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개똥벌레
최용현(수필가)
“내 윤근이다. 니 내 알겠나? 요새 니는 직장생활하면서 글 쓴다 카데?”
점심시간이 끝나고 막 오후일과를 시작할 무렵에 받은 전화 한 통이 온통 내 마음을 산란하게 했다. 아직 진한 경상도 사투리가 배어 있는 걸 보면 고향친구 같은데, 도대체 누군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고향친구라면 초등학교 아니면 중고등학교 동창이다. 대학교 때 서울로 왔으니. 누군지 몰라 쩔쩔매는 내게 그는 또 걸쭉한 사투리를 섞어 욕지거리를 해댄다.
“야, 이 자슥아! 못가에 살던 장윤근이를 모른다는 말이가?”
한참을 헤매다가 드디어 나는 그놈의 정체를 알아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부산에 가서 취직을 했던, 어릴 때 우리 마을에 살다가 못가로 이사를 간 초등학교 동창생이라는 것을. 졸업하고 처음인, 거의 30여년 만에 들어보는 목소리였으니.
이제 사십대 후반에 들어선 내 나이 또래가 가까이 지내는 사람은 대개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귄 사람들이다. 필자 역시 이런 사람들의 모임을 몇 개 가지고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고등학교와 대학 동창들의 모임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초등학교 동창들의 모임을 갖고 있는 친구는 주변에 거의 없다.
졸업한 지 너무 오래된 탓에 대부분 소식이 끊긴 상태이고, 아니면 먹고살기에 바빠서 어릴 때의 친구를 찾을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이리라. 그간 세월이 너무 많이 흘러 특별히 기억나는 친구가 없다거나, 이제 새삼스럽게 그때의 동창들을 만난다 하더라도 워낙 세월이 많이 흘러 서로 서먹할 것 같다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필자가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사정이 좀 달랐다. 한 마을에서 함께 딱지치기와 구슬치기를 하며 자란 꼬마들이 그곳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6년 동안 남자아이 한 반 여자아이 한 반으로 편성되어 공부를 했다. ‘남녀칠세…’ 어쩌고 하던 시절이라 여학생과 짝꿍이 된 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사춘(思春)의 야릇한 추억마저 없을 수는 없다.
우리는 누구의 집에 논이 몇 마지기라는 것까지도 알 정도로 서로의 형편과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졸업 후에는 각기 뿔뿔이 흩어졌지만 모두 같은 고향 마을을 가지고 있고 지금도 명절 때면 찾아가는 고향이 모두 같은 곳이 아니던가.
나는 명절 때 고향에 가면 옛날 그 초등학교를 둘러보곤 한다. 지난 설에 고향에 갔을 때도 아이들을 데리고 그 학교에 가보았다. 교실이 모자라 우리가 흙으로 쌓아서 만든 토실(土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비가 새던 목조교사(校舍)는 시멘트 건물로 바뀌어있었다. 그때는 엄청나게 높았던 측백나무 울타리는 이제 가슴 아래로 내려다 보였고, 여름에 그늘을 만들어 주던 플라타너스 나무는 키가 몇 길은 더 자라 있었다.
또, 마냥 넓었던 운동장과 교문통은 왜 그리 좁아 보이는지, 그리고 학교 앞에서 1원짜리 어묵을 사먹던 구멍가게는 어느새 논이 되어 있었다. 5원 짜리 엄청나게 큰(?) 어묵을 사먹던 친구를 부럽게 바라보던 기억, 방과 후 논에 지천으로 뛰어다니던 메뚜기를 잡아서 도시락 반찬으로 싸가던 기억, 여름밤에 반딧불을 쫓아다니던 기억들….
그때 함께 들판에서 뛰놀며 꿈을 키우던 개똥벌레 동무들과, 우리를 지도해 주셨던 선생님들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우리가 지나온 강물은 이미 아스라이 저만큼 흘러가고 없었다.
