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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 보조자료 2016.02.22
노경 구상
. . . . . .
이제 초목(초목)의 잎새나 꽃처럼
계절마다 피고 스러지던
무상(무상)한 꿈에서 깨어나
죽음을 넘어 피안(피안)에다 피울
찬란하고도 불멸(불멸)하는 꿈을 껴안고
백금(백금)같이 빛나는 노년(노년)을 살자.
* 도덕암
칠곡군 동명면 한티로 260
대한불교 조계종 전통사찰 148호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려 광종19년(968) 혜거국사(惠居國師)가 중수하고 칠성암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고려 광종이 혜거국사를 왕사로 모셔가기 위해 도덕암에 3일동안 머무르며 마신 약수로 인해 속병을 모두 나았다는 일화를 간직한 '어정수'가 경내에 전해오고 있는 조계종 사찰. 그러나 임란(壬亂)의 병화(兵火)로 광해군12년(1620)에 중수하고 효종4년(1653)에는 기성대사(箕城大師)가 중수하였으며 철종4년(1853)에 다시 중수하면서 도덕암이라 개명하였다 한다. 그 이후 방치되어 오던 것을 1970년 나한전(羅漢殿 : 나한상을 모셔놓은 불전, 응진전)을 중수하면서 요사채(寮舍 : 절에 있는 승려들이 거처하는 집) 1동(棟)을 건립하고 관음전(觀音殿 : 관음보살을 안치한 불전, 원통전, 원통보전)을 중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송림사에서 동남으로 4㎞정도의 도덕산 산허리에 조성하였다. 입구 우측에 요사채가 있고 정면에 ㄱ字型 관음전이 있다. 관음전 뒤 20척(尺)정도 가파른 곳에 나한전, 산령각(山靈閣), 자응전(慈應殿), 요사채가 자리잡고 있다.
- 도덕암 나한전내 제상
문화재자료 제509호
도덕암 나한전 내 제상(道德庵羅漢殿內諸像.문화재자료 제509호.2006년 6월 29일.동명면 구덕리 20- 5)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 말사인 도덕암은 신라 눌지(訥祗) 18년(435) 에 창건 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사찰로서,인조 10년(1632) 에 훈장선사(訓將禪師) 가 나 한전(羅漢殿) 내 16구 나한상 및 사자입상 2구가 각각 배치되어 봉안하고 있으며,나한전 안에 불단이 있고 그 위에 본존은 결가부좌하고 있으나,좌우의 보살상은 모두 두 손을 무릎 위에 놓은 형사이며 의상(倚像) 인 점이 특이하다. 향우(向右) 협시보살(脇侍菩薩) 제화가라보살이며,향좌(向左) 협시보살은 미륵보살로 전해지 고 있다.삼존불은 모두 두발을 제외한 전신(전身) 이 도금되어 있다.나한전(羅漢殿) 내 석가삼존불을 중심으로 좌 · 우측에 나한좌상 8구 및 사자입상(使者立像) 은 직부사자이며,향좌 입상은 감재사자로 알려져 있다.나한 및 입상은 모두 전신(全身) 에 백색으로 칠해져 있으며,눈,눈썹,입,수염은 청색,녹색 등으 로 그려져 있고,들고 있는 지물 및 안고 잇는 봉황,막대기,호랑이,수박이 든 소반,책 등이 다양하며,이에 따른 표현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사적기(寺蹟記)에 보면 인조 10년(1632)에 훈장선사(訓奬禪師가 나한전(羅漢殿)을 건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나한전 내 제상(諸像)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선명도가 있는 것으로 보아 문화재자료로 지정하게 되었다.
* 기성리 삼층석탑
칠곡군 동명면 기성리 1028
보물 제510호
이중기단(二重基壇)위에 건립된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3층석탑으로 높이는 5.2m이다. 일명 법성탑이라고도 하는 이 탑은 송림사, 가산산성, 팔공산으로 갈라지는 기성삼거리 주변 밭 가운데에 서있는데 옛날에 법성사(法聖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탑은 8개의 장방형 돌로 받친 가로 5m, 세로 4m의 하층 기단 위에 가로 1.97m, 세로 1.97m의 상층기단이 놓여 있고 그 위에 탑신이 세워져 전체 높이가 약 5.2m에 달하고 있다.
전체적인 형태로 볼 때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형태이지만 다른 탑에 비해 특징이 있는 것은 각 층마다 하층부분만 5개의 계단을 이루었고 화강암으로 된 2중 기단 중에 상층기단에는 우주(隅柱 : 모서리 기둥식)나 탱주(撑柱 : 가운데 기둥식)가 없으며 4면(1면은 1971년 복원시 만듦)에 커다란 안상이 새겨진 것이 특징이다.
원래는 5층탑이었다고 하나 오랜 세월동안 방치되어 파괴되었으며 1971년 도굴로 인하여 완전히 헐리게 되었다. 이로 인해 2층 옥개상면(屋蓋 : 탑신석위에 놓는 지붕같이 생긴 돌)에 사리공(사리를 장치하기 위하여 탑재에 파놓은 구멍)이 발견되었는데 옥개 가운데 정사각형의 홈이 파져 있고 그 둘레에 4개의 직사각형의 홈이 파져 있어서 이 사리공이 일반 사리공과 다른 특수구조로 되어있음이 알려지게 되었으며 1971년 국비지원으로 복원하게 되었는데 3층까지는 그대로의 형태를 갖추긴 했으나 위2층 부분을 잃어 완전한 원형은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탑은 사찰 경내지에 있어 사찰과 조화를 이루며 세워져 있어야 하나 이 3층석탑은 법성사가 없어진 후 현재 밭 가운데 서 있다.
