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고시리즈.
"거짓 가르침과 영적 미혹에 대한 경고",
21)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임할 저주
본문: 갈라디아서 1:6-9
1: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1: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1: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여러분, 혹시 집에서 오래 담가 온 씨간장이 있으십니까.
어머니에게서, 또 그 어머니의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아 수십 년을 이어온 그 장맛.
해마다 새 간장을 살짝 더하고, 불을 조절하고, 그렇게 이어온 그 맛은 아무리 좋은 재료라도 함부로 손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면서 다른 재료를 몰래 섞어 넣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겉보기엔 비슷해 보여도, 그것은 이미 그 집의 장이 아닙니다.
완전히 다른 것이 되어 버린 겁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볼 갈라디아서 1장은,
바로 그런 일이 교회 안에서 벌어졌을 때 사도 바울이 얼마나 격렬하게 반응했는지를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바울이 세운 갈라디아 교회에, 그가 떠난 뒤 어떤 사람들이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흔히 "유대주의자들"이라고 부릅니다 — 예수님을 믿는 것 자체는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거기에 할례와 율법 준수를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덧붙였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복음을 통째로 없앤 게 아니라, 복음에 무언가를 슬쩍 더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것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좇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 1:6, 8)
1. "천사라도" — 우리가 매달리는 그 권위조차
여기서 바울이 "천사"를 언급하는 것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천사는 그냥 신비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이 천사들을 통해 전달되었다고 믿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9절, 사도행전 7장 53절, 히브리서 2장 2절이 이 배경을 뒷받침합니다.
다시 말해, 천사는 율법의 권위를 대변하는 최고봉이었습니다.
그러니 바울이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라고 말한 것은, 그냥 "굉장히 높은 존재라도" 정도의 표현이 아닙니다.
이것은 정확히 겨냥된 말입니다.
"너희가 그토록 붙잡고 있는 그 율법, 천사가 전해줬다고 믿는 그 권위 있는 율법조차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앞에서는 아무 힘이 없다." 이것이 바울의 선언입니다.
원어를 조금 살펴보면 더 분명해집니다.
"복음을 전하면"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εὐαγγελίζηται(유앙겔리제타이)인데, 이것은 현재 중간태 접속법으로 쓰였습니다.
우리말로 풀면 "설령 계속해서 복음이라 부르며 전한다 할지라도"라는 뉘앙스입니다.
즉 그럴듯하게, 계속해서, 심지어 진지하게 전해진다 해도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παρ' ὃ"(파르 호)라는 표현은 "우리가 이미 전해준 것을 넘어서서, 그것과 다르게"라는 뜻입니다.
조금 더해지고, 조금 벗어난 것 — 그것으로 충분히 "다른 것"이 됩니다.
씨간장에 다른 재료 조금 넣는 것으로 충분히 그 집 장맛이 아니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바울이 6절에서는 "다른 복음(ἕτερον εὐαγγέλιον)"이라고 해놓고,
바로 다음 절인 7절에서는 "다른 복음이 아니라(οὐκ ἔστιν ἄλλο)"고 정정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바울의 뜻은 이것입니다
. "세상에 진짜 '또 다른 복음'이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의 참된 복음이 있을 뿐이고, 지금 너희를 미혹하는 것은 그 하나의 복음을 왜곡시킨 가짜일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오늘 조심해야 할 것은 "저기 새로운 복음이 있나 보다"가 아니라,
"혹시 내가 알고 있는 복음에 무언가를 슬며시 더하고 있지는 않은가"입니다.
2. 오늘 우리 안에 있는 "더하기 신앙"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것은 먼 갈라디아 교회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도 이 부분에서 자주 넘어집니다.
"예수 믿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고백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래도 내가 이만큼 헌신했으니까", "이만큼 새벽마다 나왔으니까", "이 정도 봉사했으니까" 하면서 은근히 무언가를 더하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오신 분들일수록 더 그럴 수 있습니다.
수십 년 교회를 섬겨온 권사님, 집사님, 이제는 그 세월의 무게가 은혜와 나란히 놓이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내가 이만큼 살아왔으니 하나님 앞에서 조금은 떳떳하지 않겠나" 하는 마음,
그것이 바로 유대주의자들이 할례와 율법을 붙잡았던 것과 본질이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왜 그토록 무서운 일일까요.
바울은 이것을 "아나테마(ἀνάθεμα)"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이 단어는 구약의 히브리어 "헤렘(חֵרֶם)"에서 온 말입니다.
헤렘은 단순히 "안 좋은 것"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께 완전히 바쳐져서 심판을 받도록 구별된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할 때, 이것은 "교회에서 좀 혼나야 한다"는 정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 아래 놓이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왜 이렇게까지 강하게 말할까요. 은혜에 조금이라도 우리의 무언가를 더하는 순간,
그것은 사실 그리스도가 하신 일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으로는 좀 부족해, 여기에 내 것을 좀 보태야 해." 이 말 자체가 십자가를 모욕하는 말입니다.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하는 신앙의 습관들 속에 이런 마음이 얼마나 자주 스며드는지 모릅니다.
3.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신 그리스도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본문은 우리를 정죄하기 위한 본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나테마", 그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야 할 존재는 원래 누구였습니까.
바로 우리였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율법을 완전히 지켜낼 수 없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미 그 심판선 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3장 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우리가 받아야 할 그 아나테마, 그 헤렘의 저주를 그리스도께서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십자가 나무 위에서, 우리 대신 저주가 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본문의 진짜 무게를 알게 됩니다.
바울이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리라"고 그토록 격렬하게 외친 이유는, 그가 율법을 앞세우려 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완전히 치르신 그 값을 그 누구도 다시 흥정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무언가를 더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나무 위에서 흘리신 피가 마치 부족했다는 듯이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것은 규칙이 아니라, 십자가의 완전성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 하나가 우리에게 오늘 참된 자유를 줍니다.
우리는 더 이상 무언가를 보태서 하나님 앞에 설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저주가 되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저주 아래 있지 않습니다.
이 자유는 우리가 노력해서 얻어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것입니다.
또한 이 복음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율법이 우리를 정죄한 것도, 결국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한 하나님의 예비하신 은혜였습니다.
율법은 폐기해야 할 원수가 아니라,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데려다준 초등교사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율법을 구원의 조건으로 세우는 태도는 거부하되, 구약 전체를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합니다.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하고, 구약과 신약은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4. 오늘, 작은 것부터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첫째, 이번 주 한 번, 기도할 때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내가 지금 이 기도를 드리며, 은근히 내 헌신의 분량을 하나님 앞에 내밀고 있지는 않은가."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둘째, 누군가에게 신앙을 나눌 때, "예수 믿고 이것저것 잘해야 한다"는 말 대신, "예수님만으로 충분하다"는 말을 한 번 그대로 해보십시오.
어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우리 입에 붙어야 합니다.
셋째, 하루 중 잠깐이라도, 그리스도께서 나 대신 저주가 되셨다는 사실을 소리 내어 되뇌어 보십시오.
마음이 아니라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 생각보다 큰 힘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스스로의 결단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이 마음을 일으켜 주셔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 이것 역시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은혜를 구하는 기도로 시작해야 합니다.
결론
여러분, 씨간장에는 아무것도 더할 수 없습니다.
더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다른 것이 되어버립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 한 분으로 충분합니다.
하늘에서 온 천사가 와도, 그 어떤 권위가 와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 일에는 아무것도 더할 수 없고, 더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저주받아야 할 존재였지만, 그리스도께서 그 저주를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이 사실 하나만 붙잡고 이번 한 주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한 분으로 충분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아무것도 더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