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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士와 商人과 그리고 作家
↑ 시다레(枝垂)벚나무가 늘어진 가쿠노다데(角館)의 武家門
390년 가까운 먼 옛날의 무사마을이 그 때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가쿠노다데(角館).
“미찌노쿠의 작은 교토”로 불리기도 하는 가쿠노다데 마을은 도쿠가와막부(德川幕府)의
2대 쇼군(將軍) 히데다다(秀忠) 초기인 1620년부터 시작되는 긴 역사를 안고있다.
미찌노쿠(陸奧)란 지금의 아키다(秋田), 이와테(岩手), 아오모리(靑森), 미야기(宮城) 등
도호쿠(東北)지방을 일컫는 옛 말이다. 가쿠노다데는 아키다현의 아키다시에서 동쪽으로
50여km 거리에 있다. 지금은 신칸센이 통과하기 때문에 교통이 편리하다.
기록에 의하면 이 마을의 시작은 도쿠가와가 도읍을 에도(江戶)로 옮기기 한 해 앞인
1603년에 조정으로부터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직을 임명 받고 실시한 지방 영주들의
영지교환정책에 따라 아키다영주가 된 사다케 요시노부(左竹義宣)를 따라 간 아시나
요시가쓰(芦名義勝)가 가쿠노다데에 성주대리로 부임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완전히
독립된 성으로 시작한 것이 1620년으로 뒤에 아키다 번(藩) 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로
발전했다.
마을 한 가운데에 화재방지를 위해 만든 히요케(火除)라는 작은 광장을 사이에 두고
남쪽에 무사들의 거주지인 우찌마찌(內町), 그리고 북쪽에 상인 등 일반 백성들이 사는
소토마찌(外町)를 형성했다. 39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마을 모습은 옛 날대로이고
다만 당시의 흙 길이 포장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동네 어귀에서 택시를 내려 무가(武家) 길로 들어서는 순간 이끼 낀 역사의 짙은 냄새가
강하게 느껴져 왔다. 마을이 생길 때 심어 마을과 나이를 같이 하는 가지가 휘 늘어진
시다레(枝垂) 벚나무가 초하(初夏)의 따가운 아침 햇살에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진다.
길 양 옆으로 길게 이어지는 두꺼운 초가지붕의 무가는 우람한 나무 사이로 산장처럼
조용하게 앉아있다.
세월의 껍질이 첩첩이 겹쳐져 숯검정으로 변한 통나무기둥이 두꺼운 초가지붕을 힘겹게
받치고 있다. 담 벼락만 일부 새로 칠했을 뿐 기둥과 서까래와 마루와 격자문은 처음 지을
때의 재목 그대로이다. 지금은 현(縣)문화재로 지정되어있어 빈집이 대부분이지만 아직
후손이 대를 이어 살고있는 집도 있다.
무사들이 살았던 우찌마찌에 남아있는 무가 중 아오야나기가(靑柳家)는 무려 3000평에
이르는 넓은 대지에 앉은 대 저택이다. 여기엔 갑옷을 비롯하여 무기와 각종 예 문서 등
많은 역사적 유물이 소장되어있고 전 일본에서 단 한 그루 밖에 없다는 8중(重)벚꽃나무
외에도 600여 종의 여러 종의 나무와 꽃이 계절 따라 아름다움을 자랑하고있다.
무사라고 해서 싸움만 일삼은 것이 아니었다. 일본무사 들은 일본역사 시작부터 최상층
지배계급을 형성, 국가경영의 실질적인 책임을 맡아왔기 때문에 지식 또한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가꾸노다데 무사의 후예 중에서도 문인, 학자, 화가, 과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파불의 곤충기를 번역한 시이나(椎名)도 이 곳 무사의 후예이다.
무사의 주택은 위계에 따라 그 규모에 조금씩 차이가 있다. 현재 남아있는 무가가 대부분
하급 무사인 아시가루(足輕)들이 살았던 집이었기 때문에 지금으로 말하면 연봉이 벼로
150섬(石, 고꾸)정도였으며 50섬짜리도 있었다. 집의 규모에 따라 대문의 크기도 달랐다.
