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禪, 그리고 선시禪詩(2)
권 현 수 (시인)
1 선이란 무엇인가(불교문예, 2016년, 겨울호.)
2 참선(Chamseon), 禪, 위빠싸나Vipassana, Zen(Seon), Meditation
(불교문예, 2016년, 겨울호.)
3 깨달음에 대하여1(불교문예, 2017년, 봄호.)
불교문예가 창간 된지 20년을 넘기며 지령 80호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불교적 사유를 바탕으로 계간 문예지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잊지 않고 어엿한 성년의 연륜을 넘기며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려고 합니다.
마음의 평화, 삶의 지혜, 그리고 업으로부터의 자유를 위한 불교 근본 목표를 문학예술 활동을 통해 추구하고 지원하려는 창간 의도는 여전히 살아있고 더욱 넓게 펴려고 합니다.
작금 문단의 화두로 회자되고 있는 선, 그리고 선시에 대한 문학적 자리매김을 시도해 보려는 뜻 또한 거기에 있습니다. 문단의 앞선 사유를 짚어가며 시 뿐만 아니라 불교문학 전반에 걸친 조명을 지속적으로 유지해 갈 것을 다짐 하면서 많은 독자들의 참여를 기대합니다.
3 깨달음에 대하여(1)
"당신은 정말 깨달으셨습니까?"라는 물음에 우리시대의 가장 위대한 불교지도자이며 관세음보살의 화신이라고 일컬어지는 티벳의 달라이라마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나는 자라나면서 어느 순간엔가 空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갑자기 세계가 넓어지더군요. 뭔가 이 우주와 인생에 대해서 조금 알듯했습니다. 그러면서 시야가 넓어지고 사물을 전체로 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자비를 깨달았습니다. 깨달음을 물으신다면 이 空과 자비를 통해 무엇인가 조금 이 우주와 인생에 대해 통찰을 얻었다는 것, 그런 것을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2002, 통나무)
당돌하고 무례하기까지 한 질문을 한 김용옥 교수는 불교인은 아니지만 깨달음의 경지를 궁금해 하는 아주 상식적인 사람이고, 진리에 대한 강한 욕망을 가진 조금 별난 학자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달라이라마는 그러한 김교수의 질문에 아주 성실하고 진지하게 대답하신다.
깨달음이란 이렇게 달라이라마마저도 언제 어떻게 라고 분명하게 전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그저 어느 한순간이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간파할 수 없이 순간적이며, 그러나 그것이 바로 ‘깨달음’이란 것을 당사자는 깨닫는다. 그래서 불립문자(不立文字)이고 교외별전(敎外別傳)이고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다. 그러나 달라이라마는 그 깨달음이 바로 ‘공과 자비를 통하여 이 우주와 인생에 대해 통찰을 얻었다.’ 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고따마 붓다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불교의 목적은 깨달음에 있다. 위없는 반야지혜를 체득한 깨달음을 얻어 무지, 무명(無明)으로부터 벗어나야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명이 인간 고통의 근본 원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다른 종교에서는 모르고 짓는 죄는 죄가 아니라고 보지만 불교에서는 모르고 짓는 죄가 더 크다고 보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무명으로부터 벗어나 마음의 평화와 삶의 지혜를 얻고, 궁극적으로는 업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어 윤회의 수레바퀴를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무명이란 ‘나’ 라는 존재를 실상이라고 보고 나 이외의 모든 것이 실상이 있다고 아는 것이다. 그러나 경전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연기(緣起)를 보는 자는 법(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
“이것으로 인하여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기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이 멸한다."
그러므로 영원히 존재하는 ‘나’라는 실상 ‘아트만’은 있을 수 없고 ‘무아(無我)’ 인 것이다. ‘공(空)’인 것이다.
