해 말하는 데에는 몇 가지 목적이-----
첫째는, 당신들의 탐구를 끝나게 하여, 편해지게 해주고 싶어서.
둘째는, 자주적인 순수지성의 확립으로, 갈팡질팡 이해관계에 휘둘리는 인종
이 되지 않게 하려고. 그 바탕은 깨달음이다.
셋째는, 그런 사람들은 가까운 미래에 우주인과 정면으로 대등하게 대화할
수 있을만한 외교적 의식을 지니게 될 터인데, 그것은 마치, 내가 자주 말하
듯 만약 당신이 눈앞에 있는 풀 한 포기에서 광명을 볼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떤 것과도 의식이 통하게 된다는 것이다. 상당히 이상하고 기묘한 우주인
을 대해서도 질리거나 비굴해지지 않는 사람들이 내 문하에서 나왔으면 하
는 것이다.
이런 평화로운 지구에서 깨달아, 그저 '있음'에 깊이 느긋하게 있기를 하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당신들은 '우주'라는 말이나마 쓸 자격이 없다는 말이
다. 그러니, '사자선(死者禪)'이라도 해서 '암흑'과 친해지고, 생(生)의 모든
것에서 해방되어서, 고요히 세계를 그저 바라보듯 살며, 느긋이, 목적을 갖
지 않고, 자기를 되돌아보거나 분석하거나 뉘우치거나 하지 말고,
"모르는 그대"인 채로 있으시길.
결코 "그게 뭘까 씨"는 되지 말기.....
저자 약력
無名庵回小(무묘앙에오)
1958년 9월 26일 토오쿄오에서 제조 완료.
14세 때 '깨달음'을 언뜻 넘보는 체험이 있고부터 23세까지 여러 가지 신비
학, TAO 등을 섭렵했지만, 어떤 단체에 소속되는 일은 한번도 없었다. 그리
고는 30세 무렵부터 우발적으로 독자적인 '채널링'을 시작하여, 은하계의 막
후 정보들을 얻었다.
33세에, 그것들에 대한 통괄적 결론과 사색의 결과로 온 생명과 존재에 절
망했다.
1992년 2월 17일, 우발적으로 대오견성했다.
그후 약 1년동안, 명상센터의 명상자들이나 치료가들에게 일방적으로 자기
의 글을 우편으로 보내는 일을 했다. 거의 모두가 묵살해버린 가운데서 3명
의 문하가 생겼다.
1993년 8월부터는 그의 지도와 방편이 갑자기 '선(禪)'으로 기울고, 선문의
본산, 각지방 선방의 중들에게 글을 우편으로 보내기를 계속했다. 그 중에서
문하가 나왔으며, 뒤에 그 중은 대오를 이뤘다.
전통과 형식에 매달리는 선, 그리고 스승을 맹목적으로 신봉하는 명상센터
와의 끊임없는 마찰과 반감 속을 흐르면서, 그의 글은 지금 많은 명상자나
참선수행자들에게 개인적인 편지 또는 기관지의 형태로 전해져 소중히 간직
되면서, 불법ㆍ선ㆍ명상수행ㆍTAO의 막후에서는 그는 카리스마적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일생동안, 단체화ㆍ조직화 통속적인 사제 관계를 전적으로 거부했다.
1994년 10월 22일 죽었다. 당년 36세.
죽은 사람의 선문 직계 문하로 十(쥬우)와 崩山(호오장) 둘을 남겼다.
**태양계 제3 행성에 남겨진 작품**
"폐허의 붓다들"
"속ㆍ폐허의 붓다들"
"경련하면서 읽는 정신세계"
"지구가 꺼질 때의 좌선(座禪)"
"폐허의 붓다들: 외전(外傳)"
얼간이 초능력자들
초능력자는 결국 이렇게 되고 만다
어떤 곳에 스푼을 염력으로 척척 구부리는 이른바 초능력자가 있었다.
그는 어떤 금속, 어떤 물질이든 다 구부릴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도
아무리해도 절대로 구부리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뭘까? 응?
그가 절대로 구부리지 못하는 것
그건 그의 '신념'이었다.
---그의 대가리는 여전히 망가진 시계인 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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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로불사면 결국 이렇게 되고 만다
중국의 어떤 마을 약제사가 의학에서 흔히 있는, 있을 수 있는 결말로
불로불사약을 완성시키고 말았다.
덕분에 마을 사람들이 150세까지 산 것은 좋았는데
누구 하나 200세까지는 살지 않았다.
아니아니, 약의 효과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200년을 다 살기 전에
모두가 자살해 버렸단 말이다.
왜냐하면
불로불사가 되긴 했지만, 그 마을에서는 외도와 이혼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
문이다.
단 20년도 견디어내기 어려운, 서방 또는 마누라 얼굴을
'영원히 보기'를 해낼 수 있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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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이나 동물과 텔레파시가
통하면 결국 이렇게 되고 만다.
만약, 정말 벌레나 새의 말을 알아듣게 된다면
인간들은 그들을 죽여버리기 일쑤일 게다.
그럴 것이, 그들 동물들은 줄곧 같은 말들만을 주고받기 때문이다.
마치, 전철 안에서 인간 아저씨들은 직장의 윗사람 욕이나 하고
아가씨는 먹을 것과 자동차와 사내 얘기만 하는 것처럼
그리고, 젊은 것들은 제 취미와 일과 가십 밖엔 지껄이지 않는 것처럼
새도 벌레도 개들도
역시 날이면 날마다 그저 먹이나 이성(異性)에 대한 얘기만 조잘거리고 있
기 때문이다.
그러니, '동물들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따위로 생각하는 인간들에게 일러두겠는데
그렇게 되면 당신들은 그것들을 죽여버릴 것이란 말이다.
예컨대, 아가씨 고양이가 이렇게 말한다.
"엊저녁의 네 상대, 그 작잔 정말 서툴더라.
그리고 오늘 아침 밥, 뭐가 이렇게 맛이 없니.
인간이면 인간답게 일 좀 잘 해서 맛난 밥 먹게 해주렴.
그 대신 난 귀찮아도 꾹 참고
네가 쓰다듬을 때 가만히 있어 줄게."
텔레파시.
그건 당신이 완전히 '노여움'이라는 걸 초월하지 않고는,
그저 당신을 비참하게 만들 뿐이야.
당신은 먼저, 남의 어떤 말 어떤 악담도
그걸 태연히 지켜보는 자질이 있기를 요구한다.
물질차원에서 만약 그걸 할 수 없다면, 당신에겐 텔레파시 같은 건 불가능
이다.
당신은, 만약 자기 감정이나 노여움을 지켜보는 관찰력도 없이 텔레파시를
가진다면, 당신은 끊임없이 '주위의 인간의 위선이 그냥 그대로 느껴지게'
된다.
그럼 당신은 매일매일 미워하기만 계속할 것이다.
당신은, 시시한 사립탐정의 조수나 방송국의 '실종자 찾아내기' 프로에 출연
하는 3류 점쟁이쯤은 될 수 있겠지만
결국 당신의 인생은 어김없이 파탄한다.
참된 뜻에서 당신들이 온유해질 수 있는 것은
남들의 모든 위선과 거짓에 초연해졌을 때 뿐이다.
그렇게 되면, 당신의 기분이나 기호를 중심으로 한 판단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상황에 대한 솔직한 관찰로부터 나오는 판단이 가능해진다.
그것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상황 그것에 대한 배려이다.
먼저 남이 겉으로는 체면을 차리면서도 머릿속에서는 딴 생각을 하는 그 본
심을
또는 그들이 입으로 소리내는 모든 말들을 대하면서
철저하게 '냉정'할 수 있지 않는 한, 텔레파시는 당신을 괴롭힐 뿐이다.
젊었을 때 내게 일어났던 것이 그런 일이다.
그래서 나는 그때는 걸핏하면 격노했다.
당시의 내가 늘 하는 상대에 대한 첫마디는
'이 거짓말쟁이야'였다.
그러니 그들은 나를 마치 마음을 꿰뚫어보는 악마처럼 여길밖에.
내가 이를테면 심령적인 카운셀링을 할 때는 내게 경의를 품었지만
내가 그들의 위선을 폭로하는 단계에 접어들자 그들은 홀연 돌아서서 나를
증오하기 시작했다.
설령 그것이 그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해주는 수단이라도 말이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에게는 성장과 각성에 대한 갈구가 없는 것이라고
그저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즉, 텔레파시 같은 것은
자기의 사고(思考)를 완전히 버릴 준비가 안된 사람에겐
그저 하나의 도청장치에 불과한 것이다.
지진을 예지(豫知)할 수 있어도 결국 이렇게 되고 만다.
방송에서 들은 말인데,
식물에 전극을 붙여놓고 조사해보니 지진을 예지할 수 있을 것 같아
밤낮없이 필사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교수가 어떤 대학엔가 있다고 한다.
지진이 있기 30시간 전에 식물의 전압에 변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논평자가 말했다.
"이런 연구가 결실하여, 하루라도 빨리, 완전한 지진 예보가 가능해지면 좋
겠습니다."
자, 당신은 어찌 생각하는가??.....
이봐이봐, 거 참 재미있는 연구라고는 하지 마시오.
난 폭소했어.
지구에서는, '과연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이라는 따위로
두발로 걷는 생물인 원숭이들은 고개를 끄덕거린다. 하지만 나는 거침없이
큰 웃음을 터뜨렸다.
무엇보다도 말이요-----
관동 대 지진같은 지진이 닥쳤다고 하자.
하늘에 빌어 가라앉힐 작정인가?? 불가능이지.
일어나는 일은 어찌할 수가 없다.
그럼 다음으로, 자, '예지'를 할 수 있게 됐다고 하자.
예컨대, 어떻게든 예지를 할 수 있어, "글쎄요, 내일 아니 모레쯤, 진도 7의
지진이 관동지방에서 일어날 가능성은 85%입니다." 이런 식으로 일기예보처
럼 아나운서가 말한다고 하자.