지금도 인구가 일만 정도인 가쿠노다데는 마을의 역사성에다 온천과 이 지방의 쌀과 술과
면류가 이름이 나 연중 많은 관광객이 몰려들고있다. 마을 앞을 흐르는 히노끼나이(檜木內)
강 양쪽 둑에는 지금의 아끼히도천황의 탄생을 기념해 심은 벚꽃나무가 70년이 지난 지금도
700여m나 길게 줄을 잇고있어 봄철 개화 때가 되면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비와(琵琶)호 옆 마이바라(米原)에서 신칸센을 도카이도혼센(東海道本線)으로 갈아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면 바로 다음 역이 히코네(彦根)이다. 히메지(姬路城), 마쓰모도(松本),
이누야마(犬山)성과 함께 일본 국보 4대 성의 하나로 꼽히는 히코네 성은 3重 3層으로
규모는 그다지 크지않지만 아름다운 성으로 평가되고있다. 밖에서 본 성은 아름다우나
내부는 그림 한 폭 없는 완전히 비어있는 성이며 대표적인 일본식 정원인 현궁원(玄宮園)이
볼만한 곳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사후 일본의 실력자로 군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는 히코네 성을 군사적 요충지로 축성, 부하인 이이 나오마사(井伊直政)에게 주었다.
그 후 35만 섬의 영주인 이이家의 거성으로 明治말기 까지 250여 년을 이어 온 히코네성은
막부 마지막 다이로(大老)인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가 막부와 당시 고메이(孝明)천황의
칙허(勅許) 마저 받지않은 상황에서 단독결정으로 미일 수호통상조약에 서명함으로써 이에
분개한 자객들이 그를 살해했고 그 뒤 성은 주인이 끊어졌다. 그러나 일본은 이 조약의 체결로
외세의 무력간섭 없이 일찌기 개국함으로써 서구의 침략을 피하고 선진화의 일정을 앞 당기게
되었다는 것이 일본 역사학자들의 평가이다.
“파는 사람에게 좋게, 사는 사람에게도 좋게,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에게 다 좋게.”
일본의 대표 상인인 오미(近江)상인의 경영이념이다. 상업의 도리가 압축된 말이다 싶다.
오미상인의 본거지로 알려진 일본 시가(滋賀)현의 오미하치만(近江八幡), 고가쇼(五個莊),
그리고 히노(日野). 거상의 나가야(長屋) 옛날 집이 줄지어 서있는 상인거리를 들어서자
왁자지껄한 그들의 흥정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도쿄에서 신칸센으로 오사카로 향하는 도중 비와(琵琶)호 호반의 마이바라(米原)에서 완행
으로 갈아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면 일곱 번 째 역이 인구 7만의 오미하치만이다. 그 아래로
계속해서 지나 온 거리만큼 더 내려 가면 교토이고 조금 더 가면 오사카이다. 넓은 들판 한
가운데 위치한 오미가 어째서 농사 대신 상업으로 이름이 나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오미상인의 본 고장인 오미하치만은 158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카인 히데쓰구(秀次)가
학이 날개를 편 모양을 한 학익산(鶴翼山) 정상에 하치만성을 축성하고 잡초가 무성한 들판에
종으로 12열, 횡으로 4열의 바둑판 모양의 길을 낸 후 인근 아즈치(安土)와 이시데라(石寺)로
부터 상인과 장인들을 불러들여 마을을 이루었다. 이 시대에 활약한 “하치만상인”이 바로
유명한 오미상인이다.
대부분이 2층으로 된 목조의 긴 상인건물 들은 나무 벽과 격자 문이 불에 탄 듯 색갈이 검게
변해 세월의 흐름을 말해주고 있고, 이 곳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당시 상인들의 사업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이불 등 침구를 팔던 니시가와가(西川家)는 마루베니(丸紅) 창업자와 합작으로
오늘날의 마루베니그룹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오로지 질소(質素)와 검약정신으로 저울을 어깨
에 메고 일본을 주름잡던 오미상인. 공, 농수산물과 원재료 등을 사고 팔며 전국을 누빈 오미
상인의 상법이 근대 일본 상거래 시스템의 기본을 구축했다고 한다.
신마치(新町)의 중앙 좁은 네거리에 조선인가도(朝鮮人街道)라고 쓰인 1m 크기의 화강석 돌
기둥이 서있다. 택시운전수에게 물었더니 옛날 조선통신사가 지나간 길이라고 했다. 대마도에서
시작한 통신사행렬이 도카이도를 따라 당시로서는 상업의 중심지인 오미를 거쳐 에도로 올라간
것을 기념해 세운 것이다.
