壬午年 임오년
1762년 조선 21대 영조대왕 38년.
7월 4일 궁궐에서 왕인 아버지가 아들인 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이는 역사적 참변이 일어난다.
아들을 죽인 아버지는 정조대왕(이산)의 할아버지인 영조대왕인 이금.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한 아들은 정조대왕(이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장헌세자) 이선.

壬午獄 임오옥
조선(朝鮮) 영조(英祖) 38년(1762) 임오년에 세자(世子)를 뒤주 속에 가두어 굶기어 죽인
사도세자(思悼世子) 사건(事件)의 별칭(別稱)
임오화변(壬午禍變)
임오화변(壬午禍變) 또는 사도세자사건(思悼世子事件)은 1762년 7월 4일 사도세자가 노론과
부왕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며칠 뒤 사망한 사건이다.
사도세자사건 (思悼世子事件)
*이칭별칭:임오옥(壬午獄), 임오화변(壬午禍變)
*발생·시작 일시 1762년(영조 38) 5월
정의
1762년(영조 38) 5월 사도세자가 부왕인 영조에 의해 뒤주 속에 갇혀 질식사한 사건.
내용
임오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임오옥(壬午獄)이라고도 한다. 이 사건은 노소
당인(老少黨人)들의 정쟁(政爭) 과정에서 노론에 의해 세자가 희생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조선 후기의 당쟁은 탕평책이 추진되는 속에서도 보다 심각한 국면을
드러내게 되었다. 영조는 정성왕후(貞聖王后) 서씨와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에게는 소생이 없었고 정빈이씨(靖嬪李氏) 소생으로 효장세자(孝章世子: 뒤에
眞宗으로 추존), 영빈이씨(暎嬪李氏) 소생으로 사도세자(思悼世子: 莊獻世子)가
있었다. 효장세자가 요절하였으므로, 영조는 1749년에 사도세자로 하여금 대리
청정하게 하였다.
그런데 세자가 대리청정을 맡기 전까지는 영조와 성격상의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효심과 우애심이 두터웠고, 왕세자로서의 도량과 덕을 겸비하여 영조로부터
극찬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리청정에 임하게 되면서 세자는 행동에 형평을
잃고, 비정상적인 성격이 나타나 영조로 하여금 세자에게 국정을 맡길 수 없다는
생각을 굳히게 하였다.
이보다 부자간의 대립 관계가 표면화된 것은 영조가 병석에 있을 때 신하들이
세자에게 약을 권하도록 종용하였으나 이를 거절한 일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결국 영조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고, 세자를 보좌하던 소론(少論)의 영수였던
이종성(李宗城)이 탄핵을 받아 조정에서 물러나게 된 때부터이다.
1761년 세자는 임금도 모르게 관서지방을 유람, 순행하고 돌아오자 윤재겸
(尹在謙) 등이 상소해 세자의 행동이 체통에서 벗어났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영조는 세자의 관서순행에 관여한 자들을 모두 파직시켰다.
영조가 세자를 참살한 또 다른 계기는 1762년 5월에 세자의 실덕과 비행을
고발하는 나경언(羅景彦)의 무고 사건과 문소의(文昭儀) 등의 부자간의 이간책
등이 작용하였음을 지적할 수 있겠다.
이러한 일들로 인해 영조는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하고, 세자와 영빈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뒤주에 가두어 죽게 하였다. 영조가 뒤에 이를 후회하고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린 것으로 보아 사건의 계기가 된 부자간의 불신과 이간은 노소론의
당쟁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남인·소론 등이 부왕 영조와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세자를 앞세워 보수적인
성격이 짙은 노론 정권의 전복을 꾀하다가 실패한 사건이라고 생각된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사도세자사건 [思悼世子事件]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원문보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78413&cid=46622&categoryId=46622
나경언(羅景彦)의 상변
1762년(영조 38) 나경언이 장헌세자(莊獻世子:사도세자)의 비행을 고변한 사건.
나경언은 액정국별감(掖庭局別監) 나상언(羅尙彦)의 형으로, 형조판서 윤급(尹汲)의
청지기였다. 그는 장헌세자가 그의 빈(嬪)인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를 죽이려
했고, 비구니를 궁중에 끌어들여 풍기를 어지럽혔으며, 부왕의 허락도 없이 평양으로
몰래 놀러다녔고, 북성(北城)에 마음대로 나가 돌아다닌 일 등 10여 가지 비행을
들어 형조에 고변하였다. 이 고변으로 영조는 지금까지 모르고 있던 세자의
비행을 알게 되자, 세자에게는 물론 세자의 비행을 알면서도 왕에게 고하지 않은
신하들에 대해서까지 격노하고 문책하였다.
이에 대해 세자는 나경언과의 면질(面質)을 요구했으나 부왕의 꾸지람만 받았을
뿐이다. 나중에 세자가 포도청(捕盜廳)을 통해 나경언의 가족을 심문해 본 결과,
나경언은 우의정 윤동도(尹東度)의 아들 광유(光裕)의 사주를 받아서 고변한
것임이 드러났다. 당시 영조의 탕평책(蕩平策)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파(時派)·
벽파(僻派)의 싸움이 있었고, 그 중에 벽파는 세자를 배척하는 파였다. 그러므로
나경언의 고변의 배후에는 벽파의 작용이 있었던 것이다.
영조는 자신이 모르는 세자의 비행을 알려준 나경언을 충직한 사람으로 보아 그를
살려주려 했으나, 남태제(南泰濟)·홍낙순(洪樂純) 등이 나경언을 세자를 모함한
대역죄인으로 극론했기 때문에 결국 처형하고 말았다. 그러나 세자의 비행 문제는
그것으로 종결되지 않았고 다시 확대되어 세자가 뒤주 속에서 죽게 되는 사건으로
진전되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나경언의 상변 (두산백과)
원문보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73836&cid=40942&categoryId=31778
뒤주
뒤주는 가정에서 쌀, 보리, 콩, 깨 등 곡식을 넣어두는 수장궤(收藏櫃)로서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견고하게 제작되었고 쥐나 해충, 습기의 침해를 막기 위해 다리를
높직하게 올렸다. 이 뒤주는 잡곡류인 콩이나 팥, 깨 등을 넣어두는 소형으로서
경기 일원에서 제작되었다. 굵은 기둥과 판재는 소나무를 사용하였으며,
작은 체구임에도 당당하게 보인다.
부엌가구인 찬장, 찬탁과 더불어 굵은 골재와 너른 판재의 쾌적한 비례로
우리나라 전통목가구의 건강함을 잘 나타내고 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뒤주 (한국 미의 재발견 - 목칠공예, 2005. 3. 24., 솔출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