* 한티순교성지
칠곡군 동명면 한티로1길 69
병인박해 때 조 가롤로를 비롯하여 약 37명이 순교한 해발 600m 깊은 산중에 1815년 을해박해 때부터 형성된 천주교 교우촌.
현재까지 확인된 37기의 순교자 묘는 오솔길을 따라 참배할 수 있도록 조성되어 있으며, 깊은 고요 가운데 머물 수 있는 피정의 집도 갖추어져 있다
원래 '큰 재'를 말하며 대구, 칠곡, 군위 경계의 오지로, 캐톨릭 신자들의 최종 피난처였다.
캐톨릭 신자들은, 신해사옥(1791, 정조15), 신유사옥(1801, 순조원년)을 비롯하여 을해박해(1815, 순조 115), 정해박해(1827, 순조 27), 기해사옥(1839, 헌종 5) 등으로 끊임없이 탄압 받았다. 을해박해 때는 경상도에서, 정해박해 때는 전라도에서 수백명의 신도가 수난을 당하였다.
신도들은 대구 인근의 산간벽지로 피해, 화전을 일구고 옹기와 숯을 구우며 한데 모여 살았는데, 이때 정착한 곳이 바로 한티였다. 그러나 이곳에 정착한 후에도 수차례나 포졸들의 습격을 받고 많은 신도들이 순교하게 되어, 오늘날 한티성지로 일컫게 된 것이다. 이러한 천주교 교우촌으로는, 노래산(청송군 안덕면), 머루산(영양군 석보면) 등이 있으며, 우리나라 천주교의 발상지 천진암 성지(경기도 광주), 최초의 신부 김대건이 묻힌 미리내 성지(경기도 안성), 김신부가 태어난 솔뫼성지(충남 당진)와 함께 한티는 대표적인 천주교 성지로 꼽히고 있다. 최근에 대구 대교구에서 성지 개발사업을 펴, 도로가 확장되고, 1991. 9.25에는 대형 "십자고각"(높이 14m)과 "피정의 집"(지하 2층, 지상 5층)을 준공하였다.
한티성지는 신나무골과 더불어 순교사를 되살리고 피정(고요한 곳으로 물러남) 연수를 위한 순례지로서 새롭게 각광 받고 있다.
* 가산산성
칠곡군 가산면 가산리 산98-1번지외 11필지
사적 제216호
조선시대의 석축산성으로 주변은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설정되어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잇따른 외침에 대비하기 위해 가산 요새에 삼중으로 축성된, 수려한 산세의 호국의 고장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유적이다. 국가지정 사적 제216호(1971. 3.26)로 지정되었으며 포곡식 석성, 전략성구조이다. 가산의 해발 901.6m에서 산골짜기를 에워싸 해발 600m에 이르도록 내·중·외성을 축조하였는데, 현재 사문지(四門址)와 암문(暗門)·수구문(水口門)·건물지 등의 시설이 남아있다. 처음에는 인조17∼18년(1640)에 관찰사 이명웅(李命雄)의 요청으로 축성되기 시작하였으며 26년(1648)중수되었고 성은 석성으로 둘레는 4,710보(步)이고 여장(女墻)1,887첩(堞)이 설치되었으며, 동·서·북문의 삼문과 8개소의 암문, 연못9개소, 우물2개와 장대인 진남대(鎭南臺)·창고 7개소, 빙고(氷庫)하나, 사찰 4개 등이 설치되었다. 성이 완성되면서 칠곡도호부가 되고 군위, 의흥, 하양, 신녕의 고을이 이 산성에 예속되었다.
외성은 숙종26∼27년(1701)에 석축으로 축조된 것으로 둘레는 3,754보이고 1,890첩의 여장을 두었으며 성문은 남쪽에 만들고 북·동·남쪽에 암문을 설치하였다. 중성은 영조17년(1741)에 관찰사 정익하(鄭益河)의 요청으로 길이 602보이고 402첩의 여장과 중성문이 만들어졌다.
산성 별장이 거처하는 위려각(衛藜閣)을 비롯하여 성안에는 객사(客舍)인 인화관(人和館)을 비롯한 관아와 군관청, 군기고, 보루(堡樓), 포루(砲樓), 장대(將臺)가 설치되어 행정적이라기 보다는 방어를 위한 군사시설이 압도적인 군사용 진성(鎭城)의 면모를 갖추었다.
중요시설은 내성안에 있으며 중성에는 이 산성에 입보(立保)할 예정된 네 고을의 창고가 있어 비축미와 군기(軍器)를 보관하여 유사시에 사용하게 하였다. 성은 외성 남문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성의 주변에는 송림사를 비롯한 신라시대의 절터가 많이 있다.
1954년의 집중 폭우로 남문에 홍예(虹霓)는 반파되고 수구문과 성벽 일부가 유실되었다. 그밖의 성벽과 암문은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 지세는 천주사지(天柱寺址)로부터 급경사를 이루어 가파른데 약간 평탄해진다. 성문은 외성의 남문이 홍예문이며, 다른 성문들은 앞쪽만 홍예이고 뒤쪽을 평거식(平据式)으로 만든 특수한 문의 구조로 되어있다.
