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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는 병
출전: 키에르케고르 『불안의 개념/죽음에 이르는 병/유혹자의 일기』,
강성위 옮김, 동서문화사, 1978년
제2편 절망은 죄다
제1장 절망은 죄다
죄란 ‘신 앞에서 또는 신의 관념을 갖고서 절망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아니기를 바라든 자기 자신이기를 바라든 그것은 죄이다.’ 그러므로 죄란 지나치게 심한 나약함, 또는 지나치게 심한 반항이다. 다시 말해 죄는 절망의 강한 정도를 나타낸다. 중심은 신 앞에, 또는 신의 관념을 갖고 있는 지점에 있다. (267)
A. 자기 의식의 여러 단계(신 앞에서라는 규정)
자기를 재는 기준은 언제나 인생의 단계에 따라 마주하고 있는 동질의 자기 바로 그 자체이다. 그리고 이것이 또 ‘잣대’의 정의가 되기도 한다. (…) 모든 사물을 재는 잣대는 그 사물과 동질인 것이다. 그리고 윤리적 목표는 질적으로 기준이 된다. 또 잣대와 목표는 사물의 본질과 동질의 것이다. (270)
그러므로 목표와 잣대는 어디까지나 목표이자 기준으로서 하나의 판결 방법이 되는 것이지, 인간이 그의 목표나 척도가 되는 것은 아니다. (270)
절망의 정도는 자기의식에 비례해 강해진다. 그리고 자기의 정도는 자기를 재는 잣대에 따라 강해진다. 신이 잣대가 될 경우에는 한없이 강하게 된다. 신의 관념이 증가함에 따라 그만큼 자기도 증가하고, 자기가 증가함에 따라 그만큼 신의 관념도 증가한다. 자기가 그런 단독 자기로서 현실적으로 신 앞에 있는 것을 의식할 때, 그때 자기는 무한한 자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자기가 신 앞에서 죄를 짓고 의식한다. (271)
죄란 신 앞에서 절망해 자기 자신이기를 바라거나, 또는 신 앞에서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 아니기를 바라는 것이다. (272)
육체의 죄는 천박한 자기 악의이다. (273)
죄는 절망이며 아울러 신 앞에 있다. (…) 중요한 것은 정의가 그물처럼 모든 형태를 포괄한다는 사실 뿐이다. (…) 신앙이란 자기가 자신이기를 바랄 때 신 안에 투명한 기초를 두는 것이다. (273~274)
죄의 반대는 덕이 아니라 신앙이다. 그러므로 <로마서> 14:23에는 신앙에 따르지 않은 모든 것은 최라고 씌어 있다. (274)
부론: 죄의 정의는 절망의 가능성까지도 지니고 있다. 절망에 대한 일반적 사변
죄와 신앙, 이 대립은 그리스도교다운 것이며, 그것은 그리스도교다운 것으로 모든 윤리적인 개념 규정을 개조하고 이를 더 깊이 있게 하는 것이다. 이 대립의 밑바닥에는 ‘신 앞에서’라는 결정적으로 그리스도교다운 것이 가로놓여 있다. 이 규정(죄와 신앙의 대립 관계)은 다시 불합리와 역설(신 앞에서의), 좌절의 가능성 등 그리스도교다운 결정적 표지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교다운 규정에서 그 표지가 지적되는 것은 더 중대한 일이다. 왜냐하면 (신 앞에서의) 죄절이야말로 (인간의 위험한) 사변에 대한 그리스도교다운 방벽이기 때문이다. (274)
그리스도교는 가르친다. 이 단독의 인간이, 즉 남자이건 여자이건, 하녀이건 대신이건, 상인이건 이발사이건, 학생이건 그 밖의 무엇이건 간에, 어쨌든 단독의 인간 저마다는 지금 신 앞에 있다고 가르친다. (…) 인간은 동시에 현실적으로 신 앞에 있으며 언제든 신과 대화를 나눌 수 있고 그 대화를 분명히 신이 들어줄 수 있다고 가르친다. 다시 말해 그 인간이 신과 함께 아주 편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어 있다고 가르친다. (277)
이 수난의 신 앞에서 감히 그것을 믿고 받아들일 만한 겸허한 용기를 지니지 못하는 자는 누구나 좌절한다. 왜 그는 좌절하는 것이냐 하면, 신이 그에게는 지나치게 높기 때문이다. 그의 머리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그것을 보면 유순한 마음이 들지 않고, 아울러 그것을 없앰으로써 그런 일을 미치광이처럼 만들고, 웃음거리로 삼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를 질식케 하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277)