“아난아, 연기는 깊은 것이고 깊은 곳에서 빛난다. 아난아, 사람들은 이 법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잡아함경 제12권, 제 298경)
‘깨달음’이 이와 같이 지고 지난하고 흔치 않은 일로서 너무나 개인적이며 특별하고 언어로 전달할 수 없는 신비롭기까지 한 일이니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니 말이다. 다행하게도 깨달음을 얻은 선지자, 선각자는 역사 속에 현현하게 살아있는 고따마 붓다처럼 무명에 빠진 중생들에게 생애를 바쳐 가르침을 펼치는 일을 하게 된다. 붓다이래 수많은 스승들이 붓다를 이어 가르침을 펼쳤으며, 이와 같은 현상은 모든 종교의 전통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기독교 역사속의 예수와 그 제자들, 그리고 이슬람 전통 속의 루미를 보라. 종교가 아닌 일반적인 삶의 현장 속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누구나 그 깊은 지혜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려고 하고 항상 그렇게 하였다. 심지어 목숨을 바쳐서 까지. 온갖 매스미디어로 세계 곳곳이 속속들이 연결되어 있는 오늘날에는 책으로, 영상으로, 그 큰 지혜를 배울 수 있으니 참으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캠브리지 대학 종교학과에서 1996년 출판한 ‘부처와 비전’이라는 책에 의하면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 베트남의 틱낫한 스님, 캄보디아의 마하 고사난다 스님, 그리고 한국의 숭산행원스님을 ‘세계 4대 생불(生佛)’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살아있는 부처님’이라니 얼마나 대단하신가? 더욱이 그 숭산스님을 직접 뵙고 가르침을 받은 필자는 정말 대단한 복을 누린 것이 분명하다 지금 이 글을 쓰는 것도 모두 그 지극한 인연에 의한 흥복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깨달음이란 것을 글로 쓰는 일은 당연히 깨달은 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수박이라는 과일의 실상을 알기 위해서는 말과 글이 통하지 않고 그림을 그리거나 보여주기만 해서도 안 될 것이다. 직접 그 수박을 먹으며 향기롭고 달콤하고 시원한 그 맛을 보는 것, 그것이 선이고 깨달음인데 수박의 참맛을 미처 맛보지 못한 과문한 필자가 이 글을 꼭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이유는 이 시대가 글로벌 인터넷 시대로서 뉴욕 뒷골목에서 일어난 사소한 소동까지 알 수 있는 시대이니 그 많은 정보를 통해 깨달은 분의 가르침을 옮겨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수박의 참 맛을 조금은 전할 수 있을 것 같아서이다. 그리고 일반 대중들은 무조건 언어도단이라고 치부하면서 신비롭고 초월적인, 가까이 할 수 없는 그 무엇인 것처럼 경외하고 있으니 조금은 가까이 다가가서 그 실체를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붓다가 중생의 근기에 따라 설법하신 것처럼 우리 스스로의 근기에 따라 깨달음을 이해하고 그에 따라 수행해야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인 깨달음에 한 발짝이라도 더 가까이 갈 수 있지 않겠는가?
2500여년 전해져 오는 인류 최고의 깨달은 분인 붓다는 팔만대장경 속에서, 그리고 숭산스님은 스님의 문도회에서 출간한 책과 필자가 가까이에서 지켜본 실화에 의해서 쓸려고 한다. 또 다른 두 분은 에크하르트 톨레Eckhart Tolle, 그리고 아디야 산디Adyashanti 라고 부르는 영적 스승이시다. 이 두 분은 자신의 깨달음을 현대의 탁월한 언어로 상세하게 전하고 있고, 그 책은 또 전 세계 온라인 서점인 ‘아마존’을 통해 출판 이래 줄곧 베스트셀러의 위치를 놓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우리나라를 비롯한 수 십 개국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으니 인터넷으로 그 분들의 이름을 검색해보면 친절하게도 한글로 번역되기 까지 한 생생한 영상을 접할 수 있다. 지난 시대의 사람들은 면대 면으로 직접 대하지 않으면 뵐 수 없었던 영적스승을 글로벌 시대의 인연으로 그렇게 쉽게 만날 수 있으니 새삼 현대 문명의 고마움을 실감하게 된다.
(1) 고따마 붓다.
첫 번째로 소개하는 깨달음의 증인은 당연히 우리 부처님, 고따마 붓다이시다. 2500여년을 이어오는 불교의 전통 속에서 8만 4천의 법문으로 거듭 강조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류의 모든 지적 정보가 통합 정비되고 있다고 믿어지는 현대에 와서도 역사상 최고의 선각자임을 나날이 더욱 입증되고 있기 때문이다. 붓다의 깨달음을 그 시작과 과정 그리고 그 순간, 그 후의 여정을 간략히 정리해 본다. 너무나 익히 알려진 일이지만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일 또한 당연하다. 텍스트는 대한불교 조계종 강남 포교원의 성열스님이 쓰신 [고따마 붓다, 역사와 설화]에 의한다.
