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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천 학
시인, 캐나다 〈K-문화사랑방〉 대표
하나, Hana, 하나랑(1)
▲토론토대학 ‘동아시아도서관’의 책꽂이(2025년 5월, 한 달 동안 전시행사).
-.김하나의 《ASIAN CANADIAN VOICES》(맨 위칸), 권천학의 《LOVE IS THE PAIN OF FEVERISH FLOWERS》(맨아래칸)
▲교원대학교 초빙 김하나 강연 중
〈‘독도 지킴이’ 김하나!〉 2008년 7월, 미국 의회도서관의 독도 명칭에 대한 결정 과정에서 한국인 김하나 씨가 ‘독도 지킴이’ 역할을 했다. 토론토대 동아시아도서관의 한국학 책임자로 근무하는 김하나 씨는 지난여름 미의회도서관이 독도 검색 주제어를 ‘Tok Island’에서 ‘리앙쿠르 암석(Liancourt Rocks)’으로 바꾸려던 방침을 파악하고, 역사적 근거를 들어 ‘독도는 명백한 한국영토’임을 밝히고 이 과정을 한국 정부에도 알렸다. 한국 정부는 미국 내 한국학 연구의 출발점인 대학도서관의 한국학 DB 구입에 예산을 지원키로 했고,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는 북미지역 25개 대학에 한국학 학술 데이터베이스(DB)를 설치할 수 있도록 예산 5억 원을 배정했다. ▲동아일보(2009.9.23.)〈해외 ‘독도 지킴이’ 계속해주오〉 기사 일부인용〈한강문학 편집실〉 |
‘독도 지킴이’ 토론토대 사서 김하나 씨 퀘벡 국제행사서 한국도서관협회 감사패 수상 토론토대 동아시아도서관 한국학 책임자 김하나 씨가 퀘벡 국제행사(2008. 08. 11)에서 한국도서관협회(회장 김태승) 감사패를 받았다. 김씨를 비롯한 북미, 호주, 프랑스 등지의 비롯한 해외의 한국학 사서 30여명은 미국 의회도서관의 독도 주제어 목록변경과 관련, ‘독도 명칭을 바꾸는 것이 부당하다는 점을 세계에 알리고 이 계획을 보류하는데 일조’한 바 있다. 도서관협회는 감사패 전달의 배경에 대해 “이번 일이 국민들로 하여금 조국의 영토수호 의지를 새롭게 다지도록 하는 계기를 제공했다고 판단, 감사의 마음을 모아 전달하기로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감사패는 오는 10~14일 퀘벡에서 개최되는 세계도서관정보대회 행사중 11일(월) 오후 협회가 주최하는 ‘한국도서관인의 밤’에 시상식이있었다. ▲한국도서관협회 감사패 수상(캐나다 한국일보, 2008.08.07.) |
‘독도 지킴이’ 김하나 씨, 제35회 캐나다 한인상 수상
미국 의회도서관이 2008년, 독도 관련 도서 분류의 주제어를 ‘독도’에서 ‘리앙쿠르 록스’로 바꾸려는 계획을 보류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김하나(여·41) 씨가 ‘제35회 캐나다 한인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밴쿠버 브리티시컬럼비아대(UBC)의 아시아도서관장으로 재직하는 김하나 씨는 2001년 한국교원대 독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캐나다에 이민했다. 2014년 북미 지역에서 한인으로는 처음으로 아시아도서관장 자리에 올랐다.
♠ 하나에게 말문 트기
〈등나무 꽃넝쿨 아래서〉
권 천 학
그토록 수많은 밤을
눈물로 지새웠어도
아직도 눈물로 지새워야 할
수많은 밤이 있어
나는 행복하다
그토록 수많은 등을 밝혀가며
힘겹게 먼 길 굽돌아 왔어도
아직도 등을 밝혀야 할
수많은 밤이 있어
나는 행복하다.
- 권천학 제3시집 《가이아 부인은 와병 중》(1994)에 수록
〈Beneath the flowers of the wisteria vine〉
I am happy
because there are so many nights
which I will still spend in tears
although I already spent nights in tears.
I am happy
because there is such a long way
where I will still need to light the lanterns
although I came back from an exhaustive journey
lighting lanterns.
-시집 《LOVE IS THE PAIN OF FEVERISH FLOWERS》 수록 (김하나 번역. 2015)
▲ 시집 《사랑은 꽃몸살》 표지
손자 아리(Ari)와 손녀 도리(Dori)에 이어 이번엔 나의 딸 김하나(Hana Kim)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단순히 나의 딸이기 때문에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는 하나가 당연히 가장 귀중한 존재이다. 하지만, 꼭 그런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격체로서 잘 성장해가고, 잘 뻗어가는 모습이 대견했고, 대견하다.
모녀간이라는 관계를 떠나, 완성해가는 한 사람의 객체로서 지금까지 이어온 생활의 태도와 행적을 미루어 볼 때 개인으로서도 충분히 존중할 만하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칭찬받을 만하다는 생각에서다.
2008년 7월 14일, 미국 의회도서관이 주제어 편집 회의에서 ‘독도(Tok Island)’라는 표기를 ‘리앙쿠르 록스(Liancourt Rocks)’로 변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독도는 국제적인 논란의 중심에 섰다. 당시 북미동아시아도서관협의회(CEAL) 한국자료분과위원회(CKM) 위원장이었던 김하나는 이 변경 움직임에 대해 최초로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녀는 독도의 명칭이 ‘리앙쿠르 록스’로 바뀌게 되면, 다음 단계로는 ‘일본해의 섬’이라는 주제어로 대체될 위험이 크다고 지적하였다.
김하나는 주제어 변경이 저지될 때까지 대한민국과 미국 사이에서 외교적, 학술적 노력을 기울였다. 그녀는 약 20년간 동아시아 도서 관계에 몸담아 왔으며, 북미동아시아 도서관협의회 회장, 한국자료분과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바 있다. 현재는 토론토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의 관장으로서 국제 학술회의와 컨퍼런스에 활발히 참여하며, 한국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독도 문제를 강조하는 이유는, 김하나가 해당 주제어 변경에 대해 가장 먼저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주미 한국대사관, 한국학 관련 학계, 북미를 포함한 호주, 뉴질랜드, 프랑스 등 세계 각국의 한인 사서들과 즉시 협의하여 주제어 변경을 보류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독도 문제뿐 아니라, 한국학 장서 확충, 한국 문학의 번역 지원, 동아시아 국가 자료 확보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활동, 문화 교류 증진 등 다양한 분야에서 꾸준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동안의 이런 내력과 활동 그리고 성과들을 그냥 덮어두기에는 아깝다. 대한민국을 떠나 외국에서 우뚝 서기 위한 노력과 그 노력의 결과로 오늘까지의 노고와 성과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개인적인 삶의 궤적에서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의 역할로도 그렇다.
외국에서 뿌리내려 든든한 한 그루의 나무가 되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한국인 한 사람이 외국 생활에서 개인적인 삶으로 성공한 것도 박수쳐줄 일이다. 하물며 개인적인 성공과 더불어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이는 일에 한몫한다면 더더욱 큰 박수를쳐야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나에게는 자랑스러운 딸이고, 동시에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국민, 대한민국의 딸이다. 부족한 점이 많지만 그렇게 되려고 꾸준히 노력하고 있음을 나는 안다.
물론 지금이 최종목표에 이른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계속해서 뻗어가고 계속해서 성장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박수쳐주지 않으면 누가 치겠는가.
나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모든 것을 보아왔다. 삶을 부비며 살아온 한 덩어리의 개체였다. 엄마로서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내가 바라보는 하나는 열심히, 정말 열심히 사람으로서, 그리고 한국인으로서의 긍지를 지키려고, 힘들어도 노력하는 모습이다. 거듭 말하는 것이 되겠지만, 나는 그 사람이 나의 딸인 것이 더욱 든든하고 믿음직스럽다.