남보루(南堡樓)는 성에서 약간 벗어나 있는데 여기를 보호하기 위하여 따로 성벽을 현대의 교통호(交通壕)처럼 설비한 용도(甬道)가 있어서 조선후기의 축성기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인조실록)에 의하면 인조17년 4월에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한 이명웅이 사조(辭朝 왕에게 부임인사)때 '경상도 60州 산성중에 믿을 만한 곳은 진주, 금오, 천생의 3성뿐이므로 적지에 축성할 것'을 상계하여 허락을 받고 도임후 천생산성은 형세가 험하기는 하나 좁고 천정이 없으므로 금오산성을 가축하는 한편, 최적지인 팔거현의 가산에 축성할 것을 계청하고 그 해 9월부터 인근 고을의 남정 10만여명을 징발하여 성을 쌓기 시작하여 이듬해(1640) 4월에 일단 내성을 준공하게 되나 막대한 인력과 자금의 소요 및 어려운 공사로 인한 사상자 발생으로 민심이 동요되어 이 관찰사는 인조19년7월에 타직으로 이임되고 그후 새로 부임한 관찰사 이만과 칠곡도호부사 이지성에 의해 인조26년(1648) 내성이 중수되었으며 외성은 숙종26년(1700) 관찰사 이세재에 의해 중성은 영조17년(1741) 관찰사 정익하의 노력으로 축조되었으니 거의 100년에 걸친 대공사였다.
산정엔 나직한 7개의 봉으로 둘러싸인 平頂을 이루어 사방으로 7개의 곡간을 형성하고 있으며 서북쪽으로 임란시 곽재우 장군이 왜병을 물리친 천생산성(구미시 지방기념물제12호)과 6.25전쟁당시 대구사수의 격전지였던 유학산에 연결되어 산성을 축조할만한 충분한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다.
산하는 동래-밀양-대구-상주-충주-서울을 잇는 상경로의 요충지로서 임란때에는 명의 원군 5천여명이 진주하였으며 선조26년(1593)에는 경상감영을 설치하여 선조29년 달성으로 감영을 옮기기까지 도정을 관장하였다. 그후 산성을 축조하여 산성안에 칠곡도호부를 설치하기도 했다.
보통 읍성은 나성이나 가산산성은 내외중성으로 된 전략적 성곽으로 축조되었으며 인조18년(1640) 산성이 축조되면서 5월에는 경산부(星州)에 속했던 팔거현이 칠곡도호부로 승격되고 이곳 산성안에 칠곡도호부(府使:武三品)를 설치하여 진관으로 군위, 의흥, 신녕, 하양의 4현을 관장케 하여 이후 180년간 읍치(부의 治所)를 산성안에 두었으며 순조12년(1812)에는 가산산성안에 별장(종구품, 전력부위, 지방의 산성·나루·보루·소도등을 수비하는 무관)을 두고 『가산진』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칠곡도호부는 관아가 험준한 산정에 있게 된 후 읍민들은 불편한 점이 많아 이읍을 바랐으며 순조19년(1819) 왕명에 의하여 평지인 팔구지(현 칠곡초등학교)로 읍치를 옮기고 이후로 가산산성의 수성은 가산진의 별장이 담당하였다.
성내의 사방에 포루, 장대, 남창, 군창, 영창, 군기창, 장적고 등의 창고와 문루가 있었다고 하나 남아있는 곳은 없으며 다만, 남창마을과 북창마을의 명칭에서 남창지와 외북창지를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내, 외, 중성과 동문, 동암문은 보존되고 있다. 또한 산성내에는 보국사, 천주사등 많은 사찰이 건립되어 승장을 뽑고 승려들을 모아 궁술을 연습시켰다고 하나 현재 일부 사지의 주위에 당간지주만 남아있으며 「장군정(將軍井)」이라고 하여 장군들이 마셨다고 하는 우물이 남아 있어 산성내에 많은 병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54. 7.26(음6.27)폭우와 산사태로 外城의 정문인 남문성벽과 수구문이 붕괴되었는데 이때 외성안에 있던 남창마을(진남문 위쪽 약 50호 200명)이 매몰(35호, 24명사망)되어 미군부대의 지원으로 남원2리에 새로운 마을(新興:새마을, 新南倉:새남창)을 조성, 이주하였다.
1977년부터 1980년까지 총 1억7천5백여만원을 투입하여 남문루 및 남문의 성곽과 수구문, 女墻(여장:성위에 낮게 쌓은 담. 활이나 총을 쏘기 위한 타구가 있다)185m, 중문등을 복원, 중수하였으며 1992년에는 4천3백만원을 투입하여 중문을 보수하였고 1999년에는 산성 진남문여장, 동문 해체보수, 동문 성곽 99.5m를 2억5천8백만원으로 보수하였다.
* 백선엽장군전적비
칠곡군 동명면 금암리 동명초등학교내
다부동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큰 공헌을 한 백선엽장군을 기념하기 위해 동명초등학교 교정에 세운 비석.