오미하치만에는 시내 한 가운데로 수로(水路)가 지나간다. 히데쓰구가 비와호를 왕래하는 선착
장을 만들기 위해 판 6km의 오미하치만보리(近江堀)이다. 옛 날 지금의 후쿠이(福井)현과 이시
가와(石川)현인 호쿠리쿠지방에서 오미하치만으로 물자를 실어 나르는 배 길을 뚫은 것이 지금의
수로이다. 지금은 이 수로가 관광용으로 활용되고있다. 도쿠가와막부가 시작되면서 하치만성이
없어지자 오미상인들은 보따리를 멘 보부상으로 변신, 전국행상에 나서 에도의 상업 중심지이던
니혼바시(日本橋) 까지 진출, 자리를 잡고 상점을 열었다. 당시 니혼바시에서 가장 규모가 컷던
“하치만 대점(八幡大店)”은 오미상인이 경영한 상점이었다. “고개가 험하면 험할수록 행상인이
적어진다”며 어려운 길을 즐겨 택했다는 오미상인의 장사철학은 일본상인정신으로 현대경영에도
계승되고있다. “오미를 점령하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 할 정도로 교통의 요지였던 오미의 상업
정신을 오늘 날에도 일본사람들은 여러 면에 그 의미를 적용하고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는 1935년부터 1937년 까지 3년 간에 걸쳐 쓴 서정소설 “설국(雪國)”
으로 196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지만 소설을 집필할 동안 그는 내내 궁핍한 세월을 벗지 못했다.
문학은 “낭비와 헛수고의 소산이다”라고 까지 말한 그는 설국을 쓰는 동안도 소설 속의 남자주인공
시마무라(島村)처럼 할 일 없는 사람같이 빈둥거린 기간을 보냈다고 했다.
“접경의 긴 터널을 벗어나자 설국이었다. 한 밤이 하얘졌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붓으로 직접
쓴 소설의 이 첫 구절이 그가 3년 간 머물며 집필했던 에치고 유자와(越後湯澤)의 “다카 한(高半)”
온천호텔에 옮겨다 놓은 그의 방 입구에 걸려있다. 그가 3년 간 있었던 당시의 3층 짜리 목조여관이
지금은 6층의 현대식 건물로 바뀌었고 본래 2층에 있었던 그의 방은 호텔 2층으로 옮겨져 있다.
방은 본래 대로이나 주변을 좀 넓혀 흰 모래를 깔고 작은 바위모양의 돌을 놓아 일본식 정원분위기를
느끼게 만들었고 방 입구도 다다미 석장을 놓아 사람들이 드나들기 쉽게 조금 넓혀 놓았다.
다다미 8장인 정사각형 방안에는 한 가운데에 그가 책상으로 사용했던 가로 80센티m, 세로 60센티m
크기의 붉은 색 교자상이 있고 두개의 팔걸이 의자가 마주 보게 놓여있다.
옆에는 꽃 무늬가 새겨진 도자기 모양의 둥근 화로에 작은 무쇠주전자를 올려 놓았고 앉아서 보는
여자용 작은 경대와 나무 옷걸이를 벽에 붙여 놓았다. 이상은 그가 생전에 있을 때의 모습 그대로
이고 추가로 그의 흑백사진을 넣은 중간 크기의 액자를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세워놓았다.
창업자의 이름인 다카하시 반자에몬(高橋半左衛門) 중 두 글자를 따 “다카한(高半)”이라고 붙인
호텔은 유자와 시 중심에서 조금 벗어난 높은 지대에 있어 전망이 좋았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비좁은 곳에 위치한 유자와 시는 온천과 겨울철 스키 외에는 돈벌이 거리가 아무것도 없는 작은
산골 도시이다. 이웃 군마(群馬)현 미즈가미(水上)에 있는 가미모쿠(上牧)온천에 잠시 머물렀던
가와바타는 그 곳에서 멀지않은 니이카다(新瀉)현의 에치고 유자와(越後湯澤)에 더 좋은 온천이
있다는 가미모쿠온천 측의 추천으로 다카한 온천에 오게 되었다고 종업원이 설명해 주었다.
소설 첫 머리에 나오는 터널은 1931년에 개통된 에치고 유자와역 바로 남쪽의 시미즈(淸水)터널로
길이가 9,702m에 이른다. 겨울이면 터널 남쪽에 눈이 안 내려도 유자와 일대에는 항상 2-3m의
눈이 쌓인다고 한다. 터널 위의 산고쿠(三國)산맥은 관동지방과 에치고를 경계로 하는 분수령으로
터널이 개통되기 전에는 양쪽에 어떤 마을이 있는지 주민들은 서로 간에 아무 것도 모를 정도였다
고 한다. 소설에 나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유자와 일대에 살았던 실존 인물들이다. 남자주인공인
시마무라는 작가 자신, 그리고 여자주인공인 고마코(駒子)는 손님들 요청으로 자주 다카한 여관에
춤추러 불려왔던 당시 20세의 게이샤(藝者)였던 마쓰자카에(松榮), 그리고 다카한 여관의 주인부부
도 가끔 등장한다.
닛코에서 오르막 내리막을 3시간 넘어 뛰어다니고 나자 다리는 물론 발목까지 저려왔다.