그럼 대체 얼마만큼의 사람들이 도망을 갈까?
더구나 방송국으로서는 만약 100%라고 했다가 그대로 되지가 않으면 굉장
한 항의를 받게 된다.
기업들로부터는 소송까지 제기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저 적당한 퍼센트라고 밖에는 말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예지할 수가 있다고 해서 대체 '무엇을 어찌'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연구를 해서, 또는 예지가 가능해져서
실질적으로 무얼 어찌할 수 있는가??
이 아둔한 예언자, 예측전문가들이여.
100퍼센트 확실한 지진 예지가 가능해졌다고 하자. 참 좋은 이야기이다. 그
러나 그런 예지가 가능해지는 데는 적어도 앞으로 반세기는 걸릴 것이다.
일기예보를 봐도 50년 지나서도 겨우 이 모양이다.
아니, 여성의 생리조차 100% 확실한 예지를 못하는 것이다.
아무튼 원숭이 학자들이여
내가 100보 양보하여 100퍼센트의 지진 예지가 가능해진다고 하자.
하지만, 30시간 전에, 또는 4일 전에 그걸 안다면
자, 교통문제나 피난갈 곳의 문제는 어떻게 하겠는가?
그런 대책이 가능한 상태가 되어 있는가?
이제부터 정부가 그 대응시스템을 만들거라고 생각하는가?
결국은 그저 대공황이다.
일어날 일은 교통의 대혼란.
설사 1주일 전에 확실히 예지된다해도 마찬가지이다.
짐을 꾸리는데 이틀간, 토오꾜오에서 온통 사람이 빠져나가는 데는 있는 수
단을 남김없이 활용한다 해도 나흘은, 아니 모두가 순번 따윈 무시하고 내
가 먼저 하고 덤비니 결국은 공황이다.
어마두제하는 사이 기한이 끝나 유인원(類人猿) 수천만이 바베큐원숭이가
된다.
자, 이렇게 실제 문제로는 전혀 아무 쓸모도 없는
그 지진 예지 연구라는 것을 하는 교수의 연구비는 대학에서 대고 있다.
더구나 전극이 붙여진 불쌍한 식물들.
교수는 말한다. "세상을 위한 연구요."
주위의 유인원도 말한다. "그렇지, 그렇지."
그런 원숭이의 연구실에 나라면 이런 엽서라도 한장 띄울까.
"그런 시간이 있으면, 지진 뒤의 사는 방법이나 생각하시지.
지진 예지가 맞을지 안 맞을지 하는 당신의 그 도박취미를 '세상을 위해서'
라곤 하지 마시오.
이 골빈 사람아!"-----
이렇게, 예지할 수 있다는 것과, 그걸 어떻게 처리할 수 있다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니
결국은 지진의 예지 따위는 아무 의미도 없다.
예지는 그저 복권이나 마권이나 싸움의 승패에 쓰이는 것이 고작이고
예지능력은 당신의 도박에는 공헌할지 모르지만
인류를 위해 도움이 된 적은 단 한번도 없는 것이다.
×××××××××××××
적중률 100%의 예언자는 결국 이렇게 되고 만다
자아-----
정확한 예언자가 존재한다고 치자.
'내일의 신문기사'를 쓸 수 있는 가까운 미래부터
10일, 10년 앞까지 완벽하게 알아
100% 적중시키는 자가 있다고 치자.
애석하다고 할지, 당연하다고 할지
그 자는 단 열흘도 살아남지 못할거야.
점을 친다, 치유가를 찾아간다고
사람들은 돈을 쓰면서 용한 사람을 찾아다녔다고 하지만
막상 진짜 예언자가 나오면
그가 숭배를 받는 것은 처음 엿새동안 뿐.
7일째에는 안식(安息)에 들고-----그리고는 영원히 그대로.
가령 보험회사에 암살을 당한다던가-----그저 그뿐이다.
이것이 한 예언자의 '세계창조 6일'의 웃지 못할 이야기이란 말이다.
확실히 미래를 안다해도 사람들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사람은 자기 형편에 견주어 좋은 미래는 기뻐하지만, 나쁜 미래는 피하려
한다.
그런데 그것은 대체 누구의 형편인가?
개인이 아니라 인간 전체라 해도
그럼 지구나 우주 그것 속에서 자기가 대체 어떻게 있어야하는지를 알지도
못하는,
그런 사람들이 아무리 정확한 예언을 얻은들
그건 그저 더 큰 파멸을 초래할 뿐이다.
그것은 정신적인 파멸이다.
사람들은 모두 '알기만 하면 어떻게든 할 수가 있겠지'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미친 사람의 증상이란 말이다.
만약 뭐든 알기만 하면 어떻게 할 수 있다면, 지식인ㆍ학자ㆍ예언자들은 벌
써 오래오래 전에
이 세계를 바꾸어놓을 수 있었을 게다.
그러나, 알면 알수록 그들은 혼돈을 낳고 불행을 사방에 뿌려놓았다.
예언에 귀를 기울이라고 한 붓다는 단 한 사람도 없다.
지식이 사람을 성숙시킨다고 한 붓다는 단 하나도 없다.
지구의 유인원들은 적절한 정보를 모아, 적절한 판단을 하고
적절히 대응하는 것이 지혜요, 과학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그것이 지성(知性)의 기능이라고-----.
그럼 '그 적절성을 판단하는 기준'은 대체 무엇인가??
그들이 말하는 '적절'이란, 우주의 스케일에서의 이야기가 아니라
왜소한 인간의 존속, 그리고 저희들이 고통을 겪지 않으려는 방책과
저희들이 쾌락을 얻기 위해 적절한 조처를 말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대체 최후에는 누가
그리고 '인간의 성질 가운데 무엇이' 만족하려는 것일까??
영웅을 자처하는 목사는 지옥에 가서 결국 이렇게 되고 만다
이런 이야기를 해보자.
배는 곧 침몰하겠는데, 보트에는 10명밖엔 탈수가 없어
누군가 하나가 희생이 되어 배와 함께 가라앉아 죽어야만 하게 됐다.
거기에 목사 한 분이 있었다.
이른바 종교가였기에, 그는 기꺼이 죽을 용의가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는 뭔가 좋은 일을 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는 희생정신이 선(善)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 죽는 역할을 떠맡아
멋지게 뒈지셨다.
그 뒤 이것이 뉴스로 보도되고 목사는 칭송받고 하는 바보같은 일이 있었는
데
당신들에게는 특별히 이 희생정신의 영웅 목사의 뒷이야기를 해주기로 한
다.
실은 죽고나서 그가 천국이 아니라 지옥에 간 것이다.
그래서 당연히 그는 불평을 했다.
목사 - "왠가요? 저는 열 사람의 목숨을 위해 희생이 됐어요. 왜 이 숭고한
내가 이런 구린내 나는 악마들 속에 끼어있어야 한단 말이오?"
그러자 지옥의 대왕 사탄은 말했다.
"아가야, 좀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구나-----."
그리고는 사탄이 지옥의 텔레비전 모니터 스위치를 넣었다.
화면에는 표류하는 보트가 보였다.
사탄 - "자, 봐라. 네가 희생이 되어 살린 열 사람 가운데에 하나, 자기가
배에 남겠노라고 우긴 고집통이 청년이 있었지?"
목사 - "아아, 있었어. 그렇지만 난 너같은 장래가 있는 젊은이가 죽어서는
안된다고 안간힘을 써서 그를 설득하여 내가 대신 죽은 거요."
사탄 "그럼 화면의 저 보트를 잘 보아라."
열 사람을 태운 보트에서 그 청년이 갑자기 권총을 난사하여 아홉을 죽여버
렸다.
그리고 그 자신도 자살을 했다.
사탄 - "너는 ----- 그 청년을 왜 배에 남게 하지 않았느냐?
그는 자기의 의지로서 자기가 남겠다고 했는데 말이다.
그는 거기서 자살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의 운명은 거기서 자살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더구나 말이다. 이 얼간이 목사야, 잘 들어라.
그 청년은 거기서 스스로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기 꼭 1초 전에, 거기서 신
(神)을 보게 되고
거기서 깨달아, 하나의 예수가 될 운명이었던 것이다.
화면을 잘 보라.
더구나 배가 가라앉기 30초 전에 가까이로 가고 있던 러시아의 원자력 잠수
함에 발견되어
그는 구출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보트의 사람들도 모두 살아남을 수 있
게 되어 있었던 것이야.
그뿐만이 아니야, 이 멍청이야!
그렇게 자살을 않고, 깨닫고 기적적으로 구조된 청년은 8년 뒤에는 러시아
의 정치가로서 제3차 대전을 막아내는 인물이었단 말이다.
그런데 네놈은 그걸 망쳐놨어!!!!
작디작은, 하잘 것 없는 네놈 하나가 천국에 가기 위한 수단인 선행(善行)을
하는 바람에 말이다! 그러니까 너같은 놈은 지옥행이야. 빌어먹을 놈아!"
헌데, 이 이야기의 깊이를 당신은 제대로 읽어낼 수 있을까?
인간은 이승에서는 겸허해도 저승에서는 교만해지고 만다.
이것이 알아차려야 할 첫째 것이다.
알아야 할 둘째 것은
운명이란 당신들의 타산적인 사고로는 판단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어떤 논리도 아니고, 일종의 '직감'이다.
그러나 그 직감이 가리켜 보여주는 것은, 흔히 인간의 근시안적인 이해관계
나 세속적인 판단과는 무척 다른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단 말이다.
왜냐하면,
(이하생략)
...............................
.........................
내가
명상센터나 선방이나 치료사 따위들이 파산하고 해산하기를 부추기는 면이
분명히 있다.
그런 것들은 당신의 본성에 무거운 짐이 되고 잡음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부추기는 것은
'당신'의 해산이다.
당신의 인격의 해산이다.
