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칠백년전, 한반도의 사람들은 한반도 동쪽에 위치한 섬을 " 해뜨는 곳 " 이라고 불렀다.
부산까지 영토를 넓혔던 가야가 광개토대왕에게 무너지면서 도일하여 신석기를 겨우 넘긴 해뜨는 곳에
야마토(대화)정권을 세운 후 천황가를 만든다.
이어, 백제의 비류가 광개토대왕에게 참패하며 토벌당하자 도일하여 가야가 세운 야마토 천황가를 접수한다.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국토가 코딱지만하게 줄어든 신라의 난민들은
해류덕분에 배만타면 도착하는 시마네현의 동쪽으로 대거 유입된다. ( 이들의 후예들은 현재 독도달라고 난리들이다 )
이들은 해뜨는 곳의 동쪽에서 " 겐지 : 원가(源家) " 세력을 이룬다.
백제는 나당연합군에게 백강전투에서 참패하면서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 恨 " 을 품으며, 왕실을 포함한
대부분의 지배세력들은 해뜨는 곳의 서쪽인 규슈(九州)로 대거 이주한 후 천황가를 접수,
국호를 " 해뜨는 곳.... 日本 " 이라 정한다.
그 후,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그 유민들도 서해와 동해를 통하여 이주한다.
그리고 얼마 후,
자신들은 반도에서 쫒겨온 루저들이 아닌 원천적으로 일본에서 시작된 천황가처럼 위장하기 위하여
역사를 120년 전으로 끌어올리는 조작을 한 후 역사서인 일본서기를 만든다.
그리고, 일본 서쪽에서 " 헤이시 : 평가(平家) "세력을 이룬다.
헤이시 평가세력이 농경문화의 文을 숭배했다면, 겐지 원가세력은 상업문화의 武를 숭상했다.
둘은 모두 대륙에서 온 기마민족이다.
헤이시 평가세력은 한반도 백제난민이 대부분이고, 겐지 원가세력은 한반도 신라유민이 대다수였다.
이들 신라와 백제의 루저들은 1185년 한반도에서 처럼 다시 한번 전쟁을 치룬다.
그것이 단노우라 전투이다. 여기서 겐지가 헤이시를 이기자 천황가는 무력화된다.
원가세력에 눌리어 조용히 살던 평가세력은 드디어 " 평가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오다 노부나가 " 에 와서
천하통일을 시작하여 그 부하였던 " 토요토미 히데요시 " 에 의해 완성한다.
천하를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개국공신들에게 나눠줄 땅이 부족할 것을 미리 감지하고 그 대안으로서
조선침략을 기획하며 그 명분으로는 " 신공왕후의 고토수복 " 과 " 정명가도 " 를 내세운다.
드디어 1592년 "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 " 는 부산 동래성에 이르자, " 드디어 천 년만에 조상의 원수를 갚는구나 " 라는
소회를 밝히며 살아있는 것은 인명이건 금수이건 모두 살생하는 " 동래성 킬링필드 " 를 자행한다.
그들은 왜 그랬을까 ?
백제가 신라에게 멸망 후 도일하면서 한반도는 신라의 나라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 조선은 신라의 나라 " 라고 인식한 것이다.
거기다가 능력이 안됐던 왕건은 후백제의 저항으로 인하여 왕이 되고서도 30년동안 들판에서 이를 갈며 살더니
고려는 신라 경순왕으로부터 그 적통을 이어받았다고 선언하였고, 조선은 고려의 적통을 이어받았음을 공표하며 종묘안에
공민왕 신당까지 만들었다. 그리고 조선의 양대 개국공신인 정도전과 무학대사 또한 신라의 후예들이었다.
선조는 일본의 무장을 염려하여 1차로 통신사를 보내려하지만, 정감록때문에 정씨 콤플렉스가 있는 조선왕조에서
" 정여립의 난 " 이 일어난다. 정여립은 황해도 군벌과 합세하여 역성혁명의 반란을 일으키려다가 황해도쪽의 밀고로 실패한다.
그리고 그들의 제거를 송강 정철이 단행한다. 서인이 서인을 쓸어버린 것이다.
그런 후, 어수선한 가운데 2차로 선발된 통신사가 김성일과 황윤길이었다.
명장 이순신의 활약과 명의 참전으로 전세가 조금씩 밀리게 되자, 풍신수길은 한반도 중부이북은 명에게 주고 백제와 가야와 신라의
고토이었던 한반도 중부이남은 일본이 가지는 강화를 시작했으나 조선의 극렬한 저항으로 실패한다.
