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앙칼럼
의심 많은 도마처럼 다시 읽은 성경말씀
- ‘빌립보’ 4장 4~7절 -
신약성경 ‘빌립보서’는 크리스천이 일상에서 지켜야 할 삶의 자세로 ‘늘 기쁨으로 살 것’을 강조한다. 그것도 ‘내가 다시 말하노니’라는 말로 반복해서 강조하는 흔치 않은 성경 구절이다. 이어서 성경은 주안에서 기뻐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을 이렇게 말한다. 우선 관용(寬容), 즉 자신의 톨레랑스(tolerance)를 모든 사람들이 알게 하라는 것이다. 그냥 ‘적당하게’ 가 아니라 주변에 소문날 만큼 관용하는 삶을 살라는 것 같다. 이른바 ‘후덕(厚德)한 사람‘, 쉽게 말해 ‘마음씨 좋고’, ‘늘 너그럽고 푸근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널리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일까. 늘 기뻐하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이해타산에 민감한 이기적인 삶을 절대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이어서 성경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기도하는 삶을 살라고 가르친다. 화를 내면서 노래할 수 없듯이 염려하면서 기뻐할 수도 없고 더더욱 감사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도는 믿음의 바탕이고 전부이며 영혼의 호흡이다. 또 기도는 지금 이 순간 이루어지는 나와 하나님의 대화다.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현재의 사건이다. 현재에 집중하는 삶이다. 사람은 누구든 과거에 매달려 살면 후회할 일만 더 늘어나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렇다고 또 미래에만 매달려 살면 한 치 앞의 일도 모르는 게 우리네 인생인지라 늘 걱정스럽고 불안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순간 내가 이만한 삶의 조건으로 살아있음에 감사하면서 기도하는 것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야 비 로소 내 마음에 평강이 찾아온다. 다만 감사와 기도는 늘 하나로 세팅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내게는 감사가 빠진 기도란 마치 바람 빠진 자동차 타이어처럼 보인다. 또 우리는 늘 간구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 말 그대로 간절한 기도다. 많은 믿음의 선배들은 그런 기도를 일컬어 “목숨 걸고 하는 기도‘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내 기도의 정성을 보시고 ‘아, 이건 내가 도저히 안 들어 줄 수 없구나.’라고 할 정도의 기도다. 사실 기도만 그런 건 아니다. 인생을 조금만 깊게 들여다보면 세상만사 다 간절함의 크기만큼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그 기도에 맞는 삶을 살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같은 삶의 열매를 성경은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 마음과 생각을 지킨다.’이다. 여기서 ‘지킨다.’라는 말은 영혼의 평안을 주신다는 뜻이다. 흔히 말하는 ‘만사형통’, ‘부귀영광’보다는 영혼의 평안이다. 중국 고전 <論語>에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 베고 누워도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나니 의롭지 못한 부(富)는 내게 뜬구름이라.’(飯蔬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라는 구절이 있다. 빌립보서의 즐거움도 이와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영혼의 평안이 참 행복이라는 가르침은 동서양이 한가지다. 아무리 권력, 재산, 부귀, 학식이 많아도 마음에 평안이 없고 늘 불안하다면 세상의 부귀영화라는 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세속의 풍요는 내 삶을 편리하게 할 수는 있을지라도 반드시 내 영혼을 행복하게 만드는 평안을 줄 수는 없다는 뜻이다. 듣건대 서울 강남의 소문난 부자치고 수면제 안 먹고 잠드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들이 보통 한두 건의 송사에 관련되어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요즈음 궁금한 게 하나 있다. 그 사람이 밤에 수면제 안 먹고 잘 수 있을까? 십여 개 범죄로 기소되어 주 3회 재판받으면서도 멀쩡하게 돌아다니는 그의 멘탈 말이다. 하긴 그의 지난 삶의 얘기를 들어보면 고개가 끄덕여지고 일말의 연민도 느낀다. 하지만 적어도 죄 때문에 경찰서 문턱 한번 안 넘어 보고 평생을 산 내게는 그의 멘탈이 이제는 대단함을 넘어 두렵기조차 하다. 어쨌든 금년 한해도 이 사람으로 인해 세상은 몹시 시끄러울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이같은 심리적 내전 상태가 극한으로 치달을수록 우리에겐 분명하게 챙겨야 할 게 있다고 본다. 건강한 상식의 기준이다. 선거에서 만약 누굴 더 미워하는가를 기준으로 표를 던진다면 그건 분풀이고 감정발산이지 제대로 된 투표가 아닌 것도 그런 경우다.