도대체 좌절이란 무엇일까? 좌절이란 (숭고한 상대에 대한) 불행한 경탄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질투와 비슷하다. 그러나 그것은 시기하는 자 자신이 품는 질투이다. 더 엄밀히 말한다면, 더 짓궂게 자기 자신에게 맞서는 질투이다. 자연 그대로의 인간의 좁은 마음으로는, 신이 그에게 주고자 했던 특이한 일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좌절하는 것이다. (277)
그러므로 좌절하는 정도는, 인간이 (숭고한 상대에 대해) 경탄하는 일에 얼마만큼의 정열을 지니고 있느냐에 관련되어 있다. (277)
질투란 숨겨진 경탄이다. (…) 경탄은 행복한 자기 상실이며, 질투는 불행한 자기주장이다. (278)
B. 소크라테스가 내린 죄의 정의
죄는 무지이다. (…) 생각해 보면 고작 1개월 동안만이라도 모든 것에 대한 무지를 실존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참을 수 있는 사람이 각 세대에 걸쳐 도대체 몇 명이나 될 것인가. (280)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옳은 일과 좋은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이를 실행할 것이다. 옳은 일을 하지 않고 좋은 일을 이행하지 않는 것은, 옳은 일과 좋은 일이 무엇인가를 모르기 때문이다. 즉 부정을 저지르고 좋지 않은 일을 하는 것은 무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덕은 지知이다. 이것을 바꿔 말하면 무지는 부덕, 즉 죄인 것이다. (280, 아래 각주)
소크라테스다운 정의는 다음과 같이 내릴 수 있다. 누군가가 올바른 일을 하지 않을 경우, 그는 그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 만일 그가 그것을 진실로 알고 있었다면, 그것은 곧 그를 움직이게 하여 올바른 일을 하도록 이끌었을 것이며, (…) 그러므로 이제 무지는 죄와 같다. (286)
여기서 난해한 문제점은 (…) 어떤 일을 알게 된 시점에서부터 그것을 행하려는 순간으로 이르는 이행 과정에 관한 변증법적인 규정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이행과정에서 그리스도교다운 것이 시작된다. (…) 그리스도교다운 것은 죄가 의지 속에 있음이 나타나기까지, 즉 반항이라는 개념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리고 (…) 원죄라는 교의가 첨가된다. (286)
인간은 자기가 죄 속에 있는 것이므로 자기 자신의 힘과 자기 자신의 입으로 죄가 무엇인가를 확언할 수는 없다. 인간이 죄에 대해 어떻게 말하더라도 그들의 말은 모두 결국 죄에 대한 미봉책이자 변명이고, 무거운 죄를 가볍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교는 또 그와는 다른 방법으로, 즉 죄가 무엇인가를 인간에게 해명하려면 신의 계시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들어 시작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죄는 인간이 올바른 일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것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 다시 말해 인간이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289)
소크라테스는 올바른 일을 행하지 않는 자는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더 근본으로 거슬러 올라가 말한다. 그것은 그가 올바른 일을 이해하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며, 이것은 또 그가 올바른 일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라고. (…) 인간은 올바른 일을 이해함에도 부정한 일을 저지른다, 또는 올바른 일을 이해하고 있음에도 그것을 행하는 것을 게을리 한다고. 간단히 말해서 죄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인간에 대한 완전한 힐책이며 고소이다. 신이 고발자로서 인간에게 제기하는 고소장이다. (289)
그리스도교다운 것은 믿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념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의 속성은, 인간다운 것에 대한 인간의 능력이다. 그러나 믿는다는 것은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이다. (289)
