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인근 마악산 꼭대기에 지었던 건물로 나중에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500여년 전 조선 세종 때 영월군수를 지낸 권조가 처음 이 고을에 들어와 집을 짓고 살았다.
권조는 사위 이명유에게 집을 물려준다.
“이 집은 자네에게 물려주마. 이 집터는 사위에게 물려주어야 영원히 이름난 집터로서 그 가치가 유지된다는구나.” 홍천 군수로 있던 이명유가 을사사화에 몰리어 벼슬에서 물러나자 권조는 사위에게 집을 물려준 것이다.
이명유는 다시 사위 정창국에게 집을 물려준다.
정창국은 사위인 판결사 창주 황응징에게 물려준다.
황응징은 딸이 없어 해월 황여일에게 이 집을 물려준다.
그때부터 황씨가 집을 물려받게 된다.
안동 권씨가 전의 이씨에게 넘겨줬고 다시 야성 정씨를 거쳐 평해 황씨로 이어온 뒤 지금까지 집을 지키고 있다.
그동안 아들이 있어도 사위에게 물려주었던 집터는 황씨 가문에 와서 주인 자리를 굳혔으니 사위에게 물려준 것은 제대로 주인을 찾기 위한 과정이었던 모양이다.
풍수가와 명리가들은 이곳 지맥과 해월이 태어난 해의 사주를 놓고 외손봉사터였던 해월헌을 황씨 가문이 이어받은 유래를 풀이한다.
해월헌을 관리하고 있는 해월의 13세손 황의석씨(79)는 “직장생활을 하는 아들(49)이 ‘정년퇴직할 때까지는 아버지가 맡아 달라’고 말하고 있다”며 황씨의 종택 관리가 대를 이을 것이라고 공언한다.
해월이 명나라에 간 것은 명나라 사신인 찬획주사 정응태의 무고 사건을 해명하기 위해서였다.
정응태는 조선이 일본과 힘을 합해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려 한다고 고변한 것이었다.
임란으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할대로 피폐해진 조선으로서는 명으로부터 오해를 사서 또다시 전란을 겪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조선에서는 변무진주사를 보내 해명키로 하고 백사 이항복을 정사로, 월사 이정구를 부사로 하고 해월을 서장관으로 뽑아 압록강을 건너 북경으로 보낸 것이다.
당시 명나라의 유명한 관상가가 조선의 사신 일행 중 해월에게 “서장관은 동국에서 태어났지만 만 리 기상을 타고났으니 매우 이상합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함께 있던 사람들이 “황 서장관은 동해에서 태어나 소국에서 살았는데 어찌 만 리 기상을 타고 태어났겠습니까?”라고 답했다.
그러자 관상가는 “참으로 속일 수가 없습니다.
서장관의 도량은 하해와 같은 분입니다”하고 큰 소리로 탄복했다.
황제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소문을 들은 신종이 해월에게 물었다.
“조선은 기껏 삼천리 강토인데 그대는 어찌하여 만리정기를 타고나서 명나라를 치려 하느냐?” 조선 사신 일행은 등에 땀이 흘렀다.
그런 오해를 해명하기 위해서 조선에서 일부러 왔는데, 여기서 잘못 대답하게 되면 지금까지의 모든 노력이 한 방에 물거품이 될 판이었다.
이미 두 차례나 변무사를 파견했지만 중국의 오해를 풀지 못해 자신들이 세 번째 변무사로 파견된 것이다.
해월은 황제 앞에서 거침없이 대답한다.
“예, 저희 집 앞에는 만리창해가 있습니다.
” 바다만 바라보고 살았고 그래서 중국 땅은 넘보지 않았다는 해월의 절묘한 대답에 신종은 무릎을 친다.
“조선에는 너 하나밖에 없구나.” 신종은 ‘너 하나밖에 없다’는 뜻의 ‘여일’이라는 이름이 공연히 지어진 이름이 아니라고 칭찬했다.
“내 자리 뒤에 병풍에 무엇이 쓰여 있었는지 아느냐?” 문답이 끝난 뒤 물러나는 해월 일행을 배웅하기 위해 용상에서 일어나 따라 나오던 신종은 느닷없는 질문을 계속한다.
해월이 즉시 병풍에 쓰여 졌던 글을 암송하자 신종은 “왜 10폭 밖에 못 읽었느냐”고 묻는다.
해월이 12폭 중 2폭은 접혀 있어서 못 읽었다고 대답하자 신종이 내관을 시켜 확인해보니 과연 2폭은 접혀 글을 읽을 수 없었다고 한다.
명 신종과의 대화는 변무사 일행이 중국에 머무는 7개월 동안 중국 관리들을 만나 조선의 실태를 설명하고 이해를 구한 여러 사건들 중 백미로 꼽힌다.
서장관이었던 해월이 정사와 부사를 젖히고 신종의 문답 상대로 지목된 데서도 알 수 있다.
사흘동안 이어진 필담과 구두 문답은 해월의 능력과 문장을 보여주는 쾌거였다.
해월과 동년 동월생으로 해월과 각별했던 백사 이항복은 “신종의 오해를 푼 것은 해월의 공이었다”고 백사문집에 남겼다.
해월은 귀국한 뒤 즉시 동해가 바로 보이는 마악산에 거주하는 집과 같은 집을 지었다.
정남향인 해월의 집에서는 동해가 바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명나라 조정에서 황제를 농락했다며 트집을 잡을 것을 염려해서 방비한 것이다.
그러나 그 집은 안타깝게도 수십 년 뒤 불이 나 수많은 서책들과 함께 타버리고 지금은 밭이 되어 지금도 이따금씩 기와조각이 나와 옛 사실을 이야기해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