좌우의 정치적 역량이 도토리 키재기라면 더욱 그렇다. 지금 우리는 수많은 절박한 질문들 앞에 서 있다. 자라나는 아이들의 눈망울을 보면서 내가 제대로 된 답을 준비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하는 이유다. 물론 기소된 범죄혐의는 다툼의 여지가 있고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PC)’이 윤리적 완벽함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과거형 형수 쌍욕과 현재형 반국가세력과의 선거 야합은 그 어디에도 톨레랑스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 성경에서 말하는 관용이 천박한 인격과 패역에게까지 날개를 달아주라는 말은 아닐 것이다. 왜일까.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그걸 보고 배우라고 가르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징역 2년 실형이란 2심 선고를 받고도 나라를 휘젓고 다니는 조 아무개라도 마찬가지다. 이미 우리 사회는 윤리와 양심과 상식이 천길 벼랑 끝에서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다. 게다가 용산 역시 이미 유효기간이 지난 아마추어리즘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다. 최근 여당과 대통령실의 엇박자를 보노라면 남은 3년의 가시밭길이 두렵지 않은 듯 보인다. 짠맛을 잃은 소금이 된 비겁한 사법부의 권위 역시 범죄자의 발길에 짓밟히고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딱 이런 풍경이다. 어떤 때는 이쯤 되면 우리 사회가 아노미 상태의 턱밑까지 밀려온 게 아닌지 섬뜩한 생각도 든다. 게다가 지금 나는 이 말에서 뺄 것도 보탤 것도 없다는 사실에 더욱 화가 난다. 돌아보면 선거가 코앞인데 여전히 나라의 골수를 파고드는 암세포는 뒷전이고 손톱 밑에 든 작은 가시에만 호들갑인 사람들이 절반에 가깝다. 내 눈에는 선악의 기준, 그 가벼움이 마치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그러니 하나님의 공의(公義)를 조롱하는 철면피들의 후흑행보(厚黑行步)가 오늘도 문명국가 대한민국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것이다. 좌우를 막론하고 언론의 논조들도 제정신이 아니다. 감옥에 있어야 할 피고인들이 피운 선거판 모닥불에는 곁불을 쬐려는 정치 거지들이 시궁창의 모기떼처럼 꾸역꾸역 모여들고 있다. 하지만 나는 건강한 국민지성이 나라의 주인인 유권자들의 심중에 살아있음을 믿는다. 결단코 이런 난장판의 구경꾼이 아님을 보여줄 것으로 믿는다. 왜일까? 어떻게 세워 일으킨 나라인데 이런 식으로 망가질 만큼 대한민국이 만만한 나라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관용과 기쁨이 어울리지 않은 혼돈의 시대를 살아왔다. 끝없이 이어지는 가면들의 행진과 극단의 언어들이 생산하는 소음과 먼지 속을 살았다. 나 자신의 마음과 감정을 진리 안에서 바로 잡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러고도 오늘이 내일로 이어질 수 있을까? 라는 질문도 억누를 수 없었다. 하지만 긴 숨으로 돌아보면 아직 우리 앞을 비추는 소망의 등불은 꺼지지 않았다. 그래서 빌립보서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했는가 보다. 문명사의 흐름은 늘 진리 편에 서서 오늘에 이르렀고 하나님의 섭리 역시 진리 위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믿는 자에게 내리시는 축복, 진리 안에서의 자유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하나님의 축복은 그 어느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영역 안에 들어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눈길을 끄는 사례 하나를 이곳에 소개한다.