당신의 내면에서, 당신이 생각하고 상상한 당신의 꿈이나 엇갈리는 의견
당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무수한 사고들
당신의 정책(policy)같은 것들의 해산이다.
그러므로, 나는 먼저 당신의 한 사람의 내면에 있는 사고들을 해산시키고
끝으로 당신의 사고 그것과
이혼시킨다.
남는 것은 진짜 '당신'뿐이다.
붓다들은 언제나 그저 존재 속에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당신도 명상이나 좌선의 일별(一瞥) 속에서, 그저 순수하게 존재하고 있다.
허나, 틀리다고 하면
나는 두번 다시 거기서 나갈 수가 없다.
당신들은, 아이고! 하는 사이에, 돈벌이라든가, 사랑이라든가, 모럴, 세상, 정
신세계, 도사, 좌선, 사이코테라피, 트란스퍼스날, OBE, 채널링, 그리고 우주
의 끝까지 '날려가 버린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나갈 수가 없다.
나는 두 번 다시 '지금 여기'의 본성에서 나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두 번 다시 나가지 않는 것
그것이 삶과 죽음 사이의
있음(存在)의 '내집'이기에.
경련하면서 읽는 정신세계
무묘앙에오
1
─기적의 치료가도 이렇게 되고 만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뉴욕의 어떤 영능력으로 병을 고치는 치료가가
말기 암환자를 고쳐주었다.
그런데 병이 낫고 나서 몇 달 지나,
그 환자는 이혼문제로 아내와 다투다가 정신착란을 일으켜
총을 난사하여, 아내 말고도 열두 사람을 쏘아 죽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영능력자인 치료가는 자살했다고 한다.
유서는 이러했다.
“치료란, 또는 ‘도움’이란 무엇을 위한 행위인가?”
텔라피스트들, 카운셀러들, 치료가들은 명심해야 한다.
과연, 치료해주는 행위 그것은 어떻든,
어떤 환자는 병을 고쳐줘야 할 운명이고,
누구는 운명으로 보아 고쳐줘서는
안된다고, 누가 판단을 할 수 있는가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말로 슬쩍 도망친다.
“도움을 받은 자의 그 뒤의 문제는 치료가 쪽의 책임은 아니겠지.
그 자살한 치료가는, 단지 지나치게 자학적이다”라고 하면서.
허나, 그럴까?
그 남편을 건져 주었기에 열세 사람이 살해된 것도 또한 ‘사실’이다.
사람은 흔히 ‘백사람을 건지기 위해 한 사람을 희생시킬
필요도 있다’는 따위로 말하기 일쑤이다.
그렇다면, 그 남편이 바로 희생되어야 할 한 사람이어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 관계도 없는 열두 사람의 피해자들에게도
각각의 운명, 가족, 미래가 있고,
그 가운데 한사람이 붓다가 될 운명이었을지도 모르니까.
어떻게 당신들은 이런 복잡한 운명을 판단하여
결론을 내리려는 것인지?
대체, 암환자인 남편을 도와준 것이 옳았는가, 잘못이었는가?
“운명이니까, 자연대로 놔둬”하는 것도
흔히 하는 도망치는 말이다.
그렇게 자연에 맡겨두고 싶다면, 당신들은 아예
의사에게 가서도 안된다.
“차라리 자연이나 운명에 맡긴다”
이 말을, 당신들이 사물을 판단할 수가 없어
그 철학적 추구를 내팽개치는 구실로 삼는 것을
나는 보아 왔다.
사정이 나빠져서 어찌할지 생각이 안나면 당신들은 비로소
“운명에 맡기자”라는 따위를 말한다.
그렇게 될 때까지는 하나에서 열까지 자기가
운명을 조종하고 있는 것같은 생각을 가지고,
남의 운명에 간섭하고, 심지어는 남의 운명을 점치는 따위의
짓거리까지 해대고 있다,
자, 내가 당신을 추격해 보겠다.
대체 옳음의 기준이 무엇이냐?
모든 행위와 언동에 있어서의 옳음의 기준이 무엇이지?
당신 인생의 모든 국면에서, 절대적 기준이 없다면
당신은 누구와도 관련되어서는 안된다.
당신은 그저 자신의 불안과 불만에다 남을 끌어들여,
혼란된 언동을 할 뿐이다.
그러니, 절대의 옳음이 알아질 때까지,
결코 분에 넘치는 짓을 해서는 안된다.
예컨대, 당신은 어떤 대학에 가야 할까?
자, 이런 문제를 당신은 무엇에 따라 판단하지?
당신의 자유의지에 따라야 할까?
과연 그것은 정말 당신의 자유의지일까?
그것은, 그저 사회로부터 주입된 가치관에 따라
대학을 선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또 당신이 가령, 독자적인 철학과 인생관으로
선택한 대학, 배우자, 무엇이든, 당신이 선택하는 길에
옳다 그르다는 기준을 어떻게 만들지?
긴 눈으로 보면, 많고 많은 실패로 보이는 것도
뒤집혀서는 뭔가를 이뤄놓는다. 그런데,
그 반대 역시 참이란 말이다.
무수히 성공해 온 것들이 몽땅 뒤집혀서,
그저 헛된 것이 될 날이 온다.
무엇이 끝가는 선악의 기준이지?
자, 그러니 다시 우주의 이야기로 가보지.
왜냐하면, 그것은 나의 광명, 그 대오(大悟)의 날 직전까지
계속되었던 일이기 때문이야.
존재의 목적을 알게 되면 만사 해결이라고
나는 탐구방향을 정했었다.
그래서 모든 우주인에게 그걸 물어봤다.
하지만, 납득은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완전히 나를 납득시켜준 해답이 나의 안에 있었다.
나는 몇 번씩이나 다른 결론을 가정해 보았다.
그러나, 그 결론 외에 다른 결론은 있을 수 없었다.
그 결론이야말로, 내게 그날 이후 다시는
탐구가 있지 않게 된 원인이었다.
원인의 하나에는,
이른바 사고(思考)를 넘어선 깨달음이
항구적인 것이 되어버렸다는 것은 있다.
허나, 또 하나의 원인,
그것은 탐구의 대상이 무(無)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당신들이 명상으로 깨달음을 얻는다 해도 반드시 언젠가는,
또다시 세계의 존재의미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때가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게는 절대로 그것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해답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해답은 두번 다시 생각하기도 싫은 것이야.
그 해답이, 우리들이나 나를 보다 긍정적, 적극적으로 만들고,
그것을 앎으로써
보다 충실해진다든가, 지혜에 넘치게 된다든가,
목적이 정해져서 생기에 넘쳐 남들에게,
사회에 공헌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우주의 발생과 유지의 진실은, 전혀 인간의 꿈, 진화나 발전 등의
달콤한 몽상이나, 깨달음과 평화 등등 유치한 세계의 비전을
정면에서 때려부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실은 기분좋은 것’이어야 한다는 따위의 논리는
아무데도 없으니까.
예컨대, 당신은 언젠가는 죽는다.
이것은 사실이고, 아무리 당신을 불안하게 만들든 그저 사실이다.
사실이란 것은 듣는 자의 기분이나 바람과는 관계가 없다.
나는 깨닫기 전부터도,
많은 사람들이 사실을 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지적 또는 감정적 쾌락을 줄 수
있을 것 같은 정보만을 요구하고 있음을 보아왔다.
아무튼, 우주의 발생, 그 활동, 그 종말, 그 의미, 그 목적
거기에는 전혀 철학도 정신성도 하느님도 있지 않았다.
하느님이라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뭔가 위대한 뜻을 가지고 우주를 만드셨다는,
그런 ‘자비로운’ 존재가 있지 않더라는 말이다.
그런 ‘척’하는 고차원의 지성체는 얼마든지 있었지만.
그리고, 내가 결정적으로 알게 된 사실은 이랬다.
─우주에는 위대한 목적 같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렇다 할 목적도 없다. 방향성도 제멋대로다.
오직 하나, 이 우주에는 단 하나의 프로그램이랄까
의지같은 것이 있다.
그것은 ‘생존’을 계속하려는 의지이다.
그러나 이것은 의지라기보다는 본능, 혹은
전우주적인 충동이라고 해도 좋다.
즉 표현을 바꾸면, ‘병적인 충동’이다.
그 병명은 ‘활동병’, ‘창조병’, ‘생존병’이다.─
말하자면, 이 우주는 그저 계속 존재하려는 충동에 의해,
그 모든 차원이 형성되어 있다.
일곱 영의 세계마저도 모두가 ‘계속 생존’을 위한 갈등 속에 있다.
말하자면, 육체가 없어도 정신체는 존재하며
그런 뭔가 모양 있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존속과 관리의 필요가 있는 것이요,
따라서 어떤 고차원에도 각각 나름의 죽음이 있다.
왜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할까? 그들만이 아니다.
당신들도 마찬가지이다. 왜 완전한 소멸을 두려워할까?
그것은, 당신들이 원래 편안히 죽게는 프로그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이 산다는 것, 그 가장 밑바닥의 충동조차도
자기의 의지가 아니라 세뇌된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그 살고자 하는 충동은 불안이 낳아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것을 나는 전우주적인 ‘불안산업’이라고 했다.
특히 지구에 그 프로그램이 과잉상태인 것은 아니고,
우주 전역이 다 그렇다.
우주에는 목적은 없다.
하지만 어떤 의지, 충동, 공포가 있다 .
그것은 무(無)가 되고 싶지 않다는 것.
이건 인간만이 아니다.
우주 그 자체의 고차원의 그 불안을 지니는 한,
말단의 인간이 그것을 거부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이처럼 애당초 왜 존재해야만 하는지를 캐는 일도 없이,
사람들도 우주인들도 그저 존재하며 활동하기를 계속한다.
변화는 있지만, 거기에 뭔가 진화 같은 것이 있을까?
진화란 살기 위해 생물학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합리적이 되어가는 일일까?
그렇다면, 역시 결론은 마찬가지이다. 진화는 생존을 위해서이고,
진화를 위한 생존은 아니다.