김하나가 지금 중년을 통과하고 있으니 그럴만할 때도 되었다.
설령 나의 딸로서 이야기한다고 한들, 뭐 그게 그리 흉이 되겠는가 하는 생각도 한다. 그렇더라도 가능한 한 객관적 시점을 유지하고자 한다.
♠ 정신적 DNA
나는 하나를 기르면서 내 나름의 훈육 의지와 훈육 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그보다 훨씬 이전에, 나는 하나와는 상관없이 이미 나의 미래의 삶에 대한 규칙, 즉 나의 인생 목표를 설정했었다. 사춘기 무렵이었다.
나의 미래 설계設計였고, 사상思想이었다. 그때의 생각으로는 그것이 나의 삶의 대원칙이었다. 살아가면서 주변의 상황이나 여건에 따라 삶의 방향이 바뀌긴 하지만, 그 중심에 자리한 대원칙은 바뀌지 않는다.
돌아보면, 아직 설익은 그 무렵에 설정한 그때의 그 규칙이 나의 전체 삶을 관통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에게도 이어가고 있어 가계家系의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음도 느끼고, 알게 되었다.
이래서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구나 하고 수긍한다. 동시에, 혹시 그래서 하나에게 가혹하게 하지는 않았을까. 혹시 그것 때문에 과오過誤는 없었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나로부터 시작한 우리 가문家門의 역사! 그것이 바로 내 나름의 훈육 의지와 훈육 방법에도 흐르고 있다는 것을 나 스스로 인지하면서, 그것이 하나와 상관없이 이루어진 일임에도 불구하고, 김하나의 삶에 상관하게 된 것을 인지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익숙한 ‘밥상머리 교육’이라는 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정신적 DNA이다. 정신적 DNA라는 말은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가 하나에게 하신 말씀이다.
나의 어머니는 작년(2024년)에 101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하나가 초등학생 시절에 외할머니(나의 어머니)에게 불만 비슷하게 털어놓았던 모양이다.
“할머니, 난 왜 엄마를 닮지 않고 아빠를 닮았을까? 애들이 다 엄마가 예쁘다고 한단 말이야. 엄마를 닮았으면 나도 예뻤을 텐데”
“그 대신 넌 엄마의 정신적 DNA를 물려받았잖아”
후에 우연히 알게 된 내용이다. 하여튼, 사춘기 때 설정해서 내 삶의 좌우명이 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객관적인 사람이 되자!
* 나 자신에게는 인색하되, 남에게는 너그러운 사람이 되자!
* 단 일 분이라도 남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자!
* 후회하지 말자!
철이 없다면 없을 나이에, 누구의 지시나 영향을 받은 일도 없는데 이런 생각을 갖추게 되었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타고난 기질基質과 성향性向이 아닐까? 물론 근본적으로는 그 밑바탕에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교육이나 가문에 배어있는 정신이 자리 잡고 있겠지만.
하나는 나의 외동딸이지만, 나는 다섯 남매 중의 맏이인 큰딸이다. 언니도 오빠도 없었기 때문에 언니나 오빠가 있는 친구들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편들어주는 언니, 오빠, 박수쳐 주는 언니, 오빠...
성장기가 지난 후에도 때로는 나에게 충고를 해주는 그런 사람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보낸 시절도 있었다. 나의 갈 길을 충고해 주는 선배, 가르침을 주고 지침이 되어 주는 스승, 불행히도 나에겐 그런 관계가 없었다.
김하나도 나와 마찬가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면 내가 하나에게 그런 역할을 해 줄 수 있어야 하는데, 하는 자책自責이 들기도 한다. 하나가 고등학생 때,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책가방을 패대기치듯 부려놓으며 말했다.
“정말 말이 안 통해서, 얘기를 할 수가 없어. 쯧!”
“무슨 일인데?”
“엄마, 친구들은 모두 행복이 성적순이래잖아. 난 아니거든, 그래서 아니라고 했더니 아무도 내 말에 동의하지 않는 거야. 한바탕 논쟁을 했지, 그런 친구들과 무슨 이야기를 하겠어? 말이 통해야지”
그 당시에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영화가 있었다. 그 말이 주로 청소년들 사이에서 대유행이었다. 청소년들에게 잘못된 생각을 하게 하고, 비뚤어진 것에 대한 합리화가 될까 봐 염려가 되었다. 사춘기의 하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흔들리기 쉬운 나이 아닌가. 뭔가 확고한 신념을 가지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말이 전적으로 잘못된 말은 아니지만, 일시적으로라도 잘못 사용될 여지는 있다. 그래서 하나가 이해하기 쉽게 적당한 예를 들어가며 설명을 한 일이 있었다. 간략하면 다음과 같다.
“너희들이 아직 몰라서 그렇지, 행복은 성적순이다. 왜냐하면... 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면 성적이 좋아지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면 좋은 대학에 간다, 좋은 대학에서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으로 졸업을 하면 좋은 직장을 얻을 수 있다. 좋은 직장을 얻으면 잘 살 수 있게 된다. 잘 살면 행복한 거다. 그러므로 행복은 성적순이다. 못 살면서 행복할 수 있을까? 공부 못한 사람을 사원으로 뽑으려고 하는 사장이 있을까? 무식한 사람이 대통령을 하면 그 나라가 좋은 나라가 될 수 있을까? 네가 남자라면 공부 잘하는 여자를 만나고 싶지 않을까? 그러므로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공부 잘하는 사람에게 기회가 훨씬 더 많이 주어지지”
그것이 하나에게 먹혔던 것이다. 어쨌든, 사춘기의 내가 미래의 목표를 세우기까지 나에게 영향을 끼친 것을 굳이 헤아려 본다면 혹시 독서가 아니었을까 싶다. 사춘기가 되기까지 책을 참 많이 읽었다. 읽어댔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나의 부모님은 젊어서부터 타향살이를 하셨기에, 주변에 가까이 사는 친척이 없었다. 지금의 하나도 그와 비슷하다.
전라도에 살면서 ‘경상도 집’이라고 불리었으니, 그 이면裏面에 배인 부모님의 객지 생활의 고단함을 헤아릴 수 있다.
학창 시절,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텃세에 시달리던 부모님의 상황을 지켜보며 울분으로 속을 끓이기도 했다. 내가 그런 것들을 마음 깊이 더 헤아릴 줄 알게 된 것은 스무 살이 넘어서였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삶 깊숙이 배어들었음을 차차 인식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나에게 그것은 곧 세상살이이며 ‘사람 공부’의 시작이었다.
나는 지금 인생의 후반에 도달해 있다. 한 살이[平生]를 거의 다 건너온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끔 나의 삶을 되돌아보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사춘기에 가졌던 나의 인생 목표들이 나의 전체 삶을 관통하고 있음을 확인하곤 한다.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간혹, 굳이 그렇게까지 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도 있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 ‘잘했어, 권천학!’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분명 그때의 설정 범위를 벗어나지 않게 살아왔다. 그래서 힘이 들기도 했고, 고단했던 것도 사실이다. 고지식하기 그지없다.
나의 아버지가 언젠가 나에게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못 사는 법이다’라고 말씀하신 일도 있다. 그런 나의 인생살이 설정이 나도 모르는 사이, 나의 딸 하나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보면서, 그것이 하나에겐 얼마나 힘들고 고단할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내가 여전히 고지식하듯, 하나 역시 고지식하다. 그래서 마음이 더 아프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 이것이 운명이구나! 하고 운명론자가 되기도 한다.
김하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태어났다. 월남전이 종전될 무렵의 슬픈 역사의 회오리가 나의 삶을 후려쳤다. 그 어렵고 황망한 시절,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나의 분신 하나!
겉으로 보면 여자 혼자 어린 자식을 기르느라고 고생했을 것이라고들 하기 쉬운데 나는 아니었다. 오히려 힘든 것은 사회나 주변 사람들, 가까운 가족들의 인식이었다. 그런 인식에서 자유로워지려고 무진 애를 썼다.