구약에 기록된 바, 이스라엘 민족은 출애굽 이후 40년 광야를 유랑하다 젖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수천 년의 이산(離散), 즉 디아스포라(Diaspora)에 이은 나치의 홀로코스크(Holocaust)로 이스라엘 민족은 지독한 연단의 민족사를 거듭했다. 이후 지금의 이스라엘 땅에 나라를 세웠지만 또 다시 수차례 중동전쟁 등등 고난의 세월은 그대로였고 하나님의 응답은 없는 듯 보였다. 오죽했으면 1973년 6월, 당시 이스라엘 총리, 골다 메이어(G.Mabovitz)가 빌리 브란트(W.Brandit) 서독총리의 방문환영식에서 이런 말을 했겠는가. 즉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세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불만은 그가 이스라엘인들을 석유가 지천인 중동 가운데 왜 하필이면 석유가 한 방울도 안 나는 이곳으로 데려오기 위해 40년을 광야에서 헤맸느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의 폭소가 터지고 어색했던 양국 정상 간 긴장이 풀렸다는 얘기가 있다.
젖과 꿀은커녕 풀 한 포기조차 자랄 수 없는 메마른 땅에다가 온통 사방이 적들에게 둘러싸인 채 이스라엘인들은 초긴장 속에서 살아야 했다. 게다가 에너지의 절대빈곤 속에서 한때는 석유 금수 조치로 445%에까지 이르는 살인적인 물가상승, 인플레이션까지 겪었다. 그러고 보면 지금의 이스라엘 땅은 누가 봐도 절대로 ‘약속의 땅’일 수는 없어 보였다. 그런데 마침내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다. 하나님의 축복은 인간의 시간이 아닌 하나님의 시간에 따라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로노스(Chronos), 즉 세속의 물리적 시간으로는 도저히 측량할 수 없는 카이로스(Kairos), 즉 영적인 시간표에 따라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게 바로 1999년 6월, 이스라엘 해안에서 40km 떨어진 곳에서 대규모 가스전을 발견한 것이다. 노아-1 가스전이다. 이후 10년 동안 이스라엘 영해 지중해에서 마리-B, 타마르 1, 다릿-1등 대형 가스전, 아프로디테, 삼손 가스전 등이 연달아 발견되었다. 특히 2010년 발견된 레비아탄((Leviathan) 가스전은 매장량이 3조 4,600억 입방미터 이르는 세계 최대 해양 가스전이다. 이후 이스라엘은 이 가스전에서 생산되는 천연가스로 경제와 안보의 굳건한 국가적 기반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하마스 등 극렬 반이스라엘 세력을 제외한 터어키, 이집트, 요르단 등 주변 아랍국들과 에너지 공조를 통해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고 EU 등으로 천연가스를 수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세계의 화약고인 이스라엘이 보유한 지중해 가스전은 아랍 세력과 이스라엘 사이의 가장 이상적인 평화의 완충지대로 자리 잡고 있다. 전쟁과 평화가 오버 랩 된 실로 보기 드문 문명사적 아이러니다. 수천 년 전 하나님이 선민 이스라엘 민족에게 약속했던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은 그들이 실망했던 척박한 모래땅, 가나안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곳은 황금의 천연가스가 솟구치는 지중해 바다 밑 땅, 거대한 가스전(田)이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섭리는 실로 놀랍고 신기하다. 다만 인간의 조급함이 그 섭리의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좌절하고 불평하고 무너지고 타락할 뿐이다. 출애굽 당시 광야에 엎드려 기도했던 이스라엘 조상들의 간절한 기도의 응답이 수천 년 세월을 넘어 이런 모습으로 이루어질 줄 감히 누가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고 보니 늘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그 놀라운 섭리는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선택 역시 오직 하나다. 이 순간 내가 살아있음만으로도 항상 기뻐하며 감사하며 기도하는 삶이다. 누군가 원하는 기도내용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응답이라고 했지만 살아생전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 없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기도는 이스라엘처럼 아주 먼 훗날 우리의 후손대에 이르러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비록 그럴지라도 오직 감사함으로 간절히 기도하는 일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차라리 운명 같은 것이다. 물론 우리가 이런 믿음으로 살아갈지라도 가스전 같은 축복은 그만두고라도 오히려 난데없는 연단의 시간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 고난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행복의 조건을 마련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늘 아래 그 무엇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축복, 그게 바로 내 마음과 생각의 자유, 즉 영혼의 평안이다. 목련꽃 피는 행복한 4월을 기다리며 우리 모두 이같은 믿음의 복을 누릴 수 있기를 기원한다. * 2024.3.22. 글/최익제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