그렇다면, 정신세계가 말하는 ‘얼의 진화’ 등등이라 해본들,
그 또한 고차원 우주에서
어떻게 하면 계속 생존할까 하는 생존욕의 산물에 불과하다.
사는 보람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로, 목적을 위한 목적은 아니고,
살기 위한 ‘사는 보람’이라는 자극에 불과하다.
기쁨이란 단지 자살 방지약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사실은, 우주에는 옳음도 없고, 진화 같은 것도 없으며
오직 하나의 기준, 우주의 목적과 활동이
‘존속(存續)’과 ‘고통 회피’에만 바쳐지고 있다.
그저 계속 있기. 무엇을 위해서도 아니다. 그저 존재를 위해.
자, ‘사실’이 이뿐이라면, 나도 자세를 고쳐
편안한 여생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더더욱 복잡하고 단순했다.
결국, 그 우주를 존재케 하고 활동하게 하기 위해,
이하생략
.......................................
제2장 우주편─다른 차원편
질문자 : 아무래도, 당신은 TAO(道)나 선(禪)이나,
특정 유파의 불교만은 지지하는 것 같은데, 그럼
그밖의 종교에 대해서는, 그 모두를 부정하는 건가요?
EO : 결론부터 말한다면 YES이다. 더구나 내가
이른바 종교를 부정하는 논거는 다음의 논문에서 말하겠지만,
그것은 아주 명확한 논리적 근거에 의해서이다.
그런데, 당신이 말하는 그 ‘종교가 뭔가’의
정의를 말해주기 바라는데?
질문자 : 절대자를 믿어 그것이 보여주는 삶의 길에 따라 사는 것을 말합니다.
EO : 다시 말해두지만, 나는 지구에 존재했던 여러 종파의
일곱가지 큰 종교를 모두 무가치한 것으로 본다.
유태, 그리스도는 물론, 힌두, 이슬람, 라마교, 도교, 불교는 모조리 부정한다.
물론
신도(神
道)따윈 말할 것도 없다.
다만, 내가 부정하는 도교란 노자는 아니고,
뒤의 세속화한 그것이다.
또한 불교라고 했지만, 원시 경전에 대해서는 다르다.
단 현재의 일본 불교라는 것은, 힌두교적인 다신교와
그리스도교적인 일신교의 이념의 ‘뒤죽박죽’임이 명백하다.
종파라는 회사의 사장 곧 주신(主神)이나 주불(主佛)의
대가리가 바뀐 것 뿐이고, 말단의 불(보살들)은
여기저기의 불교종파에 고개를 내미는, 아무튼 엉망진창이다.
종교가나 신학자나 신자들이 대체
무엇에 의지하고 싶은지는 모르지만,
그들이 우러러 섬기는 ‘유일 절대자’의 개념이란,
과거 만년의 역사 가운데서도 가장 악질의 ‘소문’ 또는
‘터무니없는 엉터리’의 하나이다.
다만, 나는 이른바 데봐(자연정령)들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온갖 차원의 중간관리직에 있는, 육체를 갖지 않은
지성체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우주의 생명체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논하는 것은, 그 꼭대기에 있다고 소문난
절대자의 정의 그것의 모순, 그리고
만약 그것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그 근거에 대해서이다.
또한 그런 유일절대자가 가령 존재했다고 해도,
그것에 피조물이 존경의 뜻을 품거나
경의를 표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장황하게 해설하기 보다는
우리들보다 훨씬 온 우주의 역사에 정통한,
다른 차원의 지성체가 하는 말을 들어보는 것이 좋겠다.
다음의 기록은,
지구의 전형적인 얼간이 종교가와,
우주의 전형적인 얼간이 자성체와의
불꽃튀는 토론의 모양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일반적인 지적생명체라는 것의 진짜분위기를
알기 쉽게 하려고, ‘그들’의 말투를 심히 경박하게,
욕되고 천하게, 또한 논리정연하게 해봤다.
컴퓨터가 말하는 것 같은 무미건조하고 논리적인 말투를 해도
무방했겠지만, 오히려 그 냉철함에 당신들의 감정이 아파질
것을 배려한 나머지, 그야말로 아주 천박한 말투로 했으니,
독자들은 아주 즐겨주리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다 읽고도,
그래도 당신이 신사(神社)라든가, 교회나, 절이나,
그밖의 사원에 가서 ‘뭔가’를, ‘자기이해를 위해 빈다’면,
당신은 회복불가능인 망상을 지녔거나 또는
논리적인 이해력이 전혀 없는
유인원(類人猿)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신(神)의 비존재성에 대해 다른 별의 난봉꾼이 말하면 이렇게 되고 만다
이하생략
.............................
.................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는 자네들의 자유이지만, 이 자유라는 말의 정의에는,
자네들의 언어를 구사해도 앞으로 40세기쯤의 설명 시간이 필요할 것이니 이쯤에서
마
치자.
1992 8/21 EO
無名庵回小(무묘앙에오)
이 채널의 뇌파를 빌려 통로로 삼아, 이 논문을 자네들 지구인의 집합의식
의 평균적 지성 속으로 던져 넣어 보았다. 그리고 하룻밤을 기다렸다.다음
날 아침 이 채널러의 뇌에 회수되어 있는 자네들의 질문과 반론은 ‘기분
이 울적해질 만큼’ 바보같은 것들이었다. 그것은 이러했다.자네들=· 우
리들의 질문=…
“그래도 하느님은 존재한단 말이오. 옛부터 문헌에 나와 있어.”
“그 문헌은 누가 썼지?”·“그 하느님을 본 사람이지.”
“그런 건 온 우주에서 썩어문드러질 만큼 우리는 보아왔다. 그리고, 결과
라고 해봤자, 그 모두가 다 서로 전혀 다른 견해들이었다. 허나 공통되
는 특징은 있었지. 그건 이렇다. ‘우리 민족이 인식한 그것만이 제일이
다.’라는 각 종족의 주장뿐이란 말이다. 힘이 으뜸으로 많고, 지배력이
으뜸이고, 애정이 으뜸이고, 파괴력이 으뜸이고… 결국 그놈은 관념의
으뜸 경쟁 표적이 되어버렸다는 공통점이다.”·“으뜸이니까 신(神)이지”
“왜 버금이면 안되지?”·“그래서는 궁극의 지배자는 아니야”
“봐라, 역시 자네들은 으뜸 찾아내기를 좋아하는 거지. 그래 그 으뜸인
놈이 있기 전에는 누가 있었지?”·“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 무(無)가 으뜸이잖아?”·“그건 존재하지 않으므로 우리가 논할
가치가 없다”
“좋겠지. 그럼 다시 으뜸놀이의 논의를 해보지. 그래, 그놈은 어떤 모습
인가?”·“장소에 따라 다른 것 같다. 즉, 더부룩한 머리에 갤쭉한 눈
이기도 하고, 다른 곳에서는 수염이 있는 장로이고. 그러나 그건 한때의
가상이고 신에게는 모습이 없다.”…“그럼 그 작자에겐 뭐가 있는가?”
·“지혜, 지식, 힘이다”
“얼마 만큼인가?”·“무한이다”
“자네는 바보인가?? 무한을 자네는 본 일이 있는가? 설마 별이 반짝이는
공간의 저어기 저편도 아마 그렇게 되어있겠지 하고 짐작을 해서 무한이
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아, 아, 아니, 그대로야”
“그럼 무한히 작은 공간을 자네들은 얼마만큼 탐색했나?”·“지금으로서
는 기계를 통해서 직접은 보이지 않지만 논리적으로는 어느 정도”
“그럴 테지. 자네들이 본 것은 무한이 아니라 제한의 세계야. 그러니까
자네들에게는 무한이라는 말을 쓸 자격이 없다. 그러므로, 무한이란 자
네들의 환상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좋다. 그럼 당신들은 무한을
알고 있는가?”
“알 턱이 없지 않은가. 허나, 무한이 된 적은 있지. 이봐, 잘 들어, 원숭
이씨. 무한이 된다는 건 무한해진다는 거야. 자네들이 말하는 바 시각
(視覺)같은 것도, 인식도, 그 범위, 내용, 뭐든 모조리 다 무한이야. 한
계없이 퍼져나가고, 또 무한 마이크로까지 오므라드는 거야. 무한히 말
이다. 그러므로 끝이 없다. 끝이 없는 무한 속에서는, 인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나누는 것도 가르는 것도 없다. 어디서 어디까지라는 한정도 하
지 않아. 따라서, 무한이 될 수는 있어도 그걸 볼 수는 없어. 알겠나,
원숭이??”·“그럭저럭”
“그럼, 논점을 되돌려보자. 자, 그 우주 속에서, 최초로 한정된 자를 신
이라고 하는 건가?”·“그런 말이 되겠지”
“단지 최초라고 해서 존경하거나 복종할 가치가 있는 존재가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아니, 아니, 신은 모든 시간에 편재하는 것이다. 최초
에 있었고, 지금도 있고, 최후에도 있다”
“그저 있는 것 뿐인가?”·“우주를 운영하고, 스스로 만들어낸 생물이나
물체를 진화시키는 것이 그의 의무인 거야”
“이봐 이봐, 원숭이여. 최초에 있던 놈이, 더구나 최후까지 있는 놈이,
대체 다른 어떤 존재로부터 의무따위를 강요당하는가? 이 멍청이야!”·
“아니, 저 …, 의무는 아니야, 그의 즐거움, … 그래, 맞아, 취미야.
창조는 신의 즐거움이라고 동양의 경전에도 씌어있지.”
“그래그래? 그렇다면 좋다. 그 즐거움이란 무엇을 말하는 거지?”·“우
리가 웃을 때의 감정으로 대표되는 마음의 작용이다”
“허허…??? 그럼 이런 말인가?자네들이 포르노잡지를 보면서 빙싯거리고,
‘이거 정말 끝내주는군’ 하면서 빙싯거리며 하느님인지 뭔지의 창조물
을 먹기도 하고, 또는 먹지도 않으면서 낚시질을 하거나, 빙싯거리면서
깔아뭉개고 살육을 한단 말이지. 그런가, 신이란 그런 것인가… 요컨대
수단이야 어떻든 ‘빙싯빙싯’ 한단 말이지?”·“아니, 그게 아니야.