그러자 정유재란을 일으키며 풍신수길의 특별명령으로 진주성을 유린한다.
그런데 원가의 후예였던 " 토쿠가와 이에야스 " 는 풍신수길에게 몇 가지 핑계를 대면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불참한 후,
토요토미가 전란중에 죽자 그의 아들인 " 토요토미 히데요리 " 세력을 제거한 후 일본을 접수한다.
조선과 일본은 다시 국교를 정상화한 후 통신사를 보내며 교류하였지만, 중국으로 부터 문화를 전수받던 조선에 비해
너무나도 후진적이었던 일본은 자신들의 무식함을 절실히 느끼면서 조선과의 통신사 교류를 단절하며 일본서기를 강독하는
국학운동을 시작한다. 그런 후, 일본은 유럽과 미국의 함포외교로 문호를 개방하며 탈아시아를 시작하게 되면서 막부들이 정권을
천황에게 다시 몰아주는 명치유신을 단행한다.
서양과의 교류로 조선에 대한 내재된 열등의식을 조선에 대한 자신감으로 채워가며 " 征朝論 " 을 시작한다.
그러나, 정조론은 일본조정을 정벌한다는 뉘앙스로 인하여 " 征韓論 " 으로 바꾼 후,
서쪽의 " 조슈(평가세력) " 지역을 중심으로 정한론의 승계자들을 만들며, 동쪽으로 " 사쓰마(원가세력) " 지역의 군벌들이 합세한다.
즉, 백제와 신라에서 쫒겨난 루저들의 후예가 조선을 치기위해 힘을 합친 것이다.
이 조슈와 사쓰마의 " 정한론의 승계자들 " 은 " 이토오 히로부미- 야마카타 아리모토- 가쓰라 다로- 데라우찌 마사다케-
다나카 기이치- 기시 신스케- 사토 에이사쿠- 아베 신조 " 로 계승된다. 아베신조는 현 일본총리이다.
각 인물들의 프로필은 생략한다.
이후 이들은 태평양전쟁에서 조슈는 육군으로 사쓰마는 해군으로 참전한다.
이들은 소정방이 군대를 보낸 난징을 유린한다. 그들이 중국인을 유린하기 위하여 조선인은 먼저 제외시켰다는 얘기도 있다.
한반도에 살던 가야와 신라와 백제와 고구려의 난민들이 세운 나라,
한반도에서 쫒겨난 패배자들 .... 즉, 루저들이 세운 나라인 일본.
힘이 갖춰지면 고토회복을 외치면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 거기가 전에 우리 할아버지 땅이었거든.. " 하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학살하듯이, 우리를 다시 먹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 옛날에 우리 땅이었다 " 고 하면서 일본처럼 침략을 반복한다면, 그 명제에 자유로울 수 있는 나라는 없기 때문이다.
일본은 오늘부터라도 자신들의 역사교과서에서 " 한반도인 " 을 " 도래인 " 이라고 가르치지 말고
" 한국인 " 이라고 교육하여 더 이상의 한일간의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또한, 우리도 일본에 대하여 좀 더 깊은 이해가 함께 하길 바란다.
* 첨언 :
일본어는 고구려,백제, 신라가 이두를 빌어 쓰던 고대어이다. 조사까지 동일한 두 나라의 언어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통일한 후, 고대어에 " 중국어 받침 " 을 첨가하면서 언어가 한반도어와 일본어로 갈린다.
사실, 한반도 고유의 언어원형을 일본어가 많이 가지고 있다.
한반도는 원래 성과 이름이 네글자였다. 박혁거세도 그렇고 을지문덕, 연개소문이 그랬다.
그런데,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몰아내면서 부터 세글자가 대세가 되었다.
일본은 恨을 품으며 반도에서 쫒겨났기 때문에 우리가 말하는 恨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깊다.
그래서 일본은 슬픔을 아름다움으로 느낀다.
그리고 그 한을 품은 일본이 서양의 음악을 받아들여 만든 것이 엔카인데,
식민지인 한국은 이 엔카를 서양 근대식 음악으로 받아들인다. 한국에서는 트로트라고도 부른다.
한국은 일본과 문화적으로 비슷한 것이 많은 이유가 일본은 한국과 같은 민족이기 때문이다.
3.1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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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천무님의 글을 퍼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