나는 내가 딸을 보살핀 것이 아니라, 딸이 나의 기둥이 되어주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온갖 난관을 헤치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어린 것이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 얼마나 큰 위안이고 힘이었는지, 그것이 그저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자식을 길러본 모든 부모들은 다 공감할 것이다.
어린 딸 하나가 나에게 주는 기쁨과 보람과 희망, 그런 것들이 나에게 있어서는 매 순간마다 행복이었고 내 삶의 버팀목이었다. 고생스러운 실생활은 이차, 삼차 문제였다. 힘든 생활을 버티게 해주고, 내가 살아야 할 목표가 되어 용기를 주니 얼마나 고맙고 소중한 존재인가.
♠ 물러터진 토마토
김하나가 중학생이었던 어느 여름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하나의 손에 축 늘어진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등에 멘 학교 가방 백팩보다 더 무겁게 보였다. 얼굴은 벌겋게 익고 이마엔 송글송글, 손가락 마디엔 플라스틱 봉지 자국이 패여 있었다. 놀랍게도 비닐봉지 안에 들어있는 것은 너무 익어 거의 터져가는 토마토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가에 손수레를 세워놓고 토마토를 파는 아저씨가 있었는데, 값이 엄청 싸더라는 것이다. ‘떨이! 떨이! 막 팔아요, 막 팔아요!’ 하고 외치는 수레 위에 토마토들이 쌓여 있었고, 그것을 본 하나는 잼을 만드는 엄마 생각이 났다고 한다. 엄마는 늘 등급이 낮은 떨이 딸기들을 사거나, 흠집이 있어 싸게 파는 사과들을 사서 잼을 만들었지, 싼 토마토를 엄마가 좋아하실 텐데, 아저씨에게 주머니에 있는 용돈을 다 털어서 보여주었더니, 한 보따리를 주더란다. 너무 익어서 말랑말랑하고 물러터진 것과 아직 익지 않은 파란색 어린 토마토들도 간간이 섞여 있었다. 이미 상품으로서 가치가 떨어진 값싼 토마토.
“엄마, 아저씨가 너무 많이 주셨어. 이것 잼 만들면 되잖아?”
하나는 잼을 생각했지만, 늘 아끼고 절약하는 엄마의 궁색한 살림살이가 어린 하나의 뇌리에 파고 들었구나!
그 토마토로 잼을 만드는 내내 마음이 저몄다.
♠ ‘잉카’ 대신 ‘홍도紅島’!
김하나가 고등학교 시절, 나는 그때 레스토랑 〈잉카〉를 경영하고 있었다. 당시의 나에게 ‘잉카’는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언젠가 꼭, 만약 해외에 갈 수 있다면, 가장 먼저 그곳에 가보리라 마음속에 간직해두었다. 그때는 막연한 꿈이었고 아름다운 꿈이었다. 다큐멘터리를 보고 ‘티티카카 섬’이라는 문구를 시에 쓰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세계 각국을 어지간히 돌아보았지만, 정작 잉카에는 가보지 못했다.
몇 해 전, 가족회의에서 하나가 작정을 하고 유도한 결과, 할머니의 꿈인 잉카 지역으로 가기로 정했었다. 그런데 ‘코비드-19’가 덮쳐서 포기하고 말았다. 살기에 바빴고, 글쓰기에도 정신없는 그사이, 세월은 흘러, 나는 늙어버렸다.
가족들은 나의 건강 문제로 잉카행을 머뭇거린다. 머뭇거리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올여름 가족 여행지도 스페인 지역을 정했다. ‘할머니가 운동 열심히 해서 다리가 튼튼해지면!’ 이라는 단서로 내년쯤에는 갈 수 있도록 하라고 나를 채근한다. 그러나 내년에 과연 갈 수 있을까?
난 갈 테야
몸살 앓아 끓는 피 데리고
가서
들썩이는 파도 앞에
수줍음 깔아 펼치는
붉은 돌로 살 테야
난 갈 테야
가슴 두근거리는 곳이면
어디든 갈 테야
그리움으로 안 받치며
한 그루 섬 동백 되어
짓 붉게 살 테야
기다림으로 피 달래며
두근두근 살 테야
검푸른 가슴 내보이는 바다
그 바다 믿고 살 테야.
-권천학 작시 〈그리운 섬 홍도〉 전문
*시 〈티티카카〉를 찾다가 못 찾아서, 〈그리운 섬 홍도〉로 대체한다. 시집 《가이아 부인은 와병 중》에 수록(1994).
♠ 고운 색으로 변신한 몇 티셔츠 두 장!
레스토랑 〈잉카〉의 문을 열기 전에 시장에 들러 음식 재료를 사야하기 때문에 아침 일찍 나가면 영업이 끝나는 밤 11시가 되어야 집에 돌아왔다. 때로는 자정 가까이 될 때도 있었다.
하나는 하나대로 고등학생 시절이라 대학입시 준비로 늘 공부 시간이 모자라는 상황이었다.
그런 어느 날, 자정 무렵, 집에 돌아와 보니 하나는 제 방에서 잠들어 있고, 화장실에는 연하늘색으로 물들여진 나의 면 티셔츠 한 장이 옷걸이에 입혀져 욕조의 커튼 막대에 걸려 있었다.
그 주말쯤이었을 것이다. 모처럼 한 달에 하루, 레스토랑도 쉬는 날이었다. 하나가 좋아하는 떡볶이를 만들어 주려고 아파트 단지 내 슈퍼마켓에서 떡가래를 사 들고 왔다.
하나가 화장실에서 세숫대야를 바닥에 놓고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무언가를 조물조물 만지고 있었다. 이번엔 나의 다른 면 티셔츠에 분홍색 물을 들이고 있었다.
“엄마는 예쁘지? 좋지? 마음에 들어?”
가슴이 먹먹했다. 나머지 한 장의 나의 면 티셔츠를 분홍으로 염색하고 있었다.
하나는 엄마가 좋아할 것을 염두에 두고 기대하고 하는 일이었지만, 나는 늘 쪼들리는 생활에 짠지로 사는 나 자신을 새기지 않을 수 없었다.
다들 보드랍고 화려한 블라우스를 입고 다니던 그 시절에도 나는 값비싼 옷들을 사 입기 어려웠다. 시장에서 산 단색의 면 티셔츠 2장, 나의 특별 외출복이었다. 남자들의 와이셔츠 비슷한데 굵은 면실로 짜인 천이라서 천의 올이 굵고 도톰해서 스타일도 나지 않았다. 색상도 희숭숭한 면綿 색깔이었고 사이즈도 헐렁했다. 나는 그것을 매니시 스타일(man’s style)이라고 스스로 정하고, 즐겼다. 그 티셔츠가 오래 입으니 퇴색했다. 하나가 보기에도 엄마의 그 퇴색한 셔츠가 후줄근해 보였던 모양이다.
어떤 학생 잡지의 글 귀퉁이에서 ‘집에서 손쉽게 하는 염색 방법’에 대한 안내 글을 보고, 하나는 엄마의 옷을 떠올렸다고 한다. 용돈을 털어 염색약을 사고 직접 물들이기를 실행한 것이다.
하나가 물들여준 나의 두 장의 티셔츠는 나의 귀중품이 되었다. 문인 단체의 여행이나 개인적인 외출 등 외출복으로 애용했다. 몇 해 전 밴쿠버에서 토론토로 다시 이사 오기 전까지도 입었었다. 그런데, 근래 어느 날 하늘색이 사라진 것을 알았다. 밴쿠버에서 이사 올 때 사라진 짐 속에 들었던 것이 아닌가 짐작할 뿐이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도 하나 남은 그때의 분홍색 티셔츠는 잘 간직하고 있다.
하늘색 티셔츠는 사진 속에만 남아 있어 매우 아쉽다.