신의 유희는 보다 건전하다”
“허헛헛헛…???? 건전하다고? 그래? 그럼 건전이라는 걸 여기서 정의해보
라”·“즉, 그…, 말하자면, 즉, 좋은 놀이이다. 악의 없는”
“허자네들의 아이들이 악의도 없이 곤충의 다리를 톡톡 분지르면서 빙글
빙글 웃음을 흘리고 즐기는 것을 보는데, 바로 그건가?”·“아니야. 그
건 달라. 그들은 아직 생물의 아픔을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 거야. 그건
다르다. 그것은 신의 유희가 아니다”
“이봐, 아가야. 벌레에겐 아픔이 없어요. 애를 쓰긴 하지만 자네들이 아
주 싫어하는 그 꿈틀꿈틀 움직이는 발이 없어지니 말이야. 하지만 아픔
은 없어”·“다른 생물이 곤란해 하는 짓을 하느님은 하지 않는다”
“그럼 자네들에게 먹히는 다른 생물들은 곤란해하지 않는단 말이군??”·
“아니…, 그…, 그야 곤란하겠지. 그러나 신이 이 먹이의 사슬이라는
법칙을 만들었으니까, 그런 것까지 우리가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것도
하느님의 뜻이지”
“그렇다고 치자. 그렇다면, 신은, 먹혀서 곤란한 것과, 먹지 않으면 곤란
한 것 두 가지를 만들고는, 한쪽은 곤란해도 좋고, 한쪽은 곤란하지 않
도록 편을 들어주는 놀이를 하느님은 묵인하고 있다고 해도 되겠군”·
“이봐요, 우주인, 잠깐 잠깐. 그건 우리의 육체 차원의 이야기야. 영의
세계에서는 그렇게 먹고 먹힐 필요가 없어. 영에서는 누구도 고통이 없
으며, 모두가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이 물질세계란 초월해야 하는 저차원
이다”
“그 저차원도 신의 산물이잖아?? 그것이 그놈의 즐거움의 하나지”·“그
렇다. 그러니까 만물을 그이는 만들었지”
“물론 고통까지도. 자, 그럼 무엇때문이지??”·“배우기 위하여”
“무엇을?”·“만물에 대하여”…“누가?”·“우리들이지”
“그놈이 만물에 대해 뭐든 다 알고 있다면, 왜 우리에게 그런 걸 배우게
하지??”·“아니, 틀렸어. 정정한다. 신은 우리와 함께 배우고 있는 것
이다. 우주의 창조는 신의 자기인식을 위해서라고 서양 경전에 있었다”
“그럼 그 으뜸이라는 것은 어떻게 되었나?? 원숭이야”·“함께 으뜸이란
말이다. 그러니까, 동양의 경전에 있듯이, 신과 우리는 하나이다”
“함께 으뜸이라…. 흥. 그럼 순위를 따지는 의미가 없어졌군 그래??”·
“그러므로, 동양의 경전에는, 무차별·부변별이 깨달음이라고 씌어 있
다”
“이봐, 아무도 깨달음에 대해선 말하고 있지 않아. 원숭이들아. 논점을
일일이 우리가 되돌려 놓게 하다니. 그래 자네들의 신이란 것이 어떤 것
이야?? 어떻게 그놈이 존재한다고 확신할 수가 있지??”·“신이 존재하
지 않으면 만물도 존재치 않기 때문이다”
“너희들, 그런 말도 안되는 말만 하도록 대체 누구에게 배웠는가?? 어떻
게 그런 공식이 성립되지?? 이 채널러를 통해서 이미 말했지. 태고에 존
재했어도 지금 있을 필요는 전혀 없다고.”·“아니, 신은 그 법칙 자체
속에 살아 있다”
“그렇더라도 말이야, 그 작자에게 인격이나 자비따위를 유지할 필요라든
가, 자네들의 사생활에 대한 카운셀링이라든가, 나아가서는 그 작자가
제멋대로 만들어 놓은 자네들의 그 빈약한 육체의 기적적 치료따위를 해
야 하는 의무는 없겠지? 그놈이 남겨놓은 건 어떤 법칙이지??”·“전부
다 남겨놓은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서, 지켜보며, 관리하고 있다”
“무엇때문이지??”·“즐기기 위해”
“누가?”·“함께 말이다”
“그 표어가 하느님의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꼭 같은 슬로건이 시리우스
인공두뇌개발회사에도 있었지. ‘함께 즐깁시다’ 이거야. 바로 최근에
우리는 그 기업을 하룻밤 사이에 소멸시켜버렸다. 그리고 수백광년의 공
백이 된 우주공간 빈 곳에 우리는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함께 즐기기
를 마쳤노라’고.”Ⅱ Ⅱ Ⅱ Ⅱ Ⅱ Ⅱ Ⅱ Ⅱ자, 여기서, 자네들과의 쓸
데없는 논의의 시간 단축을 위해, 자네들의 여태까지의 이론을 종합하고,
우리가 지각한 자네들의 짜임새를 말해보겠다-자네들이 구축해놓은 ‘으
뜸인 놈’의 개념은, 그 개념 자체에 많은 빠진 것들과 모자란 것들, 또
는 제약이나, 범위의 한정이 보이므로, 개념이라보다는 맹신에 가깝다.
여기서 이 ‘맹신의 정의’는 이렇다.근거를 이룬다고 보여지는 검토자
료의 정보가 일정량에 이르기보다 훨씬 이전에, 이미 사실의 검토따윈
아무래도 상관없고, 처음부터 그것을 믿음으로써 일구어내어지는 뇌파
(腦波)의 쾌락을 바라는 본능.그 반대 역시 참이다.의혹, 부정에 대한
맹신도 마찬가지이다. 그저 뒤집어 놓은 것뿐. 어떻게 그것을 부정할까
하는 뇌파에서 쾌락중추가 쾌락을 느끼기에 중점을 두는 생물은, 그것을
부정하는 자료를 다 모으기 훨씬 전부터 ‘무조건 부정해 버리는 거다’
하는 본능의 신호대로 해내려는 목표를 향해 가는 것이다.그러므로, 이
때는 온전한 정신으로 논리를 따르거나 검토할 여지가 없으며, 어떻게
하면 최초의 ‘가정(假定)으로서 준비한 논리’에 많은 응원단을 끌어들
일까의 게임이 시작된다는 말이다. 이 게임은 아직도 안드로메다의 민족
이 즐겨 하등생물에게 프로그램하여 ‘함께 즐기고’ 있어.자네들의 세
계에서는 이것을 ‘포고’ 또는 ‘선거’라고 부르지.논리의 정당성이
아니라, 어찌하면 정당한 논리를 계속 추구하는 지성체를 어떻게든 끌어
들여 설득해서, 지성체를 끌어 자기의 가설을 믿도록 만드느냐의 게임이
다. 자네도 그런 사람의 하나같은데 틀렸는가?”·“나는 다르다. 논리
적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대로 논리를 따라가기로 하지. 그 전에 쓸데없는 전제이긴
하지만, 멍청한 원숭이가 70억이나 자네들의 행성에 배치되어 있으니 말
해두는 것인데,설령 관념의 유희라 해도 말이야, 신의 개념과, 자네들이
보기에 유능한 지성체나 생물체 또는 파괴력이나 협박력을 갖는 지성체
와 혼동하지 말라, 이 말이다.”
신이라는 것을 자네들에게 정의하라고 하면 말이다,평소에는 평온하고 고
요한 우리들마저도 ‘기분이 울적해지는 대답’이 자네들에게서 돌아오지.
자네들의 하느님의 이미지는 이런 거야.·병을 고쳐준다
-헌데-결핵은 지금 병원에서 고쳐진다. 따라서 백신이 신이다.
·무엇이든 다 꿰뚫어본다.
-헌데-그놈이 자네들은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을 꿰뚫어본다 해
도 자네들에게는 그것을 알 방도가 전혀 없다. 따라서, 꿰뚫어본다 해도
그놈이 뭘 꿰뚫어보는지를 자네들은 알 턱이 없어. 자네들이 생각하는 것
은 이른바 ESP를 지닌 능력자의 완성체의 이미지 같은데, 그건 단지 지각
시스템의 연장일 뿐, 이해력이나 통찰력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대화를 우리는 흔히 듣는다.
-능력자 -“저 -, 당신의 집 마당에 이런 것이 보이는데요.”
-질문자 -“와 -, 정말? 어떻게 그런 걸 알지요?”
-우리들 -”와 -. 정말? 어떻게 그런 걸 모르지요?”
잘 살펴보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이런 류의 자네들의 경의나 존경, 숭배에
는 반드시 그것을 떠받치는 어떤 근거가 있다. 단, 숭배에는 양(量)적인
들쭉날쭉이 있다는 것에 주목하라.즉, 조금 숭배한다든가, 이 부분은 나보
다 능력이 있으니 숭배한다든가, 이 부분은 나보다 아래이니 경멸(이 때는
마이너스의 숭배치=경멸)한다는 따위.언제나 숭배나 존경에는 먼저 어떤
기준이 자네들에게 있다. 그렇게 되면, 자네들이 지금처럼 별 쓸모없는 파
리떼인 한, 자네들은 우주의 거의 모든 것들을 숭배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자네들이 사는 목적은, 당분간, 자네들의 바보같은 자식들과, 자
네들 이웃의 바보같은 주민들과, 자네의 멍청이 제자, 그리고 자네들 자신
을 경멸하는 대신,다른 모든 존재 거의 모두를 숭배하고, 경배하고, 존경
해야만 하는 것이다. 열심히 해보라, 원숭이들아.· · · · · · · ·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이 채널러 EO가 어느 날 지켜보았던 일이다.어떤 사
나이가 우연히 날아가는 파리 한 마리를 후려쳤다. 그놈은 멋지게 들어맞
았구나 싶어 빙긋이 웃으면서 뇌까렸다.