6.25 당시 낙동강 전투에서 지략과 용전으로 유학산 일대를 공격해온 적을 섬멸하고 부산 교두보를 확보한 국군 보병 제1사단장인 백선엽 장군의 영세불멸의 전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 다부동전승비
칠곡군 가산면 금화리 125-4번지
1950년 8월에 벌어진 다부동전투에 참여한 미 보병 제27연대 대원들과 국군 제1사단 대원들의 무공을 기리는 기념비.
韓國戰爭 최초의 대전차전을 승리로 이끌어 다부동전선의 붕괴위기를 막아낸 미 제 27연대(연대장 John H. Michaelis대령)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1971년 2군사령부가 당시의 격전지에 건립하였다. 볼링액리 전투로 세계전사에 기록될만큼 미군의 포탄공격은 볼링핀을 쓰러뜨릴 때처럼 정확하고 맹렬하였다.
* 충혼탑
칠곡군 왜관읍 삼청리 산 15-10번지
6.25전쟁 때 전사한 칠곡 출신 군경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탑.
6.25전쟁 당시 순직한 호국영령을 추모하고자 건립되었으며, 칠곡출신 전몰군경 540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 순국경찰위령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산 63-4번지(애국동산내)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벌어진 10.1폭동 사건과 6.25전쟁 때 순국한 칠곡경찰서 소속 경찰관 22명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위령비.
10.1폭동사건과 6.25전쟁중 희생된 경찰관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1988년 칠곡군민이 건립하였다.
1946월 10월 대구를 위시하여 좌익 폭도들의 관공서 파괴 및 탈취행위가 도내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을 즈음, 10월 3일 왜관읍에서도 폭도들이 경찰관서를 기습해와 이를 진압하던 중 순직한 경찰관과 6.25 사변 중 전사한 경찰관의 넋을 위로하고자 1952년 11월 순직경찰관 영세불망비를 건립하였으나 영령들의 큰 공훈에 비해 비가 너무 초라해 기존 순국경찰관영세불망비 자리에 순국경찰관위령비를 건립하였다.
* 왜관지구전승비 - 낙동강전투의 승리를 기념하는 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산 63-4번지(애국동산내)
6.25 전쟁 당시 1950년 8월초 이후 가장 치열했던 낙동강 방어선의 주요 전투인 왜관지구 전투에서 미국 제1기갑사단이 북한군의 낙동강 도하작전을 저지한 전공을 기념하고 이 전투에서 전사한 전몰장병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1959년 3월 1일에 육군 제1205 건설공병단에서 건립하였다.
* 왜관지구전적기념관
칠곡군 석적읍 중지리 산 33번지
6.25 전쟁때 유엔군의 참전과 낙동강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1978년 건립한 기념관.
멀리 금오산이 바라다 보이는 석적읍 중지리 낙동강변에 위치한 이 기념관은 6·25전쟁 당시 이곳 낙동강 일대에서 벌어졌던 격전을 기념하여 건립되었으며 6개의 전시장엔 당시 사용되던 무기류와 피복 등이 전시되어 있다.
1950년 8월 1일 미군의 워커 중장은 '워커라인'이라는 낙동강방어선을 설치했다. 이에 따라 8월 3일 왜관 전 주민의 소개령이 내렸고 낙동강 방어선의 교량들은 적도하방지를 위해 8월 4일 새벽까지 모두 폭파 되었는데 이 때 왜관 인도교도 폭파되었다. 8월 16일 인민군 4만 여명이 집결해 대규모 도하작전을 벌이자 워커 중장은 일본에 있는 맥아더 원수에게 융단 폭격을 급히 요청하게 된다. 이 요청에 따라 일본에서 출발한 B29 비행기 98대가 왜관 서북방 67㎢에 26분 동안 90톤이나 되는 폭탄을 투하했다. 이 폭격으로 인민군 4만명중 3만여명이 죽었다고 하니 1초에 20명, 1분에 1,150명이 폭사한 셈이다.
이 융단폭격으로 산과 들은 벌집 쑤셔놓은 것처럼 되어버렸고 특히 인민군 제 2군단의 병참 보급기지이자 제3사단 사령부가 있었던 약목역(약목면 복성리)근처는 그야말로 초토화되어 버렸다. 당시 인민군 야포의 사정거리는 20㎞, 반면 왜관에서 대구까지는 25㎞가 넘었다. 왜관을 빼앗길 경우 이곳에서 10㎞ 후방인 도덕산까지 인민군이 장악해 대구는 인민군의 사정권안에 들어가게 되며 부산까지 밀리게 된다. 이것이 바로 유엔군이 필사적으로 왜관 일대의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려 한 이유였다.
이렇게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당시의 아픈 추억을 간직하고 곳이 왜관 인도교(구철교)와 자고산(303고지)이다. 인도교 제2경간의 폭파구간은 1950년 10월 총반격때 침목등으로 긴급복구한 후 계속 통행에 이용하다가 너무 노후화 되어 1979년 11월부터는 통행을 전면 차단하게 되었다.
이 다리를 관리하는 철도청에서는 철거를 검토하였으나 호국의 상혼을 간직한 이 다리를 보존하자는 군민들의 의사를 수렴, 칠곡군이 무상관리 승인을 받고 1991년 8월 29일 부터 1993년 2월 26일까지 도비 4억, 군비 2억 1천만원을 들여 복구하고 준공식 때 '호국의 다리'로 명명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호국정신을 되새기며 통행과 휴식공간으로 이용하고 있다.