전북일보의 데이터베이스 속에 들어있는 나의 사진 속에 남아 있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옛날 전북일보에 글을 쓸 때 그리고 전주지역의 문학 행사에 갔을 때 입고 갔던 기억이 있다.
▲전북일보(2012.11.6.) “캐나다에 한국문학 전하고 싶어”〈김원용 기자〉
▲전북일보(2015.8.4) ‘캐다나 문인단체 수훈상, 모전여전母傳女傳 ‘독도 사랑’〈김원용 기자〉
2017년 무렵, 한국에 갔을 때 〈문예가족〉 동인들을 비롯한 전주지역 문우들의 환대를 받은 일이 있다. 그때 받은 선물 중 가장 인상 깊은 선물은 전북일보 기사를 스크랩한 최정식님의 액자 선물이었다.
첫 번째 기사는 ‘김제 출신 권천학 시인, 캐나다 문인 단체 수훈상’이라는 큰 제목의 2015년 8월 4일 김원용 기자의 글로, 나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두 번째는 ‘母傳女傳 독도사랑’이라는 큰 제목이었는데, ‘미국 의회 도서관 김하나 씨, 김제 출신 권천학 시인 딸로 밝혀져’ 라는 작은 제목과 함께 나와 하나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역시 김원용 기자의 글이었다.
그 외의 선물로 받은 다른 기사 스크랩에는 ‘캐나다에 한국문학 전파하고 싶어’, ‘김제 출신 권천학 시인, 전북 문인 책 기증요청’이란 제목의 2012년 11월 6일 화요일 기사였다.
그 기사들에 실린 사진 속의 나는 모두 그 하늘색 면 티셔츠를 입은 모습이었다. 그것을 보면 내가 원거리 여행이나 외출용으로 그 옷을 입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나마 하나가 물들여 준 하늘색 면 티셔츠가 살아 있다.
분홍색 면 티셔츠는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그동안 토론토의 교민 단체들에서 해 온 강의 중에서, 발행된 YouTube 들 중에 ‘한카치매협회’의 2020년 12월 9일 ‘고전 문학’ 강의에서도 그 분홍 티셔츠를 입고 있다.
지금 나는 분홍 면 티셔츠를 애지중지하고 있다. 중년을 지나는 하나가 고등학생 때 한 것이니까 벌써 삼십여 년이 넘은 옷이다. 그 무렵 나는 하나에게 말했었다. 아마 하나도 기억할 것이다.
“하나야, 더 이상 엄마에게 잘하려고 하지 마라. 너는 평생 해야 할 효도를 이미 다 했다”
그런 하나가 어른이 되어, 새끼를 낳아 나에게 안겨주었다. 새끼의 새끼를 품어보고, 자라는 것을 돌보며 함께하는 지금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모른다.
♥ 절약 정신의 DNA
나는 젊은 시절에도 고급스런 옷을 사 입어 본 일이 없다. 하나가 보기에 그런 내가 안쓰러운 모양이다.(어쩌다 그런 이야기가 나오면 하나는 전혀 아니었다. 하나 만이 아니라 주변에서도 나를 ‘스타릴니시한 멋쟁이’로 알고 있다. 지금도 그렇다. 하하하)
아끼는 것도, 가난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꼭 가난 때문만은 아니었다.
근검절약! 이미 배어있는 그 정신은 나의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자산資産이다. 나의 어머니는 그것이 당신의 할머니로부터 받았다고 했었다.
나의 어머니, 김계연桂蓮 님은 일제 치하에서 일본의 전기 기술자로 일했던 아버지(나의 외할아버지) 덕분에 함께 살기 위하여 온 가족이 모두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때 외할아버지의 노모老母, 즉 나의 어머니의 할머니는 이를 거부했다. 거동도 불편한데다가 물려받은 땅을 지키며 ‘고향에서 살겠다’고 하셨다고 한다.
난처해진 상황에서 나의 어머니가 한국에 남아 할머니와 함께 살기로 했다. 딸 넷, 아들 하나의 5남매 중의 둘째 딸이었던 나의 어머니는 고향(안동安東)에서 할머니와 단둘이 생활하게 되었다. 형제 중의 외톨이가 된 것이었다. 나의 어머니가 자청自請 반半 외할아버지의 명령 반半이었던 것으로 안다.
한국에 남아 농사를 일구며 사는 할머니와 함께 생활하면서 정情이 쌓인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절약 정신과 올바른 생활 습관 등도 저절로 익히게 되었다. 나의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나의 어머니의 할머니는 굉장히 건전한 사고방식과 담대함을 가진 그 시절 드문 여장부이셨다.
‘다섯 손가락을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나!’ 이 말을 나는 전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수용할 경우에는 수용하지만 아닐 경우도 있다는 뜻이다. 일반적이고 전체적으로는 맞지만 특별한 상황이나 예외는 있다. 필요에 따라 편견과 편애를 행사하는 부모들이 합리화로 얼버무리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자식이라도 특별히 더 정(情)이 가는 자식이 있다. 그 말이 전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전적으로 맞는 말도 아니라는 것을 나의 경험에 의해 얻은 결론이다.
아무튼, 나의 절약 정신은 나의 어머니로부터 왔고, 그것은 다시 하나에게 내려간 셈인데, 하나에겐 몹시 힘들어하는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세상은 크게 변화했고, 나의 세대와는 크게 다른 세대가 되었으니까. 생활 구석구석에서 철저히 낭비를 막고 절약하는 생활 수칙을 잘 따르면서도 때로는 숨이 막혔을 것이다.
“아무리 아껴도 도저히 엄마를 따라갈 수는 없어요!”
언젠가 하나가 하던 볼멘소리다.
안다, 그 마음을 충분히 알고 이해한다.
하나만이 아니라 요즘 세대들 혹은 절약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리라. 가난에 대한 인식, 이것이 곧 세대 차이 이리라.
‘다리미, 무쇠솥, 다듬잇돌, 짚세기, 오동장…’
너희들이 팽개친
이런 것들이 무얼 뜻하는지 아니?
구겨진 것 펴주고 오래 걸려 만들고
마음 눌러 담아두고 꾸준히 지녀온 것
대 물려 함께 지키는 것
묵어 귀한 것
낡아서 정 깊은 것
“온라인, 팩스, 전자계산기, 컴퓨터…”
너희들이 좋아하는
그것들이 무얼 뜻하는지 아니?
나날이 모습을 바꿔가며
얼을 빼앗는 것
너희들을 집에 가두는 것
너희들을 한낱 쇠붙이로
보잘것없는 쓰레기, 하잘것없는 톱니 한 개로 만드는 것
너희들을 팽개치는 것
- 〈살앓이․ 상실세대〉
* 제3시집 《가이아 부인은 와병 중》(1994)에 수록
* 이 시는 하나가 어렸을 때 ‘치맛바람’이라는 말이 성행하며 회자되던 때에 썼다. 오로지 자신의 아들딸 위주로 올인하며 눈살을 찌푸리게 하던 사회적 경향이 팽배했던 세태, 학부모들의 잘못된 교육관으로 혼란스러운 세상을 바라보면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철저했다.
내가 하나에 의하여 부엌으로부터 추방당한 때부터이다.
나이 많다는 이유로 나는 몇 해 전에 부엌일로부터 해방되었다. 말은 해방이지만 실제로는 추방당한 것이다. 곡간 열쇠를 며느리에게 넘겨주듯, 잿더미에 묻어둔 불씨를 며느리에게 넘겨주듯, 그런 세대가 되었구나. 속된 표현으로 하면 ‘뒷방늙은이’다. 부엌일은 물론이고 집안 청소, 세탁기 돌리기 등을 일체 하지않은지 오래다. 하나의 효심孝心의 발로撥路임은 안다. 고맙다. 참 많이 컸구나 싶었다. 한편으론 내가 그렇게 늙어버렸구나 하고 서늘해지기도 했다. 요즘은 더욱 실감하고 있다.