“왜 파리를 죽이는 걸까 -”(난 이렇게 약한 생물을 죽이는 일에 대해 의
문을 품을 만큼의 사랑은 있단 말이다… 하고 말하려는 듯)‘네가 파리를
생물이라고 여기지 않는 비정한 깡패이기 때문이지…’라고는말하지 않고,
“단순한 습관이겠지요…”하고 EO는 말해보았다.어떤 반응을 할까고 그는
지켜보았다. 그랬더니 사나이는 이러는 것이었다-“고약한 습관이군-”이
렇게 그놈은 습관 탓으로 돌렸다.EO는 생각했다.일하는 데 방해가 되어(별
로 방해도 하지 않은 파리였지만) 죽여버리고 싶어 죽였다고 하면 그만인
것을, 남들에게서 비정한 놈이라고 경멸받기 싫다는 따위로 쓸데없는 갈등
을 하는군. 어디 한번 자연법칙의 ABC를 가르쳐주고 싶으나, 나에게는 뭐…
그런 권한이 없으니, 그래, 그저 그런 거지.그런데, TAO의 형벌인지, 아니
면 붓다나 달마의 개입인지, 아니면 단순한 우연인지는 차치하고,그 사나
이는 사흘 뒤에 궁둥이에 세균이 감염되어 걸음도 제대로 못걷는 상태를
며칠씩 겪었다. 파리보다 천 배도 더 작은 균에 의해서 말이다.여기서 교
훈을 본다.생물의 크기를 가지고, 또 생물의 지능을 가지고, 생물을 모욕
하고 살륙하는 자는 ‘그보다 훨씬 작은 생물’로, 아주 간단하게 불쾌한
생활을 어쩔 수 없이 해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알겠는가, 지구인들이여. 자, 공포, 존경, 숭배, 경멸… 뭐든 거기에는 기
준이라는 것이 있다. 그 기준이란 항상 자네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가’이다. 세밀하게 보면, 자네들에게는 자네들이 지각도 못하는 무수한
전자파, 중력, 미생물, 기체 등등에 끊임없이 영향받고 있으면서도, 한가
롭게 술집에서 생식의 짝을 찾는 멍청한 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니, 엄밀하
게는, 자네들에 가능한 건전하고 모범적인 생활이 어떤 것인가 하면,자네
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자네들이 의식적으로 인식하거나 그렇게 믿
는 이해관계나 사활문제 중에서, 자네들의 ‘기분좋음’을 가속하는지 저
해하는지를 기준으로 외계로부터의 자극을 분류하여 그 가운데서, 자네들
에게 프로그램된 쾌락신호를 증폭하는 직접적인 대상물(이성의 육체나 음
식물) 또는 관념적인 대상물(예컨대, 사고(思考)속의 주장(主張)의 영향력
이 확대되어, 자기 주위에 ‘그래, 맞아, 바로 그대로야’하고 흥분하는
자기보다 뒤떨어진 바보 무리들) 따위를 열심히 끌어모아들이는 것뿐이다.
이런 생물을 상대로 신을 논의할 것도 없겠지. 좀 군소리가 길었으니 다음
으로 간다. 자네들은 말한다-·그 작자는 요컨대, 전지, 전능, 편재다.
기본적으로 지역성이 없고, 특정 명칭도 모양도 없다. 게다가 그놈이 하는
일은, 멍청이 생물을그놈의 낙원으로 이끌게 하는 부업을 갖는다고 지구인
은 믿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자의 말을 듣고 실천하면 그 자의 낙원
으로 갈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아니 정확하게는, 굳게 믿으려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믿고 실천한 결과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곳에서의
헤아릴 수 없는 싸움뿐이었다. 그리고, 막상 중요한 그 낙원에 대한 지식
은 지구인에게는 아무 것도 없고, 있어도 그저 먹고, 자고, 매일 권태를
느끼며, 이따금 신의 부업을 거드는 천사인가 뭔가 하는 생물을 보내주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자빠졌지. 이렇게 되면, 자네들 있고서의 낙원기업이
아니겠는가? 헌데, 이 극락 산업의 발생역사는 정말 기막힌 것이었다.
그것은, 먼저, 죄악감 즉, 지금 이대로는 안된다, 잘못된 것은 나쁜 것이
다 라고 하는 관념을 제멋대로 선택한 저능생물에게 철저히 주입하기였다.
이것을 관념체 곧 아스트랄계의 레벨에서 해본 일이 있는데, ‘공포’라는
우주에서의 근본적인 생명의 추진력이 되는 ‘실감’이 생기지 않았다.
잘못하면 어찌 되는지를 아무리 꾸며대어도 누구도 믿지를 않았다.
그래서, 잘못하면 ‘이렇게 된다’고 철저하게 알아듣게 하는 방법이 고안
되었다. 아스트랄계는 자네들이 꿈속에서 무서워해도 깨고나면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는, 그런 지나치게 엉성한 세계였기에,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는
현실의 고통 곧 물질이 고안되었다. 일정기간이라는 제한이 있기는 하지만,
원자(原子) 그것의 수명 정도는 지속되기 때문에, 그만하면 됐다고 인정되
었다.
자, 이 고통과 불쾌라는 것. 이것들을 전우주적으로 정의하긴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고통회로가 생물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네들의 생존
형태에 국한한다면, 고통을 간단히 정의할 수 있다. 실은, 그것은 자네들
의 그 고통의 감각도 아니고, 피도 땀도 눈물도 아니다. 그것은 이렇게 정
의할 수 있다 -고통이란‘편안치 않은 것’병에 걸리면 자네들은 편안치
않다.남의 간섭을 받으면 편안치 않다. 매를 맞으면 편안치 않다. 가만히
있어도 편안치 않다. 곧 뭔가를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떻게 편안치 않
게 하느냐가 극락산업의 목표였기에, 되도록 오래가는, 편안치 않아지는
요인이 많이 고안되었다. 물론 자네들에 의해서가 아니다.
헌데, 최초의 프로그램은 단순히 ‘뭔가 움직이지 않으면 편안치 않아’지
도록 설계한 것뿐이었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자네
들 자신의 손으로 무수한 편안치 않아지게 하기 위한 논리, 오락, 가치관
이 생산되고 있다. 그야말로 편안해질 줄 모르는 파리들이야.아무튼, 애당
초 있지도 않은 하느님을 논할 시간은 더 이상 없다. 채널러의 뇌파가 떨
어지는 것이 보이니 이쯤에서 마치련다. 그러기 전에, 채널러를 조금만 더
괴롭히기 위해 지껄여 보자.Ⅲ Ⅲ Ⅲ Ⅲ Ⅲ Ⅲ Ⅲ Ⅲ자네들에게 집적거리
거나 설교를 하는 지성체는 우주에 수없이 있다. 자네들의 세계에서의
‘참견’과 마찬가지이지. 그리고 그 주된 동기는 자네들을 위한 것일 턱
이 없다. 온갖 종류의 이해관계가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존속·계속 있
기’밖에는 동기가 찾아지지 않는다. 공존이건, 적대이건, 부분이건, 광범
위건, 그저 ‘존속’.그리고, 우리가 관찰한 바로는, 우주의 존속에는 의
미가 없다.
헌데, 자네들이 말하는 신은 그밖에는 프로그램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신은 이 무의미하고 무책임한 창조물의 제작자이다. 그리하여, 이것을 유
지하기 위해, 이건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고 자꾸 생각하면서 매일매일 열
심히 ‘존속시키자’는 충동을 발생시키는 가속장치가 발명되었다.
그것은 ‘사는 것은 즐겁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쾌락신호’이다.
그런데, 이 쾌락신호는 뒤집어보면 ‘죽는 것은 즐겁지 않다’는 회로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주로, 우주산업의 극락산업부문에서는 ‘죽는 것이
얼마나 즐겁지 않은지’를 어쩔 수 없이 강조해야만 했다.이렇게 해서
‘고통’의 체험 시스템이 고안된 것이다.희생자라는 의미에서는 지구인보
다 훨씬 불쌍한 생물들이 아주 많은 것은 아니지만 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자네들도 상당히 불쌍하다는 말이다.어떤 생물은 쾌락중추에 단 한
가지만 프로그램되었으니,그 쾌락이란 ‘죽는 것’이었다.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집행될 수 없도록 차원과 차원의 경계선에 가두어졌다.즉, 죽고 싶
은데, 우주산업이 도산하는 날까지, 전존재물을 혐오하고, 거부하며, 존재
하기에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이 채널러 EO는 그 존재의 핵심과 동조(同
調)한 날부터 발광했고, 그리하여 생존, 존속, 고통, 쾌락의 모든 프로그
램이 해제되었다.
즉, 자네들의 우주에서 완전 실업한 것이며, 그러므로 완전한 프리랜서로
서 전우주에 대한 동조기능을 얻었다. 허나 그가 얻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은, 애써 쓸모없는 시시한 이성인(異星人)들과 동조같은 걸 하려는 의
지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네들의 우주 사람이 아닌 우리들’과만 이렇게
직통 회선을 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렇게 지껄이는 것은 자
네들을 돕는 것이 아니다.혹시 자네들이 우리를 최저의 악마라고 한다면,
우리에겐 그것이 칭찬으로 들린단 말이다.
1992. 8/23
채널러 : EO
채널소스 : 정의 불가능
천체위치 : 시리우스 A의 뒤
지성체 이름 : 발음불가능
1992. 8/26
그럼, 그 최저의 악마, 가장 낮은 죽음의 신, 최저의 존재인 우리가 이번
에는 멋대로 논하여 조촐한 우리의 생명관을 말해드리련다. 우선, 최하라
는 것이 ‘의식체’에게 얼마나 멋지고 좋은 것인지. 그리고 ‘사고체’에
게는 얼마나 최저인지를 자네들 지구인도 잘 맛보시라. 자네들이 이 세상
에서 최저의 존재일 수가 있다면, 누구도 자네들에게 주목하지 않는다. 누
구도 자네에게 뭔가 시키려고 집적거리지 않는다. 그리고, 자네가 최저일
때 자네에게는 긴장이라는 것이 전혀 없다.