또 자고산(303고지)은 낙동강을 도하한 적과 교전한 곳인데 특히 미군포로 40명이 후퇴하는 적에게 비인도주의적으로 집단학살된 가슴아픈 상처를 지니고 있다. 1990년 미 캠프캐럴 부대(주한 미육군 군수 지원처, 1960년부터 왜관 주둔)에 근무하던 미군 2명(David King 하사, Charles Fred 상사)과 박종구 대민담당관은 미 육군 기록에서 303고지 만행을 조사한 결과 당시 제5기갑여단 H중대 박격포소대 45명이 포로가 되어 40명이 학살된 사실과 그 명단을 밝혀냈다. 이에 전 부대원과 한국인 종업원들이 성금을 모아 1990년 6월 부대내 (사령부 앞)에 추모비를 세우고 학살된 날을 기념해 같은 해 8월 17일 제막하였다.
현재 자고산은 흥국사 절과 약수터, 체육시설이 있어 왜관주민들이 즐겨 찾는 산이 되어 있지만 1950년 8월의 폭염 아래 꽃같은 젊은 생명들이 쓰러져 간 곳이다. 그 때의 피로 물든 낙동강은 오늘도 말없이 흘러가고 있지만 당시의 격전지를 바라보는 낙동강변 언덕엔 전쟁에서 희생된 고귀한 피의 발자국을 영원히 기억하고자 왜관지구전적기념관이 건립되어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 구왜관철교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872
등록문화재 제406호
이 다리는 일본이 대륙침략을 위해 부설한 경부간 군용철도의 교량이다. 경부선 철도는 1901년 8월에 착공하여 한국 노무자와 학생들을 동원, 3년여만에 445㎞의 단선(單線)을 완공하고 1905년 1월 1일에 개통, 부관연락선(釜關連絡線)으로 일본과 연결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군수물자의 신속한 수송을 위해 경부선 423㎞를 복선화(複線化)하면서 1941년 11월 30일 507m의 새로운 복선철교를 상류쪽에 가설하고 이 철교는 경부간 국도의 인도교(步車道)가 되었다.
6·25전쟁시 적 도하 방지를 위해 1950년 8월 3일 폭파된 경간(經間)은 그 해 10월 총반격때 침목등으로 긴급 복구한 이후 계속 인도교로 활용해 왔다. 1970년 11월 바로 위쪽에 경부간 국도의 왜관교(길이510m, 폭13.5m, 높이7.2m 시멘트콘크리트조)를 새로 가설한 후에는 인도교로 이용했으나 그간 복구 부분이 너무 노후하여 1979년 11월부터는 통행을 전면 차단하였다.
이 다리는 관리하는 철도청에서는 철거를 검토하였으나 호국의 상흔(傷痕)을 간직한 이 다리를 보존하자는 郡民들의 의사를 수렴, 칠곡군이 무상관리 승인을 받고 91년 8월부터 93년 2월까지 6억1천만원(도비4억, 군비2억1천만)원을 투입하여 교각 1기 신설, 상판 63m 복구, 트러스 도색, 난간보수, 교면 및 접속도로를 포장하여 복구함으로써 '호국의 다리'로 명명되어 전쟁과 호국의 산 교육장으로서 주민들의 사랑을 받으며 人道로 활용되고 있다. 이 다리가 어떻게 하여 호국의 다리로 불리게 되었는지 6·25전쟁시 왜관 일대의 전황을 자세히 살펴보자.
대구와 부산이 함락위기에 놓였던 1950년 8월 1일,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최후의 방어선(워커라인, 낙동강 교두보)을 구축하고 격전을 벌이게 되는데 이 곳 왜관 일대는 그 중심지였다. 이에 따라 그 해 8월 3일 왜관 전 주민의 소개령(疏開令)이 내렸고 낙동강 방어선의 교량들은 적 도하방지를 위해 8월 4일 새벽까지 모두 폭파되었는데 이 때 왜관 인도교도 폭파되었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왜관(자고산, 303고지) ~ 현풍까지 40㎞(하천거리 56㎞)구간을 담당하던 미제1기병 사단장 게이(Hobert Raymond Gay)소장은 휘하 부대가 김천에서 왜관으로 철수완료하면 작전상 한강교와 버금가는 왜관 낙동강 인도교를 폭파하여 전차를 앞세운 적의 남진을 저지할 계획이었다.
낙동강 연안의 왜관에는 김천~대구간 4번 국도를 잇는 유일한 인도교를 통해 많은 피난민과 군인들로 붐볐다. 7월 중순까지만 해도 수십만의 피난민들이 내려와 있었는데 다 하순부터는 하루에도 25,000명 이상이 낙동강을 건너 좁은 아군지역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피난민들이 길을 메워 군의 작전 기동력에 장애도 되고 특히 적 게릴라들이 피난대열에 끼어 들어와 아군을 교란시키는 사례가 많았다(유엔군은 당시 게릴라 총병력을 약 3만, 핵심 조직요원은 5천명으로 판단했으며 8, 9월중 4천명을 소탕했다). 이 때문에 낙동강 방어선에는 적 게릴라 침투를 막기 위해 부득이 진지점령에 앞서 강안(江岸)으로부터 8㎞이내에 거주하는 전 주민들을 소개시켰다.