“이제 엄마가 가장 좋아하시는 글쓰기, 시 짓기 만 하세요!”
부엌으로부터 추방당한 그때부터 절약에 관한 한 무심하려고 애썼다. 못 본 척 애쓰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무심해졌다고 해서 하나가 절약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방법이 다를 뿐이다. 풍요로워진 지금 세대에 맞게, 넉넉한 지금의 생활 수준에 맞게 해나갈 것이고, 또 말하지 않아도 여전히 하나에게는 절약, 저축의 습성이 배어있음을 안다.
어떻든, 하나는 자라서 어른이 되었다. 몸도 마음도 어른이 되어갔다. 지금도 계속 성장하고 있다. 내 식의 훈육 방식이었든, 하나의 타고난 기질이나 성향이었든, 지금의 하나의 정신세계를 이루고 있는 것은 순전히 하나 자신의 의지이다. 그럼에도 다만 지금도 내가 바라는 것은 내가 사춘기 무렵부터 가진 나의 주의와 사상을 그대로 주입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하나 자신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다만, 끊임없이 공부하라! 그것이 나의 주장이고, 하나도 그에 동의하고 있는 듯하다.
객관적인 안목과 사고思考, 올바른 인식과 그 올바른 인식을 바탕으로 한 올바른 판단력과 그것에 준한 평형감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살기. 하나가 그런 성인으로 자라주기를 바랐듯이 하나 역시 자신의 자식들이 그런 사고방식을 갖게 되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공부해야 한다. 제대로 알기 위한 끊임없는 공부. 그것이 나의 사상思想, 나의 주의主義이다. 나의 사상과 주의는 나의 삶은 물론, 하나의 삶에도, 그리고 지금의 손자와 손녀에게도 이어져 시행되고 있다. 대물림인 셈이다. 하나에게 그것이 때로는 매정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겠지만 잘 성장하여 여기까지 와주었으니 감사하다!
그런 차원에서 나의 양육 방법이 제대로 성공했는지 혹은 좋은 것인지 하는 판단이나 결론은 유보留保할 수밖에 없다. ‘결론내리기’는 성립되지 않는다. 굳이 해명하거나 변경할 필요도 없다. 이미 실행해온 터이고, 바꿀 생각이 아직까지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 나로부터 시작해서 하나에게로 이어지고, 하나 또한 제 새끼들에게 계속 이어나갈 우리 집안의 주체 의식인데, 그것을 지금 판단한다거나 성공 여부를 따진다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일이다.
아이야,
가난을 모르는 너희들이 가엾구나
풍요 속에 사는 너희들이 가엾구나
눈물과 한숨
쑥개떡 밀기울로 넘겨야 했던
네 어버이의 휘어진 허리, 보릿고개를
대관령 고개, 추풍령 고개, 아흔아홉 굽이의 곰티 고개… 처럼
구경삼아 한 번쯤 가 볼 만한 관광지 정도로 아는
너희들이 가엾구나
굽이굽이 공이 박힌 어버이의 생애였다는 것을
그 골짜기에서 너희들이 태어났음을
너희들 앞에 굽이굽이 휘어진 길 있다는 것을
굽이진 골짜기가 휘어져 아름다움을
모르는 너희들이 가엾구나
하늘 맑은 날
흐린 날을 염려할 줄 모르는
너희들이 참으로 가엾구나
-〈살앓이. 보릿고개〉 전문
* 제3시집 《가이아 부인은 와병 중》(1994년)에 수록.
* 이 시는 “엄마, 보릿고개가 어디에 있어요?” 하고 묻던 어린 하나의 질문에서 나왔다.
♥ 일개미 김하나의 《ASIAN CANADIAN VOICES》
하나는 지금 중년을 통과하고 있다. 여전히 열심이고 여전히 성실하다. 끝이 아니다. 아직도 하나의 성장은 계속되고 있으니까.
하나는 많은 잠재적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거듭하는 말이지만 나의 딸로만 보는 관점에서만이 아니다.
때로는 그 나이 때의 나 자신의 행적과 삶의 궤적을 비교하게 되는데, 내가 처해있던 현실과는 많은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나는 내가 가지지 못한 장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 이것 역시 나의 딸이어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여자로서, 한 인격체로서 좋아보여서 하는 말이다.
자신이 하는 일이 언제나 공익적인지를 먼저 우선하고, 사명감을 갖고 임한다. 어찌 보면 고지식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원칙주의자에 가깝다. 자기 세계의 범위 안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더듬이를 세계로 뻗고 있는 형이다.
하나, Hana라는 이름을 지은 것도 바로 그런 나의 의도가 스며 있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지 말고, 세계로 뻗어나가라! 아리(Ari), 도리(Dori) 모두 그렇다. 한국으로 불러들이지 않고, 내가 오히려 하나를 따라 외국에 나와 사는 것도 그런 생각에서다.
하나는 자신의 분야에서 시스템 개선을 시도하고, 글을 쓰며, 영역을 넓히고, 저서도 출판하는 등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 《ASIAN CANADIAN VOICES: Facets of Diversity》(2022년)을 출판하기도 했다. 출판된 첫날, 첫 번째 책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주었다.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우리 엄마께 첫 카피를 드립니다. 항상 인생에 영감을 주시는 엄마, 고맙습니다” - 딸 하나 드림, 2022년 11월 4일.
나는 속표지에 쓴 하나의 카피를 보고 또 울컥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쁘다고, 나도 그렇다. 할 수 없다.
▲《ASIAN CANADIAN VOICES》: Facets of Diversity 《아시아계 카나다인의 목소리》: 다양성의 측면
하나는 여전히 나름의 무한한 잠재력과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다. 크고 작은 일의 순서를 가리고,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성실히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참 믿음직하다. 대학교 내의 일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수많은 국제회의나 세미나 등 외부의 일들을 주관하고 치르면서 보이는 성실함은 누가 뭐래도 내가 입증한다.
과로가 쌓이는 나날들을 보내면서 끊임없이 밀려드는 일을 해내는 것을 보면서, 집에서 함께하는 시간조차 갖기 어렵고, 수다나 웃는 소리도 마음 놓고 할 느긋한 시간이 없다. 어릴 때 그 5월처럼 쉬엄쉬엄하라고 말하고 싶을 때가 많다.
아이야 어쩔거나
잘 갖추어 놓은 공부방에 갇혀
무균상태無菌狀態로 사육당하는
너희들을 어쩔거나
중요하다는 학과 공부 한 가지 때문에
모든 것을 빼앗긴
너희들을 어쩔거나
창밖의 턱 괸 나무들을
들녘의 날개 펼친 바람들을
숲속의 목쉰 찌르레기들을
계절을 싣고 온 하늘의 해를
한사코 기다리게만 하는
너희들을 어쩔거나
턱 괸 나무들, 날개 펼친 바람들, 목쉰 찌르레기들, 그리고 하늘의 해가
기다리다 돌아가 버릴 텐데
그러면 한없이 외로워질 텐데
신록은 푸르기만
5월은 맑기만
아이야, 너희들은 자유롭기만.
- 《살앓이. 5월에》
* 제3시집 《가이아 부인은 와병중》(1994년)에 수록.
♥ 첫발 디딤 한국학 도서관 책임자
김하나는 현재(2025년) 토론토대학교의 동아시아도서관장이다.
당연히 어려운 고비도, 어려운 상황도 많았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의 과정을 더듬어 정리하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 첫 동아시아도서관 사서 때 이야기로 돌아가 조곤조곤 풀어내기로 한다.
한국에서 한국교원대학교를 졸업하고 캐나다의 몬트리올에 있는 맥길대학교의 대학원에서 문헌정보학을 공부했다. 맥길대학교의 대학원을 졸업한 후 얻은 첫 직장이 토론토대학교의 동아시아도서관의 ‘한국학 사서’였다. 2003년이었다.
