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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13일 아산 UBF 주일메시지
세상의 빛 예수님
말씀 / 요한복음 9 : 1-41
요절 / 요한복음 9 : 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빛은 크게 두 가지 큰 선물을 우리에게 줍니다. 첫째는 에너지와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고 활동할 수 있게 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일할 수 있게 하시는 빛, 예수님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보고 힘차게 일하는 주의 종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1.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1-7)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예수님과 제자들이 태어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 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앞을 볼 수 없어 일을 할 수 없었고 길에서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에 대하여 제자들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2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 부모니이까” 제자들은 먼저 이 사람이 겪고 있는 현재의 시각장애를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최종적 불행, 종말적 결말로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과거의 죄가 현재의 불행을 야기하였다고 하며 과거 누군가의 책임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제자들의 말에는 과거의 죄와 현재의 개선할 가능성이 사라진 이 저주스러움이 앞으로도 이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운명과 저주가 될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관점과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3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제자들이 이 사람의 현재를 저주와 운명으로 단정하고 과거와 미래를 모두 절망으로 단정하는데 비하여 예수님은 그 반대입니다. 과거 그 누구의 죄도 이 사람과 관련이 없다고 하십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이 사람의 현재와 미래도 저주와 정죄의 시각으로 보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지금 모습이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하십니다. 그의 지금과 앞날을 축복으로 바꾸어 말씀하십니다.
4,5절을 보십시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빛이라고 8장에 이어서 다시 선언하십니다. 8장에서의 빛이 우리의 내면을 비추어 죄를 이기는 힘이 나게 하시고 생명으로 가득하게 하시는 것이었다면 여기서의 빛은 우리로 하여금 일할 수 있게 하는 빛, 우리의 모든 세계를 비추는 빛 입니다. 빛이 없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빛이 없는 곳에 가본 적 있습니까? 우리나라에는 사극 영화, 드라마 촬영하기에 적합한 장소가 많지 않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어디를 가도 전봇대와 전깃줄이 있고 그것이 멀리서 보입니다. 전기공학에서는 지지대, 전선로 라고 합니다. 밤에 그런 곳에 가보면 어떻겠습니까? 충청도에서는 공주에서 유구 가는 길에 그런 곳이 있습니다. 저는 신병훈련 때 야간행군 길 연무대에서 40킬로 이내 어느 산골에도 그런 곳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방을 보아도 어떤 집도 보이지 않습니다. 밤에 불빛이 하나도 없습니다. 밤에 그 곳은 아주 캄캄합니다. 이런 곳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움직이는 것은 물론이며 무섭습니다. 달 빛 이라도 있어야 길을 찾고 별빛이라도 보여야 절망스럽지 않습니다. 흐리거나 비 오는 날 밤, 차 없이 라이트 없이 그곳에 간다면 암담하고 무서울 것입니다. 빛이 있어야 사람이 활동할 수 있습니다. 빛이 있는 낮일 때 사람은 일할 수 있습니다.
빛을 만난 사람, 빛 아래 있는 사람이라면 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빛이 없는 날이 오기 때문입니다. 그 때는 일할 수 없습니다. 죄와 사망 권세아래 세상은 어두움 속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어두움을 걷어내 주셨습니다. 세상은 지금 빛을 누리고 있으나 이 빛을 무한정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세상을 향한 심판의 날, 끝 날이 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에게 있어서 낮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때일 뿐 아니라, 제자들의 삶이 지속되는 때를 말하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아 아직 기회가 있는 때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살아있는 동안, 젊음이 있는 동안 아직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은 날 우리는 일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일할 수 없는 밤이 인생에게 찾아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며 빛 가운데 있으므로 믿음의 일, 서로 열심히 사랑하는 일, 복음을 들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살리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6,7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후 어떻게 일을 해야 하는지 본을 보이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아픈 곳에 침을 바르면 낫는다고 여겼습니다. 진흙도 상처나 아픈 곳을 치료하는 효과가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침과 흙을 함께 이겨 시각장애인의 눈에 바르셨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저 사람은 죄 때문에 저렇게 된 것이라 결론내리며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잘못인 것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침으로 진흙을 이겨 눈에 붙여 주었을 때, 시각장애인은 예수님의 사랑을 느꼈습니다. 시각장애인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실로암 못에 순종하여 가서 씻었습니다. 그의 눈이 보게 되었습니다. 실로암의 뜻은 ‘보냄을 받았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왜 일하여야 하는지 보여주셨습니다. 빛이 있는 때이기 때문에 일하여야 합니다. 낮이기 때문에 일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어떻게 일하는지 보여주셨습니다. 있는 것을 가지고 일 할 수 있습니다. 하찮은 것일지라도 가진 것을 가지고 일할 수 있습니다.