온천생각이 간절한데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집필 방을 꼭 가봐야겠기에 전화를 걸었다.
온천은 본래 한 사람은 잘 받지않기 때문에 안되면 사진만이라도 부탁할까 했던 것인데 한 사람
이라도 좋다는 것이다. 서둘러 기차를 탔다. 오후 7시 조금 전에 닿았는데 벌써 어둑어둑했다.
사방이 높은 산이라 가까운 개활 지대에 비해 어둠이 빠르다는게 택시기사의 설명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온천시즌이 아니라 호텔손님은 나 외에 다섯 팀도 안 되는 듯 했다.
다카한 호텔은 입구부터 “雪國의 旅館”이란 간판을 비롯해 안은 온통 설국 일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여관에서 주변인물을 주인공으로 쓴 소설이 노벨상을 탔으니 나무랄 일도 아니
었다. 로비 한쪽에는 가히 도서관이랄 정도로 수 백 권의 책들이 벽을 가득 메우고 있다.
가난했던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1972년 4월 16일 밤 도쿄남쪽 즈시(逗子)시에서 가스로 자살
했다. 72세였다. 17세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한 그는 생을 마감할 때 까지 설국 외에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2세 때 어머니를, 3세 때 아버지를 여읜 그는 조부모와 함께 살다 7세 때 할머니를, 15세
때는 할아버지를 그리고 하나뿐이던 누이도 10세 때 사별하는 불운한 소년기를 보냈다. 16세 때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기숙사에 들어간 후 계속 혼자 살았다. 머리가 좋았던 그는 엄청난 불운 속
에서도 21세에 일본 수재들의 집합소인 1고를 나와 동경제대 영문과에 입학했다.
그의 자살동기는 아무도 모른다. 미(美)를 추구한 신감각파의 서정문학가로 소박하게 살던 그가
노벨상 수상으로 하루 아침에 정치적 권력까지 수반된 일본문단의 정점에 서게 되면서 심한 정신적
부담에 시달리게 되었다. 설국을 쓴 3년 동안 격식 없이 지냈던 다카한 시절로 다시는 되돌아가기가
어렵겠다는 절망의 깊은 터널에서 출구를 영영 찾지 못해 선택한 유일의 탈출구가 자살이 아니었을
까 하는 것이 그와 가까이 지냈던 사람들의 설명이다.
가와바타는 소설의 여주인공인 고마코의 실존 인물인 마쓰자카에 게이샤를 사랑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아처럼 외롭게 성장한 그는 결혼은 했으나 작품소재를 찾아서 일까 끊임없이 전국을 떠돌아
다니며 방랑자처럼 살았다. 그는 뒷날 설국 집필을 위해 3년간 머물렀던 다까한 시절이 가장 행복했고
다까한여관은 자기의 生家와도 같다고 하면서 깊은 애정을 나타냈다.
계절이 여름으로 들어서는데 멀리 보이는 산에는 아직도 잔설이 하얗게 덮여있다. 저 눈이 언제쯤
녹을까 했더니 7, 8월 두 달 잠깐 녹았다가 10월부터 다시 쌓이기 시작한다고 역까지 나를 바래다 준
호텔종업원이 설명해 주었다. 역을 출발한 신칸센의 후미가 미처 플랫폼을 벗어나지도 않았는데
앞 머리는 벌써 “설국” 첫 대목에 나오는 긴 터널로 들어섰다.
주군에게 목숨을 던져 충성했던 무사정신은 분야만 바꾸어 오늘 날도 일본사회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다. 정계에서, 관계에서, 그리고 기업에 까지. 자기 일 외에 한눈 팔지않는 장인정신 또한 어느 나라
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철저한 나라가 일본이다.
600여 년을 이어 온 과자 집, 천장에 붙은 그을음을 따 400년 동안 먹만 만들고있는 집, 대기업체를
사직하고 아버지의 뒤를 잇는 젊은 어부, 아버지 밑에서 일하는 고졸졸업 종업원과 결혼하여 가업을
잇게 하는 유학출신의 주인 집 딸. 일본에는 현재 100년이 넘은 노포(老鋪, “시니세”)가 일만 여 개,
그리고 200년을 넘은 것도 삼천 개를 넘어선다고 통계가 밝히고있다. 큰 돌로 쌓은 둑에 작은 자갈을
빈틈없이 채워 물도 새지않게 만들어진 게 일본이란 나라이다.
↑가와바타가 머물었던 온천마을 유자와(湯澤)의 아름답고 고요한 야경
↑'雪國'이 집필된 '안개의 방(かすみの間)'은 아직 그대로 보존되어있다.
權 泰 鳴 (68세, 문필가, 여행가, 전 동아출판사 사장)
2008. 5.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