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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1]
특집 코로나 이후 천도교
역사 공간 현장답사와 해설 기획
신춘호
(문화콘텐츠학 박사/한중연행노정답사연구회 대표)
이 글은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단장 최인경)의
동학해설사 강좌의 하나로,
유튜브 채널 ‘동학역사문화선양회’에서
다음의 강의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동학이란 무엇인가(윤석산),
∎서울지역문화유적-
천도교중앙대교당·봉황각·상춘원(이동초),
∎태평양을 건넌 동학-그 현장은:
사적지 답사촬영 어떻게 할 것인가?(김동우),
∎문화해설사입문1·2(신춘호),
∎역사기행프로그램 기획을 위한 제안(박광일),
∎현장실습-종로·인사동지역/북한산애국지사묘역/
망우리애국지사 묘역(신춘호, 최인경) /편집실
1. 역사기행, 어떻게 할 것인가
옛 사람들은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려면
10년은 책과 자료를 읽고,
10년은 역사의 현장을 찾아 답사를 하고,
10년은 글을 써야 한다고 하였다.
순서대로 공부하고 답사하고
글을 써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만권독서萬卷讀書 행만리로行萬里路’라는 말이 있다.
많은 책을 읽고 많은 곳을 다녀 봄으로써
글과 현장을 두루 공부하라는 말일 것이다.
과거의 시간과 공간을 찾아 직접 발로 밟으며
역사를 좀 더 가깝고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배우고 느끼는 답사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어쩌면, 늘상 쓰는 말인 ‘아는 만큼 보인다,
보이는 만큼 느끼게 된다’는 말도
그런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 듯싶다.
역사기행의 기획자나 해설사는
기행의 대상인 역사공간, 문화재의 위치,
답사의 동선을 장악하여 답사 설계를 하거나,
해설계획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기획단계에서
사전에 현장답사와 지도답사를 통해 답사현장에 대한
지리공간을 장악하는 것이 중요하고,
답사 주제에 대한 인문지식의 배양을 위해
충분한 사전 자료조사(문헌,논문,관련영상물,기타)의
필요성이 요구되기도 한다.
2. 역사기행에서 무엇을 어떻게 볼 것인가
살아서 움직이는 하루하루 생활이 일상이다.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야만 살아갈 수 있다.
누구도 따로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한자로 사람 ‘人’ 자는 하늘과 땅 사이에
우뚝 서 있는 사람들이 따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기울여 기대고 서있는 형상으로 읽을 수 있다.
인간은 서로 기대고 의지하며 관계를 맺어야만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루라는 시간을 단위로,
주어진 문이라는 공간 안팎에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간다.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려면
문(門)을 드나들어야 한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가
가족과 관계를 맺고,
현관문이나 대문을 열고 나가고, 다시 문을 들어가
학교에서건 일터에서건 친구, 동료와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간다.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문이라는 소통의 공간은
일상 활동의 테두리인 내 집과 일터,
그리고 지역뿐 아니라 온 나라와 지구
더 넓게는 우주까지 연결되는 통로이다.
소우주인 사람들은
문이라는 통로를 통하여 대우주와 소통한다.
사람들이 서로 의지하며(人),
문(門)이라는 공간 속에서 하루(日)라는 시간을 단위로
살아가는 존재라는 뜻이
인간[人間 = (l+l)+(門+日)]이라는 단어에 담겨 있다.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흔적, 행위의 흔적들도
오늘 우리의 삶과 마찬가지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았던 결과이다.
그래서 역사의 현장을 찾을 때 언제나 관심을 갖고
살펴 보거나 중요하게 짚어 볼 것이
‘그 일을 누가 했는가’(행위의 주체),
‘긴 시간 가운데 왜 그때 그 일을 했을까’(시간),
‘너른 공간에서 왜 그곳에서 그 일이 있었을까’(공간),
‘그 일은 했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갔을까’
(사회관계)와 같은 점들이다.
이렇게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폭이 다양하면 좋겠고,
늘 대상에 대한 의문을 가지면서 행위의 주체와
시간과 공간을 꼼꼼히 살펴보아야 한다.
행위 주체들의
의식과 관점과 의도를 파악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그때 그 사람들이 왜 그 일을 했을까, 목적이 무엇인가,
그 일에 담긴 이해관계는 무엇일까,
하면서 따져 볼 일이다.
역사의 현장을 찾을 때 눈여겨보아야 할 핵심 요소는
자연과 사회의 공간이다.
현장을 찾는다는 것은
어떠한 공간을 선택하여 그리로 간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자연과 사회의 공간 속에 자리 잡은
터에서 살아간다.
그 자리를 바탕으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으면서 관점을 형성한다.
“우물 안 개구리 하늘 넓은 줄 모른다”는 말이 있다.