따라서 그리스도교답게 해석하면, 죄는 인간의 의지 속에 있지 인식 속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의지의 타락은 개인의 의식을 넘어서 이루어진다. (289)
그래서 이곳에 또 좌절의 표지가 있다. 좌절의 가능성은, 죄가 무엇이며 죄가 어떻게 깊이 박혀 있는가를 인간에게 해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의 계시가 있어야 한다는 점에 있다. (…)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죄는 무지이다. 죄가 무엇인가에 대한 무지인 것이다. (290)
죄란 신이 내린 계시에 따라 죄의 문제가 해명된 다음, 신 앞에서 절망해 자기 자신이고자 하지 않는 것, 또는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것이다. (290)
C. 죄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것이다
나는 어디까지나 죄는 적극적인 것이라고 하는 그리스도교다운 것만을 고집한다. 그것은 개념적으로 하나하나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을 수밖에 없는 신앙, 역설로서이다. (…) 그래서 그리스도교다운 것은 사람이 신앙을 믿으려 하는가, 믿으려 하지 않는가에 위임되어야 한다는 점이 명백해진다. (293)
그러나 믿어야 할 뿐,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런 개념은 파악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이야말로 현대나 그리스도교계에 필요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그 필요한 것이란 그리스도교다운 것에 대한 약간은 소크라테스다운 무지이다. 그러나 특히 주의를 바라는 것은, 이것은 ‘약간은 소크라테스다운’ 무지라는 점이다. 소크라테스의 무지가 신에 대한 하나의 두려움이며 신을 받드는 일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자. 소크라테스의 무지가 ‘신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시초’라는 유대 철학을 그리스식으로 표현한 것임을 (…) 절대로 잊지 말았으면 한다. (294)
소크라테스는 바로 신에 대한 공경과 두려움이라는 마음에서 무지했었다는 것과, 그가 교회의 이단자로서 있는 힘을 다해 신과 인간 사이의 경계선에 서서 심판자로서 감시했다고 기억하자. 그가 신과 인간 사이의 질적 차이라는 깊은 연못이 언제까지나 존속함을 깨닫고, 신과 인간이 철학적이고 시적인 방법으로 하나가 되어 버리는 일이 없도록 감시하고 있었음을 우리는 결코 잊지 않아야 한다. 보라, 그러기에 또한 소크라테스는 무지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러기에 신은 소크라테스를 최대의 지자知者로 인정한 것이다. (294~295)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모든 그리스도교다운 것이 신앙에 대해서만 존재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소크라테스다운, 신을 두려워하는 무지는, 오히려 무지로써 신앙을 사변으로부터 지키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295)
죄는 신의 관념에 의해 (신 앞에서) 무한히 그 정도가 강해진 자기, 즉 하나의 행위로서의 죄에 대한 가장 큰 의식이 필요하다. 이것이 죄가 적극적임을 나타내는 것이며, 죄가 신 앞에 있다는 것이 죄를 보는 관점에서 적극적인 것이다. (295)
죄가 적극적인 것이라는 규정은 또 완전히 다른 뜻에서의 좌절의 가능성과 역설을 내포한다. 다시 말해 그 역설이란 속죄의 교설에서 오는 귀결로서, 속죄의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먼저 그리스도교가 나서서 인간의 지성으로는 결코 개념으로 파악할 수 없도록 죄를 적극적인 것(신앙의 구원이 필요한 것)으로 확고히 조정한다. 그리고 또한 그리스도교가, 인간의 지성으로는 절대로 개념으로 파악할 수 없는 방법으로 적극적인 것을 제거하는 것이다. (295~296)
A의 부론: 죄는 어떤 의미에서 매우 희귀한 것이 아닐까?