2. 네가 인자를 믿느냐(8-41)
8-12절을 보십시오. 시각장애인이 다시 보게 된 기적은 이전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다시 눈을 보게 된 이 사람으로 인해서 논란을 벌였습니다. 다시 보게 된 이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자신이 전에 보지 못하던 그 사람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는 아닌 척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이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해서 씻었더니 다시 보게 되었음을 분명히 드러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하신 일을 세상에 나타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일을 나타내는 일을 하였습니다.
13-16절을 보십시오. 소경이었다가 다시 보게 된 이 사람을 바리새인들에게로 데리고 갔습니다. 병에 걸렸다가 나은 사람들은 제사장들에게 가서 나음 받았다는 확인서를 받았습니다. 그래야 사회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건강하다는 보증이 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사람이 눈을 뜬 날이 안식일인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다시 안식날의 치료를 문제 삼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일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일하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율법의 틀에 사로잡혀서 생명의 역사 앞에서 조차 쟁론으로 시간을 소모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 내부의 분별 있는 동료의 지적에 대해서도 오히려 싸워댔습니다.
17-23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은 시작장애인이었던 그 사람의 견해를 물었습니다.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눈을 뜬 사람에게 바리새인들의 질문은 위협이었습니다. 그들은 당사자에게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부인하기를 강요하였습니다. 하지만 눈 뜬 사람은 자신의 눈을 뜨게 하신 분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 선지자일 것이라 대답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정확히 누구신지 모르지만 아무 조건 없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분은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보내시고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분일 것이라 담대하게 말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나타내는 일을 위협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부모를 데려다가 추궁하였습니다. 과연 이 사람이 이전에 태어날 때부터 앞을 못 보던 사람이 맞는가? 그가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가? 추궁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하신 일을 나타내는 아들과 달리 부모들은 유대인들이 무서웠습니다. 핍박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부모들은 분명히 말 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자기들의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에 대해서는 사실인 것을 알지만 어떻게 눈을 떴는지는 모르니 당사자에게 물어보라 하며 회피하였습니다. 부모는 출교 위협에 막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세상에 나타내는 일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24-34절을 보십시오. 이에 바리새인들은 다시 그를 추궁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죄인이라고 정죄하면서 당사자인 그가 예수님을 부인하도록 압력을 가하였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눈을 볼 수 있게 된 그는 분명히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이 사람은 자신이 원래 소경이었다가 지금 보게 되었다는 한 가지 은혜를 분명히 드러내어 말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한 가지 은혜를 나타내는 일을 하기를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출교 당하였습니다. 유대사회에서 출교는 사회적인 사망선고와 같습니다. 유대교에서 출교당한 사람은 살았으나 죽은 자와 같습니다. 2미터 이내에 접근해서는 안 되고, 죽었어도 곡해주지 말아야 합니다. 유대에서 고용될 수 없고 사업할 수도 없습니다. 출교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는 조치입니다. 유대인들은 일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복의 근원의 일을 하지 않습니다. 제사장 나라 백성의 일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시고 나라를 세워주신 것은 세상 만민이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그런 살리는 일을 하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런 일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빛이신 예수님을 말하는 사람까지 일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빛을 보지 못하는 자들이며 빛에서 일하는 사람도 일하지 못하게 하는 자들입니다.