‘한국학 사서’는 ‘한국학도서관 관장’이다.
‘한국학도서관 책임자 김하나’에서 지금의 자리인 ‘토론토대학교의 동아시아도서관장 김하나’가 되기까지에는 여러 과정을 거쳐야했다.
동아시아도서관, 일명 ‘정유동鄭裕彤 동아시아도서관’이다. 그 산하에 중국학도서관, 일본학도서관, 그리고 한국학도서관이 있다. 김하나가 바로 그 한국학 도서관의 책임자이다.
중국학도서관이나 일본학도서관에 비해 한국학도서관이 가장 규모가 작다. 만들어진 역사도 짧고 장서藏書도 많지 않았다. 열악하다보니 위상도 그만큼 낮았다.
김하나는 업무 파악을 하고, 주변 환경에 적응하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첫 직장이라는 설렘보다는 무거운 사명감에 짓눌려했다. 타개해 나가야 할 문제들이 많았다. 여러 가지 부족하고 미비한 여건임을 인식하면서 어떻게든 한국학의 위상을 높이고, 그러려면 자신의 입지立志를 높여야겠다는 것이 목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어려운 일을 포기하지 않고 성실하고 꿋꿋하게 임하며 견뎌내야 했다.
대외적으로 알리고, 후원을 요청하기도 하는 등 몸과 마음이 뜨거웠다. 그런 가운데 장서도 늘려야 했다. 비록 노력하고 애를 태우는 만큼의 성과는 돌아오지 않아도 멈출 수는 없었다.
일본학도서관장과 중국인도서관장 사이에 보이지 않는 경쟁이 심했다. 밖에서는 모르는 알력軋轢이었다. 위세가 대등하다는 뜻이고, 그것은 곧 국력과 외교력의 경쟁이었다. 그 사이에서 한국학도서관이 가장 약했다.
두 도서관에 비해서 한국학 도서관은 만들어진 시기도 짧고 자국 기업들의 후원도 거의 없다. 드러내놓고 이야기는 하지 않지만, 은근히 자국自國의 국력과 후원, 자국 기업인들의 인식이 작용하는 외교력이 미치는 영향은 크다. 한국의 기업으로부터의 후원은 전무한 상태였다.
동아시아도서관을 ‘정유동 동아시아도서관(鄭裕彤, 쳉유퉁 도서관)’으로 부르는 것도 이유가 있다.
1987년, 홍콩의 기업 뉴월드그룹 회장이었던 정유동鄭裕彤 박사(Dr. Cheng Yu Tung, 1925-2016)가 150만 불을 기증했다. 그 돈으로 도서관을 대대적으로 확장할 수 있었다. 그를 기리기 위해서 ‘정유동 동아시아도서관’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런 것에 비하면 한국 기업인들은 거기에 미치기는커녕 기부에 대한 인식 자체가 달랐다. 동아시아도서관에서도 알게 모르게 국력이 작용함을 알 수 있다. 특히 해외에 살다 보면 자국의 상황이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 토론토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에 도서 2천권券 기증
하나가 한국학도서관 책임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한국에 살고 있었다. 그 소식을 듣고 한국학 도서관에 책을 기증할 생각을 했다. 인터넷은 있었으나 널리 퍼져 있지 않았고, 카톡이 없었던 시절이어서 메일이나 전화로 소통할 수밖에 없었다. 국제전화 요금이 비싸서 전화사용이 자유롭지 못했다. 메일로 혹은 팩스로 소통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학도서관에 책을 기증할 생각을 했지만, 당시에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이 많지 않았다.
그 얼마 전에 한양대학교 윤석산 교수로부터 책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아 기증해버렸기 때문이다. 윤교수가 한양대학교 안산분교로 자리를 옮겨서 도서관 책임을 맡게 되어 책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모아두었던 시집들을 모두 정리했다. 500권 가까이 되었다. 그것을 몽땅 한양대학교 안산분교에 기증해버렸다. 그보다 조금 더 이전에 부산의 모 대학에도 기증한 일도 있었다.
도서관에 책을 기증하는 것은 딱히 하나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내가 평소에 가졌던 생각이기도 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나의 저서가 외국의 독자들에게 읽히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왔었다. 나의 저서가 외국의 대학도서관의 서가書架에 꽂힌다는 것을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한국학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교수나 전공하는 학생들 그리고 교민들에게 읽히면 국가를 위해서나 자신을 위해서나 매우 보람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외에도 나는 나중에 나이 들어 일선에서 물러나면 작은 개인도서관을 갖고 싶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책을 모았었다.
토론토대학이라고 하면 세계 유수의 대학이 아닌가. 내가 가지고 있는 책에 더하여 문인들의 저서를 모아 기증하기로 마음먹었다.
주변의 문인들에게 토론토대학교의 한국학도서관에 기증하려고 한다는 목적을 이메일, 전화, 또는 편지로 일일이 알리면서 저서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가까이 지내는 내 주변의 문인들과 문인 단체의 주소록의 명단에서 안면이 있는 명단을 고르기도 했다. 막상 일을 시작하고 보니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시일도 걸리고, 책을 분류하고 정리하고 다시 포장하고 부치기까지의 노동력도 들고, 해외로 부치려면 송료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한국 문인들의 저서들을 해외로 알린다는 사명감으로 열을 올렸다.
편지를 보내었어도 연락이 닿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고, 무응답도 있는 등, 기증하고자 하는 목표를 실행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우선 내가 변변치 못함이 첫째였다. 내 주변의 문인들과 명단에서도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로 한정되어있기 때문이었다.
권수卷數를 늘이기 위해서 문인주소록에서 명단의 이름들을 거의 다 발췌했다.
♥ 사람 공부, 문인 공부
나는 살아가는 일 자체가 공부이며, 공부 중에서 가장 어렵고, 흔하고, 그러나 중요한 것이 ‘사람 공부’라는 것을 이미 체득하고 있었다. 책을 모으는 과정에서 나는 또 한 번 ‘사람 공부’를 크게 했다.
나는 순진하게도 문인들은 일반인들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달라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수없이 겪고 수없이 실망하면서도 여전히 문인은 일반인들과는 다르다고, 달라야한다는 생각을 고수하고 있다.
사람 때문에 다치고, 상처 입고, 실망하면서도 버리지 못하는 성정性情, 천성인가보다. 버려지지가 않는다.
나는 그때, 외국의 대학도서관의 서가書架에 자신의 책이 꽂히는 것을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할 줄 알았다. 그런데 문인들 중에는 의외의 행태를 보이는 사람들이 있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 그러는 것은 아니었지만, 상당수의 문인들이 자기 자신을 최고의 문인인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점, 또 자신의 저서가 최고의 작품이 되는 냥 여기는 점, 속되게 표현하자면 목에 힘주느라 등줄기에 쇠막대기를 꽂고, 갑자기 고자세가 되며 엄청 생색을 내는 양태를 실감해야 했다. 이른바 스스로 대가大家였다. 속마음으로는 기증하기를 원하면서.
사회적, 학문적, 정평이 아니더라도 이미 그 사람의 작품을 보면 안다. 글 쓰는 사람들 사이엔 어느 정도의 평가가 내려져 있지 않은가. 글만이 아니라 접해본 사람들이라면 인격에 대한 평가도 있지 않은가. 나도 이미 내 나름의 평가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아니꼽기 짝이 없는 사람도 있었다. 되돌려줘 버리고 싶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주로 모모 대학교수들이다)은 미국 어느 대학의 도서관에, 또는 어느 기관에 자신의 책이 있다는 것을 알려오며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며 거만을 떠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심지어 나더러 가서 확인해보라는 말도 했다. 한마디로 역겨웠다. 마치 그 대학의 요청에 의해서 자신의 저서가 비치되어있는 것처럼 말한다. 그 말을 들으면, 이미 실정을 알고 있는 나로선 민망할 따름이다.
한번 시작한 일, 입을 꾹 다물고 진행했다.