목사라 하면 물론 신앙이라야만 한다. 그럼 신앙인이란! 신앙인이란 물론 사랑하는 자이다. (299)
그런데 그대들은 또 사랑하는 자가 자기 사랑을 변호하고자 생각한다고 보겠는가. (…) 정말로 사랑하고 있는 자가 (…) 그의 사랑을 증명하거나 변호하거나 할 생각을 갖지 않는다는 것쯤은 뻔한 일이 아닌가. (…) 변호 따위를 하는 자는 사랑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단지 사랑하고 있다 말할 뿐이다. 불행히 아니면 요행히, 어리석게도 그는 사랑하고 있지 않은 것을 자기 자신이 폭로하고 있을 뿐이다. (300~301)
2장 죄의 계속
모든 죄는 상태에 따라 그 하나하나가 새로운 죄이며 이어지는 그 순간순간이 새로운 죄이다. (…) 영원은 단지 두 개의 공간만 갖고 있다. 신앙이냐, 죄이냐. 즉 “신앙에 의해 행하지 않으면 다 죄가 된다.” 뉘우칠 수 없는 죄는 그 하나하나가 새로운 죄이며 죄를 뉘우치지 않고 있는 순간순간이 새로운 죄이다. (301)
사변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죄는 소극적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관점에서 보면, 물론 죄는 적극적이며, 계속 증대하는 조정의 연속성을 자기 자신 속에서 전개해 가는 것이다. (302~303)
이 죄의 연속성이 증대한다는 법칙은 (…) 죄는 사람이 죄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보면 본디 죄 속에 있는 상태가 죄가 늘어나는 것인 동시에 새로운 죄를 짓는 것이다. (303)
죄 속에 있는 상태는 더 깊은 뜻에서의 본질적 죄로 보아야 할 것으로서, 개개의 죄는 죄의 반복된 연속이 아니라 어떤 죄의 계속된 표현인 것이다. (303)
죄 속에 머물러 있는 상태는 개개의 죄보다 더 나쁜 죄이며, 죄 그 자체이다. 이처럼 해석한다면 죄 속에 머물러 있는 상태는 죄의 계속이자 새로운 죄라고 할 수 있다. (303)
대부분의 인간은 자기에 관한 의식을 매우 적게 지니고 생활하고 있으므로 일관된 것에 관한 관념을 가질 수가 없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실존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 그러므로 그들 사이에선 늘 단지 개개의 일들, 개개의 선행, 개개의 죄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304)
정신의 규정 앞에서는, 모든 실존은 일관성을 지닌다. (…) 이런 인간은 일관되지 않는 것을 매우 두려워한다. (304)
그러므로 선善의 일관성 속에서 편히 지내던 신앙인은, 그 선을 자신의 생활 터전으로 삼고서 아무리 사소한 죄라도 그것을 끝없이 두려워하는 것이다. (305)
죄 속에 있는 상태는 그가 빠져 있던 바닥 깊숙이에다 그를 잡아맴으로써 일관성에 의해 그의 불신의 마음을 강하게 하는 것이다. 그 죄의 강해짐을 돕는 것은 개개의 새로운 죄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새로운 죄의 각각은 죄 속에 머물러 있던 상태의 표현에 지나지 않으며, 죄 속에 있는 상태야말로 본래의 죄이다. (306)
따라서 우리가 지금 문제로 삼으려는 ‘죄(일관성)의 계속’이란 경우 개개의 새로운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 속에 머물러 있는 상태를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죄 속에 머물러 있는 상태는 그 자신 속에서 죄의 정도를 강하게 하는 셈이다. 죄의 상태에 머물러 있음을 의식하면서 죄의 상태에 있게 되므로, 죄의 정도가 높아져가는 운동의 법칙은 여기에서도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내면으로 점점 의식의 강도를 높여가는 것이다. (306)
A. 자기의 죄에 절망하는 죄
죄와 절망은 같다. 그 정도가 강해진, 자기의 죄에 절망하는 새로운 죄이다. (306)
자기의 죄에 절망하는 것은, 죄가 그 자신에게 일관된다는 표현이거나 일관된 것으로 되려 한다는 표현이다. 이 죄는 선과는 아무런 관련도 가지려 하지 않는다. (306)
죄와 죄에 대한 절망 사이의 관계에서 그 죄의 정도를 강화하는 요소에 이름을 붙인다면, 죄를 부추기는 것은 선과의 절교, 죄에 관한 절망을 부추기는 것은 회개와의 절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07)
죄에 관한 절망이란 좀 더 깊숙이 가라앉음으로 해서 몸을 지탱해보려는 시도이다. (307)
그러나 그의 물론 죄에 관한 절망은 자기 자신의 공허함을 깨닫는 데서 오며, 자기가 생명의 양식을 조금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자기 자신이 자기의 관념조차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잘 자각하는 데서 온다. (308)