고따마 싯닷타 태자는 BC537년 29세가 되던 해 여름 새벽에 마부 하나만 데리고 오랫동안 고대하고 있던 출가를 결행한다. 싯닷타는 출가 당시 “내가 만약 생노병사의 근심걱정을 해결하지 못하면 고향에 돌아오지 않으리라.”라고 결심하였다. 한 나라의 태자로서 보장된 왕위와 따뜻한 가족들, 그리고 온갖 부귀영화로도 채워지지 않는 삶에 대한 진정한 의문, 그것이 바로 출가의 이유인 것이다. 당시 최고의 석학들에게 다방면의 교육을 철저히 받은 태자의 신분이었으니 출가 당시에도 이미 싯닷타의 식견은 대단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오랫동안 염원하였던 출가수행이었으니 싯닷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당대 최고의 스승을 찾아 간다. 고행주의자 밧가와Bhaggava, 요가 수행자 알라라 깔라마 Alara Kalama, 그리고 라마의 아들 웃따까 라마뿟따Uddaka Ramaputta가 싯닷타의 첫 스승이다.
밧가와는 제자들에게 “죽어 천상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고행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었다. 물이나 불, 해와 달을 믿으며 풀이나 나무껍질을 입고, 하루 한 끼 또는 이삼일에 한 끼만 먹었다. 그리고 한쪽발로 서거나 진흙땅이 눕거나 가시덤불 위에 눕거나 하는 극도의 고행을 닦고 있었다. 그러나 싯닷타는 밧가와의 수행으로는 궁극적인 괴로움은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늘나라에 태어나기 위해서 심한 고행을 한다고 해도 생사윤회는 계속되어야 할 것이니 싯탓타가 바라는 진정한 깨달음과는 거리가 있었던 것이다.
싯닷타가 다음으로 찾은 스승은 요가 수행자 알라라 깔라마였다. 그는 당시 유명한 영적 스승으로서 300명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 무일물 상태에서 체험하는 ‘삼매’를 가르치고 있었다. 싯닷타는 그의 가르침에 따라 조용한 곳을 찾아 선정을 닦기 시작하였다. 싯닷타는 곧 알라라와 같은 삼매의 경지에 들었다. 알라라는 싯닷타가 자기와 같은 경지를 얻었음을 알고 그것이 최상의 공경이요, 최상의 공양이며 최상의 기쁨이라고 말하면서 자기와 함께 대중을 지도하자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싯닷타는 그와 같은 경지로는 현실적인 삶을 버리고 오직 명상에 깊이 빠져 있는 동안에만 즐거움이 있을 뿐이지 명상을 벗어나 일상적인 생활로 돌아가면 전과 다름없이 고통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지혜로 나아갈 수 없고 깨달음을 얻을 수도 없다는 것을 알고 다음으로 라마의 아들 웃따까를 찾아갔다.
웃따까는 당시 유명한 선인이자 철학자로서 700여명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선정을 통하여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경지’(非想非非想處)를 해탈이라고 가르치고 있었다. 싯닷타는 스승의 말에 따라 열심히 수행하여 곧 그가 말한 경지를 체험하였으나 여전히 의문은 남아 있었다.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경지’에는 ‘나’라는 존재가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번뇌는 남아 있고 궁극적인 문제는 해결이 되었다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싯닷타는 이제 더 이상 스승을 찾아 헤맬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길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리하여 싯닷타의 6년 고행이 시작된다. 당시 많은 수행자들이 모여 고행하고 있는 가야지방의 니란자라 강가의 숲이었다. 싯닷타는 이미 그를 따르는 다섯 명의 동료와 함께 할 수 있는 모든 고행을 닦았다. 나무 씨 한 알로 하루를 지내기도 하고 쌀 한 톨만 먹고 물 한 그릇으로 목숨을 유지하는 극도의 고행이었다. 현재 인도의 라호르 박물관에 있는 “고행상”에서 보듯이 근육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이 뼈와 가죽만 남아 마치 해골이 앉아 있는 것과 같은 형상이었으니 “피골이 상접하고 핏줄이 통째로 드러나 마치 빨라샤 꽃과 같았다. 황금빛으로 빛나던 몸뚱이가 검게 변하고 위대한 인물이 될 징조인 32가지 모습도 사라졌다”라고 경전은 전하고 있다. 6년이라는 긴 고행에도 큰 깨달음을 얻지 못한 싯닷타는 수많은 고행자들과 다섯 명의 동료가 기대 속에 지켜보고 있는 상황을 과감히 뿌리치고 자신의 믿음과 판단에 의해 다시한번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된다. 대 지혜인, 대 자유인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인지도 모른다. 싯닷타는 강물에 깨끗이 몸을 씻고 수자따가 공양하는 우유죽을 마셔 기력을 회복한 다음, 보리수 아래 풀을 깔고 앉았다.