8월 3일, 아침부터 경찰서 사이렌이 울리고 전단과 확성기로 '오후 6시까지 지시된 지역에서 퇴거하지 않는 주민은 적으로 간주하여 사살한다.'라는 내용을 포고하자 왜관 일대 주민들은 황망히 피난짐을 쌌다. 이날 따라 왜관역에는 마산으로 이동하는 미제25사단 병력수송열차가 들어서 있었다. 때때로 가랑비가 내리는 가운데 피난민들은 화차에 타기도 하면서 봇짐행렬이 줄을 이었다.
유엔군은 피난민들이 인도교를 건너 소개지역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게이 소장은 다리 근처에서 부대철수를 지휘하고 있었다. 인도교 건너편에는 수천명의 피난민들이 도강기회를 보고 있다가 3일 해질 무렵 뒤편의 미제8연대가 마지막으로 다리를 건너려 하자 뒤따라 몰려왔다.
사격위협을 해도 필사적으로 따라 오는데는 어쩔 수 없어 폭파시기를 놓쳐버렸고 그사이 날은 저물어 드디어 적의 사격이 시작되었다. 폭파시기 판단은 게이소장의 생애중 가장 어려운 결단이었다. 1950년 8월 3일 오후 8시 30분, 굉음과 함께 인도교와 복선철교 각 1구간이 폭파되었다. 어둠이 짙어진 밤하늘에는 불꽃놀이 하듯 파편이 날면서 트러스와 상판이 무너져 내렸는데 총길이 469m중 왜관쪽 둘째경간 63m가 끊어졌다.
뒤에는 적이 밀려오고 막다른 처지에 몰린 피난민들은 수심이 얕은 곳으로 몰려 갔다. 짐스러운 것은 버리기까지 하면서 군의 제지를 피해 강을 건넜는데 등에 업은 아이가 익사하는 줄도 모르고 건넌 부녀자등 정신없이 강을 건너는 가운데 희생자가 많이 속출하였다. 적은 전차가 건너올 수 없어 일단 강 서편에 집결하고 미제1기병단은 8월 4일 아침까지 강 東岸에 진지구축을 완료했다. 이후 적은 모래 가마니를 깔아 전차 도하를 여러번 시도했으나 아군의 포격으로 번번이 좌절되었다. 8월 16일에는 B29 전투기 98대가 강 건너편 일대 67㎢에 26분 동안 90톤이나 되는 폭탄을 떨어뜨려 인민군 4만명중 3만여명이 죽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융단폭격 작전으로 세계전사에 기록되어 있다.
왜관을 빼앗길 경우 대구는 북한군의 야포 사정권안에 들게 되며 부산까지 밀리게 되므로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중심으로 다부동전투와 함께 필사적으로 전선을 지켜 북한군에게 큰 타격을 줌으로써 전세를 역전시키고 반격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렇게 하여 우리 칠곡군은 '호국의 고장'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지금은 전쟁의 상처를 딛고 일어서 살기좋은 고장으로 발돋움해 있다.
* 구왜관터널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882-61, 62
등록문화재 제285호
구 왜관터널은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에 있는 일제강점기 경부선 개통과 함께 만들어진 터널이다.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만들어져, 1941년 경부선이 복선화로 새로 개통되기 전까지 이용되었던 터널로 근대 철도 역사를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터널 형태는 1905년 경부선 터널로 개통된 석조와 붉은벽돌로 된 말굽형 터널이다. 터널 입구는 화강석으로 마감되었으며, 입구 아치는 정점에 이맛돌(Keystone)을 둔 반원형 아치 모양을 하고 있다. 터널내부하단은 시각적 안정감을 위하여 화강석 견치석 쌓기를, 상부는 붉은 벽돌로 정교하게 쌓았다.
터널의 규모는 폭이 4.84m, 높이 3.15m, 길이가 70~80m 정도 된다. 1941년 경부선이 복선화 사업으로 기존 위치에서 동북쪽으로 이설되면서 현재는 사용되지 않고 있다.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근대기 철도 역사를 보여주는 중요 자료로서 가치가 크다.
* 칠곡 경수당
칠곡군 지천면 상지1길 45-1
문화재자료 제 583호
경수당은 조선 중기 유학자 석담 이윤우(1569-1634)가 세거하던 자리에 지어진 주택으로 대한제국 말기에 법무부 형사국장을 지낸 바 있는 김낙헌이 거주하던 집이었다. 이후 낙헌의 친구인 후석 이주후(1873-1957)가 매입하여 지천면 상지1길 45-1(경수당의 재실인 영모헌이 있던 곳)에서 지금의 자리인 상지1길 45-1로 이거해 오면서 벽진 이씨 후석파종택으로 삼았다 한다
칠곡 신리 웃갓마을의 북쪽 끝편에 야트막한 산을 등지고 자리하였다. 800평 규모의 넓은 대지에 一자형의 대문간채, 사랑채, 안채 그리고 광채가 동향으로 나란하게 병렬 배치되어 있고 안중사랑채가 사랑채와 안채사이에 남향으로 직교 배치된 형식이다.
경수당은 생활의 편리를 위해 창호교체와 일부 증축된 부분이 있으나 대체로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는 집으로 간결한 평면구조와 영남내륙지방의 분동형 배치, 그리고 사랑채의 물익공형 초각장식등은 특징적이다. 또한 조선 중기의 유구로 당시의 정치제도와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담양담 등이 남아 있다.