현재의 자랑(이) (…) 추억에 지는 것은 먼저 그처럼 오랫동안 자기를 도와서 유혹에 저항케 해준 것을 겸허하게 신에게 감사하는 것을 잊은 것이고, 그처럼 유혹에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이 자기의 힘을 훨씬 넘어선 것이라고 신과 자기 자신 앞에 솔직히 고백하는 것을 잊은 것이며, 또한 자기의 본디 모습을 겸허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잊은 것이다. (310)
B. 죄의 용서에 절망하는 죄(좌절)
죄의 용서에 대한 절망은 절망의 두 가지 정식 중 하나인데, 약함에서 비롯된 절망이나, 반항에서 비롯된 절망 중 하나로 환원될 수 있다. 그것은 좌절하여 믿을 만한 용기가 없는 약함에서 비롯된 절망이든지 좌절하여 믿으려 하지 않는 반항에서 비롯된 절망이든지 둘 중 하나이다. 단지 여기에서는 약함이 반항으로 나타냄으로서 다른 경우와는 반대가 된다. 다른 경우라면 약함이란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서 하지 않고 신에게 따르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신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반항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현실적으로 그런 자기 자신, 즉 죄인이고자 하기 않기 때문에, 죄의 용서를 필요 없는 것으로 여기려 하는 것이 또한 반항이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경우라면 반항이란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서 고집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그것이 약함이 됨으로써 절망하여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려 하는 동시에, 또한 죄의 용서 등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312)
그리스도를 향한 자기란, 신의 끝없는 양보에 따라 강도가 강해진 자기, 즉 신이 자기를 위해 탄생하고, 인간이 되며, 괴로움을 받고 죽었다는 사실 때문에 자기를 덮치는 헤아릴 수 없는 무게에 의해 좌절의 반동 정도가 강해진 자기이다. (…) 그리스도의 관념이 증대하면 할수록 그만큼 자기도 증대한다. (…) 그리스도가 잣대라 하는 것은 자기가 얼마나 거대한 실재성을 지니고 있는가의 표현이며, 신의 관점에서 확증된 표현이다. 신이 잣대로서 목표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가 최초의 변함없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자기는 변하며, 자기가 증대하면 할수록 그만큼 죄의 강도 또한 강화된다. (312~313)
죄란 신 앞에서의 절망을 말한다. 그 정도가 강화된 것이 죄에 관한 절망이었다. 그럼에도 지금 신은 죄의 용서, 즉 화해를 내세운다. 그런데 죄인은 절망한다. 그러므로 절망은 한층 심각하게 표현되고, 이 절망은 마침내 신과 어떤 식의 관련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런 관련이 생기는 것은 절망이 좀 더 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며, 한결 더 강하게 죄 속에 가라앉아 있기 때문이다. (313)
신이 죄를 용서하는 것에 절망하는 것은 죄이다. 유대인은 그리스도가 죄를 용서하려 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에게 좌절했고, 그것은 유대인으로서는 너무도 마땅한 일이었다. (315)
그러나 죄의 용서에 그리스도교게는 어떤 상태에 있는가? 확실히 그리스도교계의 상태는 사실상 죄의 용서에 절망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교계의 그런 절망 상태가 그런 상태로서 특별히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그리스도교계가 퇴보하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죄의 의식에조차도 아직 이르지 않았다. (317)
그리스도교계의 근본 불행은 그리스도교인이다. (317)
요컨대 신은 곧 사람이라는 교설이 그리스도교계를 몰염치한 꼴로 만든 것이다. 마치 신이 지나치게 약해 보일 정도이다. 신으로서는 마음씨 좋게도 너무도 큰 양보를 한 탓에 망은으로 보답을 받듯, 당치않은 보복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신은 곧 사람이라는 교설을 만들어낸 것은 신이다. (319)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처음부터 몸을 지켜온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죄의 교설로부터 시작된다. 죄라는 범주의 속성은 단독성이다. 죄는 사변적으로는 결코 사유될 수 없다. 다시 말해 단독의 인간, 즉 개인은 개념 아래에 있기 때문에, 사람은 어떤 한 인간을 직접 사유할 수는 없고 오직 인간이라는 개념을 통해 사유할 수 있을 뿐이다. (…) 사람은 (…) 죄를 사유할 수는 있다. (…) 그러나 또한 단독의 죄인을 사유할 수는 없다. (320)