“저 나무 아래 앉아 도를 이루지 못한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
그렇게 선정에 들어 8일째 되는 날 12월 7일 새벽, 동쪽 하늘에 뜬 별을 보고 고따마 싯닷타는 드디어 깨달음을 얻어 고따마 붓다가 되었다. 고따마 싯닷타의 나이 35세가 되던 해였다. ‘샛별이 뜰 때 확연대오하여 더 할 바 없이 바르고 참된 도를 얻어 최정각이 되었다’([태자서응본기경] 권하 [3-478중], [보요경] 제6 [3-522중], [대광대장엄경] 제9 [3-595하], [불본행집경] 제31[3-796하])라고 경전은 전한다.
숭산스님은 그 깨달음의 순간을 “싯달타와 그 별은 완벽하게 하나가 되었다. 그는 그의 실상(true substance)을 알게 되었다. 그는 그의 마음과 이 우주가, 무한한 시간과 공간의 온 우주가 그의 마음 이외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The Compass of Zen, Shambhala, USA, 1997. p14)라고 설명하고 있다. 덧붙여 또 하나의 경험담을 소개하자면 수덕사 서울 포교원에서 참선을 지도하시던 상묵스님은 어느 해 석 달 동안의 안거를 하던 중 자신의 의식이 한없이 넓어져 먼 공중에 떠도는 것 같았다고 한다. 야구공 만하게 보이는 지구를 내려다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삼일 동안을 그런 상태가 계속 되었는데 당시의 스승은 그런 경험 따위에 휘둘리지 말고 계속 화두 정진을 하라고 경책하였다 한다. 우리 존재의 실상과 이 우주는 뗄 수 없는 인연이 있음이 분명한가보다 라고 필자는 생각하였다.
다시 붓다의 깨달음으로 돌아가 보자. 경전은 깨달음을 전후하여 많은 악마의 유혹과 방해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방광대장엄경]에 의하면 탐욕, 근심걱정, 굶주림, 애정, 졸리움, 공포심, 의혹과 후회, 분노, 슬픔이나 남을 헐뜯음, 등 아홉 무리의 군대로 표현하고 있다. [잡아함경]에는 육신이나 감정 등에 집착하는 것을 악마라고 하였고 눈, 코, 귀, 등 감각기관이 그 대상에 집착하는 것을 악마의 갈고리라고 하였다. 많은 경전이 붓다의 깨달음을 ‘항마降魔’라고 하며 악마의 군대와 싸우는 투쟁에서의 승리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결국 모든 유혹을 이겨내기 위한 자기와의 투쟁이라고 성열스님은 보고 있다.
붓다는 한 바라문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 붓다냐고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한다.
“붓다는 기나긴 역사를 알고
앞으로 닥아 올 미래를 안다.
모든 존재는 파괴되고 소멸하는 것임을
현재의 삶 속에서 폭넓게 꿰뚫어 안다.
모든 문제들을 깊이 통찰하여
긍정하여 받아들일 것은 긍정하여 받아들이고
부정하여 배척할 것은 부정하여 배척한다.
그래서 나를 붓다라고 부른다.
보편적 현상과 개별적 현상을
구별하여 이해하고 사실과 같이 알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빠짐없이 알고 봄으로
나를 붓다라고 부른다.
바라문아,
중생의 길고 긴 역사를 관찰해 보니
이 세상 모든 존재들이 직면하는 고뇌는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음을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객관 대상에서 벗어나고
내면적으로 망상에서 매달리는 것에서 벗어나
독화살과 같은 번뇌를 없애 버렸으니
생과 사의 문제에서 초래되는 갈등에서 자유를 얻었다.
그래서 나를 붓다라고 부른다.”([성열, 부처님 말씀] p.9)
그리고 붓다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끝없는 고통 속에서 윤회를 거듭하는 어리석은 중생을 위해 45년 동안의 길고 긴 가르침의 길을 걷게 된다. 맨발로 걸으며 걸식을 하고 제자들과 함께 선정에 들어 그들의 물음에는 근기에 따라 8만 4천의 법을 설하며 성스러운 생을 이어간다. 깨달음을 얻은 붓다로서의 귀감이 되는 위대한 일생이라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2) 숭산 행원 崇山 行願 스님
1600년 한국 불교사에 전무후무한 행적을 보이는 스님이 바로 숭산스님이시다.
스님이 영어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처지로 미국의 동부, 미국 지성의 핵심부인 하버드 대학 근처에 선원(Cambridge Zen Center)을 세운 것이 1972년 이었다.
