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한글학회 이사장이며 국어학자인 권재일 님의 글을 퍼온 것입니다. -얄라)
가을이 깊어가면서 곧 10월 9일, 한글날이 다가옵니다. 한글날은 훈민정음 반포를 기념하는 날, 우리 글자 한글을 기리기 위하여 법으로 정한 자랑스러운 국경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한글날처럼 다른 나라에도 글자나 말을 기념하는 날이 있을까요?
실제로 세계 여러 나라와 국제기구에서는 언어와 글자의 소중함을 되새기기 위한 특별한 기념일을 제정하여 뜻깊게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러한 기념일을 소개하겠습니다.
유네스코 ‘세계 문해의 날’과 세종대왕 문해상
해마다 9월 8일은 1965년 유네스코에서 정한 ‘세계 문해의 날’입니다. 여기에서 문해란 글자를 읽고 쓸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실제 이 세상 곳곳에는 말은 있지만 글자가 없거나, 글자가 있더라도 글자를 읽지 못하는 사람이 아직 많습니다. 이에 유네스코는 모든 인류가 글을 통해 지식과 정보를 나눌 수 있도록 대대적인 문맹 퇴치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세계 문해의 날에는 이 세상에서 문맹 퇴치의 의미를 일깨우기 위해 유네스코가 다양한 행사를 펼칩니다.
특히 이날 유네스코에서는 세계 곳곳에서 문맹 퇴치에 이바지한 개인이나 단체를 격려하기 위해 1989년 ‘유네스코 세종대왕 문해상’(UNESCO King Sejong Literacy Prize)을 제정하여 1990년부터 시상해 오고 있습니다. 이 상은 훈민정음 창제를 통해 모든 백성들이 쉽게 글자생활을 할 수 있게 한 세종대왕의 숭고한 한글 창제 정신을 전 세계에 알리고자 대한민국 정부가 적극 지원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아시아대륙, 아프리카대륙, 아메리카대륙 등 세계 곳곳의 개인과 단체가 문맹 퇴치 공로로 유네스코 세종대왕 문해상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상을 받고 나서 대한민국 정부 초청으로 한국에 와서 한글날 기념식도 참가하고 다양한 한국의 문화를 체험하기도 합니다.
2026년 유네스코 세종대왕 문해상 시상식은 보름 전인 지난 9월 8일 멕시코 산후안차물라에서 열렸습니다. 수상 단체는 다음과 같습니다.
콜롬비아의 “비블로레드”
공공도서관 연계망을 기반으로 소외계층의 다언어 문해 교육과 모어의 보존 및 활성화를 지원하였습니다.
네덜란드의 “루투 재단”
학생들의 다양한 모어를 단순한 소통 수단이 아닌 중요한 학습 자원으로 인정하는 다언어·포용 교육 모형을 제시하였습니다.
나이지리아의 “와에르 워터스 자선 재단”
기초 문해력 가속화 사업을 통해 지역사회 소외 아동들에게 태양광 기반 문해 중심이라는 학습 공간을 제공하였습니다.
목숨 바쳐 모어를 지켜낸 2월 21일 ‘세계 모어의 날’
해마다 2월 21일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모어의 날’(International Mother Language Day)입니다. 세계 곳곳에서 언어와 문화 다양성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1952년 2월 21일 방글라데시에서 모어인 벵골어를 공용어로 채택하라는 시위를 벌이다 죽은 대학생 4명을 기리는 날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방글라데시의 인구는 약 1억 6천만 명으로 세계 8위의 인구 대국입니다. 벵골어 화자가 1억 천만 명으로 가장 많으며 공식언어입니다. 그런데 방글라데시는 서파키스탄과 분리되기 전에 원래 동파키스탄이었습니다. 그리고 벵골어는 파키스탄의 공식어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주민들은 크게 반발했고, 1952년 2월 21일에는 다카대학교 교정에서 벵골어를 파키스탄의 공식어로 함께 지정할 것을 요구하는 대규모 민중봉기가 일어났습니다. 이때 파키스탄 정부에서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하여 학생과 교수, 시민 등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동파키스탄 사람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정치적인 힘을 결집하여, 마침내 1971년 아홉 달에 걸친 독립전쟁 끝에 ‘방글라데시’로 독립을 이뤄냈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거쳐 독립한 방글라데시는 독립 직후부터 2월 21일을 언어 수호 운동 기념일인 국경일로 정했고, 이를 국제적으로 알리는 데에도 힘을 쏟았습니다. 그 결과 방글라데시 정부의 제안을 유네스코가 받아들여 1999년 11월 17일 제30차 정기총회에서 해마다 2월 21일을 세계 모어의 날로 공식 지정하였습니다.