우물 안에 있기 때문에
볼 수 있는 하늘의 넓이는 우물 천정 크기이다.
하늘 넓은 줄 모르던 우물 안 개구리가
하늘 넓은 줄 아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우물 밖으로 나오는 행동이다.
우물 밖으로 나오면
하늘이 펼쳐 보이므로 넓은 줄 안다.
알고 모르는 큰 차이가 우물 안이냐 밖이냐 하는
‘자리’에서 말미암는 것이다.
“몸 가는데 마음 간다”고
몸담고 있는 자리가 마음을 좌우한다.
자리에서 비롯된 인식과 관점,
지와 무지가 사람들의 삶과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니까 어떤 자리에서 생겨난 생각이
행동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따져볼 일이다.
몇 가지 예를 보자.
선종 스님들의 사리 무덤인 부도(승탑)는
9세기 통일신라의 중심이었던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에 세워졌다.
선종이 도입된 시기가 80년대 전반이었고,
귀족 중심의 교종이 중심이던 경주에
발을 붙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방에 근거지를 둔 호족세력이
선종 사찰을 지원하였고, 부도를 만들 때 후원하여
‘9세기 부도의 시대’를 열었다.
청자는 선종의 도입과 짝을 이루며 수요가 늘어났다.
고려청자를 굽는데 필요한
질 좋은 원료와 땔감을 구하기 쉽고,
많은 양을 운반하기 편리한
뱃길 가까운 곳에 도요지가 형성되었다.
고려시대 청자를 가장 많이 쓴 곳은 개성이었다.
주된 생산지는 바다 가까이 있는 부안과 강진이었다.
고려 후기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지면서
해안에서 50여 리 떨어진 곳까지
사람이 살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바닷가 도요지에서 청자를 굽던 도공들도
버텨나기 힘들었다.
청자 가마터를 버리고 왜구의 발 길이 미치지 않는
내륙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때 새롭게 등장하여 세력을 키워가던
신흥사대부들이 그들을 지원하여 자기를 굽게 하였다.
고려 말 조선 초 고려청자를 바탕으로 삼았으되
청자와는 다른 분청자가 만들어지게 되는 과정이다.
19세기 ‘민란의 시대’에
백성들의 항쟁이 일어난 시간과 공간은
주로 장날 장터였다.
항쟁의 뜻을 널리 알리고
참가자를 늘리기 적합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가 되면서 호남지방에서는
볏짚을 차지하려는 짚단 싸움도 종종 일어났다.
볏짚은 지붕을 덮는 이엉, 소 먹이와
여러 가지 도구를 만들 수 있는 재료였다.
쓰임새로 따지면 다른 지역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산이 가까운 곳에서는
땔감으로 나무를 쓴 데 비해
평야지대에서는 짚이 중요한 땔감이었다.
그전까지 짚단은 농사짓는 사람들 몫이었다.
조선 후기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면서
짚의 가치가 높아졌다.
지주들이 짚단까지 차지하려 들면서
싸움이 빈번해졌다.
해월 최시형선생이 살았던 19세기는
서세동점의 격변기였고,
삼정의 문란과 지방관의 횡포가 극심했다.
동학은 안으로는
정치의 실종과 내치의 고통을 혁파하기 위한
민초들의 몸부림이었고,
밖으로는 일본의 침탈에 저항하는
보국의 정신을 구현하고자 했다.
동학의 근거지를 찾아간다거나,
수운, 해월 등의 은거, 도피처를
추체험하고자 하는 역사여행,
해월신사의
피체노정, 순도이후의 여정을 찾아가는 답사 등
다양 주제의 답사기획이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역사공간 현장답사는
사전 답사를 통한 지리공간의 이해와 그 배경을
종합적으로 고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어떤 곳에서 살고 있느냐에 따라 경험도 다르고,
겪은 사건에 대한 느낌도 달라진다.
1986년 10월 30일, 전두환 정권은 갑자기
“북한이 20억 톤 규모의 금강산 발전소를 착공,
댐이 무너지면
화천 이남의 다섯 개 댐이 순식간에 파괴되고,
강원 경기 서울을 포함한 한반도의 허리 부분이
물바다가 되어
상상할 수 없는 피해를 입게 된다”고 발표하였다.
정권은 계속해서 금강산댐은
‘핵무기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수공 작전 수단’이며,
88서울 올림픽을 막으려는 속셈이라고 몰아갔다.
보수 언론은 ‘수공(물침략)’과 ‘물폭탄’ 위협을
극대화하는 데 앞장섰다.
한강 하류 여의도가 물바다가 되어
63빌딩 허리와
국회의사당 머리에 물이 차오르는 모습을
그림까지 그려가며 보여주었다.
그때 한강 아래쪽에 사는 주민들의
불안과 공포는 더 컸다.