그때는 중학교 입시경쟁이 치열하던 때이라 밤중에는 교실에 촛불을 켜놓고 공부를 했었다. 그러나 중학교에 들어간 친구들보다 중학교에 들어가지 못한 친구들이 훨씬 더 많았을 만큼 모두들 가정형편이 어려웠다. 그때는 하루 밥 세 끼 먹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당시 윤근이가 이렇게 묻던 것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너거는 하루에 밥 몇 끼 묵노?”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자신은 하루에 두 끼 밖에 먹지 못하기 때문에, 그나마 잘 사는 편이었던 내게 그렇게 물어보았던 것이다. 그 친구들이 학교에서 나오는 옥수수 죽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던 시절, 나는 가난한 아이들에게만 주던 옥수수 죽이 먹고 싶어서 그나마 하루 밥 세 끼 걱정 없이 살았던 우리 집 형편을 원망(?)하기도 했었다.
결국 윤근이는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바로 부산으로 가서 공장에 다니게 되었고, 들리는 소문으로는 지금은 부산에서 건축자재상을 운영하며 알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 윤근이가 갑자기 서울에 나타난 것이다. 초등학교 동창회를 한다면서.
“8월 첫 번째 일요일 오전 11시, 고향의 긴늪 솔밭 알제? 거기서 만나자. 부산과 대구에 있는 동창들도 모두 연락했다. 여자 동창들도 많이 올 끼다. 서울에 있는 동창들은 니가 책임지고 모두 데리고 와라. 알았제?”
나는 그러마고 대답을 했다. 사실은 몇 년 전에 수도권에 사는 초등학교 동창들 몇몇이 모여서 모임을 만들었고, 백방으로 수소문 끝에 6학년 때 헌신적으로 우리를 지도해 주셨던 은사님도 찾았다. 어느덧 초로(初老)에 접어든 선생님은 정년퇴직을 앞두고 계셨고, 옛날 신혼의 새색시이던 사모님은 세월의 무게를 가득히 이마에 담은 모습으로 수줍게 우리들을 반겨 주셨다.
그때부터 우리는 그 선생님을 모시고 지금까지 계속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다. 매년 스승의 날에는 우리들의 조그만 정성을 모아 선생님 부부에게 선물을 전해왔고, 봄과 가을에는 동창들이 모두 동부인(同夫人)하여 선생님 부부와 함께 서울 근교에서 산행(山行)을 해 온 지 벌써 수년이 되었다.
나는 서울에서 만나는 동창들에게 연락을 했고, 대부분이 만사를 제쳐놓고 참석하겠다는 확답을 해왔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30여 년, 그때의 동창들은 이제 모두 오십이 다 되었다. 그간 유명을 달리한 동창도 생겼고, 엄청 부자가 된 동창, 아직도 고향을 지키며 농사를 짓는 동창도 있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그때의 개똥벌레들, 남학생 한 반과 여학생 한 반 합쳐서 100명 남짓 되었던 동창생들이 6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을 모시고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이다.
벌써 마음이 설렌다. 그때 남학생들을 꼼짝 못하게 휘어잡던 여자반 반장 재순이, 뽀얀 얼굴에 양 갈래로 땋은 머리가 예뻤던 덕자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첫댓글 지난 1년 여 동안 계속된 콩트 연재를 마칩니다.
이곳에 연재한 콩트 72편은 졸저 '햄릿과 돈키호테'에 수록되어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4월부터는 이곳에 에세이를 연재할 예정입니다.
20세기(?)에 쓴 에세이입니다. 쓴지 좀 오래되었지만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수고많았읍니다. 콩트 연재를 읽는재미에 <방랑하는 마음>에 잡혀서<?> 이제껏 왔답니다.
에세이가 기대 되네요.
네, 감사합니다.
4월부터 동해 해파랑길 걷기에 도전합니다.
갈 때마다 1개 시군을 3박4일 정도로 걸을 계획입니다.
에세이는 틈틈이 올리겠습니다.
@월산처사 안써진다고 머리를 쥐어짜지 마시고 여행을 즐기세요.
자유스러운 곳에서 멋진글이 나올것같군요.
@리 치 맨 네, 그러겠습니다. 격려 감사합니다.
부산 이기대부터 출발하여 3포(미포 청사포 구덕포)를 거쳐 대변항, 송정으로 갑니다.
좋은글잘읽고갑니다 감사합니다 ~~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