스님은 한국에서의 높은 교단 지위를 마다하고 맨몸으로 미국에 와서, 세탁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대학 언어학당에서 영어를 배우며 젊은 미국학생들에게 참선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스님의 제자 중에는 베스트셀러 [만행]의 저자 현각스님, 예일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하버드대학원에서 비교종교학을 전공한 현각스님처럼 명문 Ivy리그 출신들이 많다. 시대를 앞서가는 스님의 이러한 과감한 해외포교 활동은 6.25 사변이라는 참혹한 민족전쟁 후의 상처도 채 아물지 못했고 세계적으로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조차 모르고 관심도 없는 때인 1966년 일본을 시작으로 한다. 69년 홍콩, 72년 미국, 74년 캐나다, 78년에는 폴란드를 시작으로 동구권 공산권 국가로 그 범위를 넓혔으며, 80년 영국, 81년 스페인, 83년 브라질, 85년 프랑스, 89년 남아공, 93년 싱가폴 등등등, 전 세계 32개국에 120여 군데의 선원을 세웠고 그 제자가 5만 명이 넘었으니 스님의 해외 포교이야기는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 스님은 가르침의 내용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를 내 집처럼 오고간 행적에서도 상상을 초월한다. 스님이 2004년 11월 화계사에서 입적하셨을 때 ‘세계불교는 훌륭한 지도자 한 명을 잃었다’고 한국은 물론 전 세계 매스컴에서 애도하였다.
‘세계 4대 생불’ 중의 한 분이라고 일컬어지는 숭산스님의 출가와 수행 그리고 깨달음의 과정을 스님의 행적기 [세계 일화(世界一化),가는 곳마다 큰 스님의 웃음](2000년 숭산문도회)를 기초로 엮어본다. 특히 스님의 수행과정과 스승이신 큰스님과의 불꽃 튀는 법거량으로 깨달음을 인정받아 ‘인가’를 받는 과정은 한국불교의 자랑이기도 한, 중국 선불교의 생생하게 살아있는 전통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숭산스님의 출가는 당시의 한국 사회와도 큰 관련이 있다. 스님은 1927 년에 태어나셨으니 일본 식민지 치하였다. 사춘기 그 질풍노도의 시기에는 2차 대전 말기의 절정에 달한 식민지 강압통치의 사회상과 맞물려 스님은 큰 의문과 좌절에 당면하게 된다. 스님의 출가를 제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944년 숭산스님은 지하 독립운동에 가담했습니다. 그로 인해 몇 달 뒤 일본 헌병대에 의해 체포 수감되어 좁은 감방에서 갖은 곤욕을 치루었습니다. 감옥에서 풀려난 이후 두 명의 친구들과 함께 부모님으로부터 돈 500원을 훔쳐내어 경계가 삼엄한 만주국경을 넘어 만주에서 독립군과 합세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다음 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동국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게 되었으나, 당시는 남한의 정치적 상황이 극도로 불안했던 때였습니다. 결국 숭산스님은 자신의 정치적 운동이나 학문으로는 사회에 도움을 줄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머리를 깎고 절대적 진리를 얻기 전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을 맹세하고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1947년 10월에 계를 받아 출가를 한 스님은 출가한 지 열흘 만에 곧장 100일 기도에 들어간다. 100일 기도는 한국 불교의 전통에 흔히 볼 수 있는 수행으로서 출가자나 재가자 모두 간절한 기원을 위해 택하는 소위 유행하는 수행법이기도 하다. 해마다 수능 철이면 전국 방방곡곡 사찰에는 어김없이 ‘수능100일기도’가 시작되지 않는가. 붓다가 출가하여 당시의 이름난 스승들의 수행법을 따른 것과 같은 이치이기도 하다. 스님이 출가 하자마자 곧바로 100일 기도에 들어가는 것을 보면 스님의 간절함이 얼마나 지극했는지 알 수가 있다.
숭산스님은 산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원각산 부용암에서 100일 기도를 시작하였다. 식사로는 솔잎을 말려 빻은 가루로 벽곡을 하면서 매일 20시간 이상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를 하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얼음을 깨서 목욕을 하면서.
그런데 곧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이런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무엇하러 이토록 극심한 고생을 하는가? 산을 내려가 조그만 암자를 하나 얻어서 일본 중처럼 결혼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미는 가운데 천천히 도를 닦을 수도 있지 않은가? 밤이면 이런 생각이 너무 간절해서 선사는 떠나기로 결심하고 짐을 꾸렸다가 다음날 아침이 되면 다시 마음이 맑아져서 기도를 시작하는데 이렇게 보따리를 싸고 풀고 한 것이 9번이나 되었다. 자세한 수행의 과정과 깨달음의 순간을 제자들의 기록으로 살펴보자.