* 묵헌종택
칠곡군 왜관읍 석전로3길 13-5
문화재자료 제245호
묵헌종택 (默軒宗宅. 문화재자료 제245호. 1989년 5월 29일 지정. 왜관읍 석전리 580- 2)이 건물의 안채와 사랑채는 문익공 (文翼公)이원정 (李元禎 1622, 1687)의 차 자인 이한명 (李漢命, 1651, 1687)이 건립하였으며, 사당 (祠堂)은 5대손인 묵헌 (默軒)이만운 (李萬運, 1736, 1820)이 별세한 후 유림공론 (儒林公論)으로 순조 20년 (1820)에 건립한 건물이다. 1996년에 건립한 3칸 규모의 대문채를 들어서면 일자형 (一字形)의 사랑채와 n 자형의 안채로 튼 □ 자형의 배치를 이루고 있으며 사랑채의 우측 후먼에는 사당이 자리 잡고 있다. 사랑채는 지형관계로 기단을 다소 높게 축조하였으며 자연석 덤벙 주초를 놓고 각주를 세웠다. 흩집으로 가운데에 중문을 두지 않고 10칸이 연접되 어 있는 특이한 평면을 하고 있는데 우측에는 큰사랑을 좌측에는 작은사랑을 배치 하였다. 큰사랑은 2칸, 사랑방과 2칸 사랑마루로 구성하였으며 그 앞에는 쪽마루 를 두었다. 좌측에는 불을 때는 아궁이를 설치하였다. 아궁이가 설치된 칸은 전면 은 개방되어 있으나 후면은 막아 안채로 통할 수 없게 되어 있고 상부는 다락으로 꾸몄다. 작은 사랑은 좌로부터 1칸 반 규모의 책방과 반 칸의 아궁이 그리고 작은 사랑마루, 작은방, 광으로 이루어져 있다. 쾅으로의 출입은 배면으로 하게 되어있 다. 사랑마루의 배면에는쌍여닫이 울거미널문을설치하였는데 상· 하의 문틀에는 가운데 설주를 박았던 홈이 있으며 우측면에는 원래 후면과 같은 형태의 쌍여닫이 울거미널문이 있었다 한다. 3량가로 대량 위에 제형판대공을 세워 마룻대를 받는 간결한 구조이다. 안채는 나지막하게 조성한 기단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방주를 세웠다. 2통칸 안방 과 3칸 대청을 정면에 두고 좌 · 우로 회첨시켜 방을 배치하였는데 좌측에는 부엌 과 아랫방을, 우측에는 고방과 건너방, 부엌을 두어 n자형의 평먼을 이루고 있다. 3량가이며 제형판대공이 마룻대를 받고 있다. 대청 후면에는 각 칸마다 영쌍창이 있었으나 지금은 가운데 설주홈만 남아 있다. 사당은 정먼 3칸 규모의 맞배기와집이다. 기단은 전면에만 설치되어 있는데 막돌 기단 위에 덤벙주초 놓고 각주를 세웠다. 통칸으로 되이 있으며 정면에는 어칸에 쌍여닫이 널문을, 양측칸에는 외여닫이 널문을 달았다. 3량가로 대량위에 제형판대 공을 세워 마룻대를 세웠으며 흩처마에 맞배지붕을 하였다.
* 동산재
칠곡군 왜관읍 동산1길 24-18
문화재자료 제503호
동산재(束山齋: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03호. 2006년 2월 16일 지정. 왜관읍 석전리 661번지) 동산재는 광주이씨 석전문중의 대표적인 건물로서 낙촌(各村) 이도장(李道長) 의 덕행을 기리기 위해 1913년에 세운 정면 4칸 측면 2칸 홑처마 팔작지붕 목조 와가(瓦家) 의 낙촌정, 장자(長子) 귀암(歸巖) 이원정(李元禎) 의 유덕과 공적을 알리기 위해 1903년에 세운 정면 4칸 측면2칸 홑처마 팔작지붕의 목조와가(木造瓦家) 경 암재, 장손(툿孫) 정제(靜齋) 이담명(李聃命) 의 별사봉향을 위해 세운 정면4칸 측. 면1칸 홑처마 맞배지붕 목조와가(木造瓦家) 의 소암재와 묘실, 대문채, 관리사를 일 괄하여 이름을 붙인 것이다.
재사(齋舍) 와 정사(亭舍) 가 하나의 일곽(一廓) 을 이루 면서 건립(建立) 순서와 세계(世系) 가 역순(逆順l) 이면서도 건축구성상 정연한 위계(位階) 성을 갖는 특이성을 가지고 있고, 대부분의 건물이 초창(初創) 이후 큰 변형 이 없이 유지되어 건립당시의 건축사 연구의 기초(基礎) 자료(資料) 로 보존 할 가치 가 있어 경상북도에서 기념물적 성격의 문화재자료(文化財資料) 로 지정되었다.