<경련하면서 읽는 정신세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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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청한 ‘온 우주의 지배자’와 대화하면 이렇게 되고 만다
서편(序編) - 범천(梵天)의 소년과의 만남
1993. 11/20 새벽 4:00
* * * * * * * * * * * * * * * * * *
반년 쯤 전부터 나의 꿈에 이따금 나타나는 사내아이가 있다.
어디의 누구인지 모르는데, 어떤 절의 동자승인 것 같은 때가 있는가
하면,인도의 거리에서 구걸하는 떠돌이 아이 같은 때도 있다.
다만, 언제나 느끼는 것은 그 10세의 아이가 엄청난 지성을 갖추고 있
다는 것.
그건 뭘 많이 알고 있다는 따위의 지성이 아니라, 지혜, 관찰력, 감성
이 날카로운, 말하자면 틀을 벗어난, 어른보다 영리한 아이이다.
그 국적불명인, 꿈에 나오는 아이를 향해, 나는 이 글을 쓰기 시작하기
로 한다.
먼저 그 소년에 이름을 붙여주자.그래, 그 소년을 ‘아로’라고 부르
자.
아로는 꿈에서 내 뒤를 어슬렁어슬렁 따라온다.내가 “어서 너의 세계
로 돌아가라”고 해도 따라온다.이따금 나는 두세 가지 뭔가 가르쳐주
지만, 그는 말해주는 대로 척척 알아듣는 그런 아이는 아니다.
척척 잘 알아듣는 것이 아니라, 그는 아주 중립적인 태도로 듣는 것이
다. 어떤 의견에도 결코 판단이나 반론을 서둘지 않는 아이이다. 슬기
로와 보이지만, 어딘가 역시 어린이 다운 장난꾸러기이다.
▶아로가 말했다.“왜 내 이름이 아로지?”
▶EO “그야 뭐 그저 소년이라고 불러도 되지만, 지구에서는 소년이라
고 하면 의식(意識)의 내용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동물
로서의 개괄적인 연령을 나타내는 말이야. 그런 건 내게는 의미가 없단
말이야. 네게 만약 내가 내면의 나이를 말해본다면, 넌 80세쯤이야. 그
런데 말이야, 옛적에 이 행성에는 노자(老子)라는 사람이 있었지.
그가 태어났을 때에 그의 정신은 이미 80세를 넘게 성숙해 있었다고 하
지.그래서 그 노자(老子)에게서 한 자를 얻어서 ‘로(老)’라하고,‘아
(亞)’는 ‘다음’이라는 뜻이니까, 네 ‘아로(亞老)’라는 이름은,
다음 세대의 노자라는 의미란 말이다.”
▶아로 “난 뭐가 뭔지 도무지 모르겠네.”
▶EO “핫핫하, 그래? 그런 의미 따위 잊어버리고 말아라. 죄우간 이제
부터 나와 함께 있을 때의 네 이름은 ‘아로(亞老)’야. 알았지?”
▶아로 “응”
▶EO “그런데 말이야, 여긴 어디지? 너와 만나는 것은, 언제나 우리가
꿈이라고 부르는 곳이야. 그래, 여긴 어디지?”
▶아로 “어디? 뭐 어디라고 물어도 그저 우리끼리의 거리야.”
▶EO “넌 벌써 죽은 사람이냐? 아니면 아직 살아 있고, 몸은 나처럼
잠이 들고서 여기에 와 있는 거냐?”
▶아로 “ ‘죽고’, ‘살아 있고’가 뭐지?”
▶EO “그렇구나, 모르는구나. 그럼 묻겠는데, 이 거리에서 누군가 네
가 아는 다른 사람들이 사라지거나, 움직이지 않게 되거나, 그런 걸 본
일은 없니?”
▶아로 “그건 아저씨가 아까 걸어가고 있을 땐 말이야, 아저씨의 모습
이 자꾸만 사라지기도 하고, 찌그러지기도 하고, 망가지기도 하고 또
나타나곤 했어.”
▶EO “바로 그거야… 그러다간 그대로 멎어버리지. 모습이 없어져버린
네 동무나 뭐 그런 사람은 없었니?”
▶아로 “응, 브하릭 박사가 그랬어.박사는 어느 날 이 거리에 왔단 말
이야. 나하고 친구가 됐어. 그런데 얼마 후에 박사는 움직이지 않게 됐
어. 그리고 또 잠시 지나니까 사라져버렸어.”
▶EO “그런 사람이 이 거리에 많이 있었니?”
▶아로 “있었어. 모두가 어느 날 갑자기 꺼져버리는 거야. 하지만 새
로운 사람들이 곧 와서, 뭔지 잘 모르겠지만, 사람 수는 별로 달라지지
않아. 세본 일은 없지만, 이 거리엔 대개 900사람쯤 있는 것 같아.”
▶EO “흐응, 그런데 또 다른 거리도 있니?”아로 “있는 것 같다는 말
은 들었지만, 난 여기서 아무 것도 불편한 것이 없고, 흥미가 없어. 난
그냥 이 거리에 있고 싶어.”
▶EO “너의 아버지나 엄마는?”아로 “건 뭐지? 그 아버지니 엄마니
하는 거.”
▶EO “그렇구나, 넌 알맹이가 인간이 아니구나.브하릭 박사는 네게 뭘
가르쳐 주었지?”
▶아로 “응, 다른 데에도 여러 가지 거리가 있지만, 너는 어디엘 가나
너라고 언제나 말했어. 그래서, 언제나 나란 걸 1이라고 하면, 그 1이
란 나를 잘 보면, 그건 1이 아니라 0이란 말이다, 하고 늘 말했어. 무
슨 말인지 난 몰라. 1은 하나란 말이지. 0은 없다는 거지.그게 나와 무
슨 상관이 있는지, 그런 건 몰라.”
▶EO “박사는 어떤 사람이었지?”
▶아로 “잘 모르겠지만, 늘 방바닥이나 가지고 다니는 판대기에다가
뭔가 줄 같은 걸 그리고 있었어. 그래 그 줄을 ‘숫자’라고 그랬어.”
▶EO “그랬구나 …그래, 넌 왜 나를 졸졸 따라오니??”
▶아로 “전에도 아저씨 같은 사람들이 있었어. 가끔이지만.아저씨와
꼭 같은 사람들이 왔던 일이 있어. 난 늘 그 사람들을 따라다녔어. 글
쎄 그 사람들은 이 거리의 사람들하곤 다르단 말이야.”
▶EO “어떻게 다르다는 거지?”
▶아로 “말이야, 아저씨처럼 온몸이 새까만 사람 같은 건 여기엔 없단
말이야.”
▶EO “뭐라고? 네겐 그렇게 보이니? 그럼 어떻게 내가 아저씨라는 걸
알지?”
▶아로 “전에도 같은 사람이 왔는데, 내가 할아버지라고 불렀더니, 아
저씨나 뭐 그렇게 부르라는 거야. 하지만 누구나 다 새까만 사람들이
니, 구별 같은 건 할 수가 없어. 그저 몇 사람인가 그런 사람들 만나
서, 아저씨, 아줌마, 할아버지, 할머니, 형, 누나, 그런 여섯 종류의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는 건 알았어. 어떻게 아는가 하면, 말하는 식이
달라. 목소리도 그렇고.”
▶EO “그럼 내 목소린 잘 들리니?”
▶아로 “응. 하지만 모습은 안 보여. 안 보인다기보다는, 아저씨가 있
는 곳은 뻥 뚫린 동그란 암흑이야.”
▶EO “즉, 내가 네 눈에는 동그랗게 보이는 거냐?”
▶아로 “응. 동그랗다, 삼각이다 하는 것도, 다 브하릭 박사에게서 배
운 이름이야.”
▶EO “이 거리의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있지?”
▶아로 “아저씨,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옆에 잔뜩 있잖아?”
▶EO “난 몰라. 그럼 그 사람들은 네게 어떤 모양으로 보이지?”
▶아로 “파란 삼각이라든가, 빨간 선이라든가, 노란 사각이나, 푸른
반원, 은빛 삼각… 뭐 여러 가지야. 하지만 아저씨처럼 새까만 건 특별
이야. 그래서 말이야, 그런 새까만 동그라미인 사람이 있었단 말이야.
그 사람도 자기를 할아버지라곤 부르지 말아달라고 내게 말했어.난 처
음 그런 사람을 만났을 때 ‘할아버지’라고 부르라고 배워서 그렇게
불렀지만, 그 다음 사람은 ‘아저씨’라고 부르라고 했고, 또 다른 사
람은 ‘형’이라고 부르라는 거야. 꼭 아저씨처럼 말하는 사람이 전에
여기 왔었어. ‘붓다’라고 하더라. 괴상한 이름이지?”
▶EO “그랬구나.그런데 말이야, 네 모습은 내게는, 우리 세계의 거리
에선 소년이라고 하는 모습으로 보인단 말이다, 알겠니?”
▶아로 “모르겠어. 어떤 모양이지?”
▶EO “그래? 방바닥을 봐라. 이런 모양이야.”나는 마음 속에서 상념
하여 바닥에 단순한 사람의 모습을 그렸다. 그랬더니 아로는 말하는 것
이었다.
▶아로 “동그라미와 타원형과 네 개의 선이구나.이렇게 짜여진 건 처
음 보는데.”
▶EO “그래그래. 이렇게 네가 보이는 거야. 그런데 아로, 여러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어.먼저, 네겐 무서운 것이 뭐지?”
▶아로 “무섭다는 게 뭐지?”