“50일이 지나자 선사님은 몸이 쇠약해져 기운이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 매일 밤마다 무시무시한 환상이 보였습니다. 마구니가 어둠 속에 나타나 욕설을 하기도 하고 유령이 나타나 삼킬 듯 달려들면서 차가운 발톱으로 목을 할퀴기도 하였습니다. 커다란 딱정벌레가 나타나 다리를 물려고도 했습니다. 호랑이와 용이 나타나 바로 앞에서 삼킬 듯 덤벼들어서 그는 전신이 다 얼어붙는 듯하였습니다.
그 뒤 한 달이 지나자 무시무시한 환상에 이어 이번에는 즐거운 환상이 나타났습니다. 부처님이 나타나 경을 가르치시기도 하고 어떤 때는 멋진 옷을 입은 보살이 나타나 스님에게 극락에 갈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때는 스님이 지쳐 잠깐 무릎을 끓고 엎드려 있으면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잠을 깨우기도 하였습니다. 80일째가 되면서부터 스님은 힘이 솟구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의 살갗은 솔잎처럼 파랗게 변색되어 있었습니다.
100일 기도가 끝나기 1주일 전인 어느 날,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며 도량석을 돌고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11살이나 12살쯤 되어 보이는 동자 둘이 양쪽에 나타나서 선사에게 절을 올렸습니다. 동자들은 알록달록한 옷을 입었고 하늘에서 내려온 듯 얼굴이 아름다웠습니다. 스님은 그들을 보고 무척 놀랐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굳세어지고 완전히 맑아졌다고 느꼈는데 대체 어디서 이런 것들이 나타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좁은 산길을 걸어갈 때 두 동자는 뒤에서 따라왔는데, 바위사이로 지날 때 동자들은 바위 속을 통과해 걷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30분 동안 조용히 뒤에서 따라오다가 스님이 불단 앞에 다가가 절을 올릴 때가 되면 불단 뒤로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1주일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드디어 마지막 100일이 되었습니다. 스님은 암자 밖으로 나와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그는 자신이 몸을 떠나서 무한한 공간에 있음을 느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 먼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목탁 치는 소리와 자기 음성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잠시 그 상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스님이 다시 자신의 몸으로 돌아왔을 때 깨달았습니다. 바위, 강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도 있고 들을 수 있으며, 이 모든 것이 참다운 자성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인 것이고 참 진리는 바로 이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 스님은 잠을 푹 잘 수 있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깨어나서 한 사나이가 산에 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나무에는 까마귀들이 날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습니다.
원각산하 한길은 지금 길이 아니건만,
배낭 메고 가는 행객 옛 사람이 아니로다.
탁, 탁, 탁, 걸음소리는 옛과 지금을 꿰었는데,
깍, 깍, 깍, 까마귀는 나무 위에서 날더라.”
깨달음을 얻었다고 스스로 깨달은 스님은 그것을 인정받기 위한 여정에 오른다. 이와 같은 자세한 행적을 생생하게 전해 받을 수 있는 것은 스님과 같은 시대를 살게 된 우리의 큰 복이 아닐 수 없다. 중국 선종의 전통이 스님을 통해 완벽하게 재현되었으니 그 과정을 제자들의 음성으로 다시 상세히 전해보도록 한다.
“그 후 스님은 산을 내려와 만공선사의 가르침을 받았던 고봉스님을 만났습니다. 고봉스님은 당시 국내에서 가장 뛰어난 선사였으며, 또 가장 엄하기로 소문이 난분이었습니다. 당시 그는 거사들만 가르쳤는데, 평소 그의 입버릇이 '중들이란 다 도둑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자신의 깨달음을 고봉스님으로부터 점검 받고 싶어서 목탁을 들고 찾아갔습니다. 고봉스님 앞으로 간 스님은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면서 목탁을 디밀었습니다. 이 물음에 고봉스님은 목탁 채를 집어서 목탁을 쳤는데, 이런 행동은 스님이 예상한 대로였습니다.
숭산스님이 질문을 했습니다.
"어떻게 참선해야 합니까?"
고봉스님이 말하였습니다.
"옛날 한 스님이 조주선사에게 묻기를 '달마대사가 서쪽으로 온 까닭은 무엇입니까? 라고 했더니 조주는 '뜰 앞의 잣나무'라고 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스님께서는 알 것도 같았으나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를 몰라 "모릅니다." 라고 했습니다.
고봉스님은 "모르면 의심덩어리를 끌고 나가라. 이것이 바로 참선 수행법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해 봄과 여름 동안에 숭산스님은 항상 행선(行禪)을 하였습니다. 가을이 되자 스님은 수덕사로 옮기고 100일 간의 동안거 결제에 들어가 선과 법거량을 배웠습니다.”