* 신나무골 성지
칠곡군 지천면 연화리 산 57번지
1805년에 프랑스인 김보록 신부가 처음으로 성당을 건립하였다. 1815년 을해박해를 전후하여 형성된 천주교 교우촌으로 한티 마을과 밤에 왕래하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천주교 대구 대교구가 처음 움이 튼 요람지가 신나무골이다. 약 100년 전인 1886년, 경상북도 전역의 전교 중심지로 대구본당이 설정되었으나, 그보다 20년 전의 한국천주교 100년 박해의 최종단계였던 병인년(1886년) 대박해의 여파로, 외국인 신부가 아무리 변장을 하더라도 대구 읍내에 들어가 선교활동을 할 수 없는 형편이어서, 대구 본당으로 차정된 초대 본당신부는 정처없는 부임이었고, 그래서 3년간이나 대구에서 60리 거리에 있는 신나무골에 은신하여 선교활동(대구 읍내와 부근의 신자들은 이곳으로 비밀리에 내왕하면서 성사를 보았다)을 하다가 그 후 대구 새방골로 진출하였던 것이다.
1860년경 신나무골에 가까운 웃갓(현 상지동)에 살면서 영세 입교한 광주이씨의 문중, 이이전 형제가 이곳에 이사와 살았는데, 이씨 가문은 4형제의 아들을 두었고, 맏아들 이주연은 자수성가하여 살림이 넉넉하였으며, 온 집안이 신앙심이 두터웠다. 아들 4형제중 셋째가 출생하기 전 1886년 겨울에, 대구 본당 신부로 부임하던 프랑스인 '로베르트 김 바오로'(Achille Paul Robert:1853~1922) 신부가, 이곳 이씨 집안에 1888년까지 3년간 체류하면서, 대구 읍내 신자들이 모이는 한티, 새방골(현 대구 서구 상리) 등지 공소를 순회하며 전교하다가, 한불 조약이 비준되던 1886년 새방골로 옮기게 되었다.
그 이듬해에는 전라도 전주본당으로 차정된 보드네, 사베리오 윤신부와, 경남 동래로 차정된 조슈 조 신부가 이곳에서 1년간씩 체류하였다가 떠났다. 당시 불랑 백주교는 장차 각지 교회 설립을 위한 준비공작으로, 전교회장 제도를 마련하여 9명의 후보자를 교육시켜 각지로 파견할 때, 충청도 충주 출신 박상언 회장이 1890년경에 이곳 중화리에 와서, 10년간 전교하다가 떠난 사실이 있었다. 이리하여 이곳 신나무골은 대구를 위시하여 여러 본당 발전의 요람지로서 유서 깊은 곳이 된 것이다.
대구본당 초대 주임인 로베르트 김바오로 신부가 이곳을 떠나 새방골로, 그리고 다시 읍내 대야볼(현 대구 서구 수창동) 정승지 바오로의 집으로 옮아가면서, 읍내로 들어갈 준비를 하던 1895년에 칠곡 가실본당이 설립되어, 가밀로 한 신부가 3년간 전교할 때부터 이곳은 가실 본당의 소속 공소로 있게 되었다가, 1928년에 왜관 본당이 설립되면서는 왜관 본당 공소로, 그리고 1967년 신동 본당이 신설되면서 신동 본당의 소속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노석리 마애불상군
칠곡군 기산면 노석리 산43-2
보물 655 호
높이 본존불상 1.55m , 여래좌상 1.15m
통일신라 초기의 거대한 바위면에 얕게 돋을새김한 마애불상이다. 바위면의 중심에 본존불(本尊佛)과 좌우 협시보살(脇侍菩薩)등 삼존불좌상(三尊佛座像) 그리고 바로 오른쪽에 작은 불좌상(佛座像)이 배치된 특이한 구도를 보여주고 있다.
본존불좌상은 큼직하고 높은 육계(肉계 : 부처의 정수리에 있는 상투모양으로 두드러진 혹같은 모습), 둥글고 박력있는 얼굴, 작은 이목구비, 큼직한 어깨와 짤막한 상체, 맨살의 오른팔과 가슴까지 든 손과 통견(通肩 : 불상의 양어깨를 덮은 양식)의 불의(佛衣)등 다소 생경하지만 뛰어난 솜씨의 불상이다. 머리주위로는 둥근 광배(光背 : 불상등의 배면에 광명을 표현한 것)가 뚜렷하고 큼직하게 묘사되었으며, 이 주위로 불꽃무늬들이 무척 화려하다.
왼쪽 협시보살은 보주(寶珠)를 새긴 특이한 보관(寶冠), 본존을 향하여 측면으로 바라보는 얼굴과 자세, 풍만한 체구, 왼손에 연꽃가지, 오른손에 보주를 잡고있는 수인(手印), 뾰족한 대좌(臺座)와 연꽃무늬등 경주 남산 신인사(神印寺) 동방보살상과 매우 비슷하다. 오른쪽 보살상은 왼쪽 보살상과 흡사하지만 발목에서 교차하고 있는 교각자세(交脚姿勢)의 특징이 가장 독특하다.
오른쪽의 단독불좌상은 삼존불의 본존상과 거의 흡사하지만 본존불만큼 풍만하지는 않으며 안락좌(安樂坐)의 특이한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 동명시장 - 장날 ; 4, 9
칠곡군 동명면 금암4길
동명시장이 위치한 동명면은 팔공산 도립공원이 있어 문화유적과 등산을 위해 관광객들이 매년 증가하고 있다. 동명시장은 1921년 개설되었으며 대구 인근에서 찾아온 손님들은 각종 특산품과 상품을 구입후 팔공산에서 등산을 즐긴후 유적지를 관람하고 시장에서 따뜻한 인심과 더불어 쇠고기 국밥으로 허기를 달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