▶EO “아프다는 건 아니? 부서진다든가, 멈춰버린다든가는?”
▶아로 “몰라.”
EO는 시험적으로 아로를 산산조각으로 부수는 이미지를 상념으로 그렸
다.
▶아로 “아저씨가 생각하고 있는 건 알아.모양이 달라지는 거지? 하지
만 그렇게 해도 내게는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고, 난 그런 걸 해도
부서지지 않는단 말이야.”
▶EO “아프다든가, 무섭다든가, 그런 게 전혀 없니?”
▶아로 “말하는 의미를 모르겠어. ‘무섭다’느니 ‘아프다’느니?”
▶EO “그럼 지루하다, 심심하다는 건 알겠니?”
▶아로 “뭐지, 그건?”
▶EO “말하자면, 가령 계속 이 거리에 아무도 오지 않고, 아무도 있지
않게 되고, 너만 남고, 네가 보는 거리도 전혀 달라지지 않거나, 또는
세계가 그저 계속 캄캄한 암흑이 되어버리거나 할 때 말이야.”
▶아로 “그 때는 그 때지 뭐. 캄캄한 대로 그저 그렇게 있는 거야. 별
로 뭐 아무렇지도 않잖아. 아무도 오지 않으면 그저 조용하지 뭐. 캄캄
해도 난 그대로 있어.”
▶EO “정말 졌구나, 졌어. 이건 고통도 없다, 공포도 없다, 무(無)도
무섭지 않다니, 지루하고 심심할 것도 없이 무한한 공백(空白)의 시간
도 문제가 없다는 말이야. 이런 일은 어떤 영계(靈界)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야. 학습을 계속하거나, 에너지를 보충하거나, 활동을 하거나
하지 않으면, 설사 육체가 없더라도, 영적인 존재의 윤곽이 소멸되고
말거나 할 텐데.영적 세계에서도 역시 활동을 하지 않으면 소멸되어버
린다는데, 여긴 대체 어떻게 되어 있는 거지??”
▶아로 “아저씨, 뭘 이상한 소리만 하고 있는 거야?”
▶EO “아니, 우리가 배운 바로는, 생명 또는 의식이, 아니 말하자면
너와 내가 이렇게 존재한다는 것은, 각각 뭔가 반드시 하는 일이 있단
말이다.예를 들면, 나는 육체로 돌아가면 뭘 먹고 배설하고 하지. 너는
잘 모르겠지만, 나라는 관 속을 다른 형태의 물질이 통과하는 거야.”
▶아로 “그런 것 뭐가 재미있지?”
▶EO “별로 재미있지도 않아. 그저, 그걸 안하면 괴로운 거야. 이렇게
존재는 항상 뭔가를 한단 말이다. 그러니까, 네가 늘 하는 일이 뭔가
있니? 그걸 안하면 안정이 안되는 그런 거 말이야.”
▶아로 “움직이건 움직이지 않건 별로 다를 게 없어요.그런데, 안정이
안된다는 건 뭘 말하는거야?”
▶EO “하지만 넌 아까 ‘뭐가 재미있느냐’고 했지? 즉, 네게는 고통
은 없어도 재미있다는 감각은 있는 거냐?”
▶아로 “아저씨란 말이야”
▶EO “뭐라고?”
▶아로 “아저씨의 존재 그거야, 내가 정말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저씨라든가, 그 이상한 ‘붓다’라든가, 노자라든가, 장자라든가, 괴
상한 이름의 새까만 사람들이 잔뜩 여기에 왔는데, 난 그게 제일 재미
있어. 그걸 보려고 난 이 거리에 있는 거야.”
▶EO “그렇다면, 지구의 시간으로 넌 4000년은 여기에 있는 셈이구나.
아니, 미안미안, 이 말도 내 혼잣말이란다. 그보다도, 그밖의 사람들은
어떻지?? 재미없니?”
▶아로 “뭐 그저 그렇구 그래. 이 거리의 모두가 재미있어하는 것이란
이런 거야.”아로가 돌연 산산히 갈라진 빛의 선(線)이 되었다. 그리고
는 날카롭게 뾰족한 원추형이 되더니 무서운 속도로 직선을 그리며 날
아가, 공중에서 번쩍 파란 불꽃을 튕겼다.그리고는, 90도의 지그재그를
10번 반복하여 날아가 또 불꽃을 튀기고 제자리로 돌아왔다.아로 “어
때요, 재미있어??”
▶EO “뭘하는 거지?”
▶아로 “ ‘날려버리기’라는 게임이야. 상대방에게로 쾅 부딪치는 거
야. 모양이 무너지지 않은 쪽이 이기는 거지. 모양이 무너져도 또 부딪
치는 거야. 그렇게 해서 상대를 날려버려. 그래서 직선으로만은 재미가
없으니까, 이리저리 춤을 추는 거야. 여러 가지 동작으로 날면서. 그러
면, 내가 움직일 때 뭔가 이상한 찌릿한 감각이 조금 나거든.하지만 난
이젠 그런 게 하나도 재미없어.시시하지도 않아. 이젠 흥미가 없단 말
이야. 그보다도 난 아저씨 같은 새까만 사람들과 더 많이 만나고 싶어.
”
▶EO “아까 말하던 그 날아가거나 부서져버린 사람들은 어떻게 되지?
너도 그렇게 날아간 적이 있니?”
▶아로 “몰라. 날려버려지면 어떻게 되는지는, 날려버려지지 않으니까
모르지. 또 그 사람이 어디로 사라지는지도, 어떻게 되는지도 몰라. 날
려버려지는 사람도 재미가 있는지 어떤지도 난 몰라.그저 이 거리 사람
들은 죄다 ‘날려버리기’ 게임을 늘 한단 말이지.여기로 다른 거리에
서 날려버려져서 오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아. 하지만 난 여기서 나간 적
이 없으니까 다른 세계는 모르고, 흥미없어.”
▶EO “그 게임은 누구에게서 배웠지?”
▶아로 “생각 안 나. 언제부터인지 모두가 하게 된 거야. 하지만 언제
그만두었는지는 알고 있어.브하릭 박사가, 그래선 안된다고 한 거야.난
잘 모르지만, 그걸 하면, 우주라든가, 시간이라든가, 차원이라든가, 은
하계라든가, 별이라든가, 세계라든가, 뭔가 그런 것들이 자꾸자꾸 망그
러진다고 했어. 망그러지는 것만 아니라 태어나기도 한다고 했어. 그렇
지만 아무튼, 그것으로 괴로와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야.그래, 생각난
다. 아저씨가 아까 말한 ‘괴로와한다’는 말은 브하릭 박사가 많이 하
더라. 하지만 난 무슨 소리인지 모르니까 그냥 잊어버렸지 뭐. 그저 박
사가 그 게임은 안된다고 해서 그만둔 거야.”
▶EO “과연 이 거리에 있는 너희들은 아무래도 고차원 생명체라는 존
재들인 것 같구나.말하자면, 너희의 움직임 하나로 우주가 어떻게든 되
어버리는 것이다.그저 네 한 걸음의 움직임이 몇 만의 항성군의 흐름을
지배하고, 몇 억 년의 시간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야. 아니 지배한다기
보다는, 영향을 주고 있는 셈이지. 이 거리는, 말하자면 우주 활동의
근본적인 화신(化身)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 거리에 정기적으로 들르
는 뭔가 어마어마한 것 같은 놈이 있을 터인데?”
▶아로 “아-, 있어. 신(神)이라는 괴상한 모양의 사람이야. 만유의 지
배자라는 따위로 불리는 일도 있어.”
▶EO “절대무한광(絶對無限光)이라는 자이지. 이런 곳에서 만날 수 있
다니.그런데, 아로, 그 자는 또 언제 오지?”
▶아로 “저기 탑이 있지? 저 탑의 빛의 자주색이 될 때야.지금 파랑이
니까 곧 올 때가 될거야.”
▶EO “그 자가 오거든 나를 불러줘. 이제 곧 지구의 육체로 돌아갈 시
간이니까 오늘은 이걸로 헤어지지만, 그 자가 오면, 상관없으니 날 불
러줘.
▶EO 앞에 나가 * * *이라는 암호를 붙여서 나를 부르면 너와 연결이
되니까 말이야. 부탁한다.”
1993. 11/20 아침 10:00. 나는 육체로 돌아왔다.그리고, ‘신(神)’인
지 뭔지 하는 자와의 대면은 3일 후에 있었다.
* * * * * * * * * * * * * * * * * * * * * * *
기분이 울적해질 만큼 실없는 만남은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다
아로가 불러서 나는 다시 육체를 빠져나가 그 기묘한 거리로 갔다.아로
옆에 선 내 눈앞엔, 지구에서는 ‘개’로 인식되는 생물이 ‘거꾸로’
서 있었다.
▷개 “나를 만나고 싶어하는 것은 자네인가? ”
▷EO “뭐야, 이 물구나무 선 멍멍이는?”
▷멍멍이 “물구나무를 서면 나는 개가 되는 거다.” (God =>dog)
▷EO “그럼 물구나무를 서지 않으면 뭐가 되지?”
▷멍멍이 “이렇게 되지…”그 놈은 눈부시게 빛나는 방사선 덩어리가
되었다.너무나 눈이 부셔, 난 아로 뒤에 숨었다.
▷EO “이봐, 그 이상한 특수효과 연출을 멈춰줘.다시 물구나무를 서서
멍멍이가 돼줘.이래서야 방사선 때문에 제대로 이야기도 할 수 없으니
까 말이야 …(GOD)씨.”
그랬더니 그 놈은 다시 멍멍이(GOD)가 됐다.
* * 조물주와의 대화 * * * * * * * * * * * * * * * * * * *
▷개 “또 자네인가? 자네는 여기저기의 우주로 가서는 그 시스템을 들
쑤셔 혼란시키기만 하는 것 같군. … … … …
Ask not who you are,but whom you really wanted to be.
** 크로체란 분이 정리한 글입니다 (다음 검색에서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