고봉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지 못한 스님은 그의 가르침에 따라 하안거 동안거를 하며 참선을 하고 공안을 깨치기 위한 법거량을 하며 집중적인 수행을 하게 된다. 드디어 큰 스승에게 ‘인가’를 받게 되는 과정을 계속 들어보자.
“그 다음으로 숭산스님이 찾은 사람이 바로 거친 행동과 상소리로 유명했던 춘성스님이었습니다. 절을 한 뒤 이렇게 물었습니다.
"스님, 제가 어젯밤에 삼세제불을 다 죽여서 장사를 지내려고 도반을 구하는 중입니다. 스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춘성스님은 "아!" 하고 감탄하며 숭산스님의 눈을 그윽히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런 다음 "네가 본 것이 뭐냐? "하고 물었습니다. 숭산스님이 말했습니다.
"밖에 눈이 하얗지 않습니까?"
"아하, 이 사람 큰일 날 사람이네. 그래 밖에 눈이 하얀데 그 눈 속에 불이 붙는 소식을 아느냐?"
“왜 구멍 없는 젓대소리를 하십니까?"
춘성스님이 웃으며 "아하!" 하고 감탄하며, 몇 가지 질문을 더하자 숭산스님은 하나도 막힘없이 술술 답하였습니다. 드디어 춘성스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숭산스님 주위를 돌며 춤추면서 외쳤습니다.
"행원이가 견성을 했다! 견성을 했어!"
그 소식은 삽시간에 퍼져 그 다음날 모든 사람들이 전날에 있었던 일을 소상히 알게 되었습니다.”
1월 15일, 겨울 안거가 해제된 뒤 숭산스님은 다시 고봉스님을 찾아 길을 떠났다. 첫 번째 법거량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으니 다시한번 도전해서 기어코 인가를 받아보리라 작심하였다. 고봉스님은 경허, 만공, 고봉으로 이어지는 정통 중국 선종의 임제스님 법맥을 이은 선승이었기 때문이다. 계속 제자들의 음성으로 들어보자.
“고봉스님의 명성에 당시 승속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었습니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숭산스님은 금봉, 금오 두 스님을 만나서, 그들로부터 인가를 받았습니다.
스님은 누더기를 입고 걸망을 진 채 고봉스님의 절을 찾아갔습니다. 그가 고봉스님 앞에 절을 올리고 말했습니다.
"제가 어제 저녁에 삼세제불을 다 죽였기 때문에 송장을 치우고 오는 길입니다"
"내가 그걸 어떻게 믿을 수가 있느냐?" 하고 고봉 스님이 말했습니다.
스님은 걸망에서 오징어 한 마리와 소주 한 병을 꺼냈습니다.
"송장을 치우고 남은 것이 있어서 여기 가지고 왔습니다."
"그럼 한 잔 따라라"
"잔을 내 주십시오"
이 말에 고봉스님이 손바닥을 내밀었습니다. 스님은 술병으로 고봉스님의 손을 치우고 장판 위에 술병을 내려놓았습니다.
"이게 스님의 손이지 술잔입니까?"
고봉스님이 빙긋이 웃고 말했습니다.
"나쁘지 않다. 네가 공부를 좀 하긴 했지만 몇 가지를 더 묻겠다."
고봉스님은 1,700가지 공안 중 어려운 것을 골라 물었는데, 숭산스님이 막힘없이 모두 대답하였습니다.
이를 본 고봉스님이 말했습니다.
"서식야반 반기기파라. 쥐가 고양이 밥을 먹다가 밥그릇이 깨졌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늘은 푸르고 물은 흘러갑니다."
"아니다"
숭산스님은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선문답에서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얼굴이 벌개져서 또 다른 '여여한' 답을 말했습니다. 고봉스님은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참다못한 숭산스님은 화가 났고 또 실망했습니다.
"춘성스님, 금봉스님, 금오스님들 모두 제게 인가를 해 주셨는데, 왜 스님만 아니라고 하시는 겁니까?"
"그게 무슨 뜻이냐? 말해라!"
50여 분간 고봉스님과 숭산스님은 서로 성난 고양이 같이 상대방을 노려보기만 했습니다. 불꽃이 번쩍번쩍 튀는 듯 하더니 그때 갑자기 숭산스님이 대답을 하였는데, 그것이 '즉여'의 답인 것이었습니다.
고봉스님은 이것을 듣자 눈에 눈물이 고이고 얼굴에 기쁨이 넘치며 환히 웃고 숭산스님을 얼싸안고 말했습니다.