나에게 보내는 한국 국내의 우편료만을 부담할 뿐인데... 어차피 출판하면 공짜로 배부하면서. 출판하는 사람도 공짜로 나눠주고, 주변 사람들도 공짜로 받을 생각만 한다. 나는 관행처럼 되어있는 그것도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분류하고 포장하고 토론토 대학교로 보내는 해외 송료의 부담은 내가 내 돈을 들여서 하는 일이었다. 한국학 책이 부족하다는 말에 한국학 장서가 많기를 바라는 나의 간절함도 있었다.
어쨌든 그 일을 통한 나의 ‘사람 공부’는 문인들의 위선을 들여다보게 된다는 점에서 더욱 견디기 어려웠다.
‘사람 공부’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문인 공부’인 셈이었다.
역겹고 민망한 순간마다 앞서간 김상용 시인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의 마지막 구절 ‘왜 사냐건 웃지요’를 뇌이며, 그저 소리 없는 웃음으로 날리고 말았다. 그런 중에도 드물게, 기꺼이, 감사하게 책을 보내주는 사람도 있었다.
어떻든 노력한 결과 이천 여권의 책을 토론토 대학교 도서관에 기증을 성사시켰다. 벌써 이십 여 년 전의 일이다.
일을 하다보면 이유가 많은 사람이 있다. 능력 있는 사람, 의리 있는 사람, 책임감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별로 이유가 없다는 것을 또 한 번 경험하게 되었다. 말 많고, 이유 많은 사람은 대개 능력이 부족하거나, 좋지 않은 습벽習癖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또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그런 것들이 나에게는 저절로 세상 사람을 재는 잣대가 되었다.
그때의 일로 유일하게 기억하는 이름이 있다.
임성구 시조시인, 그의 시조집 제목은 《오랜 시간 골목에 서 있었다》였다. 경남 창원지역에 사는 분으로 기억한다. 자신이 속한 단체 회원들의 저서들을 일괄해서 150권 정도를 보내주었다. 그런데 최근 어느 문인들의 단톡방에선가 그분의 이름을 발견했다. 시조시인으로 어느 문인 단체의 직책을 갖고 계신 듯했다. 반가웠다. 연결해 볼 생각을 했으나 차고 넘치는 카톡방의 정보들에 휩싸여 흘러가고 말았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나는 여전히 한국도서가 많이 있으면 좋겠다는 순진한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어서 토론토 시내에 있는 공공도서관을 내가 직접 두루 섭렵할 때도 있었다. 일본 책, 중국 책은 있어도 한국 책은 없었다. 있어도 많지 않았고, 출판된 지 오래된 낡은 책이거나 그다지 평가받지 못하는 책들이어서 씁쓸함을 금치 못했다. 뿐만아니라 도서관 데스크에 물으면 기증을 아예 받지 않는다고 했다. 이제는 그 순진한 생각을 버렸다.
♥ 해외 도서관 상식
여기어 잠깐, 참고하시라고 해외 도서관에 저서 기증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길게 덧붙인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도서관들이 기증받는 일도 중단했다. 공간 부족 때문이다. 독자 부족도 요인이 될 수 있다. 한국 책이 읽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캐나다만이 아니라 북미 전체의 모든 도서관들이 비슷한 실정이다. 어떤 루트를 통하지 않으면 기증이 어렵다. 게다가 한국 책이 비치되어있는 곳은 드물다.
이곳의 각 지역마다 있는 공공도서관들 중에도 한국 책을 비치하고 있는 곳이 한두 곳일 뿐이다. 그나마 소량이다. 독자도 아주 적다. 요즘은 오히려 없애고 있는 추세이다. 북미 전체의 도서관이 비슷한 상황이다.
지금도 특별한 루트를 통해서 사전에 타진한 뒤 기증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는 한다. 지금은 한국의 지인 문인들에게 일체 기증하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한국의 문인 중에는 도서관에 기증하는 것이 자신을 알리는 좋은 홍보라는 것을 인식한 몇몇, 귀가 열린 소수의 사람들로부터 기증을 부탁해오는 경우가 있긴 하다. 내가 받아서 처리해주기는 하지만, 그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설령 수월하다고 해도 그동안에 문인들로부터 받은 ‘문인 공부’를 통해서, 알게 된 얕은 이기심과 배신감 때문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나서지 않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아무에게나 ‘예스’ 하지 않는다.
외국의 대학교에 자신의 저서가 비치되어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운 일이기는 하다. 물론 어떤 루트를 통해서 비치돼있을 수는 있다. 출판사나, 기타 관련한 사람들의 역할에 의해서 혹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요청받은 경우는 없다. 필요한 책, 가치 있는 책은 여전히 존재한다. 어중이떠중이 책이 아니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특별한 경우란 학교나 기관 등, 주최 측에서 무슨 행사나 기획에 의해 일시적으로라도 시선을 집중 받는 경우이다. 당연히 번역본이다.
근년에 나의 시집 《LOVE IS THE PAIN OF FEVERISH FLOWERS》(사랑은 아름다운 꽃몸살)의 경우, 출판사의 기획이 비교적 성공적이었고, 외국에서의 판매 부수가 상당한 숫자에 오른 결과였다. 그때 보니까 이미 이전에 한국번역원에서 번역되어 나갔던 고은, 신석정, 정지용, 정호승의 시집이 뒤를 잇고 있음을 본 기억이 있다. 나의 시집 외에는 대개가 이전에 번역원이나 해당 기관에서 특별한 정책에 의해서 보내어진 것들이 대부분이다.
기증은 받지 않지만 필요하면 도서관 자체에서 구입한다.
나의 시집 《2H+02=2H2O》도 하버드 대학교 주최 번역대회에서 우승했기 때문에 후원한 ‘타말출판사’에서 출판해주었다. 접이식 양면으로 한글과 영문을 배치한 특수한 편집이었다.
자랑 같지만, 말 나온 김에 나의 시집 《LOVE IS THE PAIN OF FEVERISH FLOWERS》의 경우, 북미뿐만 아니라 유럽의 유수한 대학들, 영국, 네덜랜드... 등에서까지 자기들이 구입하여 비치하고 있다. 당시에 확인된 바에 따르면 60여 곳이 넘었다. 이것은 문인 단체나 번역원의 지원 없이 오로지 나 혼자의 힘으로 해낸 것이다.
2022년 4월, 뉴욕 공립도서관에서 열린 ‘National Poetry Month’ 행사에서, 나의 번역 시집 《Love Is the Pain of Feverish Flowers》(사랑은 아름다운 꽃몸살)가 선정되어 전시되기도 했다.
뉴욕 시민들 사이에서 관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또 맨하탄 대학에서 한 테마별 인터넷 전시회에서, 나의 시 〈2H+02=2H2O〉가 선정되어 전시되기도 했다. 대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런 행사들은 한시적이어서 한국의 언론들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알더라도 보도하지 않는다. 당시에는 나도 몰랐다. 지난 후에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로 우연히 알게 되었다.
나 혼자 늘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것 같아 주저앉고 싶고, 때로는 내가 이룬 작은 성과들에 대해 칭찬받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하고 사람들은 냉담하다. 그럴 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우는 것은 그나마 나의 딸 김하나이다.
▲ 《2H+02=2H2O》: 김하나의 영역 우승 공고문.
| 제1회 ‘민 챕북’ 대회 우승작 김하나는 권천학의 시를 번역하여 《2H2 + O2 = 2H2O》라는 제목의 책으로 상을 받았습니다. 김하나는 토론토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의 한국학 사서이자 통번역가입니다. 2001년 한국교원대학교에서 교육학 학사(독어 및 영어)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2003년 캐나다 몬트리올 맥길 대학교에서 문헌정보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1998년에는 호주 멜버른 왕립 멜버른 공과대학교(RMIT)에서 통번역가 국가인증기관(NAATI) 인증을 획득했습니다. 하버드대학교 한국연구소와 ‘타말비스타’ 출판사는 선식민재단의 지원을 받아 다음과 같은 소식을 발표하게 되어 기쁩니다. |
▲ 《2H₂+O₂=2H₂O》 속표지
▲ 《2H₂+O₂=2H₂O》 접이식 양면 색다른 편집
♥ 어학연수 기간에도 아르바이트를
나는 드러내진 않았지만, 김하나가 토론토대학교의 사서司書가 된 것만으로도 매우 다행으로 여겼고 우쭐하는 기분도 들었다.
