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제정구 그리고 정일우신부님/
-‘내 친구 정일우’의 다큐를 보았다.
고향 선배인 故제정구형을 문득 생각할 때마다 함께 떠오르는 이가 있다. 정일우신부님.
그 정일우신부님의 다큐를 뒤늦게 보았다. 얼마전 은빛순례단 관계로 복음자리에 계신 형수님 신명자선생과 통화하면서 이 다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 시골에선 그걸 상영하는 극장이 없어 볼 수 없었는데 이번에야 인터넷으로 다운을 받아 보게된 것이다.
제정구형은 고향 중학교의 선배인데 대학 때 같은 사건에 연류되어 당국의 배려(?또는 관리) 차원에서 고향 가까운 지방 교도소에서 함께 지낸, 이른바 감방 동기(?)이기도 하다. 그런 인연으로 지방에서 농민운동을 하던 나는 서울에 가게 되면 당시 형이 빈민운동을 하며 함께 살던 양평동 뚝방 판자촌에 자주 들리곤 했다. 정신부님을 거기서 처음 만났다. 제선배와 함께 신부님도 거기에 살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그 때가 1976년 무렵이라 싶다.
신부님과의 첫 만남의 인상은 내게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온 것 같다. 우선 서양사람이 판자촌에서 빈민들과 함께 아울려 산다는 것과 그가 예수회 출신 신부인데다가 대학교수 출신(그는 스스로 교수직을 사임하고 빈민촌에 들어가 살았다)임에도 그의 말이나 태도 어느 곳에서도 그런 자신을 내세우는 기색이 전혀 없다는 것, 꾸밈없이 소탈하고 또 무지하게 잘 웃는 매우 쾌활한 성격이라는 것 등의 인상이 강렬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사실 그때만 하더라도 외국인 특히 미국사람이나 외래 종교인 천주교 등 기독교에 대한 일종의 부정적 선입관을 상당히 갖고 있었던 터라 정신부님의 이런 모습이 내겐 상당히 충격적인 느낌으로 다가왔던 거라 싶다. 더구나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에 대한 도전적인 나의 질문에 서로 다르지 않다는 망서림 없는 신부님 답변에 또 한 번 놀라워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아무튼 이런 첫 만남에서 나도 정신부님을 좋아하게되었다. 그렇게 그는 누구든지 첫눈에 좋아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 이후로도 우리의 만남은 자주 이어졌다. 당시 농민운동을 하던 나는 빈민운동을 하던 제선배와 일을 통해서도 자주 만났고(우리는 함께 천주교사회운동협의회의 틀 안에서도 농민운동과 도시의 빈민운동이 서로 연대할 수 있는 길을 찾았다. 사실 도시 빈민이란 대개 이농한 농민들의 다른 이름이 아니던가) 그 때마다 제선배와 정신부님은 형제처럼(연인처럼?) 늘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정신부님은 복음자리와 상계동 판자촌을 거쳐 한 때 괴산에 있는 공동체에 내려와 계시기도 했는데 그 때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다. 내가 신부님께 영성이 무엇인가 하고 물었더니 신부님은 시골 농부가 아침이면 들에 나가 논밭을 둘러보는 마음이라고 했던 그 말씀이다. 내가 생태영성학교라는 이름으로 도반들과 일할 때 신부님의 영성에 대한 이 말씀을 새기곤 했다.
정일우신부님, 어디서든, 누구와 만나든 활짝 미소 지으시던 분이다. 세상에 이 분만큼 그렇게 환히 웃으시고 기분 좋게 하실 수 있는 분이 얼마나 될까. 제대 위에서 미사를 드릴 때도 눈이 마주치면 한쪽 눈으로 윙크하며 미소로 답하시던 분. 그는 사제라는 걸 무엇인양 내세우거나 또는 근엄한 체 하는 그런 부류들과는 아예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이었다. 개구쟁이 어린아이 같았던 사람, 그러나 불의와 부정과 사랑이 아닌 것에는 온 몸을 던져 두려움 없이 싸웠던 분이었다. 가난한 이들이, 오직 가난뱅이들이 유일한 희망이라는 믿음으로 스스로 가난뱅이가 되어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았던 사람.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구원하는 게 아니라 가난한 이들이 지금의 교회를 구원할 것이라 믿었던 사람. 정신부님과 제정구선배는 둘 다 그런 믿음으로 한 생을 사신 분들이다.
그와 영원한 도반 제정구형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한 켠이 아릿해진다.
제정구, 그를 추모하는 어떤 글에서 나는 정치를 해서는 안 될 사람이 정치판에 뛰어들었다가 견딜 수 없어 먼저 갔다고 썼다. 이 시대, 내가 좀 체 만나기 어려웠던 맑은 혼을 가진 몇 분 가운데 한분이었던 그 사람. 일급수의 물고기가 저 혼탁한 물 속에서 건강하게 살아갈 수는 없는 까닭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정일우신부님. 걸림없이 자유롭고 스스로 가난하고 그리고 온전히 사랑할 줄 아셨던 분. 이번 생에 내가 만날 수 있어서 행복했던 분들의 이름이다.
이 다큐를 통해 그런 만남을 다시 회상하고 그 때 함께 했던 옛 동지들과 지인들을 다시 볼 수 있어 반갑고 고마웠다. 절로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시울이 적셔온다.
‘사람’이고 싶다는 신부님의 말씀처럼 마지막까지 그 사람의 길을 걸어 우리에게도 사람의 길을 열어 보이신 분.
결국 사람일 것이다. 그 사람과 사람의 삶,그것이 전부가 아닐까.
겨울의 맑고 시린 그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과 같았던 사람들, 혼탁한 이 세상이 그래도 이나마 지탱해갈 수 있는 것은 이런 분들의 영혼이 우리 곁에 함께 하기 때문이라 싶다.
오늘 밤에 별을 다시 보아야겠다. 제정구라는 별과 정일우라는 별을.
우리 가까운 곳에서 밝게 빛나는 두 개의 큰 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