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입니까
우 병 기
길 가다 툭 치며, 불쑥 마주쳐도
그냥 함께하고 싶고
맞잡은 손 오래
머쓱하도록 놓기 싫은 사람
맛난 집, 좋은 곳이면
꼭 먼저 생각나는 사람
책 속의 멋진 구절 고이 접었다가
안달나게 나누고픈 사람
진종일 바깥 기웃기웃 살피다
맨발로 와락 맞이하고픈
그지없이 질박한 사람
벙어리 장갑처럼 따뜻한 그 사람.
선비 마을
돌담길, 토담길이 길죽하게 구불하고
고샅길 초입부터 오르막이 정겨웠다
담장 너머 훔쳐 본 듯한 뒤안길은 미안함
솥뚜껑 여닫는 소리 아슴하게 들릴 듯
부엌 앞에 개숫물을 휙 하고 버리는 듯
모퉁이 돌면 나즉한 선비의 글 읽는 소리
한 모퉁이 더 돌면 마주앉은 다듬이 소리
옆집 어린아이 잠투정 울음소리
세상의 아름다운 그 소리들이 집집마다
대문 앞으로 막 달려 나올 것만 같은
느낌이 불끈하게 솟는 저녁답, 조용한 마을
여기는 어느 변방인가
뒤 안쪽 기와집은 작약꽃 개락인데
대들보 성주신이 고맙게 인사했다
조왕신이 군불 땠을 것만 같은 큰 집은
기둥마다 주련 글씨 황홀하여라
성주풀이의 대활량 아니었으랴
아는 문장 몇 개 꽃대궁 가지 꺾어
손바닥에 꾹꾹 글귀를 따라 써 본다
굴뚝이 무럭무럭 내뿜는 연기
묵은 정 쏟아내듯 하염없이 피어오르고
돌아서니 고담한 정취 배웅인데
물씬한 황토 흙내음 뒤따라오더라.
정진
불현듯 염치가 세필마저 나무란다
얄팍한 가슴으로 보듬을 것 뭐 있냐고
먹 갈던 벼루 옆에서 연적만 멋쩍어라
싸리울 부여잡고 용쓰는 강낭콩도
번듯한 흘림체로 병풍 한 폭 그렸었지
울타리 넘을 쯤에는 연분홍도 피웠다
한없는 부족함에 낯가리고 숨고파라
게으른 독서라고 뭐라는 이 없겠지만
남아男兒의 수독오거서須讀五車書
이룰 날 있으리오.
우병기
경북 영양 출생, 시인, 《한강문학》 31호(2023, 봄호) 시부문 신인상 수상 등단, 현대자동차(주) 연구개발본부 근무(15년), 자동차부품 관련 회사 임원(10년). 家訓:〈아름다움과 멋을 느끼며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