죄(신의 계시로 구원받는 죄)는 결코 사유할 수 없는 것(…) 죄는 개념으로부터 떠난 것 (321)
죄에는 윤리적인 것이 관계되어 있음을 사변은 주의하지 않는다. (…) 윤리적인 것은, 현실을 추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 속에 깊숙이 파고든 다음에, 본질적으로 사변이 간과하고 경멸하는 단독성의 범주로써 현실을 조작하는 것(…) 그래서 이 경우의 죄는 개별자적 규정이다. 사람은 스스로 이런 단독의 죄인인데, 단독의 죄인이라는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인 양 여겨 가벼이 행동하는 것은 새로운 죄이다. (…) 죄의 심각, 또는 엄숙함은 네가 죄인이고 또 내가 죄인이라는 식으로 개별자의 관점에서 본 죄의 현실성이다. 사변의 관점으로는 개별자는 무시당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 개별자의 죄에 관한 사변적인 말은 경박할 수밖에 없다. 죄의 변증법(개별자적)은 사변의 변증법(전체 개념적)과는 정반대로 나가는 것이다. (321)
여기에서 그리스도교는 죄의 교설과 함께 시작되어 인간 저마다에게 개입한다. 신은 곧 사람이라는 교설, 신과 인간 사이의 동일성의 교설을 푼 것은 물론 그리스도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뻔뻔스럽고 건방지게 강제로 책임을 지우는 것을 크게 증오한다. (321~322)
이들 모든 추상물(개념적ㆍ추상적 죄)은 신 앞에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단독의 인간들(죄인들)만이 그리스도에게, 신 앞에 살아 있는 것이다. (…) 개별자는 전체 개념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개념 아래에 한 구성원으로서 속해 있다. 신의 개념은 모든 것을 포괄한다. (…) 신은 현실 그 자체와 모든 개별자를 하나하나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다(포괄하고 있다). (322~323)
인간이, 즉 인간 각자가 죄인이고, 그것도 ‘신 앞에서’ 죄인이라는 점에서만큼 인간이 신과 구별되는 점은 없다. 그러나 그 때문에 사실은 서로 대립하는 신과 인간 개인은 이중의 뜻으로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즉, 서로 대립하는 것은 결부된다(떨어지지 않도록 꼭 붙게 된다). 그들은 서로 떨어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처럼 결부되어 있기에 이 둘의 차이는 바야흐로 두드러진다. (323)
보통 인간에 관한 모든 술어 중에서도 죄는, 부정의 길에서나 탁월의 길에서나 도저히 신의 술어가 될 수 없는 유일한 것이다. (323)
죄인으로서의 인간은 질質이라는 무한정한 심연으로써 신과 단절되어 있다. (…) 신이 인간을 용서할 경우에도 신은 마찬가지로 질이라는 무한정한 심연으로써 인간과 단절되어 있다. (…) 죄를 용서한다는 것에 대해서만은 인간은 영원히 신과 동등할 수 없다. (323~324)
이렇게 하여 여기에 인간의 좌절(즉, 죄의 용서에 절망하는 죄)이 극도로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바로 신과 인간 사이의 동일성을 가르치는 교설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므로 좌절은 주체성 있는 단독의 인간으로 규정하는 것을 크게 결정하는 것이다. 물론 좌절한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좌절을 생각하는 일은 가능하다. (324)
따라서 좌절은 개별자와 관련된다. 그런 점에서, 즉 인간 저마다를 개별자나 단독의 죄인으로 만드는 데서 그리스도교는 시작된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는 천지가 찾아낼 수 있는 모든 좌절의 가능성을 한 곳에 집중시킨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개별자 저마다에게 ‘너는 믿을지어다, 즉 너는 좌절하든지 믿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밖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덧붙일 말도 없다. (324)
죄의 용서에 절망하는 것은 좌절이다. 그리고 좌절이란 절망의 정도가 강화된 것이다. (…) 주로 좌절은 (아직 좌절의 가능성인 단계에 비하여) 오히려 죄로 꼽히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런 죄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으며, 아직 좌절되지 않은 죄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좌절이 죄의 정도가 진전된 것이라고 여겨지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에 어울리는 죄는 신앙과 맞부딪히는 것이 아니라 덕과 맞부딪히기 때문이다. (326~327)