금강산댐이 터진다 해도
바닷물이 불어나 물에 잠길 열려가 없었던
목포나 부산, 동해안 쪽에 살았던 주민들은
공포가 실감 나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공간에 서면, 대체로
내가 보고 싶은 부분만 보게 마련이다.
그 자리에서 생각하고 싶은 역사만 기억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보고 싶고 생각하고 싶은
대상들에 대한 이면을 들춰 보자,
역사의 진실에 좀 더 가깝게 다가가는 방법이 아닐까?
* 유물 유적에 담겨 있는 ‘노동’을 보자
바레 프랑소아의 『노동의 역사』를 보면
그리스 로마 시대의 위대한 조각 작품들을 감상할 때
그 웅장함, 아름다운 예술성과 함께
그 뒤에 흐르는 노예들의 피땀과
눈물을 보지 못한다면
반편밖에 보지 못한다는 내용이 있다.
노예들의 노동이 없었다면
그러한 ‘작품’은 만들어질 수 없었다.
어떤 행위의 결과에도 그 안에는 이름 남기지 못한
일꾼들의 노동의 흔적이 스며있다.
달에서도 보인다던 ‘만리장성’,
거대한 대륙을 관통하는 ‘대운하’의 수로,
지하궁전에 조성된 ‘병마용’ 등은
수많은 인간의 피와 땀과
착취의 노동력으로 이루어진 산물이다.
전제군주의 시대에
거대한 국가적 사업에 투입된 노동력의 대부분은
자의에 의한 참여라고 보기 어렵다.
선조들의 숱한 희생의 이름아래 오늘날
역사문화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는 것이다.
계급사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먹고 살려고 하는 노동은
일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먹여 살린다.
정치도 과학도 예술도 문화도
노동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다.
노동은 사회가 존재할 수 있는 근원이다.
그런데 정작 일하는 사람들은
먹고 살기가 힘들기 때문에 싸울 수밖에 없다.
싸움의 결과는 더 힘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역사가 노동과 투쟁이라는
두 수레바퀴로 굴러가는 이유이다.
거북선은 누가 만들었을까?
임진왜란 때 누가 싸워서 이겼는가?
이순신 장군 혼자서? 석굴암은 누가 만들었는가?
김대성 혼자서 다 만들었는가?
수원 화성은 정조가 아버지 묘를 수원으로 옮기면서
그 자리에 살던 주민들을 집단 이주시켜 만든
신도시에 쌓은 성이다.
수원 화성에 가보면
온통 정조가 다 만든 것 같은 분위기다.
실학자 다산 정약용 공도 컸다고 덧붙인다.
물론 정조가 아니었으면
새로 성을 세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정조나 정약용이 성을 쌓을 때 힘들여
바윗돌, 벽돌 한 장 옮기고 기둥 하나 세웠을까?
수원 화성을 직접 쌓은 사람들은
석수, 목수, 미장이, 와벽장, 대장장, 개와장, 수레장,
화공, 가칠장, 큰끌톱장, 기거장, 걸톱장, 조각장,
마조장, 선장, 목혜장, 안자장, 부계장, 병풍장,
박배장, 회장 같은
2개 분야에 걸쳐 180명이 넘는 기술자들과
수많은 인부들이었다.
다들 요즘으로 치면 건설 노동자들이었다.
* 과거와 현재의 조우,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역사의 현장을 찾을 때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 할 점은
현재의 시각에서
과거를 바라본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 있다.
그때와 지금이 똑같지 않다는 사실이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고도 하고,
“산천 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고”라고도 하였듯이
사람보다 자연의 변화가 느리기는 하지만
산천 또한 변한다.
물리적으로는 같은 공간이나 거리라도
도로와 교통수단의 발달과 함께
사회 역사의 공간은 달라진다.
주거공간이나
사람들이 움직이는 동선도 달라지게 된다.
근대화된 신작로와 철도, 자동차와 기차는
사람들의 삶을 빠르게 변화시켰다.
우리가 가고 있는 이 길이 그때 그 길이 아니다.
옛 사람들은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다니지 않았다.
과거의 현장을 그 시대 사람의 처지에서
보고 느껴보는 것이 필요하다.
동학의 시대를 설명한다면,
그들이 살았던 10년도 훨씬 이전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그들의 시대로 들어가 보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그들의 생활문화와 사회제도, 의사소통의 방식 등
지금과 다른 옛사람들의 사정을 염두에 두고
역사 공간을 마주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역사의 현장에서
수백 년 전의 역사를 소환하는 것은 때론
‘망연자실’의 감정을 느끼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한 현장에서
역사 속에 살아 숨 쉬었던 옛사람들의 삶과 이야기들에
생명을 되살려내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역사기행 기획자 또는 해설자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역사가의 한 모습이기도 하다. (다음호에 계속)