35-3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와 주셨습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예수님은 그에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약속하신 메시야이심을 드러내어 주셨습니다. 그의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전에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은 눈을 뜨고 다시 보게 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세상의 구원자 예수님을 나의 메시야로 만났습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니라’ ‘주여 내가 믿나이다’ 전에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이 피조물의 세계를 본 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세상을 지으신 예수님의 세계, 생명의 빛 예수님의 나라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가 시신경이 회복되어 보는 것은 가시광선과 세상의 물체가 그 가시광선을 일부를 흡수하고 반사하는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가 받은 가장 큰 복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본 것입니다. 그것은 영생입니다.
39-41절을 보십시오. 진짜 맹인은 그 시대 선생들이요 모든 것을 본다고 자부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놀라운 은혜와 신기한 영적 비밀을 전혀 보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복의 근원이 되라고 불러주셨건만 복의 근원의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제사장 나라가 되라고 나라를 세워주셨지만 제사장 나라다운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복의 근원의 일을 하지 않는 유대인들과 제사장 나라로서 일하지 않는 그들에게 아무 것도 일할 수 없는 밤이 곧 닥쳐오고 있었습니다. AD 66년부터 유대전쟁이 시작됩니다. 이 전쟁은 AD 70년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예루살렘 성전을 불태움으로써 1차 종료됩니다. 로마군에게 포위된 예루살렘에서 110만명의 유대인이 죽었을 것으로 봅니다. 로마군은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을 때까지 예루살렘t성과 성전을 파괴하였습니다. 그들의 땅의 이름도 ‘Judea’가 아니라 유대인들이 가장 증오하는 블레셋사람의 땅이라는 의미, ‘팔레스타인’으로 바꿉니다. 예루살렘에는 풀도 나지 말라며 소금을 뿌렸으며,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모두 먼 나라로 쫓아냈습니다. 이후 2000년간 시온의 언덕에는 유대인이 없고 유대인의 나라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일할 수 없는 밤이 불과 예수님의 때로부터 30년 후에 찾아온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일하지 않았습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것을 세상에 나타내는 일 하는 사람들을 막고 내쫓았습니다. 보지 못하는 사람은 시각 장애인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내쫓기는 사람은 장애 였다가 보게 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사람이 살다가 어려움을 만날 수 있습니다. 큰 사건이나 고난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때 그것을 종말적인 운명이라 여기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예수님께서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학생들이 앞으로 어려움도 만나고 좌절하는 일도 만날 것입니다. 낙심하는 일도 만날 것입니다. 그것은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어렵고 좌절하고 낙심하는 그 때가 새로 시작하는 때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은 어려움을 겪을 때, 왜 이런 일이 생겼는가? 인과관계를 따지고 싶어 합니다. 이때 한 가지 사람들이 보이는 일정한 패턴이 있습니다. 좋은 일이 있으면 좋은 원인과 동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고, 나쁜 일이 있으면 나쁜 원인과 동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우리 센터에도 좋은 일이 있으면 우리가 은혜 받을 만한 모습이 있었다고 하는 말이 금방 들려옵니다. 그 반대의 경우에는 우리가 무엇을 잘못하였을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요즘 코로나로 인하여 K방역, K바이오가 유명해졌습니다. 우리나라 제약회사가 1500개 정도 된다고 합니다. 실제 제약회사는 700개 정도 된다고 하는데 이 중에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제약회사가 ‘유한양행’입니다. 