C. 그리스도교를 적극적으로 폐기하고, 그것을 허위라고 말하는 죄
이것은 성령에 적극적으로(역설적ㆍ교설적ㆍ신앙적으로) 반反하는 죄이다. 여기서 자기는 가장 절망적으로 그 정도가 강화된 상태에 있다. 자기는 그리스도교 전체를 내동댕이칠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를 거짓이고 허위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327)
신의 용서에 관한 절망은 신의 자비로운 의견에 대한 인간적 태도의 하나인데, 이 절망하는 죄는 완전히 도피하는 것도, 단순히 방어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교를 허위나 거짓인 것으로 폐기하려는 죄로서 공격하는 싸움인 것이다. (327)
성령에 거역하는 죄는 좌절의 적극적인 형태이다. 그리스도교의 교설은 신은 곧 사람이라는 교설이며 신과 인간 사이의 친근성에 대한 교설이기는 하지만, 주의할 것은 거기에는 좌절의 가능성이 인간을 견제해, 인간이 신에게 지나치게 가까워지지 않도록 신의 몸을 지키기 위한 보증이 되는 것이다. (328)
그리스도교가 가르치는 바에 따르면, 인간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신 앞에 다다를 수 있고 신 앞에 다다를 수 있도록 허용되며, 또 신 앞에 다다라야 하는데, (…) 신과 인간이란, 그 사이에 끝없는 질質의 차이가 있는 두 가지의 다른 질이다. 이 차이를 간과하는 모든 교설은 인간적으로 말하면 광기이고, 신적으로 해석하면 신을 모독하는 것이다. 이교에서는 인간이 신을 인간으로 만들지만(사람이 곧 신), 그리스도교에서는 신이 스스로를 인간으로 만들었다(신이 곧 사람). 그러나 신은 자비로운 은총의 무한한 사랑 속에서 하나의 조건을 내건다. 신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신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라는 말,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슬픔이다. 신은 스스로를 천한 자로 만들고, 하인의 모습이 되어 괴로움을 받고, 인간을 위해 죽을 수 있으며, 모든 사람을 내게로 오라고 불러들이고, 그 생애의 매일매일을, 그리고 모든 시간 아니 생명까지도 희생할 수 있다. 그러나 좌절의 가능성, 이것은 신조차 없앨 수 없다. 유일한 사랑의 행위이다! 아,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의 슬픔이다! 그런데 신 자신은 그 좌절의 가능성(죄)을 실천할 수 없다. 그것은 다른 뜻으로 보면 신이 바라지 않는 것이기도 하고, 신이 바랄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이 인간들처럼 죄를 짓기를 바라서 인간과 같아졌다 하더라도, 사랑의 행위로 말미암아 인간들이 오히려 비참해질지도 모를 결과를 막는 것은 할 수 없다. (328~329)
인간의 가장 큰 비참함, 죄보다도 더 큰 비참함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앞에서 좌절하여 그 좌절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그 좌절은 그리스도도 그것을 불가능하도록 막을 수 없으며, ‘사랑’도 그것을 불가능하게 할 수 없다. (…) 그로서는 그 이상의 것을 할 수 없다. 그리스도는 더없는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인간을 전례 없을 정도로 비참하게 한다. 아,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의 모순이다! 그럼에도 그는 사랑 때문에 그 사랑의 행위를 일부러 멈출 수는 없다. 아, 그렇기에 또 인간은 신이 사랑을 중지했으면 결코 그렇게는 되지 않았을 비참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329)
신과 인간 사이에 무한한 질質의 차이가 있다는 점, 이것이 없앨 수 없는 좌절의 가능성이다. 사랑 때문에 신은 스스로 인간이 된다. (…) 신은 인간으로서 천한 하인의 모습을 취한다. 신은 사람이 누구든 자기를 제거자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는 동시에, 또 사람이 신 앞에 가까이 가게 할 수 있는 것을 인간적 명성이나 사람들 사이에 떨치는 명성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비천한 인간이란 어떤 것인지를 드러내 준다. (331)