맥길대학원을 졸업할 때에도 졸업생들의 취업 문제는 제각각의 고민이었다. 더구나 드문 동양 학생이라서 취업의 난관이 더욱 호되기 때문에 마음을 조렸다.
대학원에 재학 중에도 하나는 짬만 나면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그 돈으로 내가 한국에서 몬트리올에 다니러 갔을 때 YMCA의 멤버십 카드를 마련해주기도 했었다. 말은 안 했지만, 비록 큰돈은 아니라고 해도 미안하고 눈물겨웠다. 한순간도, 한 자락도 허투루 할 수가 없었다.
늘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하나의 모습을 보며 믿음직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늘 조마조마한 마음이어서 겨우 소리 나지 않는 응원을 할 뿐이었다. 모든 부모의 마음일 것이다.
하나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교수나 전문 학자가 되기를 원치 않았다. 가끔 내가 교수를 해보라고 언질을 주기도 하고 권장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하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나는 한국에서 문학 활동을 하면서 문인들 중에는 대학교수라는 직책으로 얻는 혜택이, 많이 누리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교수라는 이름으로 문학을 하는 경우 단순히 교수라는 직책 때문에 덤으로 대우받고, 유리한 자리에 서는 것을 보면서 더욱 그랬다. 사석에서는 그런 불평들을 하는 문인들도 많았지만, 막상 드러내지는 않았다. 나 역시 교수다운 교수가 몇이나 될까, 회의가 든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문학, 문학인이 그렇게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늘 생각과 달랐다. 그러다보니 나도 모르게 하나에게 교수 되기를 은근히 강조한 꼴이 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부모의 편견과 편애, 그리고 사회적 불평등 인식으로 균등한 교육의 기회를 얻지 못했고, 미래에 대한 꿈을 피워보기는커녕, 무질러야 했던 나의 콤플렉스일 수 있다. 나의 세대들에겐 그것이 일반적인 사례이기도 했다.
어떻든 그로 인한 피해의식이 하나에게 그런 식으로 발현發現된 것일 수 있지만, 하나는 싫어했다. 학문적인 쪽보다는 행정이나 경영 방면에서 연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하나는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선택했다. 그런데 대학입시를 앞둔 고3 때 국가정책으로 일본어가 제2외국어에서 배제排除되었다.
한국교원대학교에 진학해서 독어 교육학을 전공으로 택했다. 한국교원대학에 진학 한 것도 가난한 엄마를 생각해서 선택한 것이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때는 교원대학의 장학생이 되면 전 학년 학비 면제와 1~2학년까지는 기숙사도 무료 공급받고, 식비도 무료 제공받는 등의 국립학교로서의 특혜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나가 교원대학교의 장학생으로 합격했을 때 내가 살았던 신림동의 수퍼마켓 아저씨는 나만 보면 “딸내미 잘 둬서 집 한 채 번거예요” 하고 말했고, 집 근처의 학원 앞에는 ‘축 교원대학교 장학생 입학!’하는 현수막이 내걸리기도 했었다.
그 후로 한국교원대학교의 규정도 많이 바뀐 것으로 안다.
일반 대학교의 사범대학에서 불평등에 대한 데모를 하는 기사를 보기도 했다. 어떻든 당시엔 주말이면 청원군까지 차를 운전하고 가서 하나를 데리고 오는 것이 나의 큰 낙이었다. 아끼고 절약하여 모은 돈으로 하나를 데리러 가고 오는 중에 음식점에 들려 하나에게 고기를 먹이는 것이 나로서는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 시절의 쌈밥과 삼겹살, 지금도 군침이 돈다.
김하나는 한국교원대학교 2학년을 끝내고 호주로 언어연수를 떠났다. 나에게 현지 언어연수원의 첫 학기의 등록금만 대주면 나머지는 자신이 하겠다고 하면서 해외연수를 떠나기를 원했다.
지금이야 세계 어느 곳이든 한국 사람 발길 닿지 않는데도 드물고 곳곳마다 한국 사람들이 많지만, 그때만 해도 다 그렇지는 않았다. 한국 사람들이 많이 가는 시드니나 멜버른 같은 지역을 피하고, 북쪽에 위치한 케언즈(Cairns)를 영어 연수 목적지로 선택한 것도 하나 자신의 의견이었고, 결정이었다. 어차피 영어를 배우러 가는데 한국 사람 많으면 도움 될 것이 아니므로 낯선 곳에서 철저히 공부하겠다고 스스로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풍족해서 떠나는 영어연수가 아니라는 것을 하나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늘 엄마의 경제가 어렵다는 것을 인식하기 때문에 매사 절약, 절약의 태도를 취했다. 그런 하나가 기특하고, 미안하고, 고마웠다.
언어연수 기간 동안에도 여러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을 벌었다. 낮에는 학교의 컴퓨터를 관리하는 일을 맡아서 했고, 저녁식사 시간 무렵에는 여행객들을 상대로 하는 시내의 식당에서 일을 했고, 주말에는 홈스테이 하는 주인집 아주머니가 운영하는 옷가게에서 일하기도 했다. 하나는 정말 성실했다.
언어연수를 마치고 귀국했을 때 하나의 얼굴이 빵빵 토실토실해서 반갑고도 놀랐다. 배를 곯지나 않나 걱정을 했던 것과는 반대였다.
“엄마, 왜 그런지 알아? 일하는 한국식당에서, 일을 마치면 밥을 주는데, 그중에는 손님들이 남긴 것도 있어. 그런데 나는 잔뜩 먹어, 배가 터지도록. 그래야 다음 날까지 든든하거든. 아침 한 끼 정도는 거를 수 있거든”
하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웃기려고 말을 하지만,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장마가 주룩주룩, 젖어들곤 했다.
“일단 배부른 게 최고였어. 그래서 닥치는 대로 가리지 않고, 탄수화물을 엄청 섭취했지”
하나가 까르르 웃을 때도 나는 속울음을 삼켜야했다.〈40호에 계속〉
엑스트라 사진자료입니다.
▲ 유명환 외통부장관 만평: 독도관련
▲ ‘시의 달’ 선정: 뉴욕공공도서관의 사이트
* NYPL 뉴욕공공도서관, 2022년 4월 미국 ‘시의 달’에 선정된 권천학의 《LOVE IS THE PAIN OF FEVERISH FLOWERS》가 포함되어있다.
시인 권천학權千鶴
《현대문학》으로 등단, 진단시 동인으로 활동. 《여원》에 단편〈모래성〉, 드라마 〈끊임없이 도는 풍차〉, 〈저녁노을 붉은 꽃〉, 〈끈〉이 KBS, TBS에 당선, 한국전자문학도서관 웹진 《블루노트》2000~2006)를 발행, 2008년 캐나다로 이주, 2010년 단편 〈오이소박이〉로 ‘경희해외동포문학상’ 대상 수상, 2015년 국제작가네트워크(WIN)의 Distinguished Poet Award를 수상, 현재 캐나다 밴쿠버에 거주하며 국제PEN클럽, 한국시협, 캐나다문협, 세계시조시인포럼 회원으로 활동 중, 저서: 《그물에 갇힌 은빛 물고기》 외 시집 12권, 영한시집 《2H₂ +O₂ =2H₂O》, 일어시집 《空っぽの都市の胸に電話をかける》(빈도시의 가슴에 전화를 걸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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