"네가 꽃이 피었는데, 내가 왜 네 나비 노릇을 못하겠느냐?"
다음해인 1949년 1월 25일, 고봉스님은 숭산스님에게 정식으로 법(法)을 전하는 건당식을 열었습니다. 이 건당식에서 행원스님은 숭산(崇山)이라는 당호를 받았습니다. 이로써 선사께서는 고봉스님으로부터 법을 전수 받아 붓다의 법을 잇는 제78대 조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고봉스님이 주었던 최초의 전법이었습니다.
건당식이 끝나고 고봉스님은 숭산스님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지금부터 3년간을 너는 묵언하여라. 너는 이제 무애한 대자유인이다. 우리 500년 후에 다시 만나자. 네 법이 전 세계로 퍼질 것이다"
숭산스님은 이렇게 해서 선사가 되었으며 그때의 나이 22살이었습니다.”
숭산스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선방에는 세계 어느 나라의 선방이든 똑 같이 볼 수 있는 사진이 있다. 잘 보이는 벽 위쪽에 모셔진 그들이 바로 75대 조사 경허스님, 76대 조사 만공스님, 그리고 77대 조사 고봉스님이시다. 중앙에는 금빛 찬란한 붓다를 모시고 언어와 역사와 문화가 모두 다른 선방, Zen Center에서는 한국 선방에서와 똑같이 예불을 올리고 법문을 하고 참선을 한다. 참선이 끝난 후에는 숭산스님으로 부터 인가를 받은 대광스님, 대봉스님 등 10분의 선사님이나 청안스님, 현각스님 등 30여분의 지도법사님에게 법문을 듣는다. 그와 같은 법회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질문이다. 많은 대장경에서 전하고 있듯이 붓다는 언제 어느 곳이든지 제자들의 질문을 받고 그 근기에 따라 정성껏 대답을 해 주셨다. 꼭 그와 같은 모습으로 질문을 받고 질문하는 수행자의 근기를 간파하여 스승은 알맞은 대답을 해 주는 것이다. 또한 잘 짜여 진 계획대로 2, 3일, 1주일, 한 달 또는 석 달 동안의 안거도 하는데 그 때에는 승속을 불문하고 똑 같은 방법으로 ‘인터뷰’ 법거량을 한다. 중국 선종의 1700공안 중에서 숭산스님은 현대인에게 맞는 365공안을 뽑아 정리하였고 그것이 바로 수행자들의 지침이 되고 있다. 스님이 서양의 제자들에게 주는 공안은 ‘what am I ?’로서 ‘이뭣고?’에 해당하고 이 화두를 들고 ‘only don't know mind’, ‘오직 모를 뿐’을 참구하라고 가르친다. 스님은 또한 다른 나라의 제자들이 한국에 와서 한국 선불교의 전통에 따라 수행할 수 있도록 충청남도 논산의 계룡산에 ‘무상사’를 창건하셨다. 숭산스님에게 법을 이어받은 대봉선사님이 주석하시는 무상사에는 지금도 일 년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예불과 목탁소리가 들리고 참선을 가르치고 있다.
중국 선종의 전통에 따른 법의 인가를 받아 초조(初祖) 달마대사에 이어 제 78대 조사가 된 숭산스님에게 고봉스님이 남기신 말, ‘너의 법이 전 세계로 퍼질 것이다.’라는 예언은 이와 같이 이루어 졌으니 참으로 신묘한 법의 세계임이 분명하다.
서구에 전파된 불교의 전통에 따라 수행을 하고 깨달음을 얻은 두 분, 에크하르트 톨레Eckhart Tolle, 그리고 아디야 산디Adyashanti 라고 부르는 영적 스승님에 대해서는 다음호에서 만나보려고 한다. 실증, 실험에 의하여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증명을 하려는 서구인답게 MRI 등의 의료 기구를 사용하여 참선 수행을 하는 수행자의 뇌의 변화를 측정하기도 하고, 양자물리학의 원리를 차용한 다양한 연구를 통하여 깨달음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우리의 의식을 변화시키는가를 알아보는 것은 붓다의 가르침이 과학문명의 힘으로 더욱 확실해 지는 현장이 될 것이다.
첫댓글 회원님들의 편의를 위해 원문을 여기에 옮겨 놓았습니다. 함께 선과 선시에 대한 공부를 계속해 나가기를 바라면서 앞으로는 관련 학자들의 옥고를 많이 실어서 더욱 알차게 특집을 엮어 나가고자 합니다. 날마다 좋은 날 만듭시다. 권현수합장
좋은글 감사합니다.
권 시인님 심오한 내용이라 틈 나는데로 와서 정독하고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