프랑스어 사랑주간
우리나라에도 여러 가지 주간이 있습니다. 겨울철이 되면 불조심 강조주간이 있고, 봄이 되면 식목주간도 있습니다. 이처럼 프랑스에는 1995년에 제정한 ‘프랑스어 사랑주간’(Semaine de la langue française)이 있습니다. 3월 중순부터가 바로 그 주간입니다. 올해 2026년에는 3월 17일부터 20일까지였습니다. 전 세계 프랑스어 사용국과 언어 학습자들이 함께 참여합니다.
일주일 동안 프랑스어에 사랑을 표현하도록 하는 각종 행사를 엽니다. 프랑스어의 아름다움, 다양성, 역동성을 함께 나누는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집니다. 예를 들어, “나에게 열 단어를 말해줘”(Dis-moi dix mots)라는 행사가 있는데, 프랑스어 사랑을 위한 열 개 단어를 선정하여 뽑은 이유, 어원, 쓰임새에 대한 정보를 인터넷에 올려놓고, 이를 바탕으로 누구든지 직접 수필, 시, 노래, 이야기들을 짓게 하거나 단어 놀이에 참여하게 합니다.
영국사람들도 바른 영어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기로 이름나 있습니다. 공석 상에서 품위 있고 고상한 바른 영어를 사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프랑스 역시 이에 못지않습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바른 프랑스어 사용을 위한 교육이 철저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바른 어휘, 바른 문장을 구사하는 표현의 측면뿐만 아니라 생각한 내용을 구성하여 효과적으로 대화하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훌륭한 프랑스인을 만들기 위한 철저한 언어 교육에 힘씁니다.
여러 나라에서 언어를 기념하는 날
각국은 국어 능력이 국가 경쟁력의 기초라는 신념 아래 자국어의 위축을 극복하고자 자국어 보호 진흥에 힘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국어의 날을 정하여 기념하고 있습니다.
카자흐스탄은 9월 22일을, 헝가리는 11월 13일을 자국어의 날로 정하여 기념합니다.
독일은 9월 둘째 토요일을 독일어의 날로 정하여 기념합니다. 독일어의 자립성과 주체성을 보호하고 국민들에게 독일어의 중요성을 알리고 있습니다. 독일어연합회가 중심이 되어 독일어의 사회적 위치와 외래어로부터의 보호를 주장하면서 그와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매년 진행하며 시민들의 모어에 대한 관심을 높였습니다.
말레이시아는 해마다 10월을 국어의 달로 정하여 기념합니다. 전국적으로 언어 관련 행사를 벌립니다. 정부 기관, 모든 주 정부 기관, 금융 기관 및 민간 분야 등이 참여하는, 단일 규모로는 최대의 연례행사라 합니다.
한편 언어의 날은 아니지만 남아메리카의 볼리비아에서는 다민족과 다언어를 기념하는 날을 정해서 행사를 펼칩니다. 1월 22일이 바로 다민족국가 창립기념일입니다. 이날은 공휴일인데, 케추아어, 아이마라어를 비롯한 30여 언어와 민족을 높이 받드는 날입니다.
이처럼 세계 여러 나라가 자국어의 존립과 존엄을 지키기 위해 기념일을 정하고 온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다가오는 10월 9일 한글날, 우리는 한글이라는 위대한 문화유산을 가진 겨레로서 우리 말글에 대한 자긍심과 사랑을 한층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출전]
권재일 (2013), ≪세계 언어의 이모저모≫, (주)박이정, 295~30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