유한양행 회장 유일한 박사는 손녀에게 유산을 하나도 주지 않았습니다. 유한양행 손녀가 금수저로 태어났지만 어른들로부터 유산을 하나도 받지 못한 것에 대하여 여러분은 어떻게 보십니까? 그는 금수저인데 벤틀리, 롤스로이스를 살 수 없습니다. 그는 여름에 요트를 즐길 수 없으며, 미국에 추신수 선수처럼 방 많고 휴게실 따로 있고 화장실이 많은 대저택을 살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유산 받지 못한 것을 좋은 일이라고 볼 수 없다면 그러면 이 여자에게 나쁜 원인이 작용하였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좋은 원인에 의해서도 얼마든지 어려운 일, 유쾌하지 못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요셉에게 노예로 팔려가는 일, 성범죄자로 감옥에 갇히는 일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에게도 이유 없이 왕이 죽이려 하고 이리저리 쫓겨 다니며 갖은 고생을 하는 일은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일이 전적으로 나쁜 동기에 의하여 발생한 것입니까? 요셉은 하나님께서 구원 역사를 이루시려고 자기를 먼저 이집트에 보내신 것이라고 간증하였습니다. 다윗왕도 양치던 천한 목동이었던 자신을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시려고 함께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비추실 때, 우리에게 나쁜 일은 없습니다. 예수 안에서 환한 빛이 비취므로 우리에게 나쁜 원인, 나쁜 동기, 나쁜 결과는 없습니다. 예수 안에서는 모든 것이 선합니다. 모든 것이 합력합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힘차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단국대학교 천안캠퍼스에서 학부를 나왔습니다. 저는 석사를 호서대학교에서 받았습니다. 나사렛대학교에 지원하였을 때, 저를 추천하는 교수가 인사위원들에게 ‘많이 부족하다. 스펙에 호서대가 있다. 그렇지만 잘 봐주기 바란다’고 부탁하고 다녔습니다. 저도 1985년 천안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할 때, 저의 인생이 끝난 줄 알았습니다. 절망하고 깊이 낙심하였습니다. 자다가 새벽에 눈 뜨면 내가 왜 여기에 있나? 괴로웠습니다. 2004년 뒤늦게 제가 호서대 석사과정 대학원 다닐 때, 그때는 대학원 미달사태가 전국적이어서 호서대 졸업하는 학생들도 고려대 대학원에 진학하고 있었습니다. 호서대 석사 스펙이 평생 저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 생각 들었습니다. 단국대학교 천안캠퍼스 학사, 호서대학교 석사, 충북대학교 박사 이런 스펙을 가지고 학벌사회 대한민국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저에게 예수님의 빛이 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빛이 임하였을 때, 많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제가 ‘교수’라는 것도 영광입니다. 예수님의 빛이 임하여 2010년부터 지금까지 천안의 주류사회에서 저는 영향력 있는 교수로 살았습니다. 네이버에 올라오는 뉴스에 29건 정도 저에 대한 뉴스가 나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가 서울대 나왔을 것이라고 하는 경우가 있고, 친한 친구들도 해외 박사인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일은 빛이신 예수님 안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현재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기독교 지도자 두 분도 그분들끼리 서로 저를 추천하는 일도 보았습니다.)
우리 청년들이 지방대라서 안 된다. 금수저가 아니어서 나는 끝났다. 이런 말을 하거나 이런 생각을 한다면 예수님 안에서 그 말은 틀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환한 빛을 비추십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일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비추는 빛 안에서 얼마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빛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예수님께서 복주십니다. 놀라운 세계를 열어 주십니다.
결론적으로 지금 예수님의 빛이 비취고 있습니다. 힘차게 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 살리는 일, 주의 이름을 높이는 일, 그런 일을 하라고 우리가 죄 사함 받고 구원함 받고 부르심 받았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이의 일을 힘차게 하여야겠습니다. 비천한 죄인이었던 우리를 불러 영광스럽게 하신 예수님의 일을 주 예수의 빛 안에서 부지런히 해나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를 환하게 비추시고 우리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시는 주 예수님을 찬양 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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