그러나 좌절의 가능성이 (…) 신과 가장 가까웠던 인간과의 사이에 엄연히 놓여 있다. 다시 말해 좌절하지 않은 자는 믿고 예배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배는 신앙의 표현으로서, 예배하는 자와 예배받는 자 사이에 무한히 입을 벌린 질이라는 심연이 엄연히 놓여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하고 있어도, 짐짓 좌절의 가능성이 변증법적 예배의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332)
그러나 지금 여기에서 문제 삼는 좌절은 적극적인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교를 허위와 거짓말이라고 언명하고, 또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똑같이 언명하는 것이다. (333)
좌절의 가장 낮은 형태, 인간적으로 말해서 가장 천진한 형태는,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문제를 결정하지 않은 상태로 두고 그 문제에 대해 일부러 아무런 판단을 내리지 않는 것이다. 더욱이 신앙도 갖지 않고 판단도 내리지 않는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것이 좌절의 한 형태인 것을 대부분의 사람은 알아채지 못한다. (…) 그리스도교가 당신에게 전달되었다는 사실은, 바로 당신이 그리스도에 대해 하나의 견해를 지녀야 함을 뜻한다. 그리스도 자신이, 다시 말해 그리스도가 현재 있다는 것과 또 그리스도가 현실적으로 존재했었다는 것, 바로 그것이 온 인류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대사인 것이다. 그리스도가 당신에게 말을 전했을 때, 그것에 대해 나는 아무런 의견도 가질 생각이 없다고 하는 것은 좌절인 것이다. (333~334)
다시 말해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그리스도가 인간에게 의견을 가지도록 요구할 권리를 갖고 있음을 부인하는 것이다. (334)
신이 스스로를 탄생케 하여 스스로 인간이 된다는 것은, (…) 그것은 뭔가 해봐야겠다는 생각에서이며, (…)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것은 인간 세상에서의 엄숙한 사실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또 인간 각자가 그것(즉 신이 인간으로 된 것)에 대해 의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이 엄숙한 사실 중에서도 엄숙한 문제이다. (334)
좌절의 제2형태는 부정적이되 수동적이다. 이런 형태의 좌절은 그리스도에게 부정적이지만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관한 일을 내버려 두고 생활에만 몰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또 그는 신앙을 가질 수도 없기에 다만 같은 한 점, 즉 역설을 언제까지나 바라보고 있다. 그러는 한에서 그것은 어쨌든 그리스도교를 존경은 하고 있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이 문제가 정말 무엇보다도 중대한 문제임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이런 형태의 좌절을 하는 자는 그림자처럼 살고 있다. (335)
좌절의 마지막 형태는, (…) 적극적인 좌절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교를 허위와 거짓이라고 주장하고(그가 현실로 존재한다는 것과 그가 그 말대로 존재한 분이라는 것을) 그리스도를 가현설假現說의 관점에서든지, 또는 합리주의 관점에서 부인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는 현실적으로 단독의 인간이 되지는 않고, 다만 가상적인 존재가 되거나 아니면 그냥 가상적 단독 인간이 되거나 둘 중 하나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가현설이라는 관점에 따라 현실이라는 것을 요구하려 들지 않는 시 또는 신화가 되거나, 아니면 합리주의라는 관점에 따라 신이라는 것을 요구하려 들지 않는 현실성 중 하나가 되고 만다. 이렇게 역설적으로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에는 으레 죄, 죄에 대한 용서 등의 모든 그리스도교다운 것을 부인하는 것도 포함된다. (335~336)
좌절의 이런 형태는 성령을 거스르는 죄이다. (…) 이런 좌절은 죄의 강도가 가장 강화된 것이지만, 대부분 그것을 간과하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죄와 신앙을 대립적 관계로 여기지 않고 죄와 덕을 대립 관